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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마지막 시대 그리스도인의 모습말씀 2019. 6. 3. 01:07
마지막 시대 왈덴스인이 되자 잠14:32 계17:1-18
다뉴브의 비극
29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침몰한 유람선의 한국인 탑승객 33명 중 7명만이 구조되었다고 한다. 사망한 사람들은 가족단위 또는 친구들로 모처럼 여행을 갔다가 객지에서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한해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이 3000만명이나 된다고 하니 이런 사고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부다페스트는 동유럽 헝가리의 수도로 서울의 한강처럼 도시 중앙에 길이 2,858㎞,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다뉴브강이 있다. 이 강에서 유람선을 타면서 보는 야경은 파리, 프라하와 함께 '유럽 3대 야경'으로 꼽힐 정도로 유명하다고 한다.
강 주변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국회의사당, 고딕 양식의 화려한 외관이 돋보이는 어부의 요새와 성 이스트반 대성당, 그리고 국립미술관, 황금빛 불을 밝힌 왕궁 등을 감상하는 유람선 투어는 부다페스트 관광에서도 최고 인기 코스다.
출발지는 국회의사당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머그리트 다리 인근에서 출발한 유람선은 주요 명소들을 거쳐서 엘리자베스 다리까지 갔다가 국회의사당인근 머르기트(Margit) 다리까지 돌아오는 1시간 정도 걸리는 코스이다. 부다페스트에서 관광 가이드로 15년 활동했다는 석태상씨는 당시 다뉴브강 선착장에서 유람선 야간 투어를 하려고 손님들을 기다리던 차에 유람선 침몰 사고를 바로 눈앞에서 목격했다. “50m 정도 눈앞에 해당 유람선이 선착장으로 들어오고 있는 중에 순간 대형 크루즈선 뒷머리가 유람선을 치고 지나갔다”며 “이 충격에 유람선이 쓰러지는 것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50m만 오면 배에서 내릴 수 있는 선착장인데 '바이킹 시긴'에 추돌한 허블레아니는 불과 7초 만에 침몰했다. 크루즈를 운행하는 선장은 64세인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오랜 운항 경험을 갖고 있다고 경찰은 전했다. 50M만 가면 선착창인데 몇 분 앞두고 일어난 사고였기에 안타까움이 더 크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가 이번만 일어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안전한 곳이란 없습니다. 강에서만 사고가 납니까? 공중에서도 바다에서도 땅속에서도 심지어 집에 있어도 예기치 못한 사고는 언제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의 삶이 항상 불안한 상태를 대비해서 보험도 들고 종교도 갖게 됩니다. 종교를 가져도 신을 믿어도 사고는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믿는 사람들의 죽음에는 특별한 위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14:32)
사람이 악인이냐 의인이냐를 가장 확실히 분간할 수 있는 시점이 바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처신하는 행동을 보면 알게 됩니다. 악인이 사형선고를 받게 되면 대부분 기왕에 죽을 몸 혼자 죽기 아깝다하면서 죽음에 같이갈 길동무를 많이 만들기 위해 악을 더 많이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죽는 순간에도 소망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면서 상대방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2000년의 역사가운데 예수님을 믿다가 목숨을 잃은 순교자가 대략 5000만명이라고 합니다. 성경대로 예수님을 믿었는데 성경대로 믿지 않은 가짜 교회에 의해 그렇게 순교자가 많다는 것은 모순적이면서도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오늘은 그들 중 아주 일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최초로 순교한 사람은 예루살렘 교회의 스데반 집사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기전 그가 외친 말씀이 성경에 나옵니다. (행7:56 이르되, 보라 하늘들이 열리고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내가 보노라, 하매.) 그는 죽음 앞에서도 성령이 충만하여 똑바로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면서 이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앞에서도 소망있는 사람만이 외칠 수 있는 말입니다.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워졌던 사람들은 안디옥교회의 사람들이었다. "..안디옥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더라"(행11:26). 이것은 주후 43년 경에 일어난 일로서 이교도들과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하여 붙인 이름이 그리스도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신약 교회는 국가의 간섭과 이교의 영향 속에서 세력을 확대해 나가면서 복음을 전파했는데 이러한 신약교회들은 로마 카톨릭과는 처음부터 번지수가 달랐다. 중세교회시대 루터, 즈빙글리, 칼빈 등, 많은 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때에도 신약교회 그리스도인들인 재침례성도들은 이미 성경대로 살아가면서 박해받는 사람들이었었다. 종교개혁자들이 국가 세력을 등에 업고 개혁을 시도했는데 이 개혁은 완전한 개혁이 아닌 로마 카톨릭의 의식인 성탄절과 부활절의 전통을 그대로 수용한데 반하여 재침례성도들은 철저히 로마 카톨릭의 전통을 거부했으며 국가와 교회의 분리도 강력히 주장했다. 왜곡된 교회사 속에 재침례교회 성도들의 평가가 나쁘게 나 있다는 것은 사실이나 이 반석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신앙의 반석위에 세워진 교회는 바로 이 무리들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재침례성도들은 시대를 따라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며 핍박 속에 사라져 갔으나 성경을 원칙으로 삼은 이들의 신앙은 오늘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신앙이라고 확신한다. 물론 그들 모두가 완벽하게 성경과 일치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는 다소 지나치게 나갔으며 또 어떤 이는 재침례성도들의 거룩한 모임에 먹칠을 할 정도로 형편없는 모습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신실한 재침례성도들은 확실히 달랐다. 그들은 완전히 세상과 구별된 교회(ekklesia)로서 성경대로 주님의 구원하심을 확신하면서 복음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에 힘썼던 것이다. 그들이 시대를 따라 가졌던 이름부터 알아보자.
