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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 여호와닛시와 여호와삼마말씀 2019. 1. 20. 12:09
여호와닛시와 여호와삼마 출17:14-16 겔48:35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삭대신 숫양을 미리 준비하셨다는 말에서 여호와이레라는 말이 나왔는데 성경에는 여호와란 말은 본래부터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의미하는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대신 주님 혹은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고자 여호와이레니 여호와닛시니 여호와삼마라는 말도 나오는데 오늘은 이런 하나님의 특별한 성품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여호와닛시
예루살렘 근처 야드바셈이라는 곳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의 학살을 추모하는 기념관이 있습니다. 그곳에 새겨진 문구가 인상적입니다. “용서는 하되 결코 잊지는 말자” 나치의 만행도 하나님이 주신 승리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문구입니다. 이처럼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17장 14절에는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으로 삼고 또 여호수아의 귀에 그것을 되풀이 하여 말하라. 내가 하늘아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철저히 없애리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이것이란 이스라엘과 아말렉과의 전쟁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말인데 좀더 자세히 들어가 보자.
BC 약1440여년 경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을 한 후 마지막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로 들어섰다. 광야는 말 그대로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추운 곳이다. 그렇다고 낮에 더울 때에 마실 물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 광야생활 통해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셨던 것이다.
물이 없다고 부르짖을 때는 반석에서도 물이 콸콸 솟아나 마시게 해주었고 매일 새벽아침에는 만나로 저녁에는 메추라기로 먹을 수 있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그 백성들은 알게 되었다. 정말로 하나님이 돕지 않고서는 그들은 살아갈 수 가 없는 백성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이 자기들 가운데 계신가? 아닌가? 시험을 하므로 하나님의 노를 일으키게 하였던 것이 몇 번 이던가?
이스라엘이 출애굽 때 두 가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떠날 수 없도록 뒤에서 물고 늘어지는 애굽 왕 바로이었고 또 앞으로 전진 할 때에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아말렉이라는 원수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막는 아말렉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혈통에서 야곱의 형이 에서입니다. 그런데 (창36:12)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아말렉은 에서의 손자입니다.
에서는 배고픈 창자를 위해 장자의 명분인 상속권을 팔았던 사람입니다. 배가 고픈데 예배가 밥 먹여주나? 영적 무관심, 현실주의자, 이기주의자가 에서같은 사람입니다.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아말렉입니다. 영적축복엔 무관심하고 현실문제, 물질문제만 급급한 자가 에서요, 아말렉의 가치관입니다.
야곱은 누구입니까? 나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야곱입니다. 야곱이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라면, 에서는 인간중심의 사람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에서와 야곱이 싸우듯이 우리 안에도 에서의 가치관과 야곱의 가치관이 싸웁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세상의 가치, 거룩한 마음과 육신의 정욕, 영원한 가치와 현실주의가 내 안에서 싸웁니다. 우리들도 기도하기를 내 속에 있는 에서와 아말렉의 체질을 야곱의 체질로 변화시켜주소서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말렉은 (신25:17-18)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한 족속이며 천지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교회와 성도를 존중할 줄 모르는 자들이 아말렉입니다.
(출17:8)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르비딤에서 이스라엘과 싸우니라로 시작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 길을 막는 아말렉족속과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까지 종으로 살았기 때문에 누구와 싸움을 한 적도 없는데 아말렉이 와서 르비딤에서 싸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행진하고 있었는데 에서의 후손인 아말렉 족속이 이스라엘을 쳤습니다.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이 피곤할 때 후미에 있는 약한 자들을 쳤다고 합니다. 힘들고 약할 때 공격하는 것은 비겁하며 그에 대한 상처와 분노는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말렉은 무기로 무장하고 후방에서 힘들어 지쳐서 떨어져가는 자들을 갑자기 공격을 하여 전쟁을 걸었지만 이스라엘은 이 처음에 행한 전쟁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을 했을 때 싸우는 방법이 좀 희한했습니다.
