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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카톨릭의 평가
    타종교 2018. 1. 12. 00:14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로마 카톨릭 평가

    작금에 일어나고 있는 모종의 사건들은 모든 크리스챤 지성인들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로마 카톨릭이 무엇인지를 알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들고 있다. 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즉 기독교 사이에 화해를 도모하고자 하는  운동들이 일어나고, 숱한 회의들이 개최되는가 하면, 이 같은 일을 환영하는 자들은 우리(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상호존중하에 협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니며, 크리스천 정신의 경이로운 구현(具現)이 아니냐고 말한다. 바로 이 같은 일련의 움직임 때문에, 현 국면을 바르게 파악해야 할 당위성이 있는 것이며 앞날을 내다볼 때  모종의 개연성 때문인 것이다.

    통계적으로 볼 때  머지않아 카톨릭의 비중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될 국가들은 전 세계적으로 상당수에 달할 것이며 그럴 경우, 로마 카톨릭은 '다수결 원칙'을 따르는 민주주의 국가 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하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야기될 모종의 개연성을 예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사실 우리나라(영국)라고 해서 수년 내에 그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현실을 감안해 볼 때, 우리가 이 같은 입장을 점검해 보고, 우리가 직면하게 될 엄청난 사실을 예의주시하는 것은 필요한 것이다.  본인은 개인적으로 전에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러한 성격의 어떤 ‘프로테스탄트 단체’에 소속된 적도 없고, 그 같은 주제로 강단에서 설교해 본 적도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로마 카톨릭주의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代案)은 기독교의 진리와  개혁 교리를 적극적으로 선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 외에 이 문제를 능히 다룰 수 있는 것은 전무후무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개신교회가 여러 해 동안 꾸준히 성장세를 유지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최근 들어 로마 카톨릭 교세가 실질적인 증가추세를 보이는 반면, 소극적인 개신교의 온갖 노력들은 무기력해 보인다.   

      본인은 이시간 부득불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인  ‘마귀의 속임수’에 대해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카톨릭 신자이면서 동시에 크리스천인  일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카톨릭 체제에 대한 역사기록을 알고 있고, 정치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카톨릭의 주장들이 정치적인 힘으로 발전된다는 사실도  알지만 본인으로서는 오히려 영적인 측면에 관심이 있는데,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우리 앞에 제시하고자 하는 관건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I·로·마·카·톨·릭·체·제

    자,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까요? 우선 ‘하나의 체제’란 관점에서 살펴볼 때 본인으로서는 로마 카톨릭교로 알려진 이 체제야말로, ‘마귀의 가장 위대한 걸작품’이라고 단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체제는 크리스천의 믿음과 성경의 가르침에서 심하게 이탈(離脫)된 종교이므로, 본인은 주저없이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과 더불어, 이 체제를 ‘배교집단’(背敎集團)이라 단언하는 바이다.

      우리는 배교를 기독교의 진리로부터 전적으로 이탈한 기독교라고 정의합니다. 혹자는, “글쎄요, 당신은 로마 카톨릭을 지칭하는 겁니까?” 라고 반문하겠지만, 여기에 대해선 무척 신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일에 카톨릭을 배교집단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사실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엔 진리에 대한 ‘부인’(否認)이라기 보다는,  진리에 대한 ‘첨가’(添加)로 말미암아, 마침내 진리로부터 이탈하게 된 경우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설명하자면 --- 진리에 대한 첨가야말로 온갖 교활함이 들어오는 곳이요, 마귀의 속임수가 들어오는 곳이란 말입니다.

