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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2 현충일날 잊어서는 안될 월튼 해리스 워커 이야기
    인물 2018. 6. 10. 13:35

    현충일에 잊어서는 안 될 월튼 해리스 워커(Walton Harris Walker)      에4;13-17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6일 현충일, 10일 민주항쟁 기념일, 24일 순교자 기념 주일이고  25일 6·25전쟁,  29일 제2 연평해전 등 우리가 기억해야 할 날들이 많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것도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과 이미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6.25 전쟁이 일언난지 68전 즉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선전포고도 없이 38선을 넘어 남침했다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부터 1953년 7월 27일 까지 3년 1개월간 동족상잔의 처참한 전쟁이었는데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어떤 징후가 있었다면 왜 대비를 안했는가?
    김일성은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해 스탈린을 만났다. 흐루쇼프 회고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남침공격을 위한 완벽한 계획서를 가지고 왔다. 그날 만찬에서 우리는 이미 결정된 것(공격)을 주로 화제로 삼아 얘기했다.” 1950년 1월 김일성은 다시 한 번 모스크바를 방문해 군원 요청과 남침 승인에 대한 확답을 받는다. 당시 우리 군의 대북관은 너무 깜깜했었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6.25 발발 직전인 1950년 3월-5월 태백산맥으로 침투한 생포한간첩들을 심문결과 적의 대규모 남침에 관한 정보를 육본에 수차 보고했으나 군 수뇌부에서 묵살했다는 점이다. 또 당시 북한의 행태는 평화를 띄우는 분위기였다. 1950년 6월 10일 북한은 느닷없이 자신들이 억류하던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 부자와 그해 남한에서 체포된 거물간첩 김삼룡·이주하를 맞교환하자는 평화공세를 폈다. 우리는 조만식 선생과 북한 간첩을 맞교환을 긍정 검토했으나 북한은 열흘간 시간을 끌다 무산시켰다. 6월20일 상공장관을 지낸 임영신 의원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쟁 가능성을 보고했지만,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전쟁을 대비하라는 대통령의 명령을 묵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성모장관의 망언은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는 말로 전쟁에 대한 대책없이 국민들을 속였던 것이다. 이같은 북한의 평화공세에도 불구하고 남한은 6월11일부터 6월23일 까지 비상경계령을 내렸다가 해제하였다.  한편 우리가 비상경계령을 해제한 6월23일은 북한 김일성이가  남침 준비를 완료하고 전투병력을 대기하도록 결정된 날인데 전쟁발발하기 이틀전 이런 위기상황에서 국방부는 오히려 6월 24일 자정을 기해 경계령을 해제하고 육본은 비상 경계령 해제와 더불어 전 장병의 2분의 1에게 휴가를 주어 외출과 외박을 시켰다.  전방 부대 장병 절반 이상이 텅 비었다.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6월 24일 오후 6시 육군회관 개관식에 육본 참모진과 각 사단장, 주한미군사고문단 등 고급장교 50여명을 초청해 밤새 술 파티를 벌였다. 이러니 결국 개전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됐고, 국군 9만8000명 중 4만4000명이 전사했다. 군장비도 80%가 소실됐다. 앞서 신성모국방 장관은 이범석 전임 국방장관이 미군 철수를 대비해 어렵게 창설한 4만명의 예비군 조직 호국군을 해체했다. 이러고도 망하지 않은 대한민국이 정말 신기할 뿐이다.
     
    1. 6.25한국전쟁 발발 
    북한 군은  치밀한 사전 계획에 의거 /총병력 19만 8천 380명, /탱크 242 대, /  해군함정 약 30척, /대포 2천 500문,/ 120밀리 포 56문, /82밀리 포 1천 503문의 강력한 무력으로 남침을 감행했는데 북한군은 장단반도, 문산, 동두천, 춘천 그리고 강릉의 5개 방향으로 38선을 일거에 돌파하여 남으로 내려왔다. 2개 군단으로 구성된 20만의 북한군 선두에는 잘 훈련되고 준비도 완벽하게 마친 7개 사단과 더불어 제105전차여단 예하의 전차부대와 이들 바로 뒤에는 후속 진군할 6개 사단(서에서 동으로 제7,10,13,9,15,8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와 맞서는 우리 국군은 8개 사단(수도경비사령부 포함) 그리고 1개 독립연대로 구성된 총10만이었는데, 이중 4개 사단과 1개연대가 38선 일대를 경계하고 있었고 나머지 사단들은 후방에서 공비 토벌 등의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6월 24일 0시를 기해 국군은 그동안 전군에 내려졌던  비상경계령이 해제되면서 많은 병력이 휴가, 외출 등을 나와 있었던 관계로 개전 시점의 전력차이는 더욱 벌어져있던 상태였다. 예를 들어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진군할 북한군 2개 사단과 1개 전차여단으로 구성된 총 3만2,000명은   휴가나 외출중으로 4,500여명만 남아있는 군에게는 전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력차이 중에서도 가장 위협을 주었던 것은 바로 전차였다.  개전 당시 242대의 소련제 T-34전차는 2차대전 당대 최고의 명품전차였는데, 그중에서도 소련이 북한에게 공급한 T-34는 85밀리미터 포를 장착하여 화력이 강화된 최신형인데 이를 막아내기 위해 국군이 보유했던 장비는 전무했다. 더구나 대다수의 병사들이 전차를 처음 보았을 만큼 공격방법조차 모르던 상태였다. 이런 막강한 북한군에 의해 의정부를 지키던 제7사단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개전 하루 만에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가 북한군에 점령당하였다. 그런데 북한군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의정부에서 이틀을 쉬고 개전 3일째인 28일 서울에 입성하였다. 의정부에서 지체하다 서울에 이틀이나 늦데 들어온 것은 정말 미스터리한 일로 갈팡질팡하는 군에 다소 후퇴할 시간여유를 주었지만  후방에 있던 예하부대들을 투입되다보니 마치 모닥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차례차례 소진되어 버렸고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시내전역이 북한군 수중에 들어가는 치욕을 맛보게 되었다. 전쟁역사상 3일 만에 수도가 적에게 점령당하였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말이 전쟁이지  탱크와 포로 무장한 북한군의 전력앞에는 멘주먹뿐인 우리나라 군은 전혀 싸울 만한 대상이 안되었다. 
    UN이 창설된 이후 유엔군을 다른나라에 참전시키기 위한 안전보장이사회의는 처음이었다고 본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로 미 지상군과 유엔군 일부가 참전했지만 전세는 쉽게 만회되지 않았고 북한군에 여전히 밀리는 형국이었다. 결국 국군과 유엔군은  전력의 열세로 전쟁 40일후에는 낙동강 일대를 제외하고는 전 영토를  북한군에게 내주고 말았다.
     
