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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했듯이 우리들도 새사람이 되자
    말씀 2020. 1. 5. 15:36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했듯이 우리도 새 사람이 되자. 고후5 : 15-21

     

    지난주는 2019년의 마지막 예배를 드리면서 한해를 보내는 아쉬움을 가졌는데 오늘은 한주만에 2020년의 첫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니 너무 마음이 기쁩니다. 새해를 맞이하니 이 말씀이 떠오릅니다.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제 새해를 맞이하였으니 우리들은 지난날의 죄악과 잘못된 것들을 되풀이하지 말고 또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는 불신과 불순종도 2019년과 함께 영원히 묻어버렸으니 이제부터는 로마서에 있는 말씀처럼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오르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감사하는 생활로 우리들 일상생활이 변하였으면 합니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람은 누구나 새것을 좋아합니다. 새 옷 입는 것을 좋아하고 새 아파트에서 사는 것을 좋아하고 신인 가수나 신인 선수를 좋아할지라도 성도들의 소원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것을 최후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새해가 되었어도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다짐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새롭게 변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새로워졌다는 것을 거듭났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어느 날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이 표적을 보니 랍비인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믿는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 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생각할 것은 율법에 철저한 바리새인이라도 거듭나지 않고서는 즉 새로워지지 않고서는 절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새해 첫주 제가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2020년에는 우리 모두 거듭나는 신앙, 즉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진실로 축원합니다.       

    2019년을 뒤돌아보면 우리사회에서는 정치적인 이념갈등이나 사회빈부차이에 의한 갈등으로 인하여 한도 많고 사건도 많았던 한해였는데도 우리 주님께서는 지난 한해도 우리를 지켜주셨던 것처럼 올해에도 변함없이 우리를 지켜주실 줄 믿고 이 새해 첫주일에 하나님께 먼저 감사기도를 드리고 찬양과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아멘.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요단강 물속에 있던 돌들을 꺼내서 돌 기념탑을 세운 것처럼, 우리들도 이제까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자 늘 감사하는 기념비를 마음속에 세우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주님께 드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러한 행위를 우리는 쉬운 말로 예배라고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항상 이 예배를 소중히 여겨야 하고 예배를 우리의 생활에 가장 귀중한 시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 예배 시간은 목숨 걸고 지켜야 되는 것인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였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으로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여리고성을 무너뜨려야 하는데 그 여리고성을 내 힘으로 무너뜨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주 하나님의 능력으로만이 가능합니다. 그런 말씀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4:6) 만군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 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아멘.여리고성보다 강한 마귀 사탄 권세는 피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불순종하며 불평과 불만과 원망을 하면 안 되고 범사에 감사 할 때 마귀는 물러가고 모든 일들이 잘 되고 형통하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올해에는 어느 환난과 고통이 오더라로 무조건 감사하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더 큰 축복을 받게 하는 지름길과 같습니다. 아무리 생활이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면 하나님은 사렙다 과부를 통하여 역사 하시던 기적을 바로 여러분을 통하여서도 역사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지난 한해를 생각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립시다. 삶의 무거운 중압감으로 힘들었을 때도 다시 소생할 수 있는 소망을 주셨으며 교회와 가족들을 눈동자처럼 지켜 주셔서 큰 사고 없게 지난 한 해를 잘 마칠수 있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립시다. 내 인생에 폭풍이 있었기에 주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며, 가끔 십자가를 지게 해 주셨기에 주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었음을 감사드립니다.나를 사랑해 준 사람에게 감사하고 나를 공격해 준 사람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면서 나를 더 이해심 많은 사람으로 만드셨던 것에 감사합니다.