    어떤 면에서, 무심코 바라보게 되면, 세상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만큼 정통인 교회가 없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같은 교리적 측면을 고려해 볼 때는, 로마 카톨릭의 정통성에 문제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로마 카톨릭은 나사렛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믿으며 예수님의 처녀탄생을 믿으며 예수님의 성육신을 믿으며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믿으며 십자가 위에서의 그분의 대속사역과 그분의 육체적 부활을 믿는다.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늘나라에 앉으신 것도 믿고 있다니 . 로마 카톨릭이 대부분의 개신교보다 훨씬 더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 카톨릭의 입장을 그토록 소름끼치게 만드는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사역에 대한 측면을 가지고 카톨릭을 보더라도, 카톨릭의 정통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은혜(恩惠)의 원리’에 대해 고려해 보면, 그것이 그들의 중심 교리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카톨릭을 단지 일반적인 접근방식으로 바라본다면, 카톨릭은 세계에서 가장 정통적 교회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이점에서 교활함이 들어오고 어려운 문제들이 야기된다. 카톨릭은 이 모든 것에다 ‘저주받을 더하기’로써, 전적으로 비(非)성경적인 것들과, 사실상 성경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는 것들을, ‘첨가’(添加)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카톨릭이 가르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결국에 가서는 우리가 거짓말을 믿는 위치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카톨릭의 교리는 일종의 모조품(模造品)이며, 성경에 명시된 대로, 카톨릭은 다름 아닌 ‘매춘부’(賣春婦, 음녀) 그 자체입니다.

    과연 이 문제가 지극히 교활한 것이지만, 다행히도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도 ‘교활함’, 즉, 마귀의 속임수에 대한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교활함이 어떤 것인지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반드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문서를 읽어 볼 필요가 있다. 로마 카톨릭은 모든 사람에게 어떠한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카톨릭 체제는 무척 방대하고, 그녀의 교활함은 실로 커서 거의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다. 무작위로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틀림없이 여러분이 여러 번 접한 경우일 것이다. 여러분이 들어온 바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혼을 용납하지 않으며, 카톨릭 교인 중 누가 이혼했을 경우, 그는 교회로부터 제명당하게 될 것이다 .   그런데도 우리는 신문 지상에서 돌연 일부 독실(篤實)한 카톨릭 신도들의 이혼 소식을 접하고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라고 반문하게 됩니다. 글쎄요,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결코 진실된 결혼이 아니었다”고! ...

    그들은 어떤 것이든지 해명해낼 수 있고, 어려울 게 하나 없다. 그들의 견강부회(牽强附會 가당치도 않은 말을 억지로 끌어다 대어 자기 주장의 조건에 맞도록...)의 체계가 그러하며, 고도의 논법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의 대응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다. 혹은 달리 얘기해서, 로마 카톨릭이 실상으로 얼마나 많은 얼굴들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나라(영국) 안의 카톨릭을 살펴 보자. 또 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의 로마 카톨릭을 살펴 보십시오. 여러분이 미합중국에서의 카톨릭을 살펴 본 다음, 남아메리카에 있는 몇몇 라틴 국가들의 카톨릭을 살펴보게 되면, 그들이 동일한 체제라고 믿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주변 국가들의 카톨릭 교회와 대조해 보면,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같은 카톨릭 체제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도, 사실은 같은 카톨릭 체제이다. 카톨릭은 얼마든지 그 색깔과 모습, 형태를 바꿀 수 있다. 말하자면, 어디서든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카톨릭입니다. 흡사 카멜레온과 같이 ......여러분은 마귀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변모시킬 수 있는 것이 마귀의 특징 중의 하나라고 우리에게 알려 준,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카톨릭 교회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카톨릭의 ‘위장술’(僞裝術)에는 끝도 없고, 한계도 없다. 이 나라에서는 카톨릭이 고도의 지성적인 형태로 나타나서, 카톨릭 교도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권장합니다만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금하며, 비(非)지성적일 뿐만 아니라, 고의적으로 미신(迷信)을 조장하기도 한다. 또한 이 나라에서는 관용적이고, 기꺼이 들어주며, 토론도 하고 양보도 하며, 매우 친근한 모습을 취하는데 다른 후진 국가에서는 아주 완고하며, 이교(異敎)에 대해 사악하고도 비열한 방법으로 핍박을 가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동일한 로마 카톨릭 교회요, 동일한 카톨릭 체제이며, 동일한 카톨릭 교도들로서 존재합니다. 나는 이러한 증거들을 통해 카톨릭 교회가 마귀의 걸작품(傑作品)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 한 거대한 조직과 체제가 있어, 수십세기 동안  곧 온갖 교활함과 속임수 가운데서, 성경의 표현대로 “온갖 불의의 속임수로써”, 마귀의 속임수를 그대로 드러내 왔다. 이 모두가 성경에 분명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두 번째 장에서 이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이 조직이 활동해 오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그것이 계시록 13장의 두 번째 짐승으로 묘사되어 있고 계시록 17장의 일곱 언덕 위에 앉아 있는 ‘거대한 음녀(淫女)’의 그림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듯이, 바로 로마 카톨릭이 그러하며 언제나 그같이 행해 왔다.

