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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말씀 2019. 1. 6. 11:27
새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눅 5:36-39
해가 바뀌면서 느끼는 것은 세월은 참 유수와 같이 빨리 지나가는데 잠시 생각해보니 지난 한해동안 큰 열매를 거두지 못해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고 부끄럽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해를 또 한번의 기회로 주셨다는 것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만약 새해가 없고 매일 똑 같은 날만 계속된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한 세상일까 하면서 한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되지 않을까요? 사람들은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각자 꿈과 소원이 있어서 올해에는 뭐가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새해를 맞이하지만 성경은 해아래서 하나님없이 사는 모든 인생들이 헛된 일에 분요하다고 하면서 새해를 맞이한들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정말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기 전까지는 새것이라는 말이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떴던 해가 내일 다시 떠오르고 지난해 왔던 계절이 올해에도 다시 오리니 무엇을 가리켜 새것이라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새것이란 그리스도안에서 죄사함을 받아 거듭나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데 정말로 새롭게 된다는 것은 죽었다가 부활의 몸이 되어 새하늘과 새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사는 것만이 새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그래도 우리의 생명을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올 한해에도 우리들과 함께 하여주실 것을 믿으면서 때와 날과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스위스 알프스 산맥에는 풀이 풍부합니다. 그래서 양을 치는 목동들에게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아름다운 습관이 있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목동들이 양을 이리 저리 끌고 다니며 풀을 뜯어 먹게 합니다. 한낮에 양을 치면서 목동들은 한가로이 낮잠을 자기도 하고 피리를 불기도 합니다. 때로는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양들을 급히 나무 아래로 피신시키기도 하며 어느 때는 갑자기 나타난 맹수와 싸우기도 합니다. 때로는 낭떨어지기에 떨어진 양을 구하기 위하여 많은 고생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루를 지내는 동안 갖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해질 무렵이면 산 위에 있는 목동은 산밑에 있는 목동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주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주님을 찬양합시다” 이 소리는 조용한 공기를 타고 산 아래로 널리 퍼지게 됩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다른 목동들도 그 소리를 듣고 “주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주께 감사합시다” 응답하면서 하산을 시작합니다. 하루를 마감하는 한결같은 구호는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입니다. 목동들이 하루를 마감하는 것이나 우리들이 한해를 마감하는 것이나 어쩌면 비슷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오늘 하루를 도우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목동들을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실까? 그렇다면 우리들도 지난 한해동안 우리들을 도우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감사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여기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셨다를 히브리어로 에벤에셀이라 합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새해를 맞이합시다.
1. 새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우선 지난 한 해가 어떻게 흘러갔는가 다음의 시 한편을 읽어보면 그냥 지나가 버렸는지나 않았는지 한번 뒤돌아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지나가 버렸네」- 박상천
구두 한 켤레를 바꾸는 사이에 일년이 지나가 버렸네
이발소에 열 번쯤 다녀오는 사이에 일년이 지나가 버렸네
손톱을 오십번쯤 깎는 사이에 일년이 지나가 버렸네
담배를 삼백갑 쯤 피우는 사이에 일년이 지나가 버렸네
자동차를 몰고 이만 삼천 킬로쯤을 달려오고 나니 일년이 지나가 버렸네 그렇게 지나가 버렸네 일년은 한 켤레 구두처럼 털어 버린 시간
몇 센티쯤의 머리카락으로 잘려버린 시간
몇 그램쯤의 손톱으로 깎여버린 시간
몇 모금의 연기로 흩어져버린 시간
타이어 몇 미리 정도가 닳듯 닳아버린 시간들
헐고, 잘리고, 깎이고, 흩어지고, 닳으며
일년은 그렇게 너덜너덜 지나가 버렸네
이제 나는 몇 켤레의 구두를 바꿀 수 있을까?
시인 박상천 교수(한양대 국어국문학과)는 지난 일년이 그렇게 지나가 버렸다고 이야기하며 시간에 대해 아쉬워합니다.