[몬타니스트(Montanist)]
[노바티안스(Novatians)]
[도나티스트(Donatist)]
[알비겐시스(Albigenses)]
[왈덴시스(Waldo or Waldenses)]
[모라비안스(Moravians)]
[아나밥티스트(Anaboptist)]
1. 신약교회 등장
기독교를 천주교에도 개신교에도 붙이는 사람이 많습니다. 천주교를 기독교 또는 그리스도교라고 불러도 괜찮은지 다음의 글을 읽어보면 알게 됩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 하여 그리스도인 이라고 부르지요. 처음에는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 비하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인데 듣고보면 잘 붙여진 이름입니다. 천주교는 바벨론 종교에다 기독교를 합쳐서 만들어진 종교이므로 카톨릭스스로는 자기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는 부르지 않고 신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 즉 종교개혁에 의해 천주교에서 나온 개신교는 천주교에서 기독교 부분만 가지고 나왔다고 하지만 요즘은 개신교나 천주교나 별반 다른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초대 기독교부터 시작하여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되기 까자 약250년동안이나 로마황제들에 의해 핍박을 받으며 견뎌왔는데 그 시대에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을까요?
(1) 몬타니스트(Montanist)
1) 기원
몬타너스(Montanus)는 본래 시벨리에 있는 이교사원의 사제였다. 몬타니스트는 몬타너스(Montanus)의 이름 뒤에 부쳐진 이름인데 몬타나스는 150년경 기독교로 개종하여 주교의 지위까지 오르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다. 그는 예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가 자기에게 오셔서 성령께서 자기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라고 하면서 성령께서는 자기를 황홀한 지경에 사로잡히게 한 다음에 말씀을 주시는데, 그 때의 자기 말은 개인의 말이 아니라 보혜사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이런 몬타너스들은 아시아를 거쳐 북아프리카에서 로마까지 전개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수 차례 핍박을 받았어도 그들의 전도활동은 몇 백년에 걸쳐서 전개되었다. 브루기아 지방의 주교들도 172년경에 회의를 열어 저들을 유죄로 판결하고 교회에서 금지키로 하여 몬타너스는 독립교회를 형성하고 그 후계자인 데오토투스는 보다 철저하게 조직을 강화하였다.
2) 주 장
①성도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 얻는 것은 아니다.
②경건한 생활을 위해서는 교회가 세운 제도나 규칙에 익숙하기 보다 육체의 정욕을 극복하기 위해 금식하고 결혼은 일생에 한 번으로 족하다.
③성령을 받은 사람은 다 똑같은 제사장이므로 성령의 활동을 일정한 형식 안에서 제한해서는 안된다.
3) 영 향
이들의 운동은 교회가 무미건조한 의식주의로 흘러가는 데 반항하여 엄격하고 청순한 신앙운동을 회복하려던 청교도적 개혁운동이었다. 때문에 터툴리안교부도 말년에 이 운동에 가담하였다고 비난을 받았다. 2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소아시아는 물론 동, 서방까지 영향이 확대된 채 6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몬타너스의 주장 중의 하나가 기성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는데 그것 때문에 정치적 박해까지 받았다. 하지만 그들이 성령에 사로잡힌 능력을 구하였던 점들은 긍정적인 것이다.
(2) 노바티안스(Novatians)
1) 기 원
노바티아누스(Nopvatianus)는 소아시아 브루기아 출생으로 철학자였는데 개종 후 로마교회의 집사로 후에는 로마교회의 장로가 되어 주교를 보좌하는 일을 할 정도로 신망을 얻었다. 로마교회의 감독인 파피아누스가 데키우스 황제(150-251)때 심한 박해를 받아 순교당했다(AD250).
그러자 로마교회의 주교를 바라고 있던 코넬리우스(Conelius)는 황제의 박해 때 변절했던 자들의 도움을 얻어 로마 주교에 취임하였다. 이로 인해 교회의 변절자들이 다시 교회에 들어오느냐의 문제를 놓고 심각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코넬리우스는 관용론의 입장이었고 노바티아누스는 책벌론자의 입장이었다. 이들 노바티안스는 몬타너스 운동과 합세하여 7세기까지 존재하다가 사라졌다.
2) 주장
AD250년경에 발생한 노바티안스은 거짓에 더럽혀지지 않은 청결한 삶의 의미인 카타리(Cathari)로 불려 졌다. 그들 역시 카톨릭으로부터 나온 세례명을 모두 없애고 다시 침례를 받아 재침례 그리스도인으로 불려졌다. 오챠드는 말하기를 "이 노바티안스 교회들은 청교도의 진리와 거룩함을 본받아 충실한 성도의 관계와 도덕적으로 성숙된 모임이었으며 타락한 정부 밑에서 60년 동안 사역할 수 있었으며 로마, 카르타고 등지에서 속속히 뿌리내린 그들의 반대파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무리이며 그런 상황에서 노바티안 교회는 아주 담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카톨릭에서부터 나온 세례명을 부정하고 다시 침례를 받도록 하였기에 카톨릭 교회의 잠자고 있던 화를 치밀게 하여 많은 피해를 받았다. 413년경 침례를 다시 받았거나 다시 재침례를 주는 사람은 사형에 처하도록 법률을 규정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알바누스(Albanus)이었던 선교사도 재침례를 한다는 이유로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종교적 학살로 통해 많은 도시가 파괴되고 피난을 파드몽트로 가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월덴시스(Waldenses)라는 곳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3) 노바티안스의 교리
① 교회회의가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져서는 안된다.
