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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1 성서인물 에스라와 느헤미야
    말씀 2019. 7. 8. 00:22

    포로 귀환을 위해 준비된 에스라와 느헤미야
                                           느 6:15-16, 8:6-10
     
    책은 즐거움을 주는데 책 중에서도 가장 좋은 책인 성경을 읽는 사람은 가장 좋은 즐거움을 경험할 뿐만이 아니라 크고 귀한 감동까지 겪는다. 성경을 읽는 중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화되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 기록된 말씀이라는 것이 정론인데 성경속에서는 특정인물에 대한 기록도 있다. 여기에 해당된 사람들이 <성서 인물>이다. 하나님께서는 성서인물을 통하여 역사하시면서 인생들과 가까이 하셨다. 구약에 나타난 인물들의 생애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그들의 신앙적 면모를 점검해 보는 동시에 민족과 역사에 미치는 영향 등,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 마치 이러한 성서인물을 통해서 비쳐지는 인생은 마치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천연의 조화를 이루듯이 성서인물 한 사람을 통해서 나오는 신앙적, 인간적 체취를 통해 우리는 성서인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구약성서에서 주요 성서인물들의 생애에서 획을 긋는 중요한 때를 포착하여 그들의 삶이 던져 준 교훈을 현재 본인에게 적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성서 인물들을 통해 그들과 교감하며 자신의 삶과 신앙을 돌아보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된다.
     구약성서에서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구약시대의 마지막 역사를 다루는 아주 중요한 책이다. 열왕기하와 역대하의 마지막 부분이 다윗의 왕조였던 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으로 망하고(BC 586), 유다의 왕과 왕족들, 귀족들, 유능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는 이야기로 마무리하였다. 열왕기하 24장과 25장을 보면 BC 605년, 597년, 586년 바벨론이 세 차레에 걸쳐 유다를 공격했고, 유다 백성들이 세 차례에 걸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것을 알 수 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하던 유다 백성들 역시 세 번에 걸쳐 고국으로 돌아왔다. 1차 포로귀환은 BC 538년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2차 포로귀환은 BC 458년 서기관 겸 제사장 에스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3차 포로귀환은 BC 444년, 총독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바벨론 포로

