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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 오병이어의 기적
    말씀 2019. 1. 27. 10:42

    오병이어의 기적    요6 : 1-15

     예수님께서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지고 오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이야기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복음서에서의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이야기는 어느 것 하나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인데 예수님은 기도와 말씀으로 아주 쉽게 기적들을 행하셨으므로 이러한 사건을 대할 때 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침례 요한이 목베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신 후 배를 타고 갈릴리바다 건너편 빈들로 가셨다. 그러자 무리들이 듣고 예수님을 만나고자 여러 마을로부터 왔다. 그때 예수님께서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거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저녁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 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이 떠날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주어 먹게 하라(마14;1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여기 우리에게는 단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마16:17)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게 하시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축복하시고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열 두 바구니가 남는 기적이 일어난 것을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니 성경은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엔 기적이 일어난 사건들로 도배를 하고 있습니다. 홍해가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를 육지처럼 건넌 사건, 철옹성 여리고 성을 하루에 한바퀴씩 돌고 일곱째 날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성을 일곱 번 돌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길게 불고 백성들은 큰 소리로 외칠 때 여리고성이 무너진 사건,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추게 한 사건, 엘리야가 불말과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사건, 예수님의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사건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무덤에 묻힌지 삼일만에 부활하셨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십일 동안 계셨다가 오백여명이 보는 앞에서 승천한 사건, 세상끝날에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처럼 기적이 일어난 사건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C.S 루이스는 기적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기적은 초자연적인 능력이 자연 질서에 개입하는 사건이라고 정의를 했습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이 자연 질서와 인생과 역사에 개입하셔서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자연 질서에 개입하셔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열 두 바구니가 남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오병이어의 이야기는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대부분 사람들이 어느정도 알고 있는 너무 유명한 이야기이다. 또 기독교인이라면 예배시간에 몇 번 정도는 오병이어 설교를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동안 행하셨던 기적의 이면에는 우리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연민이 있는데 이 연민을 통해서 일어난 그런 기적을 한번 좀더 깊이 들어가 보고자 하겠습니다.
    이런 기적을 이야기 하기 전에 우선 기적을 믿지 않는 어떤 신학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렇게도 설명합니다. 이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9 마일이나 떨어진 빈들이라서 사람들이 9 마일이나 떨어진 곳을 오면서 각기 자기들의 몫의 음식을 준비해 왔다. 그들은 그것을 단지 자기들만을 위해 감추어 두었는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보시고 빙그레 웃으시며 제자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선뜻 사람들과 나누게 하시었다. 그러자 이것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자기들 것을 나누기 시작했고 그래서 그들은 모두가 충분히 함께 음식을 나누게 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이란 다름이 아니라 자기들만을 생각했던 이기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서로 나눌 수 있는 풍요로운 마음으로 바꾸신 것이다. 예수께서 역사했던 것은 빵과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한 것이다. 이 설명이 모든 것을 감각적으로, 손으로 느낄 수 있어야 받아들이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그럴 듯 하고, 또한 서로 나눌 때 거기 풍요로움이 있다는 진리는 틀림없기에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 설명을 들으며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렇게도 예수님의 기적을 믿기가 어려운가? 단순한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조금은 다르지만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려고 한다.
    2차대전 때 아프리카 북부 사하라사막에서 1개 소대 병력(30여명)이 고립되었다. 지친 병사들에게 물이라고는 물이 반 정도 찬 수통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뙤약볕 사막을 횡단한다. 휴식시간이 되면 수통의 물을 나눠 마신다. 계급이 제일 높은 소대장부터 한 모금씩 마십니다. 당연히 30번 째 쫄병까지 물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런데 매번 휴식 때마다 그 쫄병 차례가 되면 물이 찰랑찰랑 그대로 수통에 들어있는 것이다. 앞에 고참들을 보면 분명히 한 모금씩 물을 마시는 것 같은데 쫄병이 보면 물은 항상 그대로이다. 모두 입만 대었다 뗀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 사람을 위해서 내 아랫사람을 위해서 동료를 위해서 입만 대었다 떼는 겁니다. 사막을 다 건널 때까지 그 수통의 물은 남아있었다. 30명이 수일 간 사막을 횡단하면서 수통 하나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누가 뭐래도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견줄 수는 없지만 서로에 대한 연민, 배려, 사랑이 그들로 하여금 그 넓은 사막을 수통 하나로 건너게 했다. 그들은 사막을 건너는 내내 이런 기적같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한 어린아이가 가져온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약 20000여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거나 동료들을 배려해서 만들어진 기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아이가 내놓은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광주리나 되는 빵이 남았다는 이 단순한 오병이어의 이야기는 4 복음서에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다 있다. 그런데 아주 똑같은 것은 마지막 예수님의 감사기도 후에 그 빵과 고기가 늘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고 그냥 나누어주니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오히려 남은 부스러기를 12광주리에나 담을 정도로 남아있다고 하니 이것은 실제적인 기적이지 마음이 감동되어서 이웃을 배려해서 나오는 기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1.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던 현장