② 지은 죄가 랩시(속전)에 의해 도움이 된다면 물질로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우상숭배와 같다. 노바티안스는 교회는 신앙의 정절을 대단히 중요시 했으므로 끝내 독자적인 신앙노선을 펼쳐나갔다
(3) 도나티스트(Donatist) 4-5세기
1) 기원
도나티스트 교인들과 노바티안 교회는 신앙적인 면과 규율적인 면에서 거의 동일하였는데 도나티스트 성도들은 4세기 로마카톨릭교회가 국가로부터 세력을 얻어 커지고 영적인 상태가 세속화되는 것을 거부하는 한 크리스챤의 무리가 나타났는데 바로 "도나티스트"라고 불리는 일단의 그리스도인 그룹이었다. 이들은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박해가 끝나갈 무렵, 북아프리카 칼타고 교회 주교로 도나투스(Donatus)와 황제 콘스탄틴의 지지를 받았던 카에킬리아누스 감독이 주교로 선출되었는데 이를 거부하는 도나티스트가 황제가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항하고 콘스탄틴 황제가 비 신앙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강제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에도 반대하였는데 도나티스트들은 국가의 힘으로 교인을 강제로 확보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이라기 보다는 사단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였고 종교가 국가 세력에 의해 강화되는 것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국가가 명령하니 자신들 앞에 올 생명의 위협과 핍박을 피하려고 나온 그리스도인들을 가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은 적은 수의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가짜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핍박을 받으면서 그들을 광야 교회로 내 몰았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와 종교의 통합을 반대하던 도나티스트들이 걸은 길을 따라갔다. 이들 4세기 경에 생긴 도나티스트들은 암흑시대 동안 참 신앙을 고수하기 위하여 광야로 쫓겨 다니며 신앙 생활을 하였던 왈데스인들의 선구자가 되었다.
2) 주 장
도나티스트들은 국가와 교회는 서로 분리되어야 한다(마22:21, 롬13:7, 고후6:15-16)는 주장을 하다가 375, 377년 그라티아누스 황제 때 도나티스트 파가 사용하는 교회와 선전물이 몰수되었다.
이들은 엄격한 신앙훈련에 의한 교회생활을 통해 회중정치의 교회, 유아세례 반대, 선교하는 교회 등을 강조하였다.
자기들만이 참된 교회라는 영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혀 살다가 반대세력들을 옹호하는 국가조직에 대항하다가 결국 국가세력으로부터도 많은 핍박을 받게 되었다.
크리스핀(Crispin)이라는 프랑스 역사학자는 도나티스트 교인들과 노바티안 교회는 둘이 뭉쳐있는 단합적인 존재라고 표현하고 있다. 도나티스트 교인들과 노바티안 교회는 거의 동일한 교회로 다시 침례하는 교인들 즉 재침례파 그리스도인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오시엔더(Osiander)가 말하기를 재침례 그리스도인은 도나티스트 교회의 오래 전 모습의 원형이라고 했다. 로빈슨(Robinson)은 그들에 대해서 말하기를 삼위일체를 중요시한 재침례 그리스도파였다고 말한다.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 교회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나티스트 교인은 모두 침례를 다시 받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단적이다.
오차드는 서로마의 황제 호노리우스와 동로마의 황제 데오도시어스가 저지른 도나티스트에 대한 학살 만행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두 황제는 명령을 내려서 침례를 받았던 사람이 다시 받거나 다시 침례를 주는 사람은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5세기경 도나티스트 교회는 카톨릭 교회와 심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단지 이방인들을 받아들인 것만이 아닌 거짓 교리로부터 출발된 유아세례에서도 서로 맞물린 견해를 가지고 대립한 위치에 있었다.
AD 415년에는 어거스틴이 92명의 사제들을 회의로 불러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하였다. "우리가 선언하기를 새로 태어난 아기는 영생을 얻을 권리가 있으며 어머니의 태로부터 태어난 어린이들은 죄를 안고 더럽게 태어나기 때문에 그 원죄를 없애기 위해서 모든 아이들은 세례를 받도록 규정한다." 카데그에서 같은 때 다시 열린 회의에서 또 다른 선언을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우리는 유아세례를 받은 어린이는 자유로우며 영원한 생명을 얻었음을 확인한다." 이러한 왕권을 통한 선언으로 인하여 도나티스트 교회들은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으며 많은 인적 피해와 죽음을 맞아야 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스페인과 이탈리아로 이민하여 피신했고 어떤 사람은 아프리카에 머물러 있으면서 변질되어있는 이단무리들에 맞서 오직 하나의 진리를 갖고 끝까지 투쟁하기도 하였다.
