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1 병든 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말씀 2019. 2. 3. 12:13
병든 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마9:9-13, 막2:17, 눅5:27-32
아담의 후손인 우리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에덴에서 추방당한 죄인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므로 본래부터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3:10은 말씀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단정지었습니다. 여기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이 있겠는가요? 결국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죄를 용서해 주실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인간 스스로는 의인이 될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족 은혜로 용서받은 의인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인생살아가면서 이런 죄와 의에 대하여 한 두 번씩은 생각하면서도 늘 우리 삶속에 일어나는 죄로 인하여 우리는 영적으로는 건강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늘 영적건강보다는 육적으로 건강하게 살기를 소원하고 있다. 육신의 건강에는 늘 관심들이 많다. 그래서 의사가 사람들의 건강상태를 점검할 때 하는 말들중에는 다음과 같다.
당신은 건강하십니까? 팔 다리에 이상이 없고 튼튼하십니까?
오래 걸어도 거뜬합니까? 무거운 짐을 잘 들 수 있습니까?
소화는 잘 되시고요? 부드러운 음식도 단단한 음식도 잘 드실 수 있나요? 혈당 조절도 잘되고 혈압도 정상입니까? 숨 쉬는데 어려움은 없나요? 갑자기 추워지거나 건조해도 감기 몸살에 걸리지는 않나요?
뒷목이 아프거나 가슴이 울렁거리지는 않나요?
상처가 나도 잘 아물고 혈액도 제대로 멈춥니까?
여전히 에너지가 넘치고 활기찹니까?
당신은 여전히 밥맛이 좋고 잘 드시나요?
건강검진에도 이상없고 스스로 건강에 자신이 있나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당신에게 의사는 필요 없겠습니다.
만일 이렇게 건강하기만 하다면 의사는 없어도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장담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건강하다 해도 내일은 어찌 될지 모르니까요. 아니 지금까지 건강하다 하더라도 병들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당신이 모르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고요. 그러니 장담은 금물입니다. 더구나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변하는 당신의 몸은 어쩌시렵니까? 지금 아무리 건강하다고 당신에게 오는 세월은 어쩔 수 없지요. 이런 위로의 말들이 나에 대해 누군가 염려 해주는 말이라고 생각해 보자.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유익한 말씀중 하나는 방금 위에서 말했듯이 건강에 관한 말씀인데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깨닫는 은혜가 있습니다. (마9:12, 막2:17, 눅5:31)에 나오는 말씀인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 든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주님을 비난하던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당신들은 어찌하여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냐고 물었을 때 주님이 답변하신 말씀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의원이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려 왔노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하늘 보좌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건강한 백성 되게 하시려고 오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병들었으면서도 스스로 생각하기를 건강하다고 하는 착각에서 벗어나 병든 심령임을 인정하고 즉 죄인임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나오면 건강한 인생과 함께 천국의 삶으로 옮겨간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것 같지만 병들었고 기쁜 것 같지만 슬프며 쾌활한 것 같으나 우울한 인생을 그 깊은 고민에서 건지시려 오신 예수님을 맞이하면 더할 나위없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삶의 고민이 깊어지면 사는 게 재미없습니다. 인생들의 고민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면 인생이 달라질 겁니다. 그런데 그런 고민을 내려놓는 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피를 토하며 외칩니다.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1:5-6) 인생의 머리부터 발바닥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인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든 자들보다는 건강한 자들을 더 좋아하고 죄인들보다는 의인들을 더 좋아하고 마음이 상한 자들 보다는 마음이 편한 자들을 더 좋아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정 반대로 병든 자들에게 쓸데 있는 분으로, 의인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시는 분으로, 그리고 마음이 상한 자들을 부르시는 분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근심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다음 저들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마지막 순간에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에게 분노와 저주대신 긍휼을 베푸시면서 구원의 손길을 펴셨고 평생 죄만 짓던 우편 강도 에게도 분노와 저주대신 긍휼을 베푸시면서 구원의 손길을 펴신 너무너무 이상하신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1. 죄인을 찾아 오시 예수님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과 죄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함께 치료와 죄 사함의 손길을 펴신 이야기들을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산상 설교를 하시고 내려오시면서 병든 자들과 죄인들과 몸과 마음이 상한 자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함께 치료와 죄 사함의 손길을 펴셨다고 마태복음 8-9장에 자세하게 기록을 했습니다.
