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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4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
    말씀 2019. 8. 26. 04:45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 창1:1
    해방된지 벌써 74년인데… 아직도 親日·親美 타령인가"라는 제목을 보고 무슨 이야기인가 하고 기사를 보았더니 열혈 운동권이었던 안병직(83) 서울대 명예교수의 기자와 가진 인터뷰이야기이다. 1965년 서울대 전임교수가 된 그는 마오쩌둥 혁명론에 영향받으면서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던 좌파 지식인이었다. 당시 그는 남조선 혁명을 꿈꾸던 이론가로서 언론에 안띄게 1960년대 후반부터 10년 정도 남조선혁명조직운동'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북한등 외부 도움 받지 않고 내부에서 체제 전복을 시도하기 위해서 노동 현장을 비롯, 사회 각 분야에 침투하면서 그런 사상을 전파하는 자로서 자신이 소속한 단체나 이름이나 강령도 정하지 않았고 기록도 남기지 않으면서 일대일 점조직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그 점조직도 얼마 못가 1980년 신군부 집권 당시에 발각됐다. 조직원들이 잡혀가 취조당했지만 두 명 정도만 사법 처리됐다. 자신 이름도 당연히 나왔지만 끌려가 취조를 당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안 교수가 몸담은 조직은 어쩌면 운이 좋았던 사례다. 그가 당시 느꼈던 것은 북한같으면 허위 자백까지 받아 처형해버렸을 텐데 그 엄혹한 시기에도 개인의 기본권은 보장하는 게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였다. 이런 게 몇 년 후 사상 전향을 하는 데 영향을 주어서 1980년대 중반 전향했다. 그리고 2000년대 보수의 혁신을 내건 '뉴라이트 운동' 대부로 활동했다. 최근 출간돼 논란을 빚은 '반일종족주의' 필자 대부분은 그의 사상적 세례를 받은 제자들이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구역질난다"고 비판한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등이 쓴 '반일종족주의'가 2주 연속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 1위를 기록했다. 반일종족주의는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와 김낙년 동국대 교수,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등이 함께 쓴 역사 교양서이다. 이 책에는 한국이 과거사에서 가장 많은 과오와 만행을 저지른 중국 등은 놔두고 일본만 원수로 인식하는 것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샤머니즘이 깔린 '종족주의'라는 주장이 담겨 있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주장하는 내용도 나와 사회적인 파장을 불러일으킨 책이다.
    게다가 지난 5일 조국 후보자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반일종족주의 저자들은 매국 친일파, 구역질 나는 책"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으면서 논란에 불을 지폈을 때 이 책의 저자들은 조 후보자를 모욕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기도 했다. 이 책은 특히 60대 독자들을 중심으로 인기가 지속되고 있다. 일본 아베 정권을 규탄하기 위해 불매운동이 전국에서 거센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서점가에서는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가 쓴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이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는 것이 너무 아이러니칼하다. 
    지난 7월 10일 미래사에서 출판된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은 식량 수탈 문제, 위안부와 징용 문제에 있어서도 강제성은 없었다는 내용으로 국민적인 공분을 사고 있다. 그는 일제하 강제 동원은 '허구'이고 '헌병과 경찰이 길거리 처녀를 납치하거나 빨래터 아낙네를 연행해 위안소로 끌어갔다는 통념은 거짓말이라고 받아친다. 대한민국이 이웃을 적으로 모는 근거 없는 '반일종족주의' 때문에 현 대한민국이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한다.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을 읽은 지식인들의 찬반 토론이 소셜미디어에 쏟아지고, 일반 독자들의 반응은 첨예하게 갈리는 가운데에서 8월 21일 안병직 교수를 만났다. 안 교수는 '반일종족주의' 대표 필자인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와 2007년 낸 대담집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에서 이번 책의 주요 이슈를 다룬 바 있다. 어쩌면 이 모든 논란의 '뿌리'이자 '배후 세력'인 셈이다. 근원부터 물었다. 안병직 교수는 말하기를 ‘기적의 대한민국’을 만든 주역을 친일과 친미라는 잣대로 패대기칠 수 있냐고. 미국과 일본에서 기술·자본·제도를 들여와 이룩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 동시에 그 나라는 자유와 인권을 지키는 민주국가가 자랑스럽다는 이야기이다.
