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20-2-1 병든 자들에게 의사가 필요하다
    말씀 2020. 2. 2. 16:15

    병든자들을 치료하러 오신 예수님 9:9-13, 5:27-32

     

    메르스 같은 유행병이 다시 등장했습니다. 이 메르스는 2012년 사우디아라비에서 처음 발견한 신종 전염병이었는데 국내에서도 2015년 대규모 확진자를 일으킨 감염병으로 20155월 첫 환자가 발생한 후 20179월까지 186명의 확진 환자와 39명의 사망자를 낸 메르스는 감기처럼 호흡만 같이 해도 전염이 되는 병이다 보니 온 나라가 불안에 떨었던 지난 일들이 생각이 난다.

    2020년에 들어서면서 중국우한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박쥐에서 유래한 사스와 유사한 바이러스라는 것으로 확인했다고 하는데 우한 폐렴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먼저 바이러스의 특성을 알고 대처해야 한다바이러스는 유전물질을 전달하는 단백질로 구성돼 있으며 사람이나 동물 등 생명체에 기생하지 않고는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데 만약 생체에서 벗어나 공기 등 외부로 나오게 되면 1~2시간 안에 소멸된다. 그러나 사람 등 세포 속으로 침투한 바이러스는 자기 유전자를 복제해 폭발적으로 증식하는데, 이를 억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이 증식 과정으로 숙주세포 내에 바이러스가 충분하게 만들어지면 이제는 쓸모없어진 숙주세포를 미련 없이 버리고 다른 숙주세포를 찾기 위해 뛰쳐나가는 바이러스의 대탈주의 충격으로 숙주세포는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2002년 중국에서 발병한 사스의 경우 2년동안 총 8200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으며, 사망자는 775명으로 치사율이 9.4%에 달한 셈이다. 그 때 사스로 인한 피해가 컸던 원인은 중국 당국의 철저한 언론 통제로 그렇게 커졌다고 하는데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하여 중국 당국은 23일부터 우한과 연결되는 버스, 기차, 항공기 등 모든 교통수단의 운항을 중단하는 교통 통제 조치를 취해 다른 지방으로 확산을 막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1일 현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우한폐렴)으로 인해 확진자가 1만명이 넘고 사망한 사람이 260명에 이르고 있는데 하루동안에도 감염자수가 2000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이 전염병은 주변나라로도 조금씩 전파되고 있어 세계 각 국은 중국과의 교류를 차단하기 위해 하나 둘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

    미국은 중국 전역으로의 여행 금지령을 내린데 이어 중국을 방문한 외국인 입국을 전면 금지했다. 아프리카를 비롯해 유럽 등 거의 많은 국가들의 각 항공사들도 중국으로 들어가거나 중국에서 나오는 항공편을 일제히 차단하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국제 항공인 델타항공과 아메리칸에어라인, 유나이티드에어라인 등 미국 대표 항공사들은 베이징과 상하이 등지로 가는 항공편을 절반 가까이 축소하거나 전면 금지하는 조치를 선제적으로 취한 바 있다

    국내에서도 이미 10명의 확진자가 나왔지만 구체적인 치료법이나 백신은 아직 없지만 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람 간 전염이 된 것을 확인했다는 것이 알려졌지만 이 코로나 바이러스는 기침할 때 1m 정도이상을 이동할 수 없다고 하지만 이 코로나바이러스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마스크를 착용하다보니 마스크를 착용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아지면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한산할 정도로 사회분위기가 변하고 있다. 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여파로 경제적 손실도 만만찮다는 것이다. 중국인 해외 관광객이 세계 관광시장에 미치는 충격도 막대하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평소 중국 관광객들로 붐비던 서울 도심의 명동거리는 썰렁해지면서 상인들과 종업원들은 전염병에 대한 걱정과 함께, 불경기가 심해지는 게 아니냐는 걱정까지 하게 됐습니다. 여기에 빗나간 의식도 나타나는데 중국인 교포에 대한 시선도 따갑다는 것이다. 특히 전혀 중국을 방문하지 않았거나 한국에서만 10년 넘게 거주한 중국 동포들에게도 근거 없는 공포감과 두려움을 갖는것에 대해 다소 억울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한국에서 20년째 살고 있는데도 무조건 중국교포들을 병자취급하다보니 우리도 다 같은 사람인데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고 억울해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중국 동포들이 주로 포진해 있는 직종인 방문요양보호사나 가사도우미 등에서도 몇몇 현장으로부터 조선족이나 중국 출신을 보내지 말아 달라는 말을 듣는다며 너무나 사회분위기가 예민해 졌다고 털어놨다.