마8:1에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 진지라”(마 8:1-3). 그 다음에는 죄인인 백부장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칭찬의 손길을 펴셨고 중풍병에 걸려있던 백부장의 하인에게는 치료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마 8:10,13).
그 다음에는 열병에 걸려있던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만지시면서 열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 들더라”(마 8:14,15).
그 다음에는 마귀들린 자들과 병든 자들을 모두 다 고쳐주셨습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마귀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마귀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마 8:16).
그 다음에는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마 9:2,6).
그 다음에는 자타가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일어나 그분을 따르니라”(눅5:27-28 마 9:9).
예수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면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마태복음 9장은 마무리를 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5).
위의 말씀으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건강한 자들보다는 병든 자들을, 의인들보다는 죄인들을, 마음이 편한 자들 보다는 마음이 상한 자들을 부르셔서 주님의 귀중한 일꾼들로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실례로 사도 바울은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죽인 사람들 중의 하나이었는데 그를 통해 성경을 기록하도록 가장 귀하게 사용하신 사도였습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 이기풍 목사님은 쌤 마펫 선교사를 돌로 쳐서 쓰러뜨렸던 평양의 깡패 두목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은 불교와 선도의 도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밖에 없는 저들을 때려 잡는 대신 “사울아 사울아” 라고 부르셨고 “이기풍아 이기풍아” 라고 부르셨고 “길선주야 길선주야” 라고 부르셨습니다. 지금도 우리 죄인들을 부르십니다. “아무게야” “아무게야야” 라고 부르시고 또 부르신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주님의 은혜는 건강한 사람들보다는 병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더욱 진하고 풍성하게 임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가 그랬고, 패니 크로스비의 경우가 그랬고, 송명희 시인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질고에서 벗어난 인생은 없습니다. 지금은 건강할지라도 앞으로 계속 건강할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내가 건강할지라도 가족이나 이웃들 가운데 반드시 연약한 자들이 있습니다. 설교하는 저도 마찬가집니다. 제가 지금은 건강한 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저도 20대에는 무좀으로 2년, 30대에는 치질로 2년, 40대에는 복통으로 3년, 떨국질로 10개월동안이나 고통을 겪었고 둘째 아들은 교통사고로 사망하였고 셋째아들은 경귀로 인하여 3개월동안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때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는 집에서 잠잘때가 거의 없었고 병원복도 의자에서나 보호자 대기실에서 잔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나의 경우만 그런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가정이나 집안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서로의 형편을 들어보면 모두 오십보백보입니다. 우리 모두는 질고를 껴안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2. 고난이 주는 유익
우리가 질병이나 갑자기 일어나는 사고에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어려움을 많이 겪은 사람들은 대부분 겸손하게 됩니다.
고난의 풍파가 그런 인생을 만든 것입니다. 고난을 안고 있으면 예수님께 나아가 기도를 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사람이 됩니다. 나도 아들문제로 10일간의 금식기도도 했고 그 이후에는 좀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며칠간 금식기도는 단골메뉴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보면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정말로 우리 주 예수님께서 나의 구주요 주님이심을 더욱 확실하게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 아닌가요? 뿐만아니라 인생 질고를 겪고 있는 가족들이나 이웃들의 아픔을 잘 이해하게 됩니다. 또 질고 중에 있는 그들이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하도록 기도하고 격려하고 섬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고 사는 질고가 꼭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일 수 있습니다. 질고를 안고 예수님께로 나아가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짊어지시든지, 그 질고를 가볍게 하시든지, 아예 질고를 제거하시든지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유익이 된다고 시편기자도 말했듯이 질고가 보통 은혜가 아니기에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우리들이 어려운 일을 만나면 예수님께 겸손히 나아가 간청했을 때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육체를 가진 사람이시지만 동시에 마귀들을 쫓아내시고 불치병도 고치신 하나님이십니다. 즉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연약한 우리들을 치유하셔서 건강하게 살도록 능히 도우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기자인 마태가 마 8:17절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여호와의 종 즉 메시아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신 구주시요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천국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이 믿고 의지해야 할 구주시요 주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이 왔을 때 병을 고쳐주셨고 죄인들을 부르시고 저들의 죄를 사해주셨고 상처 받은 사람들의 상처를 싸매어주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병 중에 있는 자들에게 위로와 사랑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베푸시고, 또 죄 때문에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더 넘치는 은혜를 베푸시고, 마음에 상함을 입고 사는 사람들에게 평안의 은혜를 더욱 더 풍성하게 베푸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넓고 깊고 오묘하다고 생각합니다. 병든 자들과 죄인들과 상처받은 자들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깊이 만나는 회개와 기도와 예배에 전력을 다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야 합니다.
