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2 이스라엘 건국은 예수님의 재림을 확증한다말씀 2020. 4. 12. 16:52
이스라엘 건국은 예수님의 재림을 확증한다 눅21:20-33
인류역사의 마지막 때가 증거된 것은 이스라엘 회복의 역사이다. 이스라엘 독립은 하나님의 특별섭리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이다. 일련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도래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 역사가 인류역사의 시간표임을 알자. 1948년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독립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기적 그 자체였다. 지금은 당연해 보이지만, 독립 이전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정말 불가능하게 보였던 일이다. 지난 18세기 동안 세계 50여개 나라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이 옛 고토로 돌아와 독립된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성취되도록 하나님께서 개입해 이루신 역사임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성과 성전이 내려다보이는 감람산 위에서 마지막 때의 징조를 묻는 제자들에게 세 가지 중요한 때를 예고하셨는데(마24 막13 눅21) 요약하면 이 성전 큰 건물을 보느냐 돌 하나도 다른 돌위에 남지 아니하고 다 무너지리라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 듯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해 인류역사의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영광중에 구름타시고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재림에 관한 말씀이시다.
1. 이스라엘의 멸망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메시아를 보내시겠다고 성경을 통해 약속하셨는데 구체적으로는 처녀의 몸을 통해 올 것이고, 장소는 베들레헴이라고 예언자들을 통해 미리 말씀하셨고 때가 되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처녀 몸을 통해 오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시기로 예언된 메시아를 간절히 고대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로마인의 손을 빌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이보다 더 큰 모순과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성경은 그 때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요1:11) 그분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시매 그분의 백성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배척한 죄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땅에서 쫓겨나 2000년간 전 세계에 흩어져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1) 이스라엘의 형벌에 대한 예언과 성취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항하고 예수님을 배척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하나님께 어떤 형벌을 받게 될 것이지 예수님께서 오시기 1500년 전에 이미 예언되어 있었다.
(레26:27,33) 27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나를 대적하여 걸을진대 33 내가 너희를 이교도들 가운데로 흩으며 또 칼을 빼어 너희를 뒤따르게 하리니 너희 땅이 황폐하게 되며 너희 도시들이 폐허가 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형벌 하실 때 그들을 전 세계에 흩어질 것과 그들이 가는 곳마다 항상 칼이 따름 같이 생명의 위협을 당할 것과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가나안 땅은 황페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에 대해 신명기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신28:64) 주께서 너를 땅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모든 백성들 가운데로 흩으시리니 네가 거기서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곧 나무와 돌을 섬기리라.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이스라엘의 멸망당할 것에 대해 동일한 말씀을 하셨다.
(눅21:20-24) 20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것의 황폐함이 가까이 이른 줄 알라. 21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하고 그것의 한가운데 있는 자들은 밖으로 떠나가며 시골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22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성취하기 위한 원수 갚는 날들이니라. 23 오직 그 날들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그 땅에 큰 고난이 있고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으리라. 24 또 그들이 칼날에 쓰러지고 모든 민족들에게 포로로 잡혀가며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의 때가 찰 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리라.
1) 제 1차 유대전쟁
이스라엘은 여러 차례에 걸쳐 로마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일으켰었는데 예수님께서 예언을 하신지 37년 후인 A.D.70년에는 당시 로마는 내부적으로 어수선한 데다가, 이스라엘 같은 변방의 반란으로 강력한 진압이 필요한 때였다. 더구나 유대 저항군과 전투에서 생존을 약속받고 투항했던 로마 군인들이 유대인에게 떼죽음을 당한 일도 있고 해서, 로마의 분노가 극심해진 상태였다. 결국 당시 로마 황제인 베스파시안의 아들 타이터스 장군이 이끄는 8만명의 로마군은 예루살렘성을 에워싸고 압박하며 고사 작전을 펴고자 물줄기를 끊고, 식량보급로를 차단했다. 당시 로마군의 성벽을 공략하는 기술은 역사상 가장 뛰어났다고 평가받는 수준인데 예루살렘 성벽 또한 고지대에 위치한 데다가 워낙 견고한 터라 유대인들은 로마군의 투항 권유를 무시한 채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달리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로마군은 예루살렘성 주변으로 토성을 쌓기 시작했다.
(눅19:43-44)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라.