    인류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르시기를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런 무서운 질병이 발생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로 죽게 된다는 것이 새삼 기억나게 한다. 인류역사이후로 인류는 질병을 치료하고자 현대 의학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어서 인간의 수명은 길어져서 이전보다 더 오래 살고 있지만 한 편으로는 현대 의학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의학의 발전 못지않게 병도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그래서 하루가 다르게 이름 모를 병이 생겨나고 원인을 알 수 없는 희귀한 병이 도처에서 현대인을 위협합니다.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암은 불치의 병이라고 해서 암걸렸다 하면 마치 사형 선고라도 받은 듯 두려워하여 환자에게 숨기기도 하면서 인생을 정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다고 암이 완전히 정복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은 많이 치료되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질병이 발생할 때 마다 속수무책이요, 못 고치는 불치의 병이므로 더 두려워하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인간은 생령이 되어 건강하게 태어났으면 천수를 누리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병균이 인간에게 침입하여도 그것을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면역력과 적응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러나 모든 만물이 늙고 병들어 죽

    는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이 땅에는 수많은 병균과 질병이 존재합니다. 더군다나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타락함으로 세상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온갖 고통과 질병과 환난과 풍파가 엄습했기 때문에 인간은 질병과 싸워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병이라고 하면 우리는 세 가지를 생각합니다.

     

    인간이 겪는 질병

    인간은 태어나면서 생로병사의 길을 가고 있으므로 누구든지 질병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은 죽음의 병에 의해 이 세상을 마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겪는 병은 어떤 병들이 있을까요?

    첫째는, 육신이 겪는 질병입니다. 이것은 병의 대명사처럼 사람들은 몸이 아픈 것을 병이라고 합니다. 이 병을 치료하고자 병원에 가면 육신이 겪는 병명에 따라 외과 내과 피부과 등 진료하는 곳이 다 다릅니다. 이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여야만 우리들의 삶을 이어갈 수 있다.

    둘째는 정신적인 병입니다.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는 이런 질병이 너무나 많습니다. 스트레스가 정신병의 원인이라고 합니다. 이 병을 대수롭게 생각하면 안되는 것이 정신적인 병의 대표적인 우울증으로 인해 비관하고 낙심해서 자살하고 미쳐버리는 경우도 흔합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숫자가 하루에 약 30명 정도라고 하니 정신적인 병이 이처럼 무섭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전 곡성에서 일어난 투신자살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젊은 공무원 지망생이 시험준비에 시달리다 아파트에서 떨어져 투신자살을 했는데 그가 남긴 유서에는 나는 잘난 것이 없다. 너무나 못났고 모자라고 부족하다.’ 그런 말을 남긴 후 옥상에 올라가 투신하는 순간에 하필이면 군청에서 퇴근한 공무원 위에 떨어져서 둘 다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다섯 살 난 아들과 어머니 배속에 있는 자식을 두고 아버지가 어이없게도 비명에 횡사를 한 것입니다. 정신적인 병이 이렇게 무섭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는, 종교적인 병입니다. 잘못된 종교에 빠져서 일생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믿는 종교가 최고라고 여깁니다. 그것이 미신이든지, 사이비든지, 이단이든지, 마귀들을 섬기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믿고 거기에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맹신적이 되어 가정도 버리고 무조건 추종하다가 일생을 망치는 자들은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결국은 죽고 나서야 알게 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종교적인 병 또는 영적인 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합적으로 보면 이 세 가지는 결국 하나로 기인됩니다. 먼저 종교적으로 타락할 때 정신적인 병이 생기고, 정신적인 병이 들어올 때 육체가 병들기 시작합니다. 의사들의 말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질병의 75%가 정신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것은 병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키고 사건에 연루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부부 싸움을 심하게 하고 나서 자동차를 몰고 나가면 사고가 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럴 때는 운전을 삼가던지 어떤 사람은 약국에 가서 진정제를 사 먹고 안정을 찾은 뒤에 운전을 한다고 합니다.