    때때로 가시때문에 한숨과 눈물도 흘렸지만 그것 때문에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도 배웠습니다. 실수와 실패를 통해 겸손을 배운 것에도 감사합니다. 금년 한 해에도 평범한 생활 속에서 감사를 발견하는 지혜를 주소서.무엇이 생겨서가 아니라, 무엇이 나에게 발생하지 않음에 대해서 감사하게 하소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귀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과, 살기좋은 이 시대에 태어난 것과, 무엇보다도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징조가 우리 시대에 수없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깜짝 깜짝 놀랐던 순간을 기억하면서도 감사를 드립니다.나보다 잘난 사람과 비교하지 말게 하시고 돈이 내 인생의 목적이 아닌 것에 감사하며 항상 있는 것으로 족하게 하는 마음으로 넉넉하게 채워주시고 이웃 사랑과 영혼구원하는 일에 행복한 삶이 이어지게 하시며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주소서. 이제 감사기도를 마쳤으면 새해의 다짐을 한 번 해봅니다.

    보통 새해를 맞이하면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올해는 좀 더 나아지겠지 하는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는 경자년 쥐띠해로 쥐는 부지런히 먹을 것을 모아 두듯이 모두가 풍요로운 한해가 될 것을 기도합니다. 하지만 우리주변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중국간의 무역분쟁속에서 섣불리 잘못개입하였다간 큰 코 다칠지도 모르며 또 국내적으로 남북관계 그리고 4.15총선에서 과연 어느 당이 다수당이 되어 나라를 바르게 이끌고 갈 것인가가 가장 금년의 관심 대상이 될것인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 모든 현안에 대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에 보면 파수군이 성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아니하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라고 하였듯이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시야만 우리들이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이처럼 남북문제와 4월에 있을 총선을 위해 기도해야 할 문제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데 애국가에 있는대로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라고 하였으면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장차 이나라가 열방을 향해 빛을 발하는 나라가 될 수도 있는데 이런일들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전 국민이 이러한 시급한 문제를 놓고 기도를 해도 시원찮은데 새해첫날 새벽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태양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니다. 과거에는 이런 모습이 거의 없었는데 이제는 먹고 살만하니까 어느새 새해아침에는 이전보다 더많은 사람들이 바다로 산으로 가서 붉게 떠 올라오는 해를 보면서 태양에게 복을 구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니 하나님께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사람들이 해에게 복을 빌기 위하여 전국 해돋이 명소에는 이미 몇 달전부터 다 예약한 사람들만 갈 수 있는데 보통사람들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해를 보면서 소원을 빌고 있는 인간을 보면 인간처럼 어리석은 사람들도 없습니다. 해는 수소기체가 불타고 있는 무생물인 불덩어리로서 전혀 인간에게 복을 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새해 첫날에는 떠오르는 해가 자기의 소원을 들어줄 것으로 착각하고 해돋이를 보기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 어느새 새해의 풍속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일출구경하는 것 갖고 뭐라고 말할 필요야 없지만 새해 일출을 보면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소원을 빈다는 것이야 말로 현대판 태양신을 믿는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보통날도 일출구경은 매우 장관을 이루지만 새해 아침에 일출모습을 보면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태양신을 향한 기도임에 틀림없다.

    전도서에는 이런것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제 떴던 해가 오늘 다시 떠오르고 지난해 떴던 해가 새해 아침에 다시 떠오르는데 무엇을 가지고 새것이라고 하느냐 해아래서는 새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떠오르는 태양을 향하여 그러게 야단들이지만 전혀 새것이 아니라 어제 있었던 그대로라고 하면서 이러한 것이 다 헛된 일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해가 바뀌어도 새로워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입니다. 새옷을 입었다고 달라진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새롭게 변해야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어떻게 해야 새롭게 변해질 수 있냐고요?

