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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엘리사가 받았던 갑절의 은사말씀 2019. 7. 28. 22:23
엘리사가 받았던 갑절의 은사 왕하2:1-15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는 뜻을 가진 엘리사는 요단 계곡에 있던 아벨므홀라 성에 거하였는데 이 성읍으로 말하면 사사 기드온의 300용사와 미디안 군의 전쟁 때 등장했던 곳(삿 7:22)인데 엘리사는 사밧의 아들이요(왕상 19:16) 부유한 농부로서(왕상 19:19) 대머리였던(왕하 2:23) 엘리사는 엘리야의 뒤를 이어 활동했던 선지자로서 북이스라엘의 제9대 왕 여호람부터 예후, 여호아하스를 거쳐 제12대 요아스왕까지 무려 50여년간 영적 지도자로 봉사했다(왕상 19:16, 21). 하나님은 갈멜 산에서의 영적 승리 이후 침체기를 맞고 있던 엘리야에게 엘리사를 후계자로 기름부어 세울 것을 지시하셨고(왕상19:16), 이에 엘리야는 밭을 갈고 있던 엘리사에게 자신의 겉옷을 던짐으로써, 엘리사로 하여금 자신이 엘리야의 후계자로 선택되었음을 깨닫게 했다(왕상19:19). 주 하나님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할 때에 엘리야는 엘리사와 작별하고자 길갈에서도 벧엘에서도 여리고에서도 요단으로 갈때도 너는 여기 머물러 있으라 하여도 엘리사는 말하기를 주께서 살아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였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말하기를 주께서 나를 네게서 데려가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하였을 때 엘리사는 말하기를 당신의 받았던 갑절의 영감을 구했다. 엘리야는 말하기를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주께서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리라.”고 한 후 불병거와 불말들이 그들 둘을 갈라놓으매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다시는 엘리야를 볼 수 없었고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옷을 가지고 요단강물을 치니 물들이 여기저기로 갈라지면서 강을 건너는 장면이 처음 나온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본 후 갑절의 은사를 받았다.
열왕기하 2장은 그 때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엘리사가 받았던 갑절의 은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엘리사가 행한 이적
북이스라엘의 제9대 왕 여호람에서부터 예후, 여호아하스를 거쳐 제12대 요아스왕까지 무려 50여 년 간 영적 지도자로서 그가 행한 기적은 다음과 같다.
1)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으로 요단강물을 쳐서 갈라지게 하고 건넜다.(왕하 2:13-14)
2) 물이 나빠 열매를 맺지 못했던 물에 소금을 던지면서 고친 일(왕하 2:19-22),
3) 벧엘로 가는 길에서 아이들이 대머리라고 조롱할 때 주의 이름으로 그들을 저주하매 암콤 두 마리가 숲속에서 나와 42명의 아이들을 찢었다(왕하 2:23-24).
4) 유대와 에돔이 동맹하여 모압왕과 싸울때 물이 없어 고생하는 것을 보고 비 없이도 시내에 물이 가득하게 한 일(왕하 3:16-20).
5) 적군의 판단을 흐리게 한 일(왕하 3:21-23)로 해가 물에 비쳐 붉게 된 물을 피로 생각하였다,
6)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에게 기름을 만들어 주어 빚을 갚게 하였다(왕하4:7).
7) 불임인 수넴 여인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왕하4:16-17)을 말한 후
8) 그 아들이 죽은 것을 다시 살렸다(왕하 4:17, 35).
9) 국의 독기운과 우물물의 독을 제거함(왕하 4:28-41).
10)바알살리사에서 보리떡 20개로 백명을 먹이고 남았다(왕하 4:40-44).
11)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 주었다(왕하 5:14; 눅 4:27).
12) 자기 종 게하시에게 문둥병을 주었다(왕하5:27).
13) 물에 빠진 도끼를 떠오르게 하였다(왕하 6:6).
14) 아람왕이 비밀로 의논한 말을 이스라엘 왕에게 미리 전하는 일(왕하 6:8-12).
15) 자기 사환의 눈을 밝게 하여 불 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호위한 것을 보여 주었다(왕하 6:17).
16) 아람 군사의 눈을 어둡게 하여 사마리아로 인도하고 그 눈을 다시 밝게 하여 사마리아 성중에 있는 것을 보게 하였다(왕하6:18-20).
17) 내일 이맘 때는 굶어 가는 사마리아 성앞에서 식량 값의 폭락할 것이라는 예언(왕하 7:1-2).
18) 곡식값이 폭락하였어도 그 소식을 불신했던 장관은 제외되다.
19) 엘리사가 죽은 다음 해에 어떤 사람이 죽은 시체를 엘리사의 무덤에 던져 놓았더니 그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는 순간 다시 살아났다(왕하13:2-21).
