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5 되로 주고 말로 받았던 다윗왕이 범했던 죄의 보응말씀 2018. 9. 30. 22:16
되로주고 말로받은 다윗이 지은 죄의 보응
삼하 7:12, 12:9-14
삼하7:12 네 날들이 차서 네가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배속에서 나올 자 곧 네 뒤를 이을 네 씨를 세우고 그의 왕국을 굳게 세우리니
삼하12:9 어찌하여 네가 주의 명령을 업신여기고 그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족속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으며 암몬 자손의 칼로 그를 죽였느니라.
10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족속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이제 그런 까닭에 칼이 네 집에서 결코 떠나지 아니하리라
11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네 집에서 너를 대적하는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아내들을 네 눈앞에서 가져다가 네 이웃에게 주리니 이 해가 보는데서 그가 네 아내들과 함께 누우리라
12 너는 그 일을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해 앞에서 이 일을 행하리라 하매
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주께 죄를 지었노라 하거늘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주께서도 왕의 죄를 치우셨으므로 왕이 죽지 아니하리이다.
14 그러나 이 행동으로 인하여 왕이 주의 원수들에게 신성모독의 큰 기회를 주었으니 왕에게 태어난 아이 또한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니라.
1. 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 다윗
다윗이란 뜻은 「사랑함」이다. 다윗은 이스라엘 제 2대의 왕이다.
다윗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유다 지파 이새의 막내 아들로 베들레헴에서 출생했다. 다윗에 대한 이야기는 사울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때, 하나님은 선지자 사무엘을 베들레헴에 보내어 사울의 뒤를 이를 자로서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였다. 사무엘이 기름뿔을 취하여 다윗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그는 주의 영께서 그에게 임하셨다. 우선 다윗에 대한 첫 언급은 볼이 불그레하다 즉 혈색이 좋으며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고 보기에 잘생긴 소년이였다.(삼상 16:12)고 기록하고 있다. 겉으로 외모만 출중한게 아니라 그는 비파를 잘 탈 뿐만 아니라 강하고 용맹한 자요 전사로서 일에 분별력이 있으며 말도 잘하고 풍채도 좋은 데다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십니다.(삼상16:18)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막내로 양을 치다가 주의 영에 이끌려 나와 이스라엘을 돌보는 일을 맡게 된 다윗왕은 하나님과 사람들로 부터 사랑받는 인생을 살았던 다윗의 인생삶 속으로 들어가 그의 진정한 모습을 만나보자,
다윗과 관련된 일화 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골리앗을 물맷돌로 쳐 죽인 사건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을 때 블레셋에는 거인 골리앗이라는 장군이 있었다. 키는 약 3m이고 57kg정도 나가는 갑옷으로 중무장하고 창날만도 7kg 정도 되는 거대한 창을 든 거인 골리앗 앞에서 이스라엘은 무서워 어쩔 줄 모르고 있었을 때 소년 다윗이 골리앗의 모욕적인 말을 듣고 할례도 받지 않은 저 블레셋 사람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욕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에 도전하느냐?(삼상17:26) 그리고 사울왕한데 다윗은 자신이 싸우러 나가겠다고 합니다. 골리앗을 물리치겠다는 소년 다윗의 용기는 어디서 왔을까요? 그것은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다윗은 평소에 하던 대로 ‘막대기와 시내에서 주운 돌 다섯개, 그리고 팔매질을 할 끈’(삼상17:40)만 들고 적장의 앞으로 나아가 골리앗의 앞에 선 다윗은 ‘나는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다는 것을, 주님은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전쟁은 주께 속한 것임을 알게 하겠다(45-47절)’고 외칩니다. 그리고 ‘날쌔게 달려가 돌팔매질을 해서 돌 하나를 골리앗에게 던지니 돌은 정확하게 골리앗의 이마를 맞추고 이 거대한 장수는 쓰러진다.(48-49).’ 이 일로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빗대어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다윗은 약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곰이나 사자와 싸웠던 경험을 통해 믿음으로 중무장한 ‘용맹한 장사이며 전사’(삼상16:18)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으로 강해질 수 있으며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명성을 얻기 시작했지만, 그것이 그대로 임금의 자리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이요 다윗은 수만이라는(삼상18:7) 여인들의 찬사는 곧장 사울의 시기를 불러왔습니다(18:6-9). 이제 사울은 공개적으로 그를 죽이겠다고 선언합니다(삼상 19:1). 사울은 도망자 다윗을 도왔다는 이유로 놉의 제사장들과 주민들을 학살하며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자신의 의지를 확고하게 드러냅니다(21:1-10). 다윗은 이제 자신을 따르는 400명의 군사들과 함께 무리를 형성하고 점차 힘을 키워 나갑니다(삼상22:1-5). 그래도 다윗의 목숨을 노리는 사울의 추적은 집요하게 이어졌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사울의 손에 넘겨주지 아니하시니라(삼상23:14). 삼상 24장의 이야기는 다윗 일행이 숨어든 동굴 안으로 사울이 들어와 다리를 쪼그리고 앉아 급한 일을 처리하고 있는 사울의 등 뒤, 어두운 곳에 다윗과 그 부하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부하들이 말합니다. ‘지금이 바로 저 원수를 칠 기회다. 그러나 다윗은 ‘주님께서는 기름 부음 받은 임금에게 손을 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며 사울의 옷자락만을 몰래 자릅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사울이 길을 나서자 다윗이 쫓아나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왜 다른 이들의 소리에 끌려가느냐? 나는 이렇게 당신을 해칠 수 있었음에도 아무런 일도 벌이지 않았다.’ 결백을 주장하는 그는 ‘주님의 판단’(삼상24:13)에 자신을 내맡깁니다. 사울은 ‘네가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다.’(18절)라며 비상한 예언의 말을 합니다. “이제야 네가 반드시 임금이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너의 손에서 일어날 것이다.(삼상24:21)”
2. 왕의 자리에 오른 다윗
사무엘기상 31장은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자 다윗은 헤브론으로 가서 유다 지파의 임금이 됩니다(삼하 2:1-7). 다른 지파들의 연합체인 이스라엘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임금으로 세우지만 곧 그는 살해되고 맙니다(삼하 4:4-8). 이스보셋의 사망으로 다윗은 이스라엘 12지파 전체로부터 왕으로 추대를 받음과 동시에, 왕국 확립 사업에 착수하였다(삼하 5:1-5). 다윗은 우선 여부스사람이 점령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이것을 수도로 삼았다.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언약궤를 옮겨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합니다(6:1-23). 이제 그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이민족을 물리치고 영토를 확장하며, 왕정 체제를 굳혀갑니다(삼하8장, 10장). 이제 모든 것이 자리를 잡고 모든 것이 다 잘 풀려나가는 듯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권력의 맛에 취했나 봅니다.
