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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년전 사도 도마 한국을 전도하다
    말씀 2018. 11. 5. 06:44

    2000년전 사도도마 한국을 전도하다  마28:19-20, 행1:8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고
    20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모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이느니라, 하시니라. 아멘.
     
    행1:8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신 뒤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사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땅의 맨 끝 지역까지 이르러 나를 위한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공식적으로는 세 번 나타나셨지만 실제로는 여러번 나타나셨고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이 마태복음28:19과 사도행전 1:8이다. 요약하면 종교와 민족과 언어를 초월하여 세상끝까지 가서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달라는 말씀이시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전하는 자는 참된 신앙을 소유하여야 하며 그 신앙을 위해서는 절규도 할 수 있어야 하고 마지막에는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진정한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사도들이 전해준 말씀을 통해 보이지 않는 영원하고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세상의 권력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으며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사도들 거의 다는 이렇게 증인이 되었지만 특별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삼일만에 부활하였을 때는 보지 못했지만 여드레 후 다시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 도마가 외쳤던 신앙고백처럼 우리들도 예수님을 나의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예수님의 열두 제자중 디두모라 하는 도마
    예수님의 공생애의 마지막이 막 다가옴에 따라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인 예루살렘성전에서는 공회를 통해 예수를 죽일 음모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는데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면서 어떻게 예수를 넘겨줄지를 의논했습니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님은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드린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저녁 식사 후에 잔을 들어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비장하기 이를 데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떼어낸 빵은 곧 찢기실 주님의 몸을 상징했고, 나누어 마신 포도주는 주님이 흘리실 피를 상징하건만 제자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은 사울의 눈을 가렸던 비늘이 제자들의 눈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년이나 주님과 동고동락 하면서도 또 주님께서 세 번이나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입성할 때 수많은 군중들이 호산나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외치는 소리에 제자들은 장미빛 미래에 도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누구를 가장 큰 사람으로 정할 것이냐를 놓고 말다툼을 벌이기까지 하였으니 지상에서의 삶의 종착역이 저만치 보이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미숙한 신앙 속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런 제자들이 어떻게 주님의 증인이 되었는가하면 부활의 주님을 친히 뵙고 그분이 영원한 왕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안 후에는 죽음도 그 무엇도 제자들을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특히 의심많다고 하던 디두모라고 불렸던 도마는 두 번째로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을 뵈었을 때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예수님이 원하셨던 신앙고백을 하면서 어느제자보다도 예수님의 증인에 가장 앞장섰던 제자였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본다면 요한복음에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 도마의 불신앙과 부활한 주님을 만났을 때의 도마의 위대한 신앙 고백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극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하여튼 우리는 도마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잘 알 수는 없는 것은 성경에서 도마에 관해서는 많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기독교 정경이 채택되면서 제외되었던 외경들 중에는 도마행전이라는 것도 있는데 도마행전을 참조한다면 도마야 말로 땅끝까지 복음을 전했던 제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요한복음서에 등장하는 도마어록
    1)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11장에 보면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속에 있었던 나사로를 살려 주신 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건에서 보면 주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당장 달려가지 않고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그러신 후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내가 깨우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 유대인들이 방금도 돌을 들어 치려고 했는데 왜 다시 베다니로 가고자 합니까?’ 하며 말렸지만 도마는 불쑥 나서며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며 엉뚱한 소리를 한 것처럼 들립니다. 언제 어디서든 상황인식을 제대로 이해 못하면서 용감하게 들이대었던 모습이 도마의 모습인 것처럼 보지지만 실은 목숨을 아까와 하지 않았던 주님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최고의 진리의 말씀을 얻게 한 도마의 위대한 질문
    14장에서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영원한 나라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지만 사실, 현실에만 마음을 두고 있던 제자들은 그 예비된 영원한 나라에 대한 설명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요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말해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14:3)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받아들여 내가 있는 곳에 거기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14:4) 내가 어디로 가는지 너희가 알고 또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제자들이 지금 마음이 분산되어 있는데 이 말씀을 이해했을까요? 다른 제자들이 묵묵히 있을 때 도마가 물었습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도마는 과감히 그 길을 물었습니다. 
    (요14:5) 도마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어찌 그 길을 알겠나이까?
     도마의 질문은 위대한 대답을 얻어내었습니다. 
    (요14:6)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3) 도마의 신앙고백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의심만은 도마라고 불리워졌던 것은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만져보아야 믿겠다고 말하였다가 결국 부활한 예수님이 두 번째 나타나셨을 때 위대한 신앙고백을 남겼습니다.
    (요20:26) 여드레가 지나서 그분의 제자들이 다시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그들과 함께 있더라. 그때에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한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요20:27) 그 뒤에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고 내 두손을 보며  또 네 손을 이리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으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시니
    (요20:28) 도마가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리고 도마는 신앙고백의 확신에 따라 놀라운 선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우리들은 보통 신앙고백하면 ‘베드로의 신앙고백’만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그 누구로부터 ‘도마의 신앙고백’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도마의 신앙고백은 어쩌면 요한복음 전체의 핵심이 바로 이 한 마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땅에 사는 인간들에게 최고의 선물은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입니다. "부활"은 죄인인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며 유일한 생명의 길입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구약에서 유일한 여호와 하나님이 신약에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이시다 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증거야 말로 이사야9장6절에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가리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며 평강의 왕이시다 라고 우리에게 미리 알려 주었습니다. 오늘 도마의 신앙고백은 바로 예수라는 이름으로 한 역사를 살았던 한 인물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말해주는 위대한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요20:28)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도마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마는 이 신앙고백의 확신에 따라 놀랍게도 땅끝까지 선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2. 도마행전은 어떤 책인가요?
    (1) 도마행전은 성경이 아니고 역사 자료이다.
    도마행전은 예수님의 12명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도마의 행전인데 외경이 된 주 원인은 어쩌면 신비적인 글들이 자주 나오다보니 영지주의 문서라고 하여 위경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도마행전은 성경은 아니지만 사도 도마가 어떤 인물이었는가를 연구하는데는 많은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도마행전은 사도 도마가 직접 쓴 책이 아닙니다. 도마행전은 AD 3-4세기에 에뎃사 (오늘날 터키 우르파, urfa)에서 기록된 역사자료일 뿐입니다.

