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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의 소명 렘1:1- 19
아몬-요시아-여호아하스-여호야김-여호야긴(여호야김아들)-시드기야
1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하나인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들이라 2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 시대 곧 그의 통치 십삼 년에 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고 3 그것이 또한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십일년 말곧 다섯 째 달에 예루살렘이 포로로 끌려갈 때 까지 임하니라
4 그 때에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뱃속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거룩히 구별하였으며 너를 민족들을 향한 대언자로 세웠노라 하시기에 6 그 때에 내가 이르되 ,아, 주 하나님이여 !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을 할 수 없나이다, 하니라. 7 그러나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나는 아이니이다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할 모든 자에게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건져내리니 그들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라. 주가 말하노라, 하시고 9 그 때에 주께서 자신의 손을 내미사 내 입에 대시며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들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이날 너를 민족들과 왕국들 위에 세워 그것들을 뿌리채 뽑고 무너뜨리며 파멸시키고 파괴하며 세우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11 또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에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기에 내가 이르되 내가 아몬드나무 막대기를 보나이다 하매 12이에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내가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내 말을 재촉하리라. 하시니라. 13 주의 말씀이 두 번째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기에 내가 이르되 내가 끓는 가마솥을 보는데 그것의 표면이 북쪽을 향하고 있나이다, 하니 14그 때에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북쪽에서 재앙이 쏟아져 나와 그 땅의 모든 거주민들에게 임하니라. 15보라 내가 북쪽 왕국들의 모든 가족들을 부르리라. 주가 말하노라 그들이 와서 저마다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자기 왕좌를 정하고 그곳의 사방 모든 성벽과 유다의 모든 도시를 치리라 16 그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에게 경배하였은즉 내가 그들의 모든 사악함에 대하여 그들을 향해 나의 심판을 선고하리라 17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의 얼굴을 대할 때에 놀라지 말라. 내가 그들 앞에서 너를 당혹스럽게 할까 염려하노라 18 보라 내가 이 날 너를 그 온 땅과 유다의 왕들과 그것의 통치자들과 그것의 제사장들과 그 땅의 백성을 칠 방벽을 세운 도시, 쇠기둥, 놋 성벽이 되게 하였노라. 19 그들이 너와 싸우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건져 내리라. 주가 말하노라
예레미야는 아나돗에서 태어나 약 40여년 동안 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 예언을 했습니다. 그는 요시야왕 13년(B.C.627)부터 예언을 하기 시작하여 여호아하스왕, 여호야김왕, 여호야긴왕, 시드기야왕 때(B.C.586)까지 예언을 했습니다. 요시야 13년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시작하였는데 요시야의 통치는 기원전 640년부터 609년까지 였으니 대략 627년 경에 첫 계시의 말씀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의 사역은 여호야김시대를 거쳐 시드기야 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데 이 두 왕은 모두 요시야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개혁적이었던 요시야 임금과는 달리 그 두 아들은 개혁과 거리가 있습니다. 여호야김 통치 초기 때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종교개혁을 시도합니다.
주께서 예레미야에게 성전 뜰에서 가감없이 외치라고 명하신다. 너희는 나에게 순종하지 않았으며 내 율법을 행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악한 길에서 돌이키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던 뜻을 돌이키시겠다고 말씀하면서 끝가지 돌아오지 아니하면 ."내가 이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렘 26:6). 고 외친다.
실로같이 되게한다는 것 법궤를 블레셋에 빼앗겼을 때를 생각한다면 법궤없는 성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이 말씀을 오늘날 거창한 교회건물을 지은후 많은 사람이 모일 것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은행 빚을 끌어다가 성전건축을 하였는데 그 때부터 건축 빚을 해결해 달라는 기도이다. 재정이 점점 더 악화가 되자 교육비, 선교비, 구제비, 모든 것을 동결 시킨다. 교회 건축을 무리하게 하여 파산선고를 하는 교회가 해마다 늘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너희들이 성전만 잘 짓고, 제사만 드린다고 너희에게 축복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성전 문에서 외치게 하였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이웃에게 정의를 행하고 가난한 고아나 힘없는 과부나 이방인을 압제하지 않고, 무죄한 자에게 피를 흘리게 하지 말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하심을 기억하며 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알고 따르는 길만이 교회가 살길이다. 교회 안은 장사하는 곳도 아니고, 친목회 모임을 하는 곳도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을 듣고 실천하며 뜻을 세우는 곳이다.
