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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11-2 모든 인생을 달아 보시는 하나님
    말씀 2018. 11. 11. 11:52

    인생을 달아보시는 하나님 (5:17- 28)

    건강검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몸무게이다. 키는 성장이 멈추면 더 이상 변화가 없지만 체중은 나이를 막론하고 늘 변할 수 있다. 만약 체중이 갑자기 증가하였거나 감소하였다면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증거이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 세계에서 가장 체중이 많이 나갔던 사람은 미국 워싱턴에 살았던 존 브로미녹이란 사람으로 635킬로그램이나 나갔다고 한다. 그는 살을 가장 많이 뺀 기록도 가지고 있는데 216킬로그램이나 줄인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체중이 가장 작았던 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살리'라는 23세의 알제리 청년이었다고 하는데 몸무게가 5Kg이었고 키는 겨우 55cm였던 왜소한 체격이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체중을 달아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체중의 변화는 사람들의 건강을 측정하는 지침이 된다. 그런데 몸무게만 측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지혜서 탈무드는 "하나님은 부자가 인색한지 가난한 자가 불평하지 않는지 저울질 하신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부자도 가난한 자도 달아보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의 측정을 외모와 성적으로 측정하고 있다. 영국 시골에 얼굴도 못 생기고 공부도 못하는 고등학생이 있었습니다.

    전교생 중에서 성적이 맨 뒤에서 세 번째였습니다. 그의 학적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이 학생은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어렵고 사회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훗날 영국의 존경받는 인물 윈스턴 처칠이 되었습니다. 윈스턴 처칠하면 신장은 160cm 이지만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영국의 총리를 지냈으며 학생시절부터 문학에 소질을 보여온 처칠은 195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윈스턴처칠은 어려서는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자신의 장점을 계발하여 훗날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을 각자에게 맡겼는데 사람들로부터 나쁜 평판을 받았지만 훗날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도 있고 처음엔 좋은 평판을 받았는데 나중에는 나쁜 평판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평판을 받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며 자신이 할 나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사사기에 입다라는 사람은 그의 아버지 길르앗이 창녀에게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밖에서 아들을 낳아 가지고 데려 왔는데 본처 자식들에게 많은 구박을 받으며 성장하였습니다. 결국 입다는 본처의 형제들로부터 쫒겨나서 이방 지역 돕 땅에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갔갔으며 후에는 그 지역에서 보스가 되어 기반을 잡고 살아갔습니다. 한편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로 쳐들어와 전쟁이 났습니다. 누구하나 앞장서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울 장수가 없었습니다. 나라가 위급해지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찾아와서 나라가 풍전등화에 처하였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합니다. 입다가 처음엔 거부하였지만 길르앗 장로들이 이번에 전쟁을 승리하면 입다에게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입다는 승낙하였고 맨 앞장서서 암몬과의 전투를 진두지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입다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번 전쟁에 승리하도록 도와 주십시오. 이번 전쟁에 승리하면 집으로 돌아갈 때 제일 먼저 달려나와 저에게 인사하는 그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나이다"(11:30-31)라고 서원까지 합니다.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주께서 그들을 그 손에 붙이시매 아로엘에서부터 미니스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크게 살륙하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였더라"(11:32-33)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입다를 제일 먼저 맞이한 사람은 무남독녀 입다의 딸이었습니다. 입다는 옷을 찢으며 슬퍼하였고 그 마음이 참담하였지만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지 않고 결국 약속을 지켰습니다, 두 달 후에 딸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입다는 자신에게 큰 손해가 와도 그리고 엄청난 슬픔이 와도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지키는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행위가 종교적이냐? 윤리적이냐를 떠나 진짜 딸을 죽여 바쳐도 되느냐? 등등 많은 의견 등이 있으나 성경이 우리들에게 제시하는 교훈은 약속을 지키는 신실한 입다의 신앙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행동을 달아보십니다. 하나님의 저울추는 정확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달아보실 때 주님이 원하시는 만큼의 무게가 나가야 합니다. 부족하면 안됩니다. 오늘은 "인생을 달아보시는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하나님은 사람의 말(언어)을 달아보십니다(11:35)

