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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예수님의 산상수훈 설교말씀 2019. 6. 23. 20:55
예수님의 산상수훈 마5:1-12
성지순례를 간다면 갈릴리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팔복산 정상에 세워진 팔복교회를 보면서 2000년전 예수님이 이 곳에서 팔복의 산상보훈을 선포한 것을 생각하게 된다. 산상수훈으로 불리는 예수님의 설교는 마태복음 5-7장, 누가복음 6장에 기록되어 있다.오늘날 팔복산, 혹은 수훈산으로 믿어지는 장소는 갈릴리 호수 북서부 해안으로, 가버나움과 게네사렛 사이에 위치하며,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곳으로 전해지는 타브가에서 약 3km 거리이다. 4세기 경 비잔틴 제국에서 팔복을 설교한 장소를 기념하여 이곳에 교회를 세웠으나 614년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되었고 오늘날의 팔복교회는 1937년 프란치스코 수녀회가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아 팔복산 정상에 세운 것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건축가 안토니오 바를루치(Antonio Barluzzi)가 설계했다. 교회 내부는 여덟가지 복을 상징하는 팔각형 구조로 되어있으며, 여덟개의 유리창에 라틴어로 팔복의 내용이 하나씩 기록되어 있다. 설계자 안토니오 바를루치는 예수님이 주신 8복 말씀에 하나를 더하여 아홉 가지 복을 표현하려고 했다. 예수의 팔복 말씀은 ‘나로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할 때…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급이 큼이라.’로 끝을 맺는다. 이 말씀을 아홉번째 복으로 생각한 안토니오는 팔각형 모양의 건물 중앙에 커다랗고 둥근 지붕(돔)을 만들어 하늘을 향한 둥근 돔이 하늘에서 받을 상급을 뜻하는 아홉 번째 복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일간 금식하신 후 초기 사역으로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천국 복음을 전한 후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주심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확증하셨다. 그러다보니 소문을 듣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에서뿐만 아니라, 인접한 이방 지역에서도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 왔으며 예수님은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들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 치료하심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셨다.
외적으로 본다면 이 시기는 예수님이 최고로 성공하신 시기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러한 방식으로 사역하지 않으시고 마태복음 5장부터는 전혀 다른 방법을 취하셨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고 하였는데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무리를 피하셨다는 의미인데 왜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무리를 떠나 산으로 올라가셨는가? 그 이유는 예수님은 진실로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무리만을 가르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자주 산에 가셨던 산은 비록 높지만 어느 정도 평탄한 지역이며, 광야와 같이 황량한 곳이다. 예수님께서 외진 산으로 가셨다는 말은, 시끄러운 군중을 뒤로하고 고요한 정적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찾아 그분의 음성을 듣고자 하시는 것이며 또 산으로 가시는 것은 피상적이고 쉽게 열광적이 되는 무리들과는 다르게 진지하게 예수님을 찾는 자들을 위해 산으로 가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몰려온 군중을 잘 가르치셔서 그들을 모두 제자로 만드시면 좋지 않았을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요6:15 예수님께서 빵 다섯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명을 먹였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시려고 하던 것을 보면 군중은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온 것이 아니라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왔다는 것이다. 군중은 어찌하든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광야와 같은 산으로 가심으로써 정말로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 사람만 따라오도록 하여 예수님이 하신 사역 방식은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오늘날 대중 전도를 통해 많은 사람을 교회에 모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방법을 무시하고, 거룩한 교회를 시장바닥으로 만드는 일이다. 따라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갈만한 교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을 예수님께 와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대중을 심리적으로 이용해서 울고 웃기는 방식으로는 사람을 거듭남으로 인도할 수는 없다. 우리가 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인데 십자가를 가려면 그분의 말씀을 귀를 기울이고, 또한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단숨에 본성에 이끌리어 살기 쉽다.
이로써 우리는 산상수훈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것을 모른다면 산상수훈이 누구에게 적용되는지를 두고 많은 논란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이고, 제자들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가 그 가르침 대로 살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교훈하신 것이다. 특별히 마태복음에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말씀이 총 다섯 번 나옵니다.
