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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말씀 2019. 8. 11. 15:0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3:16-21

     

    1. 요한복음의 배경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을 복음서라고 하는데 같은 내용이 겹치기도 하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본 저자에 따라 예수님을 각각 다른 방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선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을 따라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소개하는가 하면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이며 누가복음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계보를 아담부터 묘사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앞의 공관복음과는 큰 차이가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저자의 예리한 통찰력과 탁월한 영성을 발휘하여 예수님에 대해 나는 빛이다, 나는 생명이다 같은 짧고 명쾌한 필치로 자신을 선포하고 있다는 점에 본서의 묘미가 특별하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저자는 친히 주님의 모습과 행적을 목격한 자라 하였고(1:14). 또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제자로 불리워졌으며 (13:23; 19:26-27; 21:24). 그래서 초대교회 교부들은 본서 저자를 요한이라 했는데(Irenaeus, Polycarp, Papias) 그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으로 세베대의 아들이며, 야고보의 형제로서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기 전(A.D. 95년경)에 본서를 기록한 것으로 본다. 일반적으로 마태, 마가, 누가복음보다는 후대일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렇다면 본서 저작 연대는 대략 80-90년일 것으로 추정된다(Eusebius).

    요한복음을 기록한 의미가 잘 나와있는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라’(20:31)는 말씀에 나타나고 있다. 사도요한은 본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분명히 밝히고 동시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이단에 미혹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 본서를 기록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중요한 무대들이 소개되는데 예수님께서 침례받으신 요단강을 시작으로 첫 번째 이적을 행하신 갈릴리 가나, 수가라 하는 동네에서 우물가 여인을 만난 사마리아, 특별히 공생애 기간 중 세 차례 방문하신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이 집중 조명되고 또 예루살렘에서 오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죽은지 4일이 지난 나사로를 살리신 베다니, 부활 후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사명감을 고취시켜 주신 디베랴 바닷가 등이 역시 본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무대이다

     

    2. 사도 요한의 생애

    (1) 진리를 수호하는 사도 요한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야고보와 형제간이다. 요한은 요한복음서와 요한 서신, 요한계시록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요한복음이 다른복음서와 대조되는 것은 다른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만 기술한 반면,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는 인간의 탈을 쓰고 온 것이지 인간이 아니라는 이단자 마르시온의 주장인 가현설을 반박하기 위해서 예수의 죽음을 자세히 묘사하는 등 인성도 강조하였다.

     

    1) 마르시온(영지)주의 Marcionism Gnosis

    기독교 인물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그 제자들의 제자들 신앙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알아보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먼저 초기 교회사를 두 부분으로 구분하면 한 부분은 자료는 별로 없고 순교한 내용이 대부분인 예수님의 제자들의 제자들 시대라고 하는 속사도 시대이고 그 다음은 속사도의 제자들인 변증가들로 저술 활동도 활발했고 자료도 많았던 변증가 시대입니다. 속사도 시대 폴리캅은 69년 터키 스미르나에서 태어납니다. 그는 사도 요한의 직계 제자로서 마르시온주의(구약의 신은 악한 신이고 신약의 신은 선한 신이라는 잘못된 이분법)와 영지주의(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잘못된 이분법)와의 신학적 논쟁으로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속사도이다. 로마제국의 16대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기독교를 핍박할 때 폴리캅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다가 체포를 당했을 때 로마 황제는 폴리캅에게 "네가 믿는 그리스도를 저주하든가 아니면 가이사에게 제사를 드리든가, 아니면 죽음을 선택하라"고 하자 그는 "86년 동안을 그리스도를 섬겨 왔는데, 그동안 주님은 단 한 번도 나를 섭섭하게 하지 않았소. 그런데 내 어찌, 나를 구속해 주신 내 왕을 저주하겠소"라고 말한 뒤에 화형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 제자들의 제자인 속사도들의 믿음과 행동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본서를 기록할 당시 소아시아 일대에는 영지주의가 만연해 있었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가 절대로 육신을 취할 수 없으며, 단지 사람들에게 나타나기 위해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환상을 입었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가현설을 주장한다. 이 가현설은, 인간 육신은 궁극적으로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그들이 논리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부인하며 인간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도 부인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 하며 영과 육신을 분리하는 이원론을 주장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자체를 부인하였다. 마르시온주의는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이 85년경 흑해 연안의 항구 본도(Pontus)에서 태어났고 140년경 로마로 가서 크레도(Credo)라는 사람의 영지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키며 독자적으로 교회를 세워 많은 추종자를 얻었으며, 이렇게 발생한 마르시온 교회는 2세기 중반에 나타난 초대교회에 가장 위협이 되는 이단으로 거의 1세기 동안 활발하게 활동했다. 마르시온이 쓴 작품들은 현존하지 않지만 터툴리안을 비롯하여 그를 비판한 교회 지도자들의 자료들을 통해서 그의 사상을 잘 엿볼 수 있는데 마르시안주의는 영지주의에서 나온 이단이다. 마르시온은 영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육체를 지니지 않은 영적 존재라고 가르쳐 그리스도가 참 인간이었음을 부정하는 가현설을 주장했다. 그는 육체의 부활은 없고 최후의 심판도 없다고 했다.