    (1) 벳세다광야
    우선 기적이 일어난 곳이 벳세다라고 하는(눅9:10) 곳을 한번 가보자.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바다 연안에서 3㎞를 동북쪽으로 가면 베이트 체이다 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요르단강에서 동쪽으로 1㎞ 정도 떨어져 있으며 국립공원인 요르단 공원지구에 속해 있다. 31년전 성서고고학 팀에 의해 이곳이 고대 성읍이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는 철기 시대 산당과 성문, 비문들이 발견된 바 있다. 신약시대에 존재했던 어부의 집과 포도주를 만들던 집터도 발견되기도 했다. 이곳의 성경 지명은 벳세다로  바로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군중 2만여명의 저녁을 해결하신 곳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던 현장 벳세다이다.
    지난해 어느 날에 베이트체이다 즉 성경에 나오는 벳새다 들판에 한국인 성지순례객 270명이 둘러 앉아 빵과 포도주로 성찬예배를 드렸다는 글을 보았다. 성지 순례객들은 2000년전 예수님께서 바로 이곳에서 행하셨던 오병이어 기적을 되새기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더듬어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성찬예배에는 갈릴리 바다에서 잡히는 암눈이라고 불리는 생선 두 마리와 이스라엘인들의 국민빵인 피타 5개가 오병이어의 상징으로 성찬상에 올랐다. 암눈은 베드로 물고기라고도 불린다. 둥글게 생긴 피타빵을 찢어 작은 조각으로 만들어 성찬식을 하였는데 성도들은 줄지어 나와 포도주에 빵을 찍어 먹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렸다. 이 성지순례를 동행한 목사는 마태복음 14장 13~21절을 중심으로 설교했다. 그는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나기 직전 예수님이 자신을 따라온 무리들을 보고 불쌍히 여긴 구절(14절)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그냥 살아갈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한 아이가 가져온 오병이어를 예수께서 축복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의 배고픔이 해결된 것을 언급하며 기적 현장엔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는데 한 아이의 작은 희생이 큰 무리를 먹였다며 우리도 희생의 자리에서 망설이지 말고 앞장서자.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드리자고 강조했다. 참석했던 성도들은 기적이 일이났던 현장에서 드리는 성찬예배에 감격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아낌없이 살겠다고 다짐했다. 앞서 이른 아침엔 갈릴리 바다 위에서 선상예배를 드렸다. 갈릴리 바다 서부 해안 마을인 티베리아 선착장에서 두 대의 배에 나눠 탄 신자들은 갈릴리바다 한 가운데로 나갔다. 바람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에 물결은 잔잔했다. 바다 빛깔은 맑은 초록빛이었다. 배는 북서쪽 게네사렛까지 6㎞쯤 항해했다. 성도들은 배 위에서 감사와 찬양을 연발했다. 예수 우리 왕이여 찬송가를 부르며 갈릴리 인근을 관망했다.

