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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10-1 다윗과 요압
    말씀 2018. 10. 7. 21:32

    다윗과 요압 (왕상2:5-6).

    왕상2:5 또한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과 이스라엘 군대의 두 대장 곧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너도 알거니와 그가 그들을 죽여서 평화로운 때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그 전쟁의 피를 자기 허리에 띤 띠와 자기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6 그러므로 네가 지혜대로 행하여 그의 흰 머리가 평안히 무덤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7 그러나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는 친절을 베풀어서 그들이 네 상에서 먹는 자들 가운데 들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으로 인해 도망할 때에 그들이 그렇게 내게 나아왔느니라.

    8 또 보라. 바후림 출신의 베냐민족속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그는 내가 마하나임으로 가던 날에 지독한 저주의 말로 나를 저주하였느니라. 그러나 그가 내려와 요르단에서 나를 맞이하기에 내가 주를 두고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가 칼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성경에서 보면 가장 멋진 왕으로 꼽을 수있는 사람은 다윗이다. 그는 일찍이 베들레헴에서 양치는 소년이었을 때 사무엘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때가 되면서 이스라엘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다윗왕 때 영토도 가장 많이 차지하였고 오늘날 이스라엘 국기도 다윗별이 새겨져 있으니 말이다. 다윗은 이미 블레셋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렸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단번에 유명해 졌고 그 이후에도 전쟁이 있는 곳마다 가서 늘 승리하였던 왕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무엘하에 기록된 말씀 대로 삼하 7:12네 날들이 차서 네가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배속에서 나올 자 곧 네 뒤를 이을 네 씨를 세우고 그의 왕국을 굳게 세우리니 라는 말씀을 통해 그의 후손을 통해 메시야가 올 것을 예언하셨기 때문에 다윗왕은 영육간에 축복에 축복을 받은 왕. 오죽 인기가 좋으면 영미권에서는 David란 이름도 많을까 하는 정도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이란 수식어가 항상 따라 다니는 다윗. 그런데 난 다윗은 알고보면 인간적인 매력이 너무 없어서 그렇다. 다윗은 인간적인 면에서 약점이 너무 많다. 하지만 그 약점들은 예배시간의 설교에서 다루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러 잘못한 점이 많이 있겠지만 굵직한 것을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 이스라엘의 왕 다윗

    1. 여자관계가 엉망인 점이다.

    왕이 되면서 사울의 딸 미갈을 발디엘에게서 뺏어온다.(삼하3) 아브넬이 다윗을 만나러 오는 조건은 미갈을 데리고 온다는 것이다. 잘 살고 있는 부부를 왕이라는 이름 하나로 찢어놓고서 막상 미갈을 데리고 와서는 사랑했다고 하는 장면이 없다. 미갈이 누군이가? 그를 사울의 위협에서 구해주었던(삼상19) 첫 아내가 아닌가? 그렇다면 잘 살도록 내버려 둘 일이지 가정 파괴를 할 이유는 없지 않나... 아브넬이 미갈을 데려왔으면 아껴줄 일이지 그 뒤로 사랑하지 않아서 자녀가 없다는 말만 나온다. (삼하6) 왕의 아내들이 부족하지도 않은데 말이다. 또 밧세바 사건은 말 안해도 너무 잘 알 것이다. 밧세바를 간음하고 그 잘못을 은폐하고자 다윗왕에게 충성된 장군인 우리야를 전장에서 특별휴가를 주어 예루살렘으로 오도록 하였고 그러나 우리야는 정직하며 신앙의 사람인지라 다들 전쟁중인데 어찌 집에 가서 아내와 함게 있을 수 없다고 집에도 들리지 않으므로 다윗왕은 이보다 더 큰 죄인 살인죄를 범하여 우리야가 전쟁에서 자연스럽게 죽도록 방조를 한다.(삼하11)

     

    2. 자녀교육이 엉망인 점이다.

    다윗은 여러 여자로부터 많은 자녀를 얻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압살롬의 반역을 전후로 자녀들 간 다툼을 통해 극명하게 살펴볼 수 있다. 암논이 다말을 강간하였을(삼하13:14) 때도 이에 대한 징계나 책임있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으며 이일이 결국은 다윗가정의 칼을 불러오게 되었다.(삼하13-18) 물론 어떤 말로도 압살롬의 반역이 용서받지는 못하겠지만, 암논이 한 짓을 듣고 다윗이 심히 노했다(삼하13:21)고는 했지만 암논에게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결국 압살롬이 자기 누이의 복수를 하게 된다. 그리고 도망다니다가 어찌어찌 해서 다윗과 압살롬은 화해를 하고 같이 지내게되지만 결국 다윗은 또다시 압살롬에게 왕을 볼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삼하14:24) 그런지 2년이 지나 압살롬이 요압에게 부탁해서 화해시켜달라고 부탁하는 장면도 있으니 말이다. 이런 자식에 대한 무관심이 결국은 압살롬으로 하여금 반역할 기회를 준 것이다.

