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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 추석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추수감사를 드리자말씀 2018. 9. 23. 12:35
추석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추수감사를 드리자
눅 18:18-23 신16:13-17
평년보다 일찍 맞이한 추석인데도 잘 익은 과일들이 풍성하고 곡식들의 결실이 좋아 글자 그대로 ‘한가위만 같아라’ 하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명절 추석은 농사를 지은 후 수확한 것에 대한 기쁨의 행사로 음력 8월 보름을 맞아 그동안 헤어졌던 가족들이 만나 가족 간의 우애와 사랑이 더욱 돈독해지는 명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선 추석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예, 감사하는 날이라는 생각이 제일 많이 날 것입니다. 그래서 추석 때만 되면 사람들이 선물을 많이 삽니다. 다른 때는 자녀나 애인에 대한 선물이 많지만, 추석 때는 감사용 선물이 많은 것을 보면 확실히 추석은 감사하는 때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감사해야 할 대상이 누구이며 무었 때문에 감사하여야 하는가?”하는 것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원래 추석은 농경사회에서 1년 추수에 대한 감사제로 드리는 명절입니다. 모양은 다르지만 어쨌든 우리 모두는 2018년이라는 한 해 동안 직장이나, 가정, 학교에서 모두 농사짓듯이 열심히 일하며 살아 왔으니 마땅히 감사할 대상을 찾아 감사하는게 당연합니다.
첫째, 제일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목자되신 하나님이 우리를 세세히 돌봐 주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동자처럼 지켜주지 않았다면 오늘같은 이 기쁜 날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추석을 맞아서 우리를 세세히 보살펴 주시고 인도해 주신 주 하나님께 기쁨으로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부모님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바로 부모님입니다.
우린 모두다 부모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받았고, 부모를 통하여 자라가며, 부모님 때문에 성장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더 줄게 없는가를 생각하는 게 부모입니다. 버림을 받으면서도 결코 자식을 버리지 못하는 게 부모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삽니다. 따라서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매일 감사하여야 하지만, 오늘 어버이 날이 아니더라도 감사의 날 특별히 눈에 보이는 부모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돌아가셔서 올 수도 없는 죽은 부모에게 제사상 잘 차려드릴 것이 아니라 살아계실 때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하나님이나 부모에게 감사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오히려 반려동물 같은 어뚱한데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한 해 첫 수확에 대해 감사하고, 이를 가족 및 이웃과 나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추석은 이미 고대시대부터 한 해의 농사를 마치고 그 결실을 맺게 해준 하늘에 감사를 지내던 ‘풍농제’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고려시대부터 이 풍농제는 하나의 절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국가적 행사로 추석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한가위는 그 동기가 농사의 결실을 맺게 해준 하늘에 감사를 드리는 의식에서 비롯된 만큼 기독교의 추수감사절과 통하는 부분이 많다. 기독교의 추수감사절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천신만고 끝에 2달만에 북미땅에 도착한 102명의 청교도들은 혹독한 첫 겨울의역경을 지나면서 절반은 죽고 살아남은 51명이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려 첫 추수를 하게 되었던 것에 대한 감사의 예배를 드린 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라 할 수 있다. 이후 조지 워싱턴 대통령, 링컨 대통령에 의해서 매년 11월 마지막 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다. 한국교회는 미국장로교회의 전통을 따라 11월 셋째 주를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다. 신명기에 기록된 수장절에서 볼 수 있듯이, 한해 농사를 마무리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절기인데 우리가 드리는 추수감사절은 겨울이 시작되는 11월에 지켜지면서, 본래의 의미인 첫 수확을 하나님께 드리는 추수감사절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
한국에서의 첫 수확은 9월이나 10월인 추석때가 되기 때문에 우리민족 고유인 한가위를 기준으로 추수감사절로 정하다면 무난할 것이라는 교회도 있다. 기독교의 한국적 토착화에 관심이 있는 목회자들에게는 교회의 추수 감사절을 추석 명절에 지키는 것도 오히려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실제 한가위를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교회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키자는 것에 무조건 거부하기보다 지혜를 살려서 추석의 진정한 의미를 통해 온 가족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추석명절을 통해 금년 한해에도 오곡백과를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할 수 있는 추수감사의 기회로 변경한다 하더라도 비성경적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적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감사를 받으실 대상은 누구냐 하면 농사를 잘 지으려면 뭐니 뭐니 하여도 햇빛과 비가 제 때 와야 풍년이 드는 것인데 그러면 햇빛과 비를 하늘에서 주시는 분이 창조주 하나님인 것을 무조건 거부할 것이 아니라 우주 만물의 주인으로서 일기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면 이미 추석 모임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청명한 가을에 맞는 한가위인 추석은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가을에 첫 추수한 것을 가지고 한해 농사를 잘 짓게 해 준 하나님께 감사해야하는데 하나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감사하는 대상이 돌아가신 조상께서 그렇게 해준 것으로 알고 돌아가신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햇곡식으로 송편을 만들고 햇과일도 제사상에 놓기도 하며 돌아가신 조상님께 감사의 표시로 제사를 드리는 것인데 가까운 이웃 나라들의 추석은 어떤 모습일까?
