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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비느하스가 던진 질투의 창말씀 2020. 1. 19. 15:39
비느하스가 던진 질투의 창 계2:14, 민25:1-18
동물동장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동물들도 자신을 사랑하는 주인을 위해서는 꼬리를 흔들면서 사랑을 표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염소라는 동물은 양과는 달리 사람을 잘 안 따를 것 같은 동물인데도 주인이 사랑을 베푼 염소를 본 적이 있다. 어미에게서 젖을 얻지 못하고 다른 것들에 치여서 크지 못하는 염소를 주인할머니는 데려다가 우유를 주면서 키웠더니 언제 어디서나 주인 할머니를 졸졸 따라다닌다. 한번은 주인 할머니가 개를 쓰다듬어 주면서 귀여워하니 염소의 눈빛이 달라지더니 개에게 염소 뿔로 드려박는 모습을 보았다. 보통 때는 개에게 가까이 가지도 않던 염소였는데 자신의 사랑을 개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니 뿔을 드려대면서 개를 쫓아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동물들도 사랑을 알고 사랑을 뺏겼을 때는 질투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처럼 동물들도 사랑을 뺏겼을 때는 그냥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뺏어간 자와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랑을 뺏긴 경우 사람들이야 사랑의 배신자에게는 자기가 당한 것의 몇 배로 갚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의 질투는 어떠하겠는가? 하나님은 계명을 통해 다른 우상을 만들거나 그것들에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라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속성을 알려주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들이야 말로 사랑 때문에 다투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표로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셨는데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 다른 우상들을 섬긴다면 하나님의 분노와 질투는 당연하다는 것임을 알아야 하며 하나님이 특별히 내 백성이라고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일을 자행했다면 어떠했을까? 출애굽기와 민수기와 신명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로 범죄하면서 그 댓가를 혹독하게 치렀던 사건들이 소개되고 있다.
첫 번째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고 내려 왔을 때 산밑에서는 아론을 중심으로 금송아지를 만들고 놓고 이것이야 말로 우리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금송아지 앞에서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한 이스라엘 백성을 볼 수 있다. 출애굽한 이후 처음 행한 이 우상숭배로 죽임을 당한 숫자가 출32장 28절에 나오는데 그 날 백성중에서 삼천명 가량이 죽으니라. 이처럼 주 하나님을 사랑하던 백성들이 하나님 대신 다른 우상을 섬긴다면 분명히 그들에게 참혹한 징계를 내리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독생자까지 우리를 위해 보내주신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 이외 다른 우상들을 섬기면 이렇게 질투를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질투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요?
1. 질투하시는 하나님
질투라는 말은 사랑의 다른 형태로서 사랑하고 있는 상대가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감정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상대가 자기에게 무관심하고 비교대상도 아니면 질투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질투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하는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사람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어도 질투심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는 참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질투는 우리 인간들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서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한다는 면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질투하는 하나님 즉 엘 칸나로 소개하시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출애굽기에는 질투하는 하나님 엘칸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34:14) 너는 다른 신에게 경배하지 말라. 주는 질투라는 이름을 가진 질투하는 하나님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하나님 이외 다른 어떤 우상도 섬기지 말라 명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그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질투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칸나, 헬라어로는 젤로스라 합니다.
엘칸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인데 이 질투라는 젤로스는 성경에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하나는 질투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열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질투 안에는 하나님의 열심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열심이 있으신 분이시며 우리를 약속하신 천국까지 반드시 인도하시겠다는 열심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기 뜻대로 살려고 고집을 피우고 곁길로 갈 때조차도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하시는 열심이 있으신 분이신데 이런 하나님을 가리켜서 하나님은 우리를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결코 다른 것과 나누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으며 영원토록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사랑에 어떻게 보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만을 온전히 사랑하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어떤 형상들 앞에서 머리숙이고 절하면 그것이야 당연히 우상을 섬기는 것이겠지만 그런 형상이 아니더라도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돈, 명예, 권력, 자식, 취미, 쾌락, 사업 등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그것들도 우상들이 될 수 있으므로 그런 것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질투는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우린 온전히 하나님만을 섬기며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택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출34:10) 그분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맺노라. 내가 아직 온 땅에서나 혹은 어떤 민족가운데서도 행하지 -아니한 놀라운 일들을 너의 온 백성 앞에서 행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행할 일은 두려운 것이므로 너와 함께 있는 온 백성이 주의 일을 보리라.