(4) 알비겐시스(Albigenses)
1) 기 원
12세기 중엽 프랑스 남부 알비 근처의 롬베르에서 교회 회의가 개최된 이후, 알비파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알비파 사람들은 로마 카톨릭에서 만든 신앙고백대로 순종하지 않고 그들의 양심에 따라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고 함으로써 로마 카톨릭에서 경멸하는 뜻으로 알비파의 무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로마 카톨릭은 이들을 마니교도와 같다고 정죄하였다.
이들 중에 뛰어난 지도자는 '피에르 드 브루에이스(Pierre de Brueys)'였다. 그는 이름뿐인 신자들에게 습관화된 교회의식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읽어주고 상세하게 설명해 줌으로 영적 각성을 하게 하는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들 지도자 앙리(Henri)였는데 당시 그의 세력을 꺾기 위해 유럽에서 가장 탁월하다고 소문났으나 마침내 로마 카톨릭은 앙리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체포하려고 하였다. 결국 배신한 성직자에 의해 로마 카톨릭에 넘겨진 앙리는 옥사했거나 사형 당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의 영향으로 프로방스와 남부 프랑스는 교황의 요구와 주장을 거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드디어 교황 이노센트 3세는 1209년 십자군 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무사들이 프로방스와 남부 프랑스 지역에 들어가 20년 동안 황폐화 시키는 작업을 하였다.
라 미네르브라는 곳에서 로마 카톨릭의 군 지도자 시몬 드 몽포르는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140명의 신자들에게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을 하든지 장작더미 위로 올라가라는 택일을 명하였다. 그 때 알비겐시스들은 "우리의 최고 권위는 교황이나 사제에게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뿐이다"라고 하면서 모두가 장작더미 위로 올라가 불 속에서 죽어갔다. 1165년 롬베르스 회의와 1184년 베로나 회의에서 그들을 정식으로 이단이라고 결정하였다. 1209년 베지에에서 이들에 대한 대학살이 있었으며 1213년 그레고리 9세는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여 알비파를 조직적으로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1215년부터 교황 이노센트의 명령에 의해 진멸이 시작되어 14세기 말에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2) 주 장
① 로마 카톨릭이 말하는 성사(사제가 거룩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주장)를 믿지 않고 연옥의 교리를 믿지 않았다.
②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죽음을 기념하는 상징일 뿐이다.
③ 기도나 선행이 죽은 자를 더 좋게 할 수는 없다.
3) 영 향
이들의 영향으로 로마 카톨릭은 뚜울루즈회의(1229)에서 모든 성경을 평신도들에게 금하고 성경의 어떤 부분도 자국의 언어로 번역되어질 수 없으며 오직 라틴어로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영구적 교령이 선포되었다.
2. 로마카톨릭의 등장
예수님의 부활 후 온전히 회개하고 다시 거듭난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큰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 사명을 잘 감당해내었다. 1세기에는 예수께서 직접 세우신 사도들이 이러한 교회들을 다스렸고, 그 후에는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도 교부들이 일어나서 진리를 지켰다. 그런데 2세기에 들어서면서 로마제국의 황제숭배가 강요되면서 신약교회는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 제국의 다신교와 이교의 사상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당하기 시작하였다. 로마제국의 끔찍한 핍박은 250년 이상이나 계속되었지만 교회는 그래도 신앙의 순결을 유지하며 순교자들의 피를 씨앗으로 하여 로마제국 전역으로 세차게 번져 나갔다. 그 중심에는 몬타니스트, 노바티안스, 도나티스트 같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기게 되었고, 그리스도교의 큰 성장이 뒤따르게 되었다. 사도시대 이래 처음 몇 세기 동안에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지역에 따라 이름만 다르게 불렀지 지금 같은 여러 교파가 없었다. 놀라은 것은 순교자의 피가 흘려진 곳마다 새로운 신자들이 생겨나고 가혹한 핍박하에서도 기독교인들의 숫자는 크게 증가되자, 정치적으로 불안감을 느낀 로마 황제는 정책을 바꾸어 종교 자유를 허락하는 관용 정책을 통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313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는 종교 자유를 허락하는 밀란의 칙령을 내리게 되었고 자신도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의 신학자 뵈트너 박사의 증언은 4세기 그리스도교의 진상에 대한 적절한 요약이 될 수 있다.
4세기 초, 서방을 다스리던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교에 호의를 베풀기 시작하고...324년,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종교로 만들었다. 콘스탄틴 황제의 이름뿐인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을 불러일으켰으나, 사실 이것은 세상이 의(義)의 형식의 가면을 쓰고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교도인들과 그리스도교들의 통합을 통해 로마 국가의 번영과 통일을 꾀하려는 황제의 정책의 일환일 뿐이었던 것이다.
하루아침에 기독교가 국가종교로 선포되고 나니 어제까지 이교를 믿었던 신자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얻기 위해 수많은 이교도들이 교회로 들어왔다. 화려한 이교 의식에 익숙한 이교도들에게 단순한 그리스도교 예배는 만족을 주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이교적인 신조와 종교 행사들을 끌어들였다. 사람들은 점점 성경의 진리를 소홀히 여기게 되었고, 진리에 대한 신자들의 무지로 인하여 교회는 점차적으로 그리스도교의 교회라기보다는 오히려 이교의 교회라고 불러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교의 행습을 본받아 교회 안에는 화려한 복장을 차려입고 제사를 드리는 사제와 화려한 의식, 돌과 나무로 새긴 각종 성상들, 성수, 분향, 수사들과 수녀들, 연옥의 교리, 구원은 은혜보다는 행함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이교적 신앙이 일반 신자들과 성직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갔다. 이러한 이교와 그리스도교회 사이의 타협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보다도 자기를 더 높이리라고 예언된 불법의 비밀의 발전을 초래하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로마 교황권의 확립을 초래할 큰 배도를 예언하였다. 그는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살후 2:3, 4)고 말하였다.
