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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슬람교는 카톨릭의 위작이다
    타종교 2018. 2. 3. 22:44

    인간을 숭배하는 이슬람교는 카톨릭의 위작이다.

    이슬람은 로마카톨릭과 더불어 현존하는 가장 큰 사탄의 종교이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무함마드에 대해서 “사탄의 장자”라 말할 정도로, 이슬람교는 그들의 교리적인 측면 외에도, 역사적으로 그들이 저질러 놓은 수많은 살육과 악행들을 통해서 그들의 사탄적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참으로 이상하게도 오늘날 이슬람교는 세상 사람들에게 평화의 종교라고 생각한다. 손에는 칼을 들고 무자비한 학살을 하면서도 “나는 관대하다.”라고 말하는데, 사람들은 그 말을 그대로 믿는다는 사실이다. 사우디아라비아 국기는 아랍어로 된 문장과 칼 한자루가 놓여 있는데 아랍어로 된 문장을 해석하면 알라외에는 신이 없다는 의미이다. 무하마드는 알라의 메신저이다.

    인구 분포로 볼 때 이슬람은 세계 인구의 1/5을 자랑하며, 신도 수로 말하면 카톨릭이 11억 기독교가 7억이라 봤을 때 이스람교는 17억정도로 세계 제1의 종교이다.

    이슬람교의 신앙의 대상인 무함마드

    이슬람에 대해서 말하려면 먼저 무함마드부터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영어적 표현은 마호메트 이고, 아랍어로는 무함마드라고 한다. 무슬림들이 말하는 마호메트(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며 선지자”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선지자가 아니라 거의 알라와 동일한 지위의 절대적인 사람이다. 그들 교리에 따르면, 알라는 유일신 하나님이며, 어느 누구도 알라를 무함마드의 가르침대로 믿지 않는다면 그는 알라를 믿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무함마드는 “알라에게 이르는 길”이며, “알라와 무함마드”를 믿는 사람만이 무슬림으로 불려진다.

    무슬림들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생전에 우상 숭배로 가득한 아라비아 사람들을 유일신 알라에게로 돌아오게 했다고 한다. 무슬림들에게 무함마드는 거의 알라와 같은 존재로 신앙의 대상이다. 결국 이슬람교는 인간을 믿는 종교이다. 그는 이슬람교의 창시자일 뿐 아니라 “교주”이다. 인간 숭배가 극치를 이루는 것은 대환란 때의 적그리스도 숭배의 전초모습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탄 숭배가 된다.

    이것이 바로 이슬람교가 사탄의 종교라 말할 수 있는 한 예인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자중의 한사람인 제프리스 목사는 “무함마드가 천사에게서 이슬람을 계시받았다는 주장은 “무함마드가 본 천사는 실제로는 ‘광명의 천사’와 같이 악마였다”고 했다. “사탄이 이러한 환상을 사람들에게 전달하여, 수백만 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했다. 이슬람은 여러분들을 지옥으로 이끄는 거짓된 종교다. 거짓 선지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슬람이 기독교인들을 얼마나 미워하는가!

    2015년 2월 15일은 이집트 콥트교인 21명이 이슬람 수니파 조직 IS(이슬람국가)에 의해 순교한 날이다. 당시 이들 콥트교인들은 건설노동자로 리비아로 갔다가 IS에 의해 납치된 이들은 해변가에서 IS에 의해 참수를 당했고, 그들이 흘린 붉은 피가 해변과 바다를 물들였다.

    이들 순교자들은 칼이 그들의 목에 떨어지기 전에 모두 함께 한 목소리로 "야 랍비 야소우(Ya Rabbi Yasou)"라고 부르짖었는데, 해석하면 "오 나의 주 예수님"이라는 뜻이다.