교회가 잘되기 위해서는 먼저 이웃사이에 정의가 먼저 세워져야 한다. 사랑과 용서라는 명목 하에 모든 일에 질서가 없어서는 안 된다. 이웃 사이에 지켜야 할 것은 지키라는 것이다. 일부의 몰상식한 교인들이 이웃남자의 아내에게 '자기'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힘없이 외롭고 혼자 사는 여인들을 도와준다고 하는데 혼자 산다고 만만히 보고 아무 때나 전화를 한다든지 성적희롱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어린이와 과부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무례한 행동이다. 어린아이와 과부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구원한 자들이다. 그들을 무시하는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윽박지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는 내가 만만히 보고 상대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핏 값을 치루고 택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에레미야가 활동하던 당시에도 성전지도자들은 성전을 발판삼아 막강한 부와 권력을 누렸다.
사실 예레미야는 유다를 향한 마지막 회심의 기회라고 보았다.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돌이킬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에레미야가 이 성전을 실로같이 될 것이라고 저주하고, 이 성이 황폐하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하면서 예레미야를 잡아 죽이려고 한다. 유다의 고관들은 예레미야가 한 말을 근거로 예레미야가 죽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결함.
이 장면에서는 예수님이 생각난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무리들. 예수님의 죄 명도 성전을 허물어 질 것이라는 것에 대한 것임을 생각한다면, 예레미야와 예수님은 유사성을 가진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것으로 죽음에 위협을 당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심으로 죽음에 이른다.
에레미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지방의 장로 중 몇 사람이 일어나 온 회중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이 우리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였으니 죽일 만한 이유가 없다.
예로써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에 대해 예언하기를 시온은 밭가는 경작지가 되고,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가 되며,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했으나, 유다 왕 히스기야가 그를 죽였느냐?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주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지 않았느냐
시드기야는 유다의 마지막으로 기원전 598년 12월 중순부터 597년 3월 17일까지 왕위에 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그의 조카 여호야긴을 대신하여 왕이 된 요시야의 아들입니다. 시드기야는 12년의 왕위에 있었는데 여호야김과 예레미야가 적대적관계를 보인 것과는 달리 의논할 필요가 있을 때는 예레미야에게 자진해서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때로 예레미야를 보호하기도 한 왕이었습니다(렘 21:1-10 참조).
이 시기에서 볼 수 있듯이,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해야할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선지자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말은 쉽게 할 수 있지만 가슴 아픈 말은 하기가 어려운 법이듯이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유다와 예루살렘 멸망에 대해 선포하고, 거짓 선지자들이 다 평안하다 외칠 때, 바벨론에게 항복하고 포로로 가라고 예언을 합니다. 그래서 매국노로 오인을 받기도 하는 그 저항을 우리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1. 예레미야가 받은 소명 (1-10절)
1-3절에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십일년 말까지 곧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임하니라"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예레미야 위에 내렸습니다. 뱃속에서 그를 짓기도 전에 그를 아셨고, 태중에 나오기도 전에, 그를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니다. 그리고 그를 여러 민족들을 향한 대언자로 세우셨습니다.
예레미야의 부르심은 어느 날 아무나 찍은 것이 아니라 이미 작정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구체적이며 적극적입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정하시고 그 정하신 바를 보이지 않는 섭리의 손길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바입니다.