    입다는 자기 딸에게 말하기를 "내가 주를 향해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 한 마디도 다 듣고 계시며 말한대로 행하였는가 저울에 달아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한 말도 더러운 말도 불순종의 말도 불평의 말도 하지 말고 비난하는 말도 하지 말고 무엇보다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12:36-37)"오직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들이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그것에 대하여 회계보고를 하리라 네 말들로 네가 의롭게 되며 네 말들로 네가 정죄 받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무슨말이냐 하면 사람은 말을 할 때는 긍정적인 말을 하느냐 부정적인 말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동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말이 행동이 되고 그 행동은 최후에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 최초로 인쇄소를 설립한 사람이 스테판 데이라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따서 데이라는 인쇄소를 세웠는데 이 인쇄소가 훗날 하버드대학교 출판사의 전신이 됩니다. 그는 미국 건국에 많은 공을 세웠고 특히 성경과 찬송가를 보급하는데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그런데 스테판 데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마디 말을 하기 전에 세 가지를 생각하고 말하라 "첫째 자신이 하는 말이 진실인가 둘째 꼭 필요한 말인가 셋째 모두에게 유익한 말인가?" 말로써 실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 때문에 낭패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생각 없이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가정도 교회도 직장도 사회도 국가도 어지럽고 문제가 발생합니다. 대통령이 생각 없이 함부로 말하는 바람에 국민들의 마음이 불안하고 나라가 한시도 잠잠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공적인 삶을 방해하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 "이런 것도 못하니 너는 실패자야"라는 말이 있으며 둘째 "이런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셋째 "상황이 내게 협조를 안 해준다"고 말하는 사람은 모든 문제를 자신에게 찾지 않고 남에게 돌리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도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정적인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도소에서 오랫동안 선교를 해온 분이 이런 통계를 내놓았습니다. 교도소에 온 사람들 중에 어린 시절 집에서 부모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어떤 말인가를 조사하였더니 "넌 교도소 가서 살 놈이다" "넌 하는 짓이 콩밥 먹을 놈이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운명이 부모님의 아무 생각없이 하는 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림동의 한 슈퍼 앞에서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던 최 아무개 씨가 자기 친구를 보고 "너는 유영철이를 닮았어"라는 말에 격분한 그는 병을 깨어 최씨의 뒷덜미를 찔러 중상을 입혔습니다. 친구간에도 좋은 말을 써야 합니다.

    러시아에서 장수학을 연구하는 그리아닌 박사의 조사에 의하면 단명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는데 남을 헐뜯기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기 좋아하는 분이 있습니까? 자신의 생명을 단축한다는 것임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는 리더로서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좋은 관계를 만드는 세 가지 c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 비판(criticize) 둘째 비난(condemn)셋째 불평(complain)이라고 하였습니다. 남을 비판하지 말고 비난하지 말고 불평하지 않으면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업가로서 성공하고 싶습니까? 비판하지 말고 비난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기 바랍니다.

    성공학자 마폴레옹 힐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요인이 있는데 "성공한 사람은 성공한 사람을 보면 칭찬하지만 실패한 사람은 성공한 사람을 보면 비난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크게 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잘 되거나 성공자를 보면 "!대단하다 훌륭하다 본받아야 한다. 감동적이다"하며 칭찬하는데 실패한 사람들을 보면 성공한 사람을 칭찬하지 않고 오히려 비난합니다. "재수가 좋았다느니, 그 사람의 힘이 아니라 누가 도와 줘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거나, "제법인데", 하며 폄하하거나, "어쩌다 맞아 떨어졌지",하거나 "미꾸라지가 용되었네"하며 상대방을 깍아 내리려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공할 확률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속히 생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창조적이며 긍정적인 말로 바꿔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달아보십니다 (24:11-12)

    "11 네가 만일 죽음으로 끌려가는 자들과 죽임당할 자들을 구출하려 하지 아니하고 12 말하기를 보라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찌라도 마음을 살피시는(저울질하시는) 이가 그것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겠느냐 또 네 혼을 지키시는 이가 그것을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분께서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지 아니하시겠느냐?"고 했습니다.

    (16:2)"사람의 모든 길이 그의 눈에는 깨끗하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주께서는 (심령) 영들을 달아보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심령을 감찰하신다는 말은 달아보신다는 뜻입니다.

    15세기 네델란드의 신학자 토마스 아킴피스는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 하나 하나를 평가하신다"고 하였습니다.