    왜 기독교인들을 살해했는가는 이슬람 경전인 “꾸란에는 이슬람 확장의 반대편에 서 있는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을 죽이라는 35개의 명령들로 가득하다. 반면에 신약성경 어디에도 불신자들을 상대로 한 폭력을 요구한 구절을 찾을 수 없다. 예수그리스도는 원수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반대로 무함마드는 원수를 살해하라고 명령했다”고 말했다.

    어떻게 하여 이슬람종교가 만들어졌는가?

    이 이야기는 전직 카톨릭 예수회(Jesuits)의 신부였던 '알베르토 리베라박사가 바티칸 로마카톨릭을 탈출해 고발한 내용이다.

    그가 바티칸 지하 창고에서 1급 비밀로 아무나 볼 수 없는 책을 보았는데 거기에는 이슬람교 만들어진 내용이 기록된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가 새로 거듭난 '크리스챤'으로서 그는 모든 숨겨진 로마카톨릭 조직을 적나라하게 전세계에 알렸다. 그에 의하면, 가톨릭 예수회는 그들은 목적을 위해 한 나라를 세우기도 하며 멸망시키기도 하며 개신교내에 스파이를 침투시켜 위장 신학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정말 놀라운 일은 바티칸이 중동에 마호메트라는 인물을 내세워 달의 신 알라를 통해 이슬람을 세워 진정한 하나님을 모르도록 음모를 꾸며왔다는 기록이다.

    이슬람교의 시작은 이렇게 출발한다.

    4세기 중반에 북아프리카 히포에 성자가 있다는 소문이 전파되어 나갔는데 그 사람이 바로 어거스틴이었다. 그는 로마 교회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성자로 불려졌다. 그는 저 유명한 참회록(Confession)이란 책과 신의 도성(The City of God)이란 책을 쓴 사람이다. 어거스틴이 죽고 난 후 로마카톨릭교에서는 큰 도시에서 동떨어진 작은 부족들의 마을에 스파이들을 침투시켜서 이런 예언들을 하고 다니게 했다.

    그 예언이란 장차 한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 아랍의 부족들을 하나로 통일시켜서 서로 싸우지 않는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고 다니게 했다.

    로마카톨릭은 예수탄생과정을 모방하여 아랍에 장차 위대한 지도자 성인이 태어나 아랍부족을 통일할것이라는 말을 퍼뜨렸다. 이러한 예언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어서 그 예언이 퍼져 나간 후로는 부족들 간에 전쟁이 있을 때 마다 언제 그러한 지도자가 나타날 것인지 고대하게 되었다. 그후 카톨릭 교회에 모든 재산을 헌납하고 수녀원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카디자는 이상한 명령을 받고 세상에 나왔는데 교황청이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일을 돕고 아랍의 메시야가 될 남자를 찾는 것이었다. 카디자는 마호메트를 찾아 결혼했고 충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하디자의 사촌 바라카는 마호멧을 교육했다.

    바라카의 도움으로 마호메트가 코란경을 쓸때 그는 아주 큰 거짓말을 했다. 성경은 분명히 이삭이 희생제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아브람이 희생제물로 이스마엘을 바쳤다는 것이다. 유대인은 이삭의 후손이요, 아랍인은 이스마엘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거짓 예언자 모함마드 (570-632)는 거짓 환상들을 610년경에 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교황 보니파스 4세(550-615)이었다.

    무함마드는 610년경에 그의 '거짓' 환상들을 보기 시작하면서 그는 그것들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한 천사가 그에게 나타났으니, 바로 '알라'(ALLAH)였던 것이다: 바울은 기록하기를 그러니(거짓 사도들로 가장하는) 그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니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하느니라. (고후 11:14) 마호메트가 죽은 후 이슬람교는 번창했고 아랍은 무함마드의 이름아래 뭉치고 세력이 커졌다.