    (2) 갈릴리 바다
    갈릴리바다는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며 복음을 전했던 장소다. 성경에는 갈릴리 호수, 디베랴 바다, 긴네렛 바다, 게네사렛 호수 등 다양한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갈릴리 호수는 현재 이스라엘 국가 영역내에 있으며 북쪽으로는 헬몬산 동쪽으로는 골란고원이 위치해 있다. 갈릴리는 담수호로써 정확한 표현은 갈릴리 호수가 맞지만 사도요한이 기록한 요한복음에는 갈릴리 바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요 6:1). 그리고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모두 갈릴리 호수로 기록되어 있다(마 15:29, 막 7:31, 눅 8: 22). 왜 사도요한은 갈릴리 바다라는 표현을 썼을까? 사도요한은 갈릴리 벳세다사람으로 바다를 볼 수 없었던 탓에 너무나 넓은 크기의 갈릴리 호수를 보고 바다라고 하지는 않았는지?  과연 갈릴리 호수의 크기는 얼마나 컸으면 사도요한은 갈릴리 바다라고 기록했을까?





    갈릴리 호수(바다)(Sea of Galilee)       

                                           







     이스라엘 북동부, 요르단 강의 중류에 있는 호수.
    호수의 둘레가 약 53km이고, 남북의 길이는 21㎞, 동서로 12㎞이며
     면적은 대략 166km²에 이른다.
    해수면으로부터 약 210m 가량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수심의 평균 깊이는 약 26m, 가장 깊은 곳은 43m에 달하는 민물 호수다. 하지만  사도요한이 느끼기에는 과히 바다라고 표현할 정도의 막대한 크기의 호수였을 것이다. 요단강을 따라 남쪽으로 흘러 사해에 이른다.  
    성경에서는 갈릴리 호수에서 심한
     폭풍이 일어났다는 표현이 등장한다(마 8:24, 막 4:37, 눅 8:22). 이는 북쪽의 헬몬산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과 따뜻한 호수의 공기가 상호작용하여 발생하는 것으로 때로는 2m 높이의 파도가 발생한다고 한다. 게다가 갈릴리 호수는 평지보다 200m 낮은 지리적 특성으로 기온차가 급격히 발생하여 커다란 풍랑이 발생할 여건이 충분하다. 이 커다란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은 시몬, 안드레,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셨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기적을 베푸신 곳으로, 갈릴리 호수라는 단어를 들으면 먼저 예수님이 떠오르게 된다.
     예수님께서 사역했던 당시 갈릴리 주변 지역은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9개 성읍이 조성돼 있었다. 지금은 오병이어기념교회 베드로수위권교회 팔복교회 등이 주위에 세워져 있다.
     성지순례객들은 예수님이 실제 다녔던 땅을 직접 밟아보니 너무 기쁘고 갈릴리에서 땅과 바다를 직접 눈으로 보니 벅차고 이렇게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했다.

