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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국가교회 창시자타종교 2018. 1. 12. 00:07
천주교 국가 교회 창시자 콘스탄틴과 어거스틴
2017년 10월 31일은 정확히 500년 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며 종교 개혁이 일어난 계기가 된 날입니다. 무려 1,000년 이상 유럽의 대다수 국가 국민들은 천주교회의 전체주의 시스템인 국가 교회 밑에서 영혼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신음 속에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러한 천주교 전체주의 시스템을 누가 만들어 주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단순히 교황들이 이런 것을 스스로 만든 것으로 이해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아닙니다. 이 국가 교회 전체주의 체제는
'교회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세상을 통치하는 왕국'이라는 가르침을 확고히 세우며 교황의 수위권을 공공연하게 인정하도록 만들어 준
두 인물, 즉 콘스탄틴과 어거스틴(395-430히포의 주교)에 의해 기초가 놓였습니다.
두 사람은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천주교회의 성인으로 추대받고 있다. 그런데 천주교회에서 개혁을 위해 항거한 프로테스탄트들의 후예들이 이 두 사람을 기독교의 큰 위인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어찌 개신교인들이 천주교 성인들을 찬양해야 한단 말인까? 역사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은 천주교 전체주의 국가 교회 시스템을 세운 사람들입니다.
위키백과 등 객관적인 세상 자료는 분명히 보여 준다.
이 글은 이런 자료들을 분석하고 요약하여 개신교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역사의 진실을 보여줍니다. 이 글을 통해 기독교의 뿌리는 천주교가 아니라 유대교이며, 기독교의 부흥을 위해서는 콘스탄틴이나 어거스틴이 아니라 예수님과 사도바울임을 개신교인들이 인지하면 좋겠다.
로마와 기독교
이교도 국가인 로마가 세계를 통치하던 시대에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고 사람들과 함께 사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부활셨고 승천하신 후 이 땅에 신약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 얼마나 영광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자신의 백성에게 얼마나 큰 복을 주셨는지 알기 원하면 사도행전을 읽기 바랍니다. 이때에 수많은 사람이 교회로 나왔으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확증하시기 위해 큰 기적과 이적들을 많이 보여셨습니다.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기독교는 초원의 불길처럼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기독교는 대륙과 대양을 건너가서 왕들을 떨게 하고 폭군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이렇게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온 세계를 뒤집어엎었습니다! 실로 그들의 메시지는 권능으로 충만했습니다(행 17:6).
그러나 여러 해가 가기 전에 몇몇 사람들은 성령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백성 위에 앉아 왕 노릇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처음와 같이 영적인 방법과 진리로 성도들을 치리하지 않고 자기들의 사상과 방법으로 치리하며 스스로 성령님을 대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7 '불법의 신비'가 이미 일하고 있다고 언급한 것을 보면, 배교활동이 심지어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때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배교하는 일'이 있을 것이며 몇몇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는데 이는 곧 이교도들의 가짜 교리들을 경고한 것입니다
(살후 2:3, 7; 딤전 4:2).
이제 기독교는 여러 형태의 바빌론 이교주의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바빌론 이교주의의 관습이나 예배의식을 거부했으며, 그 결과 많은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고소를 당하고 사자 굴에 던져졌으며 화형대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당시에 실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잔혹한 방법으로 고문당하고 순교당했지만, 로마 황제는 로마 전 지역에서 기독교 박해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의 주교들(지역 교회 감독들)은 명예를 얻게 되었으며 교회도 강한 권력을 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모든 것을 얻기 위해 비싼 값을 치러야만 했고 기독교와 이교주의 사이에는 많은 타협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로써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거룩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제도의 한 부분이 되어 버렸습니다.
황제는 교회에서 가장 큰 지도력을 발휘하고자 했는데, 그 이유는
이교주의에서 황제는 항상 신으로서 믿음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점에서부터 이교주의가 혼합돼 기독교에 들어오게 되었다.
콘스탄틴과 국가 교회의 시작
기독교를 국가종교로 인정되면서, 밀려드는 이교도들과 그들의 문화를 제대로 처리하는 것이 황제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당시 이러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가장 교묘하게 다룬 사람이 바로 기독교를 공인한 것으로 알려진 콘스탄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 272-337년)입니다. 그는 306-337년 재위한 중기 로마 황제로서, 동방정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해 '성 콘스탄티누스'라 부릅니다.