    1115일 수능 후에 대학들은 정시모집에 들어갑니다. 대학에서 학생을 뽑을 때 생활기록부에 나타난 그 학생의 성적을 평가해서 성적이 좋은 학생을 뽑고 그 다음엔 면접을 합니다. 그 학교 수준에 맞는 학생을 뽑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천국에 들어와 영원히 살만한 자격을 가진 자를 뽑는데 그 마음을 달아보신 후에 뽑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달아보시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1) 정직한 마음입니다.

    욥기 1:1은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6:18에는 주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주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사 네 대적을 몰수히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하신 아름다운 땅을 들어가서 얻으리니 주의 말씀과 같으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늘 말씀하시는 것은 정직히 살라는 것입니다. 정직과 진실은 인간의 기본 덕목이며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정직의 반대인 거짓은 마귀의 속성입니다. 거짓 말, 거짓 행동, 거짓 생활 모두 다 버려야 합니다.

     

    (2) 의인의 마음입니다.

    노아 홍수 때에 온 세상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 하나님은 의인을 골라 방주를 만들게 하였고 그 무서운 심판을 피하게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노아입니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 하였으며" (6: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가정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복을 받았습니다."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1:19)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들 마음이 의로운지 아닌지를 달아보십니다.

     

    (3) 충성된 마음입니다.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12:7)

    모세는 남다른 충성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고전 1:12)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2:10)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 4:2)

     

    (4) 겸손한 마음입니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3:34)

    "그러나 그분께서 더 많은 은혜를 베푸시나니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들은 물리치시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시느니라" (4:6)

    주님은 원래가 겸손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5) 헌신하는 마음입니다.

    김대중 집사님은 경기도 광주에서 겨우 먹고사는 정도로 분식집을 운영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섬기는 교회가 건축을 하다가 빚을 많이 지고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김대중 집사님은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제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며 기도하던 중에 자신이 경영하던 가게를 정리하여 그 돈을 모두 다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는 그 후 매일 성전에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앞길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너의 가는 길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리라"고 하는 음성이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고향 후배가 고창에서 찾아 왔습니다. 10년 동안 연락이 없던 친구입니다. 두 사람은 만나 김 가공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업이 얼마나 잘 되는지 해마다 15억의 매상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가진 것이 하나도 없지만 자신이 가진 전부를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이 그의 헌신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앞길을 그렇게 열어 주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을 보였던 벨사살왕.

    "기록한 글은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니이다. 그것의 해석은 이러하니 메네는 하나님께서 왕의 왕국을 세셔서 그것을 끝내셨다는 것이요.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다니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며 베레스는 왕의 왕국이 나뉘어서 메대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니이다 하니(5:25-28)

     

    1-4장은 느부갓네살 왕의 통치기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이고, 5장은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내용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바벨론 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왕이었지만 BC 562년에 죽은 후 바벨론 역사는 539년 마지막 왕 벨사살에 와서 메데와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당하였습니다. 86년동안 번창하였던 바벨론이었지만 갑자기 멸망하였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왜냐하면 바벨론 수도는 유프라테스 강에 의해 둘러 쌓인 천연적인 요새였습니다. 도시 주위에는 높이 10.6m, 2.6m의 성벽이 세워져 있었고, 이 벽 안쪽으로 800m떨어져 똑같은 높이의 성벽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두 벽 사이에는 78Km의 기름진 땅이 있어서 적이 도시를 포위할 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장소로 이용되었습니다. 외벽 바깥에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9m 깊이의 수로가 벽 주위를 따라 파여져 있었습니다.