    마르시온은 극단적인 바울 추종자로 오직 바울만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한 진정한 사도로 여겼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을 분리시켜서 구약 성경은 유대인의 역사서요, 율법일 뿐이라고 여겼다. 또한, 구약의 신은 무지와 분노와 복수의 마음을 지닌 열등한 창조 신에 불과하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으로 충만한 참 하나님으로 우주적 구세주인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으로 보았다. 마르시온이 정경(正經)으로 인정한 것은 바울의 10개 서신과 누가복음의 편집본이었으며 이것을 가리켜서 마르시온의 정경(Marcionite Canon)’이라고 부른다. 마르시온의 성서 편집에 자극을 받은 초기 교회는 성경의 정경화 작업을 촉진했고, 393년 북아프리카의 히포 회의와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27권의 신약성경 정경 목록을 확정했다. 마르시온은 160년경에 죽었지만 마르시온의 추종자들은 이후에도 여러 세기 동안 활동했다.

     

    (2) 예수님을 만난 요한

    야고보 형제인 요한은 가버나움에서 베드로, 안드레와 고기를 잡았으며 젊은 청년이었던 요한은 안드레와 함께 침례 요한에 의해서 예수님께 인도 되었다(1:40). 예수님과 몇 말씀을 나눈 요한은 그가 구세주임을 확신하였다. 요한은 육십년이 지난 뒤에도 처음으로 예수님과 대화한 감격적인 시간을 회상하였다. 이 순간부터 예수님은 요한의 생애에 빛이 되셨다. 요한은 "예수님의 가장 사랑받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수님과 처음 만난 후 요한은 고기잡이하러 돌아왔으나 후에 예수께서 요한을 부르셨을 때 예수님과 동행을 위해 야고보, 베드로, 안드레와 함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하여 아버지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 활화산 같은 성품의 요한

    예수님은 요한과 그 형제 야고보를 "보아너게" "우뢰의 아들"이라 부르셨다(3:17). 이 형제들의 활화산 같은 성품은 주님에게 겸손하지 못한 사마리아인에게 불을 내리기를 원했을 때 잘 나타났다. 또 이 형제는 앞으로 올 왕국에서 높은 자리 둘을 주십사고 예수께 간청하는 절제 없는 야망을 갖기도 했다. 예수님은 이들의 불같은 열망과 경건하지 못한 욕심을 꾸짖으셨으며 예수께서는 이들을 삼년간 훈련시켜 폭풍 같은 성격을 잠재우며 조용하게 변화시켰다. 그 결과 요한은 예수님에 의하여 우뢰의 아들에서 사랑의 사도로 변하였다.

    신학자들은 요한이 복음서뿐만 아니라 서신과 계시록도 썼다고 믿는다.

    요한이 이렇게 변하는 데는 여러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의 인격 속에는 타고난 폭발적인 잠재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나 예수그리스도의 함께 생활하면서 그분의 권능과 근엄한 용모는 여러 갈래로 찢어진 요한의 옳지 못한 정력을 온유한 길로 인도하였다. 우리는 요한의 강력한 정신이 거짓 교리나 사악한 행동에 대하여 단호히 규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요한의 성품의 변화는 우리에게 많은 격려를 준다.