엘리사가 행했던 이적들은 참으로 하나님의 도움없이는 하나도 될 수 없는 것인데 그는 예수님의 모형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엘리야는 왕가의 핍박을 받으면서 지냈으나 엘리사는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한 관계로 왕가로부터 특별 대우를 받았다. 그가 엘리야를 따른 것은 베드로와 비슷하고 이적을 많이 행한 것은 예수님의 모형으로 비교할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행한 수많은 이적들 중 몇 가지만 소개하고자 합니다.
(1) 수넴 여인에 대한 이적
1) 수넴여인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왕하 4:16-17)
수넴이란 곳은 갈멜산과 길갈의 도중에 있다(왕상 1:3). 그러므로 그곳을 자주 왕래하던 엘리사를 수넴에 사는 믿음이 신실한 수넴여인은 자기집 앞으로 언제나 지나가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자기집으로 안내하여서 음식과 쉴자리로 공궤 하였다. 그러던 차에 남편과 상의하여 수넴여인은 자기 담벽에 방을 하나 달아서 엘리사가 지나가다가 쉴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하였다. 수넴여인의 호의에 고마운 엘리사는 종 게하시에게 수넴여인이 무엇을 소원하는가를 묻는다. 수넴여인은 자신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하자 종 게하시는 엘리사에게 수넴여인이 아들이 없으니 아들을 낳게 하면 기뻐할거라고 한다. 엘리사는 수넴여인에게 아들이 있을거라고 말하자 수넴여인은 자기를 놀리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아들을 낳지 못했던 수넴여인에게 아들을 낳게 되니 수넴여인은 엘리사를 하나님처럼 떠받든다.
2) 죽은 수넴여인의 아들을 살리다
아이가 자라서 걸어 다닐때 쯤 아들은 벼를 타작하는 들에 나가서 아비앞에 머리가 아프다고 말하자 수넴여인 남편은 아픈 아이를 집에 수넴여인에게 보낸다. 그아이는 수넴여인 품안에서 아이고 머리야 아이고 머리야 하더니 죽었다. 아이가 죽은 후 수넴여인은 바로 엘리사의 방 침상에 죽은 아이를 눕혀 놓고 나귀와 사환을 데리고 엘리사를 찾으러 갈멜산으로 간다. 엘리사는 산밑에서 수넴여인이 오는 것을 보지만 하나님께서 수넴여인이 왜? 오는지 엘리사에게 숨기시고 (27)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평소에 엘리사는 이런 상황이면 하나님께서 왜? 자기를 찾는 자들이 무슨 이유로 찾아오는지를 미리 알게 하셨다는걸 의미한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수넴여인을 마중나가서 너는 무사한지, 아이는 무사한지 남편은 무사한지 묻게 한다. 게하시의 질문에 수넴여인은 모두 무사하다고 대답하고, 엘리사의 다리를 붙들고 주저 앉는다. 그러자 게하시가 수넴여인을 엘리사에게서 떼어 놓으려하자 엘리사는 수넴여인의 마음 중심에 고통이 있음을 알고 하나님이 자기에겐 숨기심을 알고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한다. 수넴여인은 엘리사를 원망하며 내가 언제 당신더러 아들을 달라고 했느냐며 자신의 아들이 죽었음을 고하자 엘리사는 종 게하시에게 자신의 지팡이를 가져다가 앞서 달려가 내려가는 길에 사람을 만나면 말하지 말고 인사도 하지 말고 곧장 수넴여인의 죽은 아이 얼굴에 그 지팡이를 얹어 놓으라고 한다. 뒤이어 엘리사가 수넴여인의 집에 도착 했을 때 게하시는 엘리사가 시킨대로 했지만 아이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엘리사는 문을 안으로 닫고 아이에게 기도하였으나 전혀 차도가 없자 엘리사는 죽은 아이의 배위에 올라가서 엘리사의 눈과 아이의 눈과 엘리사 입과 아이 입과 코를 아이와 맞부딪쳤으나 전혀 가망이 없자 성경은 엘리사가 매우 당황하여 아이에게서 내려와서 방안을 이리저리 돌다가 다시 아이에게 올라가 시도하자 그때서야 아이가 가느다란 숨을 쉬기 시작하고 7번 재채기를 하고 살아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 수넴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가 자신의 아들을 살리리라 믿었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엘리사를 찾아갔던 것이다.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하여 그의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수넴여인은 아이를 살려낸 엘리사 앞에 엎드려 그발에 입맞추며 감사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3) 여기서 감춰진 비밀과 엘리사와 수넴여인의 문제는 무엇인가?
성경은 교묘하게 하나님의 종 엘리사가 자신의 육신의 안락을 위하여 개인적 은혜를 베풀어 준 수넴여인에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고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하나님처럼 높이고 엘리사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으며 엘리사가 하나님이 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성전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날 때 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치료하였을 때 앉은뱅이는 일어서자마자 소경은 눈이 뜨자 즉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라고 성경은 기록한다.
