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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들림은 말세성도들의 휴거를 예시한다인물 2018. 4. 18. 11:38
에녹의 들림은 성도들의 휴거를 예시한다. 창 5:21-24.히11:5-6
우리들이 사는 이 시대야 말로 가장 살기 좋은 시대임에 틀림없다. 봄에 모내기를 하여 가을에는 벼를 추수하는 것만 봐도 기계가 다 하고 있다. 물론 사람이 기계를 다뤄야 하지만 농사일에 기계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볍씨 뿌리는 파종기 모심는 이앙기 비료나 퇴비 뿌리는 살포기, 농약 뿌리는 분무기 곡식거두는 콤바인 곡식 터는 탈곡기 턴 곡식을 운반하는 트레일러 등 농사를 제대로 지으려면 6-7가지 기계가 있어야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알고 보면 논농사도 사람손이 가는 것은 얼마 안되고 대부분 기계가 대신하고 있으니 얼마나 살기 좋은 시대인가요 어디 그뿐인가요 집에서도 주부들이 살림할 때 설거지는 초음파세척기, 빨래는 세탁기. 집안청소는 로벗청소기 밥은 전기밥솥, 요리는 전자레인지가 시간만 맞춰노면 알아서 척척하는 그야말로 정말 인간이 이 땅에에 살면서 이렇게 편리해진 시대는 처음있는 일이다. 또 냉 난방과 취사도 수천년 동안 산에서 나무를 해다 도끼로 쪼개 아궁이에 불을 때야 난방을 하였다가 그후에는 연탄을 때다가 지금은 가스로 난방 취사를 하니 우리들이 생활하는 모든 것이 기계를 이용하다보니 일자체도 쉬워지고 시간도 절약되어 과거보다 훨씬 좋아지게 된것만은 확실하다. 생활자체가 점점 편리해지니 시간이 많이 남아돌아가지만 그렇다고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 잘 믿느냐 성경을 더 많이 읽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생활은 삶이 편해질수록 점점 멀어져 간다는 것도 또한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편해진것 만큼 남는 시간을 취미생활, 동호회 등 세속적인 일에 치우치다보니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점 멀어질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 사는 믿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8:8)인자가 올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이 바로 이 시대를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사탄은 바로 마지막 때 사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편리한 삶을 살도록 환경을 만들어 줘 사람마음이 교회나 예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는 것이 저들의 전략인데 얼마나 잘 맞아 떨어지는지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사탄은 현대 문명을 통해서만 신앙을 후퇴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또 사람들의 말이나 생활속에서도 이미 자기들의 이미지를 다 박아 나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사탄 문화에 빠져들게 하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사탄의 세력의 범위에서 벗어나 사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2017년에 수많은 관객을 동원한 신과함께 죄와 벌이란 영화는 줄거리가 이런 것이다. 어느 소방수가 화재진압하다 죽어서 지옥에 가서 49일동안 7번 재판을 받아 다시 환생한다는 것을 주제로 하여 사람들에게 과연 지옥이 이런 곳이라고 영화를 통해 알려주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다른 것은 잊어버려도 지옥이 영화에서 보았던 그런 곳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사탄은 실제 지옥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이처럼 가짜 지옥을 마음에 심어줘 수많은 영혼들을 이시간도 불타는 지옥으로 가도록 미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옥은 영화처럼 그정도 한가한 곳이 아니다. 유황이 불타는 불못이며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수 없는 영원히 불가운데서 형벌을 받는 곳이며 마귀의 고통을 매순간 받아야하는 정말 말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너무 끔찍한 감옥이다. 선하게 살았다는 이유로 재판받아 환생하는 곳이 결코 아니다. 사탄이 영화를 통해 지옥을 너무 미화시킨 것이다. 성경도 예외는 아닙니다. 지옥이란 말대신 음부니 스올이니 하면서 불타는 지옥을 단지 저승세계로 기록을 한 데가 한국교인들이 가장많이 읽는 개역성경에는 수없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도 지옥에 간다하더라도 별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도록 지옥이란말 자체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세상의 임금인 사탄마귀가 어떻게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지 마귀 전략에 대해 좀 살펴 볼까요 ?