부부란 서로 사랑하면서 함께 살아가듯이 성령하나님께서도 우리 속에 거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면서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도록 하시는데 우리가 불순종과 거역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때 성령님께서 시기하시기 까지 탄식하신다면 이것이 성령님의 질투하심입니다. 이에 대한 말씀을 보세요.
(약4:5) 너희는 성경기록이 우리 안에 거하는 영이 시기하기까지 욕심을 내느니라, 하고 헛되이 말하는 줄로 생각하느냐?
그런데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들이 하는 질투와는 다릅니다. 질투 자체가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너무도 사랑하시는 것에서 비롯되었기에 어떤 경우에도 이 사랑을 접는 경우가 없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쫓는 우리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과 언약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우리 마음에는 질투가 불처럼 일어나지 않습니까? 때로는 이 질투로 인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는 것을 뉴스를 통해 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질투하기까지 자신의 그 모든 사랑을 내어주심으로 우리들을 사랑하신 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해 당신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 말씀하신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사랑에 대한 반증입니다.
실제로 질투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자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가를 나타내셨습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십자가의 사랑이야 말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을 증거하는 징표인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길래 보잘 것 없는 미천한 우리를 위해 이토록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입니까?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하나님만을 사랑하기를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나누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 독점적인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로 향한다면 용납이 되겠습니까? 만약 용납한다면 그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질투와 혼동해서 사용하는 단어가 시기입니다. 성경에도 이 두 단어는 서로 혼동해서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고전 13장에서는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참된 사랑은 시기하지 않지만 질투는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질투와 시기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질투는 사랑하고 있는 상대가 자기 이외의 사람을 사랑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감정이라고 한다면 시기는 자기의 소유가 아님에도 탐하거나 남이 잘되는 것을 시샘하여 미워하는 감정을 의미합니다. 물론 질투라는 감정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독점하려는 동기는 분명히 정당합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질투에 대한 구절을 연구해보면 놀랍게도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질투의 하나님으로 소개하는 구절은 영락없이 우상숭배를 금하는 말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런 구절들을 한번 봅시다.
(출34:14) 너는 다른 신에게 경배하지 말라. 주는 질투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님이니라.
(신4:23-24) 2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할지니라. 너희가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너희와 맺은 그분의 언약을 잊어버리고 너희를 위해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금하신 새긴 형상이나 어떤 것의 모습을 만들까 염려하노라 24 주 네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오 곧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거나 조각하지 못하도록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나누이지 않게 하기위함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사랑을 쪼개는 행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결혼식에서 부부는 결혼서약을 합니다. 결혼서약은 이제부터 부부된 당신만을 사랑하겠노라고 서약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약속을 깨뜨린다면 이혼하는 사유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되었으므로 하나님만을 사랑하겠다고 서약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 됩니다. 하나님보다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자식을 더 사랑한다면 그 모든 것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내려놓을 때까지 싸우실 것입니다.
성경에는 질투 때문에 큰 죄를 범하고 결국 자신마저 패망의 길로 걸어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있을까요? 동생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아주셨는데 자신의 제사는 받아주시지 않음을 질투하여 결국 동생을 죽임으로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고 만 가인이 있습니다.
블레셋의 침략으로 국가가 풍전등화같은 위기에 있을 때 용감하게 맞서 싸워 적장 골리앗을 죽인 다윗을 질투한 사울왕은 결국 전쟁에서 자신과 자기 아들들과 하루동안에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이와같이 질투심은 긍정적인 이미지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단어입니다.