예루살렘성이 무너지던 날 아이 밴 임산부를 칼로 가르고 젖먹이를 어미 품에서 빼앗아 땅에 메쳐 죽이는 잔인한 학살이 있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노예로 팔려 전 세계에 흩어지게 되면서 예루살렘은 그 때부터 이방인에게 짓밟히게 된 것이다. 주께서는 그날의 상황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23:28-30) 28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 29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수태하지 못하는 자와 해산하지 못한 태와 젖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때에 그들이 산들에게 말하기 시작하여 이르기를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바로 토성이다. 고지대의 비탈진 성벽 주변에 어떻게 토성을 쌓을 수 있었을까? 당시 전쟁을 직접 목격한 요세푸스가 「유대전쟁사」에 그 해답을 서술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유대 제사장 신분으로서 이전에 독립 전쟁을 지휘하다 생포되었던 저항군의 우두머리이기도 했던 인물이다. 토성은 나무를 엮어 칸들을 만들고, 그 안에 돌과 흙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쌓았다니 엄청난 양의 나무가 필요했다. 로마군인들은 그 목재를 충당키 위해 예루살렘 주변 사방18km내 전 지역의 나무들을 완전히 벌목하여 황폐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식량보급원이 될 것을 염려해 유실수 역시 모두 베어 없앴다. 그 이전에는 나무들과 숲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예루살렘성의 자태가 벌거숭이의 황량한 벌판으로 변하였다고 요세푸스는 적고 있다. 후에 로마군이 점령하고 확인한 것이지만, 오랜 기간의 고사 작전으로 성 내에서는 먹을 것이 바닥나고 굶주림이 극에 달해 자식을 삶아 먹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신28:57) 또 자기 발 사이에서 나오는 어린 것과 자기가 낳을 자기 자식에게 악하게 뜨리니 이는 네 원수들이 네 성문에서 너를 괴롭게 하려고 너를 에워싸고 곤경에 빠뜨릴 때에 그녀가 모든 것이 부족하여 은밀히 그들을 먹을 것이기 때문이라.
여인이 태와 자기의 낳은 어린 자식을 가만히 먹은 사건들이 실제 일어난 것임을 유대역사가인 요세푸스 조차도 그것을 확인해 주고 있다.
성벽은 결국 무너졌고, 로마군은 무자비한 살상을 서슴지 않았다. 어린아이를 엄마의 품에서 빼앗아 부모가 보는 데서 내동댕이쳐 죽이고, 그 부모마저 죽였다. 임신한 여인의 배를 칼로 갈라 태아와 임부를 죽였고, 여느 전쟁과는 달리 노약자라고 해서 살려 주는 일도 없었다.
유대사가 요세푸스는 이때 110만여 명이 사망했고 10만여 명은 포로로 잡아갔다고 유대역사에 기록했는데 바로 그 때가 유월절을 지키고자 전국에서 수많은 인파가 모였을 때 예루살렘 성이 포위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은 예루살렘 남서쪽 30㎞ 지점의 마사다 요새에서는 열심당원들이 끝까지 항전했으나 대세를 반전시키지는 못하고 73년 마사다가 함락되면서 1차 유대 전쟁은 막을 내렸다. 로마군은 성벽을 파괴하고 성전을 불질렀다. 성전이 불에 탐으로 인해 금으로 입혔던 것이 녹아 내려 벽과 바닥에 스며들었고, 군인들이 그 금을 긁어내고자 말 그대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는 파괴가 자행되었다. 성읍이 황폐케 되고, 성소가 황량케 되리란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다.
2) 제2차 유대 전쟁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 거의 200여 년 동안 로마의 지배를 받아왔으나, 유대인들은 독립 정신이 투철하여 기회만 생기면 반란을 일으켜 로마를 몰아내려고 하였는데 1차 유대전쟁 이 후에도 이스라엘 전국에서 독립 항쟁이 다시 발발하게 일어났었는데 A.D.132-135년 시몬 바르 코크바가 로마를 상대로 일으킨 유대 독립전쟁을 제 2차 유대전쟁이라 한다. 132년 당시 유대의 최고 랍비였던 아키바는 바르 코크바를 민수기 24장 17절 한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는 메시야로 선언하면서 시몬 바르 코크바의 항쟁은 급속하게 유다 전역으로 퍼졌으며 급기야 예루살렘 점령에 성공하면서 "이스라엘 해방 제1년"이라고 새겨진 동전을 발행했고 아키바 벤 요셉은 유대교 부흥에 나섰다. 그러나 135년 바르 코크바는 베들레헴 근교의 바티르 마을 전투에서 전사했고, 아키바는 유대인들을 선동한 죄로 체포되어 처형당함으로써 2차 유대전쟁도 실패로 끝이 났다.
