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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여호와이레의 복을 받자말씀 2020. 1. 12. 18:51
여호와 이레의 복을 받자 창 22 : 1 - 19
경자년 새해가 시작한지도 벌써 2주가 되었지만 아직도 새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구정이 오려면 아직도 2주 정도 남아있으므로 새해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2020년을 새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2019년은 지나갔고 2020년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2020년이 1년 내내 새해를 맞은 새날이 될 수 있으려면 날마다 새해의 소망과 벅찬 감격이 가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채봉 시인의 <첫 마음>이란 시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1월1일 새해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는 것이다. 새해 첫날인 1월1일 아침에 처음 마음먹었던 그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그 마음은 언제나 새 마음이기에 날마다 새롭다는 말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새롭게 하신 2020년에도 우리의 신앙도 나날이 새로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의 정도가 올해에는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에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믿는 사람들의 아버지라고 여겨지는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해 알아보고 우리들 신앙의 모델로 삼고자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가 적어도 서너번의 시험을 통과하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세상일도 시험에 합격하면 영광과 찬사를 받듯이 아브라함이 믿음이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은 것은 시험을 통과한 후 그렇게 불리워진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받았던 시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아브라함이 받았던 시험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는 창세기 12장 1-2절부터 나오는데 주께서 아브람에게 하시는 말씀이 너는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 집에서 나와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1). 그리고 말씀에 순종한다면 내가 너로부터 큰 민족을 만들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크게 하리니 네가 복이 되리라는 말씀이십니다(2). 아브라함이 받았던 첫 번째 시험은 부모 고향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간다면 너로 큰 민족을 만들어 주는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인데 이 때 아브람의 나이는 75세였는데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갈대아우르는 문명이 발달되어 생활하기 좋은 곳인데 이런 곳을 두고서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 땅으로 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아브람은 주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대로 자신의 고향 하란을 떠났다는 것 자체가 아브람은 주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는 처음부터 순종하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의 모든 과일을 먹을 수 있으나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만은 먹지 말라. 먹는 날에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건만 아담과 하와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해 죄를 짓게 되었고 죄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무조건 순종하니 이제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이었습니다. 새로운 삶이란 성경말씀대로 라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였듯이 중요한 것은 우리들도 그리스도안에서 순종의 삶을 산다면 이것이 바로 새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해 아래는 새것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제 떠올랐던 태양이 오늘 떠올라오고 작년 해 저물었던 달이 오늘 다시 지게 되는데 무엇을 가리켜 새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입니다. 새것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이 시작 된다면 이것이 정말로 새로운 삶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아브람은 잠시 살았던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주님이 아브람에게 찾아 오셔서 (1)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니라고 하신 것은 분명히 떠날 것이냐 말것이냐? 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조상대대로 살아왔으며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고향(갈대아우르, 메소포타미아)을 떠나 인도하는 대로 간다면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한다는 것을 온전히 믿었던 아브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가나안에 들어가 보니 좋은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전에 살았던 하란과는 비교가 안될정도로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창13:1). 그래서 이 기근을 피하려 남쪽 이집트 땅까지 내려갔다가 이번에는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아내까지 빼앗길 뻔 한 위기까지 겪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위기를 넘기고 다시 가나안땅으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험은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된다는 시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가나안에 들어갔었을 때 이 가나안땅을 네 씨에게 주시겠다는 말씀(12:7)을 들은 후 기근을 피해 애굽까지 갔다 다시 가나안으로 올라와 살지만 주시기로 약속한 자식을 얻지 못하였을 때에도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다시한번 말씀하시기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는 말씀을 주신 후(창15:4)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끌고 밖에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에서(창15:5) 자녀를 생산할 능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네게 후사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느냐? 하는 시험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람을 처음 부르셨을 때에도 또 가나안에 들어와 이 가나안 땅을 아브람에게 주었을 때에도 네 씨에서 나온 자가 이 땅을 상속할 것이라고 하였는데도 또 네 씨에서 나온 자손들이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번성할 것이고 그들에게서 여러 왕족과 민족이 나오리라고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말씀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사래의 여종인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게 되었는데 이때 아브람의 나이는 85세였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참으로 시험을 통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나이는 이미 90을 넘어100세로 가까이 되는데 이 약속한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마엘을 얻으 후 아브람이 나이 99세 되었을 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다시 나타나 내년 이맘 때에는 사래에게서 네 씨를 얻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브람이란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사래도 사라라고 부르라고 하였는데 이들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 사라는 많은 열국의 어머니라는 뜻으로 이름을 고친 것인데 이때 아브라함은 이 말을 온전히 믿었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네 씨에서 나오는 자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다는 것을 믿었다면 이스마엘도 얻지 않았을 테인데 인간이란 신이 아닌이상 이렇게 실수도 하며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어느 것 하나 예사 시험이 아니었으나 아브라함은 단순-우직하게 그 두 시험인 친척 고향을 떠난 것이나 내년 이맘 때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굳게 믿으면서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아브라함이 100세 아내 사라가 90세 되던 해 드디어 아들 이삭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처음에 약속하신 후 25년 만에 이 약속이 이루어 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도 기도응답이 금방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고 하나님 원망할 것이 아니라 아 우리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약속받은지 25년 만에 그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하신 것은 가장 적당한 때가 되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번 셋째시험은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바치라는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앞에 두 시험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시험이었습니다. 앞에 두 시험도 웬 만한 믿음 없이는 통과할 수 없는 시험이었으나 셋째 시험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평면적 차원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가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삼차원적 시험이었습니다. 즉 첫째, 둘째 시험의 목적이 이삭 이었다면 이번엔 그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은 첫째, 둘째 시험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인데 정말 사람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아브라함은 그 절대 무의미한 믿음까지 믿음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에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 축복은 바로 오늘 날 성도들이 정말 예수그리스도를 진실히 믿는다면 이 땅을 떠난 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형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누구든지 천국의 보좌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고자 예수님을 주로 믿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누가 들어갈 수 있는가? 이시간 아브라함이 세 번째 시험을 어떻게 통과한 것을 알고 나면 나도 아브라함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하겠다고 다짐하는 성도만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셋째 시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합니다. 세 번째 시험은 하나님이 그냥 이삭이라고 하시지 않고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시험’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아들 이었으므로 이삭이야말로 아브라함에게는 소중한 아들 정도가 아니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아브라함이 자기 생명 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아들이었는데 하나님은 그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번제가 어떤 제사인지 알고 계십니까? 레위기 1:5-9 숫 송아지를 번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번제라는 뜻을 글자 자체로 태워서 드리는 헌물이라는 것입니다.