(1) 세리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
예수님이 부르신 세리 마태를 보면서 당시 세리들은 자기민족 사람들의 집이나 그들의 사업에 가서 세금을 걷었다. 그리고 세금을 떼어갈 때마다 자신을 위하여 항상 귀한 것 한 가지씩을 가져갔다. 한편 세금을 내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자기의 밑에 있는 사람들을 시켜서 그들이 하는 일을 고난에 빠뜨려 핍박했다. 그들은 정해진 만큼을 받지 않고 더 많이 받아서 챙겼으며 또한 로마로부터도 세금을 거두는 그 일을 한 대가를 받았다. 세금을 징수하는 자들은 단순히 로마의 압제의 도구가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사람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치부하는 착취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매국노나 죄인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나라를 위해 올바른 결정을 했으며 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양심이 마비되어 있어서 자신들의 하는 일에 대해 모든 사람이 비난해도 자신들만 모르고 있다고 하니 제정신이 있는 세리라면 얼마나 괴로운 일이었던가?
어느 날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았다. 자기를 향하여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그는 매우 놀랐다.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주님을 따랐다. 마태의 마음에는 주저함이나 의심도 없었고 이익이 남는 사업이 가난과 곤란으로 바뀌어 지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예수님과 함께 있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연합할 수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이전에 부름을 받은 제자들 역시 그러하였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명령하시자 즉시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렸듯이 말이다. 이 제자 중의 어떤 이들에게는 생계를 그들에게 의존하는 가족들이 있었으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머뭇거리거나 내가 어떻게 가족을 부양해야 할까 하고 묻지 않았다. 그들은 부르심에 순종하였다. 아마도 세리 마태도 이렇게 자기의 육적인 욕심을 위하여 늘 죄 가운데서 빠져 생활하다 예수께서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소문을 들었으니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오셔서 나를 따르라고 하였을 때 얼마나 놀라웠을까 그래서 마태는 주님께 죄의 용서함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거하는 처소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갔을(눅5:29) 뿐만 아니라 자기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자신과 가까이 지내던 다른 세리들도 불렀으니 그들도 자신과 같은 죄인들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뒤를 밟으며 말과 행위를 기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그 자리에 함께 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죄인이나 세리와 함께 하지 않는 자신들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비록 자기의 육신의 욕심과 명예를 위하여 백성들의 영혼을 인도하고 있었으나 오히려 자신을 의롭게 여겼다. 반면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지금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있으니 율법을 어긴 죄인들이다. 즉 그리스도를 더러운 자라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마태의 초청을 받아 그 자리에 온 자들뿐만 아니라 자신을 해하려고 그곳에 함께하고 있는 종교지도자들도 기꺼히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말씀을 전하기 원하셨다. 바로 복음서 (마9:12, 막2:17, 눅5:31)에 나오는 말씀인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 든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다는 주님의 말씀이다.
(2) 병든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다
의사는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의사가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 모든 병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병에 걸려있음을 모르는 사람이나 알면서도 끝까지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치 않다. 또한 자신이 병에 걸려있으나 의사도 고치지 못한다고 생각하거나 자신 스스로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에게도 필요 없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사람과 세상일로 바쁜 사람도 필요 없다. 오직 그들 가운데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병에서 낫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만 필요하다.
병을 앓고 있는 사람도 세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내가 무슨 병이 들었다는 것을 알고 의원을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눈이 아프니 안과로 가고, 이빨이 아프니 치과로 갑니다. 소화기 계통에 문제가 있어 배가 아픈 사람은 내과로 가고 부인병이 있는 사람은 산부인과로 갑니다. 여기에는 상당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내가 내 병을 알아서 치유함을 받으려고 해당 병원을 찾아가고 담당 의사를 바로 찾아가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병의 치료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경제 문제나 다른 조건들은 무시합니다.