시간은 잡을 수도 없는 것이고 살다보면 지나가는 것이라고 자조하면서 아쉬워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몇 켤레의 구두를 바꿀 수 있을까’라는 물음으로 시간과 인생은 내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present)이므러 현재(present)를 선물로 보는 것입니다. 이 한해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다시한번 감사의 마음을 가집시다.
(1)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삼상7:12)
해가 바뀌면서 생각나는 것은 그래도 하나님께서 나를 지금까지 도우셔서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를 히브리어로 에벤에셀이라고 합니다.
BC 1050년 경만 하여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의 팔레스타인인 블레셋으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받았습니다. 땅도 뺏기고 농사지으면 곡식도 뺏기고 늘 불안한 상태에 있었는데 이런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였는가요? 3절에 보면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마음을 다해 주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주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선지자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신과 아스다롯 신상들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런 후 미스바로 모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50여리 떨어진 미스바에 모여서 금식하며 회개하는데 블레셋이라는 강대국이 이스라엘을 침략 해 왔을 때 사무엘이 어린 양으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며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를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큰비와 우뢰를 통해 블레셋 군사들이 혼비백산하여 패하게 하였습니다. 매번 패하기만 하던 전쟁에서 이번에는 단번에 승전했으므로 사무엘이 미스바와 센사이에 돌을 취하여 승전 기념비를 세웠는데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의미로 그 기념비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여러분!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지난 2018년도까지 인도하여주시고 지켜주셨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여기까지 도우시는 에벤에셀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때에 금년 새해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어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예배 시간에 우리는 하루를 마감하는 목동들과 같은 감사의 찬양을 주님께 드림으로 찬양을 통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 감사찬양을 합시다. 우리에게도 목동들이 하던 간절함이 있기를 원합니다.
2018년은 인류의 역사에서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이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 순간을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난지 40년만에 광야생활을 마치고 이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온 것과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을 해봤습니다. 광야생활을 마치고 요단을 건너 가나안입성에서 광야생활은 영원히 사라진 것처럼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는 광야로 돌아갈 수 없듯이 우리들도 다시는 지난해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에서의 생활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이었으므로 우리들도 이 한해는 그렇한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는 순간 그들은 그렇게도 꿈에도 소원이든 가나안 땅을 밟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땅이요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입니다. 그러나 그 좋은 땅도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들어갔다고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요단강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넜지만 가나안 땅의 문전에 여리고성이 있습니다. 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함락시키지 못하면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무찌를 수가 없습니다. 여리고성은 난공불락의 성입니다.
그러나 여리고성을 반드시 쳐서 함락시켜야 합니다.
다음은 가나안땅의 일곱 족속을 모두 멸절시켜야 합니다. 이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저들은 모두가 전쟁에 숙련된 족속들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위하여 아무런 준비도 없었고 또 무기도 없는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기 때문에 어떤 족속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새해를 맞이하여 그냥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해 세상과 싸워서 패했던 것들을 이 해에는 능히 믿음으로 싸워 승리하여야만 새해를 맞이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악과 싸워서 이긴다는 것이 내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지금까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셨다는 믿음을 갖고 난공불락의 죄악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오늘 2019년 새해를 맞는 첫주일 예배에 우리는 사무엘선지자가 한 말 우상을 버리고 오직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겼을 때 하나님은 에벤에셀 하나님이 되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말을 마음에 되새기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첫째로 어제까지 지내왔던 것을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에벤에셀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습니다. 지난해에도 수많은 어려움들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경제적인 어려움이 컸습니다. 급격한 최저임금상승으로 인한 소상공인이나 자영업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힘들었던 한해이며 폐업자수가 너무나 많았던 한해였는데 이처럼 사업부진이니 스트레스압박으로 인한 건강악화니 정말 우리 모두들 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엄청난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건강을 지켜주셨고 가정을 지켜주셨고 믿음을 지켜주셨고 또 각종 사고로부터 보호해 주신 것에 감사하여야 하겠습니다.