(5) 그는 주 앞에서 그 수소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아들들인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6) 그는 또 번제 헌물의 가죽을 벗기고 그것을 여러 조각으로 자를 것이요(각을 뜰 것이요) (7) 제사장 아론의 아들들은 제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가지런히 놓고 (8) 아론의 아들들인 제사장들은 그 조각들과 머리와 기름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에 가지런히 놓으려니와 (9) 그가 그것의 내장과 다리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전부를 제단 위에서 태우는 희생물로 곧 불로 태워 주께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는 헌물로 삼을지니라. 지금까지 말씀한 것이 번제인데 이런 번제를 드릴려면 일단 번제물을 잡아 죽인 다음 번제물의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또 번제물의 가죽은 벗기고, 살은 토막 토막 각을 뜬 다음에는 내장도 꺼내고 다리도 잘라서 씻은 후에는 이 모두를 제단 위에 올려놓고 남김없이 불로 태우는 것이 번제입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이렇게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자식이 아프면 대신 아프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며 자식이 죽을 병에 걸리면 대신 죽어도 좋다고 기도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100세에 얻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그 시험에 아브라함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이삭을 번제물로 드렸던 아브라함(창22:1-13)
(창22:3-4)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일어나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여 주신 곳으로 갔더라 (4) 그 때에 셋째 날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한 시험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는 시험이었지만 아브라함은 이것이 시험인 줄 몰랐으며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이니 바치겠다고 실천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세 번째 시험을 어떻게 실행하였는가 한번 알아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는 아내 사라와는 이것에 대해 상의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내에게 말한다면 당연히 막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내 사라에게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와 이삭이 모리아 산에 가서 제사하러 갈 것이라 하면서 아브라함은 지체없이 그 다음날 아침에 모리아 산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미적거리며 고민하다가 하루 이틀 보내다 보면 마음 약해져서 순종하지 못할 수도 있으므로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번제에 쓸 나무를 싣고 이삭과 함께 하나님이 일러주신 모리아 산을 향해 떠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 시험을 치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브엘세바인 집에서 모리아 산까지는 70km 거리였으므로 3일 길을 가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험은 한 순간의 결단을 요구하는 시험이 아니라 3일간 모든 의지와 마음을 드리는 시험입니다. 그냥 집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했다면 갈등할 시간도 없었을 수도 있지만 번제로 드릴 준비를 하고 70km거리를 걸어서 3일 가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오갔겠는가?
3일째 되는 날 아침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이제 그 산이 멀리 보입니다.
한국과 미국을 비행기 타고 오갈 때 가장 반가운 소식은 목적지를 30분 남겨놓고 나오는 기내방송입니다. 이제 30분만 지나면 공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을 듣으면 피곤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마음도 설레이고 즐거워집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마음은 목적지가 가까울수록 더 괴롭고 더 아팠을 겁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되어갈 때,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로 드려야 하는 시간이 가까이 오고 있기 때문에 점점 더 고통스러웠을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이 3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던 죽음의 3일과 비교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이삭의 번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네가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려고 할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나는 안다. 나도 내 아들 예수를 내어줄 때 나도 그랬어’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까요?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을 바라보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도 골고다 언덕을 바라보시면서 '저 곳이 내 아들 예수가 죽을 곳이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내 마음 알겠지.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브라함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삭이 예수님을 예표하는 신앙의 인물이 된 것입니다. 집에서 출발한지 3일째 되는 날 아브라함과 이삭이 드디어 모리아 산밑에 도착 했습니다.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무르라. 나와 아이는 저기에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다시 오리라, 하고는 이삭은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아브라함은 불을 준비해서 둘이 갑니다. 이 때 아브라함이 한 말은 하나님께 경배한 후 나와 아이는 너희에게 다시 오리라고 종들에게 한 말이 너무 중요합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산에 올라가는데 번제는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를 태우는 제사인데 이삭과 함께 내려 올 테니 기다리라고 말한 것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아브라함이 거짓말 했다고 합니다. 이삭이 뻔히 듣고 있는데 어떻게 사실대로 말 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 정말 이삭 때문에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한 것일까요?