그러나 수넴여인은 바로 엘리사의 발아래 엎드리고 엘리사에게 감사한다. 엘리사 역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엘리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걸 성경은 기록하고 숨겨 놓은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엘리사가 수넴여인이 올라오지만 무슨 이유인지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숨기신다고 (27)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수넴여인 아이를 죽이시고 엘리사에게 평소에 늘 보여왔던 걸 숨기신 것이다. 내가 성경이 숨겨놓은 이 부분을 찾는데는 하나님께서 병든자의 질병의 원인인 죄를 알게 하시는 능력 때문에 성경이 감추어 놓은 이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아이가 밭에 있는 아버지께 나가서 아이고 머리야! 아이고 머리야 ! 라고 말했을 때 아비는 집에 있는 수넴여인에게 아이를 데려가라고 사환에게 이른다. 이 말씀을 분석 해보면 이 아이의 아픈 것은 머리되신 하나님 아버지에게 대한 죄의 문제이며 그 죄는 수넴 여인이며 하나님께서는 수넴여인 품에서 아이를 죽게 하시고 즉시 수넴여인은 하나님께 아이를 살려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엘리사의 침상에 죽은 아이를 눕히고 바로 갈멜산 엘리사를 찾으러 간다. 그리고 성경은 엘리사 스스로 하나님께서 수냄여인의 속사정을 자신에게 감추이고 계신다고 실토한다. 왜? 죽은자를 살리는 엘리사가 평소에 자신의 지팡이를 죽은 자의 얼굴에 놓으면 죽은 자가 살았는데 왜? 엘리사의 능력의 지팡이는 죽은 수넴여인의 아이에게는 기적이 나타나지 않았을까?
모든 하나님의 제사장이나 예수님이나 베드로나 바울이나 수많은 선지자들이 죽은 자를 살릴 때는 즉시 살아났다. 그런데 왜? 성경은 엘리사가 수넴여인의 아들을 살리는데 3번이나 실패한 부분을(35) 매우 세밀한 부분까지 기록하며 4번째에야 겨우 죽은 아이가 생기가 돌아오는 장면을 매우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는가?
성경은 수백년을 건너띄며 대충 기록하다가 이번 엘리사와 수넴여인의 사건에서는 아이가 재채기를 7번 한것 까지도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는가? 더욱 아이가 죽은 원인이 머리가 아픈 이유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사실은 머리는 하나님에 대한 범죄이다. 아이가 머리가 아파서 죽은 것은 아이의 부모인 수넴여인 때문이다. 갈멜산 엘리사는 평소와 전혀 다르게 몇가지 낭패를 본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수넴여인이 왜? 오는지 평소의 엘리사 능력을 감추어 보이지 않게 하셨다는 것이다.
둘째는 수넴여인은 엘리사에게 언제 자신이 아들을 달라고 했느냐며 사건의 발단이 엘리사임을 원망한다.
셋째는 엘리사는 평소에 죽은 자의 머리위에 올려 놓기만 해도 죽은 자가 살아나는 엘리사의 능력의 지팡이가 전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걸 경험한다. 이것은 엘리사의 능력이 하나님 것임을 말한다.
넷째는 엘리사는 수넴여인 집에 도착하여 방문을 안으로 잠그고 엘리사의 3번의 실패를 성경은 매우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요즘 하찮은 일반성도들도 하나님께 기도하여 즉시 질병이 회복된 경험을 한 사람들 눈에는 하나님의 선지자인 엘리사에게 일어난 3번의 실패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성경은 엘리사가 당황하는 모습까지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이는 눈이 있는 자만 볼것이요, 귀가 있는 자만 들을 것이라는 하나님 말씀을 대변하고 있다. 엘리사는 매우 유능한 하나님의 선지자이다. 그러나 인간 엘리사도 하나님 앞에 완벽할 수는 없다. 믿음 좋은 수넴여인 역시 하나님을 사모한 나머지 하나님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었지만 엘리사는 사사로운 자신의 개인 은혜에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고 능력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고 엘리사 자신이 하나님이 된 사건이며 수넴여인 역시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고 엘리사를 하나님처럼 여긴 것이 바로 엘리사가 낳게 해준 수넴여인의 아이를 죽게 한 죄였던 것이다. 성경은 볼 눈이 있는 자에게는 감추어진 보물이 가득한 창고를 볼 수 있다.
(2) 벤하닷의 죽음과 하사엘의 왕위 계승(왕하 8:7-15)
엘리사가 다메섹에 갔을 때 아람 왕 벤하닷이 병들었다. 아람왕 벤하닷은 하나님의 사람이 여기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신하인 하사엘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손에 예물을 가지고 가서 하나님의 사람을 맞이하고 내가 이 병에서 살아나겠는지 그를 통하여 주께 물으라.” 하사엘은 엘리사를 맞이하러 갈새 다메섹의 모든 좋은 물품으로 예물을 삼아 가지고 낙타 사십 마리에 싣고 나아가서 그의 앞에 서서 말했습니다. “당신의 아들 아람 왕 벤하닷이 나를 당신에게 보내 이르되 나의 이 병이 낫겠나이까 하더이다.”