두번째 오늘도 도우실 것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말은 여기까지만 도우시고 여기서부터는 안 도우시고 멀리 가버리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난해까지만 도우시고 올해부터는 안 도우실 분이 아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신 것은 오늘도 도우실 것이고 올해에도 도우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도 도우셨고 광야에서도 도우셨습니다. 물이 없을 때 물을 주시고, 먹을 것이 없을 때 만나를 주셨습니다. 옷이 없을 때 옷이 헤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더울 때 구름기둥으로 도우셨고 추울 때 불기둥으로 따뜻하게 하여 주셨습니다. 여기까지 도우셨던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블레셋이 쳐들어 올 때 도우시고 계십니다. 어제 도우신 하나님은 오늘도 도우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이보다 더 큰 위로의 말씀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끝날 까지 함께 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리 레빈이라고 하는 50대의 미국 해외 특파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레바논에서 취재를 하다가 회교도들에게 잡혀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독방에 가두었습니다. 대개 독방에 감금된 사람들은 한 달이 채 못되어 미쳐버린다고 합니다. 이 사람도 역시 독방에 감금된지 며칠이 지나자 정신착란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중에 갑자기 아내 생각이 났습니다. 그의 아내는 평소 그에게 늘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요. 어려움 당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와주실 거예요” 그래서 그는 혼자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여기까지 내가 지낸 것은 아내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도우신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도우실 것이다. 내가 왜 외롭게 지내는가? 하나님과 대화를 해야지” 그는 하나님께 말을 걸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살아 계십니까? 정말 살아 계시다면 저로 하여금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이 감옥 안에서도 저를 돌봐주시고 나가게 하옵소서”
무신론자가 독방에 갇히니까 비로소 하나님께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불안과 두려움, 공포 속에 있던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자 마음속에 평강이 넘쳐났습니다. 기쁨이 생겼습니다.
자기를 가둬 놓은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도 없어지고 오히려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1년 후 그가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그 때 그는 몸도 마음도 모두 건강한 상태였습니다. 정상이었습니다. 무신론은 완전히 떠나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은 지금 막 돌아온 자들에게도 변함없이 도와주시는 것이 에벤에셀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내일도 도우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기까지 도우신 에벤에셀 하나님은 여기서부터도 영원토록 도우실 것입니다. 그 때 미스바에서 도우신 하나님은 그 후 에그론, 가드까지 땅을 빼앗게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미스바까지는 사막지대입니다. 그러나 에그론, 가드는 곡창지대입니다. 이스라엘 땅 중에 가장 기름진 땅에 속하는 땅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도 도우시고 오늘도 도우시더니 내일은 더 좋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상 두 사람의 두 사건을 늘 마음속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는 모세 불꽃속에서 모세를 만나주신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는 요나 고래뱃속에 구원해 주신 하나님입니다.
이 두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에 가시떨기나무 불꽃속에 있었지만 타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불이 이스라엘에 떨어져도 이스라엘을 태워 없애버지지는 못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습니다.
누구도 이스라엘을 타버리게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불과 같은 재앙도 이스라엘을 재로 만들 수는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나가 고래뱃속에 들어가서 3일 3야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래는 요나를 소화시키지 못하고 결국 토해놓고 말았습니다. 누가 이스라엘을 삼켜도 먹어 치우지는 못 하고 토해내고 말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굳건한 신앙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미래가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모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역사나 요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믿는 자들이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반드시 구출된다는 확신을 갖게 만듭니다. 모세와 요나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이 한해에도 우리들을 세상의 재앙으로부터 소멸되는 것을 막아주실 것이며 우리를 삼키려는 자들로부터 막아주실 것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을 도왔고 이제도 돕고 영원토록 도우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에벤에셀이 말하고 있는 의미입니다.
연말이 되면 각종 행사에서 시상식을 합니다. 요즘 상을 타는 유명인들이 하는 말 중에 하나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에벤에셀은 지난 한해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모든 어려움과 시련도 극복할 수 있어서 감사를 드립니다. 금년 한해에도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상치 못하고 우리를 삼키지 못하도록 도와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제 새해를 맞이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내 자신에게 새로운 변화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변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 있단말입니까? 나의 마음이 변하는 것이 전제조건입니다. 잠언 4장 23절에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이는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만큼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을 갖고 생명을 지키도록 노력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새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새술은 새부대에 담으라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이 말씀을 우리 삶에 한번 적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 우선 이말의 유래를 돌아본다면 당시에는 유대인들은 포도주를 만들 때 양가죽 부대에 담아서 자연적으로 발효시켰는데 발효가 끝난 포도주는 헌가죽 부대에 담아두어도 괜찮지만 새 포도주는 발효 과정에서 가스를 내뿜고 팽창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가죽 부대도 자연히 늘어나야만 하는데 이때 신축성이 없는 낡은 가죽 부대는 포도주의 발효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버리게 합니다. 그래서 발효중인 새 술은 헌 가죽부대에 담아두면 부대가 찢어지고 술도 다 쏟아지게 되어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 새해 첫주에 준비하고자 하는 말씀은 새술은 새부대에 담으라는 말씀입니다.