    2. 오병이어의 기적

    (1) 무리를 향한 연민의 정
     바로 이런 유서깊은 곳에서 예수님께서 한 어린아이가 가져온 빵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여자와 어린이들 외에도 성인 남자 5000명이 먹고 12광주리가 남았을 정도로 배고픈 무리를 배불리 먹이신 사건으로 요한복음에서 4번째 기적이다. 오늘 말씀에는 방황하는 큰 무리를 보는 세 가지 시각이 나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눈이요, 둘째는 빌립의 눈이요, 셋째는 안드레의 눈이다. 그 중에 방황하는 무리에 대한 예수님의 목자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예수님의 목자의 심정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낳았다. 또한 이 목자의 심정에 동참한 안드레의 진심과 믿음이 기적을 낳았다.
    이 시간에 예수님의 목자의 심정을 배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1-4)
     예수님은 예루살렘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걷지 못한 병자를 걷게 하신 사건으로 이미 갈릴리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또 얼마전 침례요한이 목베임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후 잠시 쉬고자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여기 갈릴리까지 다니시느라 피곤도 하셨기 때문에 좀 쉬시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시려고 제자들과 함께 호수 건너편 한적한 곳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큰 무리의 사람들이 벳세다라는 빈들 멀리까지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때는 유월절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 민족의 최대 명절입니다. 이 때 성인이면 누구나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제사를 드리게 되어 있는데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당시 유대의 상황은 로마의 식민지요, 헤롯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을 기꺼이 맞아 먼저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해 주심으로서 영적인 목마름을 채워주셨습니다. 그리고 병든 사람들을 다 치유해 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에 감탄하여 그들은 예루살렘 유월절 명절보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날이 저물자 사람들이 허기지고 지친 것을 보시고 그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신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바로 이 기적에 대해 우리는 좀더 자세히 접근하고자 합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는 유대 지방 사람들에게 무거운 세금으로 인해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들은 실로 위로와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돌볼 정치 지도자나 종교지도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정치 지도자들은 체제유지에만 힘썼지 백성들을 잘 다스리지 못했고 또 종교 지도자들도 그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어야 했는데 불행히도 그들은 정치와 결탁하여 백성들의 목자가 되어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백성들의 어깨에 무거운 율법의 멍에를 메우게 하므로 사람들의 삶을 더욱 고달프게 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놀라운 치료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베데스다연못가에 38년 된 걷지도 못하는 나약한 병자를 고쳐주어 걷게 하신 사건을 통해 이기적이고 메마른 세상에서 예수님의 따뜻한 목자의 사랑과 심정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월절인 데도 만사를 제쳐 놓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2) 큰 무리가 나오는 것을 보시는 눈
      예수님은 산에 오르셔서 제자들과 함께 앉으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셨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어떤 눈으로 보셨습니까? 눈은 그 사람의 마음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생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때 모 대학총장은 학생 한명을 돈 50만원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당시 등록금이 50만원이었기 때문에 그는 학생들이 돈으로 보인 모양입니다. 요즘 민선으로 장이 되고자 하는 분들도 사람들을 본다면 표밭으로 보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들을 보는 순간 심히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랜만의 휴식을 빼앗아 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으로 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이용가치와 수단으로 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9:36에는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예수님은 그들을 목자가 없어 유리 방황하는 양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면서 저녁때까지 말씀을 가르치시고, 또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제 저녁이 되어서 몰려든 사람들을 바라보시는데 그들은 인생의 갖가지 사연들과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처지와 아픔과 슬픔을 이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수단으로 보지 않고 애정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보게 되면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길은 상대방에 대한 연민의 정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들의 겉모습만을 보고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과 깊이 대화하다가 보면 100이면 100명 모두가 갖가지 인생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어떤 분은 허무주의로, 어떤 분은 부모를 여윈 슬픔 문제로, 어떤 분은 부모가 계시지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랑결핍자로, 어떤 분은 돌이킬 수 없는 죄문제로, 어떤 분은 막연한 두려움으로, 어떤 분은 정욕으로, 어떤 분은 가난으로, 어떤 분은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찾지 못해 고민하고 방황합니다. 실로 이 시대는 누구나 목자를 필요로 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현실 문제로 인해 이웃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지 못합니다. 이 시간에 우리가 자신의 문제를 넘어서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우리 이웃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주님의 기본적인 마음입니다.

