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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 믿음은 행함으로 완성되어 진다.
    말씀 2019. 3. 3. 12:52

    믿음은 행함으로 완성된다. 10:13 2:14-26

    김정은과 트럼프가 기대했던 두 번째 회담이 227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렸으나 결렬되어 전세계가 놀랬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라는 나라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북한은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할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다. 단지 국제적인 제재를 완화시켜달라고 하는 댓가로 일부만 비핵화한다고 했지 핵무기를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비핵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 우리나라 문제인대통령이 김정은이는 비핵화를 약속했다고 하면서 미국이 우선 경제제재를 풀어달라고 국민을 속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 나아가서 문재인은 평화통일이 가까이 왔다고 하는데 그 평화통일이란 우리의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북한이 원하는 대로 통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시간이 지난 후에는 사람들은 속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후회한들 이미 버스 떠난 후 손 흔드는 격이나 마찬가지다.

    성경에도 10계명중 9계명은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것이다.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이 타는 지옥불에서 영원히 고통 받을 것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마귀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은 마귀에게 속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 영혼에게 사기를 쳤으면 가장 큰 사기이다.

    인류역사를 뒤돌아 보면 개인이건 국가이건 속고 속이는 것들을 누누이 보아왔다. 그중에서도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을 속이고 더 나가서는 계획적으로 사기극을 벌이며 타인들을 실족하게 하는데 그중에서 최고의 사기극이 무엇일까 한번 생각해 봤다. 대부분은 돈에 대해 사기를 당했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사기당한 후에는 마음의 상처와 스트레스를 받아 그 고통이 너무 큰것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물질적인 사기보다도 더 큰 사기를 치는 사람도 있는데 바로 영혼을 사기치는 것이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심각한 사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기로 돈을 잃어 손해를 보았던지 사기로 건강을 잃었다면 고통은 오겠지만 그렇다고 영혼이 멸망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혼을 상대로 사기를 당했다면 그런 사기야말로 다시는 보상을 받은 기회를 잃어버리고 마는 지상 최고의 사기극이라는 말이다. 이런 종류의 사기는 종교를 다루는 곳이 아니면 세상에서는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교회 목사들은 우리 교회나오면 천국갑니다. 믿지 않으면 지옥갑니다 하면서 사람들을 설득시키지만 저들이 말한 대로 그 교회나가서 천국에 못가고 지옥에 갔다면 이것이야말로 정말 영혼이 사기를 당했다고 보는 것이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오늘 그런 비슷한 사기극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복습하는 마음으로 롬 10: 9,13을 읽겠습니다.

    9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 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믿음이 무엇인지 이야기 하지 않고 이 할 절만 갖고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인데 증거로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만을 딱 잘라서 강조한다면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였다고 구원받은 것이 정말 사실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였다고 구원받는 다는 것이 성경적인가?

    (8:29) 이에 마귀들린 두사람이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되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예수님이 두사람들 속에 있는 마귀들로 그 사람들에게서 떠나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도록 허락하니 돼지떼가 경사진 곳을 세차게 내리달아 바다에 빠저 몰살하였는데 여기서 마귀들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시인하였는데 구원받았는가? 돼지떼가 물속에 빠져죽었을 때 온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그 지역에서 떠나달라고 간청하였다는 것을 보면 마귀들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여도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단순히 입으로 시인하였는데 롬 10장에선 바울이 이것을 모르고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받는 다는 말은 또 무슨 소리인가? 한발작 더 나아가면 예수님은 더 강력하게 말씀하신 것이 있다. (7:21)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여하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교회에서 주님 주님 이렇게 시인하였는데 구원을 못받았다는 것인가? 분명히 예수님은 그들이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니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인가 아니면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인가?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를 11장까지 보자.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으니 무슨 짓을 하더라도 한번 받은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이니까 이 문제의 답을 얻기 위해 롬 1122절을 참고하자.