(1) 모세가 손을 들면 전쟁에서 이기다
아말렉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여호수아는 젊은 장정들을 모집하여 산밑에서는 아말렉과 전쟁하고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도로 부르짖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은 하루 종일 밀고 밀리는 팽팽한 싸움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모세가 손을 들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지는 겁니다. 여호수아가 어떤 전략을 가지고 있느냐? 군대의 숫자가 많으냐 적으냐, 어떤 무기로 싸우느냐 등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산위에서 모세가 손들고 기도하는 것이 승리하는 무기였습니다. 기도할 때 손을 드는 것은 하나님한테 먼저 항복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내가 죽으면 망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내가 항복하면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살고 민족이 삽니다.
(출17:10) 여호수아가 모세가 자기에게 말한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더라. 모세와 아론과 홀은 산 꼭대기로 올라갔는데
(출17: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그가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라.
그래서 아예 모세를 바위에 앉게 합니다. 그리고 해가 질 때까지 그 양손을 아론과 훌이 받쳐 들고 있습니다. 그 결과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이런 식의 전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은 모세가 기도할 때는 승리했다는 말입니까?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우선 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것의 이름을 여호와닛시라 하였습니다. 여호와닛시는 ‘여호와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깃발이 상징하는 바는 깃발은 군대를 상징합니다. 깃발 아래 모이고 깃발을 따라 행진하고 깃발을 꽂을 때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모세의 손이 깃발 역할을 했습니다. 이 깃발을 볼 때 이스라엘은 힘을 내서 싸워 승리했습니다.
깃발이 보이지 않을 때 이스라엘은 패배했습니다. 깃발은 곧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깃발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있습니다. 우리도 깃발을 보고 그 깃발을 따라갈 때 승리가 있습니다.
산아래에는 여호수아로 하여금 전쟁을 하도록 하고 모세는 아론과 훌을 데리고 산위에 올라가서 기도하였을 때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그가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는 전쟁인데 이때 아론과 훌이 모세 양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해가 질때까지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아서 이스라엘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께 단을 쌓고 여호와닛시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기도도 필요하지만 그 기도는 깃발 되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기도이어야 합니다. 세상전쟁은 항복하면 끝입니다. 영적전쟁은 두손 들고 하나님께 항복하면 승리합니다. 내가 사령관, 지휘관이 아닙니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었다" 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했다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피곤해도 기도를 멈추면 안됩니다. 내 기도의 손이 올라가면 가정이 승리하지만, 피곤하여 기도의 손이 내려오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80살 모세가 피곤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형 아론과 매형 훌 두 사람이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하여 모세의 기도하는 팔을 붙들어 주었을 때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영적전쟁은 기도로 승리하는 것인데 영적으로 먼저 승리하면 결국은 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아말렉과의 전쟁은 양면으로 싸웠습니다.
첫째는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말렉과의 전쟁은 골짜기의 전쟁이었습니다. 둘째는 모세와 아론과 훌이 산꼭대기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는 산위에서는 영적전쟁이 있었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산꼭대기에서 기도하므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기도하면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가능해 집니다. 기도하면 세상 사람들이 꿈도 꾸지 못했던 기적이 여러분에게도 일어납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여호와 깃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 말씀을 붙잡고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하면 이기고 또 이겨 여호와 닛시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지휘하에서 승리하였듯이 세상사는 동안에도 교회로 모여 세상의 왕인 사탄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모두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연약한 교인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민족을 가슴에 끌어안고, 기도할 때에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승리의 깃발이 천국에 꽂혀지는 그날 까지 여호와 닛시의 복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의 줄을 놓지 안기를 믿습니다.
(2) 하나님을 대적하는 아말렉을 잊지 말자
오늘 말씀의 핵심은 15절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것의 이름을 여호와닛시라 하였으니 16 이는 그가 이르기를 주께서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리라고 주께서 맹세하셨도다. 하였기 때문이더라.
아말렉 족속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대대로 그들의 후손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아말렉의 역할을 자청하지 마십시오. 뒤에 처지는 교인도 되지 말고, 뒤에 처진 교인을 공격하는 사람도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전쟁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으로 삼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전쟁을 수행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게 하라 명령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악한 마귀와의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는 비밀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악한 사단과 아말렉은 전면전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행렬에서 뒤처진 사람들, 은혜의 자리에서 멀어진 사람들, 교회의 비전에서 멀리 처진 사람들, 믿음의 확신없이 방황하는 사람들, 구경꾼처럼 원망불평하는 사람들을 악한사단이 공격합니다.