    1. 주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된 그리스도인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이 죄가 인간들 사이에 왕 노릇함으로써 인간과 하나님사이에는 죄가 가로막고 있어서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를 제거하고 화목하게 하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 결과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며(1:12) 이처럼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보다 더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 간다면 이는 분명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믿은 우리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이며 새롭게 된 자들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따른다면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우리도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갈라디아서 220절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내가 육체 안에는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들이 이제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이제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기로 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사신 방향대로 살아가기로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러한 결단을 가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영원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거듭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그 어떤 다른 무엇으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자들이 바로 주 안에서 거듭난 자이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1) 육체대로 살지 아니하려는 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인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당연히 세속적인 삶의 가치를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되며 더구나 육체대로 살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세상풍조를 따라가지 않고 세속의 행동 양식으로 생활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비록 그들이 과거에는 세상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썩어질 재물이나 명예나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에 따라 살아갔으나 이제는 예수님의 생명을 소유한 거룩한 자들이기에 오직 하나님 나라의 양식대로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인들이 육체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은 이기적인 욕심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가치도 그 깊은 밑바닥에는 개인적인 탐심이 깔려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치에는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그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육체대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 나라의 삶의 양식대로 살아갈 때 그곳에는 항상 하나님 나라의 문화와 역사가 펼쳐집니다.

     

    (2) 주님을 따라 생활하는 자입니다.

    새 사람이란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구주이심을 믿는 자인 것입니다. 인생은 육으로 났으니 어디까지나 육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악으로 죽어버린 영혼으로는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에티오피아 사람이 자기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없듯이 악을 행하는데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성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13:23). 육신은 제 아무리 애써도 육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가려면 갈라디아서에 나온 말씀대로 예수님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육이 죽고 영이 사는 것에 대해 성경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참된 믿음으로 사는 삶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43:18) 너희는 이전 일들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들을 깊이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4:22-24) 22 이전 행실에 관하여는 너희가 속이는 것으로 가득한 욕심들에 따라 부패한 옛 사람을 벗어 버릴 것을 가르침을 받았으니 23 너희의 생각의 영속에서 새롭게 되라 24 또 너희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을 것을 가르침을 받았으니고 하였습니다.

     (3:9-10)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옛 사람은 육욕에 속한 사람이나 썩어질 수밖에 없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을 벗어 버리면 새 사람이 됩니다.

     옛 사람이 죽지 않으면 새 사람으로 다시 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옛 사람에 대해 마가복음 721부터 23에 나옵니다.

    (7;21-23) 21 속에서 곧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간음, 음행, 살인 22 도둑질, 탐욕, 사악함, 속임, 색욕, 악한 눈, 신성모독, 교만, 어리석음이 나오는데 23 이 모든 악한 것이 속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것들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상태입니다. 얼마나 더럽고 치사스러운 마음씨입니까? 이런 옛 것을 다 벗어 버리고 매장해 버려야 합니다. 옛 것을 청산하지 않고는 새것을 영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직도 새 사람이 되었다고는 하나 미지근한 부분이 있다면 이제 완전히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새 사람답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님 안에서만 새로운 피조물이 가능하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입니다.  모든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 단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에라는 말은 연합, 교제, 연결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며 그리스도와 날마다 교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매순간 교제를 이룰 때 가능한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이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말합니다(4:24). 새롭게 다시 지음을 받은 새사람은 비록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죄의 유혹 아래 살지만 결코 다시 죄의 종노릇을 하지는 않습니다(6:2). 오르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5:22-23). 왜냐하면 새로운 피조물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데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써 그는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5:24-25).

    우리는 마귀에게 속아서 우리가 여전히 죄의 권세 아래서 종노릇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제 우리는 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즉 성령으로써 거듭난 사람은 마귀의 미혹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신분이 새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믿기 이전 우리의 상태를 본질상 진노의 자녀(2:3)라고 했습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음으로써 신분에 정말로 놀라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4:6-7)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정도가 아니라 영생을 누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의 자녀로서 세상에서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생명력을 사람들에게 불어넣으시고 그들을 향하여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부르셨습니다(17).