(1) 종교 암흑시대의 도래
1) 교황권의 확립
6세기에 교황권은 확고하게 확립되었다. 그의 권좌는 로마에 위치하게 되었고, 로마의 감독은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된다고 공포되었다. 이 교회는 그 세력과 지위를 교황에게 넘겨 주었고, 로마교회가 온 제국과 세계의 권세를 잡게 되었다. 이리하여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서 예언한 1260년간의 종교 암흑시대와 교황권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로마교의 권세가 더해 갈 적마다 영적인 암흑은 더욱 짙어졌다. 믿음과 진리는 진정한 기초이신 그리스도께로부터 로마 교황에게로 옮겨 갔다. 사람들은 죄의 사유와 영원한 구원을 하나님의 아들에게 의뢰하는 대신에 교황과 교황에게서 권세를 받은 신부나 주교에게 구하게 되었다. 교황은 세상에 있는 그들의 중보자이며, 그를 통하여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또 교황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위치에 서 있으므로 그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사람들은 배웠다.
(2) 교회에 들어 온 오류와 미신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진리와 믿음을 버리고 로마교의 의식과 예배를 받아들이든지, 지하 감옥에 갇히거나 고문대와 화형(火刑)과 참형 집행자의 칼에 생명을 빼앗기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박해는 전에 없이 한층 더 격렬하게 신실한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임하였으므로 세상은 하나의 큰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그 후 수백 년간 그리스도교회는 인가가 없는 궁벽한 곳 (매우 후미지고 으슥하다)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선지자는 이 일에 대하여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1260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계12:6)고 예언하였듯이 로마카톨릭이 종교개혁하기까지 1260년 동안이나 복음은 잊혀졌고 사람들은 여러 가지 가혹한 요구 때문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그들은 교황을 그들의 중보자로 우러러보고, 죄를 속하기 위하여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하지만 이 고난의 기간중에도 신약교회를 유지해왔던 그리스도인들의 무리는 수많은 피를 흘리면서도 믿음과 성경을 지켜왔었던 것도 사실이다.
3. 왈덴스인들의 출현
하나님의 눈에 사랑스럽던 광야의 교회, 하나님의 참 교회였던 신약교회그리스도인들은 교황권의 거짓 교리와 오류와 미신의 가르침들을 저항하고 참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안락한 집과 생계수단과 안일한 삶을 버리고 험한 산골짜기로 피신하여 살던 사람들을 왈덴스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 왈덴스인들 등장
왈덴스라고 불리어지는 사람들은 특정한 인물 피터 왈도(Waldo)라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기독교 운동 단체이다. 왈도는 원래 프랑스 리옹 지방의 매우 부유하고 학식있는 젊은 상인 이었습니다. 어느날 삶을 바꾸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왈도의 친구가 갑자기 죽자 그는 삶의 무상함과 세상 재물의 헛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왈도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그의 부를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순회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휴대하고 다녔으며 상인이나 무역상으로 종사하면서 그들이 가는 곳에 성경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일정한 주거지가 없이 맨발로 구걸과 동냥으로 생활하면서 설교를 하고 돌아다녔다. 그의 가르침의 핵심은 금은보화를 절대로 소유하지 말며,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의 삶과 가르침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곧 많은 추종자들이 생겨났다. AD 1170년 피터 왈도는 많은 사람들을 모으게 되었으며 그들은 ‘가난한 리옹인’ 또는 왈덴스인이라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왈도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그 나라의 말로 자유롭게 설교하였습니다. 왈도의 신앙은 이단으로 정죄받게 되었습니다. 1218년 피터 왈도가 죽고 나서도 로마 교회는 왈덴스인들을 무섭게 핍박하였습니다. 왈도파의 주장은 부패하고 타락한 성직자가 행한 성사는 무효이며, 남녀 불문하고 사도적인 삶을 살면서 공덕을 쌓은 의로운 자만이 설교권과 성사를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교회의 성직 위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또한 성인 숭배를 거부하고,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면죄부의 효용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또한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사소한 거짓말을 하는 것도 죄악시하였고, 맹세를 하지 않고 재판제도를 인정하지 않았다. 제3차 라테란 회의에서 모든 성직자들이 청빈하게 살겠다는 서약이 공식적으로 왈도에 의해 요청되었으나 교황은 이를 냉정히 거절(1179)하고 왈도가 설교하는 것을 금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리용의 대주교 '쟝'의 선동과 교황 루키우스 3세의 명령으로 왈도파는 리용에서 추방당하게 되었다. 이들은 밀라노로 이동하여 수백의 무리를 이뤘다(1209). 이 운동은 이태리 북부, 북서부, 프랑스의 스트라스버그와 바이에른,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마인츠 주변까지 확산되었다(1231). 여기에는 주로 농민계급과 중산계급의 평신도들이 위주가 되었고 약간의 수도사들, 소수의 사제들, 지성인들이 합세하였다.