이 아말렉과 치러진 전쟁을 성경에 기록하고 잊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하지만 아말렉은 이스라엘과는 형제 관계였습니다. 아말렉은 야곱의 형 에서, 곧 에돔의 자손입니다(창36:12). 형제의 몰인정은 사람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합니다. 이후 아말렉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세력을 상징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아말렉이 이스라엘에 행한 것은 처음으로 르비딤에서 아말렉과의 싸움을 시작으로 이스라엘과 아말렉은 대대로 원수 관계가 됩니다.
사울 왕 때에 아말렉과 전쟁이 있었습니다. 아말렉 왕 아각을 사로잡았지만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사울 왕이 물질에 욕심을 내어 아각 왕과 좋은 짐승들을 남겨 놓았다가 선지자 사무엘의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다(삼상15:9 그러나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또 양과 소와 살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과 어린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그것들을 진멸하려 아니하며 다만 나쁘고 가치 없는 것만 다 진멸하니라).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가 페르시아 치하에 있을 때 벌어졌습니다. 이때 하만이란 자가 유대인을 박멸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에스더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이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함께 있는 모든 대신 위에 두니”(에3:1) 하만을 아각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아각은 아말렉의 왕 아각입니다. 하만은 그의 후손으로 추정합니다.
하만이 유대인 왕궁문지기 모르드개에 대한 원망을 품고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열두째 달 곧 아달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대인들,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을 막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에3:13) 이런 위기는 하만 때만이 아니라 포로로 살던 유대인들에게는 언제든 닥쳐올 수 있는 일상적인 공포였습니다. 하만의 계획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나아간 왕비 에스더의 목숨을 건 항명과 모르드개의 활약으로 저지됩니다. 오히려 하만이 모르드개를 나무에 달려고 했던 바로 그 나무에 자신의 목이 달리게 되고 유대인들을 대적하던 세력들이 거꾸로 이 날 보복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부림절입니다. 유대인 전통에서는 부림절 앞에 오는 안식일을 자코르라 부릅니다.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아말렉을 ‘기억하라’는 말씀과 관련있다 할 것입니다.
아말렉의 만행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만행을 물리치고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대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가져다주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무리에 맞서 싸우시는 하나님입니다. 주께서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리라고 주께서 맹세하셨도다. 하였기 때문이더라(16). 그들이 더 이상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복수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복수는 무섭습니다. (나1:2-3)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시며 원수갚는 분이십니다. 주께서는 보복하며 격노하는 분이시니 주께서는 자신의 대적들에게 보복하시고 자신의 원수들을 위해 진노를 간직하시도다. 3 주께서는 분노하기를 더디하시고 권능이 크시며 사악한 자를 결코 사면하지 아니하시리도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세력에 대해서 분노하는 분입니다. 그들에게 복수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무조건적인 편견에 사로잡히거나 민족적인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기억하십시오. 마지막 때에 최후의 심판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의인들을 괴롭힌 악인들에 대한 철저한 심판이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르지만 우리는 정의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아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아말렉족속을 대적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라면서 우리들에게 승리케 하여주시는 하나님께 늘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아말렉에 대한 교훈
그리스도 십자가 이후 우리는 복수나 응징보다는 용서나 사랑이라는 단어가 더 친숙해졌습니다. 로마서 12장 19-20절 말씀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원수 갚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 몫입니다. 복수는 하나님께 맡기고 너희는 사랑의 길을 가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소년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말하기를 또 주께서 칼이나 창으로 구원하지 아니하심을 이 모인 온 무리가 알게 하리라. 전쟁은 주게 속한 것인즉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 주시리라(삼상 17:47)하면서. 전쟁의 승패는 인간의 능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으로 벌인 전쟁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14절에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으로 삼고 또 여호수아의 귀에 그것을 되풀이 하여 말하라. 내가 하늘 아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철저히 없애리라" 하시니라.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가 된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는 전쟁 마당에 나가 열심히 싸웠습니다. 어떤 때는 이기고, 어떤 때는 지는 그 이유를 잘 몰랐습니다. 여호수아는 전쟁의 승리의 비결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까지 들어갈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또 여호수아의 귀에 그것을 되풀이 하여 말하라. 내가 하늘아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철저히 없애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전쟁은 여호수아 자신이 열심히 싸워서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게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모세로 하여금 여호수아에게 알려주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잘나서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내가 주님을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2. 여호와 닛시