포도주는 오래될수록 가치를 인정받는 귀한 술인 만큼 우리 모두 새 부대에 담겨진 새 포도주가 되어서 발효도 하고 가스도 내뿜고 팽창도 하면서 맛있는 포도주가 되어 봅시다. 새 술은 새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말씀은 짧지만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 새 술은 새부대에 넣으라는 의미
여러분 중에 서부극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보통 서부극을 보면 말을 타고 다니는 총잡이들이 말안장이나 허리춤에서 주머니를 꺼내 물이나 술을 마시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 주머니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가죽 부대'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양의 가죽으로 부대를 만들어 액체를 보관하는 용기로 삼았습니다. 작은 동물의 머리와 다리부분을 잘라내고 가죽을 벗긴 다음, 털이 나있는 쪽을 바깥쪽으로 해서 목부분만 남기고 나머지 모든 구멍을 꿰맵니다. 그리고 기름기를 제거하고 일정기간 손질을 하고 나면 물이나 술같은 액체를 보관하기에 적합한 도구가 됩니다. 팔레스틴, 유럽, 남미에서 최근까지도 사용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새 포도주는 반드시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새 포도주는 발효되는 과정에 독한 가스가 발생되는데 그 때 새 부대는 신축성과 탄력성이 있기 때문에 팽창하면서 그 가스를 견디어 내지만, 낡은 부대는 주름 잡히고, 메마르고, 딱딱해서 그 가스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반드시 새 부대에 담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있습니다. 이말은 나의 마음이 새롭게 변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이 아무런 의미를 줄수 없다는 것입니다.
(2) 새 포도주와 낡은 부대의 의미
여기서 '새 포도주'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훈, 혹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 언약을 가리키는 말이며, '낡은 부대'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대표로 하는 당시의 유대교의 형식주의와 위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형식주의의 길로 빠져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들만 '율법'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
둘째는 '할례의식',
셋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선민의식,
세 가지 외적 조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선택하셨다는 선민의식이 형식주의가 바로 낡은 부대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수많은 이스라엘인 중에 주님을 만난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던 시몬과 84년 동안 과부로 살아오던 안나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통에 사로 잡힌 낡은 마음으로는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 새 부대의 의미
그렇다면 새 부대는 무엇일까요?
첫째, 새 부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담아 들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여러분 모두가 이 믿음의 '새 부대'를 가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잠언 4장 23에서 무롯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고 하였는데 이는 마음만큼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지켜야하는 이유가 마음에서 생명의 근원이 나기 때문인데 새 부대는 주님을 믿고자 하는 마음이라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새 부대는 새로운 교훈이나 사상을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입니다. 탄력성이 없어서 새로운 변화를 싫어하고 거부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낡은 부대'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은 여러분 모두가 새로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받아들이는 신축성과 탄력성을 지닌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셋째, 새 부대는 모험적 사고를 의미합니다.
역사의 새로운 아이디어(혹은 사상)나 시도는 모두 모험적 사고를 통해 이룩되었습니다. 사람도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없을까라는 모험적 사고가 비행기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넷째, 새 부대는 새 방법(New methods)을 의미합니다.
바클레이는 '사업가는 늘 낡은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을 추구해 가는데, 교회는 항상 낡은 방식을 시도한다'고 교회의 보수 지향적 성향을 꼬집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과 그분의 말씀이 곧 새 언약이요 새 포도주입니다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이 우리 안에 계셔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시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의 마음이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새 부대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받아들이는 믿음, 새로운 것(교훈, 사상)을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 새로운 아이디어를 산출해 내는 모험적 사고, 복음 전파를 위한 새로운 방법을 의미합니다.