달에게 제사를 지내는, 중국의 ‘중추절’
음력 8월 15일은, 가을의 한가운데이므로 중추절이라고 부른다. 중국의 중추절은 일찍이 주나라 때 이미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달을 향해 절을 하는 의식이 있었다고 하니 중국은 우리의 조상대신 달에게 추수의 감사를 드린다는 것이다. 달에 제사를 지내거나 달을 쳐다보며 소원을 비는 놀이가 ‘달맞이’다. 제사상에는 둥근 달의 모양을 본떠 만든 월병을 놓는데, 월병은 ‘가족이 함께 모이다’라는 의미를 지니며, 다양한 문양을 찍어 내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송편을 먹지만 중국은 월병을 먹는다고 한다.
조상의 영혼을 맞아들이는, 일본의 ‘오봉’
오봉은 원래 음력 7월 15일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양력 8월 15일에 치른다.
조상의 영혼을 맞아들여 대접하고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날로, 불교에서 유래되었다. 대표적인 행사는 무카에비로, 조상의 영혼을 맞이하기 위해 묘소나 강가, 길거리, 대문 등에서 불을 피우는 것이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봉오도리라는 민속춤의 하나인데, 마을 사람들이 저녁에 ‘유카타’라고 하는 무명 홑옷을 입고 마을 광장에 모여, 통나무로 짜 만든 높이 3~4미터 정도의 ‘야구라’라는 망대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춘다. 이는 저승에서 찾아온 조상의 영혼들이 이승에 있는 후손들과 함께 즐겁게 춤을 추고 다시 저승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수확을 감사하며 음식을 나누는, 미국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
미국의 추수 감사절의 유래는 1620년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청교도들이 영국에서 메이플라워(May Flower)호를 타고 2달간의 항해를 걸쳐 1620년 11월 19일에 미국 동해안 프리머스(Plymouth)에 도착했는데 건너간 청교도들이 겨울에 추위와 기근으로 죽기도 하였는데 살아남은 51명이 이듬해 가을 첫 수확을 거두었을 때, 우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올리고 도움을 준 인디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눈 데서 유래한다. 주요 음식으로는 칠면조와 그레이비가 얹어진 으깬 감자, 호박파이가 있다. 이 음식들은 실제로 초기 추수감사절부터 먹어오던 음식들이다.