    이 모든 사실은 역사 속에서 그대로 재현되어 왔으니, 이런 식으로 이렇게 성취되어 왔습니다. 여기 은밀히 유입되어 들어와 한 때 기독교 전체를 실질적으로 장악했던 어떤 체제가 있었는데  바로 로마 카톨릭이 천천히, 교활하게 스며들어와, 변질시켰고, 그 결과 카톨릭의 영향력은 거의 보편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II·로·마·카·톨·릭·의·중·대·한·오·류·들

    로마 카톨릭이 행한 일은 어떤 것입니까? 몇몇 머리글들을 제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본 내용을 세 가지 주요 표제글로 나누고자 합니다. 

     

    1. 첫째는 로마 카톨릭이 어떻게 우상숭배와 미신행위를 도입하는 죄를 범해 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상숭배만큼 신랄하게 정죄 받는 행위도 없다. 우리는 결코 ‘조각한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로마 카톨릭은 형상들로 가득차 있다. 카톨릭은 신도들에게 형상들을 숭배하도록 가르치고 있으며 그들은 동상들과 조형물들과 초상화들을 숭배한다. 여러분이 거대한 천주교 성당에 가보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에 가보십시오. 거기에 사도(使徒) 베드로를 기념하는 동상(銅像)이 있는데, 그 동상의 발가락 부분을 보면, 그 부분이 많이 닳아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구요? 로마 카톨릭의 그릇된 가르침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발가락에 입을 맞추기 때문이다! 그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절하면서, 형상들과, 동상들과 유물들을 숭배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성인의 유물들과, 뼈 조각들과, 사용했던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어떤 특별한 장소에 안치하여, 그것을 숭배하며 그 앞에 절을 합니다. 이 정도는 그들이 행하는 우상숭배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2. 두 번째 커다란 오류는 카톨릭의 전 체제와 가르침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를 차단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것이야말로 수많은 오류들 중 가장 끔찍한 오류이다. 예를 들어 로마 카톨릭 교회 자체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끼어 들어오고 있다. 로마 카톨릭은 카톨릭 교회 자체가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합니다. 교회 밖에서는 ---“extra ecclesiam”, 결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 “nulla salus”. 즉 카톨릭 교회가 절대적인 필수요건이란 말이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혼 사이에 카톨릭 교회를 끼워 넣고 있다. 카톨릭은 그녀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됨을 사칭(詐稱)하고 있다. 여러분은 신약 성경의 어디에서도 그 같은 근거를 찾아볼 수 없지만  단지 로마 카톨릭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로마 카톨릭은 그녀 자신만이 진리가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한다. 그녀가 진리를 묘사하고, 그녀만이 진리에 대해 정의내리고 진리를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개신교에서는 당연히 그와 정 반대로, ‘전(全) 신자의 보편적 만인제사장교리를  가르치며, 각 사람마다 스스로 성경을 읽을 권리가 있고, 성령님의 조명하에서  해석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 사실을 절대적으로 철저히 부정한다. 로마 카톨릭, 오직 로마 카톨릭만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으며,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있다고 한다.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가 스스로 ‘지속적인 계시(啓示)’를 받아왔노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카톨릭은, 크리스천들이 믿는 바와는 달리, 계시가 신약성경과 함께 끝났다고 믿지 않는다. 그녀는 아직도 계시가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에다 첨가해야 옳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물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반면, 카톨릭이 덧붙인 카톨릭의 전통도 성경과 동일하게 권위가 있고, 구속력(拘束力)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성경으로부터 이탈하게 만드는 카톨릭적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교회로 교활함이 기어들어오는 곳이 이 부분이다.