    한국 자본주의가 1970년대 말 무너질 줄 알았는데 1980년대 무역 흑자를 내면서 승승장구하며 고도성장을 이룩할 수 있다는 확신하여서 그는 좌파지식인에서 보수지식인으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변한 후 자기가 가르치고 노동 현장으로 보낸 제자들까지 일일이 만나 설득했다. 그 결과 노동운동을 하고 있던 김문수 이영훈 교수 등 후배 제자 30명쯤을 학계로 이끌었다고 한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도 자신의 누이가 정신대에 반강제로 끌려간 아픈 역사가 있지만 언제까지 이 굴레에 묶여 있을 순 없었다. 결국 판단 기준은 국익이라는 것이다. 그는 요즘같은 분위기에서 ‘친일파’라고 욕먹으며 한국 경제성장사 연구를 하고 있는데 이런 연구를 하다보니 대한민국경제성장의 기반은 일제 식민지 시기 일본에서 유입된 제도·기술·자본으로 근대화가 이뤄졌으며 해방 후에도 이런 유산 위에 대한민국 경제성장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안병문 교수가 주장하는 것은 조선총독부가 조선 농민의 땅을 수탈하였다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한다. 또 강제 동원역시 ‘허구’라고 한다. 대부분 임금도 높아 자발적 취업이었다고 한다. 한국 대법원의 미쓰비시 징용 배상 판결은 어떻게 보느냐에 대해서도 “국제조약이나 협약을 지키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따돌림당한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정리된 문제에 법원이 독단적으로 개입한 데서 문제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전임 양승태 대법원장은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대법원 판결에 관여했는데, 현 대법원장이 사법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만용을 부렸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친일 잔재 청산은 너무 오래된 숙제”라며 다시 과거사 청산을 들고 나왔는데 현정부 잣대로 본다면 안병익 교수나 이영훈 교수같은 사람들이 그 청산대상일 것이다.
    “해방된 지 74년이 지났는데, 무슨 잔재가 남아 있다고 아직까지 친일 청산을 얘기하냐고 했듯이 대한민국은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이 주도한 한·미 동맹 아래 미국의 원조와 지원을 통해 기틀을 닦고 박정희 대통령은 1960년대 한일협정을 통해 일본의 기술과 자본을 들여와 세계사에 유례없는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친미와 친일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힘이다. 대한민국 국익을 기준으로 판단해야지 ‘친일파’ ‘친미파’로 낙인찍는 선동은 그만하자.”는 안병익 교수의 지론이 가슴에 와 닿는다.
     여든셋 노(老)학자 안병직은 여전히 혈기 충만했다.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주장한 이론가이자 ‘혁명가’로 살았던 30~40대와 중진 자본주의로의 사상적 전환, 그리고 ‘뉴라이트’ 대부로 활동한 70대부터 현재까지 바뀐 건 별로 없었다. 그는 말했다. “‘기적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미국·일본의 역할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선진국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기술과 자본, 제도를 들여와 불과 수십 년 만에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는데 우린 ‘친일 청산’ ‘반미(反美)’ 타령이나 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한심스럽다는 말이다. 이젠 대한민국을 위한 친일, 친미를 당당하게 이야기할 때 아닌가! 그는 ‘친일파’로 불리는 것쯤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지금 청와대와 각언론 및 사법부를 장악한 주사파들이 이 노교수의 진정어린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다면 이 나라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젊었을 때 잘못된 주체사상을 아직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이 나라에서 국정을 운영한다면 본인은 물론이지만 이나라 국민들이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사상전향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에 무덤까지 가지고 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신앙에서도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였다는 창조론으로 바꾼다는 것은 이들 정치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천지창조의 기원을 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에 따라서 인생과과 세계관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나이23세 때 태학에 입학한 후 그의 절친한 친구 이박에게서 처음으로 기독교 교리를 듣고 난 후 천지가 창조되는 기원이나 육체와 영혼 그리고 삶과 죽음의 이치에 관하여 듣고 그후 창세기를 접하게 되었고 이로 인한 그의 유일신론적 체험은 다산의 유학해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다산의 경험처럼 창세기는 진지한 독자들에게 유일신론적 세계관을 열어주면서 우주만물의 기원과 인생과 역사의 시작을 들려주고 있다.