    사탄은 교황청을 이용하여 이슬람교를 만듬으로써 아랍인들이 예수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속이고 유대인과 적대적 관계가 되도록 만들어 유대인 학살에 이슬람교도를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코란경이 성경과 내용을 달리하면서도 많은 용어들이 성경에서 차출되었으니 코란경을 위조한 세력은 성경을 익히 알고 있는 무리였다. 그당시 성경을 아는 무리는 유대인 ,그리스도인, 카톨릭인인데 유대인이라면 이삭의 자리에 이스마엘을 놓지 않았을 것이요. 그리스도인이라면 코란을 쓸때 예수 자리에 마호메트를 놓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 자리에 마리아를 놓고 1500년이 넘는 동안 유대인을 근절하고자 애썼던 로마카톨릭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슬람 경전인 코란이 카톨릭의 위작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슬람교 기원과 실상을 밝힌다

    주후 64년부터 311년까지 박해시대에 오히려 순수했던 기독교가 311년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끝나고 바로 2년후 313년 콘스탄니누스 황제에 의하여 교회의 자유가 선포되자 지하에 있다가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오래지 않아 교회는 교리적인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동서 교회를 소집하였다. 회의의 동기는 아리우스 논쟁 즉,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派)를 이단(異端)으로 단죄하여 분열된 교회를 통일시키고, 로마제국의 안정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이 밖에도 부활절의 시기, 사제제도 등을 제정, 결의하였다.

    * 381년 제2회 세계 공의회 :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공의회. 150명의 동방정교회 정통파와 36명의 이단 주교들이 참가했다. 325년에 있었던 니케아공의회의 합의를 공인하였다.

    * 397년 카르타고 회의: 397년 카르타고에서 열린 교회회의 오늘날에는 성경 가운데서 교회가?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으로 인정한 것을 제1정경?이라고 하고, 일부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제2정경?이라고 한다. 구약성서의 《토비트》 《유딧》 등 7서와 《에스델서》에 대해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는 이것들은?외경으로 여기는 데 반하여, 가톨릭에서는 제2정경(7권)이라 하여 이것들도 정경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구약성서의 정경이 지금의 39권으로 정해진 것은 BC 90년경의 야무니야 회의에서였고, 신약성서의 정경이 현재의 27권으로 결정된 것은 397년 카르르 교회회의에서 였다.

    * 431년 에베소 공의회 : 431년 소아시아 에베소에서 개최된 에베소공의회에서 마리아를 그리스도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하나님의 어머니로 결정하면서 로마카톨릭교는 마리아를 신격화 하였다. 이렇게

    타락하고 변질된 카톨릭 교회가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을 탈환하려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군전쟁 때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려 했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3세기 말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하여 방법을 찾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탄은 교활하게 유대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참소하고 로마카톨릭교회를 통하여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하는 한편 기독교를 변질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영지주의라는 이단을 만들어 교회를 심히 혼란스럽게 했었다. 그러한 방법이 통하지 않게 되자 그 다음 방법으로 지하교회를 지상으로 나오게 하여 교리 논쟁으로 싸우게 만들고 그리고는 변질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탄은 그보다 훨씬 강력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이 사실은 지금까지 교회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변질된 기독교는 마침내 예수님보다는 마리아를 더 숭배하는 종교로 변질되어갔고 이들이 로마에 있으면 그야말로 로마교가 되고 말 것이 분명해지자 어떻게 해서든지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교황청을 예루살렘으로 옮겨서 세계 모든 종교의 통합을 이루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북아프리카 지방에 수도원들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로마카톨릭교가 전 세계 지배를 위하여 만들어 낸 로마교회의 정보 수집을 위한 지부였다.

    마침내 주후 570년경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한 사람이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마호메드였다. 후일에 그는 마침내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은 인물이 되었다. 마호메드는 유복자로 태어나서 그의 할아버지가 그를 강하게 기르기 위하여 베두인 천막에 보내서 야성을 기르며 연단을 받았는데 불행은 겹쳐서 오는 법인지 마호메드의 7살 되던 해에 그의 어머니 마저 죽고 마호메드는 고아처럼 되었다.