미국 뉴욕 102층짜리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꼭대기에 오를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이 빌딩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지의 땅을 밟은 102명의 청교도들을 상징한다는 기념으로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상륙한 102명중 첫 겨울을 보내면서 절반이나 굶어죽고 추위에 얼어 죽고 병에 걸려 죽어 갔지만 힘겹게 살아남은 그들은 원주민들이 준 옥수수 씨앗으로 첫 농사를 지어 추수해다 놓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먼저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드릴 것이 옥수수밖에 없어 죄송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칠면조가 지나갔다. 청교도들은 칠면조를 잡아 배부르게 먹었다고 하면서 청교도들의 후손인 미국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 추수감사절마다 칠면조를 먹는다. 미국은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11월 넷째 목요일을 공휴일로 정하고 그 다음날은 Black Friday로 Thankgivings을 지켜오고 있다. 세계에서 추수 감사절을 공휴일로 지키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우리의 추석처럼 주일이 아닌 주중의 가족 중심의 절기이다. 미국과 인접한 캐나다는 미국의 추수감사 문화를 공유하면서도 그 날짜는 11월 넷째 주 목요일이 아닌 10월 둘째주 월요일로 정하였다. 대부분의 한국교회에서 11월 3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게 된 것은 미국서 온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한국의 추수감사주일을 추석과 가까운 주일이나,쌀의 추수 시기를 고려하여 10월달로 드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어 이제는 재고되어야 한다. 어떤 교회들은 해마다 각 형편에 따라 임의로 정하기도 하므로 비기독교인들은 진짜 추수감사주일이 언제냐고 물으면 통일되지 않은 기독교 감사축제를 의아해하기도 한다. 아직까지 이런 이유로 추수감사 날이 기독교 감사축제로 발전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보다 한국적인 추수감사예배를 위해 한국교회들이 다시금 그 날짜와 문화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만 한다.
하루 이용료 3만∼5만원…추석 연휴 한 달 전 예약 완료
이승민 기자 = 트윈침대에 부드러운 순면 이불, 대리석 모양의 고급스러운 벽지와 푹신한 소파가 있는 VIP룸. 평소 먹던 식사를 주지만, 입맛이 없을 때는 특식도 제공. 냉난방 시설은 물론이고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놀이 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황금 연휴를 보내기 안성맞춤이다.
역대 최장 추석 연휴를 즐기기에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특급호텔이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에는 사람이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긴 연휴 귀성길에 오르거나 여행을 떠나는 주인들이 반려동물을 맡기는 애견호텔이다.
추석때가 되면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 한 애견호텔은 반려견들로 북적였다.
이 호텔 16개 객실은 추석 예약이 한 달 전 이미 마감됐다. 하루 숙박비는 3만∼4만원이다.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의 애견호텔도 열흘간의 추석 연휴 예약이 한달 전에 모두 끝났다. 애견호텔을 3년째 운영하는 김건민(35)씨는 "황금연휴를 맞아 평소보다 2∼3배 많은 양의 문의 전화를 받고 있다"면서 "여름 휴가철이나 설·추석 같은 명절에 강아지를 맡기려면 최소 한 달 전에 예약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전국적으로 어림잡아 800∼900여개로 추산되고 있는 반려동물 위탁업소들이 역대 최장의 추석 연휴를 맞아 연중 최대 성수기를 맞고 있다.
성경에는 추수한 것에 대한 감사로 드리는 절기로 수장절이 있다. 추수한 수확에 감사하고 기쁨을 나누는 절기인 수장절은 추수를 한 것에 대한 감사하는 절기이다. 네가 밭에 뿌린바 네 수고의 첫열매의 수확절을 지키라 이는 밭에서부터 수고하여 얻은 것을 거두어 들인 때 곧 한해의 끝에 있는 수장절을 지키라(출23:16). 추수에 감사하는 이스라엘의 수장절은 1주간의 초막생활을 통해 조상들이 광야에서 겪었던 고난에 대한 공동체적 기억을 되살리는 절기이므로 초막절로도 불리기도 한다.
매년 맞이하는 추석을 어떻게 보내야 좋겠는가?
첫째, 죽은 조상들 추모하는 문화에서 산 가족들이 함께 기뻐하는 문화로 바꿉시다.
돌아가신 조상에게 제사하고 성묘하는 추석은 죽은 자들을 위하는 것인데 한번 죽었던 영혼은 다시 그 자리에 올 수 없으며 성경말씀대로 인간이 죽으면 육은 흙으로 되고 영은 구원받았으면 천국으로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으로 내려가는데 한 번 간 영혼은 그곳에서 세상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죽은 자를 위한 제사는 한마디로 주인공 없는 잔치와 같다고나 할까? 그렇지 않습니까?
둘째, 조상에게 종속된 과거 지향적 문화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대하는 미래 지향적 문화로 바꾸어 나갑시다.