이 전쟁의 결과로 유대의 이름은 팔레스타인으로 바뀌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다시한번 철저히 파괴 되었다. 예루살렘이 항상 로마제국에 반대하는 항쟁의 진원지가 되기 때문에 하드리아누스는 모든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했고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A.D.135년 하드리안 황제는 아예 이스라엘 전역을 초토화시키고 58만 명을 학살한 후 생존자는 세계 전역으로 이산시켜 살게 했는데 살아남은 유대인은 노예가 되었고 이후 유대인은 예루살렘 출입이 금지되었으며 이를 어길 시 사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 되니 그래도 이전에는 주권만 없었지 영토나 국민은 있었는데, 이제는 국가를 구성하는 세 요소가 하나도 남지 않으므로 이스라엘 국가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이 때의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신29:23-24) 23 거기의 온 땅에 유황이 되고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고 열매 맺지도 못하며 그 안에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마치 주께서 자신의 분노와 진노로 무너뜨린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다 할 것이요 24 심지어 모든 민족이 말하기를 주께서 어찌하여 이 땅에 이같이 행하셨느냐? 이 큰 분노의 열기가 무엇을 뜻하느냐? 하리니
이스라엘은 두 번의 유대전쟁을 통해 전국토가 초토화되고 대략 170만명이 죽임을 당하면서 남은 자들이 세계 만방에 흩어지는 디아스포라가 되면서 유대 민족의 수난사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스라엘 민족, 즉 유대인을 핍박하고 죽이고 흩어뜨린 것은 성경의 예언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2. 흩어진 유대인들이 당한 환란
중세 두 세기(A.D. 1096년-1291년)에 걸쳐 있었던 「십자군 전쟁」의 슬로건은 이슬람교에 빼앗긴 성지 예루살렘 탈환이었다. 카톨릭 교도들인 십자군은 유대인을 "예수를 죽인 악마의 자식들"이라며 무참히 학살하였는데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그리고 1348년부터 1350년까지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었을 때 유대인 역시 흑사병의 동일한 희생자였지만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넣어 그렇게 된 것이라는 혐의를 씌워 엄청난 수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경제적인 터전을 잡고 안주할만 하다 싶으면 핍박과 국외추방이 유럽 각국에서 계속되었다. 1648년-1658년 사이에 있었던 폴란드 대 러시아와의 전쟁 중엔 40만 명의 유대인이 희생되었다. 이외에도 스페인 등 크고 작은 유대인 학살이나 추방은 늘 있었으므로 유대인은 항상 돈을 준비하고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해야만 했다.
현대사를 통해 세계 만인이 가장 생생하게 보았던 처절한 수난사는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이다. 그때 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대인은 약 60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그 수는 당시 전체 유대인의 60%에 이르는 것이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자신이 묻힐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그 언저리에 벌거벗은 채 줄지어 서 있으면 나치의 기관총구가 그들을 향하여 불을 뿜으면서 그 구덩이로 떨어지면 군인들이 하나 하나 확인 사살을 한 후 불도저로 그 위에 흙을 덮었다. 그런가 하면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때는 매장도 안된 많은 시체들이 땅위에서 나뒹굴었다. 유럽 여러 곳에 유대인 집단수용소가 설치되고, 각 곳에서 실려온 유대인들이 매일 가스실에서 죽어 나갔다. 시체들을 화장시키는 연기가 연일 하늘을 덮었고 그 냄새가 코를 찔렀다고 당시의 목격자들은 증언한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통해 그들의 고통과 환난의 일면목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치들은 유대인 시체들을 광장에 널려 놓고 기름을 그 위에 뿌려 화장하기도 했다. 벌거벗긴 후 머리를 삭발하고, 신체에 부착된 것은 물론 금니까지 다 뽑았다. 여인들로부터 삭발해 낸 머리털은 잠수함 방수제로 사용되었고 가스실로부터 나온 시체 기름을 짜서 비누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수많은 생명이 마취도 하지 않은채 온갖 잔학한 생체실험이 자행되었다. 시체를 얼렸을 때 어떻게 죽는지, 병균과 화학약품을 몸에 주입한 후 어떻게 죽는지 등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실험방법이 동원되었다. 한마디로 살아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실험을 다 자행했다. 그러한 유대인의 희생이 독일의 의학 수준을 크게 높인 계기가 되었고 인류는 그 혜택을 입고 있다니, 실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유대인들이 겪은 환란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신28:26) 네 시체가 공중의 모든 날짐승과 땅의 짐승들의 먹을 것이 될 터이나 그것들을 쫓아 줄 자가 없으리라는 말씀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유대인들은 짐승보다 더 비참하고 모욕적인 대우를 받으며 죽어갔다. 자기들이 흘린 피값에 대해 언젠가는 복수 하겠다는 기록을 유대인 전투조직은 저항과정에서 남기고 있다. 바로 그들의 조상들이 저지른 무죄한 피 및 그 대가가 조상들의 맹세대로(마27:25) 후손에게 응한 것을 깨달았을까? 더구나 (신28:37) 주께서 너를 데려다가 함께 살게 할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네가 놀랄 일과 속담과 웃음거리가 되리라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 들였을까? 그들은 자식들을 키우며 특히 신명기를 많이 암송 시켰으니 뭔가 알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성경에 예언된 대로 과연 그들은 흩어진 열국에서 가는 곳마다 멸시를 받고 안식할 곳을 얻지 못했으며, 게토에 격리 수용되거나 추방당했다. 그들은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만 했으며 자기 가족과 친구가 죽임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아침에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죽지 않고 무사히 보낼꼬, 저녁에는 배고프고 아파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이 저주스런 밤... 빨리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었던 것이다. 유대인의 환난사를 보면 하나님 말씀이 그들이 참상을 너무나 잘 표현한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신28:67) 네가 두려워하게 될 네 마음의 두려움과 네가 보게 될 것 즉 네 눈으로 보는 것으로 인하여 네가 아침에는 이르기를 저녁이면 좋겠다! 하고 저녁에는 이르기를 아침이면 좋겠다! 하리라.