엘리사는 대답했습니다. “너는 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 반드시 나으리라 하라 그러나 주께서 그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엘리사는 왕이 나을 것이지만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엘리사는 하사엘이 부끄러워하기까지 그의 얼굴을 쏘아보다가 울었습니다. 하사엘은 “내 주여 어찌하여 우시나이까” 물었습니다. 엘리사가 대답했습니다.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모든 악을 내가 앎이라. 네가 그들의 성에 불을 지르며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 아이를 메치며 아이 밴 부녀를 가르리라.” 엘리사는 하사엘이 왕이 될 것과 그가 이스라엘에 할 악행을 미리 꿰뚫어 보았습니다.
하사엘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기에 이런 큰일을 행하오리이까” 엘리사가 말했습니다. “주께서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을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왕이 되리라는 예언을 들은 하사엘은 어떻게 했습니까? 하사엘은 아람왕 벤하닷에게 “그가 내게 이르기를 왕이 반드시 살아나시리이다 하더이다.”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튿날 벤하닷에게 물에 이불을 적시여 왕의 얼굴에 덮어서 왕을 암살하였고 하사엘이 아람 왕이 되었습니다. 엘리사는 성령의 능력으로 장래의 일을 미리 알았습니다. 그는 하사엘이 아람의 왕이 될 것을 알았고, 하사엘이 아람왕 벤하닷을 암살할 것도 알았습니다. 엘리사는 하사엘이 장차 이스라엘에 많은 악을 행할 것도 알았습니다. 엘리사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장차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파괴를 바라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미래를 알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3) 사마리아 성의 식량이 풍족할 것과 장관의 죽음(왕하 7:1-2)
아람왕 벤하닷이 자기의 온 군대를 모으고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니(왕하6:24) 사마리아에 큰 기근이 있더라. 마침내 나귀머리 하나가 은 여든개에 팔리고 비둘기 똥 사분의 일갑이 은 다섯 개에 팔리더라.
옛 시리아(아람)왕 벤하닷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사마리아를 짓밟으려고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성에 포위작전을 폈습니다.
모든 도로와 교량을 봉쇄하고 개미새끼 한 마리도 얼씬 못하게 사방을 둘러쌌습니다. 아람군대에 비하면 비교될 수 없으리만치 허약한 사마리아 군대는 대항 한 번 못해 보고 성안에서 숨을 죽인 채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방이 겹겹이 둘러싸인 채로 몇 달이 지나자 성중은 치명적인 기아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식료품과 생활필수품들은 이미 바닥 난지 오래입니다. 심지어 왕궁에 있는 비상식량마저도 거덜이 나버렸습니다. 왕궁에 있던 말들마저 다 잡아 먹어 버려 이제 남은 것은 겨우 말 다섯 필밖에 되지 않습니다.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것은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굶주림이 지속되자 인육까지 먹는 처참한 비극적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엄마들이 모여 제비를 뽑아 이번에는 내 집 아이, 다음에는 네 집 아이를 잡아먹는 천륜과 인륜을 논할 수 없는 처참한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아람나라 군대는 이미 이를 예상하고 허리를 풀고 가가대소하며 항복의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성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도달했습니다. 그때, 사마리아 성 안에 있던 엘리사 선지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 예언했습니다.
“내일 이맘 때가 되면 이곳에 양식이 넘쳐날 것이며, 사람들은 배부름을 얻게 될 것이다.” 엄청난 기쁨의 소식임에도 불구하고, 나날이 가중되어져 가는 굶주림의 해결이 막막하고 처절한 상황 속에서 수 개월간 갇혀있던 한 장관은 오히려 이렇게 반박하였습니다.
주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때 엘리사는 그장관에게 말하기를 당신눈으로 볼 수 있어도 먹을 수는 없게된다고 하였다. 진정 이 장관의 말처럼 사마리아성의 절망적인 상황은 하늘의 구원 없인 살길이 없고, 배부름의 날을 상상할 수 조차 없는 기가 막힌 상황이었습니다. 불신에 빠진 그들은 하나님도 해결할 수 없을 만치 완전히 절망적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그때에, 사마리아성 외벽 어느 그늘진 곳에 자기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네 문둥이들이 격리된 채, 사람들이 던져주는 음식으로 겨우 연명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1)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는 4명의 나병환자
(7:3) 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이 서로 이르되 우리가 어찌하여 죽을 때 까지 여기 앉아 있느냐?
(7:4) 우리가 성에 들어가리라. 우리가 거기서 죽으리로다. 우리가 시리아 사람들의 군대에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두면 우리가 살려니와 그들이 우리를 죽이면 죽을 따름이니라 하고 황혼에 일어나서 들어가니 그곳에 한 사람도 없더라.
그들이 성에 들어갈 때는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는 믿음으로 나병 환자들이 걸어 나갈 때에,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함께 하니 그들의 걸음소리가 큰 군대 소리, 병거 소리로, 말굽 소리로 들리게 했던 것입니다.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왕하7:1-7).
