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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이웃사랑에 대한 주님의 교훈말씀 2019. 3. 10. 23:34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교훈 눅 10: 25-37
사람들이 스포츠를 좋아하는 이유는 스포츠에는 역전이라는 것이 있어서 스포츠를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봐도 이길 수 없는데도 예측을 무시하고 승리를 하는 경우가 종종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스포츠를 좋아하는지 모른다. 이런 일은 스포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정말이지 세상사 알 수 없는 것이 스포츠와 비슷하다. 그러니 끝난 것처럼 보여도 끝난 게 아니다. 패배한 자일지라도 후회와 회한을 접고 패배를 딛고 절치부심해 다시 일어서는 자야말로 진정한 승자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님은 인생을 패배하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패배를 딛고 일어나 성공하는 존재로 만들어 놓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인간의 영혼이 빛나는 진짜 이유는 그가 어떤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최후에는 승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이야말로 패배를 패배시키면서 전진해온 존재가 아닌가!
인간은 패배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기했을 때 끝나는 것이라고!
그렇다. 포기하지 않는 한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하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인생의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자가 될 수 있다. 누가 패배자가 되지 않고 진정한 승리자가 될까? 하나님 말씀을 믿고 행하는 사람들이다. 성경말씀을 온전히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라는 것은 마귀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여 지옥에서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요약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을 실천할 수만 있다면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출19:1-9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광야에 이르러서 시내산 앞에 장막을 쳤다. 그리고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니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었다. 3500년전에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10계명을 주셨는데 이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의 백성인 제사장의 나라가,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십계명을 다시 두 계명으로 말씀하셨는데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하셨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진정한 승리자가 되려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힘입어 이웃을 사랑하여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 무엇과도 동시에 겸하여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주이시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보내 주신 하나님만을 온전히 사랑해야 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 중 가장 잘 알려진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더 압축하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이웃사랑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5장에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굶주린 자를 보면 먹을 것을 주라는 것이고 목마른 자를 보면 마실 것을 주고 추위에 떠는 자를 보면 따뜻한 옷을 주라는 것이고 병든 자를 보면 치료해 주고 피곤한 자를 보면 쉬게 해 주고 억울한 자를 보면 그 억울함을 풀어 주어라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위의 몇가지 이야기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을 알게 하셨으니 다시한번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깨닫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올림픽이나 국제경기에서 금메달을 딴다면 너무나 기뻐하는데 정작 당사자는 얼마나 기쁠까! 그는 하루아침에 메달하나로 공인이 되기도 하고 어디가도 그의 존재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보면 전국민이 우러러보는 그런 상도 그가 이 세상에 있을 때만 효력이 있는 것이다. 이 세상떠나가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나는 오늘 성경을 통해 인간이 메달 딴것보다 더 가치있는 상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 하늘나라에서 받는 상
성경의 핵심은 예수님 믿으면 천국가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지만 믿지 않으면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핵심이다. 그런데 천국간다고 모두가 똑같이 천국의 복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겨우 천국에 가는 것으로 끝난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우편에 있던 강도는 무슨 상을 받았을까? 죽으면서 구원받았으니 그저 불가운데서 구원받았을 뿐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편말씀엔 주님을 위해 눈물흘리면서 씨를 뿌린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는 말씀은 주님을 위해 일한 대로 받는 상급도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 천국갔을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큰 상이 무엇일까 생각하니 마태복음 5장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워지는 것보다 더 큰 상은 없다고 기록된 것을 보니 이런 상이 제일 큰 상이구나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러한 상을 누가 받느냐하면 바로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한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마5:45).