      따라서 그들은 이제 죽음을 향하여 존재하는 자들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향하여 달음질하는 거룩한 자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피조물인 성도들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새롭게 부여하셨습니다(18).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6:4)고 했듯이 이후부터는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6:13)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구체적이고 총체적인 삶의 변화이므로 이전에는 나를 위해 살던 그 옛 사람의 삶은 죽었고 이제부터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새로운 삶이 부여된 것입니다(14:8)

    여러분 물은 물의 수준 이상 더 못 올라갑니다. 돼지가 새끼를 낳으면 돼지를 낳고 말이 새끼를 낳으면 망아지를 낳고 영이 죽은 사람이 아기를 낳으면 영이 죽은 아기를 낳습니다. 그러나 중생한 자는 성령으로 새 사람이 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새 사람이 된다는 의미는 마치 모래도 조개 안에 있으면 진주가 된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모래가 진주가 되기 위해서는 조갯살이 얼마나 고통을 참았느냐처럼 우리들도 예수님을 믿으면서 세상으로 오는 모든 풍속을 참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새 사람된 사람들이 수없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두 사람만 소개하고 합니다.

     

    2.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한 사람들

    요한복음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을 5이나 두고 사는 음부요 창녀였으나, 어느 날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자 사마리아 성에 일대 부흥의 불을 일으킨 전도 여인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꾼 여자가 저렇게 새롭게 변할 수 있을까? 오직 예수님말씀만이 그녀를 새롭게 변하여서 사마리아성내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에 만났던 여리고 성에 살던 세리장이 삭개오도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종족들에게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오직 재물에만 눈이 어두웠던 사람인데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렇게 탐리하던 모리배였던 세리 삭개오는 자기의 토색한 죄를 회개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선한 이웃으로 변했으며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생명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전의 우리가 아님을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로서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우리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사는 영육간의 삶이 되어서 창조주 하나님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의 복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마지막 요한계시록 21장은 믿음으로 세상에서 승리한자들이 생명책에 기록된다고 하였으며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새 이름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62:2에는 이방인들이 네 의를 모든 왕들이 네 영광을 보리라, 또 너는 주의 입이 정하실 새 이름으로 불리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방나라들이 네 공의를 보게 될 것이고 모든 왕들이 네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 하였는데 그 근거는 하나님의 입으로 정해 주시는 새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게 되기 때문이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나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 준다는 것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하나님께로부터 여러분과 저에게 새 이름을 지어 주어서 그렇게 불리워지게 해 주신다는 것은 엄청난 은혜요 영광스러운 특권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새 이름이 무엇이 있는지 한 번 확인하여 보겠습니다.

     

    (1) 교회에 나오면 성도님 이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고전1:2에 보니 예수그리스도안에서 거룩히 구별된 사람을 성도라고 불리워진다는 것입니다. 즉 거룩한 사람들의 무리가 곧 성도라는 말입니다.

    교회에서는 성도라는 이름이 자주듣다보니 별거아닌 것 처럼 들릴지라도 이세상을 떠났을 때 천국에 가면 그곳에는 오직 성도들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은 이 땅에서 성도라고 불리웠던 자들만 가는 곳입니다. 성도는 아무에게나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택함받고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만 특별이 성도님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아들

    1:12-13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3) 그리스도인

    11:26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이렇게 새 이름으로 지음을 받은 성도들 모습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바라 볼 때에 공의를 보게 될 것이고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사람들의 웃음거리와 멸시의 대상이 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과 저를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의 곧 의롭게 하시는 그 은혜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의로와졌다고 해서 성도라는 것은 보배롭고 존귀한 자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그런 산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될 책임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방나라들과 모든 왕들이 먼저 보고자 하는 것은 네 공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네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선 우리에겐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도로서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될 때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공의가 합당하게 보여지게 될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존귀한 자로 세워주신 영광도 세상 사람들의 눈을 통해 보여지게 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새해를 맞이한 우리 모든 교회의 가족들에게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새 이름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존재와 우리 자신의 행태를 새롭게 변화시켜 주시는 은혜임을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습니다.

    (딤후3:1-5) 1. 말세에 현상을 보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그리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쾌락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의 모양만 있지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라했습니다.