    1. 창세기 개요
    인간이라면 우주 만물이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작게는 나의 부모의 부모 또 그 위의 부모를 생각해다 보면 최초의 인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수많은 책중에서 이런 문제를 밝혀주는 책은 오직 성경뿐이다. 성경은 첫장 열자마자 이 문제에 대한 답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는 천지창조에 관한 것은 인간들의 학문인 과학이나 철학을 통해 논할 대상이 아님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1절은 히브리어로는 7마디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말로는 4마디로 구성되어 있다. 히브리어로 7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적 완전함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일곱마디가 담고 있는 내용은 태초라는 시간의 시작과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심을 알려주며 그 창조가 오늘 우리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창세기에서는 천지창조의 시작을 출발로 인류의 시작, 안식일의 시작, 결혼제도의 시작, 죄의 시작, 구원의 시작, 예배의 시작, 살인과 일부다처의 시작, 문화예술의 시작, 대홍수 심판의 시작, 언약의 시작, 열국분열의 시작, 여러 언어의 시작, 선민의 시작, 이신칭의의 시작 등이 나타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의 기원은 창세기 1장1절 말씀으로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이 땅이 생기기 전부터 스스로 계신 분이고 절대자이신 하나님이시므로 천지창조는 하나님의 섭리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인간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아서 시간도 과거 현재 미래가 있지만 하나님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므로 하나님의 시간은 언제나 현재뿐이다. 그래서 빛이 있으라 하면 빛이 있듯이 그분이 계획하신 것을 말씀하시면 이미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창세기는 성경 전체의 서론에 해당되지만 성경 마지막 요한계시록과도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에덴동산에 생명과가 있듯이 요한계시록에는 생명나무가 등장하고 창세기엔 아담 하와가 부부이듯이 요한계시록 19장 신랑이신 어린양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부인 성도들이 깨끗하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있다 라고 묘사를 합니다.
    이런 것은 창세기에선 힌트를 주고 계시록에선 확실한 그림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구원받게 된다는 하나님 언약이 창세기에 시작하여 이 언얀이 나선형처럼 발전과정을 거쳐서 계시록에 가선 구원이 완성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1) 창세기 이름과 저자
    히브리인들은 글이 시작되는 첫 단어를 뽑아서 책이름을 만드는 것이 비일비재한데 성경의 첫 책이름을 창세기라 한 것은 히브리인의 관습을 따라 책의 첫 번째 말을 인용하여 책이름이 부쳐졌다는 것이다. 창세기 첫단어인 태초(히브리어로 레쉬트)라는 말이 창세기라는 책 이름이 되었다.
    또 창세기의 저자는 누구인가?  어떻게 인간이 나타나기 이전인 첫째날 빛과 어두움을 만들고 둘째날 하늘을 만들고 셋째날 땅과 바다를 만들고 넷째날 해와 달과 별을 만들고 다섯째날 궁창에 나는 새와 바다에 물고기를 창조하셨고 마지막 여섯째 날에는 땅에 각종 생물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고 마지막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 것을 알 수가 없었는데 이 창세기를 모세가 썼다고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이해를 하여야 할까? 이해를 하는 방법은 사실 원저자는 하나님이시고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기록한 자임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도 모세가 썼다는 예수님의 증거를 찾아보면 알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못박힌 손과 발을 보이시고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신 후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제자들 앞에서 잡수신 후 하신 말씀이 눅24:44절입니다.
    (눅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곧 이것이라 하시고
    여기 모세의 율법이라는 말은 일반단어로는 율법이나 십계명으로 이해하는데 여기서 사용한 헬라 말 로모스는 십게명을 말하거나 일반적인 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세의 책들(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지칭할 때 로모스라고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 즉 로모스라는 것은 창세기를 모세가 썼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확증적으로 증언하신 것입니다.

    (2) 이 책의 첫 수신자가 누구인가?