    유대인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잘려버리시는데 접붙임을 받은 너희들도 자랑하지 말고 원가지가 꺽힌 것 같은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엄하심을 보라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도 잘려 나간다는 경고의 말이다. 이 말씀은 지금 예수님 믿는 우리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원가지도 아끼지 않았는데 하물며 너희들도 아끼지 않을까 두려워 해야한다는 것이다. 11장이 이스라엘이 말씀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원가지를 잘라버렸다면 이방인인 우리들도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답답한가? 여러분이 사도바울이라 생각하여보자 1011장 이어썼는데 믿는 이방인인 너희들도 두려워하여야 하니 자랑하지 말라. 우리는 예수님 믿어서 한번 구원받았으니 더 이상 구원에 대해선 걱정안해도 된다는 것은 하나님 뜻을 왜곡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그렇게 안하셨는데 인간들 나부랭이가 성경을 헤집고 칼빈이 어떻고 견인이 어떻고 성경에도 없는 견인을 만들어 내 하나님 말씀을 거기에다 꿰맞추고 정말 웃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느냐하고 그러면서 거기에 앞에 열거한 것이 무엇인가?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이런 외적인 압력도 절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 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 믿고 구원을 완성해 가는 길이 있는데 잘못 알면 벧후2:22 개나 돼지들이 토한 것을 먹거나 진흙창에 뒹군다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게 된다는 것은 지금 성도들이 믿어서 구원이 시작되었는데 나중에 세상에 있는 쾌락들 안목의 자랑들로 인해 믿음을 잃어버리면 나중 형편이 더 심하게 된다는 말을 비유한 것이다.

    딤후 4:10 데마는 사도바울의 왼팔이고 누가는 오른팔로 볼 수 있는데 데마는 바울처럼 매맞고 감옥에도 갔지만 마지막 서신인 디모데 후서에는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했다. 요한 일서는 세상을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고 했다. 세상을 사랑하면 믿음이 파선되어 비참한 사람이 되는데 데마도 믿음이 파선되어 지옥에 갈정도로 변질되었는데 하물며 우리도 세상이 주는 쾌락에 믿음이 변질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데마의 발뒤꿈치의 따를 수 없을 정도로 툭하면 넘어질 수 있고 믿음이 연약한 존재이다. 데마와는 비교도 안되는데 예수님이 붙들지 않으면 우리들 스스로는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하면 교만하다. 데마보다 믿음 좋은 사람 있나? 주기철, 손양원 목사도 데마보다 믿음이 좋았을 것이라고 말 할 수 없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고난받을 때 데마도 함께 고난 받았고, 주기철 목사는 잠간의 고난이었지만 바울은 그런 고난을 장시간 받았는데 그런데 데마가 함께 있어주었다는 것은 데마는 믿음이 좋았다고 생각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정도로 믿음이 좋았는데 나중에는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 이는 우리들도 한순간에 변질되어 지옥에 떨어질 가능성이 있으니 구원에 대해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영혼을 팔고 사는 사기극이란 한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한 구원이라고 한다면 이는 가장 사악한 사기임을 말하는 것이고 이러한 사악한 사기극에서 반드시 벗어나야한다. 우리들의 신앙의 기준은 죽음 직전 신앙이다. 예수님 십자가 달리실 때 우편강도가 구원받은 것도 죽음직전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에 아무리 믿음이 좋았더라도 죽음 직전 세상을 사랑한다면 천국과는 거리가 멀다. 죽는 그 시간까지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전에는 아니다. (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회개치 않으면 망하리라 하신 것 같이 예수님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런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만일 너희도 회개치 않으면 이렇게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것인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었는데 그런 자들에게 너희들도 만일 회개치 않는다면 구원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도 구원의 길을 가다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인데 우리들이라고 특별 케이스로 한번 믿으면 지옥에 안간다고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자들이 지옥갈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한번 믿으면 구원이 끝난다는 말은 인류역사상 가장 극악한 사기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롬10장에서 바울이 말한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한다는 것은 뭔가? 로마서가 쓰여질 때 상황을 알아보자.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한다면 죽게 되거나 재산을 다 뺏기게 된다는 그런 상황이다. 잡히면 옥에 가두는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다. 지금 시대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은 그 때 당시와 비교하면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변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무었인가?

    (12: 1-2) 1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2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는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그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는 이것이 믿음이다. 구원을 시작한 사람의 믿음 이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여러분 날마다 죄와 싸우다가 피흘리기 까지 죄와 싸우는가? 죄의 유혹은 생각보다 강할 것인데 정말 이를 악물고 죄와 싸우고 있는가?