어느 날 멋진 봉투 속에 들어있는 초대장 하나가 배달되었다고 상상해보자. 그 초대장에는 “불행과 근심, 고통이 가득한 삶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라는 초대 글이 적혀있다면 과연 누가 이 무례한 초대에 응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것은 상상이 아닙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탄이 유혹하는 이런 초대에 단호하게 거부하지 못한채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지요. 사탄은 거짓을 통해 사람들에게 허황된 꿈을 갖도록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에게 “네가 이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구별하게 된다.”는 그럴듯한 거짓말에서 보듯 사탄은 절대로 우리에게 나쁜 일이 생길 것 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말대로 따르기만 하면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거짓말로 유혹하는 것이 저들의 전략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습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오는 목적은 뺏고 죽이고 멸망시키 위해 오는 것입니다. 마귀가 가정에 들어오면 가족이라도 서로 불신하도록 만들어 남편과 아내를 갈라놓고 부모와 자식 사이에 벽을 세우고 결국은 이 땅에서 천국 모델인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 사탄의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도 끊임없는 사탄의 공격에 직면하고 있으므로 저들을 경계하지 않으면 사탄에게 이용당하기 쉬은 것이 현실입니다. 사탄이 우리 인간을 넘어지게 하는 무기는 무궁무진한데 가장 잘 사용하는 무기들 몇가지만 소개할까 합니다.
1. 교만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면서 효과적인 무기가 바로 교만이란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하나님과 동등해지려는 교만 때문 선악과를 따먹어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도 교만이란 무기로 접근하면 아주 쉽게 넘어진다는 것을 사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함으로 큰 복을 받은 유대나라 웃시야 왕이 교만으로 인하여 폐인이 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웃시야왕은 다윗왕과 솔로몬왕에 비유될 정도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았던 왕이었으르모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큰복을 받았던 왕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애굽까지 명성을 떨쳤으니 웃시야가 얼마나 강성한 왕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형통한 복을 받았던 웃시야 왕의 교만 때문에 하루 아침에 몰락한 것을 알고 있는지요?
그는 16세에 왕위에 올라, 52년 동안 유다를 통치했습니다.
대하 26:4 그가 자기 아버지 아마샤가 행한 모든 것에 따라 주의 눈앞에서 올바른 것을 행하며 5 하나님의 환상들에 관하여 이해하는 스가랴가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그가 주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형통하게 하셨더라.
그는 하나님앞에서 올바르게 행하여 그가 주님을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주 덕망있는 왕이었는도 웃시야는 왜 불행한 인생으로 마감해야 했을까?