미래지향적 문화는 앞날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문화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앞의 일을 모르기 때문에 늘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데 미래를 보장하는 하나님을 믿고 사는 날까지 두려움 없이 평안히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시 50:23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셨는데 그 앞절인 22절에는 정반대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가 없으리라. 그래서 오늘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몰라 가정이 찢어지고 사업이 찢어져 파탄되는 것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빨리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해 주시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교인들 중에서도 좋은 일 생길 때만 감사하는 사람이 있고 좋은 일이 생기어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도 있으며 또 모든 일에 감사하고 지난 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서도 하나님께 미리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감사를 선행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 생각에는 어떤 사람이 감사에 대한 인생의 모델이 되겠는가요? 주님께서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사람이 항상 미래 지향적인 문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먼저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며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감사에 대한 말씀을 선포하고자 합니다.
1. 누가 감사를 할 수 있는가?
(1) 과거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전에 레디 엘진(Lady Elgin)이라는 배가 침몰되었을 때 스펜서(Spencer)라는 청년이 물에 빠져 죽게 된 사람 17명을 구출해 낸 일이 있었다. 그 후에 청년에게 살려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러 오는 사람이 몇 명이 되더냐고 물었더니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이 빈말이 아닙니다. 과거의 은혜를 기억해 낼 줄 아는 사람이 앞날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사랑으로 돌봐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은혜를 기억할 줄 모르는 사람은 미래의 감사는 결코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잘 살게 될 때 나를 잊어버릴까 두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 8:11-14에 "주 네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아니하도록 조심할지어다 12 네가 먹어 배부르게 되고 좋은 집을 짓고 그 안에 거하며 13 또 네 소 떼와 양 떼가 번성하고 은금이 크게 늘어나며 네 모든 소유가 크게 늘어날 때에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신16:12에 네가 이집트에서 노예였음을 너는 기억하고 이 법규들을 지키고 행할 지니라. 칠칠절에 힘을 다하여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어서 "너는 이집트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과거에 자기가 가난하고 비참했던 것을 늘 기억하는 겸손한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롬 6:17-18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죄의 종이었으나 너희에게 전달된 교리의 그 틀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고 18 이로써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예수믿기 전에는 우리들이 죄의 종으로 멸망 받아 마땅한 우리자신들 이었는데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을 기억한다면 감사는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과거에 얼마나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죄인이었던가 하는 것을 늘 기억하는 사람이 참으로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비천하고 사악한 죄인이있던 과거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셋째 하늘나라에 올라가 보기도 하고 신약 성경의 3분의 2를 기록한 정말 예수님 외에 최대의 인물이면서도 늘 겸손 할 수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자라'고 했으며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라고 하면서 겸손히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추수감사는 지난 한 해동안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없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감사는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롬8: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성공이나, 실패나, 무슨 일이 잘 될 때나 잘 안될 때나 하나님께서 결국은 미래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먼저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대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에 항상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를 보면 그가 형들의 질투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것도,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것도, 임금의 술 맡은 관원이 2년동안이나 자기를 잊어버리고 있던 것도 다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고 축복하시려고 하신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죤 밀턴(John Milton)은 44세때 눈을 실명한 뒤에 위대한 작품 실락원을 썼습니다. 