이 네 사람은 나병 환자들이기 때문에 그 걸음걸이가 비틀비틀 했을 것이며 발가락도 문드러지고 온 몸에 병이 있으니까 그 발걸음이 그렇게 군대 발걸음처럼 씩씩하게 전진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러나 그들이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큰 군사의 소리로 들리게 하신 것입니다. 저들이 저녁을 먹고 자려고 준비를 하는데, 웬 갑자기 큰 군대가 몰려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말굽소리가 나고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나니까 ‘야, 이스라엘 왕이 돈을 주고 여러 나라 왕들을 사서 그들이 연합군대로 쳐들어 오는구나. 아이고, 저 소리가 바로 우리 앞에까지 다가왔구나.’ 보통 같으면 척후병을 내보내서 상황을 살펴 볼 텐데, 그럴 겨를이 없었다. 너무나도 막 귀에 큰 소리가 들려오니까, 너도 나도 그냥 다 내버려 두고 줄행랑을 쳤습니다. 얼마나 급한지 그들이 말 타고 달려가지도 못하고, 그냥 말도 그대로 묶어둔 채 그냥 막 맨발로 도망 쳤을 것입니다. 그 때의 상황을 열왕기하 7장 7절에는 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저들은 그냥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막 달려 도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사람은 나병 환자 네 사람인데,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동에서 나타난 소리들을 큰 군대의 말발굽 소리, 함성 소리, 전차 소리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그들의 소리를 마치 천지가 진동을 하는 것 같은 소리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그들과 함께 하나님이 친히 임재해 주시자 천지를 진동하고 강림하시는 하나님의 걸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문둥이들과 하나님께서 함께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사마리아가 항복하면 수많은 전리품을 얻으며 아람임금이 하사하게 될 은금보화로 엄청난 부자가 될 꿈에 아람군대는 마음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지축이 흔들리며 온천지를 진동시키는 어마어마한 굉음을 듣게 되자 혼비백산 했습니다. 일찍이 온천지가 그렇게 요동하는 것을 들은 바도 본 바도 없었습니다. 정신은 혼미해지고 눈앞이 아득한데 무릎은 떨리고 뼈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방향도 갈피도 잡지 못한 채 사마리아성이 보이지 않은 곳으로만 멀~리 더 멀리 도망쳐야 살 수 있다는 단 한가지의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들 모두, 가진 모든 것들을 다 내버려두고 도망쳐 버린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네 명의 나병환자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연약한 것 같아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그들이 믿음으로 걸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천군천사와 함께 하셔서 모든 절망은 물러가고, 기적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나병 환자들이 들어가 보니 사람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여기저기 막 어질러 놓고 쌓아 놓고 도망을 갔는데, 먹을 것이 얼마나 많은지 저들이 먹고 마시고 보니까, 뭐 비싼 것들이 많으니까 가져다가 숨기고, 뭐 나병 환자들이 뭐 거지처럼 살았으니까 눈이 뒤집어진거죠.
7장 8절 보니까, 그 나병환자들이 진영 끝에 이르자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 이 때의 상황을 시편에 이렇게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시편 46편 1절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아멘. 하나님은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망에 처한 우리들을 언제나 건져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축복으로 넘치게 채워 주시길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붙잡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꿈과 희망을 갖고 믿음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기적은 다가오는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처럼,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우리 삶 가운데 임하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기쁜 소식을 전하는 네 문둥이
아람 진에서 실컷 배불리 먹고 정신이 돌아온 저들이 가만 생각해 보니까 자기들이 지금 조금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지금 사마리아 성내에는 자기 동족들이 다 굶어 죽어 가는데 자기들만 이렇게 배불리 먹고 있으니 얼마나 죄송했는지 이런 말씀을 합니다.
열왕기하 7장 9절에, 나병환자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 오늘같이 좋은 날에 침묵하고 있으면 안 될 것이라. 그래서 그들이 달려가서 성문지기에게 이야기하고 성문지기가 왕에게 보고하여 왕이 사람을 보내어 학인해 보니 아람 군대가 다 도망을 갔고, 모든 것을 남겨 놓아서 사마리아성 사람들이 달려 나와 음식을 먹고 그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나서 위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어제 이맘때 엘리사선지자가 전한 복음이 이렇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기쁜 소식은 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세요.
(고전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할렐루야. 여러분, 가장 기쁜 소식은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없어요.
3) 주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하고 불신했던 장관은 어떻게 되었는가?
복음(아름다운 소식)은 믿는 사람에게만 역사한다. 이미 이 아름다운 소식은 선지자 엘리사에 의해 예언되었다.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 엘리사가 복된 소식을 전한다.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7:1)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내용이었다. 성 밖에는 여전히 아람군대가 둘러싸고 있고, 기근은 하루 아침에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선포한다. 그걸 옆에서 들었던 한 장관은 믿지 못하고 말한다. “하늘에 창을 낸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7:2) 엘리사는 그 반응에 당신은 그걸 맛보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7:2). 그리고 실제로 아름다운 소식이 전해졌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었을 때, 이 장관은 식량을 얻기 위해 급히 성문을 나가는 백성들에 의해 밟혀 죽게 되어 그 아름다운 소식을 누리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2000년 전 골고다 언덕위에서 십자가에 죽으셨던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구원하기 위한 죽음이고, 그가 부활했고, 그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리고 믿는 자들만 영생할 수 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결국 영원한 죽음이 있을 뿐이다.