3. 이스라엘 민족의 귀환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사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주님께서는 이에 대해,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밟히리라(눅21:24)고 하셨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영원히 망하거나 예루살렘이 끝까지 이방인에게 짓밟히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배척한 복음이 이방인, 곧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는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를 말하며, 어느날 이방인의 때가 차면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과연 예언대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고 전 세계 가는 곳마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던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에게 무참히 짓밟혔다. 성지 예루살렘은 역사의 회오리 속에 로마, 사라센, 애굽, 터키, 영국 등에게 점령당하는 수모를 격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기적적으로 독립했고, 1967년 6월 7일 제 3차 중동전쟁 때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손에 돌아갔다. 그리고 전 세계에 흩어진 이스라엘 민족이 그 땅으로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약 2000년간의 긴 환난의 시대가 끝나가고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시대가 온 것인데 이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 졌을까?
70년 로마의 예루살렘 파괴를 시작으로 유대인들이 전 세계로 흩어지는 이 사건은 동시에 이방인의 때가 시작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1894년까지는 이스라엘은 나라도 주권도 없는 국제 고아 내지는 떠돌이의 삶을 보낸다. 그 동안의 역사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볼 수 있는데 AD 5세기에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것은 기독교인들인 비잔틴 사람들이었다. AD 7세기경에는 마호메트의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들이 이곳을 점령하고 비잔틴을 축출하게 된다.
그러다가 1091년 경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무슬림들을 제거하고 이곳에 기독교 왕국을 건설하여 13세기까지 계속되다가 당시 이집트 무슬림인 마물룩 인들이 이곳을 점령하다가 16세기에 터어키인들에게 점령당했다가 20세기 초에는 다시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게 된다. 그리고 30년간 영국 통치 후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게 되는 것이다. 약 1500년 동안 팔레스타인은 역사의 주인들이 빈번하게 교체되었다. 만약에 팔레스타인 땅에 흘린 이들의 피를 채취해 본다면 아랍, 기독교, 무슬림, 십자군, 터어키계, 심지어는 몽골의 징기스칸까지 문명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너무도 혼혈적일 것이다. 아 그런데 유대인하면 두가지 종류의 유대인이 있다. 하나는 세파르디Sephardi 유대인은 원래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셈 계통의 혈통에 의한 유대인이고 다른 하나는 아시케나지Ashkenazi 유대인 - 우크라이나와 코카서스 지역에 살고 있던 튀르크계 하자르족이 8세기경 비잔틴과 사라센 사이에서 협공을 피하기 위해 유대교로 집단 개종함으로써 쉽게 말하면 개종에 의한 유대인인데 이들은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셈족 유대인과는 인종적으로 거의 무관하며, 이들이 현재 러시아와 동부유럽과 미국에 사는 유대인들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다가 유럽에서 한 유대의 지식인이 탄생하는데 그의 이름은 테오도르 헤르쩰이었다. 이 사람은 원래 오스트리아 비엔나 대학의 법과대 출신 기자였는데 어느 날 프랑스에서 나온 드레피스 사건을 읽게 된다. 프랑스군내에서 드레피스라는 대위를 독일의 간첩으로 체포하게 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유대인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첩보활동과 무관한 자였는데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재판을 받아 사형언도를 받는 희생양이 된 사건이 당시 에밀 졸라를 비롯한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드레피스 사건을 비판하면서 구명운동을 벌인다. 드레피스의 무죄함과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처형당해야하는 부당성을 고발한 것이다. 테오도르 헤르쩰은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유대인이 유럽사회에서 얼마나 차별 받고 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그 자신도 랍비의 아들이었다. 1894년 그는 독일어로 된 소책자인 ‘쥬덴스타트’ 즉 ‘유대국가’란 책자를 출판하다. 이 소책자는 바로 시온주의를 제창한 최초의 이론서가 되었다. 그 내용은 천년 이상의 방랑과 차별을 받는 유대인이 시온으로 즉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쩰에 의해 유대인들은 고대 유대국가가 있던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민족주의 운동인 시온주의 대회가 개최되면서 국제정치적인 문제로 발전했다. 19세기말 당시의 이 같은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환상으로만 여겨졌다. 그리고 테오도르 헤르쩰은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제1회 시온주의 총회를 개최하면서 많은 유대인 지식층들이 가담하면서 전 세계적인 조직을 확보해 나가는데 제 4차 시온주의 총회의 연설을 하고 다음해 1904년에 41세라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그는 죽는다. 그는 마지막이 된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꾸는 이 꿈은 5년 내지는 50년 후에는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다.“ 그가 죽은 지 50년이 채 안되어 그의 말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한마디로 시온주의는 메시야 운동이 아니다. 테오도르 헤르쩰이 시온으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은 종교인들이 꿈꾸는 그런 귀향이 아닌 정치적인 귀향이다. 이것은 정치적인 운동으로 안티 세미티즘, 소위 반유대주의의 산물이다. 떠돌아다니는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다른 민족으로부터 박해를 받으면서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자는 외침이었다. 테오도르는 물론 랍비의 아들이었기에 어렸을 적부터 유대민족의 귀향을 배우면서 자랐을 것이지만 그의 ‘시온주의 제창’은 철저하게 반유대주의인-드레퓌스 사건 같은 것을 경험하면서 나타난 것인데 이 운동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1) Aliyah 운동
테오도르 헤르쩰이 우리의 고향, 시온으로 돌아가자는 시온주의 운동은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는 기폭제가 되었는데 이름하여 알리야 운동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이 고토로 돌아오는 알리야 운동은 이미 성경에 예언되어 있다.