그는 '주께서 내 육안을 어둡게 하시고 오직 주님만 볼 수 있도록 신령한 눈을 열어주시니 감사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기쁠때나 슬플때나 항상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420년전 영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영국의 왕은 메리 여왕이었는데 그는 천주교인이었기 때문에 개신교를 많이 핍박했습니다. 그때 많은 목사님들이 체포되었습니다. 그 즈음 영국 군인이 길빈 목사를 체포하려고 갔더니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체포해가는 영국 군인이 무엇을 그렇게 감사하느냐고 했더니 "예수님을 위해 핍박을 받으면 장차 하나님께 받을 상이 크니까 감사하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잡혀가다가 넘어져서 큰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또 감사하다고 기도를 했습니다. 후에 완치되어서 퇴원하기 직전에 메리 여왕이 죽고 1558년 독실한 그리스도인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했고, 길빈 목사를 포함한 투옥되었던 교인들이 다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고차원적인 감사는 제일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입니다.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 과거의 비천했던 자기를 기억하며 겸손한 사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믿는 사람만이 이런 고차원적인 감사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들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미국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의 날짜를 따라서 지키고 있으나 원래 성경의 추수를 마친후 드리는 수장절은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우리 추석이 더 의미 있는 감사절이 된다는 것이다. 그 해에 가을에 거둬들인 처음 곡식들로 은혜를 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추수감사 예배라면 추석을 맞아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하는 교회는 많지 않고, 아직까지는 여전히 11월 셋째 주일에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대다수다. 그러나 우리 행복침례 교회는 우리민족의 고유명절인 추석이 성경을 통해 보니 이스라엘이 연중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수장절이 우리의 추석과 거의 일치함을 알고 추석을 맞이하여 추수감사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2. 초막절과 추석은 일치한다.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절기가 유대력으로 정월의 유월절, 삼월의 칠칠절, 그리고 칠월의 초막절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절기는 정월의 설 과 팔월의 추석이다. 그런데 뿌리를 찾아보면 추석의 유래가 초막절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월 설 명절은 새해가 시작되는 연초에 지키는 年頭절기이고 추석은 한 해의 농사를 다 짓고 연말에 지키는 감사의 절기이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의 설 명절이 유월절로부터 해가 새롭게 바뀌는 신년 명절이었고, 초막절은 일년 포도농사를 다 지은 후에 그것을 창고에 저장해 놓고 온 백성이 함께 지키는 연말 감사의 절기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초막절과 추석은 유사한 정도를 넘어서서 거의 일치한다.
(1) 절기상의 날짜가 일치한다.
우리나라의 추석은 음력으로 8월 보름을 말한다. 음력은 청나라 초기의 시헌력을 따른 것이다. 초막절은 유대력으로 7월 15일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년을 바벨론 달력을 따라 밤과 낮의 길이가 평등한 춘분점에 맞추어 니산월을 정월로 삼아 왔다. 그래서 그 니산월, 즉 정월 보름에 그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일곱 번째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즉 50일째 되는 날에 둘째 절기인 칠칠절, 즉 오순절(7×7+1=50)을 지켰다. 그리고 또 일곱 번째 맞는 달 보름달을 기념하여 티쉬리월 15일에 세 번째 절기인 초막절을 지켰던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초막절이 오늘날과 같이 7월(Tishri월) 15일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유대력으로 7월 15일에 지켜지는 초막절이 우리나라의 음력 8월 15일에 지키고 있는 우리의 추석과 항상 같은 시기, 같은 날짜에 만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유대력이 시헌력 보다 한 달이 늦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추석과 초막절은 항상 그 날짜의 때가 일치한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의 달력이나 유대인의 달력 중 어느 한쪽에 윤년이 들어 있는 해에만 한 달의 차이가 나고 있을 뿐이다.
(2) 달밤을 즐기는 명칭에서 일치하다.
우리들의 하루 생활의 시작은 아침에 시작하여 저녁에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유대인들의 하루는 저녁에 시작하여 다음날 해가 떨어짐과 동시에 끝이 난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첫날에 모든 것을 창조해 놓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니라’고 하셨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항상 하루가 시작되는 그 저녁이 중요했다.
따라서 예배에 있어서도 그들에게는 아침 예배보다 저녁 예배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절기 행사에서 말할 것도 없이 저녁 행사가 모두 중요했다. 그런데 그 저녁이란 언제나 해가 서산에서 떨어지고 달이 동산에서 떠오르는 시각에 시작이 된다. 그래서 그들에게 달밤이 그렇게 중요했으며 또 달놀이가 그렇게도 중요했던 것이다. 일찍부터 태양을 섬겨오던 옛날 애굽 사람들이나 서구 사람들이 해뜨는 것을 중요시하는 생각과는 아주 정반대인 것이다.