대하26:16 불행의 씨앗은 그가 강하게 되매 그의 마음이 높아져서 그가 파멸에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주 자기 하나님께 범법하고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제단에 분향하려 하였기 때문이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웃시야 왕이 교만하여져서, 주님의 성전에 들어가 자신이 직접 분향을 하였다고 합니다. 성전 향단에 분향하는 것은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성역입니다. 이 때 웃시야 왕이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려는 교만한 행동을 가로막은 사람이 있었으니 제사장 아사랴인데
17 제사장 아사랴가 주의 제사장들 곧 용맹한 자들 팔십 명을 데리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18 그들이 웃시야 왕을 막으며 그에게 이르되 웃시야여 주께 분향하는 일은 왕에게 속하지 아니하고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거룩히 구분된 아론의 아들들인 제사장들에게 속하였으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법하였은 즉 주 하나님으로부터 그 일로 인해 영예를 얻지 못하리이다. 하니라. 정말 제사장 아사랴는 웃시야의 교만을 올바르게 지적하였던 훌륭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웃시야는 교만하여 그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진노했다 19 그 때에 웃시야가 화를 내며 분향하려고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그가 제사장들에게 화를 낼 때에 주의 집에서 분향제단 옆에서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솟으니라. 그렇습니다. 그는 교만으로 인해 끝내 고침받지 못하고 문둥이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여러분, 주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기만 하면 형통의 복을 받게 되거늘, 교만하여 스스로 무덤을 파게 되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마귀가 인간을 파멸시키는 전형적인 무기가 교만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이 교훈을 통하여 깨달아야 될 것은 나도 하나님보다 내 명예나 재물이나 인기를 의지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웃시야 왕이 가졌던 교만이 나에게는 없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2. 절망
교만이 사탄의 공격용 무기라면 절망은 방어형 무기이다. 절망은 성도들을 낙심케 함으로써 하는 일을 중단케 만드는 방법인데 이역시 의외로 많은 사람에게 생각이상의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교만에 안 넘어가는 사람도 이 방법에는 쉽게 넘어간다. 절망은 자포자기나 자살에 이르는 병이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빈번하게 발생하는 자살사건들은 바로 사탄의 두 번째 전략무기에 넘어간 증거이다.
3. 거짓말
거짓말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사탄에 의해 세상에 번지기 시작했다. 사탄은 처음부터 거짓을 빼고선 말할 수 없다. 진리와 거짓은 같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거짓말이 얼마나 심각한 잘못인지는 십계명 9번째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지니라”(출 20:17)를 보면 알 수 있다. 거짓말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면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을 때 불량자 둘을 세워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거짓말하게 해 나봇을 죽게 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왕상 21:1 이 일들 뒤에 이러한 일이 있었더라. 예스르엘 사람 나봇이 예스르엘에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사마리아왕 아합의 궁궐에서 매우 가까이 있더라.
2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포도원이 내 집에 가까이 있으니 그것을 내게 주어 내가 그것을 채소밭으로 삼게 하라.
내가 그것 대신 더 좋은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혹시 네가 보기에 좋거든 내가 그것의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하매
3. 나봇이 아합에게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의 상속 재산을 왕에게 주는 것을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하니
4 예스르엘 사람 나봇이 자기에게 한 말 즉 그가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조상들의 상속재산을 왕에게 주지 아니하리이다 한 말로 인하여 아합이 근심하며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빵을 먹으려 하지 아니하니라.
5 그러나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나아와 이르되 왕의 영이 어찌하여 이같이 슬프게 되어 왕께서 빵도 들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매
6 그가 그녀에게 이르되 그 까닭은 내가 예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말하며 그에게 이르기를 돈을 받고 네 포도원을 내게 달라, 아니면 네가 기뻐하거든 내가 그것 대신 다른 포도원을 네게 주리라 하였으되 그가 응답하기를 내가 내 포도원을 왕에게 주지 아니하리이다 하였기 때문이라 하니
7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이르되 왕이 지금 이스라엘왕국을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빵을 드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예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에게 드리리이다 하고는
8 이에 그녀가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고 그의 인으로 봉인하고 나봇의 도시에서 그와 함께 거하던 장로들과 고귀한 자들에게 그 편지를 보내니라
9 그녀가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가운데 높이 앉힌 뒤에
10 밸리알(히브리어: בְּלִיַּ֫עַל, 라틴어: Belial)은 유대교 외경에 나오는 단어로 부도덕이나 가치 없음과 같은 악에 성격을 부여하여 사용하는 말이다. 히브리어로 ‘불량자’, ‘건달’, ‘사악한 자’라는 뜻이 있다)의 이들 두 사람을 그 앞에 앉히고 그를 대적하여 증언하며 이르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모독하였다' 하게 하고, 그 뒤에 그를 끌고 나가 돌로 쳐서 죽이라." 하였더라.