     

    3.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한 인구조사를 멋대로 한 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과거에는 싸울 수 있는 장정이 몇이나 되는가가 국력의 척도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인구수 즉 자신들의 힘에 의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인구조사는 하라고 할 때를 제외하고(신명기에 열심히 인구조사하는 장면같은 경우)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다윗은 뻔뻔하게 인구조사를 한다.(삼하 24) 그래.. 인구조사를 할 수 있다고 하자. 사람이 실수 할 수도 있는 것이지 완벽할 수는 없지 않나? 문제는 다음이다.

    선지자 갓이 와서 너 왜 하나님이 금지한 것을 하였는가! 너 벌받아야되니 다음 셋 중에서 골라!

    1) 이스라엘에 7년기근이 임하게 하리이까? 2) 다윗왕이 적에게 3달을 도망하시려나이까? 3) 이스라엘에 3일동안 역병이 있으리이까?...

    택하라 하면 당연히 자신이 잘못 한 것이니 2)를 택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일텐데 다윗은 자기몸 상하는 것이 싫어서 3)를 고른다. 다윗의 잘못때문에 엉뚱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역에 걸리고 3일 동안에 7만명이 죽게 되는 쟁앙을 맞게 된다. (삼하2415). 순전히 다윗의 잘못에 대해서 다윗 자신이 책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4. 개국공신에 대한 처우가 엉망이다.

    성경에 보면 요압이 너무 앞서가거나 모나게 행동하는 장면이 몇군데 나온다. 앞에서 말한 인구조사를 할때 요압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린다.(대상21, 삼하24) 하지만 그런 요압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재촉해서 결국은 인구조사를 한다. 압살롬의 반역때 위기일발의 다윗을 구해준 것은 요압이다. 비록 그가 압살롬의 심장을 뚫긴 했지만 어찌보면 다윗은 바라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손으로 어찌할 수 없는 망나니 혈육(비록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을지라도)을 누군가 대신 처리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전쟁이 끝나고 신하들이 전쟁에서 돌아왔으면 환영의 인사라도 건너야 하는데 다윗은 자기 목숨을 뺏으려던 압살롬이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승리의 분위기를 초상집 분위기로 만들어 놨다. 이때도 요압은 다윗왕에게 말하기를 왕께서 이 날 왕의 생명과 왕의 아들 딸의 생명과 왕의 처첩들의 생명을 구원한 왕의 모든 신하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셨사오니 6 왕께서 왕의 원수들은 사랑하시나 왕의 친구들은 미워하시며 통치자들과 신하들을 존중히 여기지 아니하시는 것을 이 날 밝히 드러내셨나이다. 이 날 내가 깨달은즉 만일 압살롬이 살고 이 날 우리가 다 죽었더라면 왕이 기뻐하셨으리이다. 하면서 말하였던 사람이 바로 요압이다. 장군들의 공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여튼 아둘람 굴에서부터 다윗을 왕에 오르게 도와주고 위기의 순간에도 항상 다윗 곁을 지켰던 요압에 대해서 다윗이 내린 상은 "솔로몬에게 부탁해서 요압을 죽이라"라는 것이다. 토끼가 죽으면 토끼를 잡던 사냥개도 필요 없게 되어 주인이 삶아 먹는다는 뜻으로, 필요할 때는 쓰고 필요 없을 때는 버리는 경우를 이르는 말로 토사구팽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물론 요압의 잘못도 있지만 부하의 잘못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가... 그냥 내치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그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죄를 자복했기에 하나님의 사람이고, 크게 쓰임받는 사람이 되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role model이 다윗이기 때문에 그토록 욕을 먹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어찌 잘못을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만 올바르면 된다는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최우선인 것은 옳다. 그것은 무시할 수 없는, 아니 최우선 과제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나머지 것을 모두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죄는 다 똑같은 죄인이고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영향력이라는 관점이서 볼 때 하나님 보시기에도 사람이 보기에도 좋았던 요셉이나 바울이 역할모델이 되었으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모든 인간은 그의 삶 속에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두 가지 모습이 다 있다. 좋은 모습만 갖추고 살면 좋겠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반대로 나쁜 모습만 가지고 사는 사람도 없다. 사람은 양쪽 모두 가지고 있으나 가장 좋은 인생은 긍정적인 면을 극대화시키고 부정적인 면을 최소화시키는 사람이다.