    포로 귀환

    1

    BC 605 다니엘

    1

    BC 538 스룹바벨, 여호수아

    2

    BC 597 에스겔

    2

    BC 458 에스라

    3

    BC 586 아주 많이

    3

    BC 444 느헤미야


     간단하게 말하면, 에스라서-느헤미야서는 70년 간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끝내고, 조국으로 돌아온 유대 백성들이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건축하는 이야기에다 포로귀환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로 일으켜 세우는 영적 부흥 이야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눈여겨 보는 곳은 에스라서 1:1-3절 말씀과 역대하 마지막 두 구절(36:22,23)이 똑같은 내용입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이 왕위에 오른 첫 해에, 주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고레스는 온 나라에 명령을 내리고, 그것을 다음과 같이 조서로 써서 돌렸다(대하36:22, 스1;1)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조서를 보면,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이 되던 해포로귀환이 이루어진 배경이 잘 나와 있다. 유다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낸 것은 고레스가 내린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습니다. 고레스가 내린 조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땅위의 모든 나라를 주셔서 다스리게 하시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그의 성전을 지으라고 명하셨다. 이 나라 사람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들을 모두 올라가게 하여라"(대하36:23,  스1:2-3)
    그런데 고레스가 이런 조서를 내리게 된 것은 에레미야서를 근거로 하였는데(렘29:10)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빌론에서 칠십년이 찬 뒤에 내가 너희를 돌아보고 너희를 향한 나의 선한 말을 이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1. 성서인물 에스라
    오늘은 느헤미야서를 기록한 성서인물 느헤미야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본래는 한 권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 두 권으로 분리되었으므로 먼저 에스라를 이야기 한 후에 느헤미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합니다.
    에스라는 제사장겸 서기관으로서 바벨론에서 태어난 유대인인데 그가 기록한  에스라서 1-6장까지에는 먼저 1차 바벨론 포로 귀환 때, 백성들을 이끌고 왔던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건축(BC 536)하려고 하는데, 사마리아사람들이 방해를 해서 BC 520년까지 16년 동안 성전을 건축하지 못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를 보내셔서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백성들을 격려해서 16년 동안 중단되었던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하게 해서 4년 뒤인 여 BC 516년에 성전을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에스라서 7장부터 에스라가 등장합니다. 에스라는 아론의 후손이기 때문에 제사장인 동시에 학사(서기관)이기도 합니다.
    2차 포로귀환 때, 학사 에스라가 포로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때가 BC 458년이었으니까 1차 포로귀환 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고 에스라가 2차 포로귀환 한 때(BC 458)는 1차 포로귀환자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지 80년이나 되었고,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지은 지, 58년 되던 해였습니다. 그러니까 에스라 6장과 7장 사이에는 58년의 시차가 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지은 지 58년 후,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보니까 백성들의 영적인 삶은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총독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해서 성전은 다시 세웠고, 백성들은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렸지만, 그것은 형식에 불과했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이 화려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당시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로 하나님을 떠난 저들을  본, 에스라는 옷을 찢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뜯으며 주저 앉아 울면서 기도를 드렸다(스9:3). 에스라서 9장은 하나님을 떠난 유다 백성들을 위한 에스라의 회개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에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많은 무리가 에스라 주변에 모여서 큰 소리로 슬피 울면서 회개했습니다. 이방여인들과 결혼한 지도자들은 자신의 잘못된 삶을 돌이키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서약했는데, 에스라서 10장은 이방여인들과 결혼했다가 회개하고 서약한 지도자들의 명단들입니다. 그러므로 에스라서는 단순히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지었다는 것을 말하는 책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무너진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다시 일으킨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에스라하면 우리는 느헤미야서 8장을 읽을 때에 학사 에스라를 생각한다. 에스라가 초막절에 수문 앞 광장에서 백성들 앞에 서서 반 나절 동안 모세의 율법을 낭독해 주었던 바로 그 에스라를 생각합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주 하나님을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주께 경배하니라. 모세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온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이날은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8:9) 
    에스라는 그냥 혜성같이 등장한 사람이 아닙니다. 에스라는 느헤미야가 8장에 등장하기 14년 전, 에스라서 7장에 먼저 나옵니다. 에스라가 2차 바벨론 포로귀환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돌아온 것은 BC 458년이었습니다. 에스라서 7:10절에 보면 에스라의 포로귀환 목적이 잘 나와 있습니다. "에스라가 주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에스라 7:10)
     
    성서 인물을 통한 역사서는 인생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역사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예루살렘의 영적 개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서술함으로써 성경 이야기를 진전시키고 있습니다. 

    (1) 에스라서의 내용 구성
    역대하의 끝부분에 언급된 고레스의 유다 포로 본토 귀환령을 다시 반복함으로 시작되는 에스라서는 스룹바벨이 주도하는 1차 포로 귀환과 귀국한 유다 백성의 성전 재건 사역(1-6장), 이어서 에스라가 주도하는 2차 포로 귀환과 대부흥 운동의 역사(7-10장)로 끝을 맺는다.

    구분

    1차 포로 귀환

    2차 포로 귀환

    내용

    고레스

    의 조서

    인구

    조사

    성전

    재건

    성전

    완공

    에스라 인솔하에 귀환

    개혁과 부흥 운동

    구절

    1

    2

    3-5

    6

    7-8

    9-10


     본서는 히브리 성경에서 느헤미야서와 더불어 한 권으로 분류되어  ‘에스라서’로 불렸다. 이후 라틴어 역본인 벌게잇(Vulgate)은 에스라서를 제1에스라, 느헤미야서를 제2에스라로 명명하였으며 1517-1518년에 쓰여진 히브리어 성경에서 비로소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본서 저자는 전통적으로 에스라가 기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근거로 첫째, 유대인들의 전승을 집대성한 탈무드가 본서를 에스라의 저작으로 말한다.
     둘째, 본서에서 에스라가 자신을 1인칭으로 자주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7:28-9:15).
    셋째, 본서에 자주 나타나는 제사 제도나 율법과 관련된 상세한 기록들은 모세 율법에 정통하며 학사요, 제사장인 에스라의 저작으로 보기에 충분하다는 점이다(7:6).
     이제 그 기록 시기는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다. 첫째, 본서에는 스룹바벨이 주도한 제1차 포로 귀환과 귀환자 명단이 나타난다(2:1-70 B.C. 537년경). 둘째, 본서에는 에스라가 주도한 제2차 포로 귀환 기사가 나타난다(7:8 B.C. 458년경). 셋째, 제3차 포로 귀환(B.C. 444년경)을 주도한 느헤미야 시대의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10:6; 느 3:1). 넷째,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곽을 수리한 이후에도 에스라는 귀환한 유다 백성의 대대적인 회개 운동을 주도하였다(느 8:1-9; 12:36). 이상의 사실은 에스라가 느헤미야 시대까지도 생존하였으며, 본서는 에스라 말년에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대략 B.C. 444년 전후).