(렘16:14-15) 14 주가 말하노라 그런즉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다시는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께서 살아계신다, 하지아니하고 15 오히려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을 북쪽 땅과 모든 땅 곧 친히 그들을 쫓아내어 머물게 한 모든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께서 살아계신다 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다시 데려가리라.
(렘30:3) 주가 말하노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된 자들을 다시 데려오며 또 그들로 하여금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땅으로 되돌아오게 할 터인즉 그들이 그 땅을 소유하리라
(겔36:24) 내가 너희를 이교도들 가운데서 취하고 모든 나라에서 너희를 모아 너희 땅으로 데려가리다.
전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는 알리야 운동은 반유대주의가 강한 러시아로부터 일어났다.
첫 번 ‘Aliyah’는 지난 1882년부터 1903년까지 약 35,000명의 유대인들이 동유럽부터 귀환하였고
두 번째 ‘Aliyah’는 1904년부터 1914년까지 약 40,000명이 예멘으로부터 귀환한 것이다.
1917년 영국이 예루살렘을 오스만터기로부터 접수하고 영국외상이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벨포어 선언을 한다.
세 번째 ‘Aliyah는 1919부터 1923년까지 40,000명이 러시아로부터,
네 번째 ‘Aliyah’는 1924년부터 1929년까지 모두 82,000명이 주로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것이다.
다섯 번째 ‘Aliyah는 1929년부터 1939년까지 주로 동유럽에 거주하는 유대인 250,000만 명이 나치즘을 피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것이다.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Aliyah’는 이스라엘 독립 이후인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사이에 동유럽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로서 유대인 박해를 피해 50만이 넘는 유대인들이 한꺼번에 팔레스타인 땅으로 귀환하였다.
(2) 제 1차 세계대전은 이스라엘 국가 건설의 시발점이 되었다.
1) 1917년 11월 2일 영국외상 벨포어 선언
영국 외상 벨포어로부터 유대 시온지부로 한 장의 서한이 보내어졌다.
영국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향토수립을 지지하고 이 목표달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는 이 편지를 벨포어 선언이라 한다. 이 벨포어 선언의 동기는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시 영국은 전쟁을 치르는 중 폭약인 무연화약부족을 즉 에탄올을 개발하여 해결한 사람이 맨치스터대학 화학교수이며 열렬한 시온운동가인 유대인 하임 바이츠만이었는데 영국을 도운 것은 바이츠뿐만이 아니라 금융부호가인 로스차일드는 돈과 무기로 그리고 수많은 유대인들도 자원하여 영국을 도와서 1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차대전 승리는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오스만 터키를 몰아내고 영국이 지배하게 된 것이다. 영국은 유대인들에게 보답하는 의미에서 1차 세계대전 승리를 통해 유대인들에게 벨포어 선언을 하면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들어갈 명분을 갖게 하였다. 벨포어 선언이 전해지면서 유럽에 살던 셋째 알리야 운동 넷째 알리야 운동에 의해 유대인들이 속속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오면서 팔레스타인에는 이스라엘 재건을 위한 본격적인 움직임이 일어났다. 불모지는 개간되어 농사를 짓게 되었고 집과 수도가 놓여지고 건물이 세워지면서 유대인 마을의 형성되었지만 아직 국가를 세울 만한 인구는 안되었지만 분명 국가를 세울 꿈은 점점 현실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러나 1939년 이스라엘의 독립을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돕겠다던 영국은 아랍과의 관계로 인해 돌연 유대인들의 이민을 제한해 버린다. 유대 이민자수를 매년 15000명으로 제한하고 5년 후에는 금지시킨다는 내용이다. 1930년대부터 40년대에는 영국이 강력하게 이민정책을 막았다. 팔레스타인 주변 아랍국들은 유대인들 이주를 반대했고 영국은 유대인들의 항의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을 통치하면서 더욱 심해진 반유대정책은 절정에 치달았고 독일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은 나치를 피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려고 왔으나 배는 정박되지 못하고 강제 추방되는 경우가 벌어졌다. 독립을 꿈꾸던 유대인들의 꿈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림과 동시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이 때의 상황을 보여주는 영화가 폴뉴면이 주연한 영광의 탈출이다.