2. 발람의 교훈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을 살펴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신 후 시내산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심으로 그들을 언약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급기야 금귀고리를 가지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우상섬기는 죄를 범하고 맙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간에 맺은 언약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깨뜨린 백성들에게 진노하심으로 그들을 진멸하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간곡한 중보기도에 따라 그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십계명을 돌에 새겨 모세를 통해 주시면서 다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다시는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섬기지 않도록 재삼 당부하시면서 자신의 이름을 ‘엘 칸나 즉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여기서 엘은 하나님, 칸나는 질투하는 이란 뜻입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을 섬기는 여정을 보여주는 책이다. 시내산에서의 율법을 받은 후 시내광야를 떠나 38년이 되는 해에 요르단 동쪽 모압 평지에 도착할 때 까지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과 규례를 얼마나 잘 지켰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힌 사탄은 광야 40년 동안에도 틈만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고자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하나님앞에 자주 넘어지는 것 중의 하나가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세상적인 부귀와 명예와 행복을 온전히 버리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을 엿봐서 그런데 탐심이 가득찬 사람들을 넘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1) 발람의 탐심
어느 누구든지 높은 대접과 엄청난 뇌물을 준다고 하면 이를 거절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민수기 22장에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에게 행한 것을 익히 잘 알고 있는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있을 때(민22:1) 심히 두려워하였으며 온 백성은 간담이 녹을 정도로 떨면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민22:2-3). 모압왕 십볼의 아들 발락은 아모리 족속 시혼왕에게 한 것을 듣고(민22:2) (민22-25장,31장)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발락은 유명한 선지자 발람을 불러온다. 모압 왕 발락은 전쟁으로는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음을 알고 군사 전략가와 장로들을 불러서 이스라엘을 넘어뜨릴 묘책을 찾았는데 그것은 모압으로부터 644km나 떨어진 브돌에 사는 발람 선지자를 초청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당시 발람의 명성이 어떻게 나있는가 하면 발람 선지자가 축복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임하고,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임한다는 명성이 대단했다. 그래서 모압 왕 발락은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을 통하여 예물을 보내 발람을 초청하였다(민22:7). 발락 왕이 보낸 장로들이 물질을 갖고 발람을 찾아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왕의 말을 전했을 때 하나님은 발람에게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 받은 자들이니라(민22:12)’고 말씀하셨습니다. 발람은 모압왕 발락에게 가지도 말고 이스라엘을 저주하지도 말라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들었음으로 처음엔 발락에게 갈 수 없다고 하였으나 이번에는 발락이 더 높은 고관들을 보내면서 전보다 더 크게 높여 존귀하게 해주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겠다는 말에 발람은 발락 왕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주 내 하나님을 어겨 더하거나 덜하지 못하겠노라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지 알아보겠다고 하면서 발락이 보낸 자들을 유숙하게 했던 것(19)은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발람은 발락에게 가는 길을 택하고자 구실을 삼은 것입니다(21).
(2) 말하는 나귀
발람이 나귀를 타고 출발하자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들고 길을 막아섰습니다. 이를 본 나귀가 칼 든 천사를 피하려 갈팡질팡하자 발람은 나귀를 세 번씩이나 채찍질했습니다.
(민22:23-27) 23 나귀가 주의 천사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떠나 밭으로 들어가므로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때리니라.
25 나귀가 주의 천사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담에다 짓누르매 그가 다시 나귀를 때리니
27 나귀가 주의 천사를 보고 발람의 밑에 엎드리니 발람이 분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더라. 이때 하나님은 나귀의 입을 열어 나귀가 말을 하는데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렇게 세 번씩 때리느냐’고 나귀가 말을 하니 발람이 말하기를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라면 벌써 너를 죽였으리라고 하였을 때 하나님이 발람의 눈을 열어 칼을 든 주의 천사가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게 하고 그가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네 길이 내 앞에서 삐뚤어졌으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는데(32). 만일 나귀가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분명히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33)’고 하였습니다. 이 때 발람은 이제 당신이 그 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내가 돌아가겠나이다 하니(34) 주의 천사가 이르되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해서 발람은 드디어 발락에게 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나귀를 통해서 발람의 어리석은 행동을 깨닫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발람은 발락이 약속하는 물질에 눈이 어두워져 발락을 위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숭배와 음행죄를 지어서 이스라엘이 미혹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받도록 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발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기회가 오면 자기 뜻대로 하는 이중적 행태를 보여주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한 장본인 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 위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이 세상이 어두운 것을 좋아하면서 빛의 길을 가지 않는 발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뇌물 좋아하는 사람,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 교회보다는 자기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은 현대판 발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발람의 길을 가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도 발람의 길을 따라간다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발람의 교훈을 따라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한번 보겠습니다.