천국은 하나님만 잘 믿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많이 하고 성경많이 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말씀인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천국에 간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하는데 마지막 시대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세상이야기는 귀에 잘 들어오지만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 말씀은 믿어지지 않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상은 이 세상에서 어느 상과도 비교될 수 없는 큰 상입니다. 올림픽 메달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가치있는 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을 타기 위해 마음을 다해 힘을 다해 예수님을 섬겨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그 받을 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하나님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이처럼 넘치는 복을 받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무조건 베푸는 자에게는 풍성한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교훈은 정말 새로운 교훈이십니다. 새로운 교훈은 하나님나라를 소유한자와 그러지 못한자를 분별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생활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한 마음을 소유하면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막힌 담이 남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영적인 교훈을 모르고 단지 육신의 안일함을 위해 산다면 사소한 감정도 암금으로 남아있게 되어서 이웃과의 벽이 무너질 수 없는 것이며 항상 이웃이 원수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웃이 원수로 된 이야기를 한다면 미국에서 한인이 운영하는 가게 옆에 또 다른 한인이 동일한 업종의 비즈니스를 시작하며 대 바겐세일을 합니다.
처음에는 사소하게 시작된 경쟁이 미움을 넘어 용서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도록 멈추지 않습니다. 이민와서 일군 전 재산과 희망과 같은 한 민족의 동질성까지 모두 잃고 나서야 끝이 납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받은 작은 상처를 더 큰 아픔으로 되돌려 줍니다. 결국 평생의 원수가 되고 나서야 후회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믿지 않으면 모든 인생들이 이처럼 끝까지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웃사랑만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2천년 전 유대땅에 초라하고 볼품 없는 한 청년이 나타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주 하나님 밖에는 구원자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어느날 젊은 청년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주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하고, 자신을 그 아들이라고 하는 것도 눈에 거슬리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 젊은 청년에게 몰려가서 원수를 사랑하라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하라는 설교를 듣고 이런 권세있는 말씀을 듣는 것은 처음이라며 군중들이 주님을 따르는 웅성거림이 나타나니 율법과 성전제사를 이끌고 있던 제사장이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에게는 예수님이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젊은 청년을 넘어뜨리고자 미행도 하고, 꼬투리 잡으려고 어려운 질문도 하고 그랬던 것이죠. 어느 날 한 율법학자(율법사)가 스스로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하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때 율법교사는 짐짓 자기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였더니 이 대답에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행하라. 그러면 살 수 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다시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율법사가 내 이웃이 누구냐는 것에 대한 대답을 주신 말씀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웃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2.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하라
(1)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어떤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는데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때려서 거의 죽게 되어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또 곧바로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길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불쌍한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날 자기 주머니에서 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율법사가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예화는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인데요. 유대교를 이끄는 제사장도 레위인도 강도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피하여 지나갔지만, 유대인들에게 천하게 여김을 받던 사마리아인이 이웃사랑을 몸소 보여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이해할려면 우선적으로 사마리아인들에 대하여 알아야 하는데 그들은 앗시리아에 의해 북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 후 유대인과 이방족의 혼혈로 생긴 종족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의 혈통을 더럽힌 자라 멸시받고 박해받았으며 그 반목은 매우 깊었다. 유대인 이지만 다른 신을 섬기거나, 이교도와 결혼한 사람도 있었으므로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상당한 신분적 차별과 핍박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사마리아인이라도 진정으로 자비를 베푸는 자는 이웃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즉 이웃이란 율법학자와 같은 유대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혈통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뜻을 행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어려운 이들을 돕고 사랑하는 자들이란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강도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 옆을 지나는 세종류의 사람들이 취한 행동을 비유로 말씀하면서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개인주의로 인하여 눈물과 인정사정이 메말라 버린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려 주시는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사람이 되기를 깨닫는 좋은 기회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1) 죽게 된 자 앞에 선 제사장의 모습
먼저 제사장은 시내산에서 레위의 증손자 아론을 성별하여 세운 데서 시작되었으므로 제사장은 반드시 아론의 후손이어야 했으며, 육체적으로는 흠이 없어야 했고 그들의 몸과 마음, 삶은 항상 깨끗하고 거룩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들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쳤으며 백성들이 가져온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고 십일조를 감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팔을 불어 백성들을 소집하여 축복했으며 문둥병을 진단하고
서원자의 값을 정했습니다. 더 나아가 언약궤를 옮기고 백성들의 송사를 재판했으며 24반차를 따라서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거룩한 제물로 제사들 드렸습니다. 그들의 하는 일은 참으로 귀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특별한 신분인 제사장의 태도를 보십시다.