    내 마음의 어두운 곳에 조명을 밝혀서 상처난 곳을 치유하고 무너진 곳을 수축하며 삐뚤어진 부분을 바르게 교정시켜서 살아가는 훈련을 한다면 누구나 긍정적인 면을 극대화시켜 나갈 수 있다. 이전 생각을 포맷하고 새로운 생각으로 업데이트 해 나가는 사람이 영성, 인성 면에 고무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노력해 나가는 사람만이 자신의 미래가 밝고 윤택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 다윗왕의 2인자 요압장군

    요압은 용감한 사람이었다. 여호수아 시대 이후 아무도 정복하지 못했던 예루살렘 성에 용감하게 올라가서 점령했다.

    요압은 주인을 아꼈다. 다윗이 전투에서 위험한 상황에 처한 이후 전쟁터에 못나오게 하고 자기가 항상 선봉에 섰다.

    요압은 주인에게 충성했다. 우리야를 죽게 하라는 다윗의 편지를 보고 이유를 묻지 않고 실행했다. 우리야가 죽은 그 치열했던 전투를 결국은 승리로 이끌었으나 최종 승전의 자리에는 주인인 다윗을 초청해서 영광을 돌렸다.

    요압은 리더십도 있었다. 오죽하면 다윗이 우리야에게 특별외박을 명했을 때 우리야가 '내 상관 요압이 천막에서 잠을 자는데 내가 집에서 잘 수 있습니까'라고 말할 정도로 부하들로 부터 존경받는 장군이었다. 또 요압은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다. 압살롬 반란 때 적군을 궤멸시킨 후에 후일을 생각해서 압살롬을 죽인다.

    요압은 쓴소리를 할 줄 알았다.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인구조사를 시켰을 때 강경한 반대 목소리를 내었고 압살롬이 죽임을 당해 전쟁의 승리를 초상집 분위기로 만들었을 때도 직언을 한 사람이 바로 요압이다.

    요압은 오래도록 수고했다. 사울에게 쫓겨 다니던 시절부터 다윗이 죽을 때까지 40년 이상 한 주인을 섬겼다.

    다윗 시대의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2인자는 요압이었다. 그 동안 두 번의 큰 어려움이 있었다.

     

    사울이 죽고 다윗이 남쪽 유다 지방에서 왕이 되기는 했지만 북쪽 대부분 지방에서는 백성들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섬기고 있었다. 7년 동안 계속되던 전쟁 후에 사울의 사촌이자 북 이스라엘의 2인자였던 아브넬이 다윗에게 투항한다. 마침내 이스라엘이 통일되려는 순간 다윗은 통합 정책을 펴서 아브넬을 요압의 자리에 앉히려고 한다. 그러자 요압이 아브넬을 암살한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수도를 포기하고 도망친다. 요압 덕분에(?)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 압살롬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윗은 다시 통합 정책을 펼치려 한다. 압살롬의 군대를 이끌었던

    아마사를 요압의 자리에 앉히려 한 것이다. 이번에도 아마사는 요압 의에 죽임을 당한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에서 세 사람을 언급한다. 다른 두 사람은 유언에 언급할만하다. 정말 미운데 자기가 뱉었던 말 때문에 스스로는 죽일 수 없었던, 그래서 아들한테 반드시 응징하라고 한 시므이와 너무 고마워서 대를 이어 은혜를 갚고자 하는 바르실래. 그런데 성경의 기록만 봐서는 왜 솔로몬에게 요압을 반드시 죽이라고 당부하는지 잘 모르겠다. 언젠가 한 번은 다윗과 요압의 관계를 정리해 보고 싶었다. 다윗이 망명자 생활을 할 때 광야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서로의 속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며 왕국을 같이 건설하여

    한사람은 왕, 한사람은 국무 장관 정도가 된 사람이 요압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스라엘 왕국의 2대 왕 다윗의 조카이자 군대 사령관인 요압이며 요압의 동생으로는 아비새, 아사헬이 있다. 형제들과 더불어 다윗이 거느린 용사들의 주축으로 대개 '스루야의 아들'이란 호칭은 요압을 지칭하고 있는 말이다. 다윗이 연합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후, 다윗의 정복전쟁을 수행하여 '다윗의 영화'를 쌓아 올리는데 일조한 유능한 명장이자 다윗의 치세 내내 그와 함께한 공신이 바로 요압이다. 그리고 그는 토사구팽처럼 그 명장이 어떻게 몰락하는지를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결국 다윗은 솔로몬왕에게 요압을 죽이라고 유언을 한다. 왕과 국무 장관과의 유명한 윈윈 관계는 영국 전성 시대 엘리자베스 여왕과 드레이크 공작 (스페인 함대와의 전쟁에서 이끌어 영국 부흥의 길을 염) 이나 통일신라 시대 김춘추 왕과 김유신 장군을 들 수 있다.