<그대로 순종하는 장로들과 귀족들>
11 그의 도시의 사람들 곧 그의 도시의 거주민들인 장로들과 고귀한 자들이 이세벨이 자기들에게 보낸 대로 곧 그녀가 자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 대로 행하여
불량자 두 사람이 들어와 그의 앞에 앉고, 백성 앞에서 나봇에 대하여 증언을 하여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그를 성읍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였다.
<포도원을 차지하러 내려가는 아합><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시는 하나님>
17 주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8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의 왕 아합을 만나라. 보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소유하려고 거기로 내려가 거기에 있나니
19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죽이고 또 소유로 빼앗았느냐? 하고 또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피도 핥으리라' 하라."
23 또 이세벨에 관하여도 주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예스르엘 성벽 옆에서 이세벨을 먹으리라.
4. 외식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외식이다. 외식은 천국 가는 길을 막는 마지막 전술이다. 사탄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과 성경 읽는 것, 교회 가는 것과 봉사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막을 수 없을 때 사용하는 마지막 무기가 바로 외식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기도를 외식으로 거룩하게 하고 성경을 외식으로 읽게 한다. 교회 출석을 외식으로 하게하고 봉사를 외식으로 하게 한다. 여기서 바리새인 같은 위선자가 나온다. 따라서 우리는 잘못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이 사탄의 공격임을 깨닫고 진리의 말씀으로 대적해서 그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거짓된 초대를 물리치고 승리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비결임을 깨닫아야 한다.
사탄의 견고한 진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이미 우리사회나 문화속 깊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한가지 예로서 회사 사장이나 간부들의 명패를 디자인한 것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용의 그림이 디자인되어 있다 크리스천 사장들의 명패에도 용의 그림들이 책상위를 점령하고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그리고 대통령 휘장으로 사용하는 그림이 바로 봉황인데 이 봉황은 10가지 짐승을 조합한 상상의 새이다.
봉황의 목은 뱀으로 되어 있고 부리는 닭으로 꼬리는 물고기로 그리고 그 가장 잘 보이는 몸통은 용으로 되어 있다. 봉황이란 암놈은 봉 수놈은 황이라고 하며 이렇게 생긴 새를 예부터 상스러운 새라고 하여 임금이나 대통령의 휘장에도 이미 자리잡은 지가 수천년이라는 것입니다. 이 용의 세력들이 대통령의 집무실과 모든 표창장에 자리잡고 있으니 이제는 그 들의 세상권위를 이용하여 사탄의 문화는 온 나라의 각 가정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중이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사단을 찬양하는 춤과 노래가 우리들 생활속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귀와 입을 즐겁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사탄의 문화로 채색되고 점령당한지 이미 오래전부터였다 이러한 사탄문화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 삶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문화에 휩쓸리지 않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경건하게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에녹에 대하여 알아보자.
에녹의 믿음 창 5:21-24. 히11:5-6
창5: 21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365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히11: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오직 경건한 삶입니다. 경건이란 약1:27에 보면 하나님을 섬길 때 순수하고 더렵지 않은 신앙행위는 이것이니 즉 고난중에 있는 아버지 없는 자들과 과부들을 돌아보고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지켜 더럽혀지지 아니하는 것이니라.
경건하게 살다가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 바로 창세기 5장과 믿음의 족보를 기록한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고 있는 바로 에녹이다.