가장 비참한 나병환자들이 아름다운 소식을 가장 먼저 접했고, 가장 먼저 알렸다. 오늘날에도 그렇다. 비참함을 아는 자들, 죄인임을 아는 자들이 가장 복된 소식의 최고의 수혜자요. 그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로 사용되어 진다.
(4) 아람 나라 나아만 장군의 나병을 고치다
열왕기하 5장 1-15절은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만 장군의 나병을 고치는 내용입니다. 오늘날 시리아 다마스쿠스 지역에 위치했던 이 고대국가는 기원전 10세기 이스라엘에게는, 마치 일제시대의 우리나라에게 있어 일본과 같은 존재로 오랜 세월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힌 나라다.
1) 나아만 장군이 복된 소식을 듣다
당시 오늘날 다메섹에 주둔했던 군대 장관 나아만은 승승장구하던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고대 근동 강대국인 아람왕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는데 성경은 그에 대하여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라고 소개합니다. 이처럼 남부럽지 않게 잘나가던 그였지만 쉽게 고쳐질 수 없는 나병이라고 하는 불치병이 발생합니다. 당시에는 불치병에 가까웠던 전염병인 나병에 걸렸으니 그의 사회적 생활은 모두 끝나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람을 만날 수도 없고 사람들 앞에 설 수도 없고 외모도 추악해 졌을 것이고 이같은 상황 속에 그의 지위와 명예와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치유였을 것이다. 마침 그의 아내에게는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혀온 여종 하나가 있었는데 이 하찮은 작은 아이가 나아만의 병을 치유할 사람으로 북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를 소개합니다(3절). 놀라운 일은 이 하찮은 계집 아이의 말이 얼마나 확신에 찼던지 나아만은 왕에게 허락을 받고 그는 치유를 위해 선지자 엘리사를 만나러 이스라엘에 갑니다. 그런데 나아만이 병을 고치러 갈 때 개인적으로 간 것이 아니다. 온전한 치료를 위해 왕의 친서와 온갖 예물을 함께 보내, 이스라엘 왕을 먼저 찾아가게 한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가 대 국가로서의 방문임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한편 강대국 친서를 받아든 이스라엘의 왕은, 약소국 왕답게 사실관계를 알아보기도 전에 겁부터 먹고 떨기 시작한다. 나병을 고치기 위해 보냈다는 친서의 사연을 침략하기 위한 트집으로 여기고 몸져 누운 것이다. 왕이 몸져 누웠다는 소식에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을 자기에게 보내라 기별한다. 그리고 이 엘리사 선지자는 찾아온 나아만에 대한 대접은 커녕 그야말로 장수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였다. 나아만이 엘리사를 만나러 집까지 찾아갔지만 정작 엘리사는 얼굴조차 내밀지 않습니다. 그저 심부름하는 사람을 보내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면 살이 깨끗해진다’고 전합니다. 엘리사가 직접 나와 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 위에 손을 흔들어 고쳐줄 줄 알았던 나아만은 이를 듣고 분노합니다. 자신의 병이 나으려면 어떤 요란한 절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치유는 어떤 절차나 의식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오직 말씀에 대한 믿음뿐입니다. 더구나 지금 오는 자가 강대국 최고의 장수 아니던가. 분노로 가득한 나아만 장군이 그냥 돌아가려 했을 때, 만류한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심복들이었다. 심복들은 이렇게 말했다. “장군님. 선지자가 장군님에게 더 큰 일을 행하라 하면 행하지 않으셨겠습니까? 하물며 고작 이 작은 일, 당신에게 일곱 번 요단강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하는데 그것을 왜 못하십니까?” 사실은 이 심복들의 충성스런 태도야말로 이 ‘문둥병’ 이야기의 핵심이 서려 있는 대목임을 유념해야 합니다.
2) 나병이 치료되다
마음을 진정시킨 나아만은 엘리사가 지시한 대로 요단강에 가서 심복들의 조언에 따라 요단강물에 일곱번 씻는 의식을 거행하고서 나병이 씻은 듯이 낫는데 그의 피부가 어린아이 피부처럼 깨끗해지며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이 기적같은 치료로 인하여 나아만은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15절)라고 고백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나아만이 엘리사로 인해 치유됐다는 점이 아닙니다. 병으로 고통받던 나아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참 신임을 깨닫게 되었다는게 중요합니다. 사실 나아만이 아람 군대 장관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뛰어나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람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주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더라”(1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승리할 수 있던 이유가 하나님이 그에게 승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서만 역사하는 분이 아닙니다. 전 세계를 다스리시며 온 우주를 통치하는 분이십니다. 이 사실을 모르던 나아만은 자신이 잘나서 승승장구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 병에 걸리고 그가 우습게 여기던 이스라엘에서 치유되면서 비로소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나아만이 병에 걸린 것도 하나님을 알게 하려는 그분의 은혜입니다. 치료 불가한 병에 걸리거나 죽음을 앞두고 있는 건 저주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케 하시려는 그분의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직면한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천국의 소망을 갖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제 고국에서 싣고 온 온갖 예물을 선지자 엘리사에게 주고 가려고 예를 취한다.