    (2) 에스라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역대하 후반부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한 유다의 패망을 기술하고 있다면 본서는 바사의 고레스로 인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던 유다 백성의 포로 귀환령이란 복음으로 시작된다. 나라를 잃고 타국에서 포로 생활한 지 70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하나님은 유다 백성과 맺은 언약을 잊지 않으시고, 연단의 기간이 끝나자 마침내 택한 백성을 본토로 되돌아가게 하심으로써 본서는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집념이 얼마나 대단한 지를 생생하게 느끼게 해준다. 아울러 본토로 귀환한 유다 백성이 스룹바벨의 지도하에 성전을 재건하고 학사 에스라의 주도하에 영적 대부흥 운동을 통해 과거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며 올바른 예배를 복원하는 모습을 통해 정녕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올바른 예배에 있음도 알게 된다.

    (3) 에스라서의 배경
    에스라서는 1차, 2차 등 두 차례에 걸친 포로 귀환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본서는 포로로 끌려간 유다 백성이 집단으로 살던 바벨론 남부 유브라데와 티그리스 강 중간의 평원 도시 닙불(Nippur), 포로 귀환의 경유지인 유브라데 강 연안 도시 바벨론, 레셉, 알레포, 수리아의 하맛, 다메섹, 그리고 포로 귀환의 종착점인 예루살렘 등이 중심무대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때(BC458)는 조상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지 약 140년이 지난 때였으니 에스라는 당연히 바벨론에서 태어났을 것이고, 그의 아버지도 바벨론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조상이 포로로 끌려간 바벨론에서 에스라는 주의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는 사람이었다. 에스라가 평소 주의 율법을 연구하지 않았다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주의 율법을 가르칠 수 없었을 것이다. 에스라는 이미 준비된 하나님의 종이었다. 에스라는 아론의 16대 자손으로서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4차에 걸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는데, 에스겔을 비롯한 제사장들이 포로로 끌려갔던 BC 597년이 아니었을까 추측합니다. 에스라의 조상들이 대제사장 아론의 후손들이었으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부흥을 위해 오랜 시간 준비해 놓은 말씀의 사람이 바로 에스라였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에스라가 수문 앞 광장에서 백성들에게 주의 율법을 읽어주고 가르치기 위해 무려 14년 동안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에 도착했던 BC 458년(2차 바벨론 포로귀환)부터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BC 444년(3차 바벨론 포로귀환)까지 14년 동안 주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가르칠 준비를 했습니다. 여기까지가 1부 에스라이야기 이다.

     2. 성서 인물 느헤미야
    느헤미야서도 1-7장은 3차 바벨론 포로귀환 공동체의 지도자였던 느헤미야 이야기이지만 8장부터 에스라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스라서가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이야기(1-6장)와 에스라를 중심으로 유다 백성들의 영적개혁을 일으키는 내용(7-10장)이라면,
    느헤미야서는 총독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의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이야기(1-7장)와 에스라를 중심으로 유다 백성들의 무너진 삶을 다시 일으키는 영적 부흥 이야기입니다(8-13장).

    에스라서

    느헤미야서

    1-6

    예루살렘 성전

    재건(스룹바벨)

    1-7

    느헤미야에 의한 예루살렘 성벽 재건

    7-10

    유다 백성 영적

    부흥(에스라)