오늘 우리는 구약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 중 하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이야기를 살펴보려 합니다(삼하11:1-12:31).
(1) 은밀하게 지은 간음죄와 살인죄
이 이야기는 암몬 족속의 성‘ 랍바’라는 성읍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중에 일어난 악한 행위입니다(삼하11:1 12.26-31). 이스라엘의 전군이 출전했고 ‘언약궤’까지 나갔다고 하니, 이는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칠 때와 같이 ‘주님의 이름으로 싸우는 전쟁’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 모두가 전장에 나가 있을 때, 다윗은 저녁 때 한가로이 왕궁의 옥상을 거닐고 있었는데 그는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고는 성적욕망에 사로잡힙니다.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전투에 나간 헷족속 우리야라는 병사의 아내입니다. 남의 부인이라는 것을 알고도 다윗은 그 여인을 불러들여 동침합니다. 집으로 돌아간 여인은 임신을 하고 이를 알립니다(삼하11:2-5). 이것이 7계명 간음죄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전투중에 있는 남편 우리야를 예루살렘으로 부릅니다. 자신의 ‘은밀한’(삼하12:12) 범죄를 숨기기 위해 우리야에게 집으로 가라고 명합니다. 그러나 우리야는 집으로 가지 않고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밤을 보냅니다. 다윗은 그를 불러 왜 집으로 가지 않았냐고 묻습니다. 우리야가 대답합니다.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초막에 머무르고, 제 상관 요압 장군과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의 신하들이 땅바닥에서 야영하고 있는데, 제가 어찌 제 집에 내려가 제 아내와 함께 잘 수 있겠습니까? 저는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삼하11:11)” 우리야는 헷족속, 곧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지만, 이스라엘 다윗왕 보다 더 ‘주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역시나 우리야는 그날 밤도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세 번째로 우리야를 불러 술을 먹입니다. 그러나 우리야는 충직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취중에도 집으로 가지 않습니다(삼하11:13). 초조해진 다윗은 더 악랄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를 죽게 하고자 우리야의 손에 그를 전장에서 죽게 하라는 편지를 들려 지휘관인 요압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우리야는 치열한 전투의 공방 속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다윗왕은 6계명 살인죄를 범한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취하고 아들을 얻습니다. 이제 다윗은 자신의 범죄를 은밀하게 잘 정리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습니다. 그가 벌인 일들은 이미 여럿이 알거나 눈치챘습니다. 밧세바를 궁전으로 불러온 사람만이 아닙니다. 우리야의 죽음을 알리는 전령도 조금은 이상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우리야를 치열한 전투 현장으로 밀어 넣어 죽게 한 요압은 이 사건의 내막을 알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다윗에게 보내는 전령에게 하는 말(삼하11:24)이 이를 보여줍니다. 다윗이 어떻게 반응할지, 그리고 그의 화를 가라앉힐 말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야도 죽었습니다.’ 이 한 마디가 전투에서의 패배 소식을 듣고 분노하는 임금에게서 ‘격려의 말’(25절)을 끌어냅니다. 이들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 계셨습니다. 다윗이 한 짓이 주님의 눈에 거슬렸다.(삼하11:27)고 기록되었습니다.