    다윗과 요압의 관계는 이들과는 달리 불행하게 끝을 맺었다.

    왜 그랬던 걸까?

    다윗이 이 관계마저 아주 멋있게 끝났다면 그는 더 없이 좋은 왕이 되었을 수도 있는데.. 그래서 한 번 정리해 보고 싶었다.

    1. 다윗과 요압은 친척 관계 였다.

    다윗에게는 누나인지 여동생인지 모르지만 스루야.. 그리고 아비가일이 있었다. 이 스루야에게 아들 3이 있었는데 아비새, 아사엘, 그리고 요압. 그러니까 다윗과 요압은 삼촌 조카 사이였다. 이 셋이 다윗의 도망다니던 광야 생활을 같이 한다. 다윗은 망명 생활을 할때 다윗의 광야 생활은 단독은 아니었고 다윗, 아비새, 아사헬, 그리고 요압 등 4명이 함께 했다.

    광야 생활에서는 지금은 어떻게든 살아 남기, 나중에 잘 되면 한자리 차지 하기 등의 공통의 목표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런데 이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났는데 하나는 왕이 되는 방법에서 차이가 났고 그 차이의 핵심은 아마도 사울을 어서 속히 죽이고 왕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정한 때를 기다릴 것인가에서 차이가 난 것으로 보인다. 한쪽은 기회다. 빨리 죽이자 한 쪽은 아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를 함부로 손 대면 안된다.

    왕국을 만드는 방법에서 차이가 났던 것 같다

    다윗은 자신의 왕국을 무고한 피 흘림이 없는 깨끗한 나라가 되길 원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시는 왕국에 하나님이 떠나실 만한 그런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사울이 죽고 난 후 사울의 왕국과 다윗의 왕국이 하나로 통합하는 줄다리기를 하는 시점에서 요압은 사울왕의 군장군인 아브넬을 무고히 죽인 것이다.

    다윗은 아브넬이 나라를 통합하는데 협력자라고 보았고 요압은 거짓말이며 정탐자라고 보았다!! 하며 다윗에게 알리지 않고 그를 죽여 버렸다. 이행위가 나라를 위한 것이었을까? 개인적인 복수였을까?

    (성경은 이것을 개인적인 복수라고 하였다, 아브넬이 요압의 동생 아사헬을 죽인 것에 대한 복수)

    그리고 다윗은 자신이 행한 것이 아님을 강력하게 피력하며

    "난 아니야.. 내가 그런게 아니야" "이 일로 나는 너무 슬퍼"를 확실히 표시했다. 아브넬을 위해 온갖 예우를 다 했다.

    짐작컨대. 요압은 다윗의 이러한 태도가 무척 서운 했을 것이다.

    내 동생도 죽었는데 그럼 아브넬을 죽인 나는 역적인거? 난 뭐지?

     

    두번째 다윗과 요압이 노선을 달리한 것이 아마사의 죽음이다.

    아마사의 엄마(아비가일), 요압의 엄마 (스루야)는 자매지간이다.

    그니까 요압과 아마사는 이종사촌관계이다. 압살롬과의 전쟁이 끝나고 다윗은 아마사를 요압을 대신하여 요압의 자리에 임명하고 세바의 반역이 발생했을 때 그를 진압하고자 보냈는데 후에 요압은 아마사를 다시 비겁하게 속임수로 죽였다. 요압은 왕의 명령을 받은 아마사를 죽였다. 이번엔 새로 뜨는 별에 대한 질투냐? 열등감이냐?

    자신의 존재에 대한 위태로움을 느낀 것인가?

    요압이 왜 죽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성경은 무고한 피를 흘렸다고 하였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요압이 어쩌면 자기와 이토록 노선을 달리 하는지.. 왜 자기 멋대로 하는지.. 참 골치아팠을 것 같다.

    그리고 다윗이 죽기 전 결정타가 발생한다.

    압살롬의 동생인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고 반란을 도모할 때 이때 요압은 아도니야에 편승한다. 요압은 다윗곧 죽으면 아도니아가 왕이 될 적임자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자기 입지가 불안하다고 느꼈던가

    다윗에게 등을 돌렸던 것이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왕권을 넘기면서 요압을 처단할 것을 유언하였다. 요압의 죄목은 이러했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그가 그들을 죽여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를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왕상2:5)

     

    하지만 다윗과 요압의 관계는 다윗 근심하면 그 마음을 꿰뚫는 사람이 바로 요압이었다.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도망가있을 때 이런 압살롬을 다윗에게로 오도록 한 사람이 바로 요압이었다.