첫째는 산상수훈(5장-7장)입니다.
둘째는 제자 파송의 교훈(10장)입니다.
셋째는 천국 비유(13장)입니다.
넷째는 용서의 교훈(18장)입니다.
다섯째는 종말론적 교훈(23장-25장)입니다.
오늘은 그 중에 5-7장은 흔히 ‘산상보훈’이라 부르는 주님의 첫 번째 가르침의 말씀입니다. 산상수훈, 혹은 산상보훈이라는 것은 산에서 가르치셨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입니다. 산인데 실제는 가버나움 근처의 언덕으로 갈릴리 호수 부근은 해수면 아래에 있는 낮은 지역입니다. 예수님은 이 호수 주변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청중들을 앉혀 놓고 설교를 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은 일반적으로 열두 제자를 부르신 이후 공생애 초기에 하신 설교로 봅니다. 산상수훈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인간 윤리의 최고봉과 같은 수사를 붙이지만 내용을 보면 천국 시민의 복, 천국 시민의 계명 실행, 기도, 구제, 물질생활, 분별력, 실천과 같은 주제들입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핵심은 결코 윤리적 내용이나 대인관계가 아닙니다. 신앙과 복음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으므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핵심주제입니다.1. 산상수훈은 팔복으로 시작합니다.
팔복이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들이 받는 복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로서 그리고 천국 백성이라면 당연히 누릴 가장 큰 복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팔복을 충만히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복이라고 하면 五福 아닙니까?
壽富康寧攸好德考終命(수 부 강령 유호덕 고종명)이 아닌가? 장수하고, 부자 되고, 평안하며 건강하고, 덕이 많아 자식을 많이 낳고, 명대로 살고 죽는 것을 복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제법 그럴싸하지만 오복은 하나님이 주신 복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오래 산다고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치매나 질병으로 오래 사는 것보다 짧게 살더라도 주안에서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야 합니다. 반드시 부자가 된다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돈으로 인하여 가정이 파탄 나 불행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식 많다고 행복합니까?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잘 죽는 것이 중요하지만 영생을 가지고 천국가는 것이 진짜 복입니다. 진짜 복은 죄인이 죄 용서받고 천국에서 주님과 영생하는 것이 진짜 복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복의 개념은 (시 1:1-2)“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주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또 (시128:1-4) “주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러 앉은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고 이 땅에서 복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되려면 예수님 잘 믿는 것이 복 받는 길입니다. 찬송가에도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고 부드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오복과 예수님께서 주신 팔복은 전혀 방향이 다릅니다. 오복은 육체 위주인데, 팔복은 영혼 위주입니다. 오복은 물질이 위주인데, 팔복은 영적 은사 위주입니다. 오복은 현세 위주인데, 팔복은 내세 위주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오복은 구원 없는 복인데, 팔복은 구원을 얻는 복입니다. 오복은 세상 사람들이 간혹 누리는 복인데, 팔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녀 된 사람들만이 누리는 특별한 복입니다. 오복 좋아하지 마시고, 팔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1) 팔복에 대한 해석
팔복은 산상수훈의 핵심이요 으뜸 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산상수훈을 해석하면서 윤리적으로 접근하려고 합니다. 윤리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도리요, 규범입니다. 즉 대인 관계를 맺는 규칙입니다. 산상수훈은 결코 대인관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로 신앙이 근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교훈의 핵심은 구원의 복음을 근거로 하는 말씀입니다. 팔복은 하나님 자녀가 아니면 누릴 수 없는 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 자녀가 된 사람들 만이 이 팔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팔복의 전반부 네 가지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란 도대체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이것은 구원을 갈망하는 영적 상태를 말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보여드릴 것이 없는 빈곤 상태를 말합니다. 빈 깡통 같은 내 자신으로 아래에서 자세히 말하고자 합니다.
애통하는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아니면 신체적인 건강 때문에 억울해서 우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통감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슬퍼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애통하는 자는 울다가 하나님을 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래적인 의미는 영적인 것입니다.