(2) 왈도파와 종교재판관의 등장
시대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했고 사단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복음을 대적했습니다. 왈도파가 복음을 전하던 당시 로마카톨릭은 역사상 최초로 왈도파 때문에 종교재판관을 임명하였다.
로마카톨릭이 보다 손쉽게 왈도파 그리스도인을 잡고자 교황 이노센트 3세가 종교재판관을 임명하기 시작하자 왈도파 사람들은 어느때보다 더 극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자신이 손수 모든 사람의 신앙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어떤 수도사들을 종교재판관으로 임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단의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찾아 유죄 선고를 내리도록 했다. 그들은 모든 나라에 파견되었으며, 그 세력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그들에 의해 정죄되어 투옥된 사람들은 무고히 고문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해야 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로마카톨릭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성경을 따르는 독자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과 연관만 있다고 밝혀져도 그는 재산과 생명을 빼앗겨야 했다. 종교재판을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은 무고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죄를 인정할 리 없었지만, 그럴 경우 더욱 가혹한 고문이 가해졌다. 고문기구와 그 방법들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밧줄로 묶어 도르래를 이용해 공중에 매달았다가 갑자기 바닥에 내동댕이쳐 신체를 상하게 하는가 하면, 사람 몸통 크기의 철제도구 안쪽에 쇠꼬챙이가 돋아 있는 이른바 ‘블랙 버진’에 가두기도 했다. 송곳을 박은 큰 롤러에 묶은 채 돌리기도 하고, 손발톱을 뽑거나 고문기구로 손마디나 발가락을 뭉개기도 했다. 귀나 입에 끓는 납을 붓기도 하고, 살점이 튀도록 채찍질을 하고, 눈을 빼는 일도 있었다. 못이 박힌 철제의자에 앉힌 뒤 밑에서 불을 때기도 하고, 가시 박힌 신발을 신게 하거나, 불에 달군 쇠막대로 지지는 등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잔혹한 방법들을 동원해 고문을 가했다.
심문관들은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을 위해 행하는 것이므로 만약 죄가 없다면 하나님이 구해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굳이 자백을 하지 않아도 마녀의 증거를 들이대며 악랄하게 고문했다. 용의자들의 손발을 묶고 강이나 늪, 호수 등에 던졌는데 이때 만약 가라앉아 죽으면 결백한 사람이기에 하나님이 그를 받아들인 것으로 간주하고, 물위에 떠오르면 “악마는 자기를 경배하는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마녀가 맞다”라며 즉시 처형했다. 종교재판 집행자들은 잡혀온 사람을 몇 주일이고 고문하다가 결국에는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였다. 어떤 역사가의 기록을 보면, 스페인 세빌레 시(市)의 종교재판소 소장으로 18년간 일한 ‘토르크마다’라는 성직자는 10,220명이나 되는 사람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였고, 97,322명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을 투옥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 종교재판소가 1808년에 파괴될 때까지 그곳에서 산 채로 불에 타죽은 사람이 31,912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9세기 이탈리아, 스페인을 끝으로 종교재판을 폐지하기까지 약 600년 동안 5천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가장 거룩하고 성스럽게 믿는다고 자부하는 카톨릭의 이야기다. 왈도파는 종교재판같은 끔찍한 박해를 받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박해자들의 공격에 맞서 방어하기도 했다. 어떤 모양이든 왈도파 사람들이 극심한 박해 속에서 복음을 지켜오지 않았다면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3) 주 장
① 로마 카톨릭이 인위적 힘으로 제정한 모든 요소들을 거부하였다.
② 로마 카톨릭이 실시하는 종교교육제도, 성서에 대한 신비적 해석, 각종 의식들인 부활절, 성탄절, 등을 거부하였다. 예배시 양초를 사용하는 것, 종려나무 가지, 라틴어로만 되어진 예배문, 마리아상 숭배, 성자들의 성골 및 유골숭배 등을 배격하였다.
③ 로마 카톨릭의 교리적인 것(유아세례, 견진성사, 종부성사, 연옥교리,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교리)도 반대하다.
④ 가난한 생활을 강조하며 사유재산을 포기하였다.
(4) 영 향
이들 왈도파의 신앙은 재침례성도, 모라비안, 유그노 등은 물론이고 최초로 종교개혁에 앞장 선 루터 역시 왈도파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중세기 종교 암흑시대에는 로마 천주교의 교황이 각 나라의 정권과 결합하여 세계의 주권을 장악하고 그들의 종교를 강요하는 일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그리하여 천주교와 그들이 지어낸 교리를 믿지 않고 성경을 그대로 믿으려는 무리들을 핍박하였고 13세기경에는 그 무서운 종교 재판소를 세워 4-5세기 경의 도나티스트들 처럼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주장하고 종교의 자유를 고수하려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무섭고 잔인하게 핍박하였으며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이 참혹한 고문과 죽음을 당하였던 왈데스인들이나 알비젠 교도들아나 휴구노 같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종교와 정치의 통합을 반대하고 믿지 않았으므로 군인들의 무자비한 공격을 받았다.