일단 병을 고치고 보자는 식의 저돌적 성향이 있습니다. 일을 저질러 놓고 수습해 나가는 형입니다. 만사를 능동적으로 생각하는 이런 사람은 의사의 진단을 받을 때 자기 병의 증상과 원인과 치료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둘째로, 아픈 것은 분명히 맞지만 의사를 찾아갈 용기가 없습니다.
먼저 겁이 나고, 의심이 가고, 억지를 부려 보기도 하고, 될 대로 되어라 하는 식으로 무작정 참습니다. 어떤 해결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속수무책으로 아픔을 참고 병을 키웁니다.
물론 경제적 이유도 있고 신체적 결함이나 다른 조건이 있을 수 있지만 대개 이런 사람들은 병을 치료하기보다는 앓느니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운명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누군가 자신을 인도하여 병원에 데리고 가면 마지못해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셋째로, 자기가 아픈 것조차 모르는 사람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병색이 깊어 보이는데 정작 자신은 병이 없다고 판단하고 고집을 피웁니다. 아픈 줄 모르는 병은 그 어떤 병보다도 치명적이라고 합니다. 마치 암에 걸린 사람처럼 하루하루 죽어가지만 정작 환자 자신은 자기가 얼마나 무서운 병에 걸린 줄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자기는 건강하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대개 정신병 환자들이 그렇습니다. 정신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들의 말을 빌리면 정신병 환자들은 하나같이 자기는 병자가 아니라고 우긴답니다. 자기 병을 시인하는 사람은 고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는 똑똑하다. 나는 온전하다. 그런데 저 사람들이 왜 나를 괴롭히는가.’ 바로 이러한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정신 병원에서 어느 환자가 ‘나는 나플레옹 황제다.’ 하고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닙니다. 옆에 있는 환자가 ‘뭐 네가 나플레옹이라고, 웃긴다. 진짜 나플레옹 황제는 나다.’ 하면서 같이 떠들고 다닙니다. 그때 다른 환자 하나가 나서서 하는 말이 ‘내가 언제 너희들을 나플레옹으로 임명했느냐.’ 그러더랍니다.
정신병 환자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하나같이 안하무인입니다. 자기만 옳고 자기만 똑똑합니다. 모두 자기가 하는 말에 ‘내가’ 라는 말이 들어갑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아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갈등이 많습니다. 자기를 언제나 높은 곳에 두려고 하기 때문에 남이 나를 낮추면 화가 나고 그 화를 스스로 풀 수가 없어 마음에 병이 듭니다. 남이 나를 높여 주면 기분이 좋다가도 반대로 험담을 들으면 마음이 상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영적인 의원으로서 자신의 안에 있는 그 욕심과 교만으로 인하여 죄를 지었으며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짓고 있으며 또한 내일도 동일하게 그 죄에 묶여 영원한 사망으로 들어가고 있는 자들 가운데 자신을 의롭고 깨끗하게 여기는 자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셨다. 행여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부르신다 하여도 그들의 마음과 인격이 영적인 의원인 예수님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 영적인 병자들 가운데 오직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용서받기 원하는 죄인을 회개시키려고 오셨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마태와 함께 있는 자들과 또한 그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이제는 돌이키기를 구하셨다. 그러나 마태를 제외한 다른 세리들은 그 자리들이 너무 좋았으니 돌이켜 그리스도를 좇는 자가 없었고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 역시 그들의 위치가 그들을 돌이키지 않게 했다. 그리하여 오로지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마태만 그리스도를 좇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세리와 종교지도자들을 부르셨으나 그들이 거부했던 것은 이 세상을 자신의 영원한 생명보다 더 사랑하여 자신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영원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어 한 가지 말씀을 더 알려주셨으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2-13)” 그 말씀의 뜻은 이것이다.