    8-13

    에스라에 의한 유다 백성 영적 부흥 13장은 느헤미야의 개혁 이야기

     
     (1) 3차 포로귀환을 이끄는 느헤미야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 때 술맡은 관원이었다. 술맡은 관원이란 왕을 독살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왕이 마실 술을 미리 맛보는 신하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느헤미야였다.
    왕의 생명을 지킬 책임이 느헤미야에게 있었다는 것은 왕과 느헤미야의 관계가 아주 각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느헤미야의 형제 하나니가 유다에서 와서 예루살렘 성에 남아있던 유다 사람들의 형편을 전해주었다. 유다 사람들이 자기 나라, 고향에서 업신여김을 받고 산다는 이야기였다. 더 안타까운 소식은 예루살렘 성벽이 허물어지고, 성문들이 다 불에 탔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느헤미야는 주저앉아 울면서 며칠 동안 금식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느헤미야 혼자 예루살렘으로 온 게 아니라 바벨론에 포로로 있던 유다 백성들이 느헤미야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을 3차 바벨론 포로귀환이라 하고 BC444년이었다.
    (2) 성벽을 건축하는 느헤미야
    느헤미야는 12년 동안 총독으로 일하면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을 방해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과 불에 탄 성문들을 재건하는데 정말 최선을 다했다. 호론사람 산발랏, 종노릇하던 암몬사람 도비야와 아랍사람 게셈이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는 느헤미야 목숨을 위협까지 할 정도로 격렬하게 방해했다.
    (느4:11) 원수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쳐들어와서 성벽을 재건하려는 느헤미야를 죽여서 성벽건축 공사를 못하게 하려고 할 정도였다.
     느헤미야는 젊은이들을 무장하게 하고, 짐을 나르는 이들은 한 손으로 짐을 나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무기를 잡았다. 성벽을 쌓는 이들은 저마다 허리에 칼을 차고 일을 했습니다. 경비병들은 잘 때도 옷을 벗지 않고 성벽을 재건하는 사람들을 지켜주었고, 물 길러가는 이들도, 무기를 들고 다녔습니다.
    느헤미야와 지도자들, 모든 백성들은 성벽 쌓는 일에만 힘을 기울였던  결과 예루살렘 성벽은 52일 만에 완공되었습니다(느6:15).

    (3) 느헤미야서의 내용구성
    느헤미야 7장에는 느헤미야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3차 포로 귀환자들의 이름들이 나오지 않고,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1차 바벨론 포로 귀환자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에스라2장에 나온 1차 바벨론 포로귀환 명단과 거의 비슷합니다.

    구분

    예루살렘 성곽 재건

    신앙 부흥 운동

    내용

    성벽 재건

    준비

    성벽 재건

    사역

    언약 갱신

    언약에 따른 개혁 조치들

    구절

    1-2

    3-7

    8-10

    11-13


    느헤미야서 8장에 모든 백성들이 수문(예루살렘 여러 성문 가운데 하나) 앞 광장에 모였을 때, 새벽부터 낮 12시까지 서서 율법을 읽어주는 에스라 이야기가 나옵니다.
     백성들은 에스라가 읽어주는 하나님의 율법을 듣고 울면서 회개하며,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백성들의 회개기도가 느헤미야서 9장입니다. 에스라 9장에도 에스라가 회개 기도한 내용이 나오는데 회개한 후에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서명한 사람들의 이름들이 느헤미야서 10장에 나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서 11장에 참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은 황폐한 성읍이었습니다. BC 605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대부분 엘리트 그룹이었고,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은 농사나 지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완전히 무너졌고, 예루살렘 성전도 완전히 무너진 상황이었는데 그런 성에 누가 살겠습니까?
    느헤미야가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BC 444년, 예루살렘 성은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황폐한 성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 살려고 이사를 갔습니다. 그 남은 백성들은 제비를 뽑아서 10분의 1을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살게 했습니다. 나머지 10분의 9는 다른 성읍에서 살게 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 중에서 스스로 황폐한 예루살렘성읍에서 살겠다고 자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예루살렘성에서 살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12장에는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위해 섬기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 명단이 나오고, 느헤미야가 성벽을 봉헌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지막 13장은 12년 동안 예루살렘 총독으로 섬긴 느헤미야가 잠시 페르시아를 다녀온 후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페르시아에서 돌아온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제사를 위해 사용되어야 할 방을 대제사장이 암몬 사람 도비야에게 내준 사실을 알게 됩니다. 화가 난 느헤미야는 그 방에 있던 암몬사람 도비야의 살림살이를 바깥으로 다 내던져버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안식일인데도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와 물건을 사고 파는 일을 했는데, 레위사람들을 준비시키어 성문마다 지키게 함으로 백성들이 안식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또한 느헤미야는 이방여인들과 결혼함으로 생긴 여러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건 하나님 보시기에 영적인 간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서는 느헤미야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52일 만에 다시 쌓았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서를 통해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너의 삶에 무너진 성벽이 무엇이냐?
     너의 삶 가운데, 불에 타 없어진 성문은 무엇이냐?"
    나의 삶, 나의 인생을 에워싸고 보호하는 성벽들과 성문들 중에서 지금 무너진 벽과 성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자신의 연약함, 약점, 무너진 성품들을 살펴보고 다시 쌓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는 것이 느헤미야서입니다.
    나의 삶의 무너진 성벽들과 불타버린 성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 동안 사단에게 힘없이 내어준 영역들이 무엇인지 알아야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솔직하게 우리는  나의 무너진 성벽이 무엇인지, 불에 타버린 성문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이제 무너진 성벽과 붙에 탄 성문을 다시 쌓기 위해 한 손에 무기(하나님의 말씀)를 들어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 말씀 앞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한 손으로 최선을 다해 무너진 성벽과 성문을 다시 쌓아야 합니다. 나의 곁에 있는 나의 믿음의 형제자매의 손을 잡으라는 말입니다. 나처럼 무너진 성벽과 성문을 다시 쌓으려고 한 손에 무기(하나님의 말씀)를 들고 있는 믿음의 형제들도 나처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의 손이 필요한 것처럼 그들 또한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은 나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교회만 왔다 갔다 한다고 믿음이 자라는 게 아닙니다. 서로의 삶을 나누고 함께 기도해줄 믿음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게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우리 모두는 진정한 믿음의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에 한 손에 무기(하나님의 말씀)를 들고 무너진 성벽과 성문을 쌓고 있는 당신과 함께 해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당신의 진정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서의 중심 내용은 다시 정리하면 
    에스라는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회복이라면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과 하나님의 백성들 공동체 재건이라고 할 수 있다.
    (4) 에스라서에 나오는 페르시아 왕들
    1)고레스(Cyrus the Great, BC 559-530)
    외할아버지의 나라 메대를 이기고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던 고레스는  동쪽 국경을 인도까지 넓혔다. 고레스왕의 주요업적은 그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으로 귀환하여 예배할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조서를 내렸는데 이 조서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했습니다(스1:1-3). 이사야선지자가 대언한 고레스를 보고  얼마나 놀랐을까 생각한다.(사 44:24-45:7). 