(2) 회개하는 다윗 왕
주께서 보낸 선지자 나단이 궁전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야기 하나를 꺼냅니다. ‘많은 가축을 가지고 있던 부자가 암양 한 마리를 딸처럼 키우는 가난한 이의 양을 빼앗아 잡아먹었습니다.’ 다윗은 분노합니다. ‘그런 자는 죽어 마땅하다.’ 그러자 나단의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왕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삼하12:7) “어찌하여 너는 주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주님 눈앞에서 악한 짓을 저질렀느냐?”(9절) 주님의 책벌이 예고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다.”(10절) 다윗은 즉시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주님께서 왕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왕께서는 죽지 아니하리이다.”(13절)
그러나 그에 따른 벌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불륜의 아이는 죽습니다. 또한 아들 압살롬이 다른 아들 암논을 살해하는 사건(13:23-37)이 일어나고, 압살롬이 반란(15,1-18)을 일으켜 도망자의 삶을 다시 살아야 했습니다. 아 다윗은 이제 점차 쇠퇴하게 되었을 때는 아도니야가 자칭 왕으로 선포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왕자들의 난이 이렇게 일어나니 다윗의 집안은 칼부림이 끊이지 않게다고 하였던 나단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다윗에 관한 이야기로 후대에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정리한 역대기는 다윗의 부정한 행위와 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역대상 16:37-42 23:1-26,28은 다윗이 성전의 직무와 직제를 편성했다고 하고, 역대상 28:11-18은 성전의 기본 설계도 그의 작업이라고 하며, 성전이 비록 솔로몬에 의해 지어졌지만, 그 모든 기본은 다윗의 업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성전의 토대를 만든 다윗은 위대한 임금이라는 생각에서 그에 대한 부정적인 것은 삭제해 버린 듯합니다.
다양한 재능을 지닌 뛰어난 다윗의 생애는 롤라코스트타듯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다시 깊은 구렁까지 떨어졌다가 올라오기까지 그 굴곡만큼 다채로웠습니다. 그러한 삶의 과정은 그의 혈통이나 배경이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은총(카리스마)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 주님의 은총은 그의 잘잘못에 따라 이어지거나 거두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때로 질책의 말이 주어지지만, 주님의 은총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에게 머물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주님의 은총을 받고 이제까지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택하여 주신 은총은 영원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30세에 통치하기 시작하여 40년 치리했는데, 7년 반은 헤브론에서, 33년은 예루살렘에서 하고, 71세에 사망했다(삼하 5:4,5).
그는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하여 흑암의 시기도 있었으나, 총체적으로 그의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삼상 13:14)이라고 부르기에 합당하였다. 그는 우리아의 일외에는 평생동안 주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왕상 15:5). 다윗은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었다(행 13:36).
3. 다윗왕가의 연속되는 피의 재앙
이제부터 사무엘하 12장에 예언되었던 다윗왕가의 재앙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윗왕이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를 간음한 행위는 용서받았다는 것은 그를 죽이지 않으셨다'로 받아들이면 되지만 중요한 것은 다윗의 범죄로 그의 집안은 한마디로 '콩가루'가 됩니다.
다웟왕의 간음과 우리아를 죽인 것에 대한 그가 받을 벌로
1. 칼이 그의 집에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
2. 그와 그의 집에 재앙을 일으킨다.
3. 그의 눈 앞에서 그의 아내를 빼앗아 그의 이웃들에게 준다고 예언하였는데
나단은 하나님이 다윗의 죄를 사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죄가 사해져서 3가지 예언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그의 간음죄 행위로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였지만 나단선지자가 예언한 것들은 전부 실현되었다고 봐야 한다. 다윗왕의 집안에 재앙의 시작은 간음으로 밧세바에게 태어난 아기는 병이 들어서, 다윗이 그 아기 때문에 칠일 동안 금식하고 애곡했는데도 곧 죽고 말았다.
(1)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하다
압살롬에게는 다말이라는 예쁜 누이가 있었다. 그런데 자기의 형이자
다윗왕의 맏아들 암논(이스르엘여자 아이노함의 아들)은 압살롬의 누이인 배다른 이복 여동생 다말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 암논이 아프다고 간계를 꾸며 누워 병든체하고 다말을 불러 과자와 음식 시중들게 하고 억지로 동침한 후 연애하던 맘보다 더욱 미워하는 미움이 더하여 종들을 시켜 문밖으로 쫓아 내었다. 암논이 쫒아내자 다말이 재를 쓰고 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크게 울며 오라비 압살롬 집에 처량하게 지내고 있었다. 다말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
다말의 오빠 압살롬은, 당장은 참았다. “얘야, 암논도 네 오라비이니, 지금은 아무 말도 입 밖에 내지 말아라. 이 일로 너무 근심하지 말아라.”(삼하 13:20) 다윗 역시 화를 냈지만 어떤 벌도 가하진 않았다.
그래도 가족의 우두머리요 왕궁의 치리자인 아버지 다윗이 정의로운 판단을 내리리라 기대했으나 아버지의 조치는 미미했고, 2년의 시간은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압살롬은 다윗왕이 헤브론에서 낳은 여섯 아들 가운데 셋째입니다. 압살롬은 히브리말로 아브샬롬이다. 히브리어로 아버지를 뜻하는 ‘압’과 평화를 뜻하는 ‘샬롬’을 합쳐 직역하면 평화의 아버지로 곧 다윗을 말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술왕 달매의 딸로 마아가였다. 그술은 갈릴리 북쪽으로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다윗은 정략혼인으로 이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후 태어난 아들이 평화를 지켜줄 아이란 뜻에서 압살롬으로 불렀을 것이다. 다윗왕의 셋째 아들 압살롬 (그술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은 용모가 아름다워 온 이스라엘 중에서도 그에게 비길 사람이 없을 만큼 뛰어났다.