산위에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은 부정적인 면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예수님이 말한 정확한 의미는 애통하는 자들만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5).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본받을 예수님의 삶을 살펴보면 예수께서 웃었다는 기록이 나오진 않지만 우셨다는 기록은 나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는 웃고 즐기는 모습의 예수님이 아니라 오히려 슬퍼하고 우시는 모습을 남기고 있습니다. “애통한다”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데서 필연적으로 따라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하심을 대면하고, 내가 살아야 할 삶을 직시하면 우리는 자신의 처절한 무능과 절망을 경험하면서 필연적으로 애통하게 됩니다. 자신을 참으로 보게 되고 자신에게 절망하는 자가 바로 애통하는 자입니다.온유하다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덕목입니다. “온유함”이란 말(praei)은 온유함, 겸손함, 부드러움 등의 의미입니다. 대인관계에서 온유함이란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모습입니다. 신앙적 차원에서 온유함이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권위에 복종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줄 알고, 하나님의 처분만 바라는 순종의 자세가 온유하다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가 전혀 없음을 깨닫고 어떻게 의로와 질 수 있는지 갈망하는 모습입니다. 세상의 죄로 인해 고통받거나 부당하다고 느끼는 답답함을 말하는 것인데 이런 것은 영적인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믿는 사람들이다.
팔복의 후반부 네 가지복은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란,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 긍휼함을 받은 것에 감격하여서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란, 예수님을 믿고 속죄를 받아, 마음이 깨끗하게 된 사람입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이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으로, 타인을 그 화평으로 이끄는 사람입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이란,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로서, 주를 위해 죄와 싸우는 사람입니다. 진정 구원 받은 사람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과 받지 못한 사람들과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몇가지만 비교해도 금방 알 수 있다.
잠깐의 복과 영원한 복, 사라질 복과 지속되는 복, 육체적 감각적인 복과 영혼 내면의 복, 마약과 같은 마취성의 복과 끝없이 솟아나는 기쁨의 복, 이렇게 보면 팔복은 인간적인 윤리로 얻는 복이 아니라 복음에 기초한 구원 받은 사람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복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구원 받은 사람의 복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그러므로 진정 복 있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오복의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 받아 하나님 자녀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현세와 내세에서 하나님의 주신 복을 받습니다. 윤리의 실천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결하지 못한 채, 사람과의 관계를 잘 맺는다고 복이 되겠습니까?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진노와 저주를 받는 채로 잠시 이 세상에서 내가 잘 되겠다고 발버둥친다면 과연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팔복은 진정한 행복의 길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복을 원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해결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죄용서 받고 천국에서 영생하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의로움을 얻으려고 애통하려한다면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만이 진정한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심령이 가난한 자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첫 번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는 심령이 가난한자가 받는 복입니다. 첫 번째로 강조할 것은 심령(pneuvmati)은 다른말로 마음, 또는 영혼입니다. 심령이 가난할 때 복을 누리는 주체는 육체가 아니라 심령입니다. 현대인들은 심령은 약하고 육체는 강합니다. 요즘 살인, 강도, 강간같은 강력 범죄가 빈번합니다. 이런 범죄자들은 의지가 박약하고 심령이 약한 사람들에게서 발생합니다. 심령이 약한 자들은 겉보기에는 강한 것 같지만, 유혹에 약하고, 의지가 약합니다. 어느 집사님이 개 두 마리를 길렀는데 한 마리는 진돗개이고, 한 마리는 똥개라고 합니다. 그런데 똥개는 사람들이 집에 들어갈 때부터 숨이 넘어갈 듯이 짖어대는데 진돗개는 힐끗 쳐다보고 잠잠하다고 합니다. 겁이 많은 개일수록 짖는데 강한 놈은 짖지 않는다고 하는데 사람도 그렇습니다. 영혼이 강한 사람은 겉으로 요란을 떨지 않고 가진 것 자랑하지 않고, 힘 자랑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심령입니다.