    삼하 14:1

    "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

    삼하 14:21-24

    21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요압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며 왕에게 감사를 드리고 이르되 오 내주 왕이여 왕의 종이 요청한 것을 왕께서 이행하셨사오니 오늘 왕의 종이 왕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은 줄을 아니아다 하고

    23 이에 요압이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라

    24 왕이 이르되 그를 자기 집으로 가게 하고 내 얼굴을 보지 말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요압이 왕의 마음을 꿰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요압의 관계는 사실 그리 좋지는 못하였다.

    다윗이 왕이 아니었을 때, 요압이 군대 장관이 아니었을 때는 다윗이 전면에 나섰을 때 성경 속에서 자장 많이 나타났던 다윗의 휘하의 장수는 요압의 동생 아비새였다. 아비새는 베드로와 같은 성격을 가진 장수였는데 그는 말 그대로 다윗의 명령이라면 불구덩이 속이라도 들어갈 자였습니다. 다윗이 적진 한 복판에 있는 사울 왕에게 가자고 하였을 때 아비새는 꺼리는 말 하나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따라갔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비새는 또한 순진할 정도로 다윗을 따랐는데 그것이 가끔은 다윗에게 핀잔을 듣는 이유가 됩니다.

    굴 속에서 사울왕을 만났을 때나 적진 한 복판에서 잠자는 사울 왕을 대면하였을 때 아비새는 사울 왕을 죽이자고 다윗에게 말합니다.

    아비새가 사울 왕을 죽이려고 하는 이유는 다윗이 권력을 잡으면 자신도 입신양명해보자는 그러한 뜻이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다윗의 적이니 당연히 죽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것입니다.

    정말 순진할 정도로 다윗만을 따랐던 그였습니다.

    그러한 아비새였기에 다윗과 요압이 사이가 좋지 않아 스루야의 아들들이라고 도매급으로 비난을 받으면서도 다윗을 누가 욕이라도 하려면(시므이 같은 경우) 당연히 자신이 먼저 화를 내고 자신이 먼저 해결하려고 합니다. 아비새가 오로지 다윗만 쳐다보고 따르는 장수였다면 요압은 정치 군인으로서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압은 전장에서 지혜롭게 군대를 이끄는 군인이기도 하며 장수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다윗이 왕 위에 오른 다음 그가 군대 장관이 될 수 있었습니다. 군대의 신임을 받고 있는 정치 군인에 대해서 다윗이 그리 좋은 시선을 보이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요압을 끌어내려고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세울려고 노력도 해봅니다. 물론 결정적으로 다윗과 요압이 틀어지게 된 이유는 바로 사울 왕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을 요압이 죽였는데 이유는 아비새의 동생 아사헬을 죽였던 자였기에 라고 하지만 실은 아브넬이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루야의 아들들 입장에서는 같은 하늘에 있어서는 안되는 존재였으나

    다윗은 너무나도 쉽게 아브넬과 하나의 통합된 지파로 이스라엘을 세우려는 의도에 동맹을 맺었고 요압은 두가지 이유(아사헬의 원수를 갚는일, 자신의 정치적인 위치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로 아브넬을 죽이게 되었고 그 때부터 다윗은 요압을 미워하면서도 두려워합니다.

     

    예루살렘을 여부스 족속에게 탈취하려고 하였을 때에도 이미 군대장관이었던 (물론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것으로 인해 공석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요압을 내치고 새롭게 실력자를 얻어서 군대장관을 세우려고 하였지만 예루살렘을 탈취한 것은 결국 요압이었고 다윗은 자신의 대에서는(나중에 압살롬의 군대장관 아마샤의 건에서도 볼수 있듯이) 요압을 죽일 수 없음을 알게 되었고 군대 장관이지만 그리 좋아하지 않는 요압을 두고 볼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에 반해 요압은 왕과 사이를 좋게 만들려고 노력을 많이 한 것도 사실입니다. 또 요압의 실력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다윗 시대에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대부분 요압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죽여달라는 다윗의 요청을 수행한 것을 보면 다윗이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요압입니다. 요압의 왕의 말못할 마음을 읽고 있을 정도입니다.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그술 왕에게로 도망갔을 때 다윗이 압살롬을 다시 부르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수 있을정도로 요압은 다윗 심중을 꿰뚤고 있었습니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돌아와 2년 동안 다윗을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요압에게 따질때에 요압이 그러한 압살롬을 만나려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정도인데 하나는 요압이 압살롬을 불렀던 이유는 압살롬에게 잘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잘 보이려고 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요압은 압살롬을 무서워하지 않고 어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압살롬이 왕자라고 하나 요압은 당시 군대 최고 권력자이기에 그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압은 아비새와 다르게 다윗에게 무조건 충성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자신의 군대장관 지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왕과도 대립하는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압은 압살롬을 왕자라고 해서 대우하지 않으며 무서워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요압의 성격 때문에 압살롬의 비극은 결국 일어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왕이였기에, 그 모습을 본 요압은 다윗에게 충성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왕이라는 직책을 얻고 나자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고, 악함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결국 충성된 부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자, 요압을 이용해 충성된 부하를 죽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편지를 씁니다.