    2. 낙동강 방어 전투
    그동안 북한군과 대결하였지만 워낙 강력한 북한군에게 계속 밀림으로써 전투다운 전투 제대로 하지 못한채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부터 마산-왜관-영덕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여 방어태세에 임하였고 북한군은 마지막 남은 총력을 기울여 낙동강 도하 공격을 개시하여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공세 작전을 감행하였다. 한반도의 10%밖에 남지 않은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부지역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무차별 공세에 힘겹게 맞서면서 북한군의 공격을 결사적으로 저지하였다.  이에 미8군사령관 겸 유엔지상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해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며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라고 지시하였는데 이는 낙동강 전선을 죽음으로 지키라는 명령이었다. 낙동강 전선 이곳저곳에서 다부동전투, 영천전투 등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을 만한 결전이 벌어졌다. 이 낙동강 방어전투를 위해서는 국민들도 일어났다. 전국의 많은 청년학도병들과 재일학도의용군이 참전하였다. 군대에 가지 못한 30~40대 장정들도 지게를 들고 전쟁터로 나가 군인들이 먹을 음식과 탄약을 날라주었다. 부녀자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주었다. 6.25전쟁의 최대 위기이자 대한민국에게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던 낙동강 전선은 유엔군과 우리 국군과 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지켜냈다. 낙동강 방어선을 두고 남과 북 양측이 벌인 혈전은 1950년 9월 말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약 2개월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지역에 따라서는 자칫 방어선이 돌파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절체절명의 위기 속,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얻은 값진 승리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을 하나로 모았기에 가능했다.
    또한 낙동강선 방어에 성공한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반격 작전으로 전환하여 9월 28일, 전쟁 발발 97일 만에 잃어버린 수도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다.


    3. 너무나 큰 전쟁의 댓가
     이런 6.25한국전쟁은 3년 동안 너무나 많은 희생을 내었다. 단군이래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중 이처럼 수많은 젊은이들의 희생과  20만명 미망인과  10만명 고아 그리고 1000만 이산가족 그리고 수많은 가옥이 파괴 되었던 전쟁댓가는 5000년 역사상 대재앙임에 틀림없었다. 
    미군 사망자만도 5만 4246명(지금까지 이라크전 미군 사망자가 약4천 여명),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 사망자가 모두 62만 8833명, /부상자는 미군만 10만 380명, /유엔군 전체는 106만 4453명, /미군 실종자만 8177명, /유엔군 실종자는 47만 267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남북한 군인사상자가 모두 약 300만 명, 민간인 사상자도 모두 약 300만 명. 합계 약600만 명이 죽고 다친 전쟁이 6.25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1)‘아이젠하우어’ 대통령의 아들도 최전방에 참전시켰고,
    2) 미 8군 사령관 ‘벤프리트’ 장군도 아들을 실종되었고,
    3)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도 아들을 전쟁의 후유증으로 잃었고,
    4) 낙동간전투의 승리로 이끈 워커 중장은 자식과 함께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5) 24사단 ‘딘’ 소장은 전쟁 포로가 되었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머니 저는 지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機首에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後尾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지금 한국에서 싸우고 계십니다. 드디어 저도 미력한 힘이나마 아버님에게 힘을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애인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이 편지는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 부임한 벤프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아들 지미 밴프리트 2세 공군 중위가 이제 막 해외 근무를 마쳤음으로 한국전에 참여할 의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원해서 아버지가 사령관으로 있는 한국전에  참여하면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리고 그 것이 마지막 편지였다. 1952년 4월 2일. 이 훌륭한 군인은 압록강 남쪽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지미 밴프리트 2세 중위가 폭격비행 중 실종 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담담하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고 한다.
    “지미 벤프리트 2세 중위에 대한 수색작업을 즉시 중단하라. 적지에서의 수색작전은 무모하다고 중지시킨 것이다. 
     며칠 뒤 부활절을 맞아 그는 전선에서 실종된  미군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모두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다고 전선에서 실종된 가족에게 보낸 편지이다.
    밴프리트 미 8군 사령관은 한국을 벗이라고 생각했고, 그 벗을 위해 자기 자식을 희생시킨 것이었다. 이런 강직하기 짝이 없는 군인 앞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와 놀라운 부탁을 하였다.
    1952년 12월, 대통령 당선자인 노르만디의 영웅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한국 전선을 살피기 위해 방한하여 8군 사령부를 찾은 것이었다. 8군과 한국군의 고위 장군들과 참모들이 모두 참석하고 전 세계의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밴프리트 사령관이 전선 현황에 대해서 브리핑을 끝내자 조용히 듣고 있던 차기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느닷없는 질문을 하였다.
     “장군, 내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얼마 안 있어 대통령에 취임할 당선자의 전투 사령관에 대한 첫 질문 치고는 너무나 대통령답지 않은 사적인 질문이기도 했지만 상대가 아들을 잃고도 꿈쩍하지 않은 밴프리트였기에 모두들 무슨 일이 벌어질까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젠하워 소령은 전방의 미 제3사단 정보처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라고 밴프리트 장군이 사무적으로 짤막하게 대답하자 아이젠하워는 그야말로 참석자 모두가 놀라자빠질 사적인 부탁을 공공연히 했다. “사령관, 내 아들을 후방 부대로 배치시켜 주시오.”  참석자들이 모두 서로 두리번거리면서 웅성거리고 밴프리트 사령관도 언짢은 표정으로 아이젠하워를 응시하면서 의아해 하자 당선자가 조용히 말했다. “내 아들이 전투 중에 전사한다면 슬프지만 나는 그것을 가문의 영예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존 아이젠하워 소령이 포로가 된다면 적군은 분명히 미국 대통령의 아들을 가지고 미국과 흥정을 하려 들 것입니다. 나는 결단코 그런 흥정에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령관이 잘 알다시피 미국 국민은 대통령의 아들이 적군의 포로가 되어 고초를 겪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대통령의 아들을 구하라’고 외치며 나와 미국에게 적군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압력을 가할 것입니다.  나는 그런 사태를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령관이 즉시 내 아들이 포로가 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주실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장면인가! 순식간에 두리번거리면서 의아해하던 분위기가 반전되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표정이 되고 곧이어 “즉각 조치하겠습니다. 각하!” 라는 밴프리트 장군의 우렁찬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고 이 자리에 참석했던미 2사단 72탱크 대대의 대대장 T.R Fehrenbch 중령이 전역 후 쓴 This kind of war(한국 전쟁)이라는 책에서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마지막 UN군 사령관인 마크 클라크 대장의 아들 클라크 대위도 금화지구의 저격능선에서 중대장으로 싸우다가 세 번에 걸친 부상으로 전역을 했으나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한국전에 참가한 미군 장성의 아들들은 모두 142명,  그중 35명이 전사하였다.
    한국전에서의 미군 전사자는 모두 54000여명 부상자는 10만 명이 넘었다.
     