모세는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단을 "여호와 닛시"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여호와 닛시라는 말은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란 뜻입니다. 깃발은 전쟁시 용기와 힘을 북돋워 주며 동시에 소속감을 고취시켜 주는 상징물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말은 "여호와는 당신을 따르고 의지 하는 자의 승리의 깃발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시편 20:5에는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주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최초로 경험했던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을 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여호와닛시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그를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 자에게 힘과 방패와 승리의 깃발이 되신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몸된 교회는 오늘날의 여호와닛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교회를 통해 말씀과 기도를 통해 병마와 이단과 사단과의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영력과 기력과 근력이 더 충만이 있어야 될 주로 믿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길목을 막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심과 기도으로 승리한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끝나는 날까지 언제 어디서 아말렉이 대적한다 하더라도 말씀과 기도의 권세로 또 주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삼마의 복
성경에서 전쟁의 대립개념으로서 쓰는 말로 평화, 화평, 평강 등을 의미하는 말이 [샬-롬-]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샬롬하면 전쟁이 없다는 소극적인 상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무엇에 의해서도 저해되는 일 없는 개인 및 공동체의 생활에 있어서의 정신적, 물적, 육체적으로 자유, 완전한 이상적 충족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호와살롬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에스겔서에 나오는 여호와삼마의 축복을 믿어야 합니다(겔48:35). 여호와삼마라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거기 계신다는 뜻입니다. 2019년에도 우리들이 가는 곳마다 우리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실 것이며 우리들이 어디를 가든 우리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인이시면서 천국에도 계시고 교회에도 계시고 우리 마음에도 계시고 여러분 집에도 계시고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일년 365일 동안 우리가 가는 곳마다 그곳에 계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바다를 가르시기 전에 먼저 건너편에 가서 계셨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전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와 가나안에 먼저 가 계신줄로 믿습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서 가셨습니다. 여호와삼마에 관련돤 말씀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삼마 (겔 48: 30~35)
30 그 성읍의 출입구는 이러하니라 북쪽의 너비가 사천오백 척이라
31 그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를 것인데 북쪽으로 문이 셋이라 하나는 르우벤 문이요 하나는 유다 문이요 하나는 레위 문이며
32 동쪽의 너비는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요셉 문이요 하나는 베냐민 문이요 하나는 단 문이며
33 남쪽의 너비는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시므온 문이요 하나는 잇사갈 문이요 하나는 스불론 문이며
34 서쪽도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갓 문이요 하나는 아셀 문이요 하나는 납달리 문이며
35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본문 말씀의 배경을 보면 BC 586년에 유다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에게 멸망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지 14년 되던 해에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에스겔서는 총 48장으로 된 예언서인데 그 내용을 보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장에서 32장까지는 주께서 거기 계시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주께서 거기 계시지 않기 때문에 유다가 멸망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32장에서 48장까지는 주께서 거기 계신다는 내용입니다.
주께서 거기 계시기 때문에 유다가 다시 회복되리라는 내용입니다.
주께서 거기 계시지 않으면 멸망하게 되고 주께서 거기 계시면 회복되는 축복을 받는다는 내용이 에스겔서의 전체적인 내용입니다.
그리고 48장에는 말세에 지어질 예루살렘 성읍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읍 사면에는 총 12개의 대문이 각 방향마다 3개씩이 있는데 그 성문의 이름은 유다 12족속의 이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는 말씀은 35절 말씀입니다.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고 했습니다.