4. 신앙을 지킨 왈덴스인들의 결과
(1) 왈덴스인들의 삶
그들이 삶의 정착지로 선택한 알프스 산의 첩첩이 싸인 산악들의 높은 성채들은 여러 세기를 통하여 박해를 받고 압박을 받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왈덴스인들은 거기서 은신처를 얻었다. 이곳에서 중세기의 암흑을 뚫고 진리의 횃불이 계속하여 타올랐다. 이곳에서 천여 년 동안 진리의 증인들은 옛날부터 물려받은 믿음을 지켜왔다. 비록 궁색하고 불편한 삶이었지만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그 산과 골짜기들은 그들에게 포근한 안식처가 되었다. 그 신실한 유랑인들에게는 산들이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의에 대한 표상이 되었다. 그들은 그들 머리 위에 높이 솟아 불변의 위엄을 지니고 있는 산들을 자녀들에게 가리키면서 언제나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에 대하여, 또 그 말씀이 영구히 서 있는 산처럼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은 고생스러운 그들의 운명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았고, 궁벽한 산중에 외로이 있으면서도 결코 외롭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들의 분노와 핍박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유롭게 경배할 수 있는 것을 기뻐하였다. 때때로 원수들의 추격을 받았지만 험준한 그 산들이 견고한 산성이 되었다. 그들은 높은 절벽 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지만 로마의 군대들은 그들의 감사의 찬미를 침묵시킬 수 없었다.
왈덴스인들은 험한 땅을 개간하고 열심히 일하여 수확을 얻어 그들의 생계를 유지하였다. 왈덴스인들은 진리를 위하여 세속적 번영과 유익을 다 버리고 어려운 산에서의 생활을 시작하였고 꾸준한 인내로써 그들의 양식을 얻기 위해 수고하였다. 깊은 산골짜기에서도 경작할 만한 토지를 발견하면 즉시 그것을 잘 개간하였으므로 드디어 골짜기와 언덕의 사면(斜面)들은 많은 수확을 내는 농토로 변했다.
그들은 진리의 원칙을 집이나 토지나 친구나 친척이나, 심지어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 그뿐만 아니라 그 원칙들을 그들의 자녀들과 청년들의 마음에 철저히 새겨 주기 위하여 열성을 다하였다. 젊은이들은 어릴 때부터 성경으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율법의 명령을 신성하게 여기도록 교육을 받았다. 성경의 진리를 확실하게 알고 있던 왈덴스인들은 로마교회를 요한계시록에 있는 타락한 바벨론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결정적인 태도로 교황권의 타락에 저항하였던 것이다. 오랫동안 계속된 박해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은 신앙적인 타협을 하여 그 분명한 원칙을 차츰 버리는 일이 생기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리에 굳게 서서 암흑과 배교의 전기간을 통하여 로마교황권의 최상권을 부인하고, 성상(聖像) 숭배를 우상 숭배로 보고 거부하며 참 안식일을 지켰다. 그들은 가장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그들의 믿음을 유지하였다. 교황권의 지도자들이 아무리 세밀하게 조사를 해도 그들이 규정하는 소위 “부패케 하는 이단의 근원”은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다. 왈덴스 선교사들은 하나님께서 암흑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할 엄숙한 책임을 자신들에게 맡겨주셨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힘을 가지고 로마 천주교회가 사람들에게 메워 준 무거운 멍에를 끊어 버리고자 힘썼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였던 이 왈덴스인들은, 예언에 기록된 것처럼, 로마 교황권이 진리를 땅에 내어 던지고 (단 7:25 지극히 높의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바 되어 한 때와 두때와 반때를 지나리라), 또 사람이 만든 유전과 관습을 성경의 가르침보다 높이며, 또 하나님의 계명을 변조하고 하나님의 법을 짓밟는 것을 보고, 성경과 맞지 않는 로마 교황권의 교리와 신조에 동의하지 않기로 하여, 힘을 다하여 그들의 선조들이 물려주었던 신앙을 지키고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를 고수하며 교황권에 저항하기로 한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진리를 위하여 안일하고 평화로웠던 삶을 포기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2) 존 위클리프의 성경번역
수 세기 동안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재판과 사형을 받았다. 성령이 교회안의 많은 이들에게 임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용감히 일어나 개혁을 요구하였다. 그 중 한사람이 존 위클리프 였습니다. 그는 영국의 신학자이며 평신도 목사이며 번역가이며 옥스퍼드 교수였다. 로마 교회가 성경대신 이교의 전통을 세우는 것을 보자 그는 영적으로 굶주리는 이들에게 ‘생명의 떡’을 막는 성직자들에게 항거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에 최고의 권위가 있다고 믿었고 그는 성경 번역에 착수하게 되었는데 이는 민중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성서번역에 노력을 기울였는데, 당시에는 성경 번역이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고 성경은 소수의 가톨릭 사제들만의 전유물 이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하려면 영어 성서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틴어로 된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마침내 1382년에 완성한 것이 위클리프의 가장 큰 업적이었다. 위클리프가 내건 유명한 구호 가운데 하나인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사람들이 성경에 다가갈 수 있도록 근본적으로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확인해 준다. 성경번역으로 위클리프가 탄핵을 받은것은 1381년경이다. 위클리프는 1215년 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가톨릭의 성만찬 교리로 확정한 화체설을 비판했는데 위클리프는 화체설에서 그리스도께서 참 물질로 된 빵과 포도주에 임재하는것을 부인한다. 하지만 위클리프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소수였다. 옥스퍼드에서 1381년경 그의 이론을 이단으로 선고했다. 위클리프는 1384년 12월 중풍이 악화되어 죽었지만 그가 가르친 기간은 비록 3년 반에 불과 하였는데 그의 가르침을 받은 한 세대가 세상을 변화시켰다. 위클리프가 사망한 이후 헨리 5세시절 위클리프를 따르는 무리들은 화체설을 부인했기 때문에 이단으로 몰려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래서 위클리프가 죽은 후 21년이 지난 1415년, 독일의 보덴호수에서 개최된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그는 이단으로 판결받고 그의 저작을 불태우고 그의 무덤을 파헤칠 것을 결정한다. 교황 마르티누스 5세는 위클리프가 죽은지 44년이 지난 1428년 교황의 명에 따라 부관참시(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난 사람을 다시 극형에 처하는 형벌로, 관을 쪼개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걸던 일)와 함께 그의 뼈를 태운 후 남은 재를 에이번(Avon) 강의 지류인 스위프트(Swift) 강에 쏟아부었다. 이단은 거룩한 땅에 묻혀선 안된다라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위클리프에게 영향을 받은 얀 후스를 이단으로 선고했 는데 얀 후스는 공개적으로 성직자들의 교만과 부패를 비난하기 시작하였고 두려움 없이 교회개혁을 촉구하였습니다. 그는 체포되어 이단 재판을 받게 됩니다. 경비병들은 후스를 끌어내어 사형을 집행합니다.