    (2) 도마행전의 사본 정리와 한글 번역
    도마행전은 1903년 피터 커비 (Peter Kirby)가 그리스어와 시리아어의 많은 단편 사본들을 모아서 종합한 사본 (Bonnet)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글번역으로는 '사도 도마 라이브러리'(조영길 편역, 도서출판 동서남북, 2006)라는 한글판 도마행전이 있습니다

    (3) 도마행전은 170장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장- 61장까지를 사도 도마의 전반기 사역한 기록입니다.
    62장- 170장을 후반기 사역한 기록입니다.

    사도 도마의 전반기 사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AD 30-33(에뎃사) 34-40(북인도 탁실라) 41-49 (인도 아요오디아, 한국 가야국)
    사도 도마의 후반기 사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AD 50-51(이집트, 소코트라 섬) 52-72(남인도 케랄라, 첸나이에서 순교)
    사도 도마의 한국 김해 (가야국)에서 사역 때에 일어난 일이 도마행전 51-5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추정)
    허왕후의 고향 인도 아요오디아의 사역 때 (한국에서 인도로 갔을 때)에 일어난 일이 도마행전 59-6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추정)

    도마행전의 기록자는 연대와 지명에 관심이 없었고 기록하지도 않았으므로 어디까지나 추정할 뿐입니다. 도마행전을 허구의 소설 같은 정도로 생각하였는데 탁실라에서 군다포러스왕 (재위 AD 19-45)의 왕궁터와 동전이 발견되는 등 고고학적인 증거가 나오고부터 허구가 아니라 사실로 들어난 것입니다.

    (4) 도마행전 51-58장 (내용 요약)
    51장: 한 젊은이가 성밖의 여관에 살고 있는 한 소녀를 사랑하다 살인을 하였습니다.
    성찬식에 참여하여 빵을 받을 때 젊은이의 손이 말라 입에 넣을 수가 없었습니다.
    52장: 사도 도마가 젊은이를 불러 뱀 (사단)이 한 일이라며 젊은이의 손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53장: 사도 도마는 죽은 소녀에게도 가서 간절히 기도 하였습니다.
    사도 도마의 기도 내용이 있습니다.
    54장: 사도 도마의 기도가 끝나고 그녀에게 손을 펼치자 그녀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소녀가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55-57장: 죽었다가 살아난 그녀가 지옥여행을 다녀온 내용을 말하였습니다. 지옥은 참으로 끔찍한 곳이었습니다.
    58장: 사도 도마는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를 용서 받습니다. 복음을 가진자는 올바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5) 51-58장의 해설 (한국의 김해에서 일어난 일)
    위의 기록이 한국 (가야국)에서 있었던 일로 추정되어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도 도마의 전도 여행 년도와 도마행전에 기록된 순서가 일치합니다.
    * 성과 성밖의 여관이 한국 가야국 (김해)의 봉황동 유적지의 지리로 생각되어 집니다.
    사도 도마는 가야국에서 김수로왕과 함께 성을 쌓았습니다.
    경남 김해시의 회현리 패총은 무덤이 아니라 조개로 쌓은 성입니다.
    회현리 패총에서 중국 신나라 (AD 8-23) 왕망이 AD 14년에 주조한 '화천'이라는 동전이 출토 되었습니다.
    AD 42년에 사도 도마가 한국에 왔는데 이 때는 후한 광무제 18년입니다.
    회현리 패총의 성을 쌓은 시기는 후한이 되어 나라가 바뀌었으므로 '화천'이라는 동전을 버리게 한 시기입니다.
    김해 봉황동 유적지 패총전시관을 기준으로 수로왕릉 방향이 성의 안쪽이고 배가 도착한 곳이 성밖입니다.
    성밖에서 무역을 하던 곳은 당시 바다의 밀물이 들어왔습니다.
    이 곳 (배가 최종적으로 도착한 장소를 복원한 곳)에 AD 42년 사도 도마, AD 48년 허왕후가 도착 하였습니다. 또한 가야시대의 유적인 김해시 대성동 고분(91호)에서 로만글라스가 출토 되었습니다.
    경주 대릉원의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로만글라스 (보물제624호)는 1세기 이스라엘의 헤브론에서 만들어진 유리잔으로 사도 도마가 한국에 가지고 온 것입니다.

    (6) 도마행전 59-61장 (내용 요약)
    59장: 사람들이 과부를 위해 많은 돈을 가져왔습니다.
    사도 도마는 이것들을 모아 함께 도성으로 갔습니다.
    60장: 사도 도마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찬양과 감사입니다.
    61장: 사도 도마는 기도 하였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함입니다.

    (7) 59-61장의 해설 (한국에서 인도에 갔을 때)
    위의 기록이 인도 허왕후의 고향인 아요오디아에서 있었던 일로 추정되어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도 도마의 전도 여행과 도마행전의 기록된 순서가 일치합니다.
    사도 도마는 인도 갠지스강에 있는 허왕후의 고향 (아요오디아, 아유타국)에 머무르다 AD 42년 한국으로 왔었습니다.
    한국에 만 6년간 있다가 AD 48년 다시 아요오디아에 갔었는데 59-61장의 기록은 이 때의 것으로 추정 됩니다.