    그 후 2년 뒤 마호메드 9살 되던 해에는 그의 후견인 할아버비인 압둘 무타리부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9살 되던 해부터 삼촌들을 따라서 낙타상인들과 동행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카톨릭 수도사가 나타나 마호메드라는 소년의 등을 보여 달라고 해서 마호메드의 등을 보여 주었더니 그 수도사가 하는 말이 "이 표시는 예언자의 인"이라고 했다.

    그 수도사가 남긴 말은 "당신들은 이 아이를 잘 보호하시오 특별히 유대인들이 이 아이의 생명을 빼앗으려 할 터이니 신의 일을 하게 될 이 아이의 생명을 잘 지키도록 하시오! 이 아이는 장차 위대한 일을 하게 될 것이오 !" 하고 사라졌다고 전한다. 로마 수도사가 남긴 이 말 한마디가 훗날 마호메드 추종자들로 하여금 유대인 대학살을 자행하게 만들었다.

    그 후 마호메드가 25세 되던 해 당시 40나 되는 하디자라는 과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는 두 아들이 태어났으나 둘 다 어려서 죽었고 딸만 넷이 있었는데 그 중에 파티마라는 딸이 마호메드의 사촌 알리와 결혼하여서 대체로 널리 알려졌다. 한편 이 파티마와 결혼한 알리의 추종자들이 훗날 이슬람교의 시아파를 이루었다.

    서기 610년 마호메드는 환상을 보았는데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계시를 받았다고 전한다. 그 가브리엘 천사가 말하기를 "너는 이제부터 알라 신의 사자이니라 ! "하는 사명을 받았다고 전한다.

    그 후로도 마호메드는 여러 차례 계시를 받았는데 그 모든 계시를 해석해 준 사람은 카톨릭 신자였던 바라카라는 사람이었다. 이 바라카는 마호메드의 아내 하디자의 사촌 오라비였다.

    그리고 그 바라카는 다니면서 마호메드는 우리 민족의 예언자라고 선전하고 다녔다고 한다.

    어느 날 마호메드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그를 깨우면서 부라크라는 천마를 그 앞으로 데리고 와서 그 말의 등에 태우고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파괴된 유대성전 터를 보여 주었다고 한다.

    거기서 마호메드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님과 그 많은 성인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는 다시 그 부라크라는 천마를 타고 천국으로 올라가서 선지자들을 만났고 마침내 알라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알라로부터 이슬람교위 교리를 받게 되었다고 5일 동안 기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전한다.

    마호메드는 정략적인 결혼이었지만 그에게는 9명의 아내가 있었고 그 중에 한 여인이 바로 카토릭 신자였던 카디자가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630년에 마호메드는 약 100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메카를 향하여 진군해 들어갔고 메카는 마호메드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메카에 들어오자 마호메드는 메카를 점령하면서 강해져 갔고 그를 두려워하는 주변의 여러 부족들이 마호메드의 교리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정도로 아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슬람교의 기원이다.

    로마 카톨릭이 하디자와 바라카를 보내어 공작한 것은 일반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교황청의 한결같은 소원은 예루살렘 솔로몬 성전 터에 교황청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사업을 추진하는 데 걸림돌이 될 사람들이 첫째는 정통파 유대인들이었다. 한편 여러 지방에 세워 놓은 수도원으로부터 많은 정보가 교황청에 전달되어 갔다.

    로만 카톨릭은 일차적으로 이 세상에서 없애야 할 사람들 중에 일차적으로 정통파 유대인들과 카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을 제거하는데 그 일을 대신해 줄 인물을 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악한 일을 맡을 사람으로 마호메드라는 인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는 전 아랍사람들을 한데 묶어 교황청에 복종하게 할 영웅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 영웅으로 하여금 전 아랍을 하나로 묶어서 교황에게 순복하게 하고 또 예루살렘을 교황청에 바칠만한 인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교황청에는 이 모든 일을 추진할 한 여인을 택하였는데 그녀가 바로 40대 돈 많은 과부로서 마호메드의 아내가 된 여인이었고 그녀의 사촌 오라버니 되는 바라카였다.