    이런 말세에 고통하는 모습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너는 이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라고 하십니다. 누구할것 없이 이 사회의 풍조 속에서 결국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농후한 가운데에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게 될 때 우리에게서 빛이 드러나며 하나님의 영광이 보여지겠는가? 천만의 말씀이지요.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이 여겨 주시사 하나님의 입으로 정하신 새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게 하시므로 우리의 존재를 새로운 피조물로 드러나게 하여 주시사 믿지 않는 사람들도 우리를 통하여 공의를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는 놀라운 증인이 되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를 맞이하여 새 이름을 허락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나는 이전에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변화된 나 자신의 자화상을 확인하며 변화된 내 생활의 삶을 보여주므로 이방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와 영광을 보게하는 산 증인의 삶을 살도록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되다

    (32: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이라 하리니 이는 네가 통치자로서 하나님과 견주며 사람들과 견줄 능력이 있어 이겼기 때문이니라,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 부를 새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야곱이란 이름은 다분히 교활하고 남을 속이는 육신적이고 세상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을 추구했던 삶을 살았던 이름이었습니다. 실 야곱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야곱은 그 때가지 자기 꾀와 속임수, 권모술수가 많은 사람으로서 자기 힘을 의지하고 육신의 정욕과 욕심에 붙들려 살았던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본능으로 살아온 것입니다. 신앙이 아닌 본능으로 살아왔습니다. 예를 들면 야곱은 굶주린 형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챙길 생각을 했으며, 또한 어머니의 거짓된 제안에 따라 형의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 눈이 희미한 아버지 이삭을 속이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속임수가 나타난 이유는 불신과 정욕이 그를 인도하였기 때문입니다.

    (31:17-22)은 라반으로부터 도주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낙타들에게 태우고 그 모은 바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은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려 할새 그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더라. 그가 그의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을 향하여 도망한 지 삼 일 만에 야곱이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이에 라반이 야곱을 뒤쫓아 공격하려 하지만 야곱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외삼촌 라반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다시 허탈하게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외삼촌 라반의 위협은 피했지만 야곱은 다시 그 무서운 형 에서를 만나야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끊임없는 위기가 쉴새없이 야곱에게 몰려 오고 있지만 그는 주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마지막 꾀를 내어 나름대로 조치를 취합니다.

    (32:3-8) 3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4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5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 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7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8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32:22-28) 야곱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야곱만 홀로 남았더니 야곱은 이십년 처가살이를 벗어난 큰 부자가 되어 고향인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형 에서와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고향에서 정착해 살 수 있다. 야곱이 형에게 먼저 종들을 보내었는데 돌아와서 하는 말이 형 에서가 400명의 남자들과 함께 자기에게 온다는 소식을 들으니 더욱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튿날 야곱은 자기의 소유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선물을 준비하였다. 암염소 200마리, 숫염소 20마리, 암양 200마리, 숫양 20마리, 젖먹이는 낙타들과 그 딸린 새끼들 30마리, 암소 40마리, 수소 10마리. 암나귀 20마리, 수나귀 10마리를 취하였다. 그의 종들의 손에 각각 가축 떼를 나눠주었다. 그의 종들에게 말했다. 내 앞서 건너가라 그리고 가축 떼와 가축 떼 사이에 너희는 간격을 두라.  야곱은 맨 앞서 가는 종에게 이렇게 명했다에서가 묻기를 너는 누구의 사람이며 네가 어디로 가며 네 앞에 이것들이 누구의 것이냐? 하거든 너는 말해라 이것들은 당신의 종 야곱의 것인데 내 주 에서에게 보내어진 예물입니다. 그도 우리 뒤에 오고 있습니다.  야곱은 두 번째와 가축 떼, 세 번째와 가축 떼, 뒤에 가는 모든 자에게 에서를 만나거든 동일하게 말하라고 명했다. 또 당신의 종 야곱이 바로 우리 뒤에 있습니다. 라고 말하도록 했다. 야곱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이 예물로 형 에서의 얼굴을 달래고 나서 그의 얼굴을 보면 아마 그가 내 얼굴을 들것이다.

    물질을 통하여 야곱은 형 에서의 적대감을 깨고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기 원했다. 야곱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예물을 앞서 보낸 후 야곱은 그날 밤 그 진에서 그 날 밤을 묵었다. 밤중에 일어나 그의 두 아내와 그의 두 여종과 그의 11명의 아이들을 취하고 얍복나루를 건넜다. 가족과 소유를 다 건너게 한 다음 이제 홀로 얍복 나루에 홀로 남았다.