이 제사장은 강도에게 맞고 벌거 벗긴 채로 거반 죽게 된 사람을 보고는
피하여 갔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읽는 사람들은 이 제사장에 대하여 종교적인 위신자니, 피도 눈물도 없는 무정한 사람이니 하면서 쉽게 매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제사장에게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을 줄 압니다. 앞의 제사장의 위치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사장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성별된 사람으로서 항상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보존해야 하나님 앞에 나아가 거룩한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때문에 제사 드리러 가는 제사장이 벌거벗긴 채로 피투성이가 되어 거반 죽게 된 사람을 만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이 더러운 것이나 시체를 만지게 되면 부정한 자가 되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더욱이 24반차를 따라 오랜만에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고 하면 제사장으로서 어떠한 인간적인 사사로운 일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그르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제사장의 직무를 충실하게 이행하겠다는 생각에서 강도만나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피하여 다른 길로 갔는지 모릅니다. 그리나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죽음에 처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은 사람을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이러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깨닫지 못하고 그냥 피해 지나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제사장도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지 않고 피하여 다른 길로 간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줄 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내 나름대로의 잘못된 생각이나 판단 때문에 보다 더 중요한 일들을 놓쳐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생명을 살리는 귀한 일에 최우선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내 앞에 죽어가는 자를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2) 죽게 된 자 앞에 선 레위인의 모습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은 야곱의 아들 레위의 후손들로서 이스라엘 자손의 계수에도 들지 않았다(민 1:47-49). 그들이 하는 일들을 보면 하나님의 성전에 속한 일만 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제사장들과는 달리 성전에 관계된 여러 가지 잡일까지도 다 맡아서 하는 봉사자들이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오직 성전의 일만 하는 전문적인 사람들이었다. 성전의 문지기와 회막을 관리했으며 찬양을 담당했으며 또 장막을 치고 거두며 운반하는 일들을 했습니다(민 1:50). 더 나아가 이 레위인들은 성전에서의 질서와 제사장들을 수종드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시대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런데 강도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앞에서 레위인의 태도를 보면 레위인도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이 레위인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비난의 화살을 퍼붓고 소위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사정이 있는 줄 압니다. 이들은 오직 제사장들을 수종들면서 성전에서 전문적으로 봉사만 하는 사람들이었고 또 그들은 율법을 잘 아는 사람이므로 생각하기를 저 사람은 분명코 무슨 죄가 있기 때문에 저렇게 된것이지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또 나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저런 사람들을 돌보는 일들은 다른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레위인은 자기 나름대로는 보다 더 중요한 일을 위해 그냥 피해 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된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레위인들이 성전에서 질서를 지키고 제사장을 도와 수종드는 일을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다시말하면 생명 살리는 일들을 하는 직분입니다. 그런데 이 레위인은 자신의 일에 충실한다는 생각으로 죽어가는 생명을 그대로 방치하고 지나간 것입니다. 그는 가장 중요한 일을 기피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들은 다 생명을 살리는 일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실족케하는 일들이 있지는 않은가요? 우리 모두 생명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 하기 바랍니다.