(3) 제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이스라엘이 회복되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인류역사는 전무후무한 대 참극이 벌어진다. 1933년 독일 나치당에서 총통으로 선출된 아돌프 히틀러(1889-1945)는 1차 세계대전의 패배에 침체된 독일게르만 민족을 민족주의로 승화시키는데
그 이면에는 반유대인정서를 자극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유대인차별정책으로 유대인들에게 완장을 차게 하면서 유대인들을 핍박하는 독일인들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유대인 상점은 약탈되었고 이유없는 폭행이 따랐고 유대인 회당은 불에 탔다. 이같은 상황을 피하는 길은 독일을 떠나는 것 뿐이었다. 독일을 떠나기 위해선 독일 정부에 돈을 지불하여야 하던지 아니면 재산과 집과 모든 것을 버리고 팔레스타인으로 향해야 했다. 그러나 독일인 아내 때문에 독일인 남편 때문에 사업 때문에 재산 때문에 독일을 떠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들은 후에 유대인수용소 게토에 갇히게 되었는데 독일은 승승장구하면서 그만큼 게토에 갇히는 유대인의 수도 늘어만 갔다
1) 홀로코스트가 이스라엘 국가 건설의 기폭제가 되다
1940년 바르샤바 게토인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유대인들을 가리켜 홀로코스트라고 한다. 2차 대전이 극점으로 치달으면서 독일은 밀리기 시작하면서 이 때 게토에 갇혀있던 유대인들을 기차에 실렸는데 기차의 선로가 끝나는 곳은 아우슈비츠 학살수용소였다. 매일 수천명 수만명씩 유대인 대학살을 자행되었다. 2차 대전이 남긴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참극은 바로 아우슈비츠에서 이루어졌는데 독일이 패망하고 연합군이 아우슈비츠를 점령했을 때 온 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유대인들은 무려 7년 동안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당시 유럽에는 약 1000만명의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 어린아이 130만명을 포함한 600만명이 죽임을 당한 것을 홀로코스트라고 한다. 홀로코스트는 유럽의 유대인들을 몰살시킨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히틀러의 민족주의 정책은 600만유대인들을 가스실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했다. 성경은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렘30:7) 아아, 슬프도다! 그 날이 커서 그것과 비길 날이 없나니 그 날은 곧 야곱의 고난의 때로다. 그러나 그가 그 고난에서 구원받으리로다.
아리러니칼 하게도 홀로코스트는 이스라엘의 국민을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홀로코스트를 겪은 후 유대인들이 더욱 더 몰려들면서 국가재건의 기초를 쌓은 것이다. 국민이 없다면 국가가 될 수 없는데 유대인들에겐 자신들을 보호해줄 국가의 소중함이 뼈속 깊이 사무쳤다.
유럽사회에 정착하여 유대국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유대인들에도 고토로 돌아가는 열망이 가득차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유대인들은 물밀 듯이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일 후 국제사회는 다시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면서 유대인 국가건설에 대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유대민족 씨를 말리고자 저질렀던 홀로코스트가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 독립을 앞당기는 기적을 낳았다.
2) 영광의 탈출
영광의 탈출이라는 이 영화는 이스라엘의 건국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스펙타클하게 그려낸 대하 서사극. 미국 작가 레온 유리스(Leon Uris)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원제 엑소더스는 구약성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말로 모세가 유태인들을 데리고 이집트에서 탈출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영광의 탈출의 줄거리는 이렇다. 1947년 키프러스에서 이스라엘로 귀국하려는 유대인들이 거대한 수용소에 갇혀있다. 제2차 대전 종전 후의 혼란이 온 세계를 흔들고 그런 사이에 억압받던 민족들이 오랜 질곡을 벗어나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시작하는 이 무렵 조국없는 민족이라 박해를 받던 유대인에게도 그들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건국을 정면에서 반대하는 아랍 여러 나라의 동향에 신경을 쓰는 영국은 키프러스 섬에 수용소를 설치하고 팔레스타인을 향해 몰려드는 유대인의 발을 일단 이곳에 묶어 놓는다. 어느날 키프러스 섬에 알리(Ari Ben Canaan: 폴 뉴먼 분)라는 한 사나이가 어둠을 타고 상륙해 유대인 수용소에 잠입한다. 그는 전 영국군 장교로 유대인 지하조직의 간부이다. 알리는 영국군 유대인 이동증명서를 위조하고 여객선 '엑소더스(Exodus)호'를 항구에 대기시킨 다음 백주에 당당히 2800여명의 동포를 탈출시키기 위해 이 배에 승선케 한다. 뒤늦게 이 사실 을 안 영국군은 황급히 엑소더스호에 정선 명령을 내리자 액소더스의 모든 유대인들은 알리의 지도아래 전원 단식 투쟁을 한다. 이러기를 100시간, 마침내 영국군은 들끊는 세계 여론에 무릅을 꿇고 정선 명령을 취소한다. 전 유대인의 희망과 꿈을 싣고 조상의 땅 팔레스타인을 향해 힘차게 출발하는 '액소더스호'. 한마디로 지하 운동을 하던 유대인들은 '엑소더스'라고 불리우는 배를 이용해 이들을 데리고 이스라엘로의 '영광의 탈출'을 시도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가 1960년 뉴욕에서 상영되었을 때 이스라엘 국가 '하티크바'를 연주하는 장면이 나오자 관객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춤을 추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이스라엘로서는 이 영화만큼 해외 홍보 효과를 거둔 것이 없었고 그만큼 미국인들을 대규모로 친 이스라엘편으로 돌아서는 데 공헌한 작품이다. 이 때문에 이 영화의 주인공 폴 뉴만은 아랍국가에서 입국금지 인물이 되기도 했다. 언해스트 골드의 테마음악은 한 민족의 수 천년에 걸친 비원의 깊이와 무계를 실감하게 하는 감동적인 명곡으로 60년 아카데미-작곡상을 수상하였다.