    (8) 역사적 기록으로 도마행전의 가치
    도마행전은 '도마의 역사 기록'이고 성경의 사도행전과 비교하면 논쟁만 벌어집니다. 도마행전은 인도와 중국과 한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도와 한국의 풍습과 사고방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마행전을 성서의 잣대로 평가하지 말고 도마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서 가치가 있습니다. 사도 도마는 예수님께서 '땅 끝까지 가라' (행1:8) 명령에 따라  바다 실크로드의 동쪽 땅 끝에 있는 한국에 왔었습니다.
    바다 실크로드의 동쪽 땅 끝이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경주세계문화엑스포의 '실크로드 경주 2015'에서 검증하여 세계에 알렸습니다.
    대구세계문화엑스포에서는 사도 도마를 한국의 역사적 문화 인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사도 도마를 역사적 문화 인물로 매우 높게 평가 합니다.
    사도 도마는 한국의 김수로왕에게 인도의 공주였던 허왕후를 중매 하였습니다. 사도 도마가 1세기에 한국에 온 역사적 사실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3. 도마의 행전에 기록된 도마의 선교 전승 
    놀랍게도 의심많았던 제자 도마는 그 당시 불교의 중심국이었고 또 힌두교의 중심국이었던 인도로 가서 복음을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도마가 인도에 선교사로 갔다는 이야기는 많은 이적과 신비주의로 가득한 도마의 행전(Acts of Thomas)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마행전의 서두는 예수님의 11제자가 예루살렘에 모여서 주께서 명령하신 세계선교 전략을 논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제자들은 목숨을 다해 선교사명을 감당할 지역을 나누었는데, 제비를 뽑으니 도마에게는 인도가 해당됩니다. 그러나 도마는 자신은 유대인이고 몸이 약한데 어떻게 인도로 갈 수 있느냐고 거절합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서 "무서워 말라 도마야, 인도로 가서 복음을 전하여라, 나의 은혜가 너와 함께 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마는 결국 당시 왕궁을 지을 목수를 찾으러 온 군다팔 왕의 하인 아반에게 노예로 팔려 인도로 간것으로 되어 있다. 도마는 결국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나중에 첸나이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이 도마행전의 신빙성과 심지어 군다팔이라는 왕이 없었다고 역사성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1834년 아프가니스탄의 카불계곡에서 군다팔의 동전이 발견됨으로 어느 정도 역사성이 입증되었습니다.
    도마가 전도하다 순교했던 첸나이시는 지금도 20만 기독교인이 자생하고 있는  첸나이(마드라스)시는 타밀나두 州에 속해 있으며 1996년 첸나이市로 이름을 바꾸었다. 도마가 세웠던 교회들은 인도의 남서부 해안의 케랄라와 타밀나두에 주로 위치해 있으며 교인의 숫자는 200만을 넘어서고 있다. 스스로 ‘성 도마의 크리스챤’이라고 부르는 그들은 시리아 정교회(Syrian Orthodox),시리아 야콥교회(Syrian Jacobites), 말토마교회(Mar Thomite), 네스토리안교회(Nestorius)를 비롯한 27개의 교회들이다.
    전설에 의하면 도마는 A,D 34년에 인도에 왔다. 처음에 그는 자기의 동족인 유대인 디아스포르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나 그들이 거부하자 원주민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많은 지역들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파 하였고 교회는 7개 지역, 말란카라(Malankara), 꼬따꺄얄(Kottakkayal), 빨루르(Palur), 코까망갈람(Kokkamangalam), 니라남(Niranam), 퀼론(Quilon), 차얄(Chayal)에 세워졌다.  그는 성공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주님앞으로 인도하였다. 이에 분노하며 적개심을 품은 힌두들의 공격으로 그는 마침내 마드라스시에서 8마일 정도 떨어진 첸나이시에 있는 토마스산에서 순교하기에 이르렀다(A.D 72년). 첸나이(마드리스) 시는 인도의 맨 아래 스리랑카와 마주하고 있는 인도 동해 뱅골만 연안 항구도시로 인도에서 네번째로 큰인구 1000만의 도시입니다.  비록 초기 문서는 아니지만 도마의 인도 선교를 입증하는 직접, 간접적인 문헌들이 있다.
    5세기의 사람으로 자기의 마지막 생애의 10년을 에뎃사(Edessa)에서 보낸 성 에프라엠(St. Ephraem)의 시에서 우리는 성 도마에 관련된 내용을 볼 수 있다.
    “보라, 인도에서 일어난 당신의 기적,
    우리 땅 에뎃사 안에 있는 당신의 승리,
    어디나 당신의 축제일;
    살아있는 동안 기적들을 행하였고;
    기적들은 당신의 죽음 뒤에도 계속된다.”

    에뎃사는 네스토리우스파가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동로마 황제에 의해 이단으로 몰려 동쪽의 페르시아로 이주하여 정착한 도시로 네스토리우스파는 그곳에 신학교를 세워 동방 선교의 전초 기지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동방 선교 기지인 에뎃사에 인도의 사도인 도마의 이야기가  회자되고 성 에프라엠이 이를 시로 읊은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또한 에뎃사에서 무명의 기자에 의해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 도마 행전(The Acts of Thomas) 쓰여진 것도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4. 한국에서 도마의 행적
     불국사에서 출토되어 나온 돌십자가를 따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도마와 만날 것은 생각이 든다. 요즘 우리 한국교계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도마나 도마 제자가 우리나라에 왔을 지도 모른다. 육로 비단길을 타고 에뎃사의 네스토리안 선교사들이 한두 명 쯤 우리 경주에 오지 않았을까? 비록 기록되지 않았거나 기록이 유실되고 유물과 유적을 남기지 않은 역사는 민중 속에서 신화와 전설로 구전되어 우리 곁에 있을 수 있지 않은가! 그런가하면 도마는 인도의 허황후 허황옥(許黃玉, 33년~89년)이 가락국의 초대 왕인 김수로왕과 결혼 하기 위하여 왔을 때 동행했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경북 영주시 평은면 왕유동에는 히브리어로 쓰여진 암석이 있는데 그것을 분처바위 또는 도마바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한 뒤 12사도 중 한 사람인 도마가 동방 선교의 사명을 지니고 인도에 와서 고대 동방기독교의 첫 선교활동을 펼쳤다는 것은 거의 정설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 도마가 지구의 동쪽 끝 한반도에 왔다간 흔적을 남겼다면, 이것이야 말로 세상을 놀라게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그럴 법한 일이 유물로 알려졌다. 1987년 8월 어느날 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관악고 교사 유우식 집사가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동2리에 있는 왕유동 분처바위를 찾아 역사를 바로 세우라는 꿈으로부터 시작되어 실제로 분처바위를 발견하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왕유동에 분처바위를 찾고 보니 머리 부분이 떨어져나간 암각상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기독교 관련상이라느니, 심지어 토마상이라느니 하여 충격적인 화제를 던졌다. 특히 기독교계에서는 이 뜻밖의 일을 대서특필하고 흥분에 설레었다. 성역화 논의까지 나오는 가운데, 지금도 찾는 발길이 끊기지 않고 있다고 한다.