성서가 전하는 압살롬은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가장 아름다워 큰 칭잔을 받고 머리 숫이 많고 무거웠으며 흠 잡을 데가 하나도 없는 미남으로 칭찬이 자자하였다.”(14:25) 이국적으로 긴 머리를 흩날리며 그는 눈에 띄게 자기의 외모를 자랑했다. 실제로 그의 어머니는 이방 사람 아람의 공주였다. 압살롬은 이방 공주의 후손이라는 사실과 함께 썩 좋지 못한 어떤 한계점을 일으켰다. 암논과 다른 형제들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이스라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압살롬은 커가면서 어느 순간 왕궁 안의 서늘한 기류를 느꼈을 것이다. 인물 잘나기로는 왕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 못지않았지만, 그는 결코 ‘성골’이 될 수 없었다. 소외와 수군거림, 따돌림이 어쩌면 압살롬 남매의 일상이었을 수도. 그럴수록 압살롬은 아버지의 따듯한 말 한마디가 그립지 않았을까? 그러나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 냉랭하기만 했다. 압살롬은 살인과는 거리가 먼 듯한, 성경이 공인한 꽃미남이었지만 자기의 친 여동생 다말을 성폭행한 죄 값을 치르게 하고자 온 2년간 복수의 칼을 갈다가 드디어 암논을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에브라임 옆 바알하솔에서 압살롬이 양털깍는 자들을 모아 왕자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푼 자리에서 암논이 술먹고 즐거워할 때 압살롬의 신복들이 암논을 살해했다(삼하29, 33). 이것은 다윗가정의 칼부림이 있을 것이란 예언성취이며 불행의 시작일 뿐이었다. 암논의 죽음 소식을 듣고 다윗왕은 옷을 찢고 땅에 엎드려져 대성통곡하였다. 암논의 죽음은 왕위 계승자의 죽음이었다. 칼은 암논을 찔렀지만, 마음의 분노는 사실 아버지 다윗 왕에게 향했다. 다윗은 진노했고 압살롬은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복 형을 죽이고, 압살롬은 어머니 고향으로 도망간다. 정통성이 없는 아들이기 때문에 다윗은 압살롬이 싫었을까? 어찌 아비가 그러겠는가. 혈통이 중요한 남유다 왕국에서 어차피 소외될 압살롬을 애써 마음에 두지 않으려 했던 것이겠지. 살갑게 대해봤자 나중에 왕위 계승을 두고 왕자들의 난이라도 일어나게 되면 박하게 대할 수밖에 없는 아들이 압살롬이기 때문이다. 압살롬은 어머니 고향 그슬 왕국으로 가서 3년을 숨어 지냈다. 다윗은 날마다 그술로 도망한 압살롬으로 인하여 슬퍼하였다.
(2) 다윗과 압살롬 상봉 삼하 14:28-33
그래도 아들은 아들이었다. 압살롬을 못 본지 3년이 지나갈 때, “다윗 왕은 암논을 잃었을 때에 받은 충격도 서서히 가라앉았고, 오히려 압살롬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점점 간절해졌다.”(13:39)
요압은 압논이 죽은지 삼년이 지나 다윗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그리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요압은 지혜롭고 정치적인 사람입니다. 왕의 마음을 알고 왕에게 동역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알지 못했다. 하나님은 압살롬의 살인으로 노하고 계십니다. 압살롬이 회개하지 않아 하나님의 노는 풀어지지 않았습니다. 요압은 하나님의 마음은 알지 못하고 다윗의 마음만 알고 드고아로 사람을 보내어서 거기에서 슬기로운 여인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부탁합니다. 그대는 초상당한 여인처럼 행동하고 몸에는 상복을 입고 머리에는 기름도 바르지 말고 이미 오랫동안 죽은 사람을 애도한 여인처럼 꾸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왕 앞으로 나아가서 요압이 일러주는 대로 호소하라고 합니다. 요압은 그 여인에게, 할 말을 일러주었습니다. 요압의 지혜로 드고아 여인의 비유를 듣고 다윗왕은 마음을 돌이켜 압살롬을 귀환시켰다. 드고아 여인의 비유의 요지는 이것이다. 즉, 형 암논을 죽인 압살롬은 죽어 마땅하지만(출 21:12-14) 대를 이을 아들인 압살롬을 죽이면 결국 다윗 왕은 두 아들을 다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압의 계책은 결국 압살롬의 반역으로 다윗을 다시 한번 심각한 위기에 빠뜨린 결과를 가져왔다(삼하 15:18). 여기서 우리는 선하게 보이는 인간적인 도움일지라도 자신의 유익을 위한 의도가 숨어 있으면 이러한 도움은 더욱 형제를 어려움에 처하게 함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려 할 때 우리 자신이 먼저 주님께 기도하면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앙망해야 한다.(히 4:12-13). 요압이 압살롬을 예루살렘에 다시 데려왔고 당연히 아버지를 볼 줄 알았으나, “왕의 지시는 단호하였다. ‘그를 집으로 돌아가게 하여라. 그리고 내 얼굴은 볼 수 없다.’ 그리하여 압살롬은 아버지에게 인사도 하지 못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14:24)
그러고도 2년을 더 기다리다 이때 압살롬의 행실에 뭔가 삐딱한 조짐이 드러난다. 온 이스라엘이 그가 잘생겼다고 칭송할 때, 그는 머리를 길러 일년에 한번 밖에 자르지 않았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압살롬에게는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있었다. 그 딸의 이름은 다말인데, 아주 예뻤다.” (14:27) 한없이 아끼는 자기 딸을, 지켜주지 못했던 여동생의 이름으로 불렀다. 사무친 고통에 대한 나름의 치유였을까? 손녀의 이름이 다말이라는 소식을, 다윗은 어떻게 들었을까?