(1)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이름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여러 별명 같은 이름들이 있습니다. “여호와닛시”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인데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여호와살롬”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평강이라’는 뜻인데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여호와이레”라는 이름이 있습니다.‘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인데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여호와라파”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치료하신다’는 뜻인데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여호와삼마라고 했습니다. 삼마라는 말은 거기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거기 계시면서 도우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여호와 샬롬의 평화가 있고, 번영이 있고, 축복이 있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왜 유다가 멸망했습니까? 주께서 거기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유다가 다시 회복되었습니까? 주께서 거기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삼마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주께서 거기 계시면 우리를 도우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시어서 우리들은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되는 여호와삼마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있을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간 종 노릇할 때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해내게 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 7절 말씀에 보면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았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들었나니 내가 그들이 고통을 아노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당하는 고통을 “보았고” “들었고”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모세라는 지도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길 40년을 갈 때도 하나님은 거기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면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마실 물과 먹을 양식과 고기를 공급해 주시고 대적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2) 역사 속에 계신 하나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유대인 작가 “엘리 위젤”의 자서전 「밤(Night)」이라는 책에서는 제 2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의 히틀러가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고발하였습니다.
위젤은 어린 시절을 헝가리의 작은 마을에서 신앙심 깊은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1944년 15살 때 부모와 누나와 여동생과 함께 아우슈비츠에 끌려갔습니다. 위젤은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감방 책임자가 위젤의 금니를 빼어 가려고 괴롭혔습니다.
하는 수 없이 위젤은 녹슨 숟가락으로 금니를 뽑아서 감방 책임자에게 바쳤습니다. 부모님과 누나와 여동생은 그곳에서 학살을 당했습니다.
어느 날 13세 소년이 수용소를 탈출하다가 붙잡혀서 공개적으로 교수대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소년은 30분 이상 밧줄에 매달려서 혀를 내밀고 꿈틀거리며 죽어갔습니다.
위젤은 온 가족이 학살당하고 매일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소년이 밧줄에 매달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절규를 합니다.
“하나님! 도대체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그때 위젤의 내면에서 이런 대답이 들려옵니다.
“내가 어디 있냐구? 저기 있잖아. 저기 목매달려 버둥거리고 있잖아”
하나님께서 위젤에게 들려주신 음성은 ‘나는 저 소년의 죽음 가운데, 유대인의 고통과 절규 가운데 있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현재 고난의 자리에도 계시고 형통한 자리에도 계십니다.
유대인의 제사장이요 이스라엘의 젊은 청년이었던 에스겔은 참으로 비운의 시대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성전의 제물을 먹고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성년이 되어 영광스런 제사장 위임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 위임을 받은 지도 얼마 안 되어서 나라가 멸망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의 계속적인 범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내려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모든 성읍은 바벨론에 의해 불타버렸고 휘황찬란하던 예루살렘 성전도 비참하게 파괴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뿐입니까? 모든 예루살렘의 거민은 바벨론에 노예로 끌려갑니다. 이스라엘 왕은 두 눈이 뽑힌 채 피를 철철 흘리며 끌려가고 궁중의 대신이나 율법 학사나 성전의 제사장들도 종의 신분으로 끌려가는 비극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에스겔도 사슬에 묶인 채 눈물을 흘리며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스겔의 개인적인 비운이었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 절망의 깊은 먹구름 속에서도 약속의 땅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픈 향수의 본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벨론 그발강가에 모여 앉아 수금을 타며 구슬픈 곡조로 본향의 노래를 부르곤 하였습니다.