    아무리 충성된 부하라도, 얼토당토하지 않은 명령을 받았을때, 왕을 생각하는 마음이 바뀔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때 부터 다윗은 요압의 눈에 하나님의 순종과 충성스런 종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하나의 사람으로 보게 되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생각하기를 내가 지금의 이 자리를 이용해서 아랫사람을 다스리려고 할때, 결국에는 문제가 생기고 말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일은 어떠한가를 먼저 살피고, 기도하고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질때, 우리는 다른 모든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형통은 하나님께로 부터 나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요압에게도 장점은 있었는데

    요압은 전쟁에서 언제나 용감했으며 때로는 다윗에게 쓴 소리를 한 사람이 요압이다(삼하19:7, 삼하24:3). 그러나 다윗은 죽을 때 세 가지를 유언하게 되는데 그 중에 한 가지가 요압에 대한 유언이다.

    왕상2:5요압이 내게 행한 일과 이스라엘의 군대의 두 대장 곧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너도 알거니와

    6 그러므로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의 힌 머리가 평안히 무덤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는 유언을 했던 것이다.

    요압은 아브넬을 죽였다(삼하 3:27~30). 그때 다윗은 그 죄에 대해서 자신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고, “주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삼하 3:31~39)라고 선언했다. 요압은 다윗이 자기를 대신하여 아마샤를 임명하자 그도 죽였다(삼하 19:13; 20:8~10). 이 두 사람의 죽음은 모세의 법에 따라 반드시 복수해야 했었다. 이 일이 당시에 다윗에게 위탁되어 있었지만, 요압이 헷 사람 우리야의 죽음과 관련된 다윗의 약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그를 징계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법의 명령에 따르면, 요압이 범한 것과 같은 죄악들을 처벌하지 않고 지나쳐서는 안 되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지금 자신이 단죄한 요압에게 여러 해 동안 고되고 힘든 시간을 보냈던 한 개인으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앞에서 왕으로서, 요압에게 아무것도 빚지지 않은 깨끗한 사람의 손으로 그를 응징하라고 지시했다. 더더욱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이를테면, 다윗이 여기서 분명하게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의 명백한 지시를 거스르고 압살롬을 죽인 것(삼하 18:14, 15)과 아도니야를 지지한 최근의 반역 등과 같은 행동(왕하 1:7)에 대해 요압에게 죄가 있었고, 그로 인해 솔로몬의 심기가 이미 불편해 있었다.

     

    요압이 다윗에게 잘못한 것은 맞는 말이다. 겨우 국가를 통합할 만하면 요압 때문에 다윗이 나라를 통합하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다윗은 왜 기회만 생기면 요압을 2인자 자리에서 밀어내려 했을까. 그리고 왜 자기가 처리하지 않고 아들에게 넘겼을까. 여기부터는 상상의 영역인 듯하다.

    하지만 요압의 긍정적인 측면을 보면 그는 충성스럽게 다윗을 따랐던 전사였다. 다윗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으며 다윗 왕조 건설에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요압은 애석하게도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 측면이 더 많았던 인물이었다. 이 부정적인 어두운 면이 너무 크고 많아서 저주와 멸망의 나락으로 빠져 버렸다. 처음 출발이 좋았다면 인생의 종착지에 도달을 때 까지 평생 그 속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지도자를 좌지우지 하려고 하고 자기 권세를 부리고 교만하면 반드시 망하고 저주를 받는다.