    2)캄비세스 2세(Cambyses, BC 530-522)
    아버지 고레스로부터 왕권을 물려 받았지만 경쟁자로 여긴 나머지 동생 바르디야(그리스인들은 '스멜디스'라고 부름)를 몰래 죽였습니다. 다리오 왕이 세운 베히스툰 비문에 적힌 내용에 의하면 캄비세스 2세가 자기 동생 바르디야를 암살했지만 백성들이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아버지 고레스도 이루지 못했던 이집트 정복을 꿈꾸며 이집트를 공격하는 동안 페르시아에서 왕위 찬탈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페르시아로 돌아오던 중에 죽었다고 합니다. 캄비세스 2세가 페르시아를 통치하던 기간 내내 예루살렘 성전 건축은 중단되었다.

    3)다리오 1세(Darius, BC 522-486)
    다리오는 캄비세스 2세의 신하였습니다. 이집트 정복을 끝내고 페르시아로 돌아오던 중에 죽은 캄비세스 2세를 이어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습니다. 왕위 찬탈 사건의 장본인인 '가우마타'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다리오는 파르티아 총독 히스타스페스의 아들입니다.
    페르시아의 왕으로서 정통성을 갖기 위해 고레스의 딸 아토사를 왕비로 맞이했습니다. 페르시아 왕의 정통성을 얻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짓도록 허락한 고레스 왕이 내린 조서 내용을 그대로 시행했습니다. 에스라 6:6-12에 나오는 다리오의 조서를 통해 유대인들이 성전 건축을 끝냈습니다.