3) 쉰들러 리스트
쉰들러리스트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역사영화이다!!
시대는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한 시기 폴란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폴란드는 독일에 의해 점령을 당하고....폴란드의 크라코우에는 기회주의자 오스카 쉰들러가 살고 있었다. 그는 세계 2차대전 기회를 틈타 폴란드계 유대인이 경영하는 그릇 공장을 인수하게 된다. 그러나 인수하기 위해 그는 우선 나치 당원이 되어야 했고 ss요원들에게 여자와 술 등 뇌물을 받치며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결국 인수하기 이릅니다. 쉰들러는 인건비 한푼 안들이고 유대인들을 이용하면서 한편으로는 유대인 회계사인 스턴과 가까워지며 그의 도움으로 회사가 번창하게 됩니다. 그러나 스턴과의 관계를 통해 쉰들러는 자신의 이기주의와 양심이 흔들리고 그것은 나치의 유대인들을 향한 살인 행위로 쉰들러 자신의 눈을 통해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게 됩니다. 마침내 쉰들러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의 양심을 움직여 유태인을 강제 노동 수용소로부터 구해내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구해내기 위해 쉰들러 리스트가 작성이 되고....쉰들러는 노동 수용소 장교에게서 뇌물을 주고 유대인들을 구해내기로 계획을 잡는다. 마침내 스턴과 함게 유태인 명단을 완성하고 쉰들러는 모든 계획을 이루어 1100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을 폴란드로부터 구해내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나치 당원이 쉰들러는 연합군으로 부터 도망을 쳐야 하는 입장이 되고 도망가기 전 자신이 구한 유대인들과 마지막 순간을 나누는 쉰들러... 유대인들은 고마운 마음을 모아 작은 금반지에 성경구절을 적어 쉰들러에게 선물하지만 쉰들러는 자신이 욕심을 버리지 못해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내가 입고 있는 이 옷... 이 금 배찌... 이 차...이것들을 팔았다면 더 많은 사람을 구해 냈을텐데... 스턴의 한 마디 " 한 사람을 구함은 세상을 구함이다"
4. 이스라엘 독립
1947년 11월 29일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국가 건설에 대한 안이 유엔 총회에 상정되었다. 당시 이스라엘의 독립을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던 아랍국들은 석유이권을 내세우면서 유엔총회 국가들을 압박하였다. 이스라엘독립을 지원하면 석유에 관한 이권이 끊어질 가망을 던졌고 유엔총회에 참석한 국가들은 이스라엘 독립으로 인하여 아랍국가들과 사이가 멀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민족이 나라를 건국하는 것에 대해 아랍국가들은 그것은 유대인들의 억지이며 어찌 한나라에 두 국가가 있을 수 있단말입니까? 만약 이스라엘 독립을 승인한다면 아랍석유의 접근이 어려워 질수 있다고 압박을 넣는가 하면 일부국가는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를 겪은 만큼 독립하여야 할 자격이 있다고 하였다. 이스라엘 독립에 대한 유엔총회 결과는 찬성 33 반대 13으로 유엔은 이스라엘 독립을 승인하였으며 이스라엘은 독립국가를 선포할 수 있는 국제적 명분을 갖게 되었다. 이스라엘 건국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승리였다. 벤구리온 초대수상은 유엔안을 바탕으로 1948년 5월 14일 금요일 텔아비브 박물관에서 암모스 9장을 중심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암9:11-15) 11 그날에 내가 다윗의 쓰러진 장막을 일으켜 세우고 그것의 무너진 곳을 막으며 내가 그의 허물어진 것들을 일으켜 세우고 내가 그것을 옛날과 같이 건축하리니 12 이것은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들과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이교도들의 남은 자들을 소유하게 하려 함이라. 이 일을 행하는 주가 말하노라. 13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쟁기질하는 자는 곡식 거두는 자를 따라 잡고 포도를 밟는 자는 씨 뿌리는 자를 따라잡으며 산들은 단 포도즙을 흘리고 모든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 14 또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포로 된 자들을 다시 데려오리니 그들이 피폐한 도시들을 건축하여 거기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세우고 그것들의 포도즙을 마시며 또한 동산들을 만들어 그것들의 열매를 먹으리라. 15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준 그들의 땅에서 다시는 뽑히지 아니하리라. 주 네 하나님이 말하노라. 벤 구리온에 수상에 의해 낭독되는 가운데 이스라엘이 독립했다.