    (2) 이성의 사람 빌립을 시험하시는 예수님
     5절에 보니 예수님께서 큰 무리가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빵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6)는 것은 예수님은 몰려 오는 큰 무리를 보시고 이미 먹이고자 작정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있다면 이는 감상적인 동정심에 불과합니다. 감상적인 동정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그리고 작정하지 않으면 상황에 따라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작정하면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안 될 일이 없습니다. 일사각오를 하고 무슨 일을 해 보십시오. 안 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작정만 하면 창조적인 힘과 방법이 생기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기에게 오는 무리들을 먹이고자 작정하셨는데 빌립을 통해 먹이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빌립을 시험하고자 함입니다(6)는 예수님은 평소에 빌립의 문제를 아시고 이번 기회를 통해 돕고자 하셨습니다. 빌립의 문제는 머리는 똑똑하지만 심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개 부정적인 사람에게 제일 먼저 물어보면 부정적인 대답을 해서 분위기를 어둡게 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역사에서 돌려 놓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립을 제외시키지 않고 그를 돕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을 끝까지 도우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어디서 빵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물으실 때에 빌립은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던 분이십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38년동안 누워있던 허약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선생님은 이들에게도 빵을 먹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 걱정 마세요. 어디에서 빵을 사야 될지 모르지만 어디에 가서 알아보겠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능히 주실 것을 믿습니다 라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의 대답은 (7)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200 데나리온의 빵이 그들에게 충분치 아니하리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먹이는 것을 기정사실로 정하고 어디서 빵을 사서 먹일 것인가? 물으셨는데 빌립은 돈이 없어 먹일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빌립의 대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6:35절을 보면 그 곳은 외딴 곳이요, 날도 많이 저물었으니 그들을 보내어 각자 마을에 들어가 빵을 사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남자만 5,00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습니까? 아무리 좋은 이상도 현실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빌립은 현실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 도저히 먹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어디서 빵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이겠느냐?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안 갔습니다. 차가운 이성과 칼날 같은 지성을 소유한 그로서는 먹이겠다는 예수님의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에 그의 생각은 옳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지금까지 행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큰 무리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빼놓고 현재의 상황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에 그는 먹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도 빌립처럼 하나님을 빼놓고 생각하면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입니다. 힘없고 가진 것이 없는 우리가 어떻게 남을 도울 수 있는가? 우리가 자신을 생각할 때에 이웃은 커녕 자신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선교도 할 수 있고 이웃을 도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장래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빌립의 문제는 있는 것을 찾지 않고 없는 것만 찾고 있습니다. 없는 200데나리온만 생각합니다. 200데나리온만 있으면 이 많은 사람들을 다 먹일 수 있는 데 그것이 없어!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가장 서럽고 비참한 것은 할 수는 있는 데 돈이 없어서 못할 때가 가장 비참하다고 합니다.