     

    . 요압의 인격

    1.요압은 생명의 소중함을 모르는 잔인한 사람이다

    (삼하3:27-30) 세상에는 폭력적이고 잔인한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모습 중 하나가 무정함과 무자비함이다(1:31). 바울도 말세에 하나님을 떠난 악한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무정함’, ‘원통함을 풀지 않음’, ‘사나움이라고 말하였습니다(딤후 3).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사납고 폭력적이고, 망각적인 모습이 있다. 원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죄가 없었고 양과 같이 폭력성과 공격성이 없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나서 아담의 DNA가 후손들에게 전달되면서 폭력성, 잔악성, 잔인함,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속성들이 인간 안에 들어와 인간 세계를 망쳐버리고만 것이다. 가인과 아벨을 보면, 형이 동생을 쳐 죽였다(4:8). 배워서 죽인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살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라멕은 가인의 후예로 전쟁에 나가서 자기 몸에 입은 상처에 대하여 보복하기 위해 젊은 소년까지도 죽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4:23-24). 출애굽기 1장을 보면, 이집트의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숫자가 늘어나고 점점 더 강성해지자 모든 히브리 남자 아이들이 태어나면 모두 하숫가에 던져버리라는 대학살 명령을 내린다.

    마태복음 2장에도 보면, 동방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분노했던 유대의 분봉왕 헤롯이 베들레헴 지경의 두 살 아래 아기들을 다 죽여 버리라는 집단학살을 명령한다. 이런 것들이 인간의 공격성, 야수성, 잔악함, 포악함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정도는 다르지만 사람은 모두 어느 정도 포악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요압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1) 요압의 아브넬 살인사건(삼하 3:27-30)

    다윗 왕은 적들을 품어주는 포용과 융화정책을 썼다. 그런데 요압은 그렇지 않았다. 사울이 죽고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젊은 나이에 왕이 되자 아브넬이 2년 동안 섭정을 했다. 왕이 이스보셋이라도 정치적인 힘은 아무것도 없고 아브넬이라는 군대 장관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다윗이 남쪽의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다윗은 대세가 자신에게 이미 기울어졌지만 사울의 군대장관인 아브넬을 끌어안기 위하여 그를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축복한 후 그를 다시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요압은 이 같은 다윗의 결정에 대하여 불복하고 사람을 보내서 다시 아브넬을 헤브론에 유인해 온 뒤에 칼로 그를 죽였다. 자신의 동생 아사헬을 죽인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다윗이 국가 통일에 방해를 받고 많은 피를 흘리게 됩니다. 사실 아사헬이 아브넬에게 죽임을 당한 사건은 아브넬 입장에서는 정당방위였습니다. 아브넬을 죽이려고 쫓아간 아사헬에게 아브넬은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추격하다가 창에 찔려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압은 그 일에 대하여 책임이 동생에게 있음을 자각하고 아브넬에 대하여 복수심을 갖지 않았어야 합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일진데 전쟁에서 동생의 경솔한 행동으로 죽임 당한 것을 모두 원수로 적대시하고 보복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2) 요압의 아마사 살인사건(삼상 20:4-6)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다윗은 예루살렘을 버리고 피난을 갑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때 다윗이 압살롬에게 붙어서 군대 장관을 하던 변절자 아마사의 지위를 다시 회복시켜준다. 다윗의 융화정책입니다

    그러나 요압 대신 아마사가 군대 사령관이 되었을 때 요압의동생 아비새는 세바의 반역을 진압할 때  자신의 형인 요압을 불러들였고 요압은 아마사에게 조용히 인사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그의 배를 찔러 죽여 버린다. 이 사건은  다윗의 융화정책을 또한번 지체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번에도 요압은  자기가 다윗 왕국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대상을 제거한 것입니다.

    요압은 그 소식을 듣고 아마사에게 조용히 인사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그의 배를 찔러 죽여 버린다. 자기가 다윗 왕국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대상을 제거한 것입니다. 자기 지위에 걸림돌이 된다면 친인척도 마다하지 않고 죽이는 그런 잔인한 사람이다. 아마사는 요압과 사촌 관계입니다(이모의 아들: 삼하17:25).

    요압은 무죄한 두 사람을 살인하므로써 다윗의 국가통일에 큰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3) 에돔 땅의 남자를 전멸시킵니다(왕상 11:15-16)

    열왕기상 11장에 보면, 다윗 왕이 에돔 지역에 전쟁을 하러 나가서 그 백성들을 통치하려고 했는데 에돔 사람들이 대적하게 되어 전쟁을 하면서 많은 유대의 군대들이 피해를 입게 됩니다. 군대 장관이었던 요압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6개월 동안 에돔 땅에 주둔하면서 에돔 땅의 모든 남자들을 전멸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요압의 잔인성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무정한, 무자비한, 사나운, 동물적인 폭력성과 공격성을 갖고 살아갑니다. 이 잔인함, 포악함은 하나님의 성품이 아닙니다.