3) 탐심을 낸 게아시가 나병을 가져가다
나아만 장군은 고국에서 가져온 예물을 드리려고 하였으나 엘리사는 예물을 한사코 받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이 때, 다름 아닌 엘리사의 시종인 게아시가 탐심을 먹은 것이다.
나아만 장군은 나병이 치료되어 하나님을 찬양했을 뿐 아니라 선물도 받지 않은 엘리사의 통 큰 처신에 감동까지 먹고 돌아가고 있었는데 엘리사의 시종 게하시는 나아만을 쫓아가서는, “아까 주려고 했던 그 선물, 내게 주시오”라며 청구한 것이다.
도무지 기댈 데라곤 없던 약소국 이스라엘이 강대국 실세 장수에게 어떠한 국격과 기품으로 맞서 압도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마당에, 이 형편 없는 녀석은 그만 나라 국격을 다 까먹었던 것이다.
이런 처신으로 게하시는 오히려 나아만이 가져온 나병을 자신이 인수하게 된다. 바로 이 대목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뒤집어 쓰인 나병의 실체와 호환되는 대목이다.
고대인들에게 ‘나병’은 무엇이었나? 자고로 나병이란 그 공동체를 괴사시키는 질병이었다. 나병을 빌미로 성원들을 공동체에서 내쫓았다기보다는, 공동체 자체를 괴사시키는 원인이었기에 격리시켜야 할 질병으로 본 것이다. 나병은 나아만의 ‘교만’이 꺾임과 동시에 그의 몸에서 떠나갔지만, 정작 그 교만의 핵심인 ‘자기 자신을 속이는’ 행태를 감행한 시종 게하시에게로 옮겨 들러붙고 말았기 때문이다.
게하시가 나병이 들어 쫓겨난 게 아니라, 그의 영혼에 먼저 괴사가 들어 나병이 들러붙은 것이다.
사실 이 고대 약소국의 선지자는 적국 장수의 나병을 고쳐주고서는 치료비도 한푼 받지 않음으로 국격을 높였다. 우리나라에선 일본으로부터 과거사 문제로 약 서른 일곱번의 사과를 받아냈다는데. 과거 이미 한일협정으로 큰 매듭을 풀었을 뿐만 아니라 위안부에 관한 해결도 전정부에서 이미 이루어졌는데 국가간의 협약을 깨고서 다시 보상해달라는 우리 정부에 대하여 일본은 뜻밖의 수출규제로 압박을 가하여 온 것이다.
우리나라는 일본에게서 대체 얼마를 받아야 이 문제가 해결될지도 그 액수는 아무도 모른다. ‘나병’이 든 지도자는 나아만처럼 심복들이라도 잘 만나야 치유가 가능한데, 우리나라는 요원해 보인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겪는 ‘新 나병’의 학명은 이것이 우리의 부분을, 아니 전체를 급속히 괴사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생각이 든다.
오늘 나아만의 나병치유에는 중요한 원리가 있다. 회복은 작은 순종에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작은 것이, 작은 순종이 중요함을 시사하는 부분들이 있다. 누가복음 16장 10절에 보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는 말씀이 있다. 작은 것에 순종하는 사람이 큰 것에도 순종하는 법이다. 작은 것에 순종한다는 것이 마음가짐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생각한다. 작은 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큰 것을 지킬지도 의문이다.
3. 엘리사의 기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성경 어디보다도 엘리사가 활동하였던 시대야 말로 어찌 그렇게 많은 이적들이 나타났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적을 행하셨던 그런 이적들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이런 이적들은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졌고 이제는 누구든지 성경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이런 기적을 기대할 필요는 없다. 신앙생활을 말씀대로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것을 읽고서 믿으라는 것이지 우리 눈으로 어떤 기적을 보고서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영혼이 구원받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성경을 보는 것, 기도를 하는 것, 주일 성수 하는 것과 같은 일들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방법을 시도하기 보다는 더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 신학공부, 세미나, 비전트립 또는 성지순례 등 거창한 방법으로 신앙의 회복을 꿈꾼다. 이런 방법들이 좋은 것이긴 하지만 회복의 완성은 아니다. 이러한 방법들은 마치 영양제 같은 것으로, 일시적 회복에는 큰 도움이 될 수는 있으나 근본적인 영적회복은 아니다. 근본적인 처방은 일상적인 습관이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야 말로 예나 지금이나 구원을 얻는데 제 일순위이다.