    (1)영주 분처상의 비밀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동2리 왕유동(속칭 왕머리) 분처바위에 있는 분처상과
    그 좌측에 암각된 '도마'라는 히브리어 글자.

    분처바위에 있다고 하여 ‘분처상’(혹은 ‘도마의 분처상’, ‘도마상’)이라고 하는 이 암각상은 그 터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속칭 ‘왕머리’라고 하는 왕유동(王留洞: 왕이 머무른 마을이라는 뜻)은 고려 31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리(1361년)를 피하기 위해 안동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 머물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상은 높이가 족히 5m나 되는 대형 암각상이며 손·발모양 기독교양식 뚜렷하다.
     상면(像面)과 암면(岩面)에는 3점의 음각한 명문이 있다. 그 한 점은 상의 좌측 암면에 네모꼴로 새겨진 4자의 ‘도마’라는 히브리어 글자이고, 다른 두 점은 상면의 하단에 새겨진 ‘야소화왕인도자(耶蘇花王引導者)’와 ‘명전행(名全行)’이란 한자 명문이다.
    분처상을 기독교와 연관 짓게 되는 근거는 우선, 조형기법에서 찾을 수 있다. 단번에 눈에 띄는 것은 수세인데, 왼손가락 끝은 빗장뼈에 댄 채 손등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손바닥을 외반(外反:바깥쪽으로 돌림)하고 있어 불상의 수인(手印)에서는 그 유형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수세는 1908년 중국 둔황에서 발견된 고대 동방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 즉 경교(景敎)의 인물상(당나라 말 제작, 일부 학자는 그리스도상이라고 주장)에 나타나는 수세와 비슷하다.

    수세뿐만 아니라, 상의 구도나 복장의 화려함도 두 상이 서로 유사하여 불상과는 구별된다. 발가락의 노출도 기독교(예수)상의 보편적 기법이다.
    특기할 것은 필자의 초보적 관찰로는 상의 가슴 부위에 양각된 십자가 모양이 보인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히브리어의 ‘도마’란 글자나, 한자의 ‘야소화왕인도자’란 명문은 비록 그 암각 시기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이 상이 기독교와 관련된 상이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인근 주민들의 전언도 기독교상이라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이 상을 지켜봐 온 주민들은 종래 이 상 앞에서 만큼은 물상숭배 같은 행위는 하지 않았다고 일치하게 증언한다. 불상이나 기타 상서롭지 않은 대상물만 있으면 예외없이 불공을 드리거나 기복하는 한국인들의 전래 관행에 비춰보면 짐짓 의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토마‘라는 글자보다 더 문제시되는 것은 이른바 ‘야소화왕인도자’란 명문이다. ‘야소화왕’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존칭이며, ‘명전행(名全行)’ 이란 인도자 또는 전도자로 풀이된다. 
    781년에 중국 시안에 건립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는 예수를 ‘미시가(彌施訶)’, 즉 메시아(구세주)로 칭하고 있다. ‘야소’라는 말은 중국 명대 중기에 서방 카톨릭이 중국에 유입되면서부터 비로소 쓰게 된다.

     (2) 최초 한국 기독교인은 가야시대 허황옥이었다.
    (AD 49년-삼국유사 가야국편)
    한국에 최초로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AD 49년7월27일이다.
    최초 한국 기독교인 허황옥이었다. (출전 : 삼국유사 가야국편)
    그녀는 인도에서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인 도마에 의해 전파된 인도기독교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였다.(출전 : 도마행전)
    그녀가 가져온 종교는 도마기독교인 인도기독교였다.
    인도기독교는 토마스기독교라고 불리며, 예수의 12제자 중 한사람인 도마가 인도에 와서 선교한 동방기독교이다. 현재 인도의 기독교인은 우리나라의 기독교인의 4배정도로 많은 3500만명 정도 된다
    현재 남아 있는 기독교유적은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도2동 왕유동 도마 석상(문화재자료 제474호) , 경주 불국사에서 발굴된 돌 십자가. 경주 마리아 상  등이 있다. 
     그녀는 인도 태양황조의 아유타왕국의 공주로 AD. 49년7월27일에 항로를 통해 가야국 주포촌(도두촌)의 기출변 해변에 들어왔다. 아유타국은 현재 인도의 갠지스강 중류에 있는 아요디아 읍을 말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허황옥이 이르기를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입니다. 이름은 허황옥이라 하며 나이는 열여섯이옵니다. 금년5월경이었습니다. "제 아버님 꿈에 하나님이 나와 말씀하시길. '가라국왕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보낸 이로 신령스럽고 거룩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으나 여러해 동안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는 공주를 보내어 그의 아내로 삼게 하라' 하셨다 합니다. 부모님은 꿈을 깬 뒤에도 하나님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며 빨리 수로 임금에게로 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부모님의 말씀을 좇아 그길로 하나님이 정하신 제 낭군을 찾아 아득한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보잘 것없는 얼굴로 귀하신 얼굴을 뵙게 되었으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허황옥이 가야국 김수로왕과 결혼하여 허황후가 되었다.(유적 - 파사사탑. 쌍어문, 물고기문양. 등) 그 후 기독교는 신라시대 당나라를 통해 경교가 들어왔다.(유적 - 경주 불국사의 십자가 문양 부처에 새겨진 십자가 문양 보살이 들고있는 십자가)