“너희는 그 성전의 회당에 와서 양을 잡고 소를 잡고 비둘기를 잡고 온갖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는 도다. 하지만 제사를 드린 후에 그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자기의 그 죄악된 삶을 사는 도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을 하는 것보다 그 죄악 한 가지를 이기고 거룩하게 되는 그런 자를 아버지께서는 더 원하시는 도다.” 즉 주님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말씀을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한다면 이렇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는 이 말씀은 사실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구약 호세아서 6장 6절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여호와로 명명되어 나타난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이미 오래 전 선지자들에게 들려주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되풀이 하셨습니다. 긍휼이라고 번역된 헬라에 단어 ‘엘로스’라고 하는 단어는 정확하게 히브리어 ‘헷세드’의 번역입니다.
‘헷세드’는 그 사람의 좋은 점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라 가치 없고, 비천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이 바로 ‘헷세드’라는 사랑입니다. 이런 놀라운 사랑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들에게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셨기에 예수님은 이 사랑의 화신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 바리새인들은 제사가 이 사랑보다 훨씬 더 큰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사를 하나님 앞에 향기롭게 올라가게 만드는 그것이 ‘헷세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힘입어 사람들을 그 ‘헷세드’로 사랑하는 것이 제사를 주신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를 이 ‘헷세드’보다도 더 높게 생각하는 것은 목적과 수단을 전도하는 것이요, 본말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예배와 종교 생활 속에 깃들여야할 가장 근본적인 사랑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부유하던 마태에게나 가난하던 안드레와 베드로에게 똑같은 시험이 이르렀으며, 똑같은 헌신이 각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물에 고기가 가득 차고 옛 생애에 대한 충동이 가장 강하던 성공의 순간에 예수께서는 바다에서 일하던 제자들에게 복음 사업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라고 요구하셨다. 세금 착취로 부를 쌓아가는 세리에게도 주를 따르라는 하였다. 이와 같이 각 사람이 세상의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그리스도와 친분을 맺고자 하는 욕망 중에 어느 쪽이 더 강한지에 대해 시험을 받고 있다. 원칙은 항상 가혹하다.
하나님의 사업에 전심을 다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모든 것을 해로 여기지 않으면 그 누구도 그분의 사업에 성공할 수 없다. 전적으로 바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으며 그분의 동역자가 되기는 더더욱 어렵다.
사람들이 위대한 구원을 인식할 때에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나타난 자아 희생은 그들의 생애에서도 나타날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어느 길로 인도하시든지 즐겨 따라갈 것이다.
마태를 불러 주님의 제자 중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은 큰 분노를 일으켰다. 한 종교 교사가 직접 수종하는 자로서 세리를 택한다는 것은 종교적·사회적 및 민족적 관습에 위반되는 행위였다.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의 편견에 호소함으로써 예수에 대해 반대하기를 원하였다. 하지만 마태는 제자가 된 기쁨에 이전의 친구들을 예수께 데려오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친척과 친구들을 함께 불렀다. 세리들만이 포함된 것이 아니라 나쁜 평판을 받고, 그들의 이웃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던 많은 다른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잔치는 예수님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배설되었으며 그분께서는 이 호의를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이 일이 바리새파를 성나게 하리라는 것과 또한 백성들 눈에 당신의 명성을 더럽히는 일이 될 것을 잘 아셨다. 그러나 어떤 정치적 문제도 그분의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없었다. 그분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생수를 갈급 하는 심령이었다.
3. 죄인들과 함께 잡수심
세리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원성을 많이 샀던 그러한 직업이었습니다. 로마가 식민지를 통치할 때 가장 어려웠던 일은 세금을 징수하는 일과 종교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 원칙, 즉 정해진 세금을 내고 황제를 숭배하는 로마의 정책에 반기를 들지 않는 한 자유롭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일들을 규제할 때에 그들은 유대인들 중에서 로마 편에 서는 사람들을 이용해서 이 일들을 처리하였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 중에서 세리라는 직업은 당시 사회에서 얼마나 나쁜 인상을 주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세리는 돈을 거두면서 이들이 거기에서 얼마를 남겨서 자신들이 갖든지 간에 로마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세금 제도의 불합리성 때문에 유대인들은 마땅히 내야할 세금 이상의 돈을 늑탈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비교적 여유 있는 생활을 하였지만, 동족들로부터는 정치적으로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이고, 종교적으로는 동족들을 수탈해 가는 그런 아주 더러운 죄인들이라고 낙인이 찍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에게 몸을 파는 창녀와 똑같은 수준의 죄인들로 이 세리들을 취급하고 대하였던 것입니다.