3. 광야 38년 후 가나안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이스라엘
민수 20-22장과 33장 그리고 신명기 2-3장에는 광야 38년을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에서 호르산 방향으로 향하는데(민20:22) 호르산에서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바로 가는 대신 에돔의 영토를 우회하여 남쪽으로 향하여 민수기 33장 31-35절에 언급된 숙영지들 중 에시온가벨인 현재 아카바만의 엘랏 근처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 사렛(민수 21:12)에 도착하는데, 이는 모압 영토의 남쪽 경계선으로 알려져 있다. 모압의 동쪽 경계로 이예아바림(민 21:11)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모압 영토를 우회하는 여정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리하여 모압의 북쪽 경계인 아르논 강(오늘날의 와디 무집Wadi Mujib)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이스라엘인들은 와디 엘 하비스Wadi el-Habis 연안의 나할리엘(민 21:19) 방향으로 옮겨 갔다가, 느보 산의 봉우리 중 하나인 비스가 산(민 21:20) 근처 바못(21:19b)에 도착한 후 여기서 벧여시못에서부터 아벨시팀까지 이르는 모압 벌판에 진을 치게 된다(민33:49). 성경 기록에 따르면 바못에서 모세는 모압 북쪽의 영토를 다스리던 아모리족속의 임금 시혼에게 사신을 보낸다(민21:21) 그러나 시혼이 이스라엘의 통과를 거부함으로써 야하스(민21:23)에서 싸움이 벌어졌지만 아모리족속의 임금 시혼을 죽이면서 이스라엘이 승리함으로써 시혼의 왕국 북쪽 경계인 얍복 강까지 영토를 점령했다. 뒤를 이어 이스라엘은 얍복 강 북쪽 지역에 자리한 바산의 왕인 옥과 싸움을 벌인다. 에드레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비산의 왕 옥도 죽이면서 이스라엘이 승리함으로써 그 지역까지 점령한다. (신3:1-6)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바산 영토의 모든 도시를 파괴하고 약탈했다. 이것으로 약속받은 영토점령에 대한 첫 번째 단계, 즉 요르단강 동쪽 지역 점령에 관한 약속이 이루어진다. 모세는 이 영토를 갓, 르우벤, 그리고 므낫세 반지파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스라엘자손이 앞으로 나아가 여리고 옆 요르단 모압평지에 진을 치니라(민22:1).
광야여정을 전체적으로 회고하는 민수기 33장과 신명기 2장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스라엘의 38년 광야 여정을 신명기에서는 보다 더 축약해서 기록하였으며 민수기 33장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는데 뭔가 의미가 있었던 장소들 중 몇 군데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 세렛 골짜기 (민21:12. 신2:14)민수기와 신명기 2:14절에서는 가데스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넜을 때 까지의 기간이 광야 38년인데 이기간 동안 가장 쓰디쓴 기억으로 가데스바네아의 반란 사건 이후로 출애굽 1세대의 군인들이 모두 죽고 한 명도 남지 않은 곳이 바로 이곳 세렛 골짜기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20:14) 모세가 가데스에서 에돔왕에게 사자들을 보내며 이르되 (민21:12) 그들이 거기서 움직여 세렛 골짜기에 진을 쳤고
(신2:14) 우리가 가데스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널 때까지의 기간이 삼십팔년이었더라. 마침내 이 때에 군사들의 모든 세대가 주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그 군대 가운데서 소멸되었나니 1차 목적지 였던 가데스바네아의 실패를 뒤로 하고 광야로 들어간 38년 후 이 곳 세렛 골짜기를 지나기 까지 모든 군인들이 죽어 나갔으니 이는 첫째 인구조사 때 싸움에 나갈 만한 이스라엘 자손이 계수된 자의 총계는 육십만 삼천오백 오십 명이었더라(민1:46). 이 육십만 삼천 오백 오십명을 38년x365로 나누면 38년 동안 매일 44명씩 죽어나간 셈이고 이곳 세렛 골짜기에서 새로 출발하는 셈이 되었습니다.(2) 아르논 강 건너편 (민21:13. 신2:24-25)세렛 골짜기에서 출애굽 1세대가 모두 죽은 것이 확인 된 후 세렛에서 그 다음 기착지로 언급된 아르논 강 건너편에서 비로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전투준비에 들어가게 하시고 아모리 왕 시혼을 그들에게 붙이실 것과 이스라엘을 천하만민이 두려워하게 하며 그들의 명성을 듣고 떨며 근심하게 만들 것이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신2:24-25) 24 너희는 일어나 이동하여 아르논강을 건너라. 보라 내가 헤스본왕 아모리 족속 시혼과 그 땅을 네 손에 주었은즉 그와 전쟁하며 싸워 그 땅을 소유하기 시작하라.