    4. 미8군 사령관 월튼 해리스 워커(Walton Harris Walker) 이야기
     6.25 전쟁 참전에서 잊어서는 안될 사람이 워커장군인데 다음의 이야기를 들으면 곧 알게 될 것이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8군 사령관 월튼 해리스 워커(Walton Harris Walker 1889년 12월 3일~1950년 12월 23일)한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낙동강 전선에 참전했는데 중장이라는 높은 계급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전선 최전방에 맨 앞에 서서 부하들을 진두지휘했다. 또한 당시 대위였던 늦둥이 외아들 샘 워커 역시 한국전에서 참전하였다.
     당시 6.25 전쟁의 상황에 대한 두 가지의 사실이 비밀문서 해제로 알려졌다.


    (1) 망명정부 구성하는 계획안
    6.25 전쟁 초기 한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에 고전하자, 미국 정부에서는 한국의 정부 요인 및 피난민을 합친 62만 명의 인원을 배에 태워서 당시 뉴질랜드령이었던 서사모아 제도 내 어느 섬으로 이주시키는 망명정부를 구성하는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이 계획은 이른바 New Korea Plan으로 당시 미국 정부가 미8군사령관을 통해, 한국 육군참모총장에게 영천 방어선이 붕괴되면 이승만 대통령과 서사모아로 가서 망명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청했다는 기절초풍할 제안이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사실과는 달리 말 그대로 한국의 정부 인사와 군 관계자들에게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계획에 불과했다. 
    비밀문서 해제에 따라서 일정을 보면 국군 고위 장교 및 그 가족, 정부 인사 및 그 가족을 우선으로 하고 아직 전투력을 보전한 한국군 약 몇 개 사단을 주축으로 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 모든 것은 말 그대로 제안이겠지만, 만에 하나 낙동강 전선이 쓸려나갔으면 정말 어디론가 가서 망명정부 차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재의 판단으로도 미루어 볼 때 낙동강 전선은 남한을 위해서 반드시 지켜냈어야 할 보루였음이 실로 명백하다. 밀려나면 남한은 끝장이었을 테니까.
     
    (2) 워커 중장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한국 사수를 강력히 주장 
    미국 정부의 입장에서 정말 낙동강 전투가 뚫리면 남한 일부국민을 집단 이주를 하는건가 싶었던 그 당시에, 미국 정부는 한국전쟁 초기 유엔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맨 마지막 비문 내용에 다시 나온다.
    당시 일본에 있던 맥아더 사령관도 남한을 포기하는 것을 고려했었다. 본국에서 준비한 'New Korea Plan'은 둘째치고 전면 철수가 거론되는 시점이었으니.   파죽지세로 북한군에 거의 모든 지역을 점령당한 당시 상황에 비추어볼 때 객관적으로도 남한은 승산이 없어 보였다. 남한 사수가 힘들어지면 일시적으로 일본으로 패주한 후 재정비를 고려하거나 아니면  New Korea Plan처럼 서사모아로 가는 것을 머릿속에서 생각했을 것을 더글러스 맥아더가 사령관이면 이런 일련의 상황들을 모를 리가 없는 것도 그렇다.
    그러니까 미국 정부는 전황이 어두워지니까 우린 철수해요.  낙동강에서 밀리면 알지도 못하는 섬으로 남한의 국가수반 +전국민이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거기다 대고 우리 무조건 안된다고 버텨보겠음이라고 말한 사람이 워커 중장이다.
    미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은 맥아더에게 남한 사수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정말로 워커장군이 없었다면 한국전쟁은 일찌기 종전되었다고 보고 지금은 조선인민공화국이 되었다고 생각도 해본다.
     맥아더는 일본에 있었고 워커 중장은 한국에 있었다. 최전선에서 직접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는 입장이었던 워커 중장은 한국 장병들을 만나서 이런 말을 전한다.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그리고 미국 장병들에게 아래와 같은 명령을 내린다. "우리는 절대 물러설 수 없다. 물러설 곳도 없고 물러서서도 안 된다. 낙동강 방어선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후퇴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이 사람이 미군 장병들에게 내질렀던 전설적인 명언은 "Stand or die." 사수 혹은 죽음뿐. 문제는 좁은 낙동강 전선에서도 유엔군의 병력은 턱없이 모자랐던 것이다. 말 그대로 버티기도 어려울 정도로 취약한 전선을 그은 건데, 결국 부대 한쪽의 위기가 발생하면 다른 쪽의 병력을 빼서 그쪽을 틀어막는 전략이었다.