    사실 사람이 병들면 앞이 캄캄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병이 치료할 수 없다는 암이나 신종 바이러스 독감이라고 하면 더욱 절망적일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떤 환자가 수술 직전에 의사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게 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명예도 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없는 것은 건강이니 건강 하나만 빼고 무엇이든지 다 있습니다.’ 그러자 의사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건강 하나만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한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건강이 없다면 돈이 많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명예와 지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건강이 없다면 아무 것도 당신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의사의 눈에는 환자의 명예나 지위나 재산이 보이지 않습니다. 환자의 몸 상태와 환자가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그 사실을 그대로 볼 뿐입니다. 병원에 가면 돈이 많은 사람을 위해서 특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VIP 병동이라고 해서 으리으리하지만 VIP 병실이라고 죽을 사람이 산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의사의 눈에는 특실에 있는 환자나 입원할 돈이 없어서 쩔쩔매는 일반실 환자나 똑 같은 환자입니다. 사실 그대로를 보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 온다고 하여도 정신만 바로 차리고 영혼이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면 얼마든지 무서운 질병도 이겨낼 수 있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2. 병을 치료 하시는 예수님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므로 영이 건강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왜냐하면 예수님은 영혼을 회복시켜주시고 인간을 온전하게 치료하시는 최고의 의사이시기 때문이십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최고의 의사이신가 다음의 이야기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집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심지어 문 근처에도 사람들이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는데 그 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들것에 실려 왔지만 방안에 들어 갈 수 없으므로 그들은 지붕위로 올라가서 지붕을 벗기고 부순 뒤 중풍병환자를 들것에 실려 달아 내렸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환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들이 용서받을지어다 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약점이라도 책잡기 위해 따라다니던 서기관들 중의 하나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 네 죄들이 용서받았다는 것에 대해 이 사람이 감히 하나님만 하시는 말씀을 하다니 신성모독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니 예수님이 아시고 네 죄를 용서받으라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는 말 어느 것이 쉬운 말이냐 하시면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네 자리를 들고 네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 중풍병 환자가 즉시 일어나 그 자리를 들고 그들 모두 앞에서 나아가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라고 세 복음서에 기록하였습니다(9:1-8). 예수님은 어떤 병이든지 주님 앞에 온자들은 그 자리에서 단번에 고쳐주신 최고의 의사였습니다.

     

    (1) 나를 따르라고 세리 마태를 부르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이 가버나움 해변에서 가르치시다가 다른 지역으로 가시는 도중에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서 일하는 것을 보시고 그를 부르십니다. 이 레위는 바로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입니다.