    경교는 동방기독교의 일파로서 네스트리우스파라고 부르며 당나라시대 635년에 기독교가 국교로 정해졌으며 250년간 번성했다.(유적 - 중국 당 현종 때 대진경교유행비가 있다). 
    1세기 가락국 가야는 기독교국가였다. 예수님의 12제자 중 도마가 한국에 왔었다.  좀 황당한 주장같지만 그도 그럴 것이 학교에서 이런 내용을 가르쳐 줄 리는 만무하니 말입니다.
    1세기 당시에 예루살렘에서 인도를 거쳐 한국까지 사람이 다녀가셨다고? 자, 이제부터 설명을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도마박물관 조국현박사님의 설명에 다른 전문가들의 자료를 보완한 것입니다.
    김병모박사 (크리스챤 아님)
     http://i.imgur.com/zcN0Ynr.jpg 
     http://i.imgur.com/HlVjKre.jpg

    조국현박사
    1988년 가야국이 기독교국가임을 최초 발표. 삼국유사중 가락국기 해설, 가락국 20년 연구, 도마박물관 관장, 목회자

    정학봉박사
    한국역사철학자, 대신대 대학원원장, 인도 18회 방문하며 조국현 박사의 이론 입증 `````

    이장식박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종교학과(B.A), 장신대 신대원(Th.B), (Th.M), 서독 뮌스터대학 신학부
    미국 하버드대학 신학부(Th.M), 미국 드류대학 대학원(Ph.D)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도마가 해양 실크로드의 마지막 항구인 땅끝 나라 한국 김해에 도착하여 활동하였습니다.
     
    (3) 도마의 행적
    1) 도마는 40년간 선교의 사역을 하였는데 도마의 전반기 20년은 에데사 탁실라, 한국의 가야였으며 후반기 20년은 인도의 호칭, 챙나이에서 활동했습니다. 도마는 땅 끝이 인도인 줄 알고 왔었습니다.
    이 당시 인도 역시 로마의 동쪽 끝 속국이었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들어 인도까지 왔었는데 막상 인도에 와서 보니 인도와 교역하는 더 땅 끝인 한국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가야와 인도는 교역을 많이 하고 있었다)
    2) AD 42~47년까지 한국에 6년간 머무르며 김수로왕에게 침례를 주고 인도로 돌아갔습니다.(삼국유사 기록된 연대)
     http://i.imgur.com/Ritj5OZ.jpg
    3) AD 48년에 허황옥을 김수로왕에게 중매했습니다.
    도마는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 총회에 선교보고를 하러 가던 길에
    인도에 들러 허황옥을 김수로왕에게 중매시켜주고는 그 길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4) AD 50년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했습니다.(서양의 역사에 기록된 연대)
    5) AD 52년 인도 서남부 케랄라주에서 선교하였습니다.(인도의 역사에 기록된 연대)
    6) AD 72년 인도의 첸나이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습니다.
     
    (4)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
     1) 허황옥은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왔다.
    아유타국은 현재 인도에 있는 갠지스강 아이오디아라는 조그마한 읍이 있습니다. 그 옆에는 페자바드란 큰 도시가 있습니다.
    허황옥의 아버지는 약초, 향신료 등을 수출하는 아유로베다 무역상을 했던 소왕국 아유타국의 왕이었습니다.
    이 아유타국에서 허황옥은 48년에 한국(가야)로 시집 왔습니다.
    가락국기에 허황옥이 시집오면서 들고온 물품들을 보면 당시 실크로드를 통해 교역됐던 물품들이었습니다.
    이런 물품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에도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당시 가락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의 무역 교두보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중국 현금이 발견됐습니다.
    http://i.imgur.com/OozlYGr.png

    중국 왕망은 신나라를 만들고 3차례 화폐개혁을 단행했습니다(AD 23년 왕망 죽음). 대천오십(AD 7~14년), 화천/화포(14~40년), 특히 화천은 20년간 통용됐습니다.
    아래는 그 화천이 발굴된 장소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이 사도행전의 복음사역을 감당할 때 당시 이미 중국에서 김해와 무역했지요.
    김해는 당시 최고 해상무역 관문이며 철을 수출했지요(KBS역사스페셜)  http://i.imgur.com/ARJu6nz.png

    1세기 당시는 육상 실크로드와 해상 실크로드가 왕성했습니다.
    그 이전에도 헬라의 알렉산더가 인도까지 통일했고, 페르시아 아하수에로왕 역시 그랬죠. BC 1000년 전 이미 솔로몬 때도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만들어 해상무역을 활발히 했습니다. 그러니 바닷길도 엄연히 잘 발달돼 있음을 간과하면 안됩니다.
    경주에서 매년 열리는 [실크로드 축제] 팜플렛.
    http://i.imgur.com/wsA53g0.jpg

    -KBS역사스페셜-   [로만글라스 2000년전에 신라에 오다]
    http://i.imgur.com/2GcxuCE.jpg

    2) 허황옥의 후손들
    허황옥이 10왕자 2공주를 낳습니다. 그 후손이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 이씨입니다. 허황옥의 아버지로 부터 내려오는 왕손이 지금도 인도에 살고 있습니다.
    http://i.imgur.com/MbLkcWN.jpg
    3김씨 문중 한 분인 김종필씨가 아유타에 있는 그 후손을 찾아내서 김해에 데려와서 허황옥릉에 참배도 하고 기념식수도 해놓았으며 이런 인연으로 페자바드시와 김해시는 자매결연까지 맺은 상태입니다.
    http://i.imgur.com/gkm5LAh.jpg