    지금 이 순간은 그의 삶 속에서 가장 두려운 순간이요 가장 외로운 때입니다. 자신의 모든 삶이 완전하게 거품이 될 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특히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마 인간적으로는 가장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얍복 나루에 홀로 남은 야곱은 그의 인생의 결정적인 갈등을 지나게 됩니다. 그런데 야곱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었다. 야곱은 수호 천사들을 보았던 마하나임에서 밤을 새워 기도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께 기도한다. 지난 이십년간 베푸신 은혜에 감사했다.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처자식을 형 에서의 손에서 구해주실 것을 밤새워 기도한다마하나임은 얍복에서 약 25마일 떨어져 있다. 그 밤은 야곱에게 잠을 못이루는 밤이었다.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할 수 밖에 없는 밤이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밤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니 환도뼈가 위골되었다. 그래도 야곱은 그 사람을 놓지 않으니 그가 말하기를 이제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끔 놓으라 하였을 때 야곱이 말하기를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 때 이 사람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가 야곱이라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우리는 창세기 32장에서 위대한 영적 거인으로 바뀌는 야곱을 보게 됩니다. 그 사건은 야곱이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간섭을 거절해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의 씨름은 하나님과 다투는 인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자기 계획을 세우고 제 멋대로 살아왔던 야곱은 완전한 파산의 상태에서도 하나님과 겨루고 있습니다.

    (32: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이 사람과의 씨름은 야곱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었다. 야곱 앞에는 많은 어려움이 기다렸으나 결국 야곱은 그 어려움들을 이기고 승리하게 됨을 하나님은 가르쳐 주신다. 야곱은 그곳을 브니엘이라 불렀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목숨이 보전되었다는 말이다. 해가 떠올라 야곱이 다리를 절게 되었다는 것은 야곱이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의 체험이었다. 하나님의 만남은 철저히 회개하였습니다. 환도뼈- 넓적다리. 요긴한 뼈로 환도뼈의 근육은 인간의 신체 중에서 가장 강한 부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방식대로 우리를 축복해 주시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삶 중에서 가장 강한 것을 깨뜨리십니다. 환도뼈를 쳐서 위골된 것은 야곱을 회개시키기 위함입니다. 야곱은 지금까지는 인간과 겨루어 이겨 왔습니다. 야곱은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와 남을 넘어뜨리고 살아 왔습니다. 야곱은 형을 넘어뜨리고 복을 빼앗고,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을 받고, 외삼촌도 넘어뜨리고 모든 복을 뺏는 자였습니다. 이제 씨름 대상이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먼저 씨름을 걸은 것입니다. 밤새도록 씨름하였으나 야곱이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야곱이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 위골되었습니다(25). 환도뼈가 위골되므로 절게 되었고 절뚝거렸습니다. 이때 야곱은 에서에게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죽게 생겨서 거기서 고꾸라지고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매달렸던 것이었습니다. (32:26-28)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되었으나 물러서지 않고 목숨 걸고 하나님께 매달려서 결사적으로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고 새 이름인 이스라엘을 주셨습니다. 야곱이라는 옛사람은 다 깨져나가고 새사람인 이스라엘로 거듭나서 새로워졌습니다.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승리하였다. 승리자, 하나님이 다스린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야곱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믿음으로 승리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얍복강변의 기도를 통하여 간사하고 거짓된 야곱이 변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믿음의 승리자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얍복강변의 야곱과 같이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끈질기게, 철저히 회개하고, 결사적으로 기도하며 옛사람을 깨뜨리고 새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새로운 피조물인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아멘.