세속 역사가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첫 번째 그리스도인 로마 군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치세는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그는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끝내고 기독교를 정식 종교로 공인했습니다.
그는 또한 교회의 수장으로서 325년에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였고 또 330년에 비잔티움(터키의 이스탄불)을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하였고, 그가 죽자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노플로 개명됐습니다.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 이후 타락한 국가 교회는 이교도들의 풍습에 근거한 마리아 숭배, 성인 숭배, 각종 우상 숭배, 제사장 체계, 교황, , 연옥, 면죄부 등 도저히 성경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가증한 것들을 강제로 교회에 부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국가 교회는 자기들의 범주 안에 거하려 하지 않는 자유 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참 성도들을 화형이나 수장 등 각종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했다. 중세 암흑시대에는 국가 교회인 천주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 받으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국가 교회에 예속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갈 수 있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의 명령에 따라 살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교회를 그리스도가 주인인 기독교가 아니라 교회가 주인인 '교회교라고 부릅니다.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며 국민을 통제하는 시스템을 '국가 교회'라고 하며, 기독교는 이와 정반대의 개념 즉 예수님께서 친히 마22:21에서 "그런즉 카이사르의 것들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들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시며 가르쳐 주신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지지한다.)
세속 역사가들과 천주교 사관을 가진 교회 역사가들이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을 찬양하지만, 그의 기독교 진흥 정책은 다분히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수많은 내전을 거쳐 권력을 잡게 된 콘스탄틴에게 자신의 권좌를 위협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로마 황제는 교회의 권위 내지는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임명된다는 원칙을 세우고 인간이 그것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음을 분명히 하려 하였다. 이로써 국가 교회에서 황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국가와 교회의 수장이 되어 권위를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의 예배에 필요한 의식에 거의 순응하지 않았다. 그가 주교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주교들을 자신의 정치 조력자로 취급하였다. 그는 주교들을 소집해서 공회를 주재하였고 대다수가 일치하는 의견을 따르도록 강요하였다. 참된 신자라면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 후에 정치가가 되어야 하는데 콘스탄틴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로마 제국 황제들은 '국가 교회(State Church)'를 국가 체제의 이상적인 모델로 보았습니다. 반면에 교황들은 세상 군주들을 교황권 아래 두고 다스리는 '교회 국가(Church State)'를 이상적인 모델로 보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위해 지상의 평화가 유지되어야만 하며 국가가 교회에 의존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생각하고, 오직 '교회 국가'만이 이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실 '국가 교회'나 '교회 국가'는 신권통치라는 측면에서 황제든 교황이든 국가의 수반이 되어 국민들의 자유를 박탈하고 혹독한 속박 속에 가두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과 국가 교회
콘스탄틴이 세운 '국가와 교회의 일치'는 결국 구약 시대 '신정 정치'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신정 정치란 신이 임명한 대리자에 의한 정치를 말하며 '신권 정치(神權 政治)'라고도 합니다. 이에 대해 네이버 지식백과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신정 정치에서는 정치권력과 종교 권력이 분리되지 않고 융합되어 있으며, 권력자의 명령은 곧 법이고 피지배자의 내면적 심정(心情)까지도 지배한다. 국가의 법은 신의 법 또는 명령이며 국법과 종교가 동일하다... 신정 정치는 고대 오리엔트, 이슬람 세계, 인도, 중국, 신정 정치의 근대의 전형으로서는 칼빈의 제네바 지배를 들 수 있고, 현대의 신정 정치로는 혁명 후의 이란 정부를 들 수 있다.'
콘스탄틴과 그 이후 로마 황제들은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신정 정치를 구현하려 하였는데 이 이론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어거스틴이다. 그래서 그는 그 이후 지금까지 교회의 황제인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세상 왕국들까지 다스리는 로마가톨릭 교회의 통치 모델을 완성하였는데 어거스틴의 '국가 교회' 사상은 1000년 이상 중세 시대를 지배하였다,
콘스탄틴과 어거스틴을 거치면서 신정 정치 모델이 확립된 후 16세기루터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질 때까지, 서유럽 모든 국가는 오직 가톨릭 교회만을 국가의 교회로 인정하였고 천주교 외의 다른 믿음은 모두 이단 교리로 정죄받았습니다.