    마침내 종착역에 도달하게 되면 카톨릭은 우리에게 전체주의적 충성을 강요한다. 그녀는 우리가 믿는 것, 행하는 것까지 지배하려 듭니다. 그녀는 스스로 우리의 영혼과 구원을 책임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가르쳐 준 대로 철저히 굴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히틀러가 그의 잔혹한 체제 안에서 했던 행위만큼이나, 카톨릭이 신도들의 혼을 절대적으로 얽어매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이 전체주의적 체제이다.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카톨릭이 버티고 서 있다.

    , 로마 교황과 교황에 대한 온갖 가르침들을 들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일컬어진다. 그는 사도 베드로의 영적인 직계 후손으로서, 사도적 계승을 통해 사도 베드로의 모든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 교황을 ‘거룩한 아버지’(성부, 聖父),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부른다. 비록 성경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땅 위의 어떤 사람도 ‘아버지’(Father)라 부르지 마라.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아버님뿐이다.”고 말씀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들은 추기경회의에서 ‘권좌(權座)로부터’ 선언한다고 하면서 교황이 “절대무오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곧 교화으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절대무오하고, 그리스도 자신처럼 절대무오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드러난 증거는 사제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로마 카톨릭의 사제들은 특별한 존재들이다.  성직자(사제)가 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카톨릭 교회에서 훈련받고, 교회의 성직수임(聖職受任)을 받아, ‘사도적 계승’에서 나오는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은 우리 모두가 성직자들이라고 알려 줍니다. “여러분은 선택받은 세대요, 왕가의 성직자 체계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전혀 “아니올시다”입니다. “당신들은 단지 평신도(平信徒)일 뿐, 결코 성직자가 아니며, 오직 카톨릭에서 수임을 받은 사람만이 성직자(사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제들에게 기적을 행하는 것과 같은 독특한 권능을 부여해 줍니다.

    그들은 사제가 주님의 만찬(晩餐)에서 빵과 포도주와 연관된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의 그 같은 능력을 ‘화체’(化體)라고 부릅니다. 빵은 더 이상 그냥 빵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고 그들이 말하는데 겉모습과 색깔은 잔상(殘像)으로 남지만, 내용물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화체(化體)된다고 한다. 그같은 주장은 당연히 성례전(聖禮典, 성사)에 관한 교리 전체로 이어집니다. 카톨릭엔 일곱 성사(성례전)가 있지만, 본인은 이 중 특히 세례성사(洗禮聖事)와 성체성사(聖體聖事)에 대해 관심이 있으며, 그들은 이 두 성사에 기적이 역사한다고 서슴없이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것은 마귀의 교활한 속임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첨가’된 것으로서, 거기에 대해 신약 성경에 단 한 단어의 언급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사제에 대한 언급을 마치기 전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니, 곧 로마 카톨릭의 사제는 우리가 그 앞에 나아가 우리 죄들을 고백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카톨릭에서 사제는 면죄(免罪)를 선언하고, 우리에게 죄사함을 베풀 수 있는 권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죄(허물)를 하나님께 고백해야 하고, 거듭난 크리스천들의 교회 안에서 서로에게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사제들’에게 고백하라는 말씀은 전혀 없습니다. 

    네 번째의 증거는  우리를 가장 경악스럽게 하는 터무니 없는 궤변(詭辯) 중의 하나입니다. 로마 카톨릭주의의 마리아 숭배가 놀라울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카톨릭에서 마리아는 ‘하늘의 여왕’으로 일컬어지며, 그녀는 우리가 일차적으로 찾아가야 할 대상이 되고 있다. 많은 성당들 가운데서 성모(聖母) 마리아 상(像)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에 의해 가려져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여기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인간적인 모습을 지닌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훨씬 사랑스럽고 부드럽게 다가오며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도 엄격하기에 우리는 그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시기 때문에 예수님께 영향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중보(仲保)해 주시도록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바로 우리 영혼의 구주이신 하나님의 아드님과 우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점증적으로 마리아의 권능에 뭔가를 ‘첨가’해왔다. 카톨릭 교회는 1854년에 마리아의 ‘무염시태설’ 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없이 태어나셨듯이, 성모 마리아도 또한 그렇게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마리아의 몽소승천’(蒙召昇天)의 교리를 발표했는데, 그 의미는 마리아가  결코 죽지 않았고 묻히지도 않았으며, 그녀의 아드님처럼 문자 그대로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성인들이 우리를 위해 중보할 수 있고, 우리가 부족하거나 결핍되어 있음이 발견되면 그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공덕의 잉여분을 우리에게 전가(轉嫁)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여러분은 성인들을 숭배하고, 성인들에게 기도하며, 그들을 의지해야 합니다.