3)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보십시다
사마리아인들은 BC 721년 앗수르왕 사르곤 2세에 의하여 점령당한 후 사마리아인들은 집단 이주 정책에 의해서 혼혈족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아주 부정하게 보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제사들이는 것도 받아 들이지도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사람들에 의해 멸시와 천대를 당했습니다. 오죽했으면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왕래할때도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길이 가장 빠른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땅을 밟기 싫어서 요단강 동편 쪽으로 돌아서 가곤 했겠습니다. 하지만 거반 죽게 된 유대인 앞에서 무시당하면서 살았던 사마리아인의 태도는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치료비가 더들면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눅10:33-35)고 하고 떠났습니다. 사실 강도 만난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에게 있어서는 원수와 같은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마리아 사람은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죽게 된 그를 불쌍히 여겨 그를 돌보아 주고 떠나면서 주막 주인에게 특별한 부탁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진정한 이웃이 누구냐고 물으신 후 율법사가 사마리아사람이라 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율법사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이 세상의 유혹을 받아 명예와 권세, 물질과 향락을 쫓아 하나님을 배신하고 이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강도 만나 죽어 가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목자의 심정으로 찾아가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고 주님의 교회로 인도하여 한 영혼을 구원하는데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현재 위치는 어떻습니까? 혹시 사마리아 사람들과 같이 멸시당하는 처지에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광야 같은 세상에서 마귀 강도 만나 신음하는 영혼을 주님의 교회로 인도하여 살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4) 누가 진정한 이웃인가?
<예수, 하버드에 오다>라는 책에 의하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인물들은 랍비들의 예화에 나오는 단골인물들이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제사직 계급으로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게 되지만 이들의 행동은 종교법상으로는 다시 정화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릴 뿐 아무런 문제는 없다. 또한 그들은 보통 율법을 방패로 선한 일을 하지 않아서 이들이 보인 행동은 어찌보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포인트는 "누가 이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과 함께 보통 유대인들 보다 오히려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마리아인들이 더 낫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당시 상당히 급진적인 인물이셨는데, 원래 유대인은 안식일에 일 하면 안됐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에 이를 부정하면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셨고, 율법만 지키던 바리새인들이 주요 적대세력으로 신약성경에 등장하기도 했다. 예수님이 활동하던 당대의 유대 사회에서 이런 비유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은 자신들의 일상에서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류였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이 정도로 취급을 당하는 부류가 존재하지 않지만, 굳이 비유를 하자면, 그리고 현대적인 시각에서 재구성을 한다면 매우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어떤 신학자가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준 동성애자가 진정한 이웃이다'는 대답을 들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당시의 예수의 이런 비유는 기존 종교계의 기득권층에 대한 엄청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교회서 흔히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주제로 설교를 준비하던 신학생들조차, 설교에 늦지 않기 위해서 실제로 복도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돕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가더라"라는 이야기가 돌기도 한다. 머리로는 옳다는 것을 알아도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점을 여실히 드러내보이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본문의 결론은 이웃사랑의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뚜렷하다.
왜냐하면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온 제사장과 레위인은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으로 이들은 당시 사회의 기득권자이며 존경받는 사람들입니다. 그와는 정 반대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이면서도 이방인보다도 못한 사람들이라고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율법교사가 이런 사마리아인을 자기 이웃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경멸해도 시원치 않을 천하고 멸시받을만한 사람을 이웃사랑의 모델로 제시하셨습니다.
3. 이웃사랑을 실천한 예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이웃이란 일차적으로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이지만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한 이웃은 ‘뜻을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 매일 만나더라도 뜻을 함께 하지 않으면 이웃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이웃은 그 모든 이유를 뛰어넘어 그냥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키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종교와 혈통, 신분제도 등에 대한 당시 사회의 편견을 넘어서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 사마리아인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입니다. 33절에 보면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말씀합니다.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면 불쌍한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렇지만 제사장과 레위인은 직위 때문에 아니면 편견 때문에 인간에 대한 순수한 눈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행동도 민첩하고 강도 만난 자에게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바릅니다. 그리고 그 상처 부위를 싸맵니다. 아마 자기 옷을 찢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자기가 타고 가던 짐승에 태워서 가까운 주막으로 데리고 갑니다. 데리고 가서는 밤새도록 돌보아 줍니다. 이튿날은 주막 집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고 부탁합니다. 당시 일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라면 굉장한 돈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정말로 그는 적당히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헌신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이 아는 사이입니까? 아닙니다. 전혀 모르는 사이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이 바로 이웃사랑입니다. 바로 측은지심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아담을 만드실 때는 이런한 측은지심을 우리 마음속에 넣으셨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하면 긍휼이요 자비의 마음입니다.