8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렇게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말고 전하라고 하시면서, 예레미야의 필요를 외면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두려움을 아셨으며, 이에 대한 대비책도 있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원하신다 하니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여러번 죽을 위기를 넘깁니다. 구덩이에 갖히기도 하고, 왕과 적대관계로 인해 죽음의 위기를 맞습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하시니 질병도 어려움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말씀을 잘 못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런 모든 눈물골짜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결국 그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시어 우리로 하여금 유일한 위로이신 그리스도로 만족케 하실 것임을 신뢰케 하시는 그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같지 않으심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두려움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시고 위로하시며, 거기서 구원하실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내가 겪는 고난 가운데 이 사실을 확신있게 믿고 있습니까?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것은 세차례입니다. 첫번째는 여호야김왕 때이고 두번째는 여호야긴왕 때이고 세번째는 시드기야왕 때입니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왕 때를 예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살던 B.C 7세기말에서 6세기초에는 시대적으로 유다의 역사상 가장 처참하고 암울했던 시기였습니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영원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죄를 지적하고 바벨론에 사로잡혀 갈 것을 예언합니다. 그 후 실제로 나라가 바벨론의 침략으로 인해 완전히 패망하고 유다인들은 사로잡혀 갔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고 유린되었습니다. 그런 고로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범죄는 생각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B.C.586년에 바벨론이 유다를 점령하고 유다인을 사로잡아 갈 때에도 사로잡혀 가지 않고 유다 땅에 남아 유다에서 예언을 했습니다. 그 후에 유다에 남은 백성이 애굽으로 피난을 가면서 그를 끌고 갔습니다. 예레미야는 애굽에서도 애굽에 있는 유다 백성과 애굽에 대해 예언을 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가 애굽에서 예언을 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4-5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대언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모태에 있기 전부터 알고 있었고 뱃속에서 태어나기 전에 선지자로 구별했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소명(召命,calling)은 '부르심'을 의미하는데 그 소명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적 소명입니다. 구원적 소명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이 구원 받도록 초청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지금 예수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다 여기에 해당됩니다.
둘째는 사역적 소명입니다. 사역적 소명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시키기 위해 부르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레미야가 받은 소명은 사역적 소명입니다. 구원적 소명도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이지만(엡1:4-5, 행13:48, 롬11:7, 9:18, 8:30) 사역적 소명도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선택한 것이고 그것도 예레미야가 태어나기도 전에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렘1:4-5). 그러므로 하나님이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제자들이 예수님을 좇기 전에 예수님이 그들을 택하여 불렀습니다 (요1:48나다나엘이 그분께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밑에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적으로나 사역적으로나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릴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조건을 보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 무조건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족하고 약하지만 담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릴 선택하시고 구속하시고 사명을 맡겼으니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입니다.
6-10절에 "아 주 하나님이여 나는 아이라 말을 할 수 없나이다 하니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할 모든 자에게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시고 주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복중에 짓기 전에 여러나라 선지자로 세웠다고 말씀하시자 예레미야는 '나는 어린 아이라 말할 줄 모르나이다'고 했습니다. '아이'(히.나아르)는 문자대로 어린 아이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나이 30이 안되었으니 공적으로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에레미야는 겸손이 아니라 실제로 아이로 느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상황이 예레미야로 하여금 두렵게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어렸을 땐 므낫세왕의 악정으로 정치적으로만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부패하여 유다 온 땅에 우상을 섬기는 신당과 신상들이 가득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바알, 아세라, 그모스, 몰록 등의 우상을 음란하듯이 섬겼습니다.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을 당시에는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부패의 뿌리가 너무 깊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대하34:3). 백성들은 조금도 개혁에 동참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유다왕과 유다 백성들에게 징계와 심판을 선언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일은 두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유다는 초강대국이었던 바벨론과 애굽 두 나라의 위협을 받았고 유다는 그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주변에 있는 약소국이었던 에돔, 다메섹, 블레셋, 암몬 등도 전통적으로 유다에 대해 적대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유다 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 대한 선지자로 세웠습니다. 예레미야는 패역한 유다, 강대한 바벨론과 애굽, 약소국이긴 하지만 적대국인 에돔, 다메섹, 블레셋, 암몬 등의 나라에 대해 심판을 예언해야 하는 것을 두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 사역에 대해 자신은 너무 약한 존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세운 위치에 비해 자신은 너무나 초라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한 것입니다. 모세와 이사야도 그랬습니다 (출4:1-12, 사6:5내게 화가 있도다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내 눈이 왕 곧 만군의 주를 보았도다). 하나님은 그런 고백을 하는 예레미야에게 말씀했습니다.