    바티칸 지하 서고에 있는 이 문서에는 이슬람 교리를 만들어 가는데 교황청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가 소상하게 나와 있어서 일반인들에게는 절대 비밀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물론 교황청 비밀문서 보관소에도 있고 이슬람 최고지도자들의 손에도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러한 문서에는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정통파 유대교와 카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기독교를 말살할 것인가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서 이 문서가 외부에 유출되면 두 종교는 다 큰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서로 견제하면서 서로 조심하고 있는 것이다. 마호메드는 632년에 죽었고 그가 죽고 나자 이스람교는 오히려 더 번창하게 되었다.

    교황청의 목적대로 아랍의 모든 유목민 부족들이 알라 신과 그의 선지자 마호메드의 이름 아래 통일되어 갔다. 그 때까지 아랍 사람들의 속내를 알지 못한 교황청은 이슬람교가 북아프리카 지역을 침략하여 통일시키는 일까지 승인하여 주었고 심지어 자금까지 대어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진행될 때 교황청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을 약속받고 재정을 지원했다고 한다.

    첫째 정통파 유대인들과 카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을 제거할 것

    둘째 어거스틴 수도사들과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항상 보호할 것

    셋째 교황청을 위하여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카톨릭에 돌릴 것 등이었다.

    이러한 조약이 체결되고 자금이 지원되자 이슬람교는 북 아프리카 전역을 다 쓸어서 통일시켰다.

    로마제국에 의해 수집된 어마어마한 양의 금과 은이 로마의 대형 지하 금고실 안에 축적되어 있다. 황제들의 계승자들인 교황들이 이 금과 은에 접근하였고, 그것을 무함마드에게 재정을 지원하는데 사용하였다.

    첫 번째 교황은 그레고리 1세이다 그레고리 1세(540-604). 그는 켈틱인 선교사들을 중단시키려고 어거스틴을 영국으로 파송시켰던 장본인이다. 두 번째 교황은 보니파스 4세이다. 이 두 사람들은 구(舊)로마의 호적수들을 제거한 공로로 바티칸에 의해서 '성자들로 추대되었다. .

    지금 로마 카톨릭과 이슬람은 불가침 조약이 있고 화평하게 잘 지내고 있으면서 그들의 공동의 적은 여전히 정통파 유대인들과 카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로만 카톨릭은 종교재판이라는 무시무시한 방법으로 사방에서 기독교인들을 학살하였고 이슬람은 동방에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무차별 죽여 없앴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승리를 맛 본 아랍 사람들은 교황청의 군사력이 별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랍의 군대를 막아 낼 어떤 군대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교황청에서는 아랍 사람들이 더 이상 교황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슬람지도자들 역시 교황청이 그렇게 손에 넣고 싶었던 예루살렘의 중요성을 깨닫고는 성전 산을 자신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예루살렘이란 도시는 참으로 파란 만장의 역사를 가진 도시였다.

    예루살렘은 BC 3000년대 말경에 여부스라는 가나안의 한 부족이

    차지하고 있다가 이스라엘 왕 다윗이 탈환하여 예루살렘이라고 불렀다. 다윗 왕이 여부스인을 쫓아내어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다음에는 솔로몬왕이 궁전과 성전을 건립하였다. BC 586년 바빌론 느부갓네살왕이 예루살렘을 파괴하였으며, 유태인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가서 BC 538년까지 억류 하였다가 그 후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이들을 석방해 줌으로써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도 재건하였으나, 옛날의 번영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그 후 여러 차례 파란을 겪은 끝에 BC 63년 폼페이우스가 거느린 로마 군이 성벽을 파괴하고 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때부터 예루살렘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BC 37년부터 헤롯 왕이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솔로몬 왕 이후의 번영을 되찾았다. 그러나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70~71년에 이 도시를 공격함으로써 헤롯 시대의 번영은 사라졌다. 유대교도들은 헤롯이 지은 성전의 벽을 통곡의 벽이라 이름짓고 이곳을 찾아가서 통탄하는 풍습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에도 유대교도의 반란이 거듭되었기 때문에 로마인은 135년경 예루살렘은 파괴했으며 유대교도들을 몰아냈다. 로마가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자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도의 순례자로 붐비었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의 명령으로 그리스도의 성묘(聖墓) 등에 최초의 교회가 건립되었다.