    독자를 두고 책을 쓰는데 모세가 이 책을 쓸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400년 종살이 마친 후 시내산에 와서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고 썼는데 중요한 것은 400년 종살이가 중요한게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 동안에 애굽문명에 완전히 빠져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애굽의 문명이 어떠했는가는 애굽의 왕의 명칭인 파라오를 보면 알 수 있다. 파라오는 왕의 이름이 아니고 왕이라는 직함표시입니다. 그런데 그 파라오는 태양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의 모든 삶은 해와 달과 별을 신으로 섬기면서 사는게 일상생활의 일부였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면서 생기는 주술적 문화와 또 그 주술적 문화는 반드시 음란문화가 뒤따르는 것인데 그러다보니 당연히 더럽고 추악한 음란문화로 점철된 400년을 애굽에서 살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 민족도 인간의 본능대로 행하는 애굽문화에 4대를 걸쳐 살았다. 출애굽할 당시에는 하나님 마저도 하나의 태양신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당연할 정도였을 것이다. 하나님말씀이 들려지지 않던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애굽사람들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태양과 달과 별들을 신격화하면서 그들에게 경배를 드리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던 시대였다. 그러한 배경에서 창세기 1장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말씀은 좀 쉽게 설명한다면 삼라만상을 이루는 모든 자연현상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만들어진 피조물이라는 이야기이다. 당시의 신화적 세계관속에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은 천재개벽과 같은 것이었음을 짐작케 할 수 있다. 우선 선택된 히브리인들에게 이 놀라운 말씀을 알려주기 위해 하나님은 모세를 택하시고 그에게 창조의 계시를 기록케 하도록 하신 것인데 그 기록 과정을 좀더 자세히 알아봅시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킬 계획을 하셨을 때는 하나님께서 준비한 새로운 땅에다 새로운 민족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간단치 않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 백성을 놓고 하나님 말씀을 받을 때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백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를 통해 모세 오경이 쓰여지기 시작되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주 목적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태양이 아니고 달이 아니고 별이 아니고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을 히브리민족에게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00백년동안 종살이 하면서 철저히 물질관에 굳어진 유물론사상을 인생들의 세포까지 새롭게 하는데 하루 아침에 될일이 아니기 때문에 창세기 책이 필요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창세기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라는데 일체 설명 없어 처음부터 단도 직입적으로 그냥 선포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1절 가장 짧은 4단어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이 한마디가 기독교의 모든 정수가 녹아진 문장이다. 이 문장을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모든 인간의 범주 속에서 이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느냐가 그 사람의 운명을 가르고 삶을 가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창1:1은 우선 책 한절이 시작되는 일반적인 문장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도대체 이 4단어로 구성된 창세기 1:1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이고 우리 삶속에 우리 인생을 어떻게 떠받치는 말씀인가를 한번 확인 하도록 하겠습니다.

    (3) 태초라는 시간의 시작
    자 창세기 1장1절 첫 단어 태초(레쉬트)라는 말은 요한복음 1:1에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에도 태초에 라는 말이 나오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게셨던 태초라는 하나님의 시간을 말하지만 창세기에서 태초라는 말은 우주 만물이 시작되는 시간의 시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간이 자연스럽게 도출 되는데 시간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 이시라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왜 하나님이 시간을 시작하게 하였을까 시간은 물질을 담아내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자 보세요. 시간 시작과 함게 피조세계가 같이 시작됩니다. 창조가 되면서 시간이 같이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사를 잘 보면 우리 인생사가 물질이 소멸되면 사실상 시간도 끝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물질 세계가 끝나면 시간도 끝나고 그 다음엔 영원속으로 들어감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지 3일만에 부활 하신후에는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입고 있던 그런 육체가 아니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의 육체는 전혀 새로운 육체이지만 시공간을 초월한 육체입니다. 두려워 방안에 갇혀서 떨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가셨을 때 예수님이 문열고 들어 가셨나요? 성경을 보면 벽을 뚫고 들어가십니다. 이것은 부활의 몸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몸자체가 영원한 몸이시기 때문이요. 이것을 보면 우리들도 장차 부활의 몸으로 변하면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몸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성도 여러분 시간이 끝나면 물질도 끝납니다. 물질이 끝나면 시간도 끝나고 영원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영원히 죽느냐 영원히 사느냐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간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생각하는 이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창세기 1장1절에 태초에는 시간이 시작되는 시간인데 근데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지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오늘 예배시간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확확 지혜가 열어져야 하는데 아아 모든 시간과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구나. 이 어마어마한 진리가 믿음으로 들어와 내 속에 자리를 잡을 때 우리는 우리의 가치관 세계관 심지어는 우리의 물질관 우리의 인생을 걸친 시간관 까지 전부 달라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 이게 내 인생이 아니구나 이게 나의 것이 아니구나. 이 모든 한가운데는 하나님이 주체자이시구나 바로 나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구나라는 것이 깨닫게 되는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의 자질구레한 구체적인 삶속에서 이 창세기 일장 일절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오너가 누구야. 우리 인생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기자가 기록한 것을 보겠습니다.