    4)아하수에로(Xerxes, Ahasuerus, BC 486-465)
     아버지 다리오 왕 때, 두 번에 걸쳐 그리스와 싸웠지만 전쟁에서 패한 것을 만회하려고 많은 군사를 훈련시켜 그리스를 공격하였으나 살라미스 전투(BC 480)에서 패했습니다.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아하수에로 왕은 낙담한 상태였고, 그때까지 공석이었던 왕비를 새롭게 간택하려고 했습니다. 그 동안 페르시아의 왕비를 간택할 때는 가장 유력한 일곱 가문의 딸들 중에서 간택해야 했는데 이 때, 일곱 가문의 딸들 중에서 뽑지 않고, 모든 페르시아 여인들 중에서 미인을 기준으로 왕비를 간택했습니다. 결국 에스더가 왕비가 되었고,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5)아닥사스다 1세(Artaxerxes, BC 465-425)
    아하수에로 왕의 아들입니다. 오른손이 왼손보다 길어서 '롱기마누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BC 460년에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페르시아와 세 번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가 이집트를 지원했습니다. 이집트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강 서편(시리아/ 당시 예루살렘은 시리아에 속해 있었음) 총독인 메가비주스를 보냈습니다. 
    메가비주스가 가서 반란을 진압했지만 이집트는 항상 위협적인 나라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이집트와 페르시아 사이에 완충지대가 필요했습니다. 이것을 위해 유다 지역에 총독을 파견했습니다. 총독만 보내기 뭐하니까 포로로 끌려온 유다 백성들도 함께 보냈습니다. 이것이BC 458년 이루어진 2차 포로귀환입니다.
    그런데 믿었던 (강 서편) 시리아 총독 메가비주스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배신을 당한 겁니다. 그때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이 황폐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고민 고민하다가 고향에 보내달라고 왕에게 간청했습니다.
    느헤미야도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었고, 아닥사스다 왕도 이집트를 견제하기 위하여 유다 지역을 완충지대로 만들려는 생각에 누군가를 보내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닥사스다 왕이 흔쾌히 느헤미야를 유다 총독으로 파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BC 444년에 이루어진 3차 포로귀환입니다. 느헤미야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포로귀환을 처음 실시한 고레스 왕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왕은  아닥사스다1세가 통치하던 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포로귀환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2차 포로귀환은 BC 458년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의 주도로 이루어졌고(스7:10-25), 3차 포로귀환은 BC 444년 총독 느헤미야의 주도로 이루어졌습니다(느1장)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왕 아닥사스다 1세의 신임을 얻어 술 맡는 관원이 되고, 왕의 치세 20년, 즉 B.C.445년 왕의 허락을 얻어 바빌론 포로 때 유대로부터 이주 되었던 사람들을 인솔하여 예루살렘에 귀환했다. 예루살렘의 총독(B.C 443~432)으로서 성벽을 재건하는데 진력, 사마리아 사람들과 또 그 밖의 사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52일로써 공사를 끝냈다(느6:15). 예루살렘에 12년 동안 머문 뒤, 한때 페르시아(바사)를 방문하고 433년(아닥사스다왕 32년)에 다시 예루살렘에 귀환(느13:6-7), 성전의 한 방을 차지하고 있는 도비야를 축출하고, 유대교의 정통 신앙 준수를 위해 분투했다. 이 동안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 느헤미야서이다. 그는 이스라엘 종교 사상 특수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으로 유대교의 건설에 가장 공헌한 사람 중 한 사람이다. 
    느헤미야는 주께서 위로해 주셨다’는 뜻이다. 
     
    본서는 전통적으로 느헤미야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근거로 유대의 여러 전승들이 본서를 느헤미야가 기록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또 본서 전반부, 특히 예루살렘 성벽 재건 기사에서 느헤미야가 1인칭 단수로 언급되어 저자의 생생한 경험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대개는 본서를 느헤미야 저작으로 본다. 그러나 70인역이 본서를 에스라 저작으로 보고 있고, 본서 후반부에 기록된 포로 귀환자 명단을 비롯한 여러 족보들, 에스라의 율법 낭독과 회개 운동, 초막절, 언약 갱신과 언약 갱신에 참여한 자들의 명단 등은 모두 에스라와 관련된 것으로 보아 본서 일부를 에스라 저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본서 저자인 느헤미야는 바사 왕 아닥사스다(B.C. 464-424년경) 시대의 인물이며 또 역사적으로 느헤미야는 B.C 445-425년경에 예루살렘 총독을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현직에 있을 때는 예루살렘 성곽 재건 등 외적 문제에 치중했던 이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안식일 준수 문제, 이방 여인과의 잡혼 문제, 중단된 레위인의 급여 문제 등 신앙적으로 왜곡된 부분들을 시정한다. 이렇게 볼 때 본서는 느헤미야가 총독에서 물러난 후 말년에 과거를 회상하며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대략 B.C.420년경).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느헤미야가 아주 고령에 죽었다고 전한다.
     