    (3) 최후까지 예수님께 헌신한 요한

    우뢰와 같은 요한의 성격이 온유하게 변한 것은 십자가와 초대교회에의 고난을 통해 설명이 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체포되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쳤다가 어느 사도보다도 먼저 예수님에게로 다시 돌아온 사람이 요한이었다. 베드로가 멀리 떨어져서 뒤따르고 있을 때 요한은 용감하게 대제사장의 집 뜰로 들어갔다(18:15). 아마 대제사장은 요한의 아버지인 세베대의 사업과 관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요한과는 서로 아는 사이였을 것이다. 대제사장을 알고 있던 덕택으로 요한은 베드로를 뜰 안으로 데리고 들어 왔다. 그러나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해쳤기 때문에 겁에 질린 베드로가 숯불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을 때 요한은 예수님을 심문하는 재판장에게로 곧장 들어갔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비통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요한은 진실 속에서 있었다. 모든 사도들 가운데서 오직 요한만이 십자가 옆에 서서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그리스도의 적들이 악의에 찬 독설을 내뿜을 때에도 요한은 도망치지 않고 적들의 한가운데 당당하게 서 있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들은 제자도 유일하게 요한뿐이었다. 예수님은 요한을 바라보시면서 자기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고 하시고 요한에게 그 어머니를 가리키며 "보라, 네 어머니라"하셨다>(19:26-27) 이후 요한은 다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들었다. 오직 요한만이 "내가 목이 마르다" "다 이루었다"는 최후의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께서 고개를 숙이시고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가시는 것을 지켜보았다.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를 때 피와 물이 나온 것과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장사한 사실을 말한 것도 요한뿐이었다.(19:38-42). 요한은 용감하였으며 최후까지 예수님께 헌신하였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 살인마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 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1)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요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몇몇 사도들과 더욱 가깝게 지내셨던 것 같다. 예수님과의 우정을 갖는 게 기뻐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끼리 점점 친밀해진 것은 큰 무리들로부터 더욱 독자적이고 배타적인 집단을 만들게 했을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오백여 형제이며(고전 15:6), 모인 무리의 수는 일백 이십 명이고(1:15), 예수께서는 칠십 인을 제자로 세웠다.(10:1). 이들 가운데 열 두 사도가 있으며 사도 가운데 핵심이 되는 세 사람이 있으며 이 중에서 사랑받는 요한은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자주 불리어졌다.(13:23/20:2/21:7). 요한이란 뜻은 주의 은총을 받는 자 라는 이름대로 일생을 살았다. 분명히 요한은 제자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세 제자의 한 사람일 뿐 아니라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로 불리어진 유일한 사람이며 최후의 만찬이 열리는 다락방에서는 주님의 품에 안겼다(13:23).

     

    (4) 마지막 성경을 기록한 요한

    요한의 제자이면서 폴리갑(Polycarp)과 잘 아는 이레니우스(Irenaeus)는 요한은 주후 98년까지 에베소에서 살았다고 말했다. 전설에 의하면 요한을 독살시키려는 음모에서 하나님께서 목숨을 구해주셨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은 핍박받는 동안에 끓는 기름탕에 던져 졌으나 요한은 그 속에서 살아났다고 한다. 에베소에서 멀지 않은 에게 해 복판에 있는 밧모섬에 요한이 유배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요한은 계시록의 인사말에서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1:9)라고 썼다. 도미시안 황제에 의하여 밧모섬으로 추방된 요한은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 대한 멧세지를 받고 환상을 보고 기록하였다. 트라얀황제는 요한이 밧모를 떠나서 에베소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소아시아에서 그를 따르는 자들의 선교사업은 그의 목숨이 다할 때 성취되었음을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에서 알 수 있다.

    요한은 자기의 영적인 자식들이 진리 가운데 행하여진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요한은 충분한 보응을 받을 것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이들에게 충고했다. 요한은 가이오와(3:3) 데메드리오의 선행과(3:12) 디오드레베의 교만함에 특히 관심을 가졌다(3:9). 요한은 그의 영적인 자식들이 다른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증거 하기를 원했다. 예수를 처음 따를 때 어린 소년이었던 요한은 열 두 사도 가운데서 제일 장수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형제인 야고보는 사도들 가운데 제일 먼저 죽임을 당했다. 은혜 속에 살고 죽는 것에 관하여 요한의 생애는 많은 교훈을 준다. 요한은 불같은 성급한 성격을 서서히 가라앉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권세에 순종했다. 요한이야 말로 이름 그대로 은혜로운 사람이다.