히브리서 11:17-19 말씀입니다. (17)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삭을 바쳤으니 곧 약속들을 받은 그가 자기의 독생자를 바쳤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이삭 안에서 네 씨가 부름을 받으리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 말씀에 보증을 주는 말씀이 이사야에 있습니다.
(사44:26)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의 말을 확증하며 자기 사자들의 계획을 이행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인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이삭을 번제로 드려도 하나님께서는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질 줄을 믿었던 것입니다. 즉 부활의 신앙을 가졌던 아브라함이었기에 종들에게 나와 아이가 다시 오리라고 말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 말에 확증을 해주신 것입니다.
아니 이삭이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생식 능력이 불가능한 100세 된 아브라함과 90세가 되어 이미 경수가 끊어진지 오래된 아내 사라가 자식을 낳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삭을 번제물로 바쳐도 그 이삭을 통해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번성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온전히 믿었던 믿음의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설령 번제를 통해 이삭이 죽는다 해도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주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한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처음 믿었던 대로 끝까지 믿는 것입니다. 잘 나갈 때만 믿고 어려울 때는 믿지 못한다면 그런 믿음에 무슨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상황을 보고 믿은 것이 하니라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믿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끝까지 믿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고향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실 때 믿었던 그 첫 믿음으로 지금까지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시간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믿음의 이야기는 절정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마침내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의 가슴에 비수를 꼿는 질문을 합니다.
(창22: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여기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번제할 나무를 지고 가는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물었던 이 질문은 아브라함의 가슴에 비수를 꼿는 질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주저없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8) 번제 헌물로 쓸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시리라고 어떻게 예기치 않았던 질문에 아브라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다는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할 말을 입에 주신 줄 믿습니다. 우리들도 어떤 상황에 부딪친다 하더라도 하나님만 굳게 믿는다면 그 상황에 맞는 말을 하리라고 믿습니다. 드디어 시험의 절정의 때가 왔습니다.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위에 이삭을 결박해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는 것입니다. 이때 이삭의 나이는 번제할 나무를 지고 산에 올라갈 정도로 17세 정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100세에 이삭을 낳은 아브라함의 나이는 117세로 늙고 힘없는 노인아니겠어요? 17세의 혈기왕성한 이삭이 힘없는 노인인 아버지라도 자기를 죽이겠다고 결박하면 그거 하나 뿌리치지 못하겠습니까? 얼마든지 제단 위에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순순히 결박을 당한체로 번제단 위에 누웠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습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한 게 아니라 이삭이 스스로 결박당한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마27:42) 그가 남들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 것이라.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겠노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능치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체포할 당시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보내어 예수님을 잡으러 온 로마의 군인들이나 성전에서 보낸 하속들을 단숨에 제압하실 수도 있었고 지금 예수님은 얼마든지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모든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결코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면서 십자가의 제물이 되어 죽기까지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았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오늘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인류에게 참된 소망과 영원한 생명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해 두 손과 두 발이 못박히신 채로 마지막 피 한방울 다 쏟으실 때까지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고 죽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얼마든지 힘없는 노인인 아브라함을 뿌리치고 제단 위에서 내려올 수 있었지만, 아버지에게 또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아들이 되려고 끝까지 제단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이삭도 아버지가 믿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던 것입니다. 이삭도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순종의 아들이었습니다. 이제 시험의 크라이 맥스인 절정의 순간이 왔습니다. 이삭은 눈을 감고 죽음의 순간을 기다립니다. (10) 자기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죽이려 하더니.
(11)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므로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그가 이르되 네 손을 그 아이에게 대지 말라. 아브라함이 칼을 높이 치켜들고 마지막 심호흡을 크게 한 아브라함의 손이 큰 궤적을 그리며 일직선으로 내려오려는 순간 하나님의 다급한 음성이 들리는데 너는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16) 이르되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였노라. 곧 네가 이 일을 행하여 네 아들 즉 네 유일한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였으므로 (17)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또 네 씨를 하늘의 별들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니 네 씨가 자기 원수들의 문을 소유하리라. 하나님이 급하게 그것도 두 번씩이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부르셨습니다. 이삭의 몸에 칼도 대지 말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소중한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드리는 아브라함을 보신 후 이제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세 번째 시험에 합격한 아브라함의 참모습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믿음도 이정도 까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지 알겠습니까? 신앙의 구체적인 모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 번째 시험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우리들도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시간이든 물질이든 재능이든 자식이든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하면 무조건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을 경외했기에 이삭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여호와 이레로 응답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2) 여호와이레로 응답하신 하나님
천사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이라고 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놀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던 칼잡은 손을 멈추고 보니 바로 뒤쪽에 숫양 한마리가 덤불에 얽혀 있던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은 이것이 바로 하나남께서 준비하여 놓으셨다고 믿으면서 여호와이레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말씀이 13-14절입니다.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덤불에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자기 뒤에 있으므로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곳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이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주의 산에서 그것을 보리라(준비되리라) 하느니라.