    이제 야곱은 자신에게 새롭게 주어진 이름과 함께 환도뼈가 뿌러져 다리를 절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그는 실패자요 다리를 저는 비참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는 더 이상 자신의 힘과 꾀로 속이는 자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거룩한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부러진 사람이지만,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를 통해 나타난 삶은 과거의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이스라엘의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야곱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얍복 나루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해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가장 중대한 사건은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겨루다가 환도뼈가 부러진 야곱은 비로소 자기 고집, 자기 생각, 자기 재주, 자기 힘, 자기 뜻대로 살던 교만과 자기 신뢰를 버리게 된 것이다. 회개의 눈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이후에는 자기 힘으로 사는 야곱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며 사는 새사람이 된 것이다. 우리들도 허물많은 야곱이지만이제부터 기도하기를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시기 까지 저는 기도를 쉬지 않겠다는 각오가 우리의 신앙이어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대부분의 사람은 얍복 나루 이전의 야곱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들 역시 어쩌면 얍복 나루 사건 이전의 야곱일지도 모릅니다. 정녕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만나는 때는 바로 이러한 상황입니다. 신나게 자기 욕심을 따라 달려온 인생이 허무로 마치는 것을 볼 때, 또는 죽음 앞에 서게 될 때,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을 겪는 때, 그때는 아무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불신자라면 어쩌면 스스로 생명을 끊고 인생을 마감하여 지옥불에 떨어질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한 야곱이라면 바로 그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삶의 가장 비참한 순간에 사기꾼 야곱을 새 사람 이스라엘로 만드시는 최고의 축복을 주시는 주 하나님이셨습니다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야곱이 있습니다. 이 야곱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내적인 존재를 말합니다. 성경은 이 존재를 옛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속이는 자라고 말합니다. 영원한 것에 가치를 두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는 불신앙의 존재라고 말합니다. 뿌리 깊은 죄성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쓴뿌리라고도 부릅니다.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본능적으로 구하는 것이 야곱입니다.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 꾸려 보려는 독립적인 교만의 본성을 야곱이라고 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되길 원하는 존재가 야곱입니다.

    아무도 내 인생에 간섭하는 것을 원치 않는 존재가 이 무서운 야곱입니다. 계속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여 독립하길 원합니다. 야곱의 삶은 내가 나의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된 야곱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가운데, 자신의 꾀와 힘을 의지하며 살던 그 자리에서 나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야곱의 태생적인 속사람은 20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런 야곱에게 특별히 다가오셔서 야곱의 아집을 깨트리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궁극적으로 환도뼈의 탈골을 통하여서 절뚝거리는 모습이 된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복된 이름으로 바뀌어집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하나님의 일꾼으로의 여정을 가게됩니다. 이후로도 야곱의 후손들인 이스라엘백성들은 역사를 거듭하면서 야곱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세상적인 백성들로 변해가려고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합니다. 새이름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존재와 행태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은혜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관계와 우리의 사명을 새롭게 하사 행복을 누리게 하시는 은혜임을 또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62:4-5) 4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할 것이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할 것이며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할 것이고 쁄라라 하리니 이는 주께서 너를 기뻐하심이라. 네 땅이 마치 결혼한 것과 같이 되리라.

    5 그것은 곧 총각이 처녀를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하나님께서 너를 기뻐하리라. 이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관계였었는가? 분명히 하나님이 선택해서 언약을 맺은 언약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어요.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하므로 말미암아 그 언약을 깨뜨렸어요. 언약을 깨뜨린 그들에게는 진정한 평화도 진정한 행복도 누릴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세상사람들에게 포로가 되고 노예가 되어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그들을 바라 볼때에 마치 그들은 버림받은 자들 같았고 그들의 땅은 황무지와 같았습니다. 관계가 깨지면 생활도 불편해지고 불행해 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관계가 치유되고 회복될 때 범사도 회복되고 치유되는 하나님의 축복을 우리가 덧입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할 것이고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할 것이며 오히려 너를 헵시바라 또는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그리고 하나님께서 너는 주의 손에 있는 관이 될 것이고 이 관은 면류관을 말합니다 또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임이라. 할렐루야.