(1) 이웃사랑을 실천하신 장기려 박사
2019년 1월 11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 고신대복음병원 명예원장(초대병원장) 故 장기려 박사를 비롯한 16인을 ‘과학기술유공자’로 신규 지정한다고 밝혔다.
과학기술유공자 제도는 일반 국민이 존경할 만한 우수한 업적이 있는 과학기술인을 과학기술유공자로 지정해 명예와 긍지를 높이고 과학기술인이 존중받는 사회문화를 조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이번 과학기술유공자 심사에서는 ‘국가 사회 발전 기여도(공익)’에 대한 비중을 높여 유공자 위상에 맞는 엄격한 기준 아래 심사가 진행됐으며 총 3단계에 걸쳐 167명의 전문가가 참여했다. 이번에 선정된 융복합 과학 분야에는 인술을 베푼 ‘한국의 슈바이처’ 고 장기려 고신대복음병원 명예원장과 백신 개발로 소아마비 발생률을 획기적으로 낮춘 고 이종욱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이 유공자로 선정됐다.
장기려 박사는 간 절제수술을 성공시킨 간장외과 개척자이며 간의 혈관과 미세국조 연구로 간 수술에서 출혈을 조절하는 의료기술을 개발한 최고의 실력을 갖춘 의사이었다. 또한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이자 현행 의료보험제도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기독교 신앙에 기반 해 65년간 인술을 베풀며 봉사, 박애, 무소유를 실천하신 분이시다.
2018년 11월 16일 알쓸신잡3에서 조명한 장기려 박사가 화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고인의 과거 훈훈한 미담이 주목받고 있다.
장기려 박사는 대한민국에 보험 제도를 최초로 도입한 의사이자 넘치는 사랑으로 평생을 사회에 헌신한 위대한 대의입니다. 별명으로는 바보, 한국의 슈바이처 등이 있다. 한마디로 대인배 혹은 성인(聖人)의 표상인 장기려박사는 대한민국의 의사. 야인시대 의사양반 역의 모델이 되었던 백인제 박사의 수제자로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나고야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이후 스승 백인제는 장기려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고 대전도립병원 외과 과장자리를 추천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인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는 자리였으나 후에는 평양연합기독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합니다. 그 이후 평양의과대학, 김일성종합대학의 외과 교수를 지내던 중 6.25 전쟁 중 차남 장가용과 단신으로 월남하여, 피난민들로 가득한 부산에서 복음병원을 세웠습니다.
김일성을 수술해준 인연 덕에 장기려는 북에서 매우 우대받았는데 모범근로자로 선정되어서 여러차례 상도 받았습니다. 한번은 김일성이 맹장염으로 앓아누은 적이 있었는데 김일성은 장기려부터 찾았지만 그와 연락이 안돼서 소련 군의관이 집도했는데 북에서는 장기려가 수술했다더라라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로 장기려의 명성은 높았고 북에서의 지위도 높았습니다. 그가 월남했을 때도, 북에서는 그가 월남한 것이 아니라 납치된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 덕분인지 이북에 남은 아내(부인 가족)와 딸들과 아들들은 화를 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말로 이례적인 사례입니다. 북에 남은 장남 장학용은 북에서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습니다.
내가 처음 장기려 선생님을 뵙게 된 것은 스물 네 살 되던 해 여름 어느 주일 오후였다. 그 때 ‘결혼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이며 육신은 이 세상에서 없어지거나 헤어질지라도 영혼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같이 사는 것’이라는 기독인의 결혼관에 대한 선생님의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았었다.
그 후 ‘밀알의 씨’ 부산모임이 시작되어 하루 한 가지씩 좋은 일을 하자는 선생님의 제안에 수업을 마친 후 매일 부산대학병원 화장실 청소를 했다.