초막 절기에 지키는 전통적인 이들의 저녁 행사 속에는 특별히 일곱 가지로 뻗은 촛불로 성전을 밝히는 일이 있었고, 또 그 촛불 밑에서 함께 횃불 춤을 추는 춤 놀이가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여인들의 뜰에서는 15계단을 내려가면서 계단마다 시편 노래 한 곡씩을 부르며 함께 내려가는 춤놀이가 있었는데 이 거룩한 밤의 행사는 7일 동안 이렇게 밤을 지새우며 계속 되었다. 유대인들의 이런 행사는 마치 우리 민족이 추석날 밤에 지켜 오고 있는 달맞이, 횃불놀이와 너무나도 같다. 우리나라 추석의 그 명칭을 보면 가을 추(秋)자와 저녁 석(夕)자로 되어 있다. 가을 저녁이란 뜻이다. 아침도 아니고 대낮도 아니라 저녁이라는 뜻이다. 이 또한 얼마나 놀라운 명칭인가?
(3) 고향을 찾고 조상을 기억하는 풍습이 같다.
유대인의 3대 절기 가운데서도 특별히 이 초막절은 고향을 떠나 나가 살고 있는, 흩어진 모든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은 그들의 율법 명령에 따라 이 때에 한 번씩은 반드시 예루살렘을 방문해야 하는 순례의 절기이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매년 한 번씩 조상과 고향을 찾고 또 조국을 찾는 그들의 전통과 습관이 된 것이다. 특별히 북왕국 이스라엘 사람들, 즉 사마리아 사람들이 지켜오던 5대 신앙을 보면 그 가운데는 아주 중요한 조상성자 신앙이라는 것이 있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유전시켜 준 자기 조상들(즉 하나님-아담-셋-에노스-노아-아브라함-이삭-야곱-모세-아론-엘르아살-비누하스-여호수아-갈렙-70장로들에게 까지 내려오다가 엘리 제사장의 배교로 중단이 되고 말았다고 하는 이와 같은 조상들)을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의 조상 성자로 숭배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들이 바로 이런 조상들의 은덕을 받고 있는 자들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심 산에 있는 그 조상의 무덤을 찾아 순례를 하며 매년 세 차례씩 절기 때마다 반드시 그 신령한 산을 찾고 있던 것이다(신 27:12, 수 8:30-35).
그런데 일찍이 동북아시아 산간지대와 인도와 중국으로 이동해 온 유대인들이 바로 주전 710년 시리아 왕 산헤립의 사마리아 침공으로 인해 북쪽으로 사로잡혀 갔던 살던 이스라엘의 후손들이라고 역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항상 이 절기를 지켜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성서를 보면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들을 가리켜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이라고 하셨다(마 10:5-).
또 이 절기에 순례를 하지 못하는 자들은 누구나 자기 집 곁에 초막을 짓고 전 가족이 그 속에 들어가 절기를 지켰다. 바로 그것은 옛날 광야에서 나그네로 장막을 치고 살았던 자기 조상들의 삶을 그들이 기억해 보는 의미였고, 조상들의 장막 생활을 잊지 않고 그것을 더욱 기리려는 뜻이었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인생의 깊은 진리를 바로 이 광야의 장막 생활에서 깨닫고 터득하며 살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추석이 되면 누구나 조상의 무덤이 있는 자기의 고향을 찾아 순례의 길을 떠난다. 그것은 고향에 가야 조상의 무덤을 볼 수 있고, 고향에 가야 부모의 산소를 찾아 벌초도 하고 성묘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추수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행사이다.
이 절기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린 헌물은 곡식이 아니라 열매, 즉 추수해 드린 포도와 감람열매였다. 이때에 가나안 지역의 수확 시기는 밀이나 보리 때가 아니라 포도철이었기 때문이다. 3대 절기 중에서 무교절, 즉 초실절에는 밀을 드리고, 칠칠절, 즉 맥추절에는 보리를 드렸으며, 수장절인 초막절에는 올리브와 무화과 그리고 포도열매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이다. 이것이 가나안 농경문화에 따른 감사 예물이었다. 그러나 이런 절기일지라도 가축을 치는 일부의 사람들은 양이나 짐승을 드려 이스라엘의 유목 문화적 전통을 그대로 고수해 오기도 했다.