첫째, 아이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7절). 5절에 보면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선택한 것은 모태에 생기기 전이고 뱃속에서 태어나기 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 보면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택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선택했으니 하나님이 사명을 감당할 능력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전할 말을 주었을 뿐아니라 전할 능력을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어디든지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7절). 하나님이 누구에게 보내든지 가서 무엇을 명령하든지 그 말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당신의 말을 예레미야 입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9절). 그들에게 전할 말을 주었을 뿐아니라 전할 능력을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로 세움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곳에 가고 하나님이 말하라고 한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가라는 곳까지 가고 서라는 곳에 서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변형시키지 말고 그대로 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고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니 순종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에 부딪힐 것을 핑계로 능력이 없다는 핑계로 거절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심부름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에스겔3:11에도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분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1:19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사역을 맡은 자는 하나님이 선택하여 불러서 하나님이 일을 시킨 줄 알고 순종만 하려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행11:19-26, 13:2). 주께서 어디든지 가라고 하면 가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사역을 감당하려 하면 고난이 따릅니다 (눅9:23-25, 딤후3:12).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면서 많은 환난과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10:16-18, 요15:18-19, 17:14). 선지자와 사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는 정권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예레미야는 여러 번 감옥에 갇혔고, 다니엘은 사자굴에 들어갔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벤느고는 극열히 타는 풀무 불에 들어갔습니다. 바울은 돌을 맞고 매를 맞고 옥에 갇히는 등 여러 위협을 당했습니다 (고후11:24-27). 성경에 나오는 많은 믿음의 선진들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핍박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히11:36-38).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사명을 다하기 위해 멸시와 조롱과 능욕을 받았습니다. 침 뱉음을 당했고 갈대로 침을 당했고 가시관에 눌림을 당했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마26:67-68, 27:28-31, 막15:24-26, 눅23:33). 예수님은 하나님이 맡긴 구속 사역을 이루기 위해 고난받을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눅22:42). 리챠드 빅스터는 일생동안 병과 쇠약에 시달렸는데 죽음의 문턱에서 서성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당신이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든지, 당신이 하시고자 할 때는 언제든지" 하나님 명령하시면 어디든지 가야하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찬송가 가운데 "부름받아 나선 이몸"(323장)은 그런 정신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셋째, 두려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8절).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구원해 주실 것이니 그들로 인해서 두려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역자로 선택하여 하나님이 사역을 맡겼으니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를 여러 나라 위에 세워 그들을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고 건설하고 심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10절).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 그들을 심판하고 회복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메세지를 전해야할 대상으로 인하여 두려워 하면 안됩니다. 사역자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그를 감당할 수 없고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왕하6:17, 롬8:28-39). 그러므로 사역자는 하나님이 모든 대적 가운데서 보호하고 지켜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 정복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도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니 너는 극히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수1:7). 그러므로 담대해야 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55년 미국 앨라버마주 몽고메리 시에서 흑인 50,000명의 '시내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주도하면서 백인들로부터 많은 회유와 협박과 암살 위협을 받았습니다.