    우리는 맹수가 아니라 공격성이 없는 양입니다. 잔인하고 폭력적인 그런 DNA를 우리는 버려야 됩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씀의 능력으로, 십자가의 힘으로 양처럼 변하는 역사가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요압은 제어가 안 되는 교만한 사람입니다(삼하 3:30,39)

    요압은 통제 불능의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들이 너무 힘이 강하여 제어하기가 힘드니 주께서 그 악한 일을 행한 대로 갚아주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30). , 요압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통제 불능이 된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14-1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죽기 전에 쓴 편지가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하면서 부흥시켜 놓은 다음에 자신의 후임자였던 디모데에게 교회를 맡기고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노파심에서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목회를 잘 하라는 의미에서 편지 두 편, 즉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를 씁니다. 그는 죽기 전까지 썼던 디모데후서 4장에서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니 그를 주의하고"라고 합니다. 바울에게 사법권이 없으나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딱 한 마디 합니다. "주께서 그에게 행한 대로 갚으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과 온유의 하나님의 사람, 바울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알렉산더는 교회는 들어왔지만 거듭나지 못하고, 옛 사람이 살아 있는 통제 불능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압이나 알렉산더처럼 누구의 말을 안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어가 안됩니다. 그는 저주스러운 인간입니다. 이 정도까지 가면 갈 데까지 다간 사람들입니다.

     

    존 오웬(John Owen)이라는 청교도의 대표적인 거물이 있었습니다.

    그가 존경했던 인물이 바로 시골사람, 땜장이였던 존 번연(John Bunyan)목사입니다. 가끔 존 번연이 런던에 와서 설교할 때마다 그의 설교를 들으러 갔다고 합니다. 찰스 왕이 존 오웬을 불러 물었습니다. 당신은 학식과 지위와 권위 있는 사람인데 왜 시골에서 온 땜장이 설교자, 존 번연의 설교를 들으러 가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존 오웬은 할 수 있거든 제 학식, 학위, 모든 지식, 신학을 모두 팔아버리고 존 번연이 가지고 있는 그 영성을 사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이 존 번연이 천로역정을 쓴 사람입니다. 존 오웬은 들을 귀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들을 귀가 있어야 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귀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안 듣고, 제어가 안 되는 요압과 알렉산더와 같은 인물들을 통하여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주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율법도, 권면도 안 통하는 교만한 사람은 갈데까지 간 통제 불능의 저주받은 인간입니다. 바로 요압이 이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3. 요압은 어리석은 판단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왕상 1:7-8, 2:5-6).

    에스키모인과 늑대 사냥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단 칼을 늑대를 유인하는데 쓰일 동물의 몸에 쩔러 넣습니다. 그 칼에 피와 기름이 엉겨 붙으면 끄집어내서 밖에 내놓으면 추운 영하 날씨의 모두 얼어붙습니다. 그 후에 동물에 두 번째로 집어넣습니다. 이렇게 30, 40번 해서 피와 기름이 엉겨 붙어 이것이 칼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두꺼워지면 칼을 세우고 손잡이를 땅에 묻습니다. 늑대가 피냄새를 맡고 다가와서 칼을 계속 핥으면서 얼음이 녹아 칼날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래도 늑대는 멈추지 않고 계속 칼을 빨게 됩니다. 자기가 마시는 피가 자기 피인데도 착각하고 계속 빱니다. 그렇게 몇 시간 뒤에 나가보면, 늑대가 죽어 있습니다. 이게 에스키모 선조들의 지혜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탐심, 권력의 냄새를 쫓아가다가는 자기를 파괴시킨 늑대 같은 인생이 요압이었습니다. 다윗이 늙어서 죽을 때가 되었지만 후임자를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다윗의 넷째 아들인 아도니야가 다시 반역을 일으킵니다. 그는 용모가 준수하였고 아버지 다윗이 섭섭하게 한 적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때 아도니야와 함께 공모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던 자가 바로 요압입니다(왕상 1:5-8).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어도 요압은 다윗 왕을 떠나지 않았지만 결정적으로 아도니야의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윗의 뒤를 이어서 막내아들 솔로몬이 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요압은 자신의 권력욕망 때문에 정치적인 줄서기를 잘못하여 아도니야를 옹립하려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왕상 2:5-6, 28-35). 어리석은 판단으로 비참하게 죽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요압의 인생은 이렇게 살지 말라는 거울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 요압의 인생에서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며 결정적 실수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맹수처럼 잔인하게 살지 말고 양처럼 온순하게 살아야 합니다. 통제불능의 교만함을 버리고, 겸비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됩니다. 욕심에 이끌려 죽는 자리에 줄서기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바르고 성경적으로 판단 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 인생길을 열어주십니다. 요압을 거울삼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성도, 성령 충만하여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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