아세톤을 대량으로 얻는 공정을 개발하여 영국을 1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바이쯔만의 노력으로 1917년의 ‘발포어 선언’을 이끌어내었던 바이츠만은 세계시오니즘연맹 총재를 두 번이나 역임하면서 이스라엘 건국에 크게 기여하였므로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공로를 인정받아 임시대통령직을 맡은 뒤 다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재선되기에 이른다.
이스라엘은 BC 63년에 망한 지 정확히 2011년 만에 나라를 되찾은 것이다. 한마디로 기적으로 탄생한 나라이었다. 아랍 연합국들은 영국이 철수하는 동시 이스라엘을 무장해제 시켜 아랍나라 밑에 둘려고 하였는데 세계여론 역시 이스라엘이 존재하기 위해선 아랍체제 믿으로 들어가라 그렇지 않으면 지중해 바다에 몰살당할 것이다라는 여론도 있었지만 이제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고 이스라엘의 독립이 선포하고 아랍국가는 영국이 철수함과 동시에 아랍국가로 통일할려고 전쟁을 위협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실제로 1948년 5월 14일 독립하면서 독립전쟁을 하게 되는데 당시 유대인 인구 65만명인데 전쟁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런 비관론도 있었지만 대세는 전쟁을 하여 죽을지언정 2천년만에 온 이 기회를 잃을 순 없었다. 지금이 바로 적기이다. 수상벤구리온, 대통령 하이츠만 같은 지도자들이 몇천년만에 온 기회를 놓치면 나라는 없다는 설득력이 유대인들의 마음에 불타 올랐다.
1) 1차 중동전쟁
2000년 만에 독립을 했다는 독립선언서를 듣는 기쁨도 잠시였다. 건국 선언한 그날 밤 이집트 전투기들이 이스라엘을 폭격했고 이튿날 아랍 군의 침입이 시작된다. 이로써 전 아랍이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다섯 개국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북쪽에서는 레바논과 시리아가, 동쪽에서는 요르단과 이라크가, 남쪽에서는 이집트가 공격해 왔다. 누가 봐도 이스라엘은 곧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전쟁 초기에 이스라엘 군 약 2만 7천 명과 정착촌 예비군 약 9만 명이 결사항전으로 맞서 싸웠다. 여자들이라고 예외가 없었다. 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신생 조국을 지키기 위해 달려왔다. 소총 한 자루를 두 사람이 나누어 쓰고, 박물관에 있던 대포까지 동원해서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웠다. 20일 넘게 끈 전투 끝에 결국 유대인들은 2천 년 만에 어렵게 얻은 나라를 지켜냈다. 1948년 6월 11일 스웨덴의 중재로 휴전협상이 시작되었다. 그 사이 미국의 지원으로 현대적인 전투군대로 변한 이스라엘 군은 모세 다얀 장군의 지휘 아래 이집트 카이로, 요르단 암만, 시리아 다마스쿠스를 폭격해 아랍 연합군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이듬해 2월 평화조약 조인으로 전쟁은 끝났고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유엔안보다 50퍼센트나 더 많은 지역을 점령했다.
이 전쟁으로 고향에서 축출된 아랍인들은 80만 명이나 된다. 이들을 팔레스타인인들은 현재 팔레스타인 땅인 가자지구에 거하는데 그 자체로 거대한 난민촌이라 할 수 있다. 반면 그해 말에 34만 명의 유대인 이민자들이 도착했다. 1951년 말에는 추가로 34만 5천 명이 와서 유대인 인구는 갑절로 불어났다. 이들은 주로 아랍 국가 출신들이었다.
2) 3차 6일 전쟁
1967년 6일 전쟁은 3개의 아랍연합국인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와 전쟁을 하였는데 6일 만에 전쟁을 승리로 한 기적이다. 1967년 6일 전쟁은 국가가 된지 20여년밖에 안된 소국 이스라엘은 역사상 가장 놀라운 군사적 승리를 이룩한다. 6일 만에 숫적으로 2배나 많은 적들과 싸워 이겼던 6일 전쟁은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 한 것이다. 양국 군사력을 봐도 이스라엘은 나라의 존립자체가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지만 전쟁에 이겨서 예루살렘을 탈환하였고 시나이 반도 골란고원을 차지하였다. 6일 전쟁은 초자연적인 일들이 여러번 벌어졌던 전쟁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3년 후 1948년 5월14일, 드디어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의 재생이 있었다.
(눅21:29-30) 29 무화과 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 그것들이 싹을 내면 너희가 보고 이제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너희 스스로 아나니
우리 시대에 기적같이 2000년 만에 이스라엘 국가를 재건한 것은 주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해 왔다는 것을 증거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재림은 인류역사의 마지막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시간표임을 믿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자. 아멘.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4-4 느부갓네살왕의 꿈을 통한 세상역사 설계서 (0) 2020.04.26 20-4-3 코로나 바이러스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 (0) 2020.04.19 20-4-1 종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0) 2020.04.05 20-3-5 바이러스가 역사의 종말 신호이다. (0) 2020.03.29 20-3-4 세상 끝날의 징조 (0) 2020.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