견디다 못해 아들 압살롬이 먼저 터트려 버렸다.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자기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데려온 장군의 집 밭에 불을 지르고 이렇게 호소한다. “이것 보시오. 여기에서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그 곳에 그대로 있는 것이 더욱 좋을 뻔 하였소. 이제 나는 부왕의 얼굴을 뵙고 싶소. 나에게 아직도 무슨 불법이 남아 있으면,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더라고 말씀을 전해 주시오.”(14:32)
오늘 압살롬의 모습을 보면 자신의 의도한 바를 이루기 위해 무엇이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올바른 것이든 올바르지 않은 것이든 자신만을 생각하는 모습이 압살롬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떤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의 성공, 나의 삶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지 않나요? 우리는 세상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 세상에서 보기엔 미련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가야 하는 자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신자라면 누구나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할 것이며, 분명 그것이 신자로서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죄인’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자신을 의로 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낮춤으로서 자신의 의를 보이고자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었다면 그에 따른 행동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죄인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고백하면서도 정작 죄인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보인다면 그는 아직도 자신이 누구인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압살롬은 다윗을 만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요압의 밭에 불을 놓아 요압이 압살롬을 찾아오도록 합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다윗을 만나겠다는 압살롬의 고집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압살롬은 왜 이토록 다윗을 만나고자 할까?
15장은 압살롬의 반역에 대해 기록하였다. 이것을 보면 반역을 하기 전에 백성들에게 다윗이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즉 자신의 득을 위해 다윗을 만나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압살롬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와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기도 하고, 또 단순한 기도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하여 40일 금식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을 만나달라는 것입니다. 결국 죄인이라고 하면서 기를 쓰고 하나님을 만나야겠다고 하는 것이야 말로 죄인임을 모르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압살롬은 이스라엘에서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외모를 가진 자이다. 그러나 그 역시 죄인일 뿐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조건을 가졌다 할지라도 죄인이라는 선언 앞에서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뛰어난 인물 조건, 선행으로 죄인이라는 선언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우리가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는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러한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긍휼을 입었다고 하면서도 긍휼이 없는 자로 살아갈 뿐입니다. 죄인에게 베풀어진 은총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죄인답게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기의 이익을 위해선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압살롬에 대해 성경은 짧게 이렇게 보고한다. “왕이 압살롬을 불렀다. 압살롬이 왕에게 나아가서, 왕 앞에서 얼굴이 땅에 닿도록 절을 하자, 왕이 압살롬에게 입을 맞추었다.”(14:33) 입을 맞추기 전 왕은 압살롬을 책망해야 했습니다. 왕은 살인을 한 압살롬이 죄를 회개하지 않았는데도 그와 입을 맞추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데 용서하는 것은 공의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를 키웁니다.
(3) 드디어 압살롬이 아버지에게 복수하다
다윗과 입을 맞추는 압살롬은 마음속에는 반역을 품고 있었다. 압살롬이 자신의 죄를 생각했다면 다윗의 입맞춤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나 같은 자를 부르시고 입을 맞춰주는 것에 대해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에게는 불러주신 것에 감사가 없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압살롬은 점차 야심을 드러낸다.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자기 앞에 달려갈 자 오십명을 세운 후 왕께 재판 청하러 오는 백성들에게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 온 사람들에게 그가 가까이 가서 손을 내밀어 그 사람을 붙들고 입맞추는 식으로 행하여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하였다. 귀환 후 4년, 기회가 닿자, 압살롬은 왕에게 구실을 만들고 헤브론에 가서 내 서원을 갚게 하소서 하고 그 곳을 근거지로 정하고 추종자 200명과 모사꾼 아히도벨의 가세를 얻어 마침내 고향이며 지지기반이었던 헤브론에서 아버지 다윗왕의 부하들을 데려가서 제사를 지내는 척 하면서 왕 즉위식을 한다. 즉 반기를 든다. 헤브론은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된 장소이기도 하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장소이기도 하다. 이렇게 준비를 거의 마친 압살롬은 다윗의 고문이요, 지혜가 충만한 아히도벨을 자신의 조력자로 만들어서 다윗을 몰아내고 자신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데 큰 원동력으로 삼았다. 삼하 15:10압살롬이 정탐꾼들을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 두루 보내어 이르되 너희는 나팔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통치한다 하라 하니라. 북쪽지파 사람들이 대거 가담하자 세력은 강해졌다. 이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모았기 때문에 민심은 압살롬에게로 돌아서게 되었고,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서 아비 다윗을 죽이려는 압살롬의 계획은 점진적으로 진행 되었다.
한편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거사계획을 세우고자 아히도벨과 함께 이백명의 군사와 12지파의 지지자들로 나팔소리와 함께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손 쓸 겨를도 없이 압살롬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포기하고 떠난다. 자기 아들에 의해 쫓겨나고 나서, 아버지 다윗은 그제야 압살롬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여느 아버지가 그러하듯이 아들의 비행을 아들 탓으로 보려 하지 않았다. “압살롬과 함께 반역한 사람들 가운데는 아히도벨도 끼여 있다는 말을 전하자, 다윗은 기도하였다. ‘주님, 부디, 아히도벨의 조언이 어리석은 것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15:31) 모사꾼 아히도벨 탓을 하며, 심지어 자기 사람들에게는 새 왕인 압살롬을 잘 섬기라고 당부한다. “이제까지는 왕의 아버지를 섬기는 종이었으나, 이제부터는 그의 아들, 새 임금의 종이 되겠다고 말하시오. 그것이 나를 돕는 길이고, 아히도벨의 조언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는 길이오.”(15:34)
실로 아히도벨의 계획은 참람했다. 아버지 다윗 왕의 후궁을 사람들이 보는 ‘옥상’에서 범하라고 압살롬에게 조언한다. 아버지에 대한 극악한 모독이며, 왕권을 찬탈했다는 공개적 선포였다. 아히도벨은 다윗을 뒤쫓아 죽일 계획도 제안한다. 여기서 언급한 모사꾼 아히도벨이 바로 밧세바의 할아버지다. 다윗은 반란에 놀라 소수의 충성스런 백성과 함께 요단의 동쪽으로 피했다.