     

    * 요한복음 316절의 사나이 : 티보우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미식축구라고 한다. 미식축구 챔피언 결정전을 슈퍼볼이라고 하는데, 2012년 덴버 브롱코스라는 팀과 피츠버그 스틸러스라는 팀이 맞붙었다. 23:23으로 승부를 결정 짓지 못해 연장전을 하게 되었는데, 결국 연장전에서 덴버 브롱코스가 이기게 됩니다. 이 팀의 간판 공격수는 팀 티보우라는 쿼터백이었는데, 티보우의 결정적인 역할로 역전승으로 우승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팀 티보우는 대학시절부터 스포츠 선교사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경기에 임할 때마다 눈 밑에 <John 3:16>기록한 아이 패치를 붙이고 경기에 임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그가 속한 팀은 늘 역전승을 이어갔고 중심에는 늘 그가 있었다고 합니다. 프로선수로 전향한 뒤에도 '티보 미라클'(티보의 기적)은 계속 이어졌고,

    프로에서는 아이패치가 금지되었는데, 그는 또 다른 '왕 앞에 무릎 꿇은 듯한 자세의 기도'로 경기장 관중과 미 전역 TV 시청자들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316절의 사나이', 그를 표현하는 또 다른 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최고의 선수가 되게 하신 것은 요한복음 316절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베푸신 은혜를 바르게 알려서, 멸망 길로 가던 사람들이 돌아와 본래 사람들이 있어야 할 자리인 '참된 자유와 영광된 자녀의 자리'에 서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가끔 관중들 가운데서는 Tv 중계가 되는 카메라의 각도에 맞춰서 요3:16 피켓을 들고 응원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기도 한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316절의 말씀은 신구약 66권 전체를 두고 딱 한 절만 뽑으라고 한다면 누구라도 바로 이 구절을 꼽을 정도로 귀하게 여기는 구절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한 절의 말씀 속에 <기독교 복음의 진수가 완전히 압축 요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의 백미(白眉 흰 눈썹처럼 여럿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 '에 해당되는 요절로 복음서 속의 복음이라고도 부릅니다. 이시간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번 묵상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3.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절대주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성경을 하나님의 사랑이야기 라 하며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역사란 예수님을 빼놓고선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HistoryHis story 즉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고 설명합니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말씀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이 세상을, 우리 사람을 창조하셨음을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보시는 기본적인 마음은 <심히 좋았더라>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온 세상과 우주와 사람이 정말 아름답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은 그 이유를 죄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순종의 삶으로 영원한 기쁨, 영원한 아름다움, 영원한 사랑으로 살아야 할 인간이 불순종함으로 죄가 들어왔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앞에서 순종하는 삶은 아름답게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죄와 불순종의 사람들의 모습은 악하기 그지 없습니다. 아름다움보다 악과 추함과 더러움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는 이렇게 죄 악으로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는 인간의 모습을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는 인간은 우상숭배를 한답니다.

    하나님께 영광드려야 할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짐승)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최고 창조물인 인간이 나무에게 돌에게, 짐승에게, 동물에게 복을 구한다고 합니다. 사실 그렇지 않나요? 최고의 컴퓨터 기술을 가지고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이 영화 작업을 시작하기 전 돼지 머리 놓고 코에 돈을 꽂고 절을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정욕대로 부끄러운 욕심대로 살면서 우상숭배를 하고, 더 나아가 순리를 거역하고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행위를 하고 여자가 여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행위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온갖 불의, 추악, 탐욕,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 부모 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이런 일을 행하고도 자기만 할 뿐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한답니다. 이런 악한 마음, 행동은 그 안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좋아 보이던 사람의 모습이 이와 같이 악하고 추한 모습으로 변한 것입니다. 원인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불순종의 죄악이 이렇게 만듭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으로 가득하면 얼마나 행복하고 모든 것이 아름답고 좋아 보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이 없는 우리 마음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추하고 더럽고 악하기 그지없는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세상, 이런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냥 두시지 않고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로 인해 막혀진 담을 허시고 관계를 회복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1) 독생자를 주셨으니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한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즉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믿는데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잘못 이해하면 우리가 세 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세분 하나님은 또한 일체로 한 분으로 계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사역을 감당하실 때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을 입고 독생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으로 천지창조를 하실 때부터 함께 하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2의 아담으로 마리아의 몸을 빌려 오셨기 때문에 인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독생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이유는 딱 한가지 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결정판은 예수님께서 죄인을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나 역시 죽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속에서 주님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예전처럼 육신의 욕망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다시말하지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었던 것은 하나님 사랑의 결정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가 중요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다는 증표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십자가가 서 있는 곳에 사랑이 없고 미움과 분쟁과 다툼만 있습니다. 십자가의 상징만 있을 뿐 그 안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없습니다.