    수도의 물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끌어오기 때문에 항상 풍부했습니다. 또 바벨론 제국은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방어 체제로 인해 바벨론 제국은 난공불락의 성같이 보였습니다. 그 어떤 막강한 적도 감히 이 방어선을 뚫고 들어올 수 없어 보입니다. 이처럼 겉으로 볼 때 바벨론은 아직도 강력하게 보였습니다. 또 벨사살 왕은 전쟁시를 대비하여 요새마다 많은 곡물을 저장하여 20년은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적은 항상 내부에 있는 법입니다. 바벨론 제국은 영적 도덕적 부패로 인해 뿌리로부터 썩어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메대와 바사가 연합하여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벨사살 부왕인 나보니더스 왕이 주력 부대를 이끌고 먼 나라로 원정을 간 사이에 바벨론을 점령하고자 했습니다.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은 바사의 장군인 고레스의 지휘아래 바벨론에 진격하여 바벨론을 격파하고 성을 포위했습니다. 이제 벨사살 왕과 바벨론의 운명은 풍전등화가 되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목숨을 내놓고 싸울 임전태세를 갖추고 깨어 경계를 해도 부족하였는데 벨사살 왕은 큰 잔치를 배설하고 허세를 부렸습니다. 그는 적군이 철통같은 방어망을 뚫고 넘어올 방법은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백성들에게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바벨론 역사상 가장 거창한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는 바벨론 중에서 중요한 인물 일천명을 초대하였습니다. 잔치에 왕후들과 빈궁들이 참석한 것을 보면 잔치 분위기가 얼마나 음란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방심과 방탕은 멸망의 징조입니다. 벨사살왕이 거나하게 취하여 술기운이 오르자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으나 곧 자제력을 잃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술은 이성의 조절기능을 마비시켜 인간의 본능대로 행하게 만듭니다.

    탈무드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에는 술이 언제부터 나옵니까? 노아 때 나오지요? 노아가 홍수 뒤에 포도원을 가꾸었습니다. 하루는 노아가 낮잠을 자는데 마귀가 와서 노아가 가꾼 포도원에 짐승의 피를 뿌렸습니다. 먼저 양을 양의 피를 뿌리고, 그 다음 사자의 피를 뿌리고, 그 다음 돼지 피를 뿌리고, 마지막에 원숭이 피를 뿌렸습니다. 짐승들의 피를 거름으로 해서 포도가 잘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 뒤부터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마귀가 뿌린 피의 효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제일 먼저 양의 피를 뿌렸기 때문에 사람이 술을 한 두 잔 마시면 양순해지고 차분해집니다. 그러다가 서너잔 들어가면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마십니다. 그러면 사자처럼 무서운게 없어집니다. 그래서 벨사살 왕이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성전에서 쓰는 금 은 그릇을 가져다가 술을 부어 마셨습니다. 신성모독의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로 돼지 피를 뿌렸기 때문에 더 마시면 돼지처럼 미련해져 말도 제대로 못하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합니다. 제일 마지막에는 원숭이 피를 뿌렸던 효능이 나옵니다. 원숭이가 별별 해괴한 짓을 다 하지 않습니까? 술이 꼭지까지 취하면 전봇대를 붙들고 씨름을 하지 않나, 아무데나 싸지 않나, 별별 희한한 짓을 다 합니다.

    20:1"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

    성경을 보면 술 취함으로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중 한 사람이 헤롯왕입니다. 헤롯이 자기 생일날 연회를 배설하였을 때, 헤로디아의 딸이 요사스럽게 춤을 추었습니다. 만취한 헤롯은 그 춤에 매료되어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데로 해주겠다고 헛소리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딸은 침례요한에게 원한이 사무쳐 있던 그의 어머니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아 요한의 목을 달라고 했습니다. 결국 헤롯왕은 의인의 무죄한 피를 흘리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노아도 술 때문에 큰 실수를 했습니다. 의인이요 그 시대에 완전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았던 노아도 포도주에 취해 그의 막내아들을 저주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술은 의인이나 악인이나 가리지 않고 죄를 짓게 만듭니다.

     

    술 취한 벨사살 왕은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고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느부갓네살 같은 위대한 왕도 감히 거룩한 성전 기명에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들이 지극히 거룩하신 만군의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벨사살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죄를 범하게 했습니다. 십계명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신성 모독죄를 범했습니다. 신성모독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공공연히 모욕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벨사살은 금, , , , ,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했습니다. 우상숭배는 또 다른 신성 모독죄입니다. 벨사살 왕과 그 귀인들이 잔치를 벌이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을 때, 이들 앞에 두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5"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그때에' '여흥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에' 다시말하면 한창 술잔치가 무르익은 그때에 벽에 사람의 손가락이 '툭 튀어나왔다'는데 이상한 글씨를 써내려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떠들면서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놀라서 쥐죽은 듯이 조용하게 되었고 찬물을 끼얹은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벨사살왕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큰 소리로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를 불러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 옷을 입히고 금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를 나라의 셋째 치리자로 삼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왕의 박사가 다 들어왔지만 그 해석을 왕에게 알게 해석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벨사살 왕은 크게 번민하여 그 낯빛이 변하였고 귀인들도 다 놀랐습니다.