    (12: 9) 악한 것을 몹시 싫어하고 선한 것을 굳게 불들라는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세상문화를 미워하는가? 오히려 좋아하지 않은가? 거부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면저 소망중에 기뻐하고 늘 절박하게 기도하고 여러분의 기도는 얼마나 절박한가요? 아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있나요?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아무에게도 악으로 갚지 말고 스스로 원수갚지 말고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는데 롬109절에서 바울은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로마서 전체를 보면 어떤 단어로 요약되느냐하면 그 단어는 삶이다. 교회는 이것을 놓치고 있다. 교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삶의 열매가 나타내야 한다. 여러분이 예수믿는 열매를 입증하지 못하면 여러분은 구원을 아직 시작도 못했다는 것이다.

     

    2. 믿음은 행위로 완성된다 (2:14-22)

    어떤 교회에서 성경공부시간에 토론이 벌어졌는데 토론의 주제가믿음이 제일인가, 행함이 제일인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믿음이 제일이다.”하고 한편에서는행함이 제일이다.”하면서 여러 가지 말을 동원한 말잔치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이것처럼 어리석은 토론이 없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행함도 있는 것이고, 믿음이 없으면 행함도 없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행함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으면 행함도 있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말씀에 대해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믿음이 있으면 행함도 있습니다. (2:14)

    (14) 내 형제들아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행위가 없으면 그것이 무슨 유익을 주느냐?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믿음이 있는 사람은 행함으로 그 믿음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는 믿음대로 행함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고향 갈대아우르를 떠나라 하실 때 그는 즉시 떠났습니다.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 그는 이삭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행함은 따르는 것입니다. 배나무는 배가 열리고 사과나무는 사과가 열리듯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노력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본질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마치 전기 스위치를 올리면 전등불이 켜지고, 꽃이 피면 열매가 맺히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곳은 밝고 정직한 사회가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런 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사는 삶의 현장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행함도 있습니다.

     

    (2)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2:15-17)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가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떠나가라, 너희는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하라 하고는 몸에 필요한 그것들을 주지 아니하면 그것이 무슨 유익을 주느냐? 17 이와 같이 믿음도 행위가 없으면 그것만으로는 죽은 것이니라.

    믿음은 주 안에서 말한 대로 생각한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을 것이 필요하구나 생각했으면 먹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입을 것이 필요하구나, 생각했으면 입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헐벗은 자나 굶주린 자를 다 책임질 수는 없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누어 줄 수는 있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조금은 덜어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도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명령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웃을 사랑할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한다 하면서 말을 듣지 않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됩니다.(2:18-26)

    보이지 않는 믿음을 이야기 할 때는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네 믿음을 보여라.”할 때 우리는 믿음을 보여 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온전케 해주는 것이 행함입니다. “참으로 어떤 사람은 이르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위가 있으니 네 행위가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내 행위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18).