    (시90: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우리 인생은 영원한 하나님의 시간 속에 이 제한된 유한한 시간 정말 먼지 만큼의 잠간의 시간을 스치고 살다간다는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서 우리의 인생관이 새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땅에서의 시간이 끝나면 우리는 영원한 시간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니까 이땅에서 그렇게 애닲퍼할 일도 없고 너 아니면 죽겠는다 쓸데없는 소리도 하지말라는 것입니다. 그게 다 헛되고 헛되다 전도서의 기자가 하는 얘기가 그러니까 이런 성경말씀이 내 마음속에서 재해석될 때 우리 인생관 세계관의 눈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4) 전능하신 하나님
    두번째 태초에 삼라만상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이 하나님을 찾아보니까 복수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거야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니까 그렇겠지 한다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무식할 때는 그렇게도 이해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히브리문법을 공부하다보면 히브리문법에는 절대자를 지칭해서 표시할 때는 반드시 복수로 쓰는 관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복수로 쓴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 분이 절대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복수로 쓴 것이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하여 복수로 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분이 유일무이한 절대자이신 하나님이십니이다. 자 그러면 절대자 하나님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자 요셉이 경우를 예를 들어봅시다. 요셉이 열대엿살 때 꿈을 꾸고 자기 형제들에게 꿈얘기를 하였습니다
    (창37:7)우리가 밭에서 곡식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셉은 나이 17에 꿈 때문에 형제들에 의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 총무로 있다가 다시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에 의해 시위대장 감옥에 들어가서 영영히 세상에 못나오리라고 생각하였는데 그 감옥안에서 바로왕의 술맡은 관원장과 떡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 줘서 그 후 드라마틱하게 국무 총리까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꿈이 꿈으로만 끝나는 줄 알았는데 어언 13년이 지나면서 요셉의 나이 30세에 이르러서 그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면서 자신을 노예로 판 형들이 애굽까지 양식을 구하려 와서 애굽의 국무총리인  요셉에게 머리조아리고 무릎 끓은 그 상황을 바라보고서야 소년시절에 형들의 곡식단들이 자기를 향하여 절하던 꿈이 현실로 일어난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그가 한 말이 있습니다. 그 때 요셉의 입에서 최초로 하나님을 주어로 사용합니다.
    (창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쉽게 말하면 형들이 자신을 애굽에 노예로 팔았다는 것은 놀랍게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을 하지 않나요.
    요셉이 최초로 하는 말이 하나님을 주어로 써서 하나님이 하셨구나 라는 고백을 한 것은 자 내가 노예로 팔렸던 것도 내가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옥살이 한것도 알고보니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무슨 말을 하던지 하나님으로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 원수같은 남편을 누가 만나게 했어요? 어쩌다 이런 여편네를 누가 만나게 했어요? 이 말썽부리는 자식들을 누가 낳게 했어요? 자 오늘 이시간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게 한 것도 누가 그렇게 했나요? 
    여러분 이게 우스게 소리 같지만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어가 된다는 고백이 내 속에 들어오기 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걸리더라 그것입니다. 그래서 태초에 하나님 이 한절은 내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여러분의 눈물 기쁨 영광 좌절 실패 모든 것들의 결론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믿습니까?
    요셉이 그때서야 그 입에서 이게 하나님이 하신 일이구나 이 사실을 깨닫고 소소라치게 놀랍니다. 우리에게도 문뜩 문뜩 그런 찔림과 깨달음이 있잖아요. 그래서 성경은 위인전 얘기도 아니요 역사책 얘기도 아니요. 입지적인 스토리도 아니예요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5) 우주만물의 창조주
    세 번째 단어 천지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하늘 땅 이라는 뜻입니다. 천지는 곧 우주라는 개념으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여기 이론이 필요 없어요. 생물시간에 배웠던 그 진화론은 검증되고 실험하여 나온 이론이 아니고 가설입니다. 가설은 실험할 수도 없고 논증할 수 없어요. 말 그대로 설이라 그래요 진화론의 결론이 뭐예요 원숭이 유인원이 진화되어서 인간이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한 해괴한 논리가 어디 있어요 즉 아무 증명이 안되는 얘기임에도 여기에 심취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쨌든 이 천지는 말 그대로  하늘과 땅을 포함한 우주전체를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조하시니라는 단어는 바라와 야차르가 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창조라는 단어 바라라는 단어입니다. 자 그러면 야차로와 바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자 여러분 여기 물이 있어요. 제가 이 물을 얼려 가지고 얼음을 만들면 이것을 야차르라고해요 있는 물질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만들때 이것을 야차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라는 완전한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을 바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것은 우리가 태초에를 설명할 때도 이해를 했지만 사실 이 땅에 콧구멍으로 숨쉬고 먹고 입고 살면서 우리것 없어요. 모든 물질의 기원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믿습니까? 여러분 그러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 있을 때 우리는 사람을 재해석하는 것이고 물질을 재해석하는 것이며 사물을 보는 모든 관점이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창세기 1장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힘있는 고백이 여러분들의 전생애를 통한 고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진화론의 허구
    독일을 방문한 어는 신학자의 글이 생각난다. 그가 독일 북쪽에 있는 도시 브레멘에 있을 때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개신교 예배당을 방문하였던 것을 이야기 했다. 예배당은 웅장하였고 대형 파이프 오르간이 예배당 전면 벽을 장식하였다. 놀라운 것은 예배당의 웅장한 규모에 비하여 교인의 수가 너무 적었다는 것이다. 뛰엄뛰엄 앉아 있는 교인은 60~70 여명으로 대부분 60세 이상의 노인이고, 이들과 함께 온 초등학교 저 학년의 손자 손녀들 10 여명이 대부분이었다. 성가대도 없고, 어린 학생들이 노인들과 같이 예배드리는 것을 보니 주일학교나 학생회도 없어 보였다. 목사님의 설교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설교 중 설교자와 교인 들 간의 반응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서 몇몇 교인들이 동전을 헌금함 안에 떨어뜨렸다. 후에 알게 된 것은 독일은 십일조에 해당하는 종교세를 국가에 내기 때문에 주일예배에는 믿음 좋은(?) 교인들 만 헌금한다고 한다.