    가야국과 인도와의 교역의 증거로는 한국어 속에는 인도어(드리비다어)가 400여개나 있습니다.
    특히 농사 관련 유사 단어 (쌀-Sal, 벼-Bya, 가래-Kalai, 메뚜기-Metti, 풀-Pul 등)

    (5) 가락국기에서 밝히는 아유타국
    삼국유사의 내용 중에 가야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 놓은 가락국기에 보면 허황옥은 아유타에서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요디아란 말 자체가 인도 의학, 아유로베다 의학을 하는 사람이 옛날에 그 왕국을 아유타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인도에서 아유로베다란 의학이 의료관광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6) 서울대학교 서정선교수의 DNA검사
    김해 대성동 고분박물관에는 허황옥과 김수로왕의 후손들의 유물이 있습니다. 거기에 묻힌 고분의 뼈의 DNA검사 결과 허황옥은 인도의 타미린과 같은 염색체로 밝혀졌습니다.
    이로 인해 허황옥의 한국사람, 일본사람, 중국사람 등 많은 설이 있다가 서교수의 발표로 잠잠해 졌습니다.

    5. 김수로왕은 누구인가?
    (1)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교과서에는 이전까지는 알에서 나온 신화적 인물로 소개했지만 현재는 기마민족 정도로 본다고 실려있습니다.
    http://i.imgur.com/S1GlymX.jpg

    (2) 흑해의 스키타이 민족
    김수로왕은 흑해 옆에 있는 스키타이 출신 왕자입니다.
    스키타이 민족은 문자가 없으면서, 금은세공이 굉장히 발달한 민족입니다. 신라의 금관, 귀고리 등에 보이는 '무금세공방법'이라고 하여 점이 찍히는 세공법입니다. 이 방법은 스키타이민족만 가능한 것으로 나중에는 신라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유목민들은 금을 숭상합니다. 가야가 멸망하고 신라로 흡수되었기 때문에 신라에는 백제나 고구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금문화가 있습니다.
    따라서 흉노(스카티아)가 인종학적으로는 아시아족에 속하는 황인종 퉁구스계열에 속합니다.      
     (시베리아.만주.한반도 사람들을 지칭하는 동호=전통적인 동이족)

    신라 경주 김씨들이 비문에 자신들을 흉노족의 후손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라 문무왕 비문에는 김알지는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KBS역사스페셜). http://i.imgur.com/W518iHy.png

     중국문헌의 기록의 근거는 고대 중국의 삼국지에 나오는 오나라의 왕 손권이 고구려를 ‘흉노의 왕’이라는 ‘흉노의 선우’라고 지칭한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http://i.imgur.com/0vUNEfM.jpg

    유럽인들이 경주 방문하면 꼭 들르는 곳입니다. 신라 원성왕릉(괘릉)
    http://i.imgur.com/8gjr6hZ.jpg
    왕릉입구. 왼쪽에 문인은 신라사람이고 오른쪽 무인은 흉노족 입니다.
    http://i.imgur.com/PU3lgZH.jpg
    경주의 괘릉에 있는 무인석상입니다.
    신라 원성왕릉(785~798,김경신) 앞에 있는 것으로 AD 700년 경에 신라에 스키타이민족과의 교역을 잘 보여줍니다.
    얼굴 모양이 중앙 아시아인 - 아시아에서 서진한 스키타이족(흉노)이 유럽인들과 피를 섞여 동진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김수로왕의 청동 솥
    김수로왕의 유물중에는 김수로왕이 들고 온 청동 솥이 있습니다.
    그 청동솥은 쇠꼬챙이로 꿰어서 고기도 삼고 차도 끓이는 유목민들의 것입니다. 이것이 1990년대 초반에 김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발견으로 고고학계에서는 김수로왕은 스키타이 사람이라고 다시 굳혀지게 되었습니다. http://i.imgur.com/G7iGQCU.png
    이런 영향은 신라에도 고스란히 전달되어, 신라 금관총에서도 기마인물형토기가 출토되었습니다.
    http://i.imgur.com/FdmXbW7.jpg   http://i.imgur.com/nad6zbf.jpg

    (4) 김수로왕은 유태계 스키타이인
    성경에 보면 골3:11에 나오는 '스구디아인'이 바로 스키타이인입니다.
    스구디아인은 흑해 야만족인데 유대인들이 그리로 와서 유대인 스쿠디아인이 됩니다.  이들이 철기 문명을 가집니다.
    http://i.imgur.com/6u6z1UE.jpg

    한반도 철기문화 보급, 김해박물관에 철기 유물이 굉장히 많이 전시 돼 있습니다. http://i.imgur.com/8xssXmE.jpg
    김해에서는 해마다 이렇게 철기문화의 가야를 알리는 행사가 열립니다. 청동기로 살던 한반도에 철기문명이 들어옵니다.
    1세기 당시 아시아의 반대편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미 철연장을 사용하며 로마에 끌려가 콜로세움을 짓습니다. 철기는 보편화 된 것입니다. 이렇게 스키타이족은 철기를 사용하는 강력한 기마민족입니다. 이들이 북쪽으로 거쳐 중국까지 옵니다.
    http://i.imgur.com/KVUvCpD.jpg
    당시 실크로드는 육상과 해상이 이렇게 거미줄 처럼 연결돼 있었습니다. 정학봉교수에 의하면 거기서 성을 쌓고 정착 하다가 너무 힘드니까 남하하게 되었고 고구려, 신라, 백제 등에도 많이 흡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김수로왕은 삼국의 틈새인 가야에 온 것입니다.
    김수로왕은 스키타이에서 와서 중국의 소김천씨라는 마을을 거쳐왔기 때문에 성은 김씨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김해의 구지봉에 왔을 때에 얼굴도 다르고 말도 못하니 가마 안에 있으면서 통역을 통해 얘기를 나누고 왕으로 선포되었습니다(삼국유사 가락국기).
    김해 박물관에 가면 스키타이인이 왔다는 유적이 있습니다.
    김해지역과 경주지역 고분에서 발굴된 동복, 각배, 황금장식 등 북방유목민들의 유골과 유물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김수로왕은 혼혈 스키타이 유대인이란 것입니다.
    사도들의 사역 방법은 어디를 가든지 흩어진(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도마가 인도에 왔을 때 찾아간 아유타족 역시 유대인 혈족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사도들의 전도전략).
    그런 연유로 도마가 한국에 왔을 때 김수로왕이 유대계였던 관계로 그렇게 만난 것입니다. 사실 기원전 천년 솔로몬 시대때부터 유대인들은 전 세계를 다니면서 무역을 했습니다(왕상9:26,10:22).
    에시온게벨이란 항구였습니다. 이곳이 실질적인 해양실크로드의 출발입니다.   http://i.imgur.com/rFpgBKv.png