    우리가 사랑한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말씀대로 순종하여 고아와 과부들, 궁핍한 자, 환란당한 자를 돌아보면 사람들이 우리의 행함을 보고 저 사람은 저들을 사랑하는구나.”하고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나의 행함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자신의 사랑을 그렇게 확증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천국 복음을 전하시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확인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함도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헌신이 있습니다. 이 행함이 여러분의 믿음을 온전케 하고 당신의 믿음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행함이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다면 행함으로 믿음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4) 구원은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 옳다고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행위를 한다고 하여 구원을 받는 다고는 볼 수 없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았기 때문에 선한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 구원받기 위해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교회에서 믿음은 강조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선한 행위는 구원과 상관없다는 식의 설교로 뜻하지 않는 오해를 낳고 있다는 데 있다. 성경은 선한 행위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 선행을 구원의 한 조건으로서 가르치고 있다(25). 마찬가지로 바울, 야고보, 요한, 유다, 베드로와 같은 신약성경 저자들도 선한 행위를 믿음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기고 있으며, 반면에 악한 행위는 불신앙으로 보아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악을 행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욕되게 하는 것으로서 불신앙의 태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하면 즉각적으로 얻는 구원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구원은 시간적으로 이중성을 띤다. 하나는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 이루어지는 즉각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후에 이루어지는 점진적인 것이다. 후자의 예는, 바울의 명령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는 구원을 진행형으로 말하고 있다.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대로,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만일 구원이 한 번에 즉각적으로만 이루어진다면, 바울이 이렇게 구원을 진행형으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같이 구원의 시간적 이중성은 마치 대학에 입학한 것과 대학생활을 실제로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학은 합격만 하면 즉시 그 대학의 학생이 된다. 그러나 대학생활은 4년의 기간을 요구한다. 대학에 입학했다고 해서 모두가 졸업하는 것은 아니다. 대학생활 4년 동안 대학에서 요구하는 학점을 획득해야 한다. 만일 그것을 이행하지 못하면 낙제하거나 결국 학교를 떠나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단번에 이루어졌지만 그 체험은 항상 현재로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는 늘 자백해야 하며(요일1:9), 회개해야 하는 것도 바울이 말하는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여 단번에 용서를 받았기에, 우리 미래의 죄까지 용서받았다고 하면서, 더 이상 죄를 자백하거나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용서를 받았지만 계속해서 자신의 자범죄에 대해 늘 용서를 구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죄 안짓고 살겠다고 한다는 것은 숨 안쉬고 살겠다는 말과 같다. 일부러 계획적으로야 죄를 안짓겠지만 알게 모르게 죄속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은 죄를 안짓고 살래야 살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피 공로로 인해 죄사함을 받은 자일뿐만 아니라 그 죄사함의 의도에 맞게 살아갈 의무를 지닌 자들이다. 그런데 과연 그리스도인들도 짐짓 악을 행할 수 있을까? 이 말은 고의적으로 죄를 짓겠다는 말인데 만일 이런 사람이 있다면 우선 자신의 구원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았다는 것과 악을 행한다는 것은 서로 반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서 짐짓 악을 행하거나 죄에 대해 무감각하다면 그는 단지 지식적으로 예수님을 알았을 뿐,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을 소유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들을 다르게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가라지라고 표현한 말이 더 어울린다. 가라지 곧 그들은 무늬만 있는, 명목상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다시 부연한다면, 예수님을 영접한 그리스도인들도 연약하여 죄를 짓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됨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만일 죄를 깨닫고도 자백하지 않으면 성령께서 그 사람과 함께 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대로 그리스도인들도 짐짓 죄를 짓는 일이 가능할까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성령께서는 바울을 통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성령을 억누르지 말라(살전5:19)라고 권면하였으며,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끝을 맺으려 한다고 질타하면서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의 욕망을 거스르는 적대관계이다(5:17).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들을 비추어 짐작해본다면,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짐짓 범죄를 한다면 그 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는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 과거의 사실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지금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만 한다. 그런데 만일 어떤 이가 믿노라고 하면서도 악한 행동을 지속적으로 하게 되면 그는 다시 죄의 지배에 있게 되고, 결국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바울의 에베소교회에 대한 경고이다.

    (5:5)음행을 일삼는 자나 부정한 자나, 그리고 탐욕을 부리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결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왕국에서 상속유업도 받지 못하느니라.

    아무리 입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는 믿음을 소유했더라도 주를 사랑하는 행함이 없다면 그러한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 (2:19-21)너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행함이 있다. 행함이 없는 너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 그러면 나는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이겠다. 네가 한 하나님이 계시는 줄 믿으니 잘하는도다. 마귀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그러나 오 , 허무한 사람아, 당신은, 행위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인 줄 네가 알고자 하느냐?

    사단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 아니 우리보다 예수님에 대해서 더 잘 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단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보는 근거는 다름 아닌 행위에 있다. 즉 사단은 처음부터 선한 행위를 할 수 없는 것이고 언제나 악을 창출하고 거짓을 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단을 가리켜 거짓의 아비라고 하고 있지 않는가? 따라서 믿음에는 반드시 선한 행위가 뒤따라야만 한다. 선한 행위는 믿음의 아름다운 증거이다. 선한 행위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죽은 믿음이요, 파선한 믿음일 따름이다. 그런데 오늘날 믿음과 행위를 분리하여 가르치고 생각하는 경향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꽃인 행위의 향기를 풍기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는 믿음만을 강조한 종교개혁의 슬로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3. 믿음이 강조된 배경