    5:10에 보면, 바로 이때 태후가 들어와서 왕에게 다니엘을 추천합니다. 그가 다니엘을 추천하는 이유는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 때부터 하나님이 함께하는 영적인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부름을 받아 왕의 앞에 나오자 왕은 다니엘에게 글을 읽고 해석해 주면 나라의 셋째 치리자로 삼겠다고 약속합니다. 다니엘은 왕에게 글자의 뜻을 해석해 주기 전에 먼저 자신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세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17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을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하리이다"

    다니엘은 왕이 제시한 엄청난 상급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다만 그 해석을 하겠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다니엘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예언자의 사명이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사명보다 상급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상급에 따라 사명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하나님 한 분을 즐거워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그의 존재의미요 목적이었습니다. 다니엘은 글자를 해석하기 전에 먼저 손가락이 나와서 벽에다 글자를 기록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18-21에서 벨사살 왕의 선친 느부갓네살 왕의 교만을 알려줍니다. 4:29 열 두달이 지난 어느날 왕이 바벨론 궁 지붕에서 바벨론 성을 내려다 보며 자신이 이룬 업적으로 인해 자만심에 빠져 독백을 했습니다. “30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내가, 나의 도성, 내 위엄의 영광그는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이 그 영광을 가로챘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이처럼 느부갓네살 왕의 마음이 교만해져서 자만심에 빠졌을때 하나님은 그를 여지없이 낮추셨습니다. 왕의 교만한 말이 그 입에 있을 때 하늘에서 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31 느부갓네살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그리고 왕은 백성들로부터 쫓겨나 소처럼 풀을 뜯어 먹었습니다. 그의 몸은 하늘 이슬에 젖고 그의 머리 털은 독수리 털과 같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 이상의 무엇이 되려고 했으나 하나님은 그를 짐승보다 더 못하게 낮추셨습니다. 왕은 심한 정신 질환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성을 앗아가시고 짐승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왕이 하나님의 훈련에 걸리자 그는 짐승과 같이 되어 밑바닥까지 굴러 떨어졌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장이었습니다. 인간의 죄의 뿌리는 바로 교만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자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서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로 전락하고 정욕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버렸을 때 인간의 고귀함을 상실하고 짐승보다 못한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무제한적 육신의 자유를 갈망하여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을 몰아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파멸에 이를 뿐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32 그후 7년이 지났을 때 34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하늘을 우러러 보았다는 것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며 하나님께 절실히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겸손하게 되었을 때 훈련은 끝나고 그의 이성이 회복되었습니다

    다니엘은 느붓가네살왕을 상기시키면서 이를 근거로 벨사살왕의 교만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벨사살 왕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받았습니다.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출 수 있는 절대적인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는 이런 하나님의 겸손훈련을 통하여 비로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말해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철저히 낮추시고 겸손한 자는 높이시는 분이십니다.

    벨사살은 느부갓네살 왕에게 일어난 사건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가 말해주는 교훈을 마음깊이 새기고 마음을 낮추어야 하는데 그는 역사의 교훈을 무시하고 더 큰 악을 행했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교만을 책망한 후 글을 읽고 그 뜻을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25"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메네'는 세어보았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이 여러 해 동안 그의 날을 세어보시다가 '이제 너의 시대는 끝났다'고 정지 신호를 내리신 것입니다.

    -님이 끝났다고 선언하시면 인생들은 하던 모든 것을 중지해야 합니다.

    벨사살 왕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날을 끝나게 하셨습니다.

    '데겔''무게를 달아보았다'는 뜻으로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들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바르신'은 무게를 잰 결과로 왕의 나라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과 호흡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끝났다고 하셨으면 끝난 것입니다. 부르시면 가야 합니다. 실제로 그날이 벨사살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5:30을 보면 "그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1)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들을 다 세고 계신다.