     

    (2) 멸망치 않고 영생을 주시기 위해

    (3:17-18)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는 우리를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심판을 받지 않으므로 멸망치 않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고 멸망에 이릅니다.

    19 정죄는 이것이니

    사람들이 재판정에 서는 이유는 죄 때문에 기소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 역시 죄 때문인데, 그 죄는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이신 곧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빛이시기 때문에 그 예수님을 통해서 죄가 드러납니다. 무엇보다 빛보다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을 더 사랑해서 빛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빛 앞에서 행위가, 죄가 드러날까 하여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실 수 없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진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죄 용서함을 받게 되어 멸망치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면 빛된 인생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빛 가운데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주님께로 나오십시오.

     

    4.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

    우리가 줄,줄 외우는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바리새인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비록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반대하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바리새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행하시는 여러 가지 표적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과 같은 권위 있는 말씀을 선포한 사람을 그 때까지 단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놀라운 표적을 행한 사람도 그 때까지 단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속해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비난하고 예수님을 싫어했지만 니고데모는 그런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의 반대편에 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는 자기가 속해 있던 바리새파에서 축출을 당한다면 그 때까지 자기가 쌓아놓은 모든 사회적 기반이 다 무너지고 자기는 그 순간 비참하게 되고 만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는 예수님을 존경하고 있었지만 차마 그런 자기의 마음을 겉으로 드러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보는 이가 없는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가 한 밤중에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최고의 랍비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 표적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니고데모는 얼마나 비겁합니까? 만약 니고데모에게 용기가 있었다면 그는 아무도 보는 이가 없는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올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는 대낮에 당당히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을 만나 뵙고 자기가 그렇게 존경해 마지않는 예수님과 교제를 나누어야 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존경하고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예수님과 가까이 지냈다가는 그 때까지 자기가 쌓아놓은 모든 사회적 기반이 다 무너지고 자기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만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비겁하고 남의 눈치나 보며, 무엇이 옳은지 분명히 앎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그 길로 가지 못하는 이런 니고데모를 사랑하시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런 니고데모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니고데모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가 아무도 보는 이가 없는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가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사실 니고데모는 얼마든지 멀찍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여러 가지 일들을 구경꾼들 틈에서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표적을 보는 그런 수준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럴경우 그와 그의 가족이 한꺼번에 비참한 신세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어쩔 수 없이 모든 사람들이 다 쉬고 있을 시간인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보면 그것은 니고데모가 단독으로 행한 일이 아닙니다. 그 일은 철저하게 성령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일이며 니고데모는 그 성령 하나님께 이끌려서 한밤중에 예수님께 나아왔던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6절 상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성령 하나님께서 왜 니고데모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가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오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너무 만나고 싶어서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간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니고데모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니고데모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니고데모를 한밤중에 예수님께로 이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니고데모와 같이 이런 비겁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디서나 당당함을 잃지 않는 용기 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용기 있는 사람도 사랑하시지만 니고데모와 같이 소심하고 겁이 많은 사람도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용감한 사람은 용감한 대로, 비겁하고 소심한 사람은 또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예수님께서 당신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당신을 배반하고 달아났던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셔서 그를 회복시켜주신 것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회적 신분이 무너질까 두려워서 대낮에는 예수님 가까이 가지 못하다가, 아무도 보는 이가 없는 한밤중에 아무도 몰래 예수님을 찾아가야만 했던 비겁한 니고데모까지도 사랑하시되 뜨겁게 사랑하시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사랑이 거기서 끝이 났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2천 년 전에만, 그리고 베드로와 니고데모에게만 쏟아 부어졌고 지금은 그 사랑이 중단되었으며,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부어지지 않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2천 년 전에 니고데모와 베드로에게 부어졌던 그 놀라운 사랑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변함없이 누군가에게 쏟아 부어지고 있습니다. 그 누군가가 누구입니까? 그는 사도 바울처럼 물불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일꾼일 수도 있지만, 니고데모나 베드로처럼 비겁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척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뜨겁게 신앙생활할 때도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의 신앙이 식어져서 방황하고 헤맬 때조차도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왜 계속해서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뢰가 약해지면 우리가 불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16절은 지금까지 선교지에서 현지 언어로 가장 많이 번역된 말씀입니다. 이 짧은 한 구절로 인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마귀의 종노릇하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이름을 선포하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이 말씀이 우리들 마음을 눈물로 감동으로 다가오게 할까요?