    레위는 마태의 다른 이름으로, 그 당시에는 이름이 2개인 경우가 많았다. 세리는 로마와 헤롯 정부를 대신해서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사람으로서, 무거운 세금으로 고통이 컸던 유대인들에게는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하사 먼저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은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레위 대신에 마태라고 쓰여 있습니다. 아마도 알패오의 아들의 진짜 이름은 마태이고 레위는 마태가 속한 지파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본래 레위 지파는 제사를 드리고 성전을 관리하는 거룩한 사람들인데, 어쩐 일인지 지금 마태는 세관에 앉아 있다는 말은 레위가 지금 세관에서 돈을 세고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레위는 삭개오와 같은 세리장이가 아니고, 그 밑에서 일하는 하급 세리 중 한 명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거룩한 일을 해야 할 사람이 지금 로마를 대신해서 세금을 걷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이 거두어서 자기의 잇속을 채웠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로마제국과 성전을 대신해서 세금을 걷었을 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돈을 착취까지 해면서 부를 축적한 자들이 때문에 예수님 당시 백성들은 세리들에 대해서 로마의 앞잡이 매국노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레위 지파 사람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고 말합니다. 돈을 좋아해서 세리가 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세리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본래는 거룩한 레위지파에서 태어났지만 지금은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세관 일을 보고 있는 레위, 신앙 양심과 돈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레위를 보시고 예수께서는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를 부르심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신 제 1차 소명에 이은 제 2차 소명으로서 1차로 부르신 사람들이 갈릴리 해변의 어부임에 반하여 2차로 부르심을 받은 마태는 이 해변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였던 것입니다. 당시에 세리라고 하면 창녀와 더불어 천대와 멸시를 받는 신분이었습니다. 돈은 잘 벌었지만 사람들로부터 매국노, 반민족주의자, 폭행자, 탈취자, 아첨꾼 등으로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부류들이 세리였습니다. 정말 세리는 유대인들의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리와 죄인이라는 말이 함께 사용되었고 세리와 창기는 유대 사회의 대표적인 죄인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들은 비율법적이고 비도덕적인 사람들로 낙인이 찍혀 법정에서 증인이 될 자격도 상실되었고, 회당에서는 출교를 당하여 완전히 유대 사회에서 소외된 고독한 삶을 살았습니다. 문둥이를 사람들이 기피하듯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아예 기피하였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늘 어떻게 이런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고 고민을 하는 생각에 잠겼던 것입니다. 마침 그 때에 랍비이신 예수님이 그 앞을 지나가시면서 마태의 눈빛을 보고 예수님은 그의 마음의 고통과 번민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세리 마태의 신분을 바꾸어줄 수 없으며 그가 세리를 그만두고 다른 분야에 종사한다고 해도 한 번 죄인은 영원한 죄인이라는 세리라는 꼬리표를 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번 변절자는 영원한 변절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리 마태의 깊은 갈등이요 고민에 빠졌던 그때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 길 가시다 세금받는 곳에 앉아 있는 마태를 보시고 그에게 나를 따르라는(5:27) 주님의 말씀은 마태의 고민을 단번에 해결해 주셨습니다. ‘나를 따르라(9:9)’는 그 말에 마태는 너무나 기뻐서 저가 하던 일을 다 그 자리에 두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세리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아코루데이 모이라는 이 말은 단 한 번의 호출이 아닌 계속적으로, 끝까지,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행위를 좇을 것을 명령한 제자로서의 부르심입니다. 더욱이 이 명령은 레위가 현재까지 수행하고 있던 직업을 완전히 포기하고 질적으로 새로운 직업 즉 사람을 낚는 어부를 선택하라는 생의 변화를 요구하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만약에 마태가 평소 세리를 벗어나려는 고민이 없었더라면 주의 부르심에 상당히 주저했을 것입니다. 베드로 같은 어부들은 예수를 따르다가 쉽게 자기 직업으로 되돌아갈 수 있지만 마태는 자기의 직업을 포기하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세리였습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욕을 먹더라도 돈 벌수 있는 직업인 세리를 선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태는 한순간에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위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사람취급을 받아보지 못한 마태로서는 예수라는 랍비가 자기를 부르시니 그의 마음은 너무 기뻤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가 자기의 집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거대한 잔치를 벌렸는데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이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리가 따로 있고 죄인이 따로 있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동격을 나타내는 접속사로 보아서 세리가 곧 죄인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한 해석일 것입니다. 기껏해야 만나는 사람들이 같은 처지에 있는 세리들끼리만 교제를 나눌 뿐이니 오늘 같은 잔치날에 다 초청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행사는 예수님을 모시고 여러 사람들과 식사하는 일이었다. 랍비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셨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마태의 마음이 활짝 열리게 되었고, 그래서 이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집에 초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마태의 동류들인 세리들과 손가락질 받는 죄인들도 그분과 함께 식탁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해 비난을 하기를 너희 선생은 어째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하는 비난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유행하던 격언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단정적으로 선언하셨습니다.

    (9:12) 온전한 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든 자들에게는 필요하니라.

    (2:17)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 마태를 치료하신 예수님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두드러진 사역 가운데 하나는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시는 신유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의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치시는 것보다도 더 본질적인 사역의 국면은 바로 영적으로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육신의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치료사역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우리의 영혼을 고치시기 위해서 오신 영적인 의사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육신의 질병을 통해 영혼의 질병의 심각성을 깨닫고 육신의 질병을 고쳐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경험하면서 영혼도 고치실 수 있는 그분이기에 우리의 육신 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그분을 의지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병든 자를 고치시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질병은 우리의 몸에 장애를 주는 것인데 이런 영육간의 장애를 온전케 하실 수 있는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고쳐서 그야말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궤적은 우리 자신의 내면이 새롭게 고쳐지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질병은 종종 의사들이 고쳐주기도 하지만 영혼의 질병은 의사들이 고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고치실 수 있는 질병입니다. 육신은 길어야 7-80년 동안 우리와 함께 하기에 길게 보면 일회용 소모품이지만 우리의 영혼은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니 육신과 영혼을 즉 우리 인생을 온전히 건강하게 고쳐지기 위해선 바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의사가 필요치 않는 건강한 자들이란 어떤 종교적 도움도 필요하지 않는 일종의 종교적 교만한 자를 빗댄 말입니다. 특히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치유 은혜를 거부하는 자를 말합니다. 사실 주님은 자기의 의를 추구하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병든 자 곧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죄없는 인간이 어디 있나요? 모두가 죄인이므로 인간이 주님의 부르심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교만한 자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고쳐주시겠다는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주님의 오신 목적은 죄인을 불러 죄를 용서하여주시고 구원시키고자 오신 것입니다.