에스겔도 그 무리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바로 그런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에스겔을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에스겔의 눈을 열어 주시고 하늘 보좌의 신령한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두렵고 떨리는 광경이었습니다. 과연 이스라엘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바로 그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원인이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그들이 이제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에겐 절대적으로 희망이 없다고 에스겔로 하여금 예언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계속해서 바벨론의 종노릇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스라엘 멸망이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에스겔 2장부터 36장까지 계속해서 이런 예언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은 그런 에스겔에게 또 하나의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과 예루살렘성의 재건에 관한 환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수많은 해골들과 마른 뼈들이 있는 골짜기로 데리고 갔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수많은 해골과 마른 뼈들이 주의 말씀과 생기로 인하여 다시 살아나 큰 군대를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에스겔에게 보여주셨습니다(겔 37장). 그리고 그 능력으로 다시 살아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다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여 새로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도성을 회복할 영광의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겔 40-48장). 에스겔은 먼저 예루살렘 시온산 위에 세워질 찬란한 성전의 영광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웅대하게 재건되어 있었습니다. 야곱의 열두지파, 곧 야곱 총회의 기업들이 다시 회복되었고 이 영광스런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거대한 도시로 건설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이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고 이름 하여 주셨습니다(겔 48:35).
(에스겔 40장 1-4절, 48장 35절)
1 우리가 포로 된지 이십 오년이 되는 해 즉 그 도시가 공격을 받은 뒤 십 사년이 되는 해 곧 그 해의 시작의 그달 십일 바로 그날에 주의 손이 내위에 임하여 나를 거기로 데리고 가시니라
2 하나님께서 환상 속에서 나를 이스라엘 땅으로 데리고 가서 심히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으셨는데 그 곁에는 남쪽으로 도시의 형태 같은 것이 있더라.
3 그분께서 나를 거리로 데리고 가셨는데 보라 거기에 놋의 모습과 같은 사람 하나가 손에 아마줄과 측량 갈대를 가진 채 문에 서 있더라.
4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네게 보여 줄 모든 것을 네 눈으로 보며 귀로 듣고 네 마음을 그것들 위에 둘찌어다. 내가 그것들을 네게 보여 주려고 너를 여기로 데려왔나니 네가 보는 모든 것을 다 이스라엘 집에게 밝히 드러낼지어다, 하더라.
겔 48:35 그것을 측량하면 돌아가며 (사면의 도합이)만 팔천갈대더라 그날 이후로 그 도시의 이름은 주께서 거기 계신다가 되리라.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3) 여호와삼마
여호와삼마라는 말은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다’는 말입니다. 성전에 계시던 하나님께서 성전을 중심으로 세워진 새 예루살렘 도성에도 똑같이 계신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여호와삼마는 에스겔 선지서의 중심사상이었습니다. 이것이 에스겔 선지서의 목표였고 이것이 에스겔 선지서의 핵심이며 결론이었습니다.
젊은 선지자 에스겔은 저 바벨론 땅에서 목이 터져라 여호와삼마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절망에 지쳐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겔의 예언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피를 토하도록 외치는 에스겔의 여호와삼마의 소리가 자신들을 조롱하는 소리로만 들릴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젊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자기를 이렇게 종으로 버리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하는 마음으로 돌을 던졌습니다. 에스겔은 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이마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죽습니다. 그러나 전설에 의하면 그는 쓰러져 죽으면서도 여호와삼마를 외쳤다고 합니다. 여호와삼마! 여호와삼마! 이 비운의 선지자 에스겔! 그는 절망의 먹구름 속에 살면서도 먹구름 속에 감추어져 있는 은빛 광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 백성들의 회복의 비전과 축복의 환상을 외치며 죽어갔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죽었지만 그 입술 속에서 선포되었던 여호와삼마의 복음은 아직도 지구촌을 메아리치고 있고 하늘 보좌를 진동하도록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호와삼마는 바벨론 해방 이후에 실제로 역사적으로 성취되었고 신약의 교회시대에 영적으로 성취되었으며 또한 종말론적으로 궁극적인 성취가 이루어져 가는 가운데 있습니다.