번제에 땔 나무를 지고 올라올 때 이삭이 아버지, 번제에 드릴 양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아브라함이 한 말이 기억납니다. 하나님께서 번제드릴 양을 준비하여 놓으셨다는 말을 하나님께서 보증하신 줄 믿습니다.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곳은 모리아산 정상입니다. 양은 본래 들이나 평지에 사는 동물인데 모리아산 꼭대기 수풀에 숫양 뿔이 걸려 있다는 것 자체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누가 하신 일입니까? 하나님이 준비하신 제물이므로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곳의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불렀습니다. 여호와이레란 (14) 주의 산에서 그것을 보리라(준비 되리라) 즉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양을 보자마자 하나님이 준비하셨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이레라는 말이 처음 사용되었는데 이 뜻은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위해 필요한 때 필요한 것을 준비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시는 곳은 어디든 여호와이레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이레는 수풀에 걸린 양 한 마리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놀라운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창22:16-18)은 여호와이레의 후속의 축복입니다. (16)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였노라 곧 네가 이일을 행하여 네 아들 곧 네 유일한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였으므로 (17)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또 네 씨를 하늘의 별들 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니 네 씨가 자기 원수들의 문을 소유하리라 (18) 또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니라.
여호와이레의 후속으로 주시는 복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복을 다시 확인해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족속이 네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다는 말씀이십니다. 이런 엄청난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 뿐입니다. 돌아보면 이삭이 번제할 어린양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아브라함이 했던 대답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이 말은 이삭을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정말 하나님이 한치의 흔들림이 없이 준비하여 주실 것을 믿었더니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 정말 이삭대신 숫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이런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누가 받습니까? (18) 네가 내 음성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니라. 순종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순종없이는 어떤 축복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순종이 뭐냐고요 내 이성 내 경험 내 지식을 떠나서 무조건 하나님말씀을 지키는 것이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여호와이레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시험에 합격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복인 이삭을 다시 돌려주셨던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두 번이나 선물로 받은 이삭은 이제 그 누구도 해치거나 대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들을 돌려주신 하나님께서는 또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약속하셨는데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씨가 대적의 문을 차지하리라는 승리의 복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번성하고 대적을 이기며 강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후손인 이스라엘이 지금도 세계 강국인 것은 아브라함의 약속때문인 줄 믿습니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인인 우리도 예수님을 믿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씨요 약속에 따른 상속자니라. 우리도 아브라함의 씨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
여호와이레란 말은 여호와께서 앞서서 준비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이레의 은혜는 누구나 다 누릴 수 있는 축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만 하나님께서 앞서서 준비해 주십니까? 저는 말씀을 통해 여호와이레의 축복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이레의 은혜는 믿음의 사람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받은 믿음의 사람들 몇 사람만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1)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받은 여호와이레의 복
창세기 24장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죽었고 아브라함도 이제 나이가 적어도 140세 정도로 노인이 되었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재산은 아브라함의 신실한 종인 엘리에셀이 맡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관리하는 자산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위해 신부감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엘리에설이라는 종을 불러 말했습니다.
(창24:4) 네 손을 내 넓적다리뼈 아래에 넣고 주 앞에서 나에게 약속을 하여라. 내 아들의 아내가 될 여자를 여기에 사는 가나안 여자들 가운데서 구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의 아내 될 사람을 데려오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아브라함의 요구한대로 데려오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약속을 받은 엘리에셀은 낙타 열 마리에 여러 가지 좋은 선물을 싣고 800km나 멀리 떨어진 아브라함의 고향인 나홀의 성으로 갔습니다. 나홀의 성까지 노정은 매우 험하였지만 맡겨진 일에 순종하면서 갔습니다. 종에게는 다만 순종할 책임만 있습니다. 나홀성에 도착한 종은 먼저 여인들이 물길러 오는 우물가로 가서 한 가지 상황을 설정하고 기도합니다. 만약에 우물가에 물 길러 온 여자에게 물을 부탁하여 그 여자가 자신뿐만 아니라 낙타에게도 물을 준다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신부감으로 생각하고 기도했습니다. ‘주여, 오늘 제가 주인 아들인 이삭의 아냇감을 순탄하게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저는 지금 우물가에 서 있고 성의 여자들은 물 길러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그 중 한 처녀에게 그 물동이에 있는 물을 좀 먹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 때, 만약 그 처녀가 마시세요. 내가 당신의 낙타들에게도 물을 먹이겠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 여자를 주의 종 이삭의 아냇감이라고 알겠다는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드디어 리브가가 성에서 나와 우물가로 옵니다. 리브가는 브두엘의 딸입니다. 