새 부대가 되기 위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자기 갱신의 노력을 끊임없이 해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 새 술을 헌 부대에 담으면 그 부대는 찢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사에는 'if'가 없습니다. 만약에 그것이 존재 했다면 역사란 것은 이루어지질 않았겠죠. 이미 지난 것은 과거일 뿐 입니다. 과거에만 얽매어 사는 인생은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과거를 토대로 새로움을 개척하는 삶이야말로 우리를 성장 시키며, 우리를 윤택하게 해 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삶은 유한합니다.
그렇다고 한 세기를 넘기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일 이지요. 그 짧은 시간만이 우리에게 부여된 것이지요. 그 짧은 세월은 -그 중에서도 이미 반은 써버린 상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부입니까? 명예입니까? 부와 명예는 왔다가도 사라지는 것. 부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희생되는 부분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한낱 신기루와 같은 그것들을 얻고,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쏟을 정력이 무한할까요?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내 부모를, 내 식솔들을,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을... 또 우리의 삶 자체를 ... 매일 아침마다 눈을 뜨고 밝은 태양을 볼 수 있다는데 감사해야 하고, 일용할 양식이 있음에 감사하고, 많은 이웃과 친구들이 있음에 감사해야 하며, 오늘도 내가 일을 할 수 있다는데 감사해야 하며,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또 웃을 일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笑門萬福來' 라는 말이 있습니다. 웃는 얼굴을 싫어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 우리민족은 웃음에 인색합니다. 아무데서나 웃으면 정신병자 취급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표정은 근엄만을 좋아하는 굳은 얼굴이 되었죠. 웃으면 수많은 얼굴 근육들이 운동을 하며. 배의 근육도 운동을 하지요. 또 엔돌핀도 솟아나서 건강과 젊음도 유지할 수 있고요. 친구들을 많이 만나 서로 위로하고 위로 받아야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했습니다. 혼자 무인도에 오랜 시간 방치돼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말도, 웃음도, 기뻐할 일도 별로 없고 다시 사회로 복귀해도 그는 외톨이 신세를 면키 힘들 것입니다. 내 주변에 나에게 말을 해주고 힘을 실어줄 친구가 있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천군만마를 만난 것처럼 큰 힘이 되어줄 겁니다. 새로운 전환과 발상이 요구 됩니다. 이제껏 살아 오면서 나의 취약점들을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세요. 나는 내 독단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 오지 않았는가를! 남에게 누가 되는 삶을 살아 오지 않았는가를! 우리 의식의 모든 것들을 바꾸고 전환할 때 우리에게는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았나요? 확언컨대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2019년엔 우리 더욱 서로 사랑하고 우리의 공간을 아름답고 소중하게 꾸며 나가는 뜻있는 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새해엔 더욱 건강하시고, 모든 일이 형통하며 가정에 행운과 축복이 그리고 사랑과 평화가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는 말은 새로운 술을 담가 숙성시키기 위해서 기존에 쓰던 부대/자루/포대를 사용하지 말고 새로운 것을 사용해서 보다 좋은 술을 숙성시키라는 말입니다. 즉 새로운 것을 할 때는 새로운 환경에서 하는 게 좋다는 의미로 반대가 되는 의미로는 '구관이 명관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3. 새해에는 영육간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현대의학은 예방 의학입니다. 병이 오기 전에 건강관리를 잘해서 건강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전하고 지키고 행할 때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현대인에게 건강을 해치는 것이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온다하더라도 스트레스주는 것에 신경집중하지 말고 마음을 비우고 살아야 합니다. 식사조절도 잘 하시고 적당한 운동도 하셔서 건강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생활을 하셔서 영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시고 기도로 영적으로 호흡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생활과 전도를 생활화 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더하시고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지난해도 건강하셨으니 올해에도 건강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인류조상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모든 사람들 속에는 ‘죄악의 쓴물’이 들어 왔습니다. 