25 이 날 내가 온 하늘 아래 민족들로 하여금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소문을 듣고 떨며 너로 인하여 고통을 받으리라. 따라서 출애굽 1세대의 군인들이 모두 죽고 없어진 세렛에서 출발하여 아르논 강을 건너 온 이곳에서 부터 순수 출애굽 2세대들을 통한 본격적인 가나안 정복 전쟁이 시작되는 셈 입니다.(3) 비스가 산정(21:20. 신34:1-8)이스라엘의 광야 여정 40년을 결산하는 최후의 장소로써 이곳 비스가 산상은 바로 모세가 사명을 마치고 주님께 부름 받았던 장소이다(신34:7). 모세의 형인 대제사장 아론은 가데스바네아의 다음 기착지인 호르산에서 부름을 받았을 때는 출애굽 후 40년 5월 이었고(민20:22-29) 그의 나이가 123세 이었다고 하는데(민33:38-39) 아마 같은 해에 모세는 가나안이 보이는 비스가 산상에서 부름을 받을 때 나이가 120세라고 했으니(신34:1-8) 형 아론과의 나이 차이는 세 살 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본격적인 가나안 정복 전쟁을 위하여 도착한 이 곳 비스가 산상은 가나안을 전체적으로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으로 모세는 이곳에서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나로 건너가게 하옵소서’ 간청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너는 여기까지 라고 하실 때 더 이상 간청하지 않고 그의 죽음을 받아 드렸던 장소입니다.우리들도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얼마나 더 살게 될지 모르지만 언젠가 우리들의 마지막 귀착지로서 각자 인생의 비스가 산상에 이르기까지 주님과 함께 가는 아름다운 동행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4) 요르단강 동편 시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광야를 떠난지 거의 40년만에 드디어 광야의 모든 여정을 마치고 요르단강 동편 시팀에 도착했습니다
(수3:1)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 일어났고 그와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시팀에서 떠나 요르단에 이르렀으며 그들이 건너기 전에 거기서 머물렀더라.
에서 보듯이 시팀이란 곳은 이제 요르단강만 건너면 가나안 땅이 보이는 요단 동쪽에 있는 장소이다. 시팀에서 일어났던 일이 매우 슬픈일이었다. 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동안 말씀으로 양육 받았으며, 많은 전쟁을 통해 강한 군대의 모습도 갖춰서 주위의 다른 나라들이 두려워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일만 남게 되었는데 뜻밖에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복병을 만났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적들을 다 물리쳤고, 심지어는 유명한 선지자 발람도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했는데 시팀에와서 모압사람들 사는 것을 보니 광야 40년 동안 먹었던 만나가 이제는 하찮은 음식으로 느껴질 정도로 불평이 나오는데 마귀는 이런 불평하는 저들을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나를 처음 먹었을 때는 꿀섞인 과자맛 같다고 했던 만나가 하찮은 음식으로 느껴지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실 지난 40년 동안 먹었던 만나는 종합 영양제로서 만나만 먹고서 전쟁에 나가 승리도 하였고 또 병에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영양실조에 걸려 죽은 사람도 없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푸석푸석한 빵을 싫어하노라고 불평하기 시작하였습니다(민21:5). 가나안 땅 들어가서 하나님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다른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어 있었는데도 이제 가나안 들어가는 것을 앞두고 만나가 푸석푸석한 빵이라고 생각할 때 모압 여자들이 모압의 축제에 오면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말에 죄를 범할 생각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불만이 생기면 불만을 틈타 유혹이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40년 동안이나 훈련을 받아 그토록 강하였던 군대로 변모한 그들이 어떻게 그처럼 쉽게 무너질 수 있었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발람의 교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광야 40년 훈련이 다 끝나갈 무렵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직접 원인 제공자가 발람이라는 것이다. 발람은 모압 왕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패배시킬 수 있는 한 가지 비밀을 알려 주었던 계략은 무엇이었을까요?
(계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바알브올에 연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니 그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었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민31:16) 보라 이들이 발람의 조언을 따라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브올의 사건에서 주를 대적하고 범법하게 하여 주의 회중 가운데 재앙이 있었느니라.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던 것을 가리켜 ‘발람의 교훈’이라고 합니다. 이제 ‘바알브올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의 전모를 살펴봅시다.