    614년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가 비잔틴 제국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뒤, 많은 교회를 불사르고 다수의 시민을 끌고 갔다.

    마호메드가 죽은 후 불과 7년째가 되는 638년 이슬람교로 단결한 아랍인이 이 곳을 함락시켰다. 현재 바위사원에 있는 큰 바위는 마호메트가 꿈에 천사 가브리엘의 안내로 알라신(神) 앞까지 갔다는 이른바 승천(미라지)의 장소로서 신성시되고 있다. 아랍인들은 솔로몬의 궁전이 있던 곳에 아득한 회교사원(알 아크사 마스지드)을 지었으며,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 압둘 말리크(재위 685~705)가 이 곳에 바위 돔 사원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1187년 이집트에 아이유브 왕조를 건설한 살라딘이 이슬람 세력을 모아 이를 탈환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이 있었으나 1229년 2월~1244년 8월까지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의 화의(和議)로 이 땅을 회복한 적이 있을 뿐 성지 탈환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카톨릭의 군대와 아랍의 군대는 상당히 오래 동안 전쟁을 하게 되었지만 예루살렘은 교황의 손에 넣을 수가 없었다.

    아랍 사람들은 알라 신의 이름 아래 마침내 터키가 아랍인들이 손에 넘어갔고 이어서 포르투칼과 스페인까지 점령당했다.

    아랍군대는 고국을 떠난지 수년이 걸리는 전쟁을 치르면서 마지막으로 교황청을 공격할 채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들에게는 양식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진퇴 양난에 빠진 아랍 군대와 불안에 떨고 있었던 교황청 사이에 선택의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방법은 죽기 살기로 싸우던지 .

    둘째 방법은 적당한 선에서 휴전을 하는 것이었다.

    양쪽이 다 타협과 협상으로 가닥을 잡았고 마침내 협상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때 중재자로 나선사람이 그 유명한 성 프란시스 (1182-1226.10.3)였다. 그들은 공식 협상을 통하여 이른바 정교조약(Concordates)을 맺게 되었다.

    그 때 맺어진 그 조약에는 로마 카톨릭이 간섭없이 이슬람 사원을 세울 수 있게 하는데 동의했다. 그리고 그들은 상호의 종교를 독립된 종교로 인정하고 공동의 적이 되는 유대인들과 카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기독교를 공동의 적으로 간주하여 이를 제거하는 일에 공조하기로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렇게 하여 사탄은 아랍 열국에 있는 불쌍한 이스마엘 자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손을 써 놓았다.

    한편 교황청은 이슬람과 유대인 사이를 이간질하는 공작을 계속하는 한편 그 무시무시한 종교재판에 의하여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목숨을 잃었다.

    이슬람교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성경을 접하게 되면 비밀을 깨닫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게 되었고 카톨릭에서도 역사를 바르게 가르치면 곧 두 종교 즉 카톨릭과 이슬람의 악한 협약이 드러나기 때문에 철저하게 역사를 왜곡하고 성경을 금서 목록에 두고 거짓 역사를 기록하여 사람들을 기만해 왔다.