    16세기 종교개혁시대부터 지금까지 교회 안에, ‘믿음으로서 의로와진다고 여김을 받는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가 복음의 진수로 가르쳐지고 설교되어져 왔다. 그와 더불어 때로는 이웃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가르침이나 설교는, 이신칭의의 교리 아래 종종 비복음적인 것으로 매도당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적지 않은 한국교회의 신자들은 행위를 신앙의 영역에서 제거하기 시작했고, 이웃과 사회를 거룩하게 변화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의 세속화에 동화되었고, 고귀한 윤리적인 특성을 상실해 버렸다. 이처럼 이신칭의의 교리도 그것이 본래 강조될 수밖에 없었던 16세기의 역사적 상황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결과는 전혀 다르게 된다. 지난 15세기 종교 개혁가인 독일의 마틴 루터와 스코틀랜드의 존낙스 스위스의 쯔빙글리 프랑스의 칼빈을 통하여 종교개혁당시 시대적인 상황은 중세 카톨릭 암흑기로서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받는다는 행위 구원론이 면죄부 강매등으로 지옥에 있는 영혼을 연옥으로 옮겨지게 한다는 거짓 교훈으로 구원에 있어 심각한 오류로 믿음이 타락되고 있던 시대에 종교개혁가들은 말하기를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성경으로 라는 종교개혁의 슬로건을 내걸었으며 그런 슬로건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설득시킴으로 카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라는 개신교가 태동되었고 변화의 물결이 일어났다. 그렇다고 당시 개혁의 슬로건이 다 맞다고 볼 수는 없다. 특히 칼빈이 주장한 구원론을 예지 예정론 이라 한다. 예지 구원론이란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으로 예정되어 있으며 한번 구원받은 자는 영원히 구원받는 자라는 것이고 이런 칼빈의 교리가 오늘날 한국교회를 믿음에서 멀어지게 하는 결과가 되기도 하였다. 이 칼빈의 구원론이 나온지 3세기 후에는 요한 웨슬리의 만인 구원론을 말했는데 감리교를 창시한 요한 웨슬리의 구원론인 만인 구원설은 구원 받은 자가 예정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본인의 자유의지로 마음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 받을 수 있으며 한번 구원을 받은 자라도 본인의 자유의지로 인하여 타락하면 구원을 잃어 버린다는다는 것이다.

    행위(율법)와 믿음, 예정론과 자유 의지론 등 구원에 대하여 약간의 이견이 있지만 구원이란 두 글자를 놓고 가만히 생각해 본다. 구원의 정의가 왜 필요한가 ? 신학자나 종교 지도자들의 종교적 지식을 알리기 위하여 자신의 연구 결과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론에 이론을 덧칠하는 것인가 ? 하나님은 이론을 중시하지 않으실 것이고 다만 우리의 마음과 행위를 중시하시리라 믿는다.

    그러한 사상을 누가 가장 좋아하겠는가? 바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사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유는 가만히 두면 자기의 기만에 빠져서 멸망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신학자들의 어느 교리보다는 성경말씀을 좀 더 깊이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가톨릭교회와는 정반대로, 믿음을 유일하고 충분한 구원의 수단과 조건으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루터나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이 행위 대신 믿음을 구원의 유일한 수단으로 제시할 때, 정작 그들 자신은 신자의 삶에 있어서 이 행위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는 없었다. 오히려 루터는 심지어 신자의 선행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은총의 행위이다.”라고 말하였으며, 칼빈도 신자의 선행은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루터와 칼빈은 믿음의 열매, 성령의 열매로서의 선행을 반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이 참으로 반대했던 것은 그 당시 선행이라고 미화되었던 공적’(功績) 또는 공로’(功勞) 곧 구원의 수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대부분의 종교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자들이 주창한 오직 믿음이라는 구호는 잘못 이해되어, 오늘날 교회 안에서 믿음은 선하고 귀한 것이며, 반대로 행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잘못된 생각을 불러 일으켰다. 거듭 주장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의 수단이 되어버린 종교적인 행위에 반대한 것이었지 행함’(선행) 자체를 반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개신교는 선행은 부정적인 율법으로 이해하고 도리어 종교활동은 믿음의 표현으로 보고 있다. 그 결과 구원파와 같이 신자의 행위는 어떠하든지 상관없고, 단지 믿음만 있으면 무조건 구원받고 천국 간다는 식의 잘못된 교리를 낳게 하였다.