4. 발람의 가르침에 빠진 이스라엘
발람은 불의의 삯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이스라엘백성들을 무너뜨릴 계략을 발락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계2:14에 보면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의 계략을 듣고 이스라엘에게 올무를 놓았는데 그 올무는 자기들 신의 축제 때 아름다운 여인들을 통해 유대남자들 특히 통치자들을 초청하여 우상에게 절하고 우상의 제물먹고 우상앞에서 그들과 행음하게 하는 정말 말초신경까지 녹을 정도로 유혹하는 올무였습니다. 만일 발락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더라면 이스라엘은 그들을 맞아 용감하게 싸워 승리했을 것이었지만 발락이 미인계를 보내어 우상숭배의 잔치에 그들을 초대하자 자긍심도 강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이 던진 음행의 미끼로 인해 올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신4:3-4, 민31:16, 시106:28-29, 31, 고전10:8). 그 때의 상태에 대해
(민25:1) 이스라엘이 시팀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이 사건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가나안 족속들의 우상숭배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가나안 족속들의 대표적인 우상은 ‘바알’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우상도 농경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 농사가 잘 되려면 무엇보다 비가 제 때에 충분히 내려야만 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족속들은 비가 내리는 것은 남신과 여신의 성적 결합에서 비롯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들에게 제사를 드릴 때 마지막 순서는 신들 앞에서 성행위를 함으로써 성적자극을 받은 신들이 성적 결합을 하게 되어 비가 온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압 여자들이 이스라엘 남자들을 그들의 제사에 청했을 때 이스라엘 남자들은 먼저 모압 여자들을 따라가서 그들의 제사에서 함께 어울려 술과 제사 음식을 먹고 우상에게 절을 했다는 것입니다(민25:2).
그리고 2부 순서로 그들은 바알우상 앞에서 모압 여자들과 성행위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 갔었을 때에도 모세가 오래 동안 내려오지 않자 그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금송아지 앞에서 춤추며 우상놀이 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었는데 또 다시 이런 우상숭배 죄를 범하게 되었는데 이번 이스라엘의 범죄는 이방여인들과 이방신에 대하여 간음한 것이므로 과거 금송아지때 보다도 더 무서운 죄악이므로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백성의 우두머리들을 잡아 처형하라고 하셨습니다.
(민25:3-4) 3 이스라엘이 스스로 바알브올에게 연합하였으므로 주의 분노가 이스라엘을 향해 타오르니라. 4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모든 우두머리를 붙잡아 해를 향하여 주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주의 맹렬한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이것은 지도자의 책임이 막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지도자들만 처형당하는 것이 아니라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들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민25:5) 모세가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바알브올에게 연합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
백성들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진리를 실감하며 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처형을 당한 것은 또 주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도록 백성들의 죄를 속하는 의미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가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백성들 중에 염병이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전염병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였습니다. 이 음행죄로 인하여 죽은 사람이 이만 사천 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민25:9) 그 재앙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더라.
5. 비느하스가 던진 질투의 창
백성들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백성의 지도자들과 우상에게 연합된 자들이 죽임을 당했으며, 백성들 중에는 염병이 생겨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을 때 모든 백성들은 회막문앞에 모여 죄에 대한 회개와 고통으로 인하여 부르짖고 있었던 상황에서 참으로 뻔뻔스러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민25:6)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중의 성막문 앞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중 한사람이 모세의 눈앞과 온 회중의 눈앞에서 미디안 여인 하나를 데리고 자기 형제들에게로 오니라.
염병으로 24000명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로 슬퍼하면서 회막 문앞에서 울 때에 시므온 지파의 시므리라는 통치자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자기 장막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생각하기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파렴치하고 추악한 범죄를 보고 한탄만 하고 있었는데 마침 아론의 손자인 비느하스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그분의 왕권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창을 들고 그들을 뒤따라 들어가서 그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 죽이니 이제 하나님의 진노가 끝났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비느하스의 가슴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활활 타올랐으며, 결국 하나님을 향한 열정적인 사랑으로 즉각 그들을 징계하는 행동을 취했던 것이었습니다.
(민25:7-8) 7 제사장 아론의 손자요, 엘르아살의 아들인 비느하스가 그것을 보고 회중 가운데에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8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장막에 들어가서 그 두사람 곧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으니 이에 재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치니라.