청소를 마치고 독신으로 생활하시던 대학 사택으로 돌아가시던 선생님의 식사는 늘 보리밥이었다. 선생님은 당시 44세의 패기 찬 젊은 외과 과장으로 부산대학 의과를 외과 중심으로 창건하고 계셨다. 선생님은 ‘의사가 되면 불쌍한 사람을 위해 일하겠다’는 하나님과의 서약을 두고 평양에 있을 때나 부산에 와서나 어떤 환경의 변화에도 변절하거나 굴하지 않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셨다.
선생님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변치 않는 성경의 진리가 반석을 이루고 있었다. 그 분의 말씀이나 행동에서 보여진 높은 이상의 언급들은 평소에는 그 뜻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수년이 지난 후 어렴풋이나마 깊은 뜻을 알 수 있었다.
명예욕보다는 진지하고 순수한 학문적 욕구를 늘 앞세우시며 학문과 교육에 열정을 보이시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산 복음병원에 모든 애정을 쏟아 부으셨다. 환자에게 치료비가 없으면 그대로 도망쳐도 좋다는 병원 방침을 내세우셨는데도 병원 운영에 적자는 없었다. 그리고 직원의 규제나 행정 내규에도 별로 역점을 두지 않으셨다. 병원 직원과 환자 모두 마음이 움직여 자발적으로 일하기를 바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1) 이웃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신 분
선생님께서 지내셨던 낡은 사택은 평소 선생님을 존경하던 분들이 염출하여 지어 드린 집이었다. 내가 선생님과 처음 입주하던 날 밤 연탄 가스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도 선생님은 뒤늦게 달려온 간호사에게 ‘덕호 군에게 먼저 주사를 놓아주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사제지간의 정을 넘어 내 생명의 은인이시기도 했다.
선생님은 당시 8‧15 해방 직후 얻은 간염으로 간이 부어 있었고, 당뇨병으로 입이 마르며 하루종일 수술하시고 잠자리에 누우실 때는 다리가 퉁퉁 부어 있었다. 더욱이 심장의 전도부전(傳導不全)으로 심박이 멈추었다 다시 뛰곤 하여 사실 언제 심장이 정지할지 알 수 없는 몸이셨다. 젊은 나는 언제 닥칠지 모를 선생님의 임종을 지킬 것이라는 생각으로 한 방을 쓰면서 생활하였으나, 그 후 20년간 그 분은 계속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셨다.
선생님께서는 새벽부터 한두 건의 대수술을 마치신 후에도 환자나 보호자가 원하면 거절하시는 일없이 잠자리에서도 깨어 꼭 보살펴 주시는 것이었다. 어떤 환자들은 ‘장 박사한테 보이기만 하고 죽어도 원이 없다’고 할만큼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는 의사이셨다.
당시 재단 이사회의 도움이 전혀 없던 처지에서 선생님을 따르는 의사와 직원의 합심으로 부산 복음병원 외과의 1968년도 수술 사례수는 전국에서 세 번째였다. 사심없이 불철주야 의사로서 최선의 정성을 쏟던 선생님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 자체였다.
2) 마음의 평화를 이루신 분
한 때 재단이사회를 따르는 의사들과 선생님의 뜻을 따르는 의사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선생님은 그 소란을 피하여 친지 별장에 기거하고 계셨는데 하루는 어느 제자가 돈이 필요하실 것 같아 1백만 원을 들고 찾아갔다. 그러나 선생님은 단번에 거절하시면서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오직 평화라며 병원 갈등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 사건 후 제자들은 선생님 생애에 옥의 티가 되었다는 자책감에 평생 속죄의 길을 찾을 뿐이었다. 선생님은 동족 전쟁으로 인한 형제간의 피흘림과 이산가족의 아픔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이셨다.
나의 은사, 나의 또 한 분의 아버지이신 장기려 선생님은 평생을 청렴한 생활을 삶의 기준으로 삼으셨다. 그러나 검소하고 단순한 삶에 비해 이웃을 향한 사랑은 차고도 넘쳤다. 늘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하나님과의 약속을 잊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사람 고(故) 장기려 선생님의 정신이 오늘 우리의 삶에도 뿌리내리길 기원한다.