    기원후 얼마까지 전세계를 다니면서 상업을 한 민족은 전세계에서 유대인 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불교 신문에서도 불경을 나른 사람은 100% 유대인이라고 한답니다. 정학봉박사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6일을 그렇게 이동하다가 7일 안식일에는 예배를 드려야하므로 크고 작게 모여서 집성촌을 이루고 회당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6. 허황옥은 어떤 사람인가 ?
    (1) 사도 도마가 에데사를 거쳐서 탁실라(터키 이슬라바마드 옆)에서 왕궁을 짓고 인도 아유타국을 거쳐올 때에 허황옥의 나이는 10살이었습니다.
     김수로왕은 6년간 신하들이 좋은 혼처를 주선하였지만 결혼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6년 뒤, 허황옥의 나이가 16세 때 김수로왕에게 시집가기로 결심합니다. http://i.imgur.com/asz4wsx.jpg

    (2) 인도로 간 도마는 허황옥의 아버지에게 가야에 김수로왕이
    모든 혼처를 마다하고 허황옥을 기다리고 있다는 정보를 주게 됩니다. 그래서 가락국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허황옥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동시에 꿈을 주었다고 합니다.
    허황옥이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죽으면 죽으리란 심정으로 시집을 오게 됩니다. "부왕이 왕비로 더불어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젯밤 꿈에 함께 상제를 뵈었는데 상제의 말씀이 가락국왕 수로를 내려보내 등극케 하였으니 그는 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새로 나라를 세웠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 짝을 삼게 하라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니라..."(삼국유사 가락국기 -일연스님-)
    (상제란 말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나라 최초 성경에도 하나님을 '상제'로 번역했습니다. '엘 샤다이'를 중국 광동어로 번역할 때 '상제(샹다이)'로 번역함.) 이렇게 중매후 도마는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떠납니다.

    (3) 허황옥이 시집 오면서 타고 왔던 배의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해 싣고 왔던 돌이 있습니다.   http://i.imgur.com/4nYHpvJ.jpg
    김수로왕은 공주가 오는 날짜에 맞춰 크게 환영행사를 열었고, 공주를 태워온 20여명의 뱃사공들에게 큰 선물을 줍니다. 8월 1일 이 배가 돌아가는데 벼 150석을 실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선물들을 배에 다 실으려니 당연히 싣고 왔던 돌들은 강변에 내려두고 간 것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탑으로 쌓아놓은 것입니다. 물론 이 돌들은 인도 산인 것이 밝혀졌습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기록대로 구지봉을 비롯하여 파사석탑이 있는 일대가 모두 바다였습니다.
    (김해평야가 만들어진 것은 3세기입니다. 가야의 철기 문화로 산에 나무를 베고 개간이 가능졌기 때문입니다.)
    (김해박물관에 전시된 조개무덤 패총은 옛날에는 이곳이 전부 바다였다는 증거) http://i.imgur.com/6W2yHO5.jpg

    물론 불교계에선 '허황후가 불교를 들고 들어왔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고려 말(AD 1281년) 일연스님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이 당시에는 불교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삼국유사 제3권 [금관성 파사석탑]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때 (김수로왕과 허왕후 시대) 해동에서는 아직 절을 창건하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으니 대개 부처님 화상과 교리가 이르지 않았던 까닭으로 토박이 사람들이 신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기(本記)에는 절을 창건하는 기록이 없었다. 제8대 질지왕 2년 임진에 이르러 비로소 그 땅에 절(왕후사)를 세웠고..."
    일연에 의하면 불교가 한반도에 전파된 시기는 가락국의 건국(서기 42년)보다 훨씬 이후라고 합니다.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 불교가 우리나라 들어온 때를 고구려 AD 372년, 백제384, 신라462, 가야 452이라고 밝혔습니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AD 67입니다. 그 영향으로 고구려에는 372년, 백제는 384년에 전파되었습니다.

    신라에는 418 년(신라 눌지왕 2년)에 고구려의 스님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파하려 했으나 신라왕가에서 반대하여 3년간 숨어 지내다 끝내 허락받고 흥륜사를 지으며 불교를 전파하였으나 신라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죽었습니다.
     