자, 이천 년의 세월의 간격을 뛰어 넘어서 여러분들이 한번 이 세리의 처지가 되었다고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동족의 피를 빨아먹든, 수탈을 하든, 이제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끼니가 없던 때에는 먹고 사는 일 때문에 무엇이든지 희생할 수 있지만, 이제 먹고 살만해지면 사람이란 그 마음에 사람이 물과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비록 돈은 가지고 있고, 여유로운 생활은 하지만, 동족들의 가슴에 원한처럼 맺힌 이름이 되었고,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상대해주지 않아 성전에도 들어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창녀 취급을 할 정도로 비천한 사람들이 되어버렸을 때 그 인간상실감이나 외로움은 너무나 비참했을 때 예수님은 바로 이런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사는 세리 마태를 찾아오셔서 부르신 것입니다.
사람취급을 받아보지 못한 마태로서는 예수라는 랍비가 자기를 부르시니 그의 마음은 너무 기뻤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가 자기의 집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식사를 하는데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이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리가 따로 있고 죄인이 따로 있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동격을 나타내는 접속사로 보아서 세리는 곧 죄인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한 해석일 것입니다.
기껏해야 만나는 사람들이 같은 처지로 민족에게 따돌림을 당한 세리들끼리만 만나서 함께 교제를 나눌 뿐 그들은 동족들로부터 완전히 따돌림을 당하고 마음이 허허로운 가운데 살아가는 사실상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는 그 사람에게 랍비라고 불리워지는 분이 다가오셨고,
그에게 감화를 끼쳐주셨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셨다는 것을 알알을 때
예수님께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없지만 병든자에게는 필요하다고 하였듯이 그는 예수님을 만나 즉시로 영혼의 병을 치료받았다. 그래서 마태의 마음이 활짝 열리게 되었고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집에 초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이제 함께 식탁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너희 선생은 어째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하는 비난이었습니다.
이 비난을 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병든 자를 찾아오신 분이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두드러진 사역 가운데 하나는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시는 신유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의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치시는 것 보다도 더 본질적인 사역의 국면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으로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육신적 질병의 치료사역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우리의 영혼을 고치시기 위해서 오신 영적인 의사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육신의 질병을 통해 영혼의 질병의 심각성을 깨닫고 육신의 질병을 고쳐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경험하면서 영혼도 고치실 수 있는 그분이기에 우리의 육신 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그분을 의지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병든 자를 고치시는 섬김을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질병은 어느 정도 우리의 육체에 장애가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몸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육신으로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마음을 먹어도 그 마음먹은 대로 육신이 따라주지를 않고, 그 마음이 육신에 전달되지 않습니다. 영혼도 이런 질병 상태에 있을 때에 마음이 선한 것을 명령해도 몸은 악한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장애의 상태는 우리의 삶 그 자체를 하나님 앞에 잘못된 삶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영혼을 구원하고자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무리 새로운 삶을 살고자 결심을 해도 달력 한 장 넘겼다고 바뀌어진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궤적은 우리 자신의 내면이 고쳐져 아름다운 영혼을 갖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질병은 종종 의사들이 크게 고쳐주기도 하지만 영혼의 질병은 의사들이 고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고치실 수 있는 질병입니다. 육신은 길어야 8-90년 동안 우리와 함께 하기에 길게 보면 일회용 소모품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니 육신과 영혼을 공정히 사랑해야 합니다. 그럼으로 그 몸을 입을만하게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건강하고 깨끗하게 고쳐지기 위해선 바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흐드러지게 꽃핀 들판에 피어난 한 송이의 꽃은 우리의 눈길을 끌지 못하고 새하얀 눈밭에 피어난 꽃 한 송이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고,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는 한줄기의 빛은 대낮에 충천하는 화염보다도 우리의 눈길을 끌듯이 주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 세상 사람들이 소탕하기를 바랬던 이 더러운 인간들에게 찾아오셔서 주님의 사랑으로 교통하셨고 그들에게 참으로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인생의 벼랑 끝에 서고, 친구도 없고 돌아보는 이 없이 버려진 사람들, 기껏해야 자기 동아리들 끼리나 모여서 밥이나 먹는 인간쓰레기와 같은 사람들 가운데 완전한 하나님이시오 사람이신 그분이 오셔서 그들의 친구인 것처럼 앉아주셨습니다.