    (1:18) 주가 말하노라. 이제 오라. 우리가 함께 변론하자. 너희 죄들이 주홍 같이 붉을지라도 눈같이 희게 될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주님은 죄인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대목을 놓쳐서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죄인인 세리 마태는 자기가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회당도 출교되어 갈 수도 없으며 매국노라는 비난도 받으며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도 인정할 수 없는 이 마음의 병을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 고민도 하고 방법을 찾아보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몸부림도 쳐봤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병든 것을 몰라서 세리와 함께 식사하는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9:11)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느냐?

    천한 사람들과 사귀고 먹고 지낸다는 비난과 질책을 퍼붓습니다. 실제로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 자신들도 병자인데 종교적인 교만 때문에 자기가 병자인줄 모르고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또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처럼 자신이 병자인줄 알고 있는 사람과, 병자인 줄 모르는 바리새인 외에 그저 구경만 하는 동료 세리들인 구경꾼들도 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 앞에 나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비난도 못하면서 그저 생각 없이 구경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레위는 즉시 일어나 주를 좇았습니다.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시간과 부르시는 시간은 주님의 시간입니다. 이 주님의 시간은 지나가는 시간이므로 즉시 응답하지 않으면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께서 피조물에게 명령하시는 시간이므로 즉각적인 응답만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레위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세금받는 곳에 앉아 있는 자기를 보고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 즉시로 응답하였고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자기의 집으로 영접하고 잔치를 하였습니다. 레위의 이 같은 행동은 네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그의 지금까지의 수치스러운 삶을 청산한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자기를 불러 주신 예수께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셋째, 동료 세리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전도하는 의미입니다.

    넷째, 가족과 이별을 기념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엘리사가 엘리야의 부름을 받고 즉시 밭을 갈고 있던 소를 잡아 잔치를 하고 부모와 이별했던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레위는 사치와 부의 길을 버리고 가난한 길을 선택했으며 이 땅의 죄인의 길을 버리고 예수님을 스승으로 둔 사도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세리 레위가 아니라 사도 마태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실 때에 사람들에게 첫 번째로 주신 인상은 의사입니다. 많은 환자들을 어루만져 주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의원 예수, 치유자 예수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몸과 영혼과 인생의 삶의 본질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의사이신 예수님을 생각해 봅니다. 의사는 언제나 환자의 현실만을 보는 것이지 환자가 얼마나 많이 아는지,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있는지, 또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이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의사의 눈에는 환자 그 자체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환자를 보실 때에 세 가지 관점에서 진단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죄와 관련해서 환자를 보았습니다.

    (9:2)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아들아 네 죄들을 용서받을 지어다. 병이라는 것이 죄와 관련이 있음을 예수님은 보신 것입니다. 사실 인간에게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병 때문에 고생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 사유함이 먼저입니다. 육신의 병을 고침 받기 전에 먼저 죄 사유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 계신 곳의 지붕을 뜯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달아 내린 그들의 믿음이 죄 사유함을 받은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과 관련해서 병자를 보아야 합니다.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 곧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경륜이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빛으로 오신 분임을 증거하는 역할을 담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빛을 지으시고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으며 눈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일에 쓰임을 받기 위해 태어 날 때부터 눈먼 소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셋째는, 마귀와 관련해서 병자를 보아야 합니다.

    (4:40-41) 해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여러 사람에게서 마귀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가 그리스도인 줄 앎이라.