    (5) 느헤미야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느헤미야는 바벨론 포로였지만 바사 왕의 술관원장으로 성공한 인물이었지만 그가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복구하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착수한다. 주변 족속들의 방해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인내와 성실로 성벽 재건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본서 곳곳에는 이런 느헤미야의 면면들이 잔잔하게 깔려 있다. 일신상의 부귀영화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이를 위해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은 마치 하나님의 백성(동족)과 고난받기 위해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한 모세를 연상케 한다(히11:24-25). 또 어려움에 직면해서도 낙망하지 않고 유다 백성을 독려하며 인내했고, 또 성실함으로 초지일관했던 그의 모습은 총독으로서 정치 지도자라기보다 오히려 신실한 종교 지도자로서 면모를 보는 듯하다.

    (6) 느헤미야서의 배경과 무대
    느헤미야가 바사왕의 술관원장으로 있던 바사 제국의 수도 수산.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지내며 성곽을 재건했던 예루살렘. 3차 포로귀환의 행선지 등이 본서의 무대가 된다. 
     
    (7) 느헤미야의 개혁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나 그 사실을 알았다면 잘못 된 것을 바로 고쳐야 하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느헤미야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 성벽을 재건하고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백성의 삶에서 잘못된 다섯 가지 영역을 개혁했습니다.