    '메네'라는 말은 '세다, 혹은 계수 되어지다'라는 뜻입니다. '메네 메네' , 하나님은 '세고 또 세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12:7절에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 하나라도 다 세고 계신다"고 말씀하셨고, 56:8절에서는,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시므로 인간의 모든 행위들을 세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본문에서는 바벨론의 죄악상들을 세셨지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행위들을 세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39:3절에 다윗은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신다"고 했고, 14:16절에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신다"고 했습니다. ,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아시고 세신다는 사실입니다.

    90:12절에서 모세는 고백하기를,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고, 10절에 보면,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했습니다. , 우리의 인생은 허비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서로 싸우고 미워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쁘지 않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바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선 순위입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일일이 한사람 한사람의 시간 사용을 계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의 인격을 달아 보십니다.

    '데겔'이라는 뜻은 '무게를 잰다, 저울에 달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어떤 기준에 미달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달아보는 것입니다. 본문 27절에 보면 벨사살 왕의 일생이 하나님의 저울 위에 놓여져 있는데 그 결과 '함량미달'로 판결이 나왔습니다. 즉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을 하나님의 저울 위에 올려놓으시고 믿음의 분량을 재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함량미달'이 아닌 '차고 넘치는' 장성한 믿음의 분량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3)'우바르신' '나누었다'라는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바르신'이라는 말에서 ''AND(그리고)의 뜻이고, '바르신''베레스'라는 말의 복수형인데 '나누다, 가르다'라는 뜻입니다. ,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너의 일생을 세고 세어서 달아보니 기준에 미달이 되어 왕의 날수가 다하였고 나라도 빼앗겨 나뉘어 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4) 그렇다면 특별히 벨사살 왕의 죄는 ?

    1)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죄입니다.

    그의 조부 느부갓네살 왕이 교만하고 완악하다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미쳐서 들짐승처럼 풀을 뜯어먹으며 비와 이슬을 맞으며, 머리와 손톱, 발톱이 독수리같이 되었다가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회개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벨사살 왕은 여전히 교만하여 악을 행하였습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29:1)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자들을 통해 경고하고 물질이나 질병이나 실패나 사람을 통해서 징계와 채찍으로 경고하되 돌이키지 않으면 아주 생명을 거둬 버리십니다. (대하36:15-16)

     

    2)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우상을 찬양한 죄입니다.

    23절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거룩한 금, 은 기명에다가 술을 퍼 마시면서 금, , ,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우상을 찬양하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 했던 죄입니다.

     

    3) 교만의 죄 때문입니다.

    본문 20"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팍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며" 16:18"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하셨고,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항상 교만을 조심해야 됩니다. 사람이 실패했을 때보다 성공했을 때가 더 위기이며, 욕을 먹을 때보다 칭찬을 들을 때가 더 위기입니다. 왜냐하면 교만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4) 신성모독한 죄 때문입니다.

    벨사살은 하나님을 두려운 줄을 모르고 자기 부왕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한 거룩한 금, , 기명을 가져다가 술을 퍼 마시고서는, , , , , 석으로 만든 우상을 찬양하므로 2, 3중으로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몸은 거룩한 성전(고전6:19)이라고 했는데, 그 몸을 음란하게 하거나, 술을 마셔서 술독을 만들거나, 담배를 피워 굴뚝을 만드는 것도 거룩함을 범하는 죄가 됩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것을 구별하지 않으면 심판과 징계를 받습니다. 일주일의 하루! 주님의 날을 거룩하게 구별해 바쳐야 복을 받습니다.

    내가 번 돈이라도 10분의 1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십일조를 정확히 구별해 드려야 합니다. 십일조는 여러분! 물질의 축복의 씨앗입니다.

     

    5) 쾌락을 즐기다가 망했습니다.

    금식을 해도 시원치 않는데, 술 퍼마시며 부정한 쾌락을 즐겼습니다. 술에 취하고, 도박에 취하고, 음란에 취하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도를 벗어나 부정한 짓을 즐기는 쾌락은 오래 가지 못하고 심판을 받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벨사살 왕의 죄악상을 낱낱이 세고 계셨습니다. 그 누구도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벨사살 왕은 가장 겸손해야 할 상황에서 그는 교만을 택했습니다. 오히려 금, , , 목석으로 된 우상을 하나님으로 대치하면서 하나님을 능멸했습니다. 결국, 벨사살은 그날 밤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라는 나뉘어 져서 메데 페르시야 사람에게로 넘어가 찬란했던 바벨론은 그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되었습니다.