    가야는 AD 452년 (8대 질지왕 2년) 왕후사를 세웠습니다. 그후 AD 528년 신라는 이차돈이 순교함으로 불교를 승인합니다.
    연대를 보면 중국에서부터 불교가 들어오는 시간 순서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올 때 상당한 저항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저항을 과연 어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했을까요? 감히 법흥왕이 불교를 믿고 싶었는데도 신하들이 왜 일제히 반대를 했을까요? 단순한 미신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이 한반도는 불교가 들어오기 전, 이미 기독교가 뿌리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7. 경북 영주의 도마상
    (1) 경북 영주에는 도마의 상도 발견되었습니다.
    http://i.imgur.com/78pxyWo.jpg
    이것을 처음 발견한 분은 당시 서울관악고등학교 역사교사이며 당시 순복음교회집사님이셨는데, 어느 날 기도 중에 경북 영주에 가보라는 음성을 주셨다고 합니다. 가보니 막상 이끼와 숲으로 뒤덮힌 바위덩어리였답니다. 아무런 무속행위가 없었으니 넝쿨에 묻혀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과 함께 청소를 했답니다. 유적 청소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대나무와 붓을 가지고 하나하나 청소하기 시작했답니다. 맨 위에 오른쪽에 청소하다보니 맨 오른 쪽에 히브리글자 네 자가 보인 것입니다. http://i.imgur.com/tPQpqft.jpg
    [타우멤] = 바로 [도마]입니다.
    히브리어 글자를 가장 먼저 학술화 한 분이 이장식 박사입니다.
    이 분은 도마연구를 위해서 영국 멘체스터 대학에서 1년간, 미국 예일대에서 1년간 교환교수로 갔었고 한국에 돌아와서 [아시아 고대기독교회사]란 책을 내고 도마상의 [타우멤]이 도마란 사실을 학계에 공식 보고하였습니다.
    도마상의 왼쪽 밑을 보면 [지전행]이라는 한자가 씌여져 있습니다.
    한자에는 여러 서체가 있습니다.
    이 서체는 예서체입니다. 예서체는 중국 한나라시대(BC 206년~AD 220년)에 사용한 것이라 불교가 들어오기 전의 석상임을 입증합니다. 또한 가야 건국이 바로 중국 한나라시대입니다.
    그리고 불상에는 발가락이 이렇게 묘사된 것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유일하게 발가락이 선명히 묘사된 것은 바로 샌들이기에 그렇습니다.
    http://i.imgur.com/DjRky4Y.png
    http://i.imgur.com/forrFTB.jpg
    혹자는 도마가 왜 십계명에서 금한 형상을 만들었을까란 의문을 제기합니다. 아마도 도마가 쓴 '지전행'이란 글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지전행이란 것은 '땅 끝까지 다닌 사람'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행1:8 명령을 따라 땅끝까지 이르러 주의 복음을 정말 땅 끝까지 전한 사도 도마의 고백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도마는 40년간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며 주로 강과 바다쪽으로만 다녔습니다.
    http://i.imgur.com/KHqW4FB.jpg
    도마는 왕궁건축기술자였습니다. 에뎃사와 북인도에서 선교 하며 군다포러스 왕궁을 건축했습니다.
    그러다가 실크로드의 땅 끝인 한국의 낙동강 지역을 선교하게 되었습니다(가락국기에 기록된 연대 AD 42년).
    AD 48년에 김수로왕과 허황옥을 중매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AD 50년에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합니다(서양역사 연대).
    AD 52년 인도의 서남부 케랄라주에서 선교하다가(인도역사에 기록된 연대),
    AD 72년 인도의 첸나이에서 창에 찔려 순교합니다.
    이렇게 도마의 일생은 한국과 서양과 인도에 기록된 연사적 연대가 한 사람의 이력서처럼 정확히 일치합니다.
    특히 경북 영주의 지형을 보면, 영주는 지금으로서는 제일 작은촌이지만 세계적인 해상 실크로드와 육로의 실크로드가 만나는 맨 마지막 지점입니다(형상강 지구대). http://i.imgur.com/cU3qZg0.png
    그리고 도마상의 머리가 없습니다.
    정학봉교수의 책에 의하면 사람들이 머리를 인근 제변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찾아가 보니 그 얼굴을 보니 한국사람이 아니라 유대인의 골격과 같다고 보고합니다.
    신기한 일은 경북의 기독교율이 8%인데 영주는 30%입니다.

    (2) 나뭇결 무늬 유리잔(황남대총남분, 신라)
    대릉원 황남대분에서 발견된 것으로 이스라엘 제로 판명이 났습니다.
    현재 김해박물관에는 굉장히 수많은 성찬기(성찬식을 행하는 용기)를 볼 수 있습니다. 가야에는 그 흔한 불상 하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철저한 기독교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3) 쌍어문 = 이게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김수로왕능 입구 현판입니다. 당시 백제,신라,고구려에는 이런 국기 같은 마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독 가야에서만은 이런 그림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수많은 추측의 자료들이 제시되었습니다. 현재 김수로왕능 입구의 현판에 걸린 그림은 위에 있는 사진입니다.
    그러나 저렇게 바뀌기 전에 원래 있던 모양은 아래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김해박물관 옛날 홍보자료(브로슈어)에도 실려 있습니다.
    나무 목판이다보니 보수를 하면서 저렇게 원형과 판이하게 다르게 변질돼 버렸습니다.  
     http://i.imgur.com/eKACzhu.jpg
    313년까지는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오병이어)가 기독교의 상징이었습니다.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한 후 313년 이후부터 십자가로 바뀌었습니다. 이 쌍어문의 이 그림은 바로 오병이어를 먹는 모습입니다. 빨간 점들은 유월절 양의 피를 의미하는 것이고,
    입 모양에 떡과 물고기 두마리를 두었냐하면 먹는다는 의미입니다.
    오병이어는 먹는 것임을 합니다.
    물고기의 등지느러미 형태는 이스라엘의 타부가(가버나움)에 있는 오병이어 물고기의 모양과 일치합니다.
    결국 바울이 로마를 찍고 스페인(서바나) 서쪽 끝으로~
    동쪽으로는 가장 의심많다고 타박했던 도마가 동쪽 끝까지 복음들고 왔었습니다
    2천년 전의 역사를 무슨 수로 100% 고증시켜주길 바라겠습니까?!!
    몇몇 납득하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그렇다고 전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행1:8 땅끝까지 이르러 나를 위한 증인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은 못 이루나 하나님은 이루실수 있으므로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또 신약성경이 정경화 되기 전이니 지금의 기준으로 볼 땐 내용적으로도 많이 아쉽지만  이젠 우리에게  66권 성경과 함께 복음의 바통이 넘어왔습니다. 우리들도 사도 도마처럼 세상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의 증인이 되겠다는 각오를 할 때인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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