왕궁에 들어온 압살롬은 작심하고 아버지의 후궁들을 범했다(삼하 16:22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의 눈앞에서 자기아버지의 첩들에게로 들어가니라). 왕위 찬탈을 공적으로 드러낸 행동이었다. 되돌아갈 다리를 끊어 버린 것이다. 다윗의 후궁들은 반란이 평정된 뒤에는 평생을 갇혀 지내야 했다(삼하 20:3 다윗이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르러 전에 그 집을 지키게 하려고 남겨 둔 열명의 여인들 곧 자기 첩들을 데려다가 가두는 곳에 두고 먹을 것을 주며 그들에게 들어가지 아니하매 그들이 이와같이 죽는 날까지 갇혀서 과부로 사니라). 쿠데타가 남긴 또 다른 상처였다.
사람이 위기를 당하게 되면 그 사람의 깊이를 알게 된다고 했다. 다윗은 자식에게 쫓겨나서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상황에서조차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 후새를 압살롬쪽으로 잠입시켜서 자신의 밀정으로 삼는다. 다윗의 두 모사 중 보다 유능한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반란에 가담하였고 충성스런 후새는 다윗을 따랐지만 다윗은 아히도벨의 계략을 깨뜨리기 위해 후새를 압살롬 편에 귀순시켰다. 압살롬에게 간 후새는 아히도벨의 작전계획 즉 이 밤에 다윗을 추격하면 그가 피곤하고 손이 약할 때에 그를 습격하여야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으는 장기작전을 말한다. 압살롬의 허영심을 자극하는 후새의 조언은 먹히고, 아히도벨은 자기의 조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보고 실패를 느끼자 자살하고 만다. 후새의 작전 계획에 따라 대군을 소집하는데 많은 시간이 헛되이 흐르고 그동안 전세는 역전하여 다윗 편으로 기울어져 갔다. 백전불굴의 용장과 군사들은 속속히 다윗에게로 모여 들었다. 결국 압살롬은 부왕이 살던 마하나임 근처 에브라임 숲에서 결전을 벌이게 된다. 왕위의 찬탈자는 대군을 수행하고 있었고 그의 대군에 비하면 다윗의 군대는 소수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왕이 적군을 바라볼 때에 그의 마음에 맨 먼저 떠오른 생각은 왕위도, 나라도, 전쟁에 걸린 자신의 생명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마음은 그의 반역한 아들에 대한 사랑과 동정으로 충만하였다. 군대가 성문에서부터 줄을 지어 행진할 때에 다윗은 충성스러운 병사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승리를 주시리라는 것을 믿고 나아가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지금 이마당에서는 다윗은 압살롬에 대한 그의 사랑을 억누룰 수 없었다. 군대를 인솔하는 요압은 수백번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정복자였다. 그가 그의 군주의 마지막 기별을 듣기 위하여 거만스러운 그의 머리를 숙였을 때에 왕은 떨리는 음성으로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고 말했다. 아비새와 잇대도 동일한 명령 곧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압살롬이 그에게는 그의 나라보다 소중하고 그의 왕위에 충성을 다하는 신하들보다 귀중하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들리는 왕의 호소는 싸우러 나간 장수들에게 인륜에 어긋나는 아들에 대한 군사들의 분개심을 증가시킬 뿐이었다. 다윗왕은 자기를 죽이려고 모반한 아들 압살롬을 왜 너그러이 대접해 달라고 하였을까?
비록 자신을 죽이려고 시도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의 죽음을 보지 않으려 했던 것입니다. 우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조금 보이는 것 같지 않습니까?
(4) 압살롬의 죽음
왕이 된 다윗에겐 시련이 많았다. 가장 혹독했던 건 압살롬의 반란이었다. 다윗이 총애했던 셋째 아들의 모반이었기 때문이다. 예언자 나단은 왕자의 난을 예언한 적이 있다. 다윗이 밧세바에 빠져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죽게 했을 때다.
9 어찌하여 네가 주의 명령을 업신여기고 그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족속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으며 암몬 자손의 칼로 그를 죽였느니라. 10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족속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이제 그런 까닭에 칼이 네 집에서 결코 떠나지 아니하리라. (삼하12 :9-10).
나단이 예언대로 왕자들의 칼부림에 의한 피는 현실로 나타났고 이제는 아들과 아버지와의 칼부림으로 인한 피로 이어졌다.
마하나임에서 전열을 정비한 다윗은 군사들을 정비하고 최고의 장수 요압에게 압살롬과 싸우도록 지시한다. 다윗도 출전하고자 하나 사람들이 출전하지 못하도록 말린다. 다윗은 그 말을 들으면서 모든 장군들과 백성에게 명령한다.