    벨사살 왕에게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 경고하신 말씀처럼, 성경은 지금도 오늘 우리에게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뿐만 아니라, 벧후3:10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달아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처럼 시대나 환경이나 민족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되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상대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절대기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는 개개인에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이 저울을 가지고 우리의 영적 무게가 얼마나 나가는지 재어보십니다.

    사람들의 평가에서 A학점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평가가 F학점이 나오면 그 인생은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사람의 저울에서는 무게가 나가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저울에서 무게가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4. 그러면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무엇입니까?

    (1) 인생의 삶의 우선 순위를 평가합니다.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인생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매일 매일 할 일들이 쌓였들지라도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고 천국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2) 인생들의 믿음을 보고 평가합니다.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믿음은 들음으로 생기고 그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예배를 통해서 듣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합니다. 택하신 백성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인지 아닌지를 평가하시므로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3) 인생의 열매로 평가하십니다.

    7:18-20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나님은 벨사살 왕을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보셨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에게는 그가 존경을 받았을지 모르겠으나 하나님의 공정하신 저울 앞에는 그는 왕으로로서 열매가 없었으므로 부족한 행동이 드러났습니다.

    17:10 "나 주는 마음을 살피며 속 중심을 시험하여 각 사람의 길들과 그 사람의 행위들의 열매대로 그 사람에게 주느니라"

     

    (4) 하나님은 지금도 인생들의 행동을 달아보십니다.

    죄악의 잔이 차고 넘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가 임하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도 하나님의 불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그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노아 때의 심판의 기준도 인간의 '강포함'입니다. 6:13"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달아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선한 행실도 달아보아서 어느 분량이 차면 축복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죄 짓는다고 금방 심판이 내리지 않는 것처럼 선행도 금방 축복과 상급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원하시는 어느 분량이 차야 응답과 상급이 내립니다. 기도도 분량이 차야하고, 십일조나 헌금 생활도 정성의 분량이 차야 합니다.

     

    삼상2:3 "주께서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므로 친히 사람의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이 말씀은 한나가 오랫동안 애타게 기도하다가 응답 받고 아들 사무엘을 얻은 뒤에 고백한 신앙 고백입니다.

    기도와 구제도 분량이 차야 합니다. 10장에 고넬료가 항상 기도하고 구제했더니, 천사가 나타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6:38절에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시며 주께 드리는 행위, 주의 이름으로 남을 돕는 일을 모두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십니다.

    더욱이 전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행위는 가장 큰 상급과 축복을 받는 행위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던지 그대로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5. 하나님은 인간을 종합적으로 달아보십니다.

    "하나님의 저울에는 정성이 무겁다"는 서양 격언이 있습니다. "천국 가는 길은 정성의 길을 가는 것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양과 질을 달아보시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달아보십니다. 과부가 엽전 두 냥 바친 것을 제일 많이 바쳤다고 칭찬하신 것은 그 여자의 정성이 제일 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달아보십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달아 보십니다.

    삼상16:7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외식과 가식과 형식과 체면치레는 정성이 담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는 죄 중에 하나가 외식과 위선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의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믿음이 있을 때 정성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첫 열매, 첫 것에 대하여 귀하게 보십니다. ? 첫 것은 정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할 때, 정성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찬송도, 기도도, 헌금도, 감사도 정성을 다하여 최선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최고를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의 믿음을 보시는 줄 믿습니다.

     

    (2)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16: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면 여러분은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그 십자가를 지시겠습니까?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에게 나를 따르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 하필 갈릴리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는지 아십니까? 갈릴리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갈릴리에 살고 있던 '유다'라는 사람이 선동을 해서 로마를 상대로 정치적인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이 혁명이 실패함에 따라서 '마리우스'라는 로마의 장군이 군대를 몰고 와서 당시 조그만 갈릴리라는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 2천 명을 붙잡아 길거리에 세워진 십자가에 못을 박아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매달려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갈릴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라면 모두 다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는 누구도 로마를 향해서 도전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연을 가진 갈릴리 사람들에게 지금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주님께서 지라고 하시면 여러분은 기쁨으로 질 수 있습니까? 그런 용기가 없다면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진 우리들의 신앙의 무게는 아주 보잘것 없을 것입니다.