    (3) 월튼 워커의  무조건 한국사랑
     갑작스런 사고로 순직했기에 자서전 등의 사료가 없기 때문에 사실 워커 중장의 무자비한 한국 사랑에 대한 이유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워커 중장은 인상적이고 무자비한 명령을 했다는 이유로 미국 의회에서 미국 국민이 아닌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미국 장병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게 마땅한가?  Stand or die."사수 혹은 죽음뿐. 조국도 아닌 전선에서 많은 희생을 내면서 이러는 건 많은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런데 맥아더가 워커의 말은 역사상 많은 장군이 흔하게 내리던 명령일 뿐이다 라는 발언을 하면서 그를 두둔해 주었다. 
     미국 정부도 워커 중장에게 사령관 집어 치우고 집에 가라고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버텨보겠다고 발벗고 나섰다. Stand or die(버티지 못하면 죽어라)란 발언 덕에 본국 의회에서 논란을 일으켜서 한참을 욕 먹어가면서도 한국을 꼭 지켜야 된다고 전쟁을 반쯤 포기한 미국 정부와 사령관을 설득하고, 한국 장병한테는 내가 죽어 여기 묻히더라도 한국을 꼭 지켜줄게라고 하면서 한쪽으론 미군 장병들한테 못 버틸 거 같으면 죽어버려! 라고 말하면서 낙동간 전투를 지휘한 분이 바로 미사령관 워커 중장이다. 워커 중장은 한국군과 미군 병사들이 모두 미숙한 훈련병들 위주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낙동강 방어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후에 맥아더의 낙동강 전선 시찰이 이루어진다. 이 시찰 덕분에 맥아더 사령관의 인천 상륙작전 구상이 가능해졌고, 워커 중장은 사령관을 도와서 인천 상륙작전까지 성공시키는 공을 세웠다. 성공 확률 1/5000이라는 전쟁영웅의 업적인 인천 상륙작전도 워커 중장이 낙동강을 지켜내지 않았다면 시작도 해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일각에서의 월튼 워커의 한국 사랑이라는 표현은 과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맥아더의 극동 사령부는 맥아더 패밀리 만으로 구성되는 폐쇄적 조직이었다. 맥아더의 참모들은 맥아더가 태평양 지역 사령관으로 고생하던 시절부터 함께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마디로 인맥 위주로 굴러가는 또다른 작은 사회였던 셈이다. 맥아더는 당시의 고생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았다고 평가되던 유럽 전선 출신 장교들에 대해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월튼 워커는 출신 성분이 유럽전선이었다. 게다가 무뚝뚝한 성격 탓에 같은 유럽전선 출신이면서도 눈치 빠르게 알랑거려 맥아더의 신임을 얻은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과 달리 워커 중장은 맥아더의 입장에서 볼 때 '굴러들어온 골치아픈 노땅'에 불과했다.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난 부분이 바로 낙동강 방어전인데, 맥아더는 어떻게든 미 본토의 합참을 구워삶아 다수의 병력을 지원받았으나, 이들 대부분을 인천상륙작전 병력으로 전용했고 병력이 부족해 방어선에 구멍이 나고 있는 워커에게는 병력 지원을 하지 않았다.
    워커의 입장에서는 맥아더 패밀리에 들어가지 못해 왕따당하는 것도 서러운데, 병력지원은 안해주고 방어선은 틀어막으라고 명령을 했으니 워커 입장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사랑보다 곧 전역해야 할 장성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오기로라도 임무를 완수해야 할 상황이었다. 더욱이 그냥 밀리기만 하면 또 모르겠는데 실제로는 이미 인천상륙작전이 계획되고 병력이 충원되는 마당으로, 상륙작전까지 버티지 못하고 전선이 붕괴되면 모든 책임은 자신이 뒤집어 쓸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당시 일화를 보면 그의 휘하 부대 연대장들 상당수는 무능하고 보신주의에 빠져  있어서 워커는 직접 연락기를 타고  북한군 머리 위를 날며 상황을 체크하고 연대 지휘소를 찾아 다니며 휘하 연대장들을 닦달해 전선을 틀어막아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워커는 낙동강 전선을 지켰고, 그 와중에 상륙작전에 쓰려고 병력을 안주는 극동사령부의 참모들과 싸웠다. 워커의 적은 북한군과 내부의 극동사령부 맥아더 패밀리(참모)들로 사방에 널려있었다.
    사실 인천 상륙작전이 전세를 돌려놓은 것은 김일성의 전략 미스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다수의 상륙전 선단이 꾸려지고 있다는 사실과 상륙작전의 효과가 가장 큰 곳이 인천이라고 판단했고 모택동과 그의 참모들은 이미 김일성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김일성으로서는 한국군과 미군이 인천에 오기 전에 부산을 점령하는게 더 빠를 것이라고 판단, 서울 등 수도권 주둔 병력까지 빼서 총공세를 퍼붓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이후 김일성이 뒤늦게 불안을 느끼고 인천 인근에 병력을 재배치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은 상태였다.
    결론적으로 말해 맥아더의 선택은 탁월했지만 그 선택이 가능케 만들어 주고 절망적인 병력부족 상황을 오기로 견뎌낸 것은 워커의 공이다. 사실 인천 상륙 전에 방어선이 뚫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황이 나빴기에 인천 상륙으로 인한 대전환의 공을 따지자면 7 대 3 정도로 워커의 공적이 맥아더의 공적보다 크다 하겠다. 그래서 워커는 생전에 매우 불운했던 장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나마도 맥아더의 훼방 때문에 재평가받은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편이다.
      그의 전술 방식과 평가는 솔직히 말해서 북진 전략은 모두가 맥아더 사령부의 작품이라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워커의 8군이나 에드워드 알몬드의 10군단은 그 스케쥴을 이행하는 장기말에 불과했다. 오히려 지나치게 무리하게 스케쥴을 강행했던 알몬드의 10군단이 어떤 꼴을 겪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워커는 그나마 잘 대처한 편이다. 참고로, 무리하게 장진호를 따라 북진했던 알몬드의 10군단은 무작정 진격하다가 장진호 북단에서 중공군에게 완전히 섬멸되었다.
    이에 비하면, 워커의 8군의 경우 철수 과정에서 일부 사단장의 어처구니 없는 판단 때문에 일부 부대가 궤멸적 타격을 입은 것을 제외한다면 비교적 전력을 보전해 신속히 퇴각할 수 있었으니 무조건 워커의 실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후세 사가들은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전에 병사들을 집에 보내주겠다"는 정치적 구호에 따른 무리한 전략이 아니었다면, 청천강 선에서 병력을 정비하고 방어에 중점을 둔 다음, 이듬해 공세를 시작해야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애초에 한겨울에 기후와 지형을 고려치 않은 맥아더 사령부의 후방 책상물림 참모들의 어처구니 없는 전략의 탓이다.