그런데 말입니다. 그 순간 무섭게 퍼져나가던 염병이 뚝 그쳤다는 것은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거룩한 질투의 열정을 가지고 거룩한 분노를 발산하여 죄를 범한 그 남녀를 일거에 처치한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비느하스의 그 열정적인 행동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염병을 그치게 했습니다. 성경은 비느하스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의로운 것으로서 대대로 칭송을 받을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시106:28-31) 시편 106은 이 사건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8 그들이 또한 스스로 바알브올과 연합하고 또 죽은 자들의 희생물을 먹어서 29 이같이 자기들이 창안한 것들로 그분의 분노를 일으키므로 재앙이 그들에게 임하였도다. 30 그 때에 비느하스가 일어서서 심판을 집행하니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31 그분께서 그것을 그에게 영원토록 모든 세대에 이르는 의로 여기셨도다.
정말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원수를 자신의 원수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의 의로운 행위를 칭찬하시고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제사장이 되게 하신 ‘화평의 언약’(12)을 주셨습니다. 그 공로로 하나님은 비느하스에게 특별한 축복을 주셨는데 곧 제사장 언약을 주셨습니다.
(민25:13) 그와 그의 뒤를 이을 그의 씨가 그것 즉 영존하는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얻으리라. 다시 말하면 너희 가정은 영원한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리라는 복을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즉시로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재앙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비느하스는 아론의 손자이며 엘르아살의 아들로서(민24:33) 우상숭배하는 미디안 여인을 회막에 데리고 들어온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둘을 한꺼번에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민25장). 제사장으로 미디안 정복에 참가했으며(민31:6) 포로 후 바느하스 자손이란 제사직이 생겼습니다.
6. 비느하스가 던진 질투의 창이 주는 교훈
모세의 리더쉽의 무기력함이 가져온 결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여인들과의 성적타락과 우상숭배로 인한 영적타락이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바알-브올의 사건으로 인하여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재앙을 통하여 죽어가고 있을 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판단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을 변경하기 까지 한다. 지도자의 영적인 무력함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나아갈 이정표를 잃은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재앙의 고통을 가중시킨 것은 시므온 지파의 지도자 시므리와 미디안 여인과의 성적인 타락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성적인 행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고, 지켜보는 공동체의 공간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이들의 행위에 대하여 왜 침묵하고 있었을까? 그 스스로가 미디안 제사장의 딸 십보라를 아내로 삼았다는 사실때문이었을까? 생각해본다. 만약 그가 시므리의 성적인 타락에 대하여 행동했다면, 오히려 위선자로 몰려 더 강한 비난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모세는 침묵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반전의 상황이 벌어진다. 갑자기 제사장 아론의 손자이며,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나타나 장막안에서 성관계를 하고 있던 시므리와 미디안 여인 고스비를 창으로 찔러 죽이는 살인극을 벌린다. 그러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인 염병의 재앙이 멈추었다. 분명히 비느하스의 행동은 살인행위였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재앙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했다(9). 그리고 하나님은 비느하스에게 상을 주었다. ‘내가 그에게 화평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의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 하였음이라’(12-13). 분명히 비느하스의 행동은 성적인 타락을 멈추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모압신에 대한 우상숭배를 금지시킨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의 우상과 연합하는 과정을 보면, 1절에서 모압여인과의 음행에서 시작되었고, 여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압의 신들에게로 초대하여 그들에게 절하게 했다고 언급한다(2). 그렇다면, 성적인 타락은 어떤 결과를 가져 왔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특별히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반복되는 단어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질투 또는 열심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자세히 보면, 비느하스의 행동은 질투에서 출발한 것으로 그는 하나님의 질투를 알았고, 하나님의 질투를 위하여 극적인 살인의 행동을 한 것으로 언급한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질투는 히브리 단어 칸나에서 온 단어이다. 이것은 구약의 여러 곳에서 사용되어, ‘시기’나 ‘질투’ 또는 ‘열정’으로 번역 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연관성을 가질 때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언약적 혼인 관계의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하면, 신랑 되신 하나님과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사랑의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다. 호세아의 이야기처럼, 신부가 신랑을 떠나, 다른 남자(다른 신)와 혼인 한다면, 그것은 이미 간음이며, 동시에 우상 숭배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질투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이다. 비느하스는 백성들을 향한 그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들이 죽어가는 것을 멈추어야 했다. 그 죽음의 원인이 이방인과의 성적인 타락이었다면 더 이상 이것을 방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므리와 고스비를 죽이는 최후의 결정을 했던 것이다. 분명히 비느하스 행동은 백성들의 목숨을 살리는 행동이었음에 틀림없다. 분명히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했던 것을 모세는 그 명령을 지키지 못했고 비느하스가 모세의 무력함을 보고 과감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비느하스는 분명히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이었다.