브두엘은 아브라함의 동생인 나홀과 그의 아내인 밀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리브가는 매우 아름다운 처녀이며, 남자와 가까이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리브가는 우물로 내려가서 물동이에 물을 채워 가지고 올라왔습니다. 그 때에 종이 리브가에게 달려가서 말했습니다. ‘당신의 물동이에 있는 물을 좀 먹게 해 주십시오.’ 리브가가 말했습니다. ‘내 주여, 마시세요’ 하며 급히 어깨에서 물동이를 내려 종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종이 물을 다 마시자, 리브가가 말했습니다. ‘제가 물을 길어다가 낙타들에게도 마시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리브가는 물동이의 물을 여물통에 쏟아 부은 다음, 다시 우물로 달려가서 물을 길어와 모든 낙타들이 물을 마시도록 했습니다. 외모도 아름답게 보인 리브가는 낯선 남자가 물을 부탁할 때 물을 마시게 하고는 열 필이나 되는 낙타들을 위하여도 물을 길어주는 친절함을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기도한 대로 상황이 벌어지는가 하면서 자신도 놀라울 정도입니다. 리브가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있던 엘리에셀은 그녀의 집안을 물어봅니다. 공교롭게도 그녀는 아브라함의 조카인 브두엘의 딸이라는 것을 듣고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엘리에셀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선택하는 과정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준비하심은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 숫양을 준비한 것과 너무도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 리브가를 이렇게 우물가에서 만나게 되리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이 일을 미리 준비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니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도 하나님을 진실히 믿었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자신의 천사를 네 앞에 보내시리라는 아브라함의 말을 믿었습니다(창24:7). 종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을 찾기 위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우연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뿐입니다. 엘리에셀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너무 감사하면서 준비해온 선물중에서 리브가에게 반 세겔쯤 나가는 코걸이 하나와 십 세겔쯤 나가는 금팔찌 한 쌍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종이 물었습니다. ‘아가씨 아버지의 집에 우리들이 하룻밤 묵어갈 방이 있는지요?’ 리브가가 대답했습니다. ‘우리 집에는 낙타에게 먹일 여물도 있고, 여러분이 하룻밤 쉴 수 있는 방도 있습니다.’ 리브가는 그 종을 데리고 집으로 갔습니다. 종은 리브가의 가족들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브라함의 종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결혼할 나이가 된 이삭이라는 아들이 있습니다. 그의 아내될 사람을 찾으러 여기까지 왔습니다. 내가 우물에 이르러 기도하기를 오 주 곧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여 만일 주께서 나의 가는 길을 형통하게 하실진대 내가 우물가에 섰다가 처녀가 물 길러 오거든 그녀에게 이르기를 나와 저 낙타에게도 물을 먹게 도와주는 처녀가 있다면 그 처녀가 바로 주인 아브라함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바로 저 처녀가 우리를 이 집으로 데리고 온 이 아가씨입니다. 리브가의 가족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일은 주께서 하시는 일이니, 우리는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없군요. 자,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리브가를 데려다가 그대의 주인의 아들과 결혼시키세요.’ 종은 리브가에게 금과 은으로 만든 보물과 옷을 주었습니다. 종은 리브가의 오빠와 어머니에게도 값진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날 밤을 그 곳에서 묵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종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습니다. ‘이제 주인께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리브가의 어머니와 오빠가 말했습니다. ‘리브가를 십일 동안만이라도 우리와 함께 있다가 떠나게 해 주세요.’ 하지만 종이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제 길을 형통하게 하셨으므로 기다릴 수 없습니다. 제 주인께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리브가의 오빠와 어머니가 리브가를 불러서 직접 물어 봐야겠군요 말하고 그들이 리브가를 불러서 물었습니다. ‘지금 이분과 함께 가겠느냐?’ 리브가가 말했습니다. ‘예, 가겠습니다.’ 종은 리브가를 낙타에 태우고 길을 떠났습니다.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오던 날 저녁 무렵, 이삭은 기도하러 들로 나갔습니다. 이삭이 눈을 들어 보니 낙타들이 오고 있었습니다. 리브가는 고개를 들어 이삭을 보더니 낙타에서 내렸습니다. 리브가가 종에게 물었습니다. ‘저 들판에서 우리를 보려고 이쪽으로 오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종이 대답했습니다. ‘나의 주인의 아들입니다.’ 그 말을 듣고 리브가는 베일로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 종이 이삭에게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다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종의 말을 들은 이삭은 리브가를 자기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는 어머니 사라의 대를 잇겠다는 표시입니다. 리브가는 이삭과 결혼하고 이삭의 아내가 되었을 때 이삭의 나이는 사십세였습니다(창25:20). 이삭은 리브가를 매우 사랑했습니다. 어머니를 여읜 이삭은 리브가를 통해 위로를 얻었습니다. 이후 이삭은 60세에 에서와 야곱을 낳은 후(25:26) 180세에 죽었는데(35:28) 중동의 일부다처의 관습 속에서 오직 한 여자만 평생 함께 살았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결혼을 혼잡게 하는 시대이지만 성경에 나오는 이삭과 리브가와 같은 아름다운 부부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2) 바울의 선교여행을 통한 여호와이레의 복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신 후 주님이 약속하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처음에는 12명의 사도로 시작한 교회이지만 교회를 부흥시키는 데는 사도들뿐만 아니라 여러 평신도들이 있기에 초대교회의 부흥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울은 선교여행을 하면서 함께한 동역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의 선교를 위해 여호와이레로 준비해둔 하나님의 은혜인데 대표적으로 마가 누가 실라 디모데를 비롯하여 루디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뵈뵈 집사 등 수많은 선교동역자들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2차 선교여행을 준비하면서 아시아선교를 꿈꾸며 기도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아시아로 선교여행을 떠나려 해도 성령님께서는 바울의 아시아로 가려는 행로를 막으시고 유럽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시면서 계획을 수정합니다. 그렇게 된 원인은 밤에 환상 중에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서서 바울을 향해 손짖하며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전도단 일행은 아시아에서 유럽인 마케도니아로 선교여행지를 향해 출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유럽으로 제2차 선교 여정을 떠나게 됩니다.