반면 동유럽은 정교회가 국가 교회로 되었습니다.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에 생긴 루터교 역시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삼국의 국가 교회가 되었고 칼빈의 장로교는 낙스에 의해 스코틀랜드의 국가 교회가 되었으며 헨리 8세가 세운 성공회는 영국의 국가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국가 교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어거스틴은 성경을 재해석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을 '예수님을 죽인 자들'(Jesus killers)로 규정하고 유대인들이 받아야 할 모든 복을 신약 시대의 교회가 대신 차지한다는 이론 곧 '이스라엘 대체 신학'을 정립했습니다.
역사적으로 가톨릭 교회는 자신들이 유대교의 완성이며 성취라고 주장하였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 대체 신학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2차 세계대전 유대인 대학살과 1948년의 이스라엘 국가 형성 이후로 주류 신학자들과 교단들은 필연적으로 성경을 영적·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어거스틴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 학자들의 비유 해석을 도입하여 이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이후 그리스 제국은 넷으로 분열됐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중심지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철학의 중심지가 되어 헬레니즘이라는 이교도 문화를 온 세상에 파급시키는 중심 도시가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주전 300년경부터 이스라엘을 떠나 그리스 문화와 히브리 문화를 적당히 혼합한 채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살던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 철학자 필로는 플라톤의 철학과 구약 성경을 접목시킨 인물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 중 어떤 이들은 필로의 철학을 신약성경에 적용해 '영지주의'라는 이단을 만들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이러한 '영지주의' 중심지였다. 현대 성경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송하는 가톨릭 교회 '70인역'(Septuagint)이라는 그리스어 구약성경 역본 역시, 알렉산드리아의 배도한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모조품입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 철학과 성경을 통합시키려는 욕망에 불탔습니다. 그들은 그리스 철학이 신의 영감을 받았으므로 그 기원이 신의 말씀과 같다는 그릇된 가정 하에 자신들의 해석 체계를 정립했다.
신약 성경이 완성된 이후로 180년경에 펜타누스(Pantaenus, 200년 사망)가 복음 선포자와 선교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에 교리학교를 설립했다. 19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가 이 학교를 인수했으며 결국 알렉산드리아 학교의 창설자로 인정받다.
클레멘트는 '알렉산드리아 기독교 철학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가르침을 다른 것과 섞지 않고 순수하게 전하는 것보다는 이교도들의 철학으로 옷 입혀 전하기를 원한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리 학교는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 철학적이며 비유적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주신 의미를 찾기보다는 그 안에 숨겨진 의미가 있는지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 이후 오리겐(185-254년)이라는 배도한 인물이 나와 역시 성경을 영해하고 성경 본문을 바꾸는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나이에 교사로서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의 삶은 세르베루스 황제의 박해로 그의 아버지는 순교했고 그로부터 1년 뒤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도망갈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고 결국 오리겐은 18세의 젊은 나이에 클레멘트가 창설한 알렉산드리아의 교리 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는 천재였으며 수많은 책을 모으고 읽고 저술했고 또 영지주의자였던 알렉산드리아의 암브로스(212-250)의 책들을 소장했다. 그는 또한 이교도로서 신플라톤주의를 창설한 사카스 밑에서 공부했고 매우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신발도 신지 않고 맨땅에서 잤으며 심지어 스스로 거세했던 매우 특이한 인물이었다.
오리겐은 클레멘트의 제자로서 필로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성경 본문이 신비 혹은 풍유적 의미를 통해 진정한 해석을 얻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런 성경 해석 방식을 '영해'라고 합니다.