여호와삼마! 이것은 바벨론 포로 시절 하나님의 회복을 기다리던 에스겔 선지자의 소원이었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소망이었습니다. 또한 이것은 현대를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기도 하며 종말론적으로는 전 시대, 전 역사 속에 살았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 소망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삼마란 구체적으로 어떤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지금 선민 이스라엘이 처한 역사적 정황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모든 것을 다 놓치고 빼앗기고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과연 그들의 처지는 마치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것처럼 마른 뼈와도 같았고 마른 해골들과도 같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좌절과 비탄 속에 젖어 암흑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여호와삼마를 외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삼마! 하나님은 죽지 않으셨고 우리를 떠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분은 반드시 우리를 바벨론에서 해방해 주셔서 우리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고 그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여호와삼마의 성읍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일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삼마의 복음으로 당신의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여호와삼마의 구원은 그냥 보통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구원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지금 너희의 처지가 골짜기에 누워있는 해골들과 같고 마른 뼈다귀와 같다 할지라도 내가 너희를 구원하면 된다. 아무리 너희에게 돌파구가 없고 희망이 없어 너희가 절망의 산으로 첩첩이 싸여 있다 할지라도 내가 너희를 구원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내가 누구란 말이냐? 하늘과 땅을 지으신 전능자가 아니더냐? 천지의 역사를 주관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더냐? 그러므로 너희는 못해도 나는 할 수 있다. 너희는 포기하여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반드시 때가 되면 내가 너희를 바벨론에서 구원해 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여호와삼마의 성읍을 재건하여 여호와 삼마의 축복을 누리게 하리라.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니까 말이다. 할렐루야!
셋째, 임마누엘의 언약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호와삼마!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구원해 놓은 그들과 그들의 장막, 아니 그들의 성읍에 영원히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영원히 축복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원수들이 에워싸고 군대가 너희를 향해 진 칠지라도 내가 너희와 함께 해 주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볼지어다.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하여주리라는 것이 바로 여호와삼마의 복음이요 축복의 메시지였습니다.
(4) 여호와삼마의 신도시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반역하자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왕을 통해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성전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백성들은 바벨론에 끌려가 종노릇을 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번에도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다시 재건하고 회복시키는 여호와삼마의 신도시를 계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한 도시! 하나님의 성전에 의해 다스려지고 축복을 받는 도시! 하나님은 실제로 이 도시를 이루셨습니다. 기어이 하나님은 페르샤의 고레스왕 때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에서 해방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해서 성전을 건축케 하였고 느헤미야를 통해서 예루살렘 성벽과 도시를 재건하도록 했습니다. 한마디로 여호와삼마의 도시를 이룬 것입니다.
물론 이 여호와삼마의 도시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인 예언이요, 환상이었습니다. 종말에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을 목표로 한 예언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여호와삼마의 성읍은 오늘날도 교회를 통해 우리들에게도 영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계속해서 종말을 향해 궁극적으로 이루어져 가야 합니다. 살아있는 교회라면 성도들에게 영적인 여호와삼마의 도성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참된 교회란 주일날 모였다가 흩어져도 영적으로는 언제나 교회와 성도 간에 영적인 네트워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결과 성도는 교회를 통해 은혜를 받고 신앙의 지도를 받으며 내 자녀, 내 가정, 내 직장과 사업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신도시, 여호와삼마인 것입니다. 더 위대한 여호와삼마의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더 온전한 여호와삼마를 이루어 갑시다.
2000년전 예수님께서 유대 땅에 오셨던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라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표현하면 “여호와삼마”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도우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셔서 평화와 번영의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고난을 당할 그 당시에도 거기에 계셨다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삼마”는 ‘거기 계시다’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거기”가 어디입니까? “거기”는 장소적인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곳이 바로 “거기”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거기에 함께 계시면서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5) 미래에도 거기 계시는 하나님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미래에도 거기에 계신다 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언제입니까? 우리의 미래는 앞으로 살아갈 날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원한 미래는 천국에서 영생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미래인 천국, 거기에도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절 말씀부터 보면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적용한다면 “ 천국은 여호와삼마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있는 거기에 함께 계시면서 도우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시어서 평화와 번영의 축복을 주시면 가장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마태복음 28장 20절은 예수님께서 죽은지 삼일만에 부활하셨다가 40일 지난 후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하시니라.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함께 계시며 또 앞으로도 함께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거절하지 아니하는 한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그분의 도우심과 지키심과 인도하심이 여러분과 영원히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그분을 원하고 기도로 모셔 들이시길 바랍니다. 믿음이 없이는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믿음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말씀을 계속 듣고 읽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말씀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장차 우리가 영원히 거할 곳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삼마” 천국에 계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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