    (4) 안타까운 사고
    하지만 1950년 12월 23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아들인 샘 워커 대위의 은성무공훈장 수상을 축하해주러 가는 도중, 맞은 편에서 한국군 사병이 운전하던 탄약 운반 삼륜차 트럭 과 충돌로 즉사하였다. 

    2차대전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잠시 쉬지도 못하고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망해가는 우리나라를 구원하고 한국에 온지 6개월만에 그리 빨리 가시다니 우리는 너무 안타깝고 슬프지만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마 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의 허락없이는 그것들 중의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보잘것 없는 참새 한마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허락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데 하물며 한 나라를 구해준 한국인의 은인이 이땅에서 마감하는 것을 우연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분명히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워커 장군은 이땅에 와서  할 일을 다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셨으므로 나라를 사랑하는 한국인으로서는 그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한국 정부는 안타까운 워커 장군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서울 아차산의 지명에 워커힐이라는 이름을 사용토록 하였는데 SK그룹에서 바로 그 지역에  워커힐 아파트와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을 세워서  워커힐이 바로 워커장군을 잊지않기 위한 정부의 배려이다. 해외에서는 "쉐라톤 호텔"들이지만 한국에선 특별하게도 쉐라톤 워커힐이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한다. 이제 그는 가고 우리 곁에 없지만 한국인이라면 우리 나라를 구해준 워커장군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워커힐 이라는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면 바로 그것이 워커장군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워커를 기리는 기념비 및 동상도 세워졌으나 맥아더와 견주면 철저하게 잊혀져있다. 워커힐 호텔이라고 하면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그 워커힐이 워커 장군이라는 군인을 기려서 지어진 명칭이란걸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  쉐라톤 워커힐 본관 정문 산자락에 세워진 비문.
    "오늘 우리가 장군을 특별히 추모하는 것은 한국전쟁 초기 유엔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던 미국 조야의 지배적인 분위기 속에서 유독 장군만이 홀로 한반도 고수를 주장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공산화를 방지하여 우리의 오늘을 가능케 한 그 공덕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지로 워커장군에 대해서 나온 전기는 단 두편,  그것도 한편은 사망 직후에 나온 전기이다. 동시대의 역대 미 8군 사령관들이 이전이나 이후 커리어 때문에 전기가 굉장히 많은 것과는 좋은 대조를 보인다. 사진만 봐도 알겠지만 불독 전형적인 무골이었던듯.

      
    부경대학교 대연캠퍼스에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구내 식당 이름이 워커 하우스(Walker House)이다. 말하자면  건물이 6.25 전쟁 당시 미 8군의 사령부로 사용되었다고  대구광역시에 그의 이름을 딴 미군부대인 캠프 워커가 존재한다.
    오늘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세계 경제선진국으로 살아가는 것이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월튼 해리스 워커(Walton Harris Walker)장군의 무조건 한국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오늘 날 그릇된 이념적 영향을 받은 이 땅의 젊은이들 가운데 종종 미국이 전쟁을 일으켰다 거나 남침이 아니고 북침이다.이란 설을 믿고 있는 전후세대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이 어떻게 일어선 나라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에 안타깝다.
     만약 6.25전쟁이 남에서 먼저 북침이었다면 전쟁이 발발한지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고 40일 만인 7월말에는 낙동강 하류의 지역을 제외하고 북에 거의 점령당한 일방적 전쟁이 될 수 있겠는가? 기독교에는 국경이 없지만 기독교인에게는 조국이 있어야 나라가 있는 것이다.  신앙자유를 가진 백성으로서 마땅히 조국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거룩한 책임이 아닐 수 없다. 민족이나 나라가 위험하였을 때 자신의 목숨을 바친 신앙인들을 알아봅시다.


    5. 애국에 몸바친 신앙인들
      성경에는 나라와 민족을 살리기 위해 애쓴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1) 죽으면 죽으리이다 각오한 에스더
    에스더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사 나라에서 종살이 하던 시절에 바사나라의 왕후 이었다.  당시 하만이라는 총리가 유난히 이스라엘사람들을 미워하던 중에 이스라엘 사람들 한꺼번에 몰살시킬 계획을 세웠는데 이런 음모를 알게 된 궁궐문지기였던 모르드개는 사촌 여 동생인 에스더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면서 지금 네가 왕후가 된 것은  바로 지금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고? 유대 민족이 몰살하게 되는 때에 하나님이 너를 통해 우리 민족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냐 만약 네가 잠자코 있으면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겠지만 너 혼자만 생명을 유지하려고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를 합니다.  모르드개가 이렇게 말했을때 에스더는 말하기를 나도 우리 민족을 살리기 위해 삼일 금식기도를 하겠으니 수산성에 있는 유대인들도 나와 같이 합심하여 금식하면서 이 문제를 풀어보자고 말했다. 높은 신분인 왕비 에스더는 자기 민족을 위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4:16). 에스더의 그런 의로운 희생이 있었기에 이스라엘은 하만의 흉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에8:17). 왕비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의 기도가 유대민족을 구한 것 처럼 때로는 국가가 어려울 때는 극도의 자기 희생이 요구된다.
     6.25전쟁때 우리의 선열들은 자기 목숨을 기꺼히 희생하면서 이 나라를 파멸의 위기에서 구했다. 이런 의로운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 민족이  오늘날  세계 속에서 자리잡아 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들도  6.25 전쟁기념 68주년을 맞이하여  민족을 위해  무엇을 기도해야 할 것인가?   가장 중요한  기도 제목을 말하고 싶다.