     

    (3) 인생의 진실(성실)성도 달아보십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한다는 이야기는 책임 있게 인생을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는 무엇보다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진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신의가 있고, 진실성이 있는가?'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자산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 가서 한국 교포들에게 강조한 말은 "우리가 미국 땅에서 장사를 하여 돈을 벌고 취직을 하여 잘살려고 하면 적어도 세 가지의 신의를 쌓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한국인의 말은 믿을 수가 있다. 한국인의 가게에 가서는 안심하고 물건을 살 수 있다. 한국 기술자에게는 마음놓고 일을 맡길 수 있다. 이 세 가지를 인정받아야 타국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을 아무렇게나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에는 책임이 따라야 하고, 신의가 따라야 하고, 진실성이 따라야 합니다. 그 진실성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속의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입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에는 내용이 있어야 하고, 구체적인 삶이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그 모습에서 믿음이 나타나고, 진실성이 나타나고, 무게가 실리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게 되고, 어렵게 대하게 되고 그리스도인들을 우러러 보게 됩니다.

     

    철학자 칸트는 아버지의 고향인 폴란드 슐레지엔으로 가던 중 말을 타고 깊은 산길을 가다가 강도 떼를 만나 가진 것 다 빼았겼습니다.

    "이제 더 숨긴 것이 없느냐"고 묻는 말에 너무 무서워서 아무 것도 없다고 하고는 도망치다시피 나왔습니다. 가다가 정신이 나서 보니까 몸 속에 금 덩어리 하나를 숨긴 것을 말하지 않았는데, 이 사람이 되돌아가서 강도들에게 "아까는 당신들이 너무나 무서워서 몸 속에 금 덩어리가 들어 있던 것을 모르고 말하지 않았소, 그런데 가다가 몸 속에 금 덩어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소. 미처 나도 모르고 한 것이니 용서하고 이제 받으시오." 그러면서 금 덩어리를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강도들이 한참을 쳐다보더니 아까 빼앗았던 것 모두 내주면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더니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하더랍니다.

    이 강도들이 볼 때 이 사람은 신실하다 못해 거룩하기까지 했고, 그래서 두려운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악해도 진실은 여전히 진실이고, 거룩은 여전히 거룩이고, 진리는 여전히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벨사살을 저울에 올려놓고 달아보시니 진실성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버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성을 달아보십니다.

     

    (4) 우리의 거룩성도 달아보십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믿고 경외하는 것이 '거룩성'입니다. 사람에게는 이 거룩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람이 악해지고 무서워집니다.

    공산주의를 보십시오. 얼마나 잔인합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경외심도 없고 거룩도 없기 때문입니다. 히틀러를 보세요.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으니까 유대인들을 가스실에서 육백만명이나 죽이지 심판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늘을 향한 경외심이 있는 사람 같았으면 그런 짓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 사회가 염려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사회에도 두려운 것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부모도, 스승도, 어른도 이제는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니고, 심지어는 하늘조차도 두려운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매일같이 사람을 찌르고,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죽여도 누구를 죽입니까? 어린 아이들을 죽이고, 부모를 죽이고, 자식을 죽입니다. 죽여도 그냥 죽입니까? 무자비하게, 칼로 찔러도 한두번 찌르지 않습니다. 죽인 후에는 또 그냥 놔둡니까? 토막을 내서 갖다 버리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는 무서운 세상에, 겁이 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벨사살왕도 보세요! 이 사람도 세상에 두려운 존재가 없는 사람이기에 하나님께 제사 지낼 때 사용되었던 그릇에 감히 술을 부어서 마셨습니다. 그게 보통 그릇입니까? 대제사장도 일 년에 단 한 번 들어가서 그 그릇을 사용했습니다. 그 그릇을 사용할 때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루었는데 이 사람은 겁도 없이 거기다 술을 따라 마셨습니다. 그리고 귀인들에게도 돌려 술을 따라 마시게 했습니다.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 무지한 만용을 부릴 수가 있습니까? 사람이 거룩을 지니지 않고 살게 되면 이렇게 무지한 만용을 부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 같은 거룩한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까? 언제나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질 것을 염두에 두고 살고 계십니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손에 저울이 들려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방종하지 않고 바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인생들의 신앙도 행동도 달아보십니다. 우리 모두 함량미달이 아니라 차고 넘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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