오리겐은 특히 성경 본문을 부패시킨 장본인입니다. 현재 대부분의 신학교 교과서나 참고서는 오리겐을 '위대한 그리스도인 학자요, 고대 교회의 가장 뛰어나고 영향력 있던 신학자 중 하나'라고 잘못 소개하고 있다. 그 이유는 오리겐에 대한 기록이 거의 다 콘스탄틴의 어용학자인 유세비우스의 글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리겐은 한때 성경을 해석한 이단자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예수님이 창조된 하나님이다"라는 이단 교리를 퍼뜨렸다. 오리겐은 콘스탄틴 황제의 문화비서 역할을 하던 유세비우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콘스탄틴 황제의 성경 본문 복사 요청을 수행하기 위해 유세비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인 순수한 본문을 사용하기 위해 기독교의 모태가 된 안디옥으로 가지 않고 대신에 이교도 교육과 철학의 중심지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갔습니다.
거기서 '학자들의 수정판'인 국지적 소수 본문을 얻었고, 이것을 50개의 복사본으로 만들어 배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중 하나가 바티칸 도서관에 보관된 '바티칸 사본'이며, 이 사본은 오역이 있는 여러 현대 역본들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오리겐과 유세비우스 이후 알렉산드리아 철학은 암브로스라는 밀라노의 주교에게 전달되었고 그는 비유 해석 체계를 근간으로 가톨릭 교회의 교리들을 확립하였다. 그는 가톨릭 교회를 위해 다음의 세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1. 그는 로마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다 배제하였고 믿음의 영역에서 주교는 황제를 판단할 수 있으나 황제는 주교를 판단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어거스틴은 오리겐의 비유적 성경 해석을 취함으로써 참 이스라엘 즉 아브라함의 육체에서 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송두리째 제거했고 '교회가 이스라엘'이라는 논증을 들고 나섰습니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지 않고 교회가 머리가 되는 소위 '교회교'를 창설한 초대 교부들은 교회사에서 엄청난 망언의 씨를 뿌렸습니다. 이 씨의 열매들은 첫 정치신학자 유세비우스에 의해 암브로스와 어거스틴 등에게 전달되며 로마 교회 안에 확고히 자리잡았다.
그런데도 개신교 목사들 가운데는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출발했다고 말하며, 이제는 '성경 메시지' 대신 '가톨릭 미사곡'까지 교회 안에서 연주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무력 사용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과 늘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성경은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으므로 세상에 동화되지 말 것을 곳곳에서 가르칩니다(롬 12:2; 고후 6:14-18).
초대 교회 이후 좁은 길을 걸은 믿음의 성도들은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추구하며 살았고 그 결과 국가 교회로부터 많은 탄압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 교회는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로 퍼져나가 1세기 후반에는 그 당시의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또 국가 교회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짊어지고 도시를 떠나 산지와 계곡에서 유랑하며 순례의 행보를 이어갔다.
주후 2세기에는 소아시아에서 몬타니스트들(Montanists)이 사도 교회의 순수성을 외치면서 믿는 성도만이 교회의 회원이 됨을 주장했습니다.
주후 3세기에는 전 로마 제국에서 노바티안들(Novatians)이 일어났습니다. 이들 역시 교회의 순수성을 외쳤습니다.
그 뒤 4세기 초 아프리카에서 도나티스트들(Donatists)이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외치며 일어났습니다.
7세기경에는 타우루스 산지에서 폴리시안들(Paulicians)이 초대 자유 교회의 맥을 이으며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선교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역시 구원받은 성도들만의 침례와 성도들만의 교회를 주장했습니다.