    최근 영국 런던의 많은 예배당들이 유지비가 부족하여 회교권에 팔려 회교 예배당으로 사용되고 일부는 나이트 파티 장소로 빌려주고 받은 임대료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한 저명한 영국의 목사님이 이러한 영국교회의 쇠퇴를 진화론 때문이라고 개탄하였다고 한다.
    영국과 독일이 어떤 나라인가. 종교개혁자 마틴루터, 라틴어 성경을 영어성경으로 최초로 번역한 위클리프 등의 위대한 종교개혁자를 배출하고, 찬란한 기독교 문화를 가진 나라, 수많은 저명한 신학자와 목사, 선교사를 배출한나라, 현재도 유명 신학대학이 있어 우리나라에서 많은 신학도 들이 유학을 가는 나라다. 찬란한 기독교 문명의 나라에 진화론이 과학과 교육에 침투하고, 교회도 진화론에 서서히 오염되자 100년도 안돼 교회는 힘을 잃고, 진화론에 오염된 수많은 젊은이와 중 장년 층 들이 교회를 떠났다. 한국교회는 서 유럽의 교회의 쇠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진화론의 정체와 그 해악을 정확히 알고 이에 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진화론은 생명이 우연히 저절로 생겨나(생명체 자연발생설) 오랜 시간에 걸쳐 점차적으로 고등 생명체로 진화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주장하는 학설이다. 이런 진화론의 얼마나 허구로 가득찼는지 이야기를 해보자.
     
    (1) 진화론의 허구 
    봄이 되어 황량한 벌판에 무성한 식물들이 왕성하게 올라옵니다. 잡초도 올라오고 곡식들도 올라오고, 여러분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야! 우연히 어떻게 저렇게 식물들이 자랄까? 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땅속에 생명의 씨앗들이 있었기에, 누군가가 곡식의 씨앗을 뿌렸기에 생명들이 자라나게 된 것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의 몸이 우연히 진화되어온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겠지요. 현재 여러매스컴들과 서적들을 통해서 진화론의 허구성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제 몇가지 예로 진화론의 허구성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진화론을 말하자면 아주 오래전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단순한 생물에서 생명의 기원이 시작되어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고등의 동물로 진화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1) 수학 확률적 오류
    진화론에서는 최초 생명체가 우연히 자연적으로 만들어져 진화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체가 형성되기 위해선 최소한 100개의 아미노산이 일정한 순서로 배열되어 단백질이 만들어질 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수학 확률적으로 100개의 아미노산이 단백질을 형성하기 위해서 질서정연하게 배열될 확률은 10*130(10의 130승)입니다. 수학적으로 10*50을 넘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로 간주합니다. 그러므로 진화론의 초기생명이론인 10*130 확률은 수학적으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2)  중간과정의 진화모델을 제시하고 있지 못한다.
    진화론자들은 말하기를 어류-양서류-파충류-조류-포유류로 진화되어 왔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어류에서 양서류까지 진화하는 중간 과정에서의 생물이 존재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직도 중간단계의 생물들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진화론이 허구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시조새를 예로 들어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단계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어디한번 살펴볼까요? 진화론자들이 시조새를 중간동물의 예로 드는 이유는 파충류와 조류의 특징들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파충류의 특징-이빨과 발톱 조류의 특징-깃털, 날개
    진화론자들은 파충류의 비늘에서 깃털로 진화되었다고 주장하나, 후에 과학자들은 시조새의 깃털은 비늘에서 깃털로 가는 진화과정의 깃털이 아니고 새의 완전한 깃털이라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조새가 가진 파충류의 특징인 발톱도 현재 완전한 새 종류인 타조의 날개 앞쪽 끝에 발톱이 있습니다. 시조새는 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단계가 아닌 새 인 것입니다.