       마귀의 온갖 속임수가 들어오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한편으로는 로마 카톨릭이 뭐든지 옳은 것만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문제는 그 다음에 ‘첨가’(添加)시키는 이 모든 것들이  무엇인지 의아하게 만들 정도입니다.    

    여러분은 각종 의식을 지켜야 하고, 그들이 하라고 일러준 대로 행해야 합니다. 특정한 절기에는 금식(禁食)해야 하고,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하며, 사제 앞에 나아가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일단 미사에 참석한 다음에는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해도 됩니다. 여러분의 죄는 덮어졌고, 다시 올바르게 교정되었으니 계속 여러분의 길을 가십시오.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거룩한 삶의 간단, 명료함 대신에, 여러분에게는 의식(儀式)들과 의례(儀禮)들과 절기(節氣)들이 있습니다. 또 다른 심각한 오류(誤謬)는 카톨릭이 ‘구원의 확신’(구원의 보장성)의 교리를 전적으로 부정(否定)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確信)의 교리만큼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서도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증거하십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카톨릭에서는  이 땅에서의 삶에는 확실성(確實性)과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다. 그런데도 무슨 구원의 확신(보장성)이란 말입니까? 이것이 그들의 반박이며, 이는 매우 논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로마 카톨릭 체제가 마귀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부분이 바로 여기이며 적어도 이 같은 비범한 천재성으로 이 모든 일을 성사시킬만한 존재는 마귀 외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례를 받을 때 여러분의 원죄(原罪)가 말소되고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됩니다.  그렇다면 세례 후 죄 문제, 즉 세례받은 이후에 범한 죄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여러분이 받은 세례는 세례 후에 지은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거기에 대해 어떡하시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여전히 우리를 모든 죄와 불의에서 깨끗케 하시며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나의 과거의 죄들, 현재의 죄들, 미래의 죄들을 덮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단 한 번의 행동으로 충분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로마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세례 후 죄 문제는 전혀 다른 성격의 문제입니다. 거기에 대해 내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사제에게 가서 죄를 고백해야만 하며 오직 그만이 이 문제를 다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제라고해서 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도달하게 되면, 이들 세례 이후의 죄 문제와 함께 지옥과 처벌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 때 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 문제 없습니다,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여기에 고해성사(告解聖事)가 있습니다. 사제 혼자서 여러분을 위해 그것을 베풀 수 있으며, 그는 능히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고해성사를 받게 되고, 사제에게 특별 고백을 하게 되며 여러분은 면죄를 받게 됩니다.

    그것으로 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도 안됩니다!. 거진 다 왔지만, 여전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남아있게 됩니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 다행스럽게도, ‘연옥’(煉獄)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있습니다,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용서받지 못한 세례 후의 죄가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 죄를 씻기 위해 그곳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자, 여전히 남아있는 나의 친척들이 나를 위해 기도를 하며 그렇게 하면서 돈을 지불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에게는 온갖 ‘면죄부’(免罪符)들과 온갖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들’과 온갖 촛불들과 지불한 돈이 있게 됩니다. 돈을 더 많이 낼수록 이러한 죄들이 연옥에서 더 빨리 처리되며 이 사람은 연옥에서 더 빨리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같은 주장을 성경에서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물론 전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카톨릭이 지금까지 주장해 온 추가계시(追加啓示)의 일부분이며, 이것이야말로 첨가 그 자체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충분치가 못하고, 이 모든 방식들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즉 내가 이같은 로마 카톨릭을 배교집단(背敎集團)이라고 말한다 해서 지나쳤단 말입니까?