(행16:11-13) 11 그러므로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다음날 네아플리스로 가고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렀는데 그곳은 마케도니아 그쪽 지방에서 으뜸가는 도시요 또 식민지더라. 우리가 그 도시에서 며칠을 머물다가 13 안식일에 도시에서 나가 사람들이 늘 기도드리는 강가에 앉아서 거기에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니라.
바울은 일행과 함께 마케도니아의 빌립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에 머물며 며칠을 지내다가 안식일날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려면 보통 성인남자 세대주 10인 이상이 모였을 때 회당을 세워서 예배를 드릴수가 있었는데 빌립보에는 유대인들이 많지 않아서 바울일행은 기도처를 찾다가 성 밖 강가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때 기도하는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여러 유대인 여성들이 모여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인도한 바울은 그 모인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는데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만남의 축복을 하락하십니다. 유대인으로써 하나님을 알고 율법은 알았을지는 모르겠지만 구원자 이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건하여 기도하는 루디아를 외면치 않으시고 바울을 만나게 해 구원의 복음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루디아의 고향은 소아시아에 위치한 두아디라 도시 이었습니다(행16:4). 두아디라는 고대로부터 자주색 옷감으로 유명한 도시였는데 루디아는 상인으로 오늘날로 말하면 사업가 이었습니다(행:16:14). 바울은 두아디라 성 출신인 루디아를 빌립보에서 만난 것입니다. 그녀는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던 루디아는 주께서 그녀의 마음을 여시므로 그녀가 바울의 말하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어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소귀에 경 읽기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아무리 진리의 말씀을 전하여도 귀가 열려지지 않으면 알아 듣지 못하나 진리에 갈급하고 말씀을 사모하면 은혜를 받는데 루디아는 오랫동안 말씀을 듣지 못하여 말씀에 갈급함이 있었는데 마침 바울이 진리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복음을 전하자 루디아의 귀는 열리게 되었고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선교여행을 위해 빌립보에서 루디아라는 여인을 여호와이레로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루디아만 혼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루디아는 가족에게 전도함으로 가족 모두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다 구원받게 됩니다. 그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고 즉각적으로 그와 그 집이 다 침례를 받았습니다(행 16:15). 하나님을 삶의 첫째로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가족은 그들의 집을 개방합니다. 빌립보에는 예배드릴 교회가 없었으나 루디아는 자기 집을 교회로 개방함으로서 최초의 빌립보교회가 세워지는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자기 집을 교회로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지 않겠습니까? 불편함도 있겠지만 루디아는 그 모든 불편함을 불사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로서 역사에 길이 남는 최초의 빌립보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한마디로 루디아는 강권하여 주의 종을 섬기려는 자세가 있었습니다. 당시 바울과 그 일행은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물질적으로 넉넉하지도 않았고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 하루하루를 살아야하는 상황인데 이 루디아는 무엇보다도 바울일행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영접한 그녀는 바울과 그 일행을 정성껏 섬기는 동역자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루디아를 바울의 유럽선교에서 최초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도록 축복하셨으며, 유럽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빌립보 교회의 창립 멤버가 되었으며, 물질로 섬기고 헌신할 수 있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루디아는 하나님이 유럽 선교를 위해서 준비하신 일꾼이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루디아와의 만남은 유럽선교의 놀라운 장을 열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바울을 위해 하나님은 루디아라는 헌신적인 여인을 여호와이레로 준비해 주셨던 것이야 말로 여호와이레는 바로 우리가 꿈꾸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성경을 보면 주의 종을 섬겨 복을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울은 위대한 전도자요, 설교자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인데 바울은 자신의 사역 동역자로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꼽았습니다. 이들 부부는 로마에서 살고 있었는데 49년 당시 황제인 글라우디오가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을 때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왔다가 바울을 만나게 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이다(행18:2). 이들 부부는 바울과 같은 일 즉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자연히 바울과 가까워지게 되었고 이때부터 바울이 가장 어려운 지역인 고린도에서 전도를 시작하려 할 때에 바울에게 용기를 주어 그곳에서 1년 6개월 동안이나 복음을 전하게 했던 사람들이 이들 부부이다. 훗날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들 부부를 소개하면서 ‘그들은 내 생명을 위하여 자기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모든 교회들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16:4’고 말하였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이외에도 목숨을 내어 놓고 바울을 도운 에바브로디도도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옥에 있는 바울을 돕기 위해 에바브로디도를 보냈습니다. (빌2:30) 나를 섬기는 일에서 너희의 부족한 것을 공급하기 위해 그가 자기의 생명을 돌보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거의 죽기에 이르렀느니라. 에바브로디도는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바울을 돕기 위해 자신의 병든 몸을 돌아보지 않고 옥중에 있는 바울을 돕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였습니다. 그리고 한사람을 더 소개한다면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인 뵈뵈자매입니다. (롬16:1-2) 1 내가 겐그레아에 있는 교회의 종 우리의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2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의 마땅한 도리로 그녀를 받아들이고 무슨 일에서든지 그녀가 너희를 필요로 하거든 그녀를 도울지니라. 그녀가 많은 사람과 나의 구조자가 되었느니라.