죄악의 쓴물로 인한 고통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죄악의 쓴물을 해결하지 않으면 사망의 독이 가득하여 크게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죄의 쓴물을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무서운 죄악도 해결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사 59:1) 주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죄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므로 인간들이 죄로 인한 고통 쓴물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의 쓴물은 인간의 힘이나 지식이나 수고로 달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예수로만 쓴물을 달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예표가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하기 위하여 한 나무를 던지라 하셨고, 모세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한 나무를 쓴물에 던지자, 쓴물이 단물로 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이 나무는 훗날의 예수 그리스도가 짊어지신 나무의 십자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만이 우리의 죄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만이 인생의 쓴물을 치료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요 14:6은“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죄악은 인간에게만 쓴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동일하게 고통을 받으신 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에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 53:5)고 단호히 말했습니다. 예수는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반드시 믿어야만 구원을 얻습니다. 인생의 쓴물이 단물이 되는 비결이 곧 예수를 믿는 것 이외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2) 미움과 분노의 쓴 물을 치료하시는 하나님
미움과 분노는 자기를 파괴하고 다른 사람도 파괴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움과 분노의 쓴물이 사람 마음속에 항상 있어, 그 미움과 분노의 쓴물을 토해내며 자신도 죽어가고 다른 사람들도 내가 토해낸 독이 퍼지면서 죽게 만듭니다. 미움과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다음의 글을 읽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19살에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된 토스카니니는 음악적 재능으로 위대한 지휘자로서 명성을 얻었습니니다. 그는 음악적 재능뿐만 아니라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성격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오케스트라 연습을 할 때 어떤 연주자가 실수하면,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주변에 있는 물건을 마구 집어 던지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합주 연습을 할 때 한 연주자가 눈에 띄는 실수를 하자 즉시 얼굴이 분노로 굳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지휘대에 놓아두었던 자신의 비싼 시계를 집어서 바닥에 던져버렸습니다. 그 시계는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으로 깨뜨려지고 말았습니다. 지휘자인 토스카니니의 분노는 자기의 값비싼 시계를 망가뜨리게 하여도 고쳐질 수 없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의 분노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잃어버리게 하기도 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해부학자인 존 헌튼은 말하기를 “분을 내는 자는 자살하는 사람이다. 분과 노는 남을 괴롭히기 전에 자기를 죽인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해부학회의에 참석했다가 다른 의사가 존 헌튼 박사를 비평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존 헌튼 박사가 분노해서 상대에 대항하다가 그만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죽고 말았습니다. 분을 내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누누이 가르쳤던 그가 스스로는 분을 품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엡4:26에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말씀을 지적하면서“화를 내는 것도 죄가 되나요?”라고 질문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화를 내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를 내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기 때문이죠. 화를 내고 있을 때, 우리의 마음 속에 사랑이 있습니까? 인내와 온유가 있습니까? 성령의 열매는 화, 격노, 신경질과 같은 감정과 함께 맺힐 수 없습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이런 실험을 했답니다. 개를 묶어놓고 개를 마구 때려주었답니다. 4시간 동안을 계속 때렸답니다. 개는 바짝 독이 올랐습니다. 만약 그 개를 풀어 놓으면 누구든 죽일 듯이 결사적으로 덤벼들 정도로 약을 올렸습니다. 그때 주사기를 꽂아 그 순간 피를 빼보니 피 속에 ‘시안’이라는 독이 생겼답니다. 한 마리 개에서 나온 독은 보통 개 80마리를 죽일 양의 독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사람이 독이 오르면 개보다 시안이라는 독이 1.3배나 더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혈기를 부리고 미움을 품으면 몸에 독이 생겨 일찍 죽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말하기를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고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움을 십자가에서 극복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죄 없으신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눅 23:34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미움과 분노를 이기신 것처럼 우리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갈 때만이 우리속에서 나오는 미움과 분노를 이길 수 있습니다.
(3) 불안과 공포의 쓴물을 치료하시는 하나님
사람이 죄를 범하면 마음의 불안과 공포의 쓴물이 생기게 됩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 하자 두려움 마음이 생겨서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니 나무 뒤에 숨었다 했습니다.