    (3) 믿음의 사람 안드레가 가져온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
    빌립이 현실만 바라보고 부정적인 생각을 할 때 안드레가 나타났습니다. (8)안드레는 요한복음에 3번 나오는데 3번 다 예수님께 사람을 데리고 나왔습니다(1:40,42,12:22). 안드레는 예수님이 빌립과 대화하시는 것을 듣고 있다가 얼마 있다 한 어린 아이를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9) 여기 한 소년이 있어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안드레는 5,000명을 먹여 보겠다고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내어 놓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현실감각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겸연쩍어서 머리를 긁으며 이것이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를 창조하는 위대한 생각이었습니다.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드린 안드레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빌립은 없는 200데나리온만 생각하고 있을 때 안드레는 믿음으로 있는 것을 찾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이겠느냐? 말씀을 하시자 먼저 찾아보았습니다. 그는 무리들 속으로 들어가서 한 아이에게서
    오병이어를 찾았습니다. 이것은 5,000명에 비해 아주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안드레에게는 귀한 것이었지만 안드레가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들고 나온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병이어는 가난한 사람의 한 끼 식사인 보리 빵(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여기서  보리떡이라고 했는데 보리떡은 질 좋은 보리로 만든 떡이 아니라 당시에 나귀나 짐승에게 사료로 주는 쭉정이 보리로 가난한 사람들이 만들어서 먹는 음식이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도 개떡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개떡은 돼지에게 주는 쌀겨나 보리겨를 빻아서 가난한 사람들이 먹었습니다. 그래서 본래는 겨떡인데 개떡이라고 부릅니다. 여기 나오는 보리떡은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었던 개떡과 같은 종류의 떡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또 여기 나오는 물고기는 우리나라의 굴비 같은 좋은 물고기가 아닙니다. 여기서 물고기는 헬라어로 옵사리온이라고 하는데 당시에 어부들은 고기를 잡으면 큰 고기는 집으로 가져가고 작은 고기는 살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가져가기도 그렇고 살려주기도 그런 어정쩡한 고기는 땅에 버렸습니다. 그러면 고아나 과부들이 그 물고기를 주워다가 소금에 절여서 오랫동안 보관하며 먹었던 물고기를 가리켜서 옵사리온이라고 합니다. 어린아이가 가져온 물고기는 바로 옵사리온이었습니다. 따라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화려한 음식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 먹는 한 끼 식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갖다드렸더니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 갖다드리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만약에 아이가 도시락을  혼자 먹어버렸다면 일인분으로 끝났을 것인데 예수님께 갖다드렸더니
    오천명이 먹을 수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4)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다
    안드레는 이렇게 하찮은 것을 드리고자 할 때에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었으나 안드레는 사람들이나 자신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갖고 나왔습니다. 그가 한 어린아이가 가져온 오병이어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행하신 놀라운 기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런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예수님께서 능히 배고픈 무리를 먹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 믿음을 소유했을 때 절망 중에도 희망을, 불행 중에도 행복을, 황무지에서 장미꽃을 피우고, 사막에서 강물을 흘러가게 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으시고, 이런 사람을 귀히 여기시고, 이런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빌립처럼 가만히 앉아 있을 때에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와 같이 찾아 나서면 창조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결국 안드레는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았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확신하고 그 말씀을 시도하려고 하면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쓰임받게 되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1) 오병이어를 축복하신 예수님 (10-14) 
    안드레가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드렸을 때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로 하여금 무리들을 잔디 위에 앉히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기적의 역사에 동참시켰습니다. 예수님은 무리가 다 앉은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19절에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축복하시고 빵들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가장 주목되는 말은 축복하시고라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테오라고 하는데 감사하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감사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 어린아이를 통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셔서 이 무리로 하여금 식사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축복하시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율로게오라고 하는데 축복을 빌다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축복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게 하옵소서하고 축복을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예수님이 축복하시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손에 들고 축복하시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가져 축복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니(11) 이보다 놀라운 기적이 어디 있겠는가요?

    (5)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에 대한 평가
     오병이어를 행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예수님은 안드레가 오병이어를 가져왔을 때 그것으로 뭐 하겠나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그것을 받으시고 안드레의 믿음과 심정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불가능에 도전하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멸시치 않고 감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믿음으로 드린 것은 반드시 받으시고 감사하십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우리의 진심과 믿음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없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양보다 질을 귀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갖고 있는 시간의 오병이어, 물질의 오병이어, 기도의 오병이어, 그리고 재능의 오병이어를 귀히 여기십니다. 나에게 없으면 다른 사람의 것을 찾아서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오병이어의 역사입니다. 

    1)  작은 것도 예수님이 축복하시면 풍족하게 됩니다.
     오병이어는 어린 아이에게 들려졌을 때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손에 들려졌을 때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손에 들려지기만 하면 큰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나귀의 뼈는 무의미하지만 삼손의 손에 들려서 이스라엘의 원수 1,000명을 죽게 했습니다. 지팡이는 의미가 없지만 모세의 손에 들리었을 때에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셨습니다. 물매는 개 한 마리 잡을 수도 없으나 다윗의 손에 들리었을 때 골리앗을 죽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쓸모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드리는 작은 물질과 시간을 하찮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은사를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작은 것을 들어 쓰실 때에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2) 예수님은 우리의 소원을 만족케 하십니다
    우리들 육신의 소원을 만족케 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도 만족케 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므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이상으로 심히 넘치도록 능히 채워 주십니다(엡3:20). 우리가 하나님께 큰 믿음을 가질 때에 우리의 믿음 만큼 채워 주십니다. 성경은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그것을 채우리라(시81:10) 했습니다. 죠지 뮬러는 이 말씀을 믿고 입을 크게 벌렸을 때 그는 한 푼 없이 고아 3천 명을 먹일 수 있었습니다. 윌리암 캐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큰 것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고 했을 때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우리가 큰 것을 기대하면 큰 것을 얻을 수 있고 큰 것을 시도하면 큰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작은 것을 원하면 작게 주시고 큰 것을 원하면 큰 것을 주십니다. 생선가게 아줌마와 같이 생선 몇 토막 파는 삶을 살고자 하면 그렇게 밖에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입을 크게 벌려야 하겠습니다.