오늘 말씀에서도 엘리사의 생도 중 어느 과부의 경우 1병 기름을 갖고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나 나아만장군이 나병을 치료한 것은 모두가 말씀에 절대적인 순종으로 이적을 체험한 것이다. 오늘날도 우리들이 천국을 갈 수 있는 것은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교만한 자들이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의 교만한 마음으로 인해 말씀을 무시하고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것이다. 만약에 나아만이 끝까지 불순종 하였다면 당연히 문둥병을 치료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돌아가서 비참한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 나아만의 나병치료는 엘리사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였더니 치유를 가져왔다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엘리사의 말을 듣고 요단강까지 가서 요단강 물에 일곱 번 씻어야 하는 것이 절대적인 순종이다. 여러분 삶 속에 왜 기적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지 아십니까? 절대적인 순종이 아닌 내 이성과 상식으로 이해되는 선까지 순종하는, 즉, 부분 순종을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나아만 장군의 순종의 스토리를 보면서 결국 믿음이란 순종이고,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보이시고 기적을 베푸신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나아만은 그가 부귀 권세 영화를 소유했더라고 불완전한 사람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겉으로 봐서 부족함 없어 보이는 사람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말 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완전한 인간에게는 완전하신 하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야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채울 수 있고 치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나아만은 세상의 어떤 의사도 치료할 수 없는 심각한 병을 지닌 병자입니다. 큰 소리 칠 사람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자존심 부릴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을 영접할 때 임하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하나님 앞에 구원받아야 할 연약한 죄인인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지금 나아만에게 필요한 유일한 것은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는 것 뿐입니다. 지금 나아만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만 돌아 가느냐만 있을 따름입니다. 저는 나아만의 모습을 보며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변하지 않고 바뀌지 않고 오히려 더 나를 붙들고 있는 죄와 더러운 습관과 수많은 두려움들 속에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여러분 자신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또 사마리아성에서 굶어 죽어 가던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네명의 문둥이들이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고 적진을 향해 나아갔을 때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가만히 있으면 죽는 것이고 움직일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왕하 7:3 어찌하여 죽을 때 까지 여기 앉아 있느냐?). 믿음은 행할 때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고 온전해 집니다. 행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전도하러 나갈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막16:20).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을 버릴 때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십자가 정신입니다(왕하 7:4).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왕에게 나아가니 하나님이 역사하심으로 이스라엘을 살리시고 자신도 살게 됩니다(에 4:16). 문둥병자들은 시간의 긴박성을 가지고 일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 밤을 넘기면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시간의 긴박성을 가지고 일을 한 것입니다.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룬 것이 아닙니다(왕하 7:9). 우리가 전도할 때도 우리의 가족 중 불신자가 있다면 내가 오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저 사람이 지옥에 간다는 생각으로 전도를 한다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딤후 4:2).
사마리아 성안에서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은 그처럼 쓸모없는 사람들로 보였던 문둥이들을 통하여 전하여졌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쓰시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고전 1:26-29). 또 나아만이 병에서 구원함을 받게 되었던 최초의 원인도 바로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혀온 무명의 여종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여종이 한 일이라곤 엘리사를 소개한 것 밖에 없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드렸던 무명의 어린 소년도 똑 같은 경우였습니다.
소식을 전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개팅을 연결해 준 무명의 어린 소녀를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도 주 예수님을 소개하는 중매쟁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예언을 믿지 않았던 장관은 성문을 지키다가 사람들에게 밟혀 죽었습니다 (17절).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복음을 배척하는 자에게 임하는 심판을 보여줍니다. 문둥이들을 통하여 구원의 큰 소식을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약함을 결코 핑계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혼자서만 생명을 누려서는 안 된다. 내 가까운 사람 중에 죽어가는 사람에게 생명을 구원할 복음을 전해야 한다. 왜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될까? 성경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하라고 하셨듯이 가족들은 내 몫입니다. 그리고 전할 복음 중에서 인간의 마지막 종착지가 어딘지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구원 받지 못하면 두 번 죽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 두 번의 죽음이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생물학적 죽음(창 3:19)과 그리고 백보좌 심판 때 최종 종착지인 불못에 들어가는 둘째 사망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둘째 사망에 관해 성경은 죽은자들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으며 또 다른 책도 펴져 있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라. 죽은 자들은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그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하고. 각자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고 사망과 지옥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누구든지 생명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2~15). 우리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어 합니다. 예수님만 진실로 믿는다면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유로울 수 없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스케쥴에 따라 복음에 순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사망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죽음의 세력을 멸하시기 위하여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었던 분이시다(히 2:14). 사망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복음 안에는 사망에 매이지 않는 길이 제시되어 있기에 그 진리를 받아들이면 사망의 두려움이 물러가는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정죄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느니라』(요 5:24). 죽음과 다가올 둘째 사망의 심판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여 그와 연합하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 마지막날 다시 이세상에 오실 것을 전해주어야 한다. 인류들이 볼 마지막 기적은 예수님이 구름을 타시고 재림하시는 모습이 될 것이다. 이런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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