     

    4. 말씀안에서의 구원은 은혜로 받는다

    구원에 관하여 중요한 것은 어떤 교리가 아니라 성경안에서 찾아보면 답이 쉽게 갈 것이다. 예수님은 산상설교 중에서 나무는 그 열매를 통하여 알게 될 것이며”(7:20), “나에 대하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7:21)라고 말씀하셨다. 또 바울 역시 성령의 열매 대신 육의 열매를 맺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5:21; 고전6:9-10) 그러므로 더욱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라.”(2:12) 권고하고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의 행위는 항상 심판과 관련되고 있으며, 이는 곧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물론 예수님과 바울의 가르침 속에 나타난 행위, 믿음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앞에서 제안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의 행함에는 이미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다만 바울은 수신자들의 성숙도에 따라, 믿음과 행위를 각기 다르게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은혜와 율법(행함)’, ‘은혜와 믿음일 때는 은혜를, ‘율법(의식법)과 믿음일 때는 믿음을, ‘믿음과 행함(도덕법)’일 때는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 야고보와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도 믿음은 항상 행위에 의해 점검되어질 수밖에 없다.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심판이 행위를 그 준거로 삼는 이유는 이 행위믿음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그 어느 하나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긴장의 문제이다. 이 긴장관계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믿음과 행함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 때는 그것은 굴러가지 못하고 멈추어버리는 성질이 있다. 결국 은혜가 뿌리라면 믿음은 줄기이며, 행위(선행)는 꽃이다. 또 은혜가 나무라면 믿음은 가지이고, 행위는 열매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포도나무로, 우리를 그 가지로 비유하셨다. 예수님은 가지인 우리를 통해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맺기 바라신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가 죄인이므로 죄인은 당연히 구원받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다. 이스라엘이나 이방민족이나 구분없이 허락된 것이다. 그러나 혹자는 이방민족과는 달리 이스라엘은 원래부터 하나님에 대한 그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예수님을 부인하면서도 구약시대처럼 동일하게 하나님을 믿는 오늘날의 이스라엘 민족은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의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여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도 이 복음은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되었으며(1:23)”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예수를 알지 못했던, 아담의 시대부터 앞으로 예수 재림의 그날까지의, 전 인류를 위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실 것을 믿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게 된 것이고 예수님 이후에는 오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야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바울의 상반된 견해를 살펴보았는데, 그 중에서 믿음과 행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어 왔다. 그리하여 고찰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점과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행위는 서로 상호 역동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또 시간적인 순서에 의하면 은혜가 가장 먼저이고 다음이 믿음이며, 그 마지막은 행위(선행)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믿음과 행함을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믿음은 하나님과 관계이므로 수직선으로 표현된다면, 행함은 인간과 관련되기에 수평선으로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 구원은 좌표평면상에 점선으로 표시된 원의 영역이지 않을까 싶다. 필자가 구원의 영역을 점선으로 표시한 이유는, 구원자체는 인간이 명쾌하게 판단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이야기할 때 믿음만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만 있으면 일단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 구원은 행위가 없는 믿음의 위선자일지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대신 업적을 가지고 그 공로대로 상급을 받을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7:21)고 경고하셨다. 예수님이 경고한 사람들은 그 믿음이나 능력, 은사나 지식 면에서 놀라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질타 받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이들은 목회자나 장로, 집사, 교사와 같이 교회 내의 직분자일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교회를 다니되 종교적인 생활을 잘하여 믿음이 크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이러한 위선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가라지로 명명하셨다. 가라지 교인은 예수님을 알지만 실제로는 그분을 진정한 주인으로 영접하지는 않은 자를 말한다. 바로 사단처럼 말이다. 바울은 이러한 가라지 교인들을 두고, “모든 불의한 속임을 당하고, 거짓을 믿어서 멸망 받을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신을 구원하여 줄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살후2:10-12).” 또한 그는 이들을 믿음이 파선된 사람들이라고 하고 있다.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선한 양심을 버리고, 그 신앙생활에 파선을 당하였습니다. 그렇게 된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이 바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입니다(딤전1:19-20).” 심지어 그는 친척을 돌보지 않으면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자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딤전5:8)”이라고 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의 소유자들이다. 따라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거나 감정적으로 믿어지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면서도, 행함(선행)에 대해 여전히 무감각한 사람들은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내로라하는 유명목사들을 비롯한 일반목회자들의 추문이나 교단회장 선거 때마다 터져 나오는 부정선거는 매년 일어나고 있는 것이 그 예다. 이들은 예수님이 위선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알면서도 아마도 그것은 자기들이 아닌 이단자라고 스스로 속이며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으면서도 그간의 생활습관이나 방식 -, 질투, 언어 및 재정사용 등- 을 단번에 버릴 수 없었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모든 권면의 말씀을 잘 알면서도 쉽게 따르지 못하였다. 즉 자주 넘어진다는 말이다. 이들을 위선자와는 확연하게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알기에 죄를 고백하며 늘 돌이키려고 노력하는데 있다. 이런 사람들은 행함은 없지만 믿음이 큰 것이 특징이며, 죄를 많이 저질렀던 초신자들 중에서 흔히 나타난다. 악을 많이 행하거나 심각하게 저지른 사람일수록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의 믿음은 다른 사람들보다 큰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씀은 모두가 행위를 무시하는 이야기이다.