    3)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의 반응 (15) 
    한 어린아이의 오병이어로 시작한 것이 2만여명이나 되는 무리들을 배부르게 먹고 남은 빵 부스러기들을 제자들로 하여금 거두게 하셨는데 거두어들인 양이 12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기적을 체험토록 함과 동시에 음식을 버리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를 통해 누구보다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생생하게 체험하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빵과 고기를 먹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날 경험한 기적을 평생동안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은 이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로 본 것이 아니라 세상의 임금으로 보았습니다. (15)그들이 와서 억지로 예수님을 데려다가 왕으로 삼으시려는 것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셨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정치적인 임금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믿고 이 땅에서 잘되는 것만 바라지 말고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서 영생하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3. 오병이어의 교훈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성인 남자들 오천명을 먹인 오병이어의 사건은 4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적에 대한 해석은 조금씩 다양합니다. 우리는 이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이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통하여 무리들을 배불리 먹이신 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였다. 사람들은 썩어 없어질 양식이라는 것만을 보았지 그 양식을 주신 예수님이 영생을 주실 분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날도 전날 배불리 먹은 빵 때문에 예수님을 다시 찾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들도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서 영생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믿어야 하는데 교회나오면서 세상의 부귀영화만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기억하기를 바라신 것은 단순한 성찬예식을 할 때 단지 둘러앉아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그 예식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살을 찢어서 나누시는 사랑의 행위라는 것을 알아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1) 예수님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오늘 이 오병이어의 기적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자비하심과 불쌍한 백성들을 돌봐야 하는 제자들의 책임과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의 창조의 능력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마14:15) 저녁이 되매로 시작이 되는데 예수님께서 수 없이 찾아오는 병자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고쳐주시다 보니 점심때가 훨씬 지난 오후가 되었다는 것인데  23절에도 산에 올라가셨다가 저녁이 되매 거기 홀로 계시더라로 보아 이 경우는 해가 져서 어두워진 상태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병을 고치겠다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주어 먹게 하라(16)는 불가능한 말씀을 하신다. 이미 제자들은 그들을 먹일 수 없다고 말씀드렸지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이 많은 사람을 사 먹일 돈도 없고, 또 그럴 상황도 아니라는 것을 다 아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제자들로 하여금 긍휼히 필요한 백성들에게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제자들의 신앙을 시험하고자 하기 위한 것이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알았더라면 하는 마음이 든다. 그러면 우리들은 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서 무슨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2)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을 알아야 한다
    제자들이 굶주린 백성들이 걱정 되서 마을로 보내서 사먹게 하자고 했을 때 주님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했을 때 아마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무척이나 당황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라고 했다(14).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굶주린 무리들을 향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슴에서부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셨다. 여기 불쌍히 여긴다는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고국이 망해서 이곳저것을 떠돌이 생활을 하는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것을 표현할 때 쓰이는 단어였다. 돌아갈 곳이 없는 디아스포라는 얼마나 불쌍한 상태인가?
    예수님이 그런 마음으로 그들을 보셨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 내부로부터 그 아픔을 느끼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예수님께서 항상 인간을 대하시는 속성이기도 한다. 예수님이 인간에 대한 최대한의 긍휼은 십자가상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인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셨다. 우리들도 이웃들을 대할 때 이런 주님의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배고픈 문제를 해결하시는 근본 원인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런 교훈을 통해 교회는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에게 육적인 돌봄도 필요하지만, 심령이 굶주리고 메마른 사람에게 영원한 생수를 마시게 해야 할 영혼구원의 책임이 있다.
     