그 뒤 자유 교회는 12세기경의 왈덴시안들(Waldensians)은 알프스 계곡에서 바른 성경을 붙들고 오직 성경만이 최종 권위임을 외치면서
천주교회와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는 폴리시안들의 뒤를 이은 알비겐시스들(Albigenses)이 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들고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성도들이 세상과 분리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이 부패하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에 의해 죄가 용서되고 사탄의 지배를 받던 세상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의 통치를 받으며 사람들이 변화되어 이 땅에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이론은 그의 저서 <하나님의 도시>에 잘 나타나는데 그가 이 작품을 쓴 목적은 이교도들이 로마 제국의 쇠퇴에 대한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는 것을 반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심지어 국가나 교회가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불신자들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바로 이것이 중세 천주교 통치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여러 종교 개혁자들 역시 어거스틴의 이런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여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마다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 종교 개혁자들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무력을 써서라도 신정 정치를 이 땅에 구현하려 한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목적이 정당하고 선할 경우 교회가 물리적/군사적 방법을 사용하여 심지어 사람들을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였다.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가톨릭 교회에 대항하는 자들을 강제적으로 회심시켜야 한다는 어거스틴의 주장은 중세 천주교회의 십자군 원정과 종교 재판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도나티스트들과의 논쟁에서 나타난 그의 성경 해석은 중세 천주교회와 그 이후 개혁자들의 개신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교회는 오류가 없으며 구원은 오직 교회에만 맡겨져 있고 따라서 교회에 속해 있는 것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어거스틴은 예수 그리스도를 오류 투성이인 교회로 대체함으로써 철저하게 '교회교'를 세웠고,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의 책'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교회의 책 즉 교회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라고 요한계시록 2장 7절이 말씀해 주듯, 교회는 성경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판단을 받는 창조물에 불과합니다.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교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여 뜯어고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그 이후로 로마 교회는 감히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변개시켜 왔습니다.
어거스틴의 다른 사상(영어 위키 백과의 'Augustine of Hippo' 항목에서 그대로 발췌)
1. 마리아 숭배: 비록 그 나름의 마리아 사상을 펴지는 않았지만 어거스틴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마리아에 대해 언급하였다. 431년에 열린 에베소 공회에서 로마 교회가 공식적으로 마리아를 '영원한 동정녀', '하나님의 어머니'로 부르기 전에 이미 그는 마리아를 그렇게 불렀다.
2. 교회: 그는 교회는 오직 하나만 있으며 그 안에는 두 개의 요소가 있다고 믿었다. 그중 하나는 보이는 요소로서 가톨릭 성례와 성직자 계급 체계 및 평신도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요소로서 교회에 속한 영혼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하나님의 도시>에서 교회를 하늘의 도시 혹은 왕국으로 보았고 이 교회가 궁극적으로 땅의 모든 왕국들을 물리치고 승리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3. 사제들의 사도적 계승: 그는 키프리안의 가르침에 따라 가톨릭 교회의 주교들과 사제들이 사도들의 계승자들이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권위를 주셨다고 가르쳤다.
4. 자유 의지: 그는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사람들을 이성적인 존재로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로 만드셨지만 이 자유 의지가 죄를 짓는 용도로는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종종 누구든지 원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멸망받기로 예정된 자들이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5. 종말론: 처음에 그는 모든 사람이 부활하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문자 그대로 1000년 동안 이 땅에 왕국을 세우신다는 전천년주의 )를 믿었지만 후에 그것이 육신적이라는 이유로 그 관점을 버렸다. 그는 사람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이루는 후천년주의에 가까운 믿음을 펴면서 실제로 그리스도의 왕국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무천년주의(Amillennialism)를 주장하였다.
중세 로마가톨릭 교회는 어거스틴의 사상을 바탕으로 땅에서 승리하며 다스리는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이 땅을 다스리신다는 무천년주의를 확립하였다. 종교 개혁 시대에 칼빈 같은 신학자들 역시 철저하게 어거스틴의 무천년주의를 수용하였다.
7. 연옥: 그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으나 깨끗하지 못한 자는 연옥의 불에 의해 정화된다고 믿었다.
어거스틴 사상 총 정리
위에 열거된 기록들을 통해 우리는 어거스틴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신정 정치 교회: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무력까지도 동원하여 신정 정치를 구현하는 국가 교회가 유일한 교회이다.
2. 무천년주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이 땅에서 다스리시는 왕국은 없다.
3. 이스라엘 대체 신학: 아브라함의 실제 자손인 유대인들에게는 전혀 미래가 없고 신약의 교회가 곧 구약의 왕국이므로 구약 성경에 약속된 이스라엘의 모든 복은 신약의 교회가 이어받는다.
4. 인간의 자유 의지 박탈: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인간의 자유 의지는 완전히 박탈되었다.
5. 세례 중생: 사람은 세례를 통해 다시 태어난다.
6. 연옥: 그리스도 안에서 더러운 상태로 죽은 자들은 연옥 불에 의해 정화된다.