     

    (1)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아브라함의 순종에 관해 살펴보았는데 아브라함의 첫 순종이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한 순종이었다면, 아브라함의 마지막 순종은 아들의 죽음을 담보로 한 순종이었습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이 순종은 부모에게 있어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순종이었음에도 하나님과 40여 년 동행 한 아브라함은 즉각 순종하였습니다. 모리아 산에 올라가는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제단 위에 아들을 세우고 칼을 든 아비의 심정... 이 세상 그 어떤 단어를 사용한다해도 그 아비의 심정을 우리는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비의 사랑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이 바로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처럼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주실 정도의 사랑으로..

    누군가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만 들어도 기분 좋고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데, 더 나아가 누군가로부터 사랑이 가득 담긴 선물이나 이벤트를 받는다치면 하늘을 날 듯한 기쁨에 취하게 되는데 오늘 우리들인데, 자신보다 더 한 자신의 아들을 주셨다? 그것도 조건 없이, 나를 당신의 자녀 삼으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내어놓으셨다? 이것을 어떻게 인간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때때로 아무리 친한 관계라도 단 돈 천 원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때로는 원수처럼 지내기도 하는데요. 이 세상 그 어느 부모가 다른 자식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자식을 내놓을 수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인간이 흉내낼 수도 없는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십자가 사건 이래 셀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어 변화 받고, 새 사람이 되어 자신이 받았던 그 사랑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주는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사랑의 핵심은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주는 것으로 기뻐하고 주는 것으로 행복해 하십시오! 그것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이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어떤 부부가 살다가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부인이 자꾸 이혼할 것을 요구합니다. 남편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부인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남편은 최선을 다해 많은 것을 아내에게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내게 많은 것을 주었지만, 꼭 필요한 것 한 가지를 주지 않았어요. 그것은 당신 자신이에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좋은 것을 주면서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은 주지 않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줄 수 없습니다. 아니, 주지 못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진짜 사랑은 자신을 줍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천국을 바라보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위대한 사랑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3:16-17) 두 단어들이 대조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멸망과 영생, 심판과 구원... (10:10) 마귀가 오는 것은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죽이는 것은 마귀입니다. 그러나 살리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영생과 구원이 같은 의미라는 것을 이 구절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심으로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끊어졌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예수님께서 이어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 화목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화목제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끊어졌다는 것은 인간 세계 안에 죽음이 찾아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이 땅에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다가 죽음 이후에 천국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왕노릇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받아야 할 멸망과 저주와 심판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우리들을 살리고자 죽으러 오셨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결코 호락하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유일한 목적은 죄중에 빠진 인류에게 영생과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생명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의 출발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 구원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혼들을 전도하여 교회로 이끄는 이유도 내가 받은 구원 그도 받기를 원해서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부모님과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그들이 예수 믿고 구원 받기를 원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구원의 확신, 구원의 감격이 중요한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라는 기초 위에 다른 모든 신앙이 세워지는 것인데, 구원의 확신이 없고, 흔들리기에 세워지는 것 같다가도 금방 무너지고, 더 깊이 있는 영적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워진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요한복음 316절 말씀의 실현 때문입니다. 영혼구원이 가장 중요한 교회 사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행복침례교회의 주보에도 "말씀중심예배와 영혼구원 사역과 이웃사랑의 실천을 교회의 사명으로 하겠다고 게제하기도 합니다. 교회가 영혼구원이라는 본질을 잃어버리니까 사교 클럽 내지 세상 동아리가 된 것입니다. 성령 받고 난 제자들이 한 일이 다른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복음 전하다가 감옥하고, 복음 전하다가 돌에 맞고, 복음 전하다가 순교한 것입니다.