뵈뵈자매는 신분으로 많은 위험을 무릎쓰고 바울이 쓴 로마서를 로마교회에 전달하였습니다. 이 뵈뵈 집사를 바울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든든한 재정적 후원자요 사회적으로 신변을 보호해주는 울타리가 되어주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많은 교회를 세우고, 많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었던 것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바울을 돕던 동역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바울의 선교여행을 위해 예비해 놓은신 동역자들입니다. 그러나 선교여행에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동역자하면 당연히 누가입니다. 바울은 육신적으로 너무나 약한 사람이었는데 바울은 이 고난을 사단이 준 가시라고 불렀습니다. 육신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이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하여서 바울이 간절히 3번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바울의 곁에는 항상 의사인 누가가 바울과 끝까지 함께 하였습니다. 누가는 의술만 뛰어났던 것이 아닙니다. 누가는 글 쓰는 솜씨도 뛰어났습니다. 누가는 바울과 함께 바울이 가는 곳마다 선교지에서 일어난 모든 성령의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가가 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생애에서부터 시작하여 교회의 탄생과 확장까지를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바울의 사역을 기록했기 때문에 우리는 사도 바울의 사역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일꾼들인 여호와이레의 동역자들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3) 거미줄을 통해 목숨을 구한 여호와이레의 실화
스코틀랜드의 독립 운동가였던 로버트 부르스는 주님을 잘 믿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도피자로 지낼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인줄 확신하고서 했는데 굉장히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를 반대하는 정적들이 경찰과 군인을 동원해서 그를 체포하려고 했습니다. 체포되면 총살당합니다. 그가 도망을 치는데 뒤에 계속 따라와서 산길을 도망치다가 막다른 골목에 처해서 오고갈 길이 없어서 벽에 있는 바위 굴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뒤따라오던 사람이 바위 굴속에 들어있는 그를 못 잡을 턱이 있습니까? 그는 바위굴속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꿇어앉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갈 길이 없습니다. 내 뒤에는 경찰과 군인들이 쫓아오는데 잡히면 총살당합니다. 나는 이 바위 굴속에 들어왔는데 그들은 따라와서 굴속에 있는 나를 체포할 것입니다. 나를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인간의 머리 생각으로는 대책이 없습니다. 주님이여 주님께서 구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가져오는 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면 그것이 이룰 때까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대책을 하나님이 보여 주시옵소서.” 그랬는데 얼마 있지 아니하여 경찰과 군인들이 도착해서 “이놈이 이 굴속에 들어가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아니야~ 굴속에 안 들어갔어.” “왜” “거미줄 보아라. 굴 앞에 거미줄이 이렇게 쳐져있는데 사람이 들어가면 거미줄을 뚫고 들어갈 것인데 어떻게 굴속에 들어간단 말이냐?” “아 그렇군 사람이 들어간 흔적이 없구나. 우리 돌아가자!” 다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잠시 후에 그가 굴에서 나오면서 보니까 굴 입구에 거미줄을 쫙 처 놨습니다. 하나님께서 대책을 세우시기를 이 사람이 굴속에 들어가서 기도하자마자 수백 마리의 거미를 동원해 가지고서 굴 입구를 거미줄을 쫙 처 놓으니까 뒤에 오던 사람이 보니까 이것은 사람이 들어간 곳이 아니다. 사람이 들어갔으면 거미줄을 제켰을 것인데 거미줄이 쳐 있는 것을 보니까 이곳에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무사히 구원을 받고 스코틀랜드 독립을 가져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하나님은 여호와이레의 대책을 세워 놓고 계십니다.
여호와이레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은 보잘것없는 자의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창16장에 보면 하갈과 이스마엘이 사라에게서 쫒겨나 광야를 방황할 때 부대의 물이 떨어지매 그녀는 그 아이를 떨기나무의 밑에 두고 화살이 미치는 곳에 가서 아이를 보며 부르짖기를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목소리 높여서 우니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과 목마름을 아시고 하나님은 하갈의 목마름과 괴로움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친히 샘을 준비하시고 위로하시는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갈은 하나님을 감찰하시는 하나님(브엘라 해로이)으로 불렀습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이외에도 성경에는 여호와이레의 믿음의 사람들이 계속 나타납니다. 요셉에게는 총리라는 여호와 이레가 있었습니다.