그들의 죄를 인정해서도 아니고 그들의 실패한 삶에 동의해서도 아닙니다. 그들의 죄는 미웠고, 그들의 실패한 삶은 부끄러운 것이었지만, 실패한 그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이었기에 아버지의 사랑으로 주님은 세리들 그 모임 한가운데 임재하셨던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신앙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죄인일수록, 굽은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일수록, 다시 놓아줘도 벼랑 끝에서 춤출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더욱 필요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소망이 끊어지고, 사람들이 내 곁에 없다 할 그때에 주님 홀로 우리들을 만나기 위해서 그 벼랑 끝에서 기다리고 부르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감격적으로 체험하고 일평생 그 사랑에 빚진 자로 자처하였던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이 아니라 병든 사람들이었고, 이 세상에서 존경을 받던 사람이 아니라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온 마음을 다해서 가치 없는 죄인인 우리 가운데 오셔서 사랑해주시고 함께 해주시는 주님과 늘 함께 살아가는 은혜가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4.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어차피 우리의 인생의 길은 우리가 영원히 행복하게 걸어갈 수 있는 길은 아닙니다. 죄 많은 세상에 주님만이 소망이시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순간순간 이 세상이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질병과 궁핍, 환난과 핍박, 고난과 위기, 굶주림과 병듦, 그리고 늙음과 아픔,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언제나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수록 죄인들을 부르기 위해서, 죄인들을 찾아오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주님이 영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자의 고난을 당하게 하시면서라도 우리같이 소망 없는 병든 죄인들을 하나님께 다시 부르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으니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의 이 절대적인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긍휼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긍휼을 입어서 아무 가치없는 죄인이 넘치는 긍휼을 입었은즉, 예전에 하나님 앞에 섰던 우리처럼 불쌍한 영혼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고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그리고 주님이 주신 모든 자원의 최종적인 소비처가 아니라 그것을 유통시키는 자들이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살아가야 될줄로 믿습니다.
5. 맺는 말
많은 사람들이 미래의 기독교는 점점 전망이 어둡다고 말합니다.
그럴 것입니다. 아마 교회는 점점 줄어들 것이고, 주님을 믿겠다고 희망하는 사람들의 수효도 점점 감소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확신합니다. 매일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그 수많은 추문과 도덕적으로 열악한 수준들은 더더욱 현대인들의 마음을 돌리게 만들면서 사람들이 교회에 나올 필요성은 점점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만 기독교의 위대한 힘은 영생에 대한 갈망과 윤리의 힘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하나님 사랑 안에서 결합되어 있을 때, 교회는 한 시대를 향해 위대한 힘을 갖게 되는 것인데, 교회는 무지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로 가득차고 흑암의 무지와 어두움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윤리의 힘은 많이 쇠약해져 버렸습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생각합니다.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다녀야 할 필요를 점점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방황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주님을 믿어야 할 필요는 더욱 증가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점점 다닐 필요가 없는 집단이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는 그리스도인을 점점 더 필요로 하는 목마른 시대가 될터인데, 어떻게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베풀어 주신 그 큰 사랑 때문에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려 주님의 사랑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처럼 우리들도 주님의 그 사랑을 보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낙인찍히고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들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 버림받은 자들 중에 몇이라도 구하시려고 그들을 위해 자기의 몸을 깨뜨리시고 주님의 거룩한 보혈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집 나간 자들, 주님을 멀리 떠나 아무 희망이 없이 버려져 방황하는 사람들을 오늘도 부르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버려도 변함없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하시는 한 분이 있으니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주님의 이 사랑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시니 공허하게 살았던 날들에 못을 박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과 함께 이 세상의 파도를 이기며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2-3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의 염색체는 24개 뿐이다. (0) 2019.02.17 19-2-2 천국의 실상 (0) 2019.02.10 19-1-4 오병이어의 기적 (0) 2019.01.27 19-1-3 여호와닛시와 여호와삼마 (0) 2019.01.20 19-1-2 여호와 이레 (0) 2019.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