7. 마리아 숭배: '하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이 땅에 가져오는 은혜의 통로로서 죄 없이 수태되어 그리스도를 출생한 이후에도 평생 동정녀로 살았다.
8. 성인들의 공적: 수호성인들의 공적이 있으면 죄들이 경감된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사상은 지난 1,500년 이상 로마가톨릭 교회가 공언한 믿음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의 증언을 통해 어거스틴이 로마가톨릭 교회의 모든 교리를 놓은 장본인이며 그래서 로마 교회로부터 '교회의 박사'(Doctor of the Church)로 불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함을 알 수 있습니다.
개신교회가 가르치는 교회사는 유세비우스나 필립 샤프(Philip Schaff, 1819-1893) 등과 같이 가톨릭 교회사가나 가톨릭 편향의 개신교 교회사가들이 저술한 것에 근거를 두고 있기에, 어거스틴이나 프란시스 같은 철저한 가톨릭교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성자(성도)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예수 그리스도 외에도 구원받는 길이 있다고 주장하는 마더 테레사, 프란시스 등의 가톨릭 교회 성인들은 사도 바울이 저주한 '다른 복음' 즉 '행위 복음'을 믿고 가르친 사람들로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성도들'(saints)의 반열에 결코 들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saints' 즉 성인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하나님에 의해 거룩히 구별된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가톨릭 교회가 인조 성인들을 양산해서 'saints' 즉 성자 혹은 성인이라고 부르므로 성경 번역 시 어쩔 수 없이 'saints'를 성도 즉 '거룩한 무리'로 번역하였다.)
그 이유는 가톨릭 교회의 '성인들'(saints)은 육에 속한 행위에 의해 가톨릭 교회나 교황이 생산해 내는 인조 성인이지만, 성경대로 믿어서 행위와 상관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받은 '성도들'(saints)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하시는 거룩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이 확립한 로마가톨릭 교회의 '중생즉 '다시 태어남'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들은 위로부터 임하여 인간의 질을 새롭게 창조하는 중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어거스틴의
<고백록>이 들려주듯이 가톨릭 교회에 귀의하여 그 시스템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인간의 제도적 의식이 마치 중생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비성경적인 가톨릭 주의 제도에다 고해성사라는 또 다른 굴레를 하나 더 씌워 주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수도원 규칙을 보면, 그는 아버지 종교를 더욱 강조하여 아버지 계급에 절대복종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사제를 '신부'(神父) 즉 '하나님 아버지'라 부릅니다.-물론 영어권에서도 가톨릭 교회의 사제는 'Father'로 불린다-그들은 베드로를 유일한 가톨릭 교회의 통일성으로 삼고 교회의 특성을 머리되신 그리스도에 두기보다는 '통일성, 보편성, 거룩함, 전통'에 두고 있습니다.
3세기경 오리겐의 '마리아 숭배 사상'이 암브로스에게 왔을 때 그는 '마리아 숭배 사상'에다 '성물 숭배 사상'을 더했고, 어거스틴은 이 모두에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인정하는 연옥설을 보태어 '연옥설의 원조'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 이것이 기독교이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부족하기에 혹은 이방인들의 사도였던 바울이 그토록 자상하게 설명한 은혜에 이르는 길이 부족하기에 우리 믿는 자들이 성경 밖에서 어거스틴의 은총론 같은 인본주의 은총론을 들먹여야 합니까? 어거스틴의 은총론은 로마 교회의 공회 중 가장 사탄적인 공회로 알려진 트렌트(트리엔트) 공회가 결정하고 발표한 가톨릭 교회의 의인론의 시초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어거스틴 파에 속했던 루터를 구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에서 수많은 현대판 어거스틴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들은 아직도 인간의 종교적 은총론에 갇혀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부분적으로 성구도 인용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머물고 있는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성모 교회 즉 '거룩한 어머니 교회' 안에 안주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자리잡을 수 없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모양은 있으나 하나님의 성품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입니다(딤후 3:5). 비록 그들이 베드로의 무덤을 뒤적이면서 무덤에서 일어나신 '살아 계신 생명의 주'를 찾고 있으나, 그들의 길은 결코 영생에 이르지 못하는 큰길입니다.
출처: <성경의 역사: 어둠 속의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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