(3) 루터의 종교개혁
얀 후스의 마지막 말에서 후스는 예견하기를 앞으로 100년 안에 주께서 한사람을 세우실 텐데 ‘그의 개혁을 억누룰자 없을 것이다’ 이런 말이 있은 후 놀랍게도 얀후스의 말대로 신학자이며 집필가이며 작곡가이며 성직자였던 마틴루터는 1517년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으로 심문당할 때도 저는 제가 인용한 성경말씀을 철회하지 않으며 저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거스려 말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옳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는 이것 밖에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종교재판으로 루터는 범법자로 선고 받았습니다. 그는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는데 체포 직전 그는 무장 병사들에게 납치되는데 그 병사들은 프리드리히 제후의 수하였죠. 그는 루터를 당분간 세상에서 단절시키고 바르트부르크성에 숨겨 줍니다. 프리드리히 제후 외에는 아무도 루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였죠. 거의 일년동안 그의 외로운 망명지에서 그는 이곳을 나의 밧모섬이라 회고했지요. 전직 사제인 루터는 많은 저술을 쓰게 됩니다. 그는 심지어 신약성경을 헬라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강력한 진리의 투사들이 로마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개혁자들이 외치고 인쇄기가 돌아가는 동안 사람들은 마음을 모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였습니다. 봄의 싱그러운 공기와 같이 유럽은 종교적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됩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4) 마지막 까지 진리수호
우리는 초대교회가 성경의 진리를 대신 해서 어떻게 이교의 전통과 의식을 수용하였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남녀를 일으키셔서 제국 전체에 덮힌 오류에 저항하도록 하셨습니다. 역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왈덴스인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왈덴스인들이 없었다면, 현재의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세기에 가해졌던 그 무서운 종교 핍박, 성서가 가르치는 바른 진리가 이 지구상에서 거의 사라질 정도로 혹독하게 가해졌던 종교 핍박을 꿋꿋이 견딘 왈덴스인들! 인간이 만든 유전을 강요하고 성서에 배치되는 복음과 가르침을 전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의 세력에 생명을 바쳐 가면서까지 굳세게 항거하여, 결국에 그 위대한 종교개혁 운동의 씨를 뿌리고 발아시킨,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후대까지 보존시킨 왈덴스인들! 현대의 개신교인들은 성경과 진리가 어떤 희생과 눈물겨운 투쟁을 통하여 지금까지 보존되고 전달될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별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자유롭게 성경의 진리대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특권에 대하여도 별로 감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왈덴스인들의 신앙과 역사에 대하여 연구하고나면 아마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왈덴스인들의 신앙과 진리에 대한 열정과 사랑,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밝은 성경의 진리를 가지고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왈덴스인들의 신앙 때문에 탄생하게 된 위대한 종교개혁 운동은 앞으로도 계속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종교개혁 운동은 성경의 순수한 진리 그대로 믿고 사는 현대의 왈덴스인들에 의하여 세상 끝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신앙과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칠 현대의 왈덴스인들을 하나님께서는 지금 찾고 계십니다. 에덴동산안에 마귀와 하나님과의 대결은 기독교 2000년동안 계속되어 왔으며 마지막은 계시록 12장 광야로 도망한 교회와 계시록 17장4절 자주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든 음녀인 로마카톨릭과의 대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이 음녀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17:6)하였듯이 로마카톨릭교는 수세기에 걸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최대의 핍박자였습니다. 역사가들은 말합니다. 오천만명 이상의 순교자들이 로마교회의 끔찍한 종교재판과 박해로 죽어갔습니다. 역사상 최대의 사망자가 교회의 핍박으로 발생하였습니다. 세상 마지막 때는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로 남거나 바벨론의 짐승과 연합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선택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남은자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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