    인간의 진화과정의 단계를 설명하는 것들은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되어 가는 과정의 것들이 아니라, 원숭이이거나 인간입니다.
    진화론자들의 주장하는 인간과정의 계열은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자바인-북경인-네안데르탈인-크로마뇽인입니다.
    이들은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되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완전한 원숭이이거나 인간임이 밝혀졌습니다.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는 멸종된 침팬지의 종류로, 자바인은 현대인의 대퇴골로, 북경인은 주장하는 근거가 없고, 네안데르탈인은 곱추병으로 등이 굽은 인간이고 크로마뇽인은 현대인류입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오늘날 진화론자들조차도 찰스다윈의 진화론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2) 진화론이 허구임에도 유지되는 비결
    진화론의 연속성과 변질은 모든 학문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 실상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진화론이 학계에 미친 영향은 가히 엄청나다. 그러나 진화론은 한 마디로, 억측과 추측으로 ‘세월’의 길이와 우연성만을 남긴 채 벌써 사라졌어야 할, 수많은 학문 중에  한 가지 유형의 속설과 같은 이론이다.
    그런데 왜 학자들은 진화론을 기본값으로 학문을 추구해 왔는가? 그리고 아무런 부정과 대립적 비판도 하지 않고, 학문의 장을 유지하고 있음은 물론, 진화론의 허구 위에다가 또 다른 새로운 학문을 이어나가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진화론은, 왜 이렇게 오랜 세월을 버티고 있는 것일까?
    진화론을 대체할 만한 이론의 부재도 원인이겠지만, 수많은 석학들이 지금도 진화론의 허구적 가설을 실제인 양, 진화론의 가설의 토대 위에 새로운 학설들을 이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있게 생각해 보면, 진화론의 허구의 지속 원인을 ‘지식적인 기반’에 두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를 발견하게 된다. 진화론의 허구적 지속성은, 단순한 학문적 접근으로 허물어지는 학설이 아니라는 추정을 ‘하나님의 창조론’에 근거하여 증명해야 한다.  
    성경의 창조론으로 근거하여 볼 때, 진화론이라는 가설은 보이지 않는 존재의 악의적 의도에서 시작되었으며, 진화론의 허구적 모순이 산재한 가운데 막무가내식으로 진화론이 정설처럼 유지되어야만 버틸 수 있는, 악행의 도전이 인간의 뇌리를 세뇌시키고 있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진화론을 유지하려는 세력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세력을, 보이는 세력이 이길 수는 없다. 마치 투명인간과의 싸움처럼, 모습이 노출되어 있는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존재 앞에 지극히 무능력하고 조종당할 수밖에 없는 한계적 상황 안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진화론은 한 마디로 ‘허구’이다. 허구라는 전제 하에 진화론적 시각을 가져보는 것은 학자적 관찰로 지극히 당연한 통찰이며, 이러한 부정을 학문적 중심에 두고 연구되고 추정되어야만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 앞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
    AAAS, 한국통합생물학회(한국동물학회, 한국식물학회, 한국미생물학회, 한국육수학회, 한국생물교육학회, 한국고생물학회), 한국유전학회, 한국생태학회, 한국동물분류학회, 한국하천호수학회,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서 진화학을 지지하고 있으며 계통연구를 수행하는 전세계의 무수히 많은 연구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진화학의 근거를 끊임없이 내놓고 있지요.
    진화론의 허구적 기본값이 영향을 미친 학문의 범위는 실로 광대하기까지 하다. 인류학, 지질학, 인문학, 유전학, 철학, 신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문적 영역에서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약속처럼 표준화되어 교육의 밑바탕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시공의 제한 속에 있는 인간의 한정된 지혜로는, 하나님의 신비의 창조 섭리를 알 수 없다.
      그 예를 다음의 말씀을 통해 생각해 봅시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 8:56-58)”.
    육신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아득히 먼 옛날 사람이다. 그러나 시공을 초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시간 속에 아브라함은 그저 피조물 중 한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출현 이전에 스스로 존재하신 창조주이시다. 인간의 육안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창조 섭리를, 시공의 제한을 받는 인간이 학문으로 논증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증명하고 있음이다. 