     (2)  나라를 위한 기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생명의 길임을 확신하면서 그토록 복음을 대적하고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자기 민족이 예수님께 돌아올 수만 있다면 자기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좋다고 하였습니다(롬9:3). 우리는 흔히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라고 하지만 그가 얼마나 자기 민족을 사랑하였는가를 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성도의 진정한 애국심은 우리 민족을 주님께 돌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려는 자세가 참된 애국심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롬10:1을 보면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이것이 얼마나 절실한 바울의 기도 제목이었는가를
     *롬9:1-2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무슨 말입니까? 자기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내 자신이 버림을 받고서라도 내 민족이 구원받는 것을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도 바울은 자기 민족에게 영적 구원의 부흥이 없이는 민족의 내일을 결코 낙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자기 민족에게 주시고자 했던 최고의 선물은 예수님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6.25는 비극이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민족의 새로운 희망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1907년 평양 대 부흥이후 한국 교회가 본격적으로 부흥을 경험하게 된 것이 6.25직후였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위태했던 낙동강 전선은 기도의 힘으로 지켜졌습니다. 300명의 목사님이 부산 대신동 초등학교에 모여서 일주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고 쾌청한 날씨를 허락하심으로 B29가 낙동강을 3일 동안 폭격하여 인민군들이 낙동강 전선을 넘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에는 맥아더 장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북한군의 허리를 끊을 수 있었고, 빼앗긴 서울을 3개월 만인 1950년 9월 28일에 서울을 탈환했습니다.  우리 민족은 6.25의 불행 속에서 다시 일어섰고 교회는 부흥되었고 민족은 재건되었습니다. 할렐루야!
     
    5. 평화의 고귀함을 깨달아야 한다
    6.25가 발발한 지 68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 민족에게 6.25는 아직도 커다란 상처와 고통으로 남아 있습니다. 남북으로 나누어진 겨레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분노와 복수심의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아마 우리가 쉽게 통일에 이를 수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전쟁의 상처가 깊고 서로에 대한 적개심이 깊이 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하고 미사일 발사에 열을 올리고 있다. 만약 한반도에서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 민족이 당하게 될 환란은 가히 상상하기 어려운 처지가 될 것이다. 북한의 핵개발은 우리 민족 전체의 운명을 위협하는 일이다. 전쟁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전쟁의 피해는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파괴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의 교훈을 기억해야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은 평화입니다. 마귀가 원하는 것은 분열과 분 전쟁입니다.


     (1) 자유와 평화는 공짜가 아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올해는 6.25 전쟁이 발발한지 68주년이 되었다. 오늘 자유와 번영이 주어졌지만 이것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고귀한 희생의 대가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잔학상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오늘이 있기까지는 수많은 순국 선열들의 희생과 살신성인의 헌신 더욱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북한 공산군의 침략과 싸우다 쓰러진 이름 모를 용사들도 있다. 생명을 바치면서 조국을 위기에서 건져낸  그분들에 먼저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정치인들이, 제대로 못해서 이렇게 된 것이지 왜 내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기도해야 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이 나라의 아픔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비록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잘못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북핵문제, 청년 실업률 고조, 츨산율저하, 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법에 관한 논쟁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 이런것들 보다 더 우리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평화를 위협하는 북한의 전쟁위협이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과연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에스더와 같이 느헤미야와 같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모두가 됩시다.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국가의 위기를 겪었을 때마다 자기 목숨을 바치면서 싸우다가 죽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이나라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서 간 선열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과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다시한번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마음에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말입니까.
    이 말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생활이 목숨을 바칠 만큼 가장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정말 말씀대로 살려면 교회를 위해 죽도록 충성해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내 생명을 살려주신 은혜가 감사하다면 목숨까지는 바치지 못하더라도 시간이나 물질쯤은 아니면 몸으로 땀 흘려 충성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런데도 실은 그렇게까지 하지 못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시대 우리의 목숨이나 우리 삶의 전체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일생동안 살아갈 때 내 목숨을 내 놓을 수 있을 만큼 값진 일이 무엇이겠냐고 묻는다면 저는 오직 예수님을 믿는 신앙생활뿐이라고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살고자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말씀대로 사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죽는 길뿐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말입니다. 진정으로 가정 사회 국가 교회를 사랑한다면 내가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죽어야 합니다 바울처럼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주님을 본받는 사람의 생활은 내가 바르게 죽어야 합니다 생각이나 말로 그치지 말고 실제로 내가 죽어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심각한 영적침체에 빠져있다. 무엇보다 교회가 영적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사람들의 수완이나 사회과학적 방법 그리고 지나칠 만큼 현대문화에 영합함으로 생명력을 잃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신령한 영적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라고 합니다. 미국은 매년 5월의 마지막  월요일이 현충일이다  1차 대전후 미국장병들을 추모하는 날로 기념하는 날인데 사실 현충일은 다른 국경일 보다 더 중요한 날임에 틀림없다. 6월은 현충일이 있는데 이날은 국가를 위해 희생된 선열들을 생각하는 날이다. 한국전쟁은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몇 년전 일어났던 천안함사태나 연평도 포격사건은 아직도 한국전쟁은 진행형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지금 무엇보다도 국가안보에 대하여 너무 해이한 상태는 정말 위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안보가 없으면 국가도 없고 국민도 없는데 안보불안은 날로 더해가고 있다.
    핵무기와 미사일을 보유한 전력의 현격한 북한의 우위는 너무 위협적임을 알아야 한다. 투철한 국가안보는 국민의 진정한 보훈의식으로 가능한 것이다. 국가를 위하여 생명을 바친 사람은 국가가 책임을 지고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우리와는 매우 대조적으로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람들을 영웅대접을 해주며 그 가족들에게 위로와 자부심을 주는 나라가 미국이라고 생각합니다.  
     