(잠4:23)“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정말 복된 삶을 원하신다면 외적인 삶의 환경이나 조건을 따지지 말고, 우선 내적인 심령부터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 심령은 건강하십니까? 만약 내 심령이 건강치 못한다면, 어떤 것을 갖춘다 해도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심령이 가난한 자라는게 도대체 뭡니까? 어떤 사람들은 심령 가난을 겸손의 의미로, 무소유자, 겸허한 자 등등으로 생각하는데 심령 가난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심령 가난이란, 하나님 앞에 자신이 드릴 것이 없는 정말 빈깡통같은 신세임을 통렬히 깨닫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최고로 복받은 사람은 구원 받아서 천국에 들어가는 자라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은 반드시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의미할까요?(Ⅰ)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 있는 사람은 천국을 소유한 자인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난한 자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난과 빈곤은 경건과 구원의 보증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함은 마음의 가난함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의 심령이 가난하여야 하나님의 도움과 구원의 필요성을 의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의 피를 믿으라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인데 죄가 무엇일까요? 죄는 헬라어로 하말티아(ἁμαρτία)인데 목표와 표적을 맞추지 못한채 과녁을 빗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과 목표가있는데 모든 사람이 다 이 목적과 목표를 빗나가 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다 죄에서 용서를 받아야 천국에 이를 수 있다.(2)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
예수님이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바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즉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중심으로 살며 그 마음속에 이 세상의 지식이나 명예나 인기나 재물이나 권세를 최고의 가치로 두고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와 천국이 들어갈 공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르기를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7-9) 고백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그리스도 중심의 인생을 살기 위하여 빗나간 인생의 목표를 바꾸고 자기를 부인하고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마음속에 지금까지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왔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버렸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중심에 두고 살기 위하여 무엇을 비우고 버려야 할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세속적 가치를 내려놓거나 아니면 예수님 다음의 순위에 두고 살도록 합시다. 이 시간 내 마음속에 있는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자리에 두고 있는 것들을 다 버리는 믿음의 결단을 하도록 합시다. 그러므로 바울과 같이 예수님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살도록 합시다.(3) 날마다 천국을 사모하는 사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바로 천국이 있음을 믿고 그 천국을 날마다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함을 알지 못하며 다만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일시적인 부귀영화와 쾌락과 안일함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믿고 사모하는 자에게 주어지며 이 천국을 얻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도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천국은 천국을 침노하는 자가 빼았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르기를 (골3:1-3)“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너희는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온 세상에 불신앙의 풍조와 쾌락주의 그리고 죄악의 밤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대망하면서 살도록 합시다.
베드로서에도 (벧후3:10-12)“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천국의 가치가 최고의 가치며 천국을 소유하는 복이 최고의 복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의 자리에 미치지 못하는 함량미달의 죄인들이요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지나간 날들의 삶을 뒤돌아보며 하나님의 목표와 표준에서 벗어난 삶을 회개하도록 합시다. 예수께서 이르시기를 (계22:12)“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제 반드시 주님은 천군천사들과 함께 앞서간 믿음의 선배들과 함께 이 땅위에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모든 악과 죄를 심판하시고 만왕의 왕으로 다스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전파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천년왕국에 이르러 완성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의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아멘여러분!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내놓을 의로움이 없는 의의 빈곤자 입니다. 선행과 의로움보다 죄와 불의와 악행이 더 많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사랑의 극빈자입니다. 사랑하고 관용하기보다는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정죄에 빠져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지혜의 빈곤자입니다. 아는 것은 극히 작고 모르는 것은 지천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능력의 빈곤자입니다. 마귀유혹에 약하고, 죄에 약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영적 지식의 빈곤자입니다. 도대체 영적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심령이 가난함을 통렬하게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신앙에 대한 갈망을 나타냅니다. 의의 갈망, 사랑의 갈망, 생명의 갈망, 믿음의 갈망, 지혜의 갈망, 능력의 갈망, 영적 지식의 갈망. 도대체 이 갈망을 무엇으로 채운단 말인가? 갈망할수록 결국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갈망합니다.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진노를 알게 됩니다. 마침내 속죄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 자들은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심령 가난 자체가 천국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심령 가난으로 인해 구원을 갈망하기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기에 결국 심령 가난이 사람으로 하여금 천국시민으로 하나님 자녀가 되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4) 팔복은 천국으로 시작해서 천국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하였듯이 여덟 번째도 의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 받을 복은 천국을 소유하는 복입니다. 팔복은 천국으로 시작해서 천국으로 끝납니다.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을 복도 마지막 여덟 번째 복인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받는 복도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하였는데 좀 깊이 생각해보면 그 천국의 내용은 좀 다릅니다.