1955년 12월 1일 목요일, 앨라배마 몽고메리 시내에 있는 한 백화점에서 재봉사로 일하던 로자 파크스(Rosa Parks, 1913~2005)가 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중 일어난 사건을 계기로 흑인 인권 운동은 시작되었다. 백인 좌석이 꽉 차자 맨 앞줄의 흑인 지정석에 앉아 있던 파크스에게 한 백인이 자리 양보를 요구했다. 그녀는 거절했고, 그로 인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당시 몽고메리 시의 흑인 지도자들은 파크스 사건을 계기로 침례교회 마틴 루서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목사를 비롯하여 흑인 단체는 즉각 시위를 벌였다. 1955년 12월 5일을 시작으로, 수천 명의 흑인들이 시내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벌였는데, 이는 곧 몽고메리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의 시작이었다.
승차 거부 운동은 1년 이상 진행되었으며, 마침내 미국 대법원에서 버스 안의 인종 차별은 헌법에 위배된다고 인정하면서 비로소 끝났다. 몽고메리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은 흑인 시위자들과 인권 운동가들에게 아주 중대한 승리를 안겨주었다. 파크스는 그로 인해 직장을 잃었으나, 자신이 부당한 대우에 맞선 것은 흑인 인권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항상 내면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라 진리를 위해 서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음성을 듣고 있었다고 합니다.
2. 예레미야가 본 두 환상 (11-16절)
예레미야가 본 두 환상은 유다에 미칠 재앙은 끓는 가마로 유다가 당할 환난이라 할 수 있고, '살구나무 가지'로 유다의 회복에 대한 희망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① 살구나무 가지를 보았습니다.
11-12절에 "주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이루기 위해 내말을 재촉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살구나무 가지를 보았습니다. '살구나무'(히.솨케트)는 핵과류에 속하는 아몬드 나무로서 봄이면 가장 빨리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이 피고 꽃을 피우는 나무입니다. 예레미야가 이같은 나무 가지를 본 것은 하나님의 뜻, 곧 유다의 회복이 그처럼 속히 이루어질 것에 대한 상징으로 본 것입니다. 예레미야서는 전반부에서 유다가 당할 환난에 대해 예언되어 있고, 후반부에는 유다가 회복될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50:8-10). 그렇게 볼 때 유다가 당할 환난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와 목적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에 대한 환난을 허락하신 것은 그들을 정결케 하고 온전케 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제사장적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를 아주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하고 온전케 하기 위함입니다. 온전하게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크게 사용할 수 있는 인격적 그릇이 되도록 연단시키기 위함입니다.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만난 바 되어 주시고 승리케 해 주실 것입니다 (29:12-13, 1:18-19).
② 끓는 가마를 보았습니다.
13-16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하니,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지리라. 내가 북방 왕국들의 모든 족속들을 부를 것인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방 모든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들을 치리라. 주의 말이니라. 그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게 경배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그들에게 선고하여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고 했습니다.
'끓는 가마'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가열시키는 큰 솥을 말하는데, 이는 환난, 재앙, 전쟁, 황폐 등을 상징합니다 (14-15절, 겔24:3). 끓는 가마가 그것의 표면이 북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이는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유다 모든 주민에게 부어지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바벨론 군대가 유다를 침략하여 멸망시킬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실제로 유다는 북방의 바벨론에 의해 B.C.586년에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 번이나 성읍 사면을 에워 싸고 거민들을 죽이고 왕족, 정치인, 종교인, 기능자, 청년들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세번째에는 시드기야왕이 보는 앞에서 자녀들과 신하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왕은 두 눈알을 빼서 사로잡아 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16 그들을 향해 나의 심판을 선고하리라). 하나님이 사람 막대기 인생 채찍으로 치신다는 약속대로 징계를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삼하7:14).