     6.25전쟁이 남긴 인류사적 교훈이 많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자유는 좋은 것이지만 평화와 번영은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고귀한 희생의 대가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미국의 수도 와싱톤 D.C.에 위치한 ‘ 메모리얼 기념공원 또는 한국전 기념공원’에 는 해마다 평균 320만 명이상이 방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프랭크 게일로드’의 조각 작품인 육, 해, 공군 군인이 판초 우의를 입고 앞으로 전진 하는 모습에서 깊은 감동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이곳을 방문하는 방문객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새겨진 문구입니다. 'Our nations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우리 미합중국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 전혀 알지도 못했던 나라의 자유를 위해 달려갔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딸과 아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 아래 시선이 반드시 닿을법한 넓은 돌벽에는 은색 글씨로 선명하게 이렇게 쓰여져 있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옆  그래 미국에서는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쳤다는 것이 얼마나 영예스럽고 그 후손들이 존경을 받는지 모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그렇게 되어지도록 힘써야 될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남북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대립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휴전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폐지. 국정원 기능축소, 미군 철수, 사드 배치 반대를 주장하는 부류들은 도대체 어느 쪽 사람인지 의심스럽다.
     6.25전쟁을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오늘날 처럼 존재할 수 있었을까 생각한다. 오히려 하늘이 도와 남쪽 반이라도 찾을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하는 데 말이다. 북한이 감행한 6.25전쟁이 일어나자 소련이 상임이사회의에 참석지 못하면서도 한국 파병이 이루어졌음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왜 우리는 한국 전쟁이 일어 난지 반세기가 흘러갔는데도 6.25 전쟁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가?.
    그것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끝나지 않은 휴전 상태일 뿐만 아니라 같은 민족끼리 상잔했던 비극적인 아픈 상처를 잊지 않고자 하는 데 있다.
    최근에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고, 조만간 북미정상회담도 이뤄지겠지만, 우리는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은 민족이다.
    분단의 원흉인 북한의 만행은 용서하되 그 상처는 잊지 말아야 한다. 바람이 있다면 6월 한 달 만이라도 여야 정파를 떠나 한마음으로 호국 영령들에게 추모의 마음을 갖고 유가족들을 위로하자.
    고도 미사일방어체계(사드·THAAD)의 한국 배치보다 북한 최전방 지역에 조밀하게 깔린 장사정포와 방사포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더욱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북한이 최근 군사분계선(MDL) 이북지역에 신형 방사포 300여문을 추가 배치한 것으로 드러나 수도권에 또 다른 위협이 되고 있다. 정부 소식통은 24일 "북한군이 지난 2014년부터 최전방 연대급 부대에 신형 122㎜ 방사포를 배치하기 시작해 최근까지 300여문을 깐 것으로 평가됐다"면서 "신형 122㎜ 방사포의 최대 사거리는 40여㎞에 이른다"고 밝혔다.
    만약 개성 부근에서 신형 122㎜ 방사포를 발사하면 경기 북부와 서울 청와대 인근, 인천 송도까지 사정권에 들어간다. 군은 북한이 다량의 인명을 살상할 수 있는 공격 무기를 최전방지역에 더욱 집중적으로 배치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하고 있다. 조만간 최대 사거리 200㎞에 이르는 최신형 300㎜ 방사포도 실전 배치할 전망이다. 이 방사포의 사정권은 육·해·공군본부가 있는 계룡대와 평택·군산 미군기지까지 이른다.
    정부의 한 소식통은 "북한이 최전방지역에 배치한 방사포를 발사하면 그 포탄을 격파할 수 있는 무기는 우리 군이 갖고 있지 않다"면서 "이를 무력화하는 방안은 발사하기 전에 선제 타격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군당국자는 "당장 사드 배치 문제보다 MDL(군사분계선) 이북에 있는 장사정포와 방사포를 무력화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는 것이 더 급선무인 것 같다"고 말했다.
     
    6. 안보마비가 된 오늘의 대한민국과 북 핵무기를 도운 대통령들 
    1997년에 김대중이 말했다. “북한이 핵개발한다는 증거가 있느냐. 책임질 수 있느냐?” 2001년에 또 “북한은 핵개발한 적도 없고, 개발능력도 없다. 대북지원금이 핵개발로 악용된다는 얘기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다. 북한이 핵개발하면 내가 책임진다”"핵개발 저지 골든타임에 북한을 도운 DJ-盧 정부"도 같은 대북정책을 가졌다.ⓒ뉴데일리

    ▲ 2000년 6월 북한 김정일을 만난 김대중 전 대통령.
    북핵(北核)에 대한 김대중의 말은 전부 거짓말이다. 북한은 네 차례나 핵실험을 했으나 김대중은 책임도 지지 않았다.
    김대중은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북한의 핵 위협은 계속됐다.
    노무현은 2006년에 말했다. “북한이 핵을 개발하는 것은 선제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이라.”고 했으니 엄연히 휴전상태에 있는 나라의 지도자가, 적의 백만대군이 총을 겨누는 가운데 핵무기까지 개발함을 두둔 했다.
    황당한 말인즉 세상에 공격용 무기와 방어용 무기가 따로 있다고? 북한이 개발한 핵무기는 남한 공격용이 아니다라는 것이 노무현의 생각이라면 6.25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을 죽이고 정전협정을 수만 번 위반하며 무장공비, 각종 테러를 통해서 대한민국을 끊임없이 위협한 북한정권을  노무현은 북한군 대변호인 같은 소리를 한 사람이다.
    대한민국을 한꺼번에 잿더미로 만들고 우리 국민 5천만을 단번에 시체와 이재민으로 만들어버릴 핵무기를 방어용이라고 했다.   2007년 평양까지 가서 김정일에게 말했다.
    “나는 지난 5년 동안 북핵 문제로 미국하고 싸워왔고, 국제무대에서 북측의 입장을 변호해 왔다.”고 고백 했다. 대한민국을 지키고 자유 민주주의를 변호해야할 대통령이 적군의 변호인이 되어 역적질을 했는데도 국민들은 안보에는 마비가 된 지금의 상태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에게서 본격화된 전염병은 전국에 번져갔다. 호남 모 대학교수는 핏대를 올리며 말했다. “북한의 핵은 미국을 겨냥한 것이다. 한국은 위험하지 않다.”고 하였고  고등법원의 모 부장판사도 “극우 세력이 탄압하니까 왼쪽으로 좀 간 거지, 요즘 세상에 종북(從北)이 어디에 있느냐?”
     