삼하 18:5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지휘관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싸움이 벌어진 장소는 요단강 근처에 있는 숲이었는데 이 곳에서는 압살롬의 군대의 수효가 많은 것이 불리할 뿐이었다. 삼림의 잡목 숲과 늪 가운데서 이 훈련받지 못한 군대는 혼란하게 되고 지휘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요압진영은 기선을 잡고 반란군을 친다.
그날에 이스라엘 무리가 다윗의 신복들에게 패하매 그날 그 곳에서 살육이 커서 전사자가 이만 명에 다다르자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후퇴하다가 머리카락이 나무에 걸려 붙잡힌 것으로 되어 있다(삼하 18:9압살롬이 다윗의 신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의 무성한 가지들 밑으로 지나갈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상수리 나무에 걸리매 그가 하늘과 땅사이에 들리고 그밑에 있던 노새는 가버렸으므로). 정말 그랬을까? 노새가 압살롬을 나무에 달아놓고 가버린 것이다. 왕위가 거부되었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압살롬이 나무에 달린 것도 하나님의 저주를 상징하는 것이다(신명 21:23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니라). 한 병사가 압살롬이 매달려 있는 그를 보았으나 왕의 불쾌히 여기심을 두려워하여 압살롬을 살려 두고 그가 본 것을 요압에게 보고하였다. 요압은 주저하지 아니하였다. 다윗의 장수인 요압은 “손에 작은 창 세 자루를 손에 들고 가서, 아직도 상수리나무의 한가운데 산 채로 매달려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18:14) 다윗이 그토록 부탁했지만, 압살롬은 상수리 나무에 걸려 살해되고 만다. 결국 에브라임에서의 다윗과 압살롬편의 전쟁은 다윗의 승리로 끝난다. 두 번째 다윗왕가의 칼날의 재앙이 이렇게 끝이 난다.
한편 누군가 전쟁 소식을 전하러 온다는 말을 듣고, 다윗은 무언가 불안했는가 보다. 여러 번 이렇게 말한다.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 오느니라.”(18:27) 반역자들을 퇴치했다는 말에 다윗의 첫 물음은 역시 “청년 압살롬은 무사하냐?”(18:32)이었다. 비보를 들은 다윗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했다. “왕이 크게 격동하여 문 너머에 있던 방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는 올라갈 때에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18:33)
다윗은 승전소식과 함께 압살롬의 죽음을 알고 통곡하였다. 왜 울었을까? 밧세바에 빠져 우리야를 죽였을 때 그 보응으로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죽은 것이다(삼하 12:18). 다윗은 압살롬 죽음도 그 연장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죄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다 살해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자신이 죽어야 했다며 눈물을 흘린 것이다. 요압이 말하기를 반역한 아들인데 왜 이토록 슬퍼하는 겁니까? 왕을 위해 생명을 걸고 싸운 병사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다윗은 마음을 추스른다. 다윗의 마음을 너무도 자세히 나타낸 이 성경 구절에서 우리는 다윗과 압살롬에 대하여 그 다윗의 내리 사랑을 마음 속에서부터 깊이 새길 수 있다. 얼마나 사랑하였으면, 자신에게 칼을 겨눠 죽일려고 했던 압살롬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대성통곡을 했을까? 온 왕국의 미래가 걸린 싸움에서도 오직 다윗의 관심은 압살롬이었고, 압살롬은 다윗의 전부였던 것이다. 이것이 부모의 사랑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샬롬 엔 샬롬(평안 그러나 못 평안)은 마트에서 흔히 보는 샬롬 원플러스 원 샬롬이 아니다. 샬롬해야 하는데 전혀 샬롬하지 못했다라는 히브리 말이다. 압살롬의 행적을 생각하면 그가 샬롬 엔 샬롬의 지휘자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 하나님은 평화”라는 뜻의 압살롬의 이름에서 그의 인생은 전혀 샬롬하지 않았다. 형제살인에, 아버지 부정을 넘어선 반역까지! 인간사 패륜 종합편이 압살롬의 삶이었다.
압살롬만 평안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아버지 다윗도 샬롬 엔 샬롬이었다. 다윗왕의 가정사를 살펴본다면 압살롬은 아비의 후궁들을 능욕하고, 암논은 누이동생 다말을 능욕하고, 누이의 오라비는 그 형을 살해하고, 능욕한 아들과 살인을 저지르는 아들을 아비는 바르게 책망하지 못하고, 그런 아비에 아들은 결국 반역을 꾀하고! 이것이 다윗 가문의 흑역사인 것을 말하고 있다.
(5) 다윗왕이 죽음 이후에도 계속된 칼바람
다윗왕의 아들 넷째 (학깃의 아들) 아도니아는 채용이 준수하고 다윗왕이 한번도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번도 저를 섭섭하게 하지 않았다. 아도니아는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 하자 선지자 나단의 요청으로 밧세바가 다윗왕에게 아도니아의 모의를 알려서 다윗왕이 솔로몬을 기름부어 솔로몬왕 만세를 부르고 왕으로 삼았다.