    인간만이 종교를 갖고 있다 각 종교마다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듯이 구원이란 종교를 지탱하는 큰 기둥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구원은 댓가를 치르고 얻는 것이지 그냥 얻는 것이 아니다. 무슨 댓가냐고 죄값을 치르는 십자가의 죽으심이 없고서는 내힘으로 선행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이 없고, 천국이 없다고 한다면 절대적인 신을 믿고 따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구원으로 인하여 사도 바울이 얼마나 많은 분량으로 그의 서신에서 구원을 강조하였던가 ? 율법과 행위로는 구원받지 못한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직 성경말씀으로 오직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고 그의 서신에서 강조하면서도 히브리 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대하여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지 못한다 하면서도 율법을 폐하지 않고 완성하려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렇한 이해하기 힘든 구원론이 이렇게 말씀안에서 구원확증하기가 쉽지가 않은 것이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변화되지 않는 삶.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고의적으로 남을 속이고 거짓 증거하는 삶.

    자신의 구원을 확증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하는 것이며 마음에 확증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으면 확실한 것은 생명책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한번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부인 할 수 없으며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부인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주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살후 3:2)

    하나님이 주신 그 믿음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성령이 증거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얻은 구원이 아니므로 행위로 다시 구원을 잃는 다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게다가 더 결정적인 것은 우리가 주님을 믿는 그 믿음 자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이 믿음을 받는 대상들도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하신 사람들이구요. 그러므로 알고보면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다 주관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며 하나님이 거저 다 마련해 놓으신 것을 손 내밀어 받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하여, 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이 준비하여 놓은 것 즉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진실로 영접하면 선물로 얻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얻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말세지말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최우선적이며 제일 첫째의 삶의 목적은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첫번째 목적 또한 나의 죄와 죄의 형벌인 지옥으로부터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는 구원론은 칼빈의 예지 예정론과 견인의 교리인 "한번 구원받은 자는 영원한 구원이다"라는 가르침을 받으며 믿고 있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입니다.

    장로 교단에서는 칼빈의 구원론을 절대시하고 신성시하며 그에 대한 반론들을 금기시하는 것이 장로교단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중요한 구원받는 것은 칼빈의 구원론도 아니요 어떤 인본주의적인 전통이나 철학이나 교리가 아닌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와 성령의 내주하심과 진리의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10:9~10, 1:12, 3:3, 5, 14:6, 17:3, 2:8~9, 벧전1:23, 3:5)

     

    그래서 한 시대를 변화시킨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의 메세지라도

    과연 그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행위의 모범이요 표준이요 기준이요 잣대인 66권인 성경(정경)의 관점으로 비추어보고 자세히 살펴봄으로(17:11, 8:10) 비성경적인 요소들은 철두 철미하게 배제하고 보다 더 성경적인 진리를 추구하고 회복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점진적인 계시적인 측면과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성화와 성숙의 측면에서 유익하며 바람직할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0:22,24:13)

    즉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마치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교훈인지요! 많은 사람들이 시작은 하지만 마치지는 못합니다. 성경안에는 시작하지만 마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들로 가득합니다.

    (딤후4:10) 데마는 이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믿음은 계속적인 신뢰와 순종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는 한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실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유대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꺾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교만하거나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다루셨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여러분을 다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있지 않으면 여러분도 찍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유대인들보다 더 안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후 13:5)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버리운)받은 자니라.

    어제 믿음 안에 있었다고 하지만 오늘 믿음 안에 있지 않으면 버리운 자가 될 것이라는 것이 모든 성경이 말하는 것입니다.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이 영혼의 구원(거듭남, 죄사함)은 나의 행위로 된 것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 된 것으로 자랑 할 것이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통 복음주의를 통해 우리에게까지 전파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므로 모든 믿음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예수님의 마음이며 은혜이며 십자가의 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여러분의 앞에는 길이 많아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참되고 복된 바른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이 길을 잘 선택하여 하나님께 은총을 입어 복된 열매를 거두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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