    문재인 정부의 계속되는 군약화 가속화현재 21개월인 군 복무 기간을 18개월로 단축하는 것은 단계적으로 추진해 가급적 임기 내에 완료하는 것이 목표다.  문 정부의 대북 정책은 큰 틀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의 햇볕정책으로 회귀할 것으로 예상된다 . 이후 "북한이 핵실험을 하지 않는다면" 등의 단서를 붙이긴 했지만 '제재·압박보다 대화·교류'라는 대북 정책의 기본 철학은 유지되고 있다. 문 대통령이 개성공단의 재가동과 확장을 거듭 강조했다는 점에서 개성공단이 첫 남북 대화 의제가 될 수도 있다. 
     
     이처럼 북한이 우리를 위협하는 일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데 우리 힘으로선 막아내는데 너무 벅차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국민들의 안보불감증은 너무 크고 정말 오늘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는 우리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대남정책은 우리 대한민국을 접수하여 김일성 김정일의 사상으로 이 나라를 뒤집어 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이나라의 교회를 뿌리채 뽑아 없애고 하나님 믿는 대상에 김정일 김일성의 부자를 신으로 믿도록 한다는 것이 그들의 선군정치의 목표이다.
    북한의 그런 위협속에서도 우리나라 만큼 발전되어진 나라도 없을 것이다. 한국전쟁 으로 우리나라는 황무지에서 시작하여 오늘날 이처럼 발전한 국가로 된 것은 그 원동력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국교회의 힘이 밑받침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는 이상 김정은의 계획대로는 안 될것이다는 확신한다. 오늘 우리가 셰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을 이루면서 세계에서 가장 잘 살고 있는 국민중의 하나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남북한이 정상회담을 하고, ‘평화’를 이야기한다. 일견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한두 달 전까지만 해도 눈에 쌍심지를 켜고 전면전 불사를 거론하던 대적 관계가 하루아침에 풀릴 수는 없다. 분란의 원인인 북한의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는 그대로 있다. 아니, 지금도 지하 무기공장에서 성능 개량과 추가 생산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중단한다는 핵실험은 시뮬레이션으로 대체하면 그만이다. 휴전선 이북 강원도 산간에 제2의 핵실험장을 짓고 있다는 첩보도 있다.
    남북 사이에 급작스럽게 일어나는 일들을 꼼꼼히 분석해보면 1950년 6·25전쟁 직전 상황과 몸이 오싹할 정도로 흡사해 기시감이 들 정도다. 핵 문제는 하나도 해결된 게 없는데 대전차 방호시설 철거와 대북 확성기 철폐, 국방개혁2.0이란 미명하의 장군 80여명 감축 등을 속전속결로 추진하고 있다. 스스로 자멸의 길을 가려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로와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죄문제를 해결할 분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사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성경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행전 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나를 위해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고난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마음이 찡하고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저절로 나와야 되지않을까요.
    그러니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은 것을 알면 예수님 사랑하고 예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하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한 것을 지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문제는 입으로만 예할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새롭게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변하면 행동이 변하고 행동이 변하면 우리의 습관이 변하고 우리의 습관은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인으로 자연스럽게 변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잠4:24)는 잠언의 말씀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나의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던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막10:45  자기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함이라 주님의 이런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주님께 충성을 바치고 때로는 순교의 삶을 바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목숨을 바치면서 싸우다가 죽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이나라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서 간 선열들의 자기목숨보다 나라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실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무엇을 얻고자할 때 값을 계산해서 돈으로 삽니다. 또 비슷한 것끼리는 맞바꾸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이란 돈으로 계산할 수도 없고 무엇과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마16:26하-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도 없고 돈 주고 살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귀중한 목숨을 조국의 안위를 위해 받쳤던 것을 기념하는 그날을 우리는 현충일이라고 하면서 현충일은 나라를 위해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쳤던 젊은이들을 잊지 않기 위해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 앞서간 선열들이 목숨을 바쳤기 때문에 이 나라가 있고 우리가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현충일을 신앙과 비교하면 더 의미가 새로워 집니다. 나는 누굽니까?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말입니까?.
    이 말은 에수님을 믿는 신앙생활이 목숨을 바칠 만큼 가장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정말 말씀대로 살려면 교회를 위해 죽도록 충성해야 되지 않습니까? 내 생명을 살려주신 은혜가 감사하다면 목숨까지는 바치지 못하더라도 시간이나 물질쯤은 아니면 몸으로 땀 흘려 충성을 해야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나도 살기 힘든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물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시대 우리의 목숨이나 우리 삶의 전체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일생동안 살아갈 때 내 목숨을 내 놓을 수 있을만한 값진 일이 있냐고 묻는다면 저는 예수믿는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남북 대치 상황은 계속되고 있고 북핵 문제로 요동치고 있는 한반도를 둘러싼 정황은 6.25한국전쟁을 잊을 만큼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도 않은데 말이다. 6·25전쟁이 남긴 가장 큰 민족사적 교훈이 있다면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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