본래 천국이란 미래적 천국과 현세적 천국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미래적 천국이란 요한계시록에 잘 나타나듯이 죄가 없는 거룩한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천국을 말합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눈물이 없고, 슬픔이 없고, 죽음이 없는 곳입니다. 기쁨과 생명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이러한 미래형 천국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줍니다. 현재 형편이 어려워도 견디면서 죄와 싸우게 합니다. 본향에 대한 소망 때문에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강력한 소망이 현재를 강하게 만듭니다.
반면에 현세에서는 박해와 고난을 겪고 있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을 축복은 현세적입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풍성함과 풍족함입니다. 구체적으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영혼 속에 빈곤이 가득합니다. 사랑의 빈곤, 기쁨의 빈곤, 소망의 빈곤, 의로움의 빈곤, 선함의 빈곤, 평안의 빈곤, 생명력의 빈곤 이었지만 주님이 주시는 복을 받게 되면 상황은 전혀 바뀐 것은 없으나 심령은 분명히 달라져 있습니다. 전에 없던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생명력이 있고 삶의 의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있어서 삶이 안정되어 있습니다. 내 영혼에 천국의 선물들이 가득합니다. 이런 것들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얻은 심령 익 가난함에서 얻는 천국입니다.
바울은 심령이 가난함에서 얻었던 천국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은 후에 자신이 받은 천국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7-10)한 마디로 “뭔가 보배를 가진 사람이었기에 절대로 포위당하지 않는 사람, 절대로 낙심하지 않는 사람, 절대로 넘어지거나 거꾸러지지 않는 사람, 절대로 망하지 않는 사람, 생명이 넘치는 사람! 왜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울처럼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기에 정말 이 땅에서도 심령에 천국이 가득한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자주 사용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충만”입니다. 무엇이든지 차고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이 충만합니다. 지혜가 충만합니다. 능력이 충만합니다. 기쁨이 충만합니다. 위로가 충만합니다. 평강이 충만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는 이 땅에서 현세적 축복인 줄 믿습니다.또 심령이 가난한 욥이 받았던 축복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알 듯이 욥은 부요했지만 심령은 가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욥31:24) 만일 내가 금을 내 소망으로 삼았거나 정금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가 확실하게 믿는 바라 하였다면 자신은 저주를 받았겠지만 욥은 그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어서 금으로 소망을 삼지 않았고 정금을 의지하여 살려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이 모든 것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신 줄 알고 그 손에 있는 넉넉함을 가지고 가난한 자의 소원을 채워주고 과부에게 긍휼을 베풀었다고 한 그는 세상적으로는 부요하였지만 심령은 가난한 것을 알 수 있다.(5)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예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받아 가셨을 때 만난 한 여인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의 뒤로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가지고 온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었습니다 (눅 7:38).
이 여인은 자기가 지은 죄를 인하여 무척 괴로워하다가 주님을 만난 후 통회하고 상한 심정을 주님 앞에 내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시몬은 <심령이 부한 자>였습니다. 이 여인의 행위를 속으로 비판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 둘이 있어 하나는 500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50데나리온을 졌는데 둘 다 갚을 수 없음을 알고 둘 다 탕감하여 주였다. 시몬아 네 생각에는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바리새인 시몬은 대답하기를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하니 주님께서는 “네 판단이 옳다.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너는 내게 감람유(olive oil)를 붓지 아니했으나 저는 내게 향유를 부었느니라.
내가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하시면서 그 여인에게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눅 7:35-50)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여인처럼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됩시다. 천국은 이런 사람의 것입니다.또 주님께서는 기도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시면서, “인자가 올 때 세상에 믿음을 보겠느냐?”(눅18:8)고 하시면서, 자기를 의롭다 하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에게 경고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드셨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왔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 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자랑스럽게 뽐내면서 크게 남이 들으라고 기도하였답니다. 언뜻 보기에는 얼마나 믿음이 좋은 사람 같이 보입니까? 모든 계명을 지키고, 금식 생활을 정기적으로 하며 십일조를 빠뜨리지 아니하며 바치고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아니하였답니다.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드린다고 했습니다.