    III·결·론

    이 모든 것들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카톨릭 교도들은 무지 속에 감금되어 있으며 미신행위에 빠져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마침내, 그들이 진리의 길을 걷는 자들에 대해 잔혹한 핍박을 가하게 되는 것이며,   그들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뿌렸고, 여전히 도처에서 기회만 주어지면 그런 일들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직면해야만 하는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 자신은 여기에 대해 답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 체제가 전적으로 공산주의보다도 훨씬 위험한 체제인 것은, 그 체제가 기독교로 날조(捏造)된 체제이면서도,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주빛 여자’이며, 가장 끔찍하고도, 더럽기 짝이 없는 속임수인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또 다른 얼굴은 공공연하고도 명명백백한 무신론적 불신앙(不信仰)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그 괴물이 진리(眞理)가 아니라고 말했고, 그리하여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성경이 절대적이고, 최종적(最終的)이며, 정확한 권위임과, 모든 믿는 자들의 성직자 체계 등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그같은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많은 자들이 그 진리를 위해 순교(殉敎)당했습니다! 

    여러분은 또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그렇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가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단지 카톨릭의 과거만 들춰내려 하고, 마치 16세기에 살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지금 당신은 20세기에 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십니까?” 본인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로마 카톨릭의 거만한 허풍(虛風)이 바로 이것이며, 로마 카톨릭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Semper eadem.” 어떻게 로마 카톨릭이 달라질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녀가 달라진다면, 그녀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는 셈이 되겠지만, 오히려 그녀는 여전히 말하기를,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절대무오(絶對無誤)하며 교황은 바로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결코 실수를 할 수 없으신 분이시다 라고 합니다.

         로마 카톨릭이 추호라도 변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카톨릭의 핵심주장을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그녀는 결코 변하고 있다고 말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만일 이 지구상에 하나의 거대한 세계교회가 존재해 왔다면,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나머지 모든 교회들을 흡수하고, 무지한 상태에 있는 그들을 집어 삼켜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기독교 모조품이요, 가짜이며 가장 사악한 매춘부요 가장 마귀적인 집단입니다. 실로 적(敵)그리스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마땅히 거절해야 하고, 고발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대적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의 책임(責任)이 막중합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알아야만 하며, 진리를 이해해야만 하며, 거짓된 가르침을 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과 같은 거짓 기독교에 미혹(迷惑)되고 있는 순진한 사람들에 대해 바로 여러분이 책임이 있으니, 그들의 눈을 열어주며,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우리가 성경 위에 굳게 서고, 성경의 진리 위에 굳게 설 때, 본인이 믿기로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위에 강력한 부흥(復興)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그 같은 강력한 부흥만큼 이 가증한 체제, 곧 스스로 로마 교회라 칭하는 저 큰 ‘매춘부’(賣春婦)를 쓰러뜨릴만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에게 빛을 주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를 분별(分別)하게 하시며, 너무 늦기 전에 우리를 흔들어 깨워 주소서.

    너희가 마귀의 속임수를 능히 대항하여 서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에베소서 6장 11절).

    나는 천주교 신부였다 죤 잰 논의 구원 간증

    나는 1910년, 이태리 북부지방의 어느 가난하지만 경건한 천주교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1935년 6월 29일, 추기경 로시의 안수를 받고 곧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온지 2~3년이 지나서 생일 선물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한 대 받게 되어 난생 처음으로 라디오 방송을 재미있게 듣곤 했다. 그런데 의외로 프로테스탄트(신교:新敎) 프로그램을 상당히 관심있고 흥미있게 듣게 되었고, 가끔 주일에도 특별한 방송도 즐겼다. 설교도 참 좋았고, 특히 아름다운 찬송은 처음부터 내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설교하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에 대하여 크게 강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 생각에는 그 설교자들은 예수께서 원하시는 일을 잘 성취하고 있는 것 같았다. 즉,“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그 때를 계기로 해서 난 내가 속한 로마 카톨릭(천주교)이 어디가 옳고, 또 그들이 속한 신교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기 위해 성경책을 읽기 시작했다. 정말 진지하게, 또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갔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천주님(하나님)께 기도하기가 어려웠지만 내가 속한 천주교가 얼마나 성경과 큰 차이가 있는지 점차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요한복음을 읽다가 난 놀라운 비밀을 발견했던 것이다. 즉“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성경에서 나의 구원에 관해서 이것보다 더 분명하게 밝혀주는 곳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는 천주교 신부로 여러 해를 봉직해 왔지만 내 영혼의 구원에 대하여 한번도 확신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신부로서 아무리 훌륭하게 살고, 봉사하며, 선행을 쌓을찌라도 결코 내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성경에도 다음과 같은 귀절이 있었기 때문이다.“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이 말씀을 읽을 때 나의 천주교 신앙은 큰 충격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 나는 천주교의 교리를 무턱대고 받아들여왔다. 천주교에서는 규율이 엄격해서 그 교리를 받아들이든지, 혹은 아예 성당과 발을 끊고 파문을 당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지 이런 저런 질문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일생을 바치려던 신앙에 대한 의혹이 생겼기 때문에 나는 더 열심히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 말씀에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찾게 된 것이다.