     

    (3) 복음을 거절하면 심판을 받는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구원의 기쁜 소식도 거부하면 심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안 믿으면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닌, 심판과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냥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심판이라는 결과가 있다는 진리의 말씀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서는 많이 이야기하지만 정작 믿지 않았을 때의 심판에 관해서는 침묵합니다. 상대방이 기분 나쁠까봐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이 이야기 하지 않는다고 심판이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이 사랑하는 친구가 지옥 불에 떨어지는 것을 방관하고 있으렵니까? 상대방이 듣기 싫어한다는 이유로 여러분마저 입을 다물고 있다면 그 영혼은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언젠가는 알아서 믿겠지.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복음을 전하겠지. 아니요. 하나님께서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영생과 구원 되시는 예수님을 전해서 한 영혼이라도 구원 받게 하는 것 아닐까요?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이 땅에 내려 보내셨읍니다. 저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 디엘 무디 목사님을 소개하며 오늘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4) 복음 전도자 D.L무디

    D.L. 무디는 미국 메사추세츠의 노드 필드에서 1837년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농촌에서 보낸 무디는 어머니의 청교도적인 교육에 힘입어 자신이 옳다 생각하는 일에 모든 것을 쏟을 수 있는 열정과 자신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 듣는 이에게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전할 수 있는 언변, 그리고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의 적극성 등을 갖게 된다. 이러한 점들은 정식교육을 5년밖에 못 받은 무디가 복음을 깨달은 후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크나큰 도움을 주게 된다.

    17세가 되었을 때 D.L. 무디는 노드필드를 떠나 보스턴으로 이주하게 되며 1년 후인 1855417, 그는 생애 단 한번의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 주일학교 학생이었던 그는 자신의 직장인 구두방의 창고에서 주일학교선생님으로부터 "하나님은 자네를 사랑하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잠시 후 그는 그리스도를 보내신 사랑을 통해 거듭나는 체험을 하게 되고 그후 그의 생애는 천성적인 열정에 힘입어 새 주인을 섬기는데 노력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무디를 쓰실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잃어버린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거듭난 후에도 그에게는 10만달러를 벌겠다는 변하기 힘든 포부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멸망하는 영혼을 보았을 때 그는 어린시절부터 끊임없이 갖고 있던 꿈을 아낌없이 버린다. 그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꿈도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서는 그에게 큰 의미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사랑은 불같은 정열로써 나타나게 된다. 그가 하루동안 한 명 이상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잠을 자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는 잠자리에서도 일어나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1867년 무디는 영국을 최초로 방문하게 된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무디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기 위해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와 찰스 스펄전, 그리고 헨리 발리 목사를 만나게 해주신다.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는 무디의 정열적인 전도 방법과 교회사업에 대해 듣고는 "삼십 세된 무디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가 중요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디를 통해서 무엇을 하셨는가가 중요한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무디는 자신이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 속에 자신이 쓰임을 받게 된 것임을 알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또 찰스 스펄젼의 설교를 듣고는 무디는 충격을 받게 된다. 스펄젼의 설교의 힘과 해박한 지식 앞에 그는 자신의 보잘것 없음과 부족함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께 외치게 된다. "주여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이런 낮아짐 속에서 그는 헨리 발리목사가 인도하는 기도회에 참석하게 되며 무디는 그의 평생의 지침을 얻게 된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에 완전히 헌신한 사람을 통해 하실 수 있는 일을 보아야 합니다." 무디는 이 말에 놀라게 된다. 갑자기 그는 그 자신이 크고 유명해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대신 하나님께서 조그만 무디와 하실 수 있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디는 헨리 발리목사의 말을 듣고 자신이 그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며 그 말은 그의 생전에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에 완전히 헌신한 사람을 통해서 하실 수 있는 일을 보아야 한다."

    영국을 다녀온 후 무디는 청소년 설교자 헨리 무어하우스를 만나게 된다. 헨리 무어하우스는 무디의 교회에서 6일 동안 요한복음 316절 한 구절로 설교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헨리 무어하우스는 매일 밤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설교하게 되었고 마지막 7일째 되는 날, 그는 강단에 서서, "여러분 저는 온종일 설교할 새로운 본문을 찾아 보았습니다만 요한복음 316절 보다 더 좋은 말씀을 찾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면서 또다시 하나님의 사람 사랑하심을 역설하였다.

    설교의 마지막에는 그는 "저는 일주일 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에게 전하려고 노력했지만 둔한 이 혀로는 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내가 야곱의 사다리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 전능자의 앞에 있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하나님의 세상 사랑하심을 들을 수 있다면 그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바로 이 말-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행복침례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아멘? 여러분도 그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아멘? 이것은 구호로 마칠 일이 아닙니다. 슬로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자, 하나님의 자녀로 먼저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단 한 명에게라도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겠다는 무디 목사님의 구령의 열정이 오늘 저와 여러분 안에 가득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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