    여기 헵시바란 말은 나의 기쁨은 그녀 안에 있다 그런 뜻이요. 쁄라라는 말은 결혼한 아내 결혼한 부인 결혼한 여성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제까지는 버림받은 자요 또 그 땅은 황무지처럼 졸딱 망한 피폐한 그런 고통의 환경속에 살 수 박에 없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새이름을 정하여 버림받은 자가 아니라 신랑 신부의 결혼 그 사랑이 넘치는 평화로운 관계로 회복시켜 줄 것이고 황무지 같은 우리의 환경이 하나님의 동산 또는 에덴과 같게 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이 하나님의 평화와 축복이 넘치는 삶으로 만들어 주리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새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할 것이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할 것이며 아니 너를 헵시바라 쁄라라 할것이니라 하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은혜의 환경에서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성도의 삶

    (1)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146:1-2) 1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 오 내 혼아 주를 찬양하라. 2 내가 사는 동안에 주를 찬양하며 내가 생존하는 동안에 노래로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시인은 주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내 영혼아 찬양하라하며 자기 스스로에게 권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생전에 주를 찬양하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시인의 찬양은 하나님을 입으로만 하는 찬양이 아니라 그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다 포함한 전인적인 영혼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이었습니다. 이 같은 찬양을 그는 그의 생전에 곧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계속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일생을 다하도록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생의 목적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시기도 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할 것임이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나의 평생에 해야 할 일로 삼는 사람은 이전 일에 얽매어 살지 않고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얽매인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

     

    (2)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입니다.

    (146:3-5) 3 통치자들을 신뢰하지 말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으며 주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인은 이 시에서 인간의 유한성을 언급하며 인간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그는 하나님의 무한성과 전능성을 부각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시인이 인간을 의지하지 말라고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많은 통치자라 할지라도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유한하고 무능한 존재로서 도울 힘도 없고 구원해 줄 수도 없으며 모든 생각과 계획도 소멸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시고(6), 진실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며(6),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고, 주린 자에게 양식을 주시고, 갇힌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며(7)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을 굽게 하시는 자비롭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9).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주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5) 라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일을 나의 평생에 해야 할 일로 삼는 사람은 그 생각과 계획이 결코 소멸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지는 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나의 평생에 해야 할 일 특별히 금년 한해동안에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일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성도라고 불리워지기를 바랍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두가지 일을 매일 매일 한다는 것을 잊어선 안됩니다.

     바울이 권면합니다. (5:16-17, 24-2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주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비밀은 인생의 진정한 문제는,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야곱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이스라엘로 살 것인가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순간마다 내가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사시고 있는가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를 의식하며 확인하는 것이 믿음의 씨름입니다. 하나님을 대항하던 야곱의 씨름은 환도뼈가 어긋나는 사건을 지나면서 이제는 오직 하나님만을 붙드는 기도의 씨름으로 바뀝니다. 이제 야곱이 살 길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이에 기도의 씨름을 통해 자신을 죽이고 주님이 살게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씨름입니다. 이 씨름을 하면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씨름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기 바랍니다. 그분께 집중하기 바랍니다. 주님만 바라보기 바라본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갈보리 십자가 사건은 바로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사건의 실체입니다. 그곳에서는 한 개인의 죽음의 상황이 아니라, 온 인류의 영원한 멸망의 상황이 십자가 앞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로움과 두려움과 답답함 가운데 죽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활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이스라엘이 되게 하셨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되지 못하고 야곱으로만 사는 자들이 있다면, 그럼에도 아무런 얍복 나루 사건이 죽는 그날까지 없다면 그 사람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으로서 죽음과 함께 지옥불에 떨어질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인데 야곱으로 살아가면서 죄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그 인생을 망하게 하더라도 구원하여 성도로 살게 하실 것입니다. , 필연적으로 얍복 나루 사건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시간 야곱으로 살던 삶을 회개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으로 살겠다고 결심하기 바랍니다. 브니엘의 주 예수님께 진심으로 삶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남은 모든 삶이 순간마다 이 귀한 복음의 비밀을 알아서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살게 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믿음의 삶이 되시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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