    첫째, 느헤미야는 율법을 따라 암몬과 모압 자손을 백성 중에서 쫓아내면서  암몬과 모압 자손을 유다민족과 구별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에게 양식과 물로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저주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족속이 되었습니다(느13:1-3).
    둘째, 타라한 지도자의 처신을 개혁했습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암몬 사람 도비야와 혼인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성전의 거룩한 방을 내주었습니다. “그 방은 원래 소제물과 유향과 그릇과 또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또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에서 돌아온 후 신속하게 조치하여 도비야의 모든 세간을 밖으로 던져 버리고 하나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들여놓았습니다.
    셋째, 십일조 제도를 개혁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십일조의 원활한 징수를 위해 레위 사람들을 각 성읍에 주재시켰습니다(느10:37). 그런데 문제는 백성들이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느헤미야가 자리를 비운 불과 1년가량의 기간 동안 성전 제사의 절대적 필요성을 무시할 만큼 영적으로 침체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로 말미암아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했습니다(느13:10하).
    성전 봉헌식 이전에도 레위 사람들의 상당수는 여러 촌에 흩어져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습니다(느12:27). 그런데 백성들이 십일조를 성실히 내겠다고 다짐하자(느10:37-39) 그것을 믿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십일조 납부가 중단되자 호구지책으로 다시 자기 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성전의 공간 사용과 급료가 바르게 집행되도록 그리고 곡식과 기름과 포도주의 십일조를 잘 관리할 수 있는 충직한 사람들을 책임자로 세웠습니다(느13:10-14).
    넷째, 안식일을 바로 지키도록 개혁했습니다(느13:15-22).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음식물을 팔기로(느13:15)” 이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 계명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었다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그들은 성벽 재건 직후 언약을 갱신하면서 안식일 계명을 제대로 지키기로 결단한 바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때 자신들과 이방인을 분명히 구별케 해주는 안식일을 온전히 지킴으로써 종교적, 문화적 순수성 유지를 도모하려고 했습니다(느10:31). 그리고 안식일에 일하고 장사하는 것을 꾸짖고, 성문에 레위 사람들을 세워 지키며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게 했습니다(느13:15-22).
    다섯째, 잡혼을 금지시켰습니다(느13:23-31).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아내로 삼았습니다(느13:23). “아스돗”은 블레셋의 일파로서 유다 땅 서쪽에 위치했었으며(느4:7), “암몬과 모압”은 모두 유다 땅 동쪽에 위치했었습니다. 이들 모두 유다 땅과 인근지역이었던 까닭에 쉽사리 이스라엘 백성들의 통혼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 앞에 망령된 족속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그들의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느13:25)고 했습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호른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내가 쫓아내어 나를 떠나게 하였느니라”(느13:28)는 말씀은 일반인들이 이방인들과 혼인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제사장들도 이런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느헤미야는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부부를 사마리아로 쫓아냈습니다. 개혁은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제도를 바로 세우고 그 제도를 잘 지켜나갈 성실한 일꾼들을 세워야 합니다. 단호하고 신속한 개혁은 위대한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바른 신앙과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신속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3.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한 해가 BC 586 년이었다. 그때 예루살렘에 있었던 성전은 약탈을 당했고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 가는 눈 앞에서 성전은 불 태워졌다. 모든 가옥과 건물들이 다 불태워졌었고 아마 예루살렘 성벽도 그때 무너졌었다. 그런 바벨론 포로기간에 바벨론이 메대바사 제국에 의해 망한다. BC 539 년에 메대 바사 제국의 고레스왕이 칙령을 내려 포로로 잡혀온 유대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에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라는 조서를 내린다.
    고레스왕의 내린 칙령이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되었고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바벨론 포로 70년이 지나면 고국으로 돌아온다는 예언 대로 역사는 진행이 되어서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한 1차 포로귀환자들이 BC 536년에 성전 건축을 시작한다. 한때 중단이 되었지만 성전 건축을 BC 516년에 완공을 한후 메대바사 제국의 수산궁 안에서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가 에스더로 간택이 되어 하만의 전 유대인을 상대로 살인극을 부림절로 유대인 들을 지킨후 아닥사스다 왕 7년에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영적각성을 한 회개운동이 일어나고 백성들은 예루살렘의 스룹바벨의 성전을 중심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배경으로 아닥사스다 왕 20년때 바사제국의 수산궁에 왕의 술 맡은 관원인 느헤미야가 등장을 한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귀국한지 13년후에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소식을 듣는다. 바벨론 포로 2세인 느헤미야는 한번도 예루살렘에 가본 경험이 없는 바벨론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라 이제는 나라도 메대바사 제국으로 바뀌어 전혀 에루살렘에 대한 향수와 정서를 가질수 없었던 2세대 사람인 느헤미야는 하나니가 전해준 예루살렘 소식에 "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며 " 하고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관심의 고백을 하고 있다.
    느헤미야는 왕궁에서 왕의 최 측근이었다. 술 맡은 관원은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과 경호실의 고위관료 였었다.  세상적으로 부러울게 없었던 느헤미야는 자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와 바벨론에 살면서 유대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신앙교육을 잘 받고 자란 모습을 알 수 있다. 한 나라의 왕의 최 측근이 될 만큼 실력과 모든 것을 갗춘 느헤미야가 어떻게 한번도 가보질 않았던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고 수 일 동안 울고 금식기도를 하며 하나님앞에 기도로 나아갈 수 있었겠는가? 포로의 신분으로 하찮은 집안에서 바사제국을 다스리는 왕의 최측근이 된 것은 세상의 성공이고 집안의 자랑 이었던 느헤미야는 세상의 성공과 이땅에서 번성하는 목표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번성을 목표로 살아간 사람이다.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께 금식기도를 한 이유는 "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 지고 성문들은 불 탔다 하는지라 " 의 말을 듣고 반응한 것이다. 지금 예루살렘에는 1차,2차 포로귀환을 하여 5만명이 조금 넘는 유대인들이 돌아가 성전을 건축을 한 상태였다. 그러나 성벽이 다 무너져 외세의 침략이 잦아 예루살렘이 큰 환란을 당하고 능욕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느헤미야는 슬펐고 금식을 하는 상황에 까지 이르는 모습을 보인다.
    한 나라의 고위관료가 이미 망한 나라에 아무것도 없는 폐허인 상태인 예루살렘의 형편에 무슨 그런 관심을 가지고 이렇게 까지 반응을 하였는지 너무 궁금하다. ​그의 부모는 포로로 잡혀온 이후에도 아마 우리로 말하면 가정예배를 매일드리며 집에서 받은 신앙교육으로 이렇게 예루살렘을 향한 마음을 갖게 되었으리라 믿어 의심지 않는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범죄한 사실과 모세에게 명령한 계명과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것들을 회개 한다. 정말 포로 1세대도 아닌 2세대인 느헤미야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는지? 하나님께서 이 힘들고 어려운 시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남겨둔 남겨진 자들을 준비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가게 하시는 이 시대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준비된 자로 느헤미야를 부르셨다고 밖에 볼 수 없다.
    ​"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 지어다 " 의 말씀대로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나라를 꿈을 꾸며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사모하며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시대의 그루터기 같은 시대의 남은 자였다.

    이런 느헤미야 같은 믿음을 내가 가지고 더 회복 되어야 한다. 우리 가정이 이런 믿음을 가진 가정으로 우리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잘 지키도록 양육하여야 한다. 느헤미야가 가진 하나님 나라를 꿈을 구며 이 땅의 성공만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우리의 삶을 드리는 믿음의 가정이 되어야 하겠다. 이시간 우리들로 하여금 에스라와 느헤미야 말씀을 통하여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하면서 나도 모르게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보여준 신앙앞에 무릎을 꿇게 하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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