유다에 그런 재앙이 임하게 된 것은 유다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이 하나님이 복 주신 것을 부인하고 하나님과 언약을 배반하고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도 바알이나 아세라 등 우상을 숭배하므로 앗수르(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했는데(B.C.721) 유다도 우상을 숭배한 고로 하나님이 바벨론을 통해 징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족속이나 앗수르나 바벨론 등의 문화 문명을 더 존귀하게 생각하고 그들이 섬기는 신을 섬겼습니다. 우상숭배는 비참한 결과만 초래할 뿐입니다. (렘17:5-6, 욥33: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복인 줄 줄 알고 그것들이 환난에서 구해줄 줄 알고 그것들을 음란하듯이 섬겼습니다. 산과 골짜기에 산당을 짓고 신상들을 음란하듯이 섬겼습니다. 우상을 사모하기를 마치 발정기에 이른 암낙타나 암나귀와 같이 비틀거리며 헐떡이듯이 했습니다. 우상을 사랑하여 자기들을 낳은 아비라고 하였습니다 (2:27 그들이 나무줄기에 너는 내 아버지라하고 돌에게 너는 나를 낳았도다 하였도다).
오늘날 보이는 우상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우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들은 모두 우상적인 존재들입니다. 디모데후서3:4에는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고 했고, 빌립보서3:19에는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라고 했습니다. 근본적으로 탐심입니다 (골3:5). 그것 때문에 완고하게 되어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삼상15:23). 하나님을 버리고 그것들을 따라가기 때문에 하나님이 징계 차원에서 고난과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한 후에는 그것들이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오히려 해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겔7:19). 어려움 당할 때에 우상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욜2:4). 환난 가운데 있을 때 원인을 파악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것만이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입니다 (26:13, 욘3:10).
3. 하나님의 격려와 약속 (17-19절)
17-19절에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주가 말하노라"고 했습니다.
첫째,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 17절에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허리를 동이라는 것은 문자적으로 방해되는 긴 옷을 졸라 매라는 것입니다. 이는 일을 나가는 일꾼이 힘을 쓰기 위해 허리를 단단히 매는 것처럼 사명을 감당할 마음을 굳게 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전장에 나가는 군인이 전투 준비를 단단히 하는 것처럼 위협에 대비하여 적의 공격에도 견딜 마음을 굳게 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려 할 때 방해 세력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쟁하는 정신을 가지고 깨어 근신해 있어야 합니다 (삿7:5-7, 벧전1:13, 5:8).
둘째,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전하라고 한 말만 전하라는 것입니다. 7절에서도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곳에 가서 전하라고 한 말씀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에스겔3:11에도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고 했습니다. 대상자들이 싫어하고 듣지 않고 대적해도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전하라는 것입니다. 말씀 전할 사명이 있는 자는 자기 생각대로 전하지 말고 하나님이 전하라고 한 말씀만을 전하려고 해야 합니다. 가감없이 그대로 전하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계22:18-19).
셋째, 놀라지 말라고 했습니다. 17절에 "~그들 때문에 놀라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전해야할 자들로 인하여 두려워 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두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그들 가운데서 구원하시시겠기 때문입니다. 대적자들이 위협하고 죽이려 해도 하나님이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18-19절에는 그들이 칠지라도 견고한 성읍 곧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여 그들이 이기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고대의 성은 성문이 나무로 되어 있고 성벽이 흙이나 돌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을 공격할 때는 공성퇴로 문을 부수거나 각종 화력을 동원하여 성벽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문과 성벽이 쇠나 놋으로 되어 있다면 공격에도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처럼 견고하게 지켜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4:8-10에 "고후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두려워 떠는 자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삿7:3). 의심하거나 두려워 떠는 자는 사역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약1:6-8). 그러므로 우리는 사역에서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31:6-8, 수1:6-9). 사람을 두려워 하지 말고 두려워 해야 할 대상이 있다면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결론은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 말기의 암담하고 부패한 타락상을 지적하는 가운데,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과 유다의 멸망을 경고함으로써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타락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같은 유다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단지 하나님의 심판만을 선포하지 않았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선포하는 가운데 항상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에 대한 비전을 잊지 않았다.
유다가 70년간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한 이후에는 그들이 돌아올 것을 말해 주었다(렘 29:10). 하나님의 징계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치 못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이라도 새 언약의 메시아를 바라보며 소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본서의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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