오늘 날 과학문명이 발달해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에는 불안과 공포의 쓴물이 과거보다 더 많이 솟아오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과거보다 더 많은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예일대학의 ‘존 도널드’ 교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을 일곱 가지로 분석했습니다. 첫째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요, 이성에 대한 두려움이요, 자기 약점에 대한 두려움이요.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요. 잘못 생각할까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요. 말하는 것에 실수가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요. 홀로 사는 두려움입니다.
사실 우리들에게 그것뿐 이겠습니까? 경제적인 두려움, 관계의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수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얼마나 무서운지 다음을 읽어 보기바랍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으로 죽은 미국의 청년의 수가 30만 명인데, 그 아들과 남편을 전쟁터에 내보낸 후, 염려 불안 때문에 심장마비로 죽은 미국 시민은 백만 명이 넘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전쟁에 나가 죽은 군인 수보다 그들을 보내놓고 염려와 불안으로 심장마비로 죽은 가족이 세배 반이나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워싱톤 디씨에 가면, 링컨이 애용하던 성경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 속에 손때에 이겨져 눌린 손가락 자국이 있습니다. 여러 번 같은 장소를 손가락으로 눌러서 생긴 자국입니다. 그곳은 시편 34편 4절입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였습니다.
링컨은 전쟁과 관련된 모든 억누르는 두려움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치료받았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산 소망 때문에 어떤 절망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벧전 1:3-4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라고 말씀합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였던 ‘위르게 몰트만’ 박사는 ‘희망의 신학’을 말했던 분입니다. 그리 된 배경을 잠깐 소개 드리겠습니다.
2차 대전 때, 그가 17세 되던 해, 그는 독일군으로 징집되어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어 영국인 포로수용소에 갇혔습니다.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좌절과 모욕과 고통에서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자기의 고향 함부르크가 완전히 폭격으로 다 무너지고 자기 가족들이 폭격을 당해 다 죽었다는 말을 듣게 되어 완전히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멸시와 모욕을 당하며 살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는 목을 매어 자살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떤 목사가 성경책 한 권을 주었답니다. 그는 성경을 읽는 중에 신약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장면을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유대 땅에 와서 숱한 은혜를 베풀었건만, 그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인정하지 아니하고“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제자들은 다 도망쳐 버리고, 가장 외롭고 처절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장면을 보고 자기의 절망적인 상황과 동질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 예수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사망과 음부를 이기고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그 장면이 몰트만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가장 절망적인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보며‘ 아! 나에게도 부활이 있을 수가 있구나! 나의 가슴속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면 이 절망에서 부활이 일어나고, 다 파멸된 우리 독일이 다시 부활하고, 무너진 함부르크가 부활할 수가 있겠구나!’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망의 주님, 부활의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영국의 포로수용소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를 구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 후 몰트만의 삶은 광명한 빛으로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소망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십자가를 통해서 공급되는 주님을 바라보며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4) 육신과 영의 건강을 위한 운동을 생활화 합시다.
육신의 건강은 운동을 꾸준히 하여야 얻게 돕니다. 하루 밥 세끼를 잘 먹고 소화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운동을 생활화하여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포츠를 즐기고 각자 취미생활을 하는 것도 육체적 체력을 위하여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먹고 보약먹는다 하더라도 운동부족이면 육체적 건강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은 너무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일도 신앙생활도 내 몸이 건강하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신앙생활도 무조건 기도만한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말씀을 읽고 생각하고 적용하고 암송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감사표시이다. 찬양은 이땅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히 부를 것인데 한 주에 한곡씩이라도 외우며 부른다면 일년이면 적어도 오십여곡은 머릿속에 입력시킬 수 있다. 이러한 말씀암송과 찬양외우기는 뇌의 운동을 촉진하는 것이므로 실제로 치매 예방에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2019년에는 이러한 영적 자산을 소유하는 한해가 되기를 바라면서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어떤 쓴 물들도 단물로 바꾸어놓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암송하면서 그리고 영혼에서 나오는 찬송을 통해 우리 속에 있는 죄악의 쓴물, 미움과 분노의 쓴물, 불안과 공포의 쓴물, 좌절과 절망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줄 원동력으로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주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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