아담의 7대손 에녹은 지금 우리 시대와 비교하면 너무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마치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365세를 살았고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시대와 비교하면 굉장히 장수한 것이지만 당시로는 아주 짧게 살았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사실이며, 그럴 수가 있을까"하고 반문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성경은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 무오한 진리의 말씀임을 믿지 못한다면 이는 허구에 그치는 얘기로만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놀라운 사실입니다.믿고 안 믿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에녹은 오래 산 것이 아니라 너무도 짧게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이 본래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던 것입니다 (창2: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있는 혼이 되니라). 인생은 영생하는 존재로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 유혹을 받아 죄를 지어 영원한 생명을 상실했습니다. 우리가 이사실을 알고 나면 이보다 더 억울하고 분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경은 영생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영원토록 살아갈 피조물로 창조된 것이 바로 우리 인생인데 영생을 잃고 일천년을 산다 하더라도 실은 짧은 생애입니다. 본래 인간은 백년 천년 사는 것이 아니라 영생하는 영물로 창조된 줄 믿습니다. 천사보다 더 잘 만들어 놓은 창조물이 바로 인간인데 천사가 죽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면 우리들도 정말로 영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죄값으로 인하여 인간 수명은 노아 홍수 후에 팍팍 줄어들어 모세가 살았던 시대로 내려오면 모세는 120세에 죽었고 대부분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들럼 짧은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시편 90편에 기록하기를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편90:10)고 한것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같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금처럼 짧게 살거나 아담시대처럼 900년 이상을 산다고 하여도 중요한 것은 죽은 후에 어디서 다시 사느냐가 중요한 것 아닙니까? 아무리 오래 살아도 가인처럼 천국에 갈 수 없다면 불행한 것이고 오늘 나오는 에녹은 당시로 보면 아주 짧은 삶을 살았지만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올라갔다고 하니 이제까지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중에서 가장 행복하였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과연 에녹을 이 땅에 있었을 때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1.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에녹은 아브라함이나 야곱처럼 그의 전 생애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너무도 짧은 기록을 남긴 사람이지만 성경은 그의 믿음을 한마디로 ‘하나님과 동행’이라고 2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 에녹입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모든 인류의 조상 아담부터 시작하여 몇세에 누구를 낳았고 몇세까지 향수하다가 몇 살에 죽었다고 하는 것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인류의 조상 아담이 130세에 셋을 낳은 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고 930세를 살고서 죽었더라를 시작하여 실은 모든 인류는 사망급행열차를 탄채로 사망이라는 종착역으로 달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조상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마귀의 유혹으로 죄를 지은 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아무도 사망을 향해 가는 열차를 타고 중간에 내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장을 보면 마치 산부인과 병동에 와 있는 것 처럼 온 집에 아기 울음소리로 가득찰 것입니다. 불임증으로 어려움을 겪는 여인이 있다면 아마 이 본문을 읽으시면 금방이라도 아기를 잉태하여 출산할 기분일 것입니다. 마태는 서두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1:1)고 하면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하면서 16절에는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서 그리스도라하는 예수님이 태어나시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낳는 생명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고 했습니다.
아담 안에 죽어가는 인생이 예수 안에 오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담의 역사는 죽음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역사는 생명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바로 에녹이 생명의 깃발을 흔들면서 사망의 열차를 정지시켰던 최초의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가아만 하는 사망을 통과하지 않고 하늘로 직행하였던 최초의 전설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죽음을 거치지 않고 곧장 천국 간 두사람 나옵니다.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 간 엘리야와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에녹입니다. 에녹은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족보인 히브리서 11장에 아벨 다음으로 등재된 사람입니다. 히브리 11: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다고 합니다.
곧장 천국으로 옮겼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옮겨졌다는 말씀이 5절에만 3번이나 있습니다.
히브리서 9: 27 말씀에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라 했지만 에녹은 이 법칙에서 벗어났습니다. 인생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길이라고 다 그렇게 믿고 있었지만 에녹은 이런 고정관념을 한방에 날려버렸습니다. 에녹은 아무도 피할 수 없었던 사망의 길을 피할 수 있있던 비결은 창세기 5장 24절을 보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에서 동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모두 에녹처럼 하늘나라로 들려 올라가게되므로 에녹이 받았던 축복을 우리들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에 증거하 아래에 있습니다.