    결국 나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물 하나로 모든 죄의 문제가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즉, 한 번이면서 영원한 효력이 있도록)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제사장들은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해 날마다 제사를 드렸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리려 이루셨음이니라”(히 7:27). 이젠 미사나, 고해성사나, 고행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단지 천주교에서 고안해 낸 갖가지 외형적인 의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성경을 계속 읽어가면서 보니 구주 예수의 모친인 마리아나 사도들에게 경배하라는 구절을 한 군데에서도 찾지 못했다. 오히려 마리아는 가나의 결혼식장에서“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 2:5)고 하여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스스로 부탁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며 그에게 나아오길 원하시지 결코 마리아나, 어떤 사도를 대언자로 세우신 적이 없다.“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마리아에게 예배하거나 사도를 섬기는 이런 것들은 모두 천주교가 꾸며낸 그들 나름대로의 교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 것이다. 결국 내 일생 처음으로 내가 몸바쳐오던 천주교가 완전히 잘못되어 있다는 엄청난 사실을 명약관화하게 깨닫게 되어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다. 이제 다른 생각할 필요도 없이 거기를 나오는 길 밖에 없었다.

    나는 내 신앙의 길을 다시 생각하며, 묵상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제 부모님과 형제들이 크게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될 것이고 또, 한편 가문을 더럽히게 되었다는 이유로 가정에서 어려움이 닥칠 것이 생각난 것이다. 실제로 신부로 충실해 오는 동안 좋은 친구도 많았고, 생활의 안정과 위신도 세울 수 있었다. 난 주저했지만 곧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내 마음 속에 아주 강한 음성으로 말씀해 주셨다.“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 10:37)

    이 엄청난 경고를 잊어버리려고 난 성경을 팽개치고 전보다 더 열심히 일에만 열중했다. 그전 신학교에 다닐 때 천주님께 맹세했던 것이나, 특히 신부가 될 때 안수받으면서 가장 훌륭한 천주교 신부가 되겠다고 굳게 다짐했던 일들이 자꾸 생각났다. 다른 것을 다 잊고 맡은 일에만 몰두했더니 얼마 동안은 좀 맘이 편했다.

    1955년 1월은 평생 잊지 못할 달이 되었다. 어느 기독교 잡지사의 편집인인 죠셉 챡체로라는 분이 나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는「더 컨버츠(The Converts)」라는 복음적인 잡지를 맡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신부님, 구원받으셨습니까?”하고 묻는 것이었다. 난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깜짝 놀랄만한 질문을 받은 이후로 내 머리 속에서는「구원」이라는 말이 떠나질 않았다. 나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알려달라고 간구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내게 성경을 통해 아주 분명하게 들려주신 말씀이 있었다.“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그 칼은 바로 내가 이전까지 사랑하고 아끼던 세상의 것들과 잘못된 죄와 인간의 허망한 철학을 다 끊어버리는 도구가 되었다.

    그 놀라운 계기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세주로 마음에 영접하게 된 오늘날 내가 뼈저리게 느끼고 경험한 것은 내가 오랫동안 몸바쳐 오던 천주교의 교리가‘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밝히 가르치는 성경의 길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으며, 잘못된 것인지 하는 것이다. 구원은 결코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며, 행위로 사들일 수도 없는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리디아서 2:16)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마틴 로이드 존스 의 로마 카톨릭 평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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