    (3) 오병이어를 넘어 의미하는 교훈은 ?
     (마14:19)을 보면 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오라 했을 때 가져왔고 잔디 위에 앉히라고 했을 때 그들을 앉혔고 빵들을 떼어 주시는 대로 무리에게 갖다 주었다. 여기에 세 가지 동사가 나온다.
    축복하시고, 빵들을 떼고, 제자들에게 주시매 사실 이것은 깊은 뜻은 주님의 몸이 깨어짐을 상징한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요 6장)을 보면 이 기적 이후에 주님은 내가 바로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다.
     (요 6:48-51)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위해서 그렇게 자신을 깨뜨리시어 나누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사함을 받아 구원 받는 것이다. 이제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주라는 것은 불쌍한 영혼을 위해서 책임감을 가지라는 말씀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웃사랑을 위해서 섬겨야 할 사명을 주신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사람들은 그분을 모세가 예언한 바로 그 선지자 즉 메시야라고 생각했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건져 줄 정치적인 메시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민족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낼 정치적인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인류를 죄에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구세주이심을 믿어야 한다. 

    (4) 현대판 오병이어
    아이가 예수님께 드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 오천 명을 먹이시는 예수님의 이 놀라운 오병이어의 기적이 지금 이 땅 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육적인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을 따르며 허기져 기진하였던 무리에게 육신의 굶주림을 채워주었다. 하지만 이 영적인 오병이어의 기적은 이 말세의 시대에 영적인 갈증으로 목말라 죽어가는 영혼에게 생수와 같은 상쾌한 영적 갈증을 채워주어야 한다.(요7:37-39)
    이전의 오병이어기적은 모두들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으로 열 두 바구니에 거두었다고 했는데 영적인 오병이어의 기적은 너무나 풍성하여 결코 고갈되는 일이 결코 없다. 아니 지구 전 인류의 영적 갈증을 채우고도 조금도 줄어 들지 않는다. 영적 양식의 단 한 글자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놀라우신 주님의 지혜와 위대하신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의 찬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영적인 오병이어의 기적에 적극 참여합시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42절'의 말씀을 통해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영적인 오병이어의 기적은 소자 한 명이 아닌 무수한 영혼의 갈증을 채워줄 수 있는 생명의 보고입니다. 이 영적인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한 주님의 놀라우신 역사에 적극 동참하는 행복침례교회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5) 오병이어의 기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지금 영적으로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빈들에 살고 있다.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영적인 양식이 되는 바로 예수님 말씀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빌립은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려면 이백데나리온이 필요합니다. 아 여기가 빈들인데 어디에서 이런 것을 구하느냐? 돈이 있다 하더라도 여기서는 마을까지 거리가 멀고 때가 이미 저물었습니다. 라고 핑계했습니다. 이렇게 핑계하는 제자들을 예수님은 책망 하십니다.“갈 것 없다 너희가 주어라”이 말은 굉장한 책망입니다. 한 어린아이를 주님께로 인도만 하면 되는데 우리는 이 작은 희생을 못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작은 희생입니다. 큰 희생이 아닙니다. 믿음도 굉장한 믿음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작은 믿음을 요구하는 겁니다. 작은 믿음, 작은 희생, 작은 사랑, 바로 작은 것이 모여서 큰 것이 됩니다. 이제 바라기는 우리의 작은 희생 우리의 작은 신앙, 이것이 모아져서 예수님의 손에 드림으로 현대판 오병이어의 기적이 우리들의 삶 속에 날마다 나타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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