    진화론은 ‘중간 형태의 발견 없이’ 오늘날에 이르렀다. 진화론이 한 인간이 내뱉은 속설이라는 증명은, 진화의 과정에서 반드시 나타나야 할 ‘진화 과정의 중간 형태가 없다’는 사실 한 가지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의 참 진리를 깨달은 믿음의 사람들은 더 많은 증거들을 기록하고 진화론의 허구를 폭로해야 할 것이다.
     
    창조설자들은 진화론이 아무 근거없는 허구로만 증명되고 있다고 말하기 바쁘지만 대다수의 창조설자들은 그들이 말하는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는 일을 상대방인 진화덕후들에게 위임하지요.
    왜냐하면 진화론이 허구적 가설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을 교육의 굴레에서 세뇌시키듯 가르쳐 온 교육적 기반과, 그러한 허구를 바탕으로 교육 되어진 세계적 고정관념을 무너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3) 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에 따른 댓가는 너무 크다
     성경은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분명히 창조의 주체를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창조 6일 동안 하나님은 모든 생명체를 진화라는 방법이 아닌 처음부터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창세기 1장에 10회에 걸쳐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생명의 기원이 진화론을 따르는지 성경의 창조론에 따르는지 이를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나? 어떤 현상을 과학적으로 판별하려면 그 현상을 우선 관찰한 후 그 자연현상을 지배하는 원리나 이론을 만들고 이를 반복 실험을 통하여 확인하여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천지만물을 창조하는 것을 본 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실험적으로 구현할 수 없다. 진화도 수십억년에 걸쳐 진화되는 과정을 관찰하거나 실험으로 재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창조냐 진화냐의 문제는 과학의 문제가 아닌 선택의 문제이고 믿음과 신뢰의 문제다. 창조와 진화 중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나의 가치관 인생관 그리고 세계관이 결정된다.
     내가 진화론을 선택하는 순간 나는 무신론자가 되고, 모든 생명체가 물질로부터 출발하여 진화되었기 때문에 유물론자가 된다. 더 나아가서 사람이 생명체 중 가장 고등생명체로 진화되었기 때문에 사람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인본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다.
    반면에 창조론을 택하면 나를 지으신 창조주가 어떠한 분인지, 내가 어떻게 그분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분의 계획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창조주를 기쁘게 하는 삶인지에 관심을 갖게 된다. 창조냐 진화냐의 문제는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왜곡되진 않은 생각과 마음으로 자연 현상을 관찰하면 이 중 어느 쪽이 바른 것인지 판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이 보여 알려졌나니…”(롬1:20).

     아래 사진은 미국 러시모어 국가공원에 있는 대통령산 이다.



    이 산을 보고 대통령산이 오랜 풍화작용에 의하여 저절로 된 것 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조각가들이 만든 인공 산이라는 주장 중에서 어느 주장이 맞는다고 할 수 있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조각가들의 작품이라고 쉽게 판단할 수 있다. 다음에 대통령산과 꽃을 비교해보자. 대통령산과 꽃 중에 어느 것이 만들기 쉽나? 대통령 산은 조각가 들이 만든 작품이지만 꽃은 현재의 과학기술로 절대 만들 수 없다. 대통령산이 저절로 된 것이 아니면 현재의 과학기술로 만들 수 없는 꽃을 어떻게 저절로 생겨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나. 예수님은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7:29”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진화론 자들과 많은 사람들은 꽃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믿는다. 이와 같이 여러 자연현상을 왜곡되지 않은 마음으로 바라보면 깊은 과학적 지식이 없어도 창조론과 진화론 중 무엇이 옳은지 쉽게 판별할 수 있다.

     진화론은 21세기 과학만능시대에 과학이라는 위장을 하고 교육과 과학분야에 들어가 창조주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고, 더 나아가 교회에 침투하여 교회를 파괴하는 사탄의 최대 무기이다. 기독교인이 진화론에 오염되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고 성경에 나오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기적적인 창조사역들이 전설적인 이야기로 변질된다. 미국의 개신교 목사님 들 중 6일 창조,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오병이어의 기적 등을 믿지 않는 목사님 들이 교단에 따라 40~60 % 이른다는 보고를  전 본 적 있다. 한국의 교회가 영국이나 독일 교회의 퇴락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 되심을 믿고 선포하여야 한다. 우리들뿐만 아니라 자라나는 젊은 세대들에게 이러한 창조신앙과 성경말씀을 바르게 전수하여야 한다. 적극적으로 진화론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믿을만한 것인가를 가르쳐야 한다. 무엇보다도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 성경말씀을 온전히 믿어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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