    하나님의 자녀가 죄와 악마의 사슬에 매여서 부자유한 가운데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종합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병을 하나의 현상으로, 그리고 하나의 표적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은 표적이요, 그 속 깊은 곳에 원인이 있습니다. 실제로 의사는 환자가 어디 아프다고 하는 그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아픔의 뒤에 숨겨져 있는 병의 원인을 찾기 위하여 수고합니다. 며칠을 두고 검사하고 사진 찍고 여러 가지 실험을 하면서 숨겨진 원인을 찾아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환자는 자기가 아픈 것만 알고 병의 원인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병의 원인을 모르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병의 원인과 처방에 대해 설명을 해줄 때 환자는 의사의 진단을 받아들여야 치료가 가능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깊은 근원적 원인을 시인해야 하며 주님의 판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현상, 모든 죄, 모든 고통을 다 병리적으로 진단하십니다. 그래서 이 영적인 질병이라고 하시면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자로 보십니다. 여기에 의원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3) 치료하시는 과정

    예수님의 치료 과정을 살펴봅니다. 먼저 병석에 누운 환자처럼 괴로워하며 세금을 징수하고 있는 마태를 그 현장에서 불러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서 유하십니다. 무조건 따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함께 거하십니다. 죄인으로 취급당하던 인간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고 사람들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십니다. 이제 세리 레위는 일반 백성들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두 어울려 먹고 마시고 같이 즐거워합니다. 유대인의 인권이 회복된 것입니다. 이제는 세리가 아닙니다. 이제는 매국노가 아니며, 패역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거룩한 족속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정을 구원해 주십니다. 몸만 산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관계가 온전히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바리새인들 앞에서 당당히 먹고 마십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질투할 만큼 마태는 대단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리 레위의 영혼이 온전히 치료받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참 선한 의원이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 축복이었습니다. 아멘.

    세리 마태가 참으로 축복을 받은 것은 마태는 예수님께로 가서 죄용서함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거하는 처소에 예수님을 모시고 갔을 때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 즉 자신과 가까이 지내던 다른 세리들도 불렀으니 그들도 자신과 같은 죄인들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의 뒤를 밟으며 말과 행위를 기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알아본 사람은 오직 마태 하나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사람들이 적다고 하였는데 마태의 집에 그렇게 많이들 참석을 하였고 예수님께서 건강한 자들은 의사가 필요 없지만 병든 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시면서 자신은 병든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다고 하였음에도 이 진리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의사는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의사가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 모든 병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병에 걸려있음을 모르는 사람이나 알면서도 끝까지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치 않다. 또한 자신이 병에 걸려있으나 의사도 고치지 못한다고 생각하거나 자신 스스로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에게도 필요 없다. 오직 그들 가운데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병에서 낫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영적인 의원으로서 자신의 안에 있는 그 욕심과 교만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죄를 짓고 있으며 그 죄에 묶여 영원한 사망으로 들어가고 있는 자들 가운데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셨다. 행여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부르신다 하여도 그들의 마음과 인격이 영적인 의원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 영적인 병자들 가운데 오직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용서받기 원하는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려고 오셨다.

     

    3.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병든 자라야 의사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시므로 마태와 함께 있는 자들과 또한 그리스도의 약점이라도 발견하고자 그를 따르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돌이키기를 구하셨다. 그러나 마태와 같은 세리들은 돌이킬 것들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자리가 더욱 좋으니 돌이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안되었고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그들의 위치가 그들을 돌이키지 않게 했다. 그리하여 오로지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마태만 그리스도를 좇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세리들과 종교지도자들을 부르셨으나 그들은 그 영적인 의원을 거부했다. 썩어질 육과 사망으로 들어갈 이 세상을 자신의 영원한 생명보다 더 사랑하여 자신의 마음을 돌이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어느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이 세상 자체가 죄악의 도시로 더러운 죄악의 집합소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생각과 이 세상에서 돌이켜 영적인 의원을 따르는 자만이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있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며 고침 받은 그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그 거룩한 육체의 생명에 이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하신 말씀인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는(9:12-13) 이 말씀의 뜻은 이렇습니다.

    너희는 그 성전의 회당에 와서 양을 잡고 소를 잡고 비둘기를 잡고 온갖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는 도다. 하지만 제사를 드린 후에 그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자기의 그 죄악된 삶을 사는 도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을 하는 것보다 그 죄악 한 가지를 이기고 거룩하게 되는 그런 자를 아버지께서는 더 원하시는 도다. 즉 하나님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말씀이 무엇인지 배우라는 이 말씀은 사실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구약 호세아서 66절에서 나오는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주 하나님으로 명명되어진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이미 오래 전 선지자들에게 들려주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되풀이 하셨습니다. 긍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엘로스라고 하는 단어는 정확하게 히브리어 헷세드의 번역입니다.