델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마지막때 살아남은 자들이 휴거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가 하늘나라로 올라갔다는 생생한 메시지는 우리들도 이 땅에서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하늘로 옮겨질 수 있다는 확실한 소망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멘
동행의 뜻은 마치 한 몸을 이룬 커플처럼 항상 친밀한 교제하는 것이 동행을 뜻합니다. 에녹은 늘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인데 에녹이 하나님과 300년 동안 동행 했다는 것은 한 순간도 하나님과 떨어진 적이 없는 친밀한 교제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에녹에겐 하나님과 동행한 시간보다 더 중요한 시간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너무너무 행복한 시간이 그가 이땅에서 살았던 삶의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땅에서 살 때 사랑하는 사람과 동행할 때 정말 행복한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동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매순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가 생각하지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면 우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세상이나 이세상안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동행은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창5:22에 보면 "(에녹이)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은 에녹이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적인 일에는 관심끊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혼자 산속에 들어가서 수도사 처럼 산것도 아니며 에녹도 자녀를 낳고 다른사람들 처럼 평범한 가정생활을 하면서도 믿음과 경건을 유지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당시 시대적 분위기가 신앙생활하기에 좋았느냐 하면 오히려 가인 계열에서 쏟아내는 죄악의 물결이 온 세상에 관영하였으므로 이미 에녹 시대부터 하나님의 심판이 예언되기 시작했다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유1:15)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심판을 집행하사 그들 가운데 경건치 아니한 모든 자들이 경건치 아니하게 범한 모든 경건치 아니한 행위와 또 경건치 아니한 죄인들이 그분을 대적하여 말한 모든 거친 발언에 대하여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에녹이 예언한 이 부분을 쉬운 성경으로 보면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아담의 칠 대 후손인 에녹은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수많은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곧 오실 것이다. 오셔서 각 사람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에게 벌을 내리실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악한 일들과 하나님에 대해 마음대로 떠들어 댔던 죄에 대해 그들은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에녹의 예언은 당시의 죄악을 심판한다는 말씀도 되지만 놀랍게도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그가 누구이길래 이렇게 정확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할수 있었는가. 수천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에 대한 비밀을 더듬고 나서야 이 예언을 이해할수 있을 것입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므두셀라 라고 지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은 '그가 죽으면 심판을 내린다' 라는 의미입니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지으면서 '그가 죽으면 심판을 내린다' 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앞으로의 계획을 에녹과 나누셨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처럼 므두셀라는 심판이 있었던 해에 죽었는데 그 때 나이가 969세 였고 므두셀라의 손자 노아의 나이 600세 가 되던 때 이다.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창 7:6).
에녹은 세상의 첫번째 심판을 아들의 이름을 통하여 예언을 하였으며 그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 졌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에녹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을 예언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위에서 증거했습니다.
에녹의 예언이 입증하고자 하는 무엇인가? 이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를 통하여 죄악된 세상을 예언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전에 있을 매우 중요한 사건 바로 성도들의 휴거를 예녹을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홍수 심판이 있기 전에 에녹을 데려 가셨으며 에녹을 통하여 마지막 심판을 예언하시고 그 심판 전에도 에녹처럼 성도들의 휴거가 있을 것임을 입증하신 것이다. 홍수심판전 에녹의 들림은 마지막 심판전 성도의 들림에 대한 본보기인 것이다. 성경의 매우 작은 부분에서 몇번 거론되었던 에녹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진리의 비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들의 휴거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우리들로써는 성도의 휴거의 본이 되는 에녹의 삶에 대하여 매우 심도 있게 접근 하여야 할것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11: 5~6)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히브리서에 나왔듯이 그는 창세기에 나와 있는 것 처럼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였습니다. 그의 삶을 보면서 어렴풋이 휴거될 성도들의 삶의 모습이 그려질 것입니다. 유다서에는 말세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20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너희 자신을 세우며 성령님안에서 기도하고 21하나님의 사랑안에서 너희 자신을 지키며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유 1:20-21)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어도 매 순간 순간 아버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실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충돌할 때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동행하신 비밀입니다. 