(2) 인생을 살면서 친구로 삼는 세 가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들 중 첫 번째 친구를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친구는 귀하게는 여기지만 첫 번째 친구만큼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친구는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인생에서 위기를 당했을 때 첫 번째 친구는 가장 먼저 도망갑니다. 두번째 친구는 얼마간은 함께 있어 주나, 마지막까지는 함께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 번째 친구만은 마지막까지 함께 있어준다고 합니다.
첫 번째 친구의 이름은 재산입니다.
돈은 인생이 어려움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많은 문제들을 일으킵니다.
두 번째 친구는 가족입니다.
가족은 어려울 때 힘이 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됩니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이 찾아올 때 결국은 헤어지게 됩니다.
세 번째 친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야 말로 이 세상 이후에도, 영원한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3) 이웃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
레마르크가 쓴 소설 중에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서부전선 이상 없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전쟁의 잔인하고 냉엄한 실상을 그리고 있는 소설입니다. 그중 인상 깊은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주인공인 독일군이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굴러들어간 포탄 구덩이에 적군 한 명 역시 총탄을 피해 굴러 들어옵니다. 깜짝 놀란 주인공은 싸우다 적군에게 치명상을 입힙니다. 적은 치명상을 입고 그렁그렁 신음 소리를 내며 쓰러져 있습니다. 이런 적군을 보자 주인공은 죽이려는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수 시간을 그렁거리는데 마치 그 소리가 주인공의 심장을 예리하게 찌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적군에게 물을 주고 오히려 편안하게 해줍니다. 적군의 가슴 속에 품고 있던 그 아내와 어린 딸의 사진을 보며 그가 자기와 동일한 인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또 그 적군의 이름을 알게 되자 마치 자기 가슴에 대못이 박혀 평생 자기를 괴롭힐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죽이려 할 때의 마음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교차합니다. 자기의 생명과 이해관계의 눈으로 보면 상대방은 죽이고 외면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순수한 측은지심의 마음의 눈으로 보면 상대방이 불쌍해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을 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바르게 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랑은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눈으로 손으로 합니다.
예컨대 이렇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인간의 의지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원수의 불쌍한 모습을 보았을 때, 또 어렵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거나, 이 원수를 사랑하는 어린 딸의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는 불쌍한 마음이 일어나면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넓은 범위에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며 좁은 범위에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주님의 계명입니다. 예수님은 이웃사랑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마5:39-45).
마5:39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며
40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고 당시에는 겉옷의 가치 때문에 노상강도들이 약탈하는 경우도 있었다.
41 또 누구든지 너로 하여금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와 함께 십리를 가며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고 네게 빌리고자 하는 자를 너는 물리치지 말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웃사랑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뜻에서 이해를 하니 무조건적인 희생의 사랑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세리도 하는 일이다. 형제에게 문안하는 것은 이방인도 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나를 죽이고 비방하고 핍박하는 자를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선대하라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주라는 예수님만 이런 사랑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정말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도 이웃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은 원수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도움의 손 길을 내미는 것으로 그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너희를 핍박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해 대적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파괴하는 최고의 방법은 원수를 친구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12:21에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웃사랑을 무조건 실천하면 그 결과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는 말씀인데 이보다 큰 상급은 없는 것입니다. 아들이란 단순한 명예로서가 아니라 영광스런 신분과 특권을 확보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오른뺨을 치는 자에게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 까지도 내 주며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며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으나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이런 주님의 부탁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시대의 강도 만난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인생의 고통을 겪고 있는 자들입니다.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세파에 치인 사람들입니다. 억울하게 빼앗기고 폭력으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절망의 한숨을 짓고 있는 사람입니다. 직장에서 쫓겨나고 비정규직으로 안정된 삶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다 우리의 이웃입니다. 교회의 눈은 항상 강도 만난 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들의 소리를 외면하면 우리도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유와 변명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에 우리는 더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름 없이 다만 선한 사마리아인이라 이름 붙여진 사람처럼 우리 시대의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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