    헷세드는 그 사람의 좋은 점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라 가치 없고, 비천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헷세드라는 사랑입니다. 이런 놀라운 사랑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들에게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셨기에 예수님은 이 사랑의 화신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 바리새인들은 제사가 이 사랑보다 훨씬 더 큰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사를 하나님 앞에 향기롭게 올라가게 만드는 그것이 헷세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힘입어 사람들을 그 헷세드로 사랑하는 것이 제사를 주신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를 이 헷세드보다도 더 높게 생각하는 것은 목적과 수단이 바꾸어진 것이요, 본말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예배와 종교 생활 속에 깃들여야할 가장 근본적인 사랑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언제쯤 알 게 될까? 다음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잘못된 길을 걸으며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어린 자식이 결국 아비에게 살이 찢어지는 매를 맞을 때 철없는 자식은 아비의 마음을 모르니 때릴 때 고개를 숙이는 아비를 보고는 왜 내가 맞는데 아빠가 울어요. 라고 울면서 말한다. 하지만 그 아이가 나중에 커서 자식을 낳으면 자식을 때리는 부모의 마음은 매를 맞을 때의 아픔보다 10배 더 아프기에 부모 눈에서 눈물이 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마찬가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사망으로 이끄는 죄와 멸망의 세상길에서 돌이키지 않는 영혼의 육체에 사랑의 매를 때리시고 당신은 사람의 몸이 느끼는 그 아픔과 해산할 때의 고통보다 100배의 아픔과 고통을 겪으시면서 기다리신다. 그러나 자식을 길러본 사람은 부모자식간에 그런 애틋한 마음을 아버지께서 주셨음을 알아도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함은 둘째사람을 향한 아버지의 뜻이 거룩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되 태초에 아버지의 품에 함께 계셨던 독생자께서는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아시기에 이 말씀을 통해 거듭난 영혼들 가운데 한 영혼이라도 더 자신의 속에 죄가 거하고 있음을 깨닫고 자신의 생각과 의와 이 헛된 세상으로부터 십자가 아래로 나아와 그리스도를 따르며 거룩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예수님 당시 로마의 편에 섰던 세리는 자기민족 사람들의 집이나 그들의 사업에 가서 세금을 걷되 세금을 떼어갈 때마다 자신을 위해 항상 귀한 것 한 가지씩을 가져갔다. 그들은 이렇게 법이 정한 만큼만을 받지 않고 더 많이 받아서 챙겼으며 또한 세금거두는 그 일을 한 대가를 로마로부터 댓가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매국노나 죄인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나라를 구하고자 의로운 일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태도 그들과 같이 두루 다니며 세금을 얻어 자기의 육적인 욕심을 채우면서 죄와 세상에 빠져 살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돈 벌레에다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던 마태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리스도께로 오직 죄의 용서함을 구하고자 자신의 집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갔다. 뿐만 아니라 자기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또한 자신과 가까이 지내던 다른 높은 세리들도 불렀으니 그들도 자신처럼 스스로를 죄인으로 깨닫고 있을 것임을 예단했기 때문이다물론 그리스도의 뒤를 밟으며 말과 행위를 기록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그 자리에 함께 했으나 그들은 자기들이 그곳에 온 목적을 이루고자 어떠한 말을 던져서 그리스도를 곤란에 빠뜨릴까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들은 우선 자신들이 죄인이나 세리와는 상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또한 자신들은 백성들의 영혼을 인도하며 육의 욕심과 영광을 취하고 있었으나 오히려 자신을 거룩한 주의 종으로 여겼으니 지금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있는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율법을 어긴 죄인들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더러운 자라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뿐만 아니라 마태의 초청을 받아 그 자리에 온 자들과 또한 자신을 해하려고 그곳에 함께 있는 종교지도자들도 공히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말씀을 전하셨다. 그러므로 의사는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필요하되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모든 병자들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의원인 그리스도께서도 사람이 썩어질 육의 욕심과 자신을 높이려는 교만으로 인하여 죄들을 범했으며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죄를 짓고 결국 영원한 사망으로 들어가고 있는 자들 가운데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발을 대고 걸어 다니는 모든 영적인 병자들 중에 오직 죄사함 받기 원하는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려고 오셨다고 하였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고자 당신이 오셨다는 말씀을 하시므로 마태의 초대를 받은 자들과 또한 인자를 따라다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이제는 돌이키기를 원하셨지만 마태를 제외한 영혼들은 돌이킬 것들을 족히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앉은 그 자리들이 좋았으니 예수그리스도를 좇는 자가 없었고 성경을 잘아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도 그들의 교만한 성직자라는 자리가 그들을 돌이키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살고자하는 마음을 품고 있던 마태만 그 말씀에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모든 것을 그 자리에 내려놓고 예수그리스도를 좇았던 것이다.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인간 스스로는 의인이 될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은 의인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인생살면서 이런 죄와 의에 대하여 한 두 번씩은 생각하면서도 늘 우리 삶속에 일어나는 죄로 인하여 우리는 영적으로는 건강하지 않다고 볼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늘 영적건강보다는 육적으로 건강하게 살기를 소원하고 있다. 육신의 건강에는 늘 관심들이 많다. 그래서 의사가 사람들의 건강상태를 점검할 때 하는 말들중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다.