요셉이 받은 여호와이레가 펼쳐지기까지는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형제들의 시기로 17살의 나이에 타국에 노예로 팔려갑니다. 경건하게 살고 주인의 명을 감당하고자 누명으로 인한 억울한 감옥 생활도 견뎌야만 했습니다.
요셉은 뼈를 깎는 듯한 아픔과 고통의 세월을 자그마치 13년 동안 견딘 후에 여호와이레의 애굽의 총리로 등장합니다.
베들레헴 목동 다윗도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도 왕으로서의 여호와이레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왕이 되기까지에는 10여년의 세월을 고난과 고통과 때로는 배고픔과 함께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이후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여호와이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이레는 아무리 시간이 길고 세월이 흘러도 순종하는가, 헌신하는가, 견디는가, 괴롭고 힘들어도 믿음에서 이탈하지 않는가,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가를 보신 후, 시험에 패스한 자에게 비로소 여호와이레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현재의 삶의 고통을 인내하지 못하면서 내일의 여호와이레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의 복을 보면서 하나님은 필요한 때 필요한 은혜를 준비하셨다가 공급해주시는 줄 믿습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신11:14)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제 때에 주시는 것으로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필요한 때에 필요한 은혜를 넉넉히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 2020년의 삶을 살아갈 때에 때를 따라 모든 은혜를 넉넉히 준비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삭이나 요셉이나 다윗의 삶에서 우리는 여호와이레의 놀라운 모습들을 봅니다. 그들의 삶에 주께서 준비하신 그 놀라운 기적들은 그들이 믿음으로 살기를 결단하고 그 믿음대로 행동하면서 살았을 때 하나님은 앞서서 그들을 돌보시고 그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저는 여호와이레의 축복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앞에 준비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앞서서 준비하시고 그를 축복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어떻게 여호와이레라는 놀라운 기적이 나타났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문제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신앙생활에도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는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끝까지 믿어야 여호와이레가 있습니다. 중도에 포기하면 여호와이레가 없습니다. 끝까지 믿을 때, 모리아 산 끝까지 올라갈 때, 아들을 번제단에 올릴 때, 칼을 끝까지 높이 들어 내리칠 때에,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과 더불어 수풀에 뿔이 걸린 숫양을 통한 여호와이레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3. 여호와이레가 주는 교훈
오늘 말씀은 결국 여호와이레의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여호와이레로 응답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 할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은 택한자들을 시험, 단련, 연단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끊임없이 도전하시고 시험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시험하셨고 모세에게도 바로에게 가서 노예로 고통당하는 내 백성을 출애굽 시키라는 시험을 주셨을 때 모세는 처음에 못 간다고 하였지만 결국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도 여호와이레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인류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엄청난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 시험을 극복하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드렸습니다.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는 예수님 처절한 기도를 들으신 후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주 하나님은 택한 자들을 도전하게 하시고 시험하시고 단련하십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험-연단 앞에 우리들이 선다면 아브라함처럼 또 이사야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렇게 할 것인가? 아니면 부자 청년처럼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 갈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각자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보지 말고 나보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2) 여호와이레는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한 사람만이 취할 수 있다
시험을 통과한 후에는 반드시 기쁨-영광-새 하늘 새 땅에 들어가는 최고의 축복이 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미래를 온전히 하나님에게 맡긴다는 것은 여호와이레의 믿음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기억하면 됩니다. 아브라함의 삶이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는 절망적인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잡는다면 ‘여호와이레’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결정적인 절망의 순간은 죽음입니다. 그 죽음의 순간이 쏜살같이 옵니다. 이 죽음은 마치 아브라함의 칼날이 이삭의 목을 겨누고 있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놀라거나 두려워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의 생명을 준비한 것이 궁극적인 의미에서 ‘여호와이레’입니다.
(3) 여호와이레를 통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모형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모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이삭을 되돌려 주셨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활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므로 마지막 날에 신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신부인 성도들을 영접하여 하늘나라에 데리고 들어가실 것입니다. 지금은 꿈같은 이야기로 들릴지라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간 성도들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구원의 계획을 오늘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서 오래 전에 보여주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과 그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통해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엡1:4).
하나님은 태초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준비하셨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믿음을 위해선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자신의 생명까지라도 아낌없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졌는지 시험할 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으로 시험을 이기는 우리 행복침례교회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시험이 닥쳤을 때 시험의 참 뜻을 알고 시험을 믿음으로 이기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축복은 당연히 따라 온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이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여호와이레의 축복이 그냥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오는 프리패스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들의 희생과 결단과 헌신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낳은 아들을 요구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 시험을 잘 통과했습니다. 그가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아들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된다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던 아브라함은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는 축복의 약속도 받았습니다. 진정 아브라함의 복을 원한다면 아브라함처럼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고 결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고 순종했고 아끼지 아니하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다 준비해 놓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다 책임져 줄 터이니 너는 순종만 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사람들은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순종의 길은 괴롭고 힘이 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여도 그 길은 믿음으로 가야 되는 길이기에 그래서 두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지금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돌아보니 지금까지 우리의 발걸음 하나 하나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앞날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으로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시므로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누리며 사는 여러분의 생애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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