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자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아버지의 옷을 입었다는 것은 그가 대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느하스는 제사장의 직분을 물려받을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는데 비느하스는 제사장의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레위지파의 한 일원으로 제사장을 돕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비느하스를 마지막에 어떻게 소개하는가?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 이니라(13)’. 레위지파는 하나님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준 예물이었다(민8:19).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고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했으며, 성소의 경계병이다. 이미 그들 스스로가 회막의 희생제물로서 살아야 했다. 오늘 비느하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속죄했다는 것은 레위인으로서 제사장의 지위를 내려놓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회막으로 올 수 있는 기회의 문을 열어준 것이다. 스스로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길 주저하지 않은 비느하스에게 하나님이 준 상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행동에 대한 댓가였으며 동시에 그 열정은 다시 평화를 향한 마음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몇 년 후 바느하스는 이스라엘의 동쪽과 서쪽의 땅의 분할의 문제에서 평화의 중재자로서 역할을 감당했던 것을 볼 수 있다(수22장). 신약에서 비느하스와 같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가지셨던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예루살램 성전 정화를 하는 이야기가 사복음서에 등장한다. 유월절에 성전 뜰에서 소, 양, 그리고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환전상들을 내어 쫓으시는 장면이 등장한다. 특별히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을 향하여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수식어는 예수님이 아버지를 향한, 그리고 아버지의 집을 향한 열정이 얼마나 간절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시편의 이야기는 예수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요한복음 2장17절에는 주의 집에 대한 열심히 나를 삼켰나이다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예수는 유월절을 악용하여 비둘기를 드릴 수밖에 없는 가난한 자들의 주머니를 터는 장사꾼들에게 새로운 성전파괴의 예언과 자신이 성전 될 것을 예언한다. 새로운 성전은 사기꾼들과 야합한 제사장들의 배를 불리는 퇴색된 유월절이 아니라 스스로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어 성전의 휘장을 걷어내고 누구든지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마음만 있으면 다가올 수 있는 대상인 예수가 성전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채찍을 향한 것이 아니라 부정한 짐승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명시한 것이고 이방인들의 뜰을 가로막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장사꾼들이 스스로 부정한 동물들을 따라 성전을 떠나도록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언약을 맺으실 때 자신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출20:4-6)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곧 네 주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니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하였을지라도 우리를 즉시 멸하지 않으시고 독생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 역시 당연히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이럴 때의 하나님의 심정을 ‘질투’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는 말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역설적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상을 섬기거나 죄에 빠져 파멸당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 빠지며 음행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이 때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범죄자를 처벌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열심이 이렇듯 때로는 많은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속죄의 길로 인도하며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합니다.
광야 인생길을 가는 성도에게 방심은 금물입니다. 방심은 우리가 은혜로 충만할 때 시험과 싸움에서 이겼을 때도 찾아옵니다. 본문의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방심하여 넘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을 받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강한 군대가 되었을 때가 위기의 때기이도 합니다. 40년 광야생활에서 수많은 승리의 삶을 마쳤던 이스라엘이 이처럼 맥없이 넘어진 것은 교만하여 방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은혜가 충만하십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고 있습니까?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럴 때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교만하여 방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고전10:12)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무슨 일이 있어도 죄에 빠지지 않도록 힘쓰며,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살아가십시오. 믿음에 견고히 서서 끝날까지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처럼 불신이 만연한 시대에 주의 열심을 품은 사람을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러한 열심을 품고 주의 영광을 위하여 힘써 일하게 하옵소서. 성령의 충만함을 주사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이 시대에 우리 모두 비느하스와 같이, 다윗과 같이, 엘리야와 같이, 바울 사도와 하나님의 열심을 품어서 주님의 진노를 기쁨과 시원함으로 바꿀 수 있는 경건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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