    당신은 건강하십니까? 팔 다리에 이상이 없고 튼튼하십니까?

    혈당 조절도 잘되고 혈압도 정상입니까? 숨 쉬는데 어려움은 없나요?

    건강검진에도 이상없고 스스로 건강에 자신이 있나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당신에게 의사는 필요 없겠습니다.

    만일 이렇게 건강하기만 하다면 의사는 없어도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장담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건강하더라도 내일은 어찌 될지 모르니까요. 아니 지금까지 건강하더라도 병들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당신이 모르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고요. 그러니 장담은 금물입니다. 더구나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변하는 당신의 몸은 어쩌하시렵니까? 지금 아무리 건강하다고 당신에게 오는 세월은 어쩔 수 없지요. 이런 위로의 말들이 나에 대해 누군가 염려 해주는 말이라고 생각해 보자.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유익한 말씀중 하나는 방금 위에서 말했듯이 건강에 관한 말씀인데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깨닫는 은혜가 있습니다. (9:12, 2:17, 5:31)에 나오는 말씀인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주님을 비난하던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당신들은 어찌하여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냐고 물었을 때 주님이 답변하신 말씀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의원이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려 왔노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하늘 보좌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건강한 백성 되게 하시려고 오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병들었으면서도 스스로 생각하기를 건강하다고 하는 착각에서 벗어나 병든 심령임을 인정하고 즉 죄인임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나오면 건강한 인생과 함께 천국의 삶으로 옮겨간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것 같지만 병들었고 기쁜 것 같지만 슬프며 쾌활한 것 같으나 우울한 인생을 그 깊은 고민에서 건지시려 오신 예수님을 맞이하면 더할 나위없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삶의 고민이 깊어지면 사는 게 재미없습니다. 인생들의 고민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면 인생이 달라질 겁니다. 그런데 그런 고민을 내려놓는 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피를 토하며 외칩니다.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1:5-6) 인생의 머리부터 발바닥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죄인 인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든 자들보다는 건강한 자들을 더 좋아하고 죄인들보다는 의인들을 더 좋아하고 마음이 상한 자들 보다는 마음이 편한 자들을 더 좋아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정 반대로 병든 자들에게 쓸데 있는 분으로, 의인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시는 분으로, 그리고 마음이 상한 자들을 부르시는 분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마지막 순간에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에게 분노와 저주대신 긍휼을 베푸시면서 구원의 손길을 펴셨고 참으로 건강한 자들보다는 병든 자들을, 의인들보다는 죄인들을, 부르셔서 주님의 귀중한 일꾼들로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연약한 우리들을 치유하셔서 건강하게 살도록 능히 도우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기자인 마태가 마태복음 8:17절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시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신 구주시요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천국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이 믿고 의지해야 할 구주시요 주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이 왔을 때 병을 고쳐주셨고 죄인들을 부르시고 저들의 죄를 사해주셨고 상처 받은 사람들의 상처를 싸매어주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병중에 있는 자들에게 위로와 사랑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베푸시고, 또 죄 때문에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더 넘치는 은혜를 베푸시고, 마음에 상함을 입고 사는 사람들에게 평안의 은혜를 더욱 더 풍성하게 베풒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넓고 깊고 오묘하다고 생각합니다. 병든 자들과 죄인들과 상처받은 자들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으려면 예수님께 회개의 기도와 예배에 전력을 다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만을 바라보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