    교황청과 아랍군의 정교 조약에 터키를 카톨릭에 양보하는 것으로 했지만 터키에서 일어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다시 유럽 전체를 뒤흔들면서 약 8 세기 동안 큰 제국을 구축하고 이슬람교를 신봉하면서 유럽 전채를 지배하였다. 13세기 말 이후 셀주크 투르크에 대신하여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투르크족의 이슬람 국가(1299~1922)는 오스만 1세가 건국하였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결국 예루살렘 땅은 1516년 12월 말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셀림1세가 시리아 맘루크 왕조를 꺾고 예루살렘을 지배하에 두었다. 현존하는 예루살렘 성벽의 대부분은 오스마투르크제국에 의해 건축 되었고 오스만투르크 시대에는 차차 쇠퇴하여 19세기 전반에는 인구가 약 1만 1천 정도로 감소하였다.

    오스만 트루크 제국은 각 분야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17세기 이후로는 점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러시아-투르크 전쟁에 대패함으로써 유럽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하였다.

    한편, 제 1차 세계대전 말기에 터키군이 패퇴하고 앨런비 장군이 거느리는 영국군이 이곳을 점령하였으며 1920년부터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위임 통치 하에 들어가자 그 수도가 되었다. 그 후 밸푸어 선언에 따라 유대교도의 이민이 격증하였으며, 아랍족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

    1948년 팔레스타인의 유대교도와 아랍 각국 사이에 독립전쟁이 일어났으며 1967년 6월의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의 동부마저 점령해 버렸다. 그러나 아직도 예루살렘 그 성전 산에는 유대교 성전이 아니라 이슬람 사원이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되고 보면 이제는 그 예루살렘이 교황청의 소유가 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슬람교의 소유가 되지도 못했고 교황청이 그렇게 없애 버리려고 했고 아랍사람들이 그렇게 박해했던 유대인들이 거의 다 차지하게 되었다. 다만 성전이 있는 그 거룩한 곳만 아직도 이방인들의 발아래 밟히고 있는 것이다.

    인구 약 70만 정도의 예루살렘 1967년 6월 중동전쟁 이후로 유대교도 ․그리스도교도 ․이슬람교도가 저마다 성지(聖地)로 받들고 있는 동쪽 지역도 이스라엘의 점령지이다. 사해(死海)로부터 25km,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55km, 높이 790m 가량의 팔레스타인 중앙산맥의 분수령상에 있는데, 지중해성 기후와 사막기후의 영향을 두루 받기 때문에 북위 31°41'에 위치하지만 겨울에는 몹시 춥고 봄 ․가을에는 이따금 37℃의 더위를 겪는다.

    파티마의 로자리오 성모

    한편 1910년 경에 포르투칼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이 나타나면서 도처에 붉은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큰 난관에 봉착하였다. 사회주의자들은 포르투칼에서 카톨릭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래서 교황청에는 포르투칼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확산되는 공산주의를 막아 내려면 마리아가 나설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위대한 쇼를 준비했다. 그 유명한 사건이 마호메드의 딸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파티마 마을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1917년 5월부터 10월까지 매달 13일이 되면 3명의 어린 목동 앞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죄의 회개와 로자리오의 기도를 권하였다는 유래 때문에 순례지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파티마의 로자리오 성모?에 대한 숭앙은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지금은 대성당이 건립되어 해마다 600만명의 순례자들이 이 곳을 찾아 참배한다. 큰 십자가를 꼭대기에 꽂은 높이 65m의 탑이 있다.

    수세기 동안 무슬림들이 포르투칼을 점령하고 있을 때 마호메드를 숭배한다는 뜻에서 한 지역 이름을 파티마 즉 마호메드의 딸의 이름으로 불러 왔었다. 마호메드가 사람들에게 설교를 할 당시에 자신의 딸 파티마가 죽어서 낙원에 갔는데 거기 있는 여인들 중에서 가장 성스러운 여인으로 마리아 다음자리에 있다고 설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공산주의자들의 카톨릭에 대한 위협은 스페인에서도 혹독하였다. 19세기 초부터 스페인은 정치적인 파란을 겪게 되었고 1868년 마침내 카톨릭 왕조가 무너지게 되었고 카톨릭계 여왕은 폐위되었다. 그래서 그 후 스페인은 잠시나마 공화국이 되었었다. 그러다가 1923년부터 다시 군주 정치가 부활하였고 정치적인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스페인 정국은 혼란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고 다시 공화정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 교황청은 이에 격분하여 스페인의 카톨릭 교회로 하여금 반기를 들게 부추겼다.