보통 사람은 넘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문제는 자신은 의롭고 세리나 죄인들을 멸시하는 태도는 덕이 부족한 듯 합니다. 그는 분명히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심령이 부요한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며 기도했습니다.
당시 세리(tax collector)는 로마 정부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자입니다. 정부에서 요구하는 세금뿐 아니라 몇 배나 더 받아내어 치부하던 자들입니다. 민중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자들이 세리입니다. 그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앞서 바리새인에 비하면 너무도 부끄러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에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기에는 세리의 기도가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의롭다고 하십니다. 무엇이 차이가 납니까? 세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기를 낮추는 자입니다. 겸손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높이고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것이 겸손입니다. 참된 겸손이란 내가 늘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자기를 낮추는 자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이 마귀의 유혹입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무리들은 대를 쌓아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교만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본래 이 바벨탑은 달신(Nanna) 모형을 한 보름달 모습을 대의 꼭대기에 놓는 계단식 신전탑(tiered temple tower)입니다. 오늘날 뉴에이지의 가르침도 나도 하나님이 된다는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을 배웁시다.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겸손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빌2:6-10)“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심령이 가난한 자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때문에 아무에게 관심을 받지 않으며, 인기도 없고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둘째 아들이 가난하게 되었을 때 남의 돼지 움막에서 살며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지만 주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고향생각을 하며 “나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하며 하늘을 쳐다보게 된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의지할 곳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위로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우리 인생은 태어날 때에 적신으로 태어났고 돌아갈 때도 적신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모든 것을 잠시 맡은 청지기일 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이제 정리를 하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마음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얼마나 죄 많은 인생인 줄을 아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악하고 추한 죄인을 조건 없이 받아 주시고 사랑해 주신 은혜에 너무도 감사하는 마음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고, 앞으로 살아갈 모든 날들도 역시 전적인 은혜로 살아감을 고백하고 바라보는 마음이다. 이러한 가난한 심령을 가진 자는 반드시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이 된다. 시42편에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해하는 사슴처럼 하나님께 대해 너무나도 목이 말라진다.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하나님 외에 그 어떤 만족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만나 심령이 가난해지면 감사의 사람이 된다. 주님을 만남으로 심령이 가난해지면 이제 작은 것에도 감사가 주어지므로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사후세계에서 새하늘과 새 땅에서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심령이 가난한 하나님 백성은 이 세상 사는 동안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와 사랑을 누리며 산다. 우리가 죽은 이후에만 천국의 기쁨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천국을 경험하며 산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은혜의 왕국의 축복에 대한 시편 기자들의 고백을 보라. 심령이 가난한 자를 우리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신다. 주를 찾을 때, 주님이 그를 생각하시고 도우시고 환난에서 건져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풍성한 영광의 임재가 함께 하기에 그 심령에 특별한 천국을 맛보는 기쁨이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다시 산 존재가 되었으므로 이제 우리들은 심령이 가난한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영광의 왕국에 들어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날마다 더 하나님을 갈망하고 찾음으로, 우리 심령에 천국의 기쁨, 감사, 영광, 위로, 헌신,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끝으로 천국에 대해 몇 마디 더 언급하겠습니다. 천국의 가장 중요한 뜻은 이미 언급한 바처럼 천국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다스림입니다.
-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한 것입니다.
- 주님이 우리 가정을 다스리시면 가정이 천국이 됩니다.
- 주님이 우리 교회를 다스리시면 교회가 천국이 됩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다스리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면,
- 실패의 곳이라도 천국이 됩니다.
-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천국이 됩니다.
- 고통과 시련의 장소가 천국이 됩니다.
- 가난과 초막에 살아도 주님의 통치를 받으면 그곳이 천국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자백하면서 주님 앞에 “주여, 이 죄인을 긍휼히 여기소서” 기도하며 날마다 주님 앞에 회개하여 청결한 마음을 가집시다.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천국을 소유하는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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