이것 또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비밀이었고, 이것이 또한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동행할 수 있는 성공의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누가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마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도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를 따라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하루 이틀이 아니고 어떻게 평생동안 흔들림 없이 동행하는 일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에녹이 경험했던 몇 가지 이유를 추정하면 동행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1) 첫째,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의 삶을 살기를 작정한다면 주일이 일주일 중 가장 소중한 하루가 되어야 하고 교회오는 것이 재미가 있어야 하고 예배드리는 시간이 가장 중요한 시간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이렇게 주일이 자주 돌아오나 일은 쌓여만 가는데 하면서 불평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인격적인 분이시라 교회에 나오면 하나님한데만 마음을 드려야지 예배중에 휴대전화 오는 것을 기다린다든지 문자를 보낸다든지 하는 것은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 주일날 하루만이라도 휴대전화에서 해방된다면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이 흐트러질 것 같아서 그렇면 하나님 앞에 온전히 마음을 드리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간단한 것만이라도 순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둘째 하나님의 심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왜 경건하게 살지 못하는가는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이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에게는 믿고 구원받았으면 정죄의 심판, 멸망의 심판은 면제되지만 그리스도인에게도 상급 심판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0에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언어, 생각, 낱낱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심판받게 된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날 부끄러움 없이 주님앞에 서기를 준비하신다면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준비하십시오. 에녹처럼 순종하는 믿음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안에서 거듭난 사람인가 아닌가는 내가 지금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3) 셋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히11장 5절에서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의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에녹처럼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대표적인 인물 두 명을 골라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그의 믿음이 인정 받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믿음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목숨과도 결코 바꿀 수 없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물로 바치기로 결심을 하는 순간 그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창22:12). 즉 순종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에 관해서는 사도행전 13: 22에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정시대에 이 땅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딱 맞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왕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만나고 나서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다윗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다 이루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것이며 마태복음의 시작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다윗이 세상에 나오기 전 노아보다도 약 1000전에 살았던 아담의 7대손 에녹은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었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던 믿음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경건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없다고 하였습니다. 경건하려면 늘 때를 가리지 않고 무시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고 친밀한 교제를 나눠야 합니다. 한 순간도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있어선 안됩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시편 기자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시편53:1)고 했습니다. 여기 "어리석다"는 말은 양심이 메말라 죽어서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즉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입니다(디모데전서4:2). 이런 사람들은 감정이 메말라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무감각한 사람입니다(마11:17).
그러나 이 땅에서 가장 복된 인간은 하나님의 임재를 믿고 하나님의 심판과 상급을 믿으면서 항상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에녹같은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을 믿으면 아멘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200만명을 이끌고 출애굽을 하여 나가는 모세를 향해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애굽기3:12)고 했으며,
가나안 정복길에 들어선 여호수아에게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여호수아1:9)고 했으며,
민족의 위기 앞에 선 이사야에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41:10)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동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여기 함께 한다는 것은 ‘동행’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동행하기를 원하셨던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마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싫어하고 사탄의 달콤한 말에 속아서 하나님께 불순종의 죄를 범한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하나님의 곁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끝없이 인간에게 손을 내미셨다. 그래서 다시 인간과 함께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동행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땅에 임마누엘이란 이름으로 오신 것이다. 임마누엘이 무슨 뜻이냐고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임마뉴엘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마지막 승천하실 때 세상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이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고 약속 하였으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 끝나는 그 날 까지 결단코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저나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믿고 사는 믿음이다. 바울 사도는 인간의 사는 목적에 대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했다. 인간이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할 때가 행복한 삶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가정과 자신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지만 큰 목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한다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사도요한은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5-6)고 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갖고 살았으며 또한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우리들도 에녹처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만 에녹처럼 하늘나라로 들려올려져서 영원한 기쁨과 상급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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