    스페인은 1931년부터 1936년 사이에 대통령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는데 이는 다 교황청의 카톨릭 농간에 의한 것이었다. 이에 스페인 정부는 카톨릭에 대하여 격분하여 스페인에 있는 카톨릭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고 공립학교에서 신부나 수녀가 강의를 못하게 했다. 스페인 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곧 교황청의 철저한 보복을 초래하게 되었다. 교황청은 그들의 도전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가 철저하게 보복하였다.

    이어서 교황청은 이슬람 지도자들을 불러서 옛날 예루살렘을 교황청에 넘기지 않은 빚을 갚을 것을 요구하였고 정교 조약을 내세우며 스페인 징벌을 요청하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일을 추진하는 데는 예수회 요원들이 나서게 되었고 그 일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불쌍은 스페인 국민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큰 불행을 당하게 되었다. 프랑코 장군의 지휘하에 수많은 아랍 군대가 모집되었다. 교황청은 스페인에게 본때를 보여 주어야 한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리고 엄청난 재정을 지원하면서 이슬람 군대를 스페인에 파송하였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이 전쟁을 스페인 내전이라고들 떠들지만 이는 순전히 카톨릭 교회가 꾸며낸 이야기다. 언론을 동원한 교황청은 스페인을 공산주의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싸운 것처럼 떠들어 댔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은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는 전쟁이었다. 교황청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인 이슬람 군대는 카나리 제도와 남부 스페인을 공격했다. 스페인 국민들은 페트로스 세거라 추기경이란 사람이 이슬람 군대를 지휘하면서 카톨릭을 거부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무차별 죽이는 것을 보고 전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하여 교황청은 스페인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스페인은 교황청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는 예수회와 언론을 동원하여 교황청과 마리아가 도와서 스페인을 공산주의부터 해방시켰다고 떠들어댔다. 그 때 동원된 이슬람 군대는 약 400만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그 때 스페인의 참상이 오죽했겠는가 ?

    이 전쟁을 전후로 교황청과 이슬람교 사이에는 피하지 못할 조약이 들어 있는데 그것은 절대로 교황청이 이스라엘을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지금도 교황청은 이스라엘을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어리석은 이슬람 교도들을 위한 예수회의 공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수년 전에 이슬람교도인 무하마드 알리아카라는 사람이 교황을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놀랍게도 교황은 허리 아래에 약간의 상처를 입었을 뿐이었다. 교황을 저격했던 무하마드 알리아카는 유럽의 청부살인자 중에서 뛰어난 저격수였는데 불과 9미터 앞에서 교황이라는 표적을 맞추지 못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는 교황을 죽이기 위한 저격수가 아니라 크게 다치지 않게 정교한 솜씨를 발휘해야할 사람으로 고용된 것이었다. 얼마 후에 교황은 마리아의 은총으로 건재하다는 소문이 세상에 퍼지게 되었고 온 세상의 카톨릭 교도들은 다시 한번 성모 마리아께 감사를 드렸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뉴스에 나오는 교황이 자신에게 총을 쏜 무하마드 알리아카를 용서하면서 입을 맞추었을 때 온 세상은 교황의 관용과 사랑에 감복하게 만들었고 온 세상의 이슬람 교도들은 교황에게 또 한번 크게 감사하면서 빚을 지게 만들어 놓았다.

    앞으로도 우리는 깨어서 교황청과 예수회 그리고 이슬람교와 적그리스도가 무슨 짓을 하는지 철저하게 감시를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순진한 우리 성도들이 이러한 사람들의 농간에 휘말리지 않도록 성경과 역사를 바르게 가르쳐서 마귀의 수법에 유혹되지 않도록 주님의 양들을 지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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