솔로몬의 왕된 소식에 아도니아는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제단 뿔을 잡음으로 생명을 건지고 다윗왕이 죽은 후에 밧세바에게 나아가 소원으로 다윗왕의 여자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내로 삼게 솔로몬에게 말하여 달라는 요청에 밧세바가 솔로몬에게 아도니아의 소원을 요청하자 솔로몬이 모친에게 어찌하여 아도니아를 위하여 저뿐 아니라 그의 사람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도 구하소서 아도니아는 오늘 죽임을 당하리라 말하고 브나야를 보내어 쳐서 죽임을 당하였다. 다윗왕 자녀들의 불효와 왕자들의 전쟁으로 다윗왕은 후궁들과 자식들을 통하여 인간으로서 남자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왕으로서 다윗왕의 인생여정에서 끊임 없었던 눈물의 통곡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왜 아도니아는 다윗왕의 여자 수넴여자 아비삭을 아내로 삼고자 하였는가? 제단 뿔을 잡고 목숨을 건진 아도니아에게 사단마귀는 집요하게 피흘리는 역사를 하도록 만든다. 왕자인 아도니아는 이스라엘에 아리따운 여인이 많건만 하필 아비 다윗의 마지막 여자인 아비삭을 원하고 있으니 이 무슨 괴이한 일이란 말인가?
형 압살롬이 아비의 하체를 드러낸 것처럼 아도니아에게도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게 하려는 범죄를 꾸미고 있다. 마귀의 유혹에 이성을 잃은 아도니아는 성욕에 노예가 되어 발정기의 나귀처럼 밧세바에게 가서 아비 다윗의 마지막 여자인 아비삭을 아내로 줄 것을 요구하게 한 것이다. 밧세바에게 아도니아의 요구를 전해들은 솔로몬은 대노하여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려는 아도니아를 죽인다.
23 그 때에 솔로몬이 주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되 만일 아도니야가 이 말을 하고도 자기 생명에 해를 입지 아니한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24그러므로 나를 굳게 세워 내 아버지 다윗의 왕자에 오르게 하시고 또 친히 약속하신대로 나를 위해 집을 세우신 주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아도니야는 이날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25 솔로몬왕이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의 손으로 사람을 보내매 그를 덮치므로 그가 죽으니라 (왕상 2:23-25)
다윗왕가는 암논이 다말을 강간사건 이후에 근친상간의 마귀가 친입하여 암논, 압살롬, 아도니아의 목숨을 차례로 잃게 만들었다.
4. 다윗과 압살롬을 통해 전해주는 그리스도의 참 사랑
행 13:22 그를 폐하시고 그들을 위해 다윗을 일으키사 그들의 왕이 되게 하시며 또 그에 대해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내었는데 그는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그가 내 모든 뜻을 성취하리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신 것은 다윗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다윗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 우리 죄를 담당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 오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다윗이 압살롬을 위해 애곡하였을 때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이라는 마음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감내하셨던 것이다. 적어도 나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지만, 하나님께는 내가 온 우주 왕국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는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그 사랑이라고 하겠다.
가장 인상 깊은 말씀은 삼하 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부모의 사랑이 모두 이렇게 훌륭하지는 않지만 다윗이 압살롬에 대한 애틋한 사랑은 감동적입니다. 마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도록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다윗왕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가진 지혜와 술수 그리고 여러 계획들로 결국에는 그것이 다윗의 목숨을 위협할 일들이었음에도 다윗은 끝까지 압살롬의 안위만을 생각했다는게 그저 놀라울 뿐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를 탐했던 죄인이었음에도 살려주시고 또 죄인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셨던 그 이면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같아 너무 감동적이다.
다윗 왕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자신을 죽이려고 한 자식이지만 끝까지 내치지 않고 보호하려했던 다윗처럼 하나님께서도 자녀가 아무리 크나큰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모두 다 사랑으로써 감싸주시고 항상 보호하여 주십니다.
다시한번 사무엘기하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보답드릴 수 있는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윗왕은 우리야를 간접 살인하고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는 큰 죄를 범하여 흑암의 시기도 있었으나, 총체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삼상 13:14)이라고 부르기에 합당하였다. 그는 우리아의 사건 외에는 평생에 주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왕상 15:5). 다윗은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었다(행 13:36).
그가 인류에게 준 감화는 너무나 크다. 그의 시편은 몇 세기에 걸쳐 그리스도 교회에서 애창되어 그의 영적 영향이 후대에 까지 미치고 있다. 다윗이야말로 다음에 오신 `다윗의 자손'임과 동시에 `다윗의 주'이신 분을 위해 그 조상들의 계보 사슬 중에서 특히 중대한 고리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마 1:1,22:4145).
바벨론의 포로 이후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품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야를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의 왕국을 재현할 이상의 왕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또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던 것이다(삼하 7:12네 날들이 차서 네가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배속에서 나올 자 곧 네 뒤를 이을 네 씨를 세우고 그의 왕국을 굳게 세우리니). 이와 같은 배경에서 메시야는 다윗의 가계와 연결되는 관계상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그러므로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야의 칭호이다.
마태의 계보(마 1:1)는 물론 바울도 로마서 1:3에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씨)에서 나셨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자칭한 일은 없지만, 최후의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소경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르는 것을 기쁘게 받아 들이셨다(막 10:47). 다윗은 앞으로 오실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였던 하나님의 사역에 택함 받았던 위대한 사역자 이였다.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10-2 무덤속에 있던 나사로를 불러낸 생명의 예수님 (0) 2018.10.14 18-10-1 다윗과 요압 (0) 2018.10.07 18-9-4 추석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추수감사를 드리자 (0) 2018.09.23 18-9-2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종말의 징조 (0) 2018.09.09 18-9-1 지구 자전을 멈추게 한 히스기야왕의 기도 (0) 2018.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