한편으로 우리나라 추석 절기에도 보면 고향을 찾아 성묘를 하는 조상 숭배 신앙의 그 추석 전통이다. 그래서 가정마다 조상에게 감사의 차례를 지내고 산소를 찾아가 성묘를 하며 모든 감사를 먼저 조상님께 드렸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마을은 잔치를 벌리며 각종 놀이 행사에 참여를 했다. 이런 것은 같은 중국의 유교 문화권 안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오직 한국인들에게서나 찾아 볼 수 있는 독특한 현상이다. 다만, 하나님을 잘 몰랐기 때문에 조상신이나 허튼 신들에게 감사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5) 초막절과 추석은 외래적 토착성이 같다.
본래 이스라엘의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으로부터 약 3200년 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문화를 만나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이뤄진 감사절 문화이다. 본래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수장절(收藏節, asiph)이라는 농경 문화적 감사절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장막절(帳幕節 Pavillon)이라고 하는 그들의 유목 문화적인 독특한 문화를 갖고 들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가나안 문화와 결합되는 과정 속에서 제3의 문화가 나타나게 된 것인데, 그것이 바로 오늘의 초막절(草幕節, Sukkah)이다. 그러므로 가나안 사람들이 볼 때에 이 초막절은 확실히 외래적 토착 문화였다(문서설의 창시자 그래프 웰 하우젠의 주장).
마찬가지로 우리의 추석 문화도 보면 그것 또한 외래문화였음을 분명히 알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추석 명절에 대한 이름이 두 가지로 전승되어 온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추석’과 ‘한가위’라는 이름이다. 추석은 후기에 들어온 외래문화였지만 한가위는 시초부터 본래 우리 땅에서 생겨 난 토박이 문화였다. 다시 말해서 이 가위 혹은 가배 문화가 신라 유리왕 때부터 지켜 내려온 순수한 우리의 전통 문화였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보면 “유리왕 9년에 왕이 6부를 정한 다음 이를 둘로 나누고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기 부내의 여자를 거느려 편을 지어 가을 7월 16 일부터 일찍이 대부의 뜰에 모여 길쌈을 하고 한밤중에 파하되 8월 15일에 이르러 그 성적의 다소를 심사하여 패한 편이 주식을 장만해서 이긴 편에게 사례를 하게 했다. 이에 노래와 춤과 온갖 놀이가 벌어졌는데 그것을 가배라고 하였다고 했다. 이 가배가 곧 오늘날 8월 보름에 지키는 한가위 명절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그 때에 이 명절의 성격을 보면 처음부터 그 문화가 바로 순전한 스포츠 문화였다는 사실이다. 길쌈놀이의 경기를 하고 또 춤을 추며 노래하고 즐겼다는 그 자체가 바로 오락 문화였음을 여실히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지키고 있는 추석을 보면 그 성격이 저 가배문화와는 완전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말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추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추석-한국 명절의 하나. 음력 8월 15일. 중추절, 가위, 한가위라고도 한다.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는 명절로 햅쌀로 송편을 빚고 햇과일 등 음식을 장만하여 조상에게 차례를 지낸 다음 성묘와 벌초를 한다.”
이것을 보면 추석은 확실히 오락 문화가 아니라 참으로 하나의 경건한 종교 문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배의 전통과는 완전히 다른 또 하나의 이질적인 별개의 전통인 것이다. 그러므로 추석은 경기나 오락의 스포츠 문화가 아닌 종교적 감사제의 문화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전통이 신라 유리왕 때부터가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러면 그것이 언제부터였으며 또 어디서부터 들어온 문화일까?
추석이 외래문화라는 점은 이 추석명절이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에도 있고 일본에도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중추절이라는 이름으로 이 팔월 보름을 명절로 이미 지키고 있고, 일본에서는 오봉이라는 이름으로 이 팔월 보름을 명절로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추석을 우리만의 고유문화라고 결코 말할 수가 없게 된다. 때문에 할 수 없이 우리는 여기서 이 추석을 밖으로부터 들어와 우리의 한가위 문화 속에서 토착화된 하나의 외래문화라고 정의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추석이 외래문화라고 보는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우리나라 추석이 감사절 문화라면 그것이 감사절답게 우리 계절에 꼭 맞았어야 한다. 그런데 추석은 우리의 계절에 맞지 않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추석이 감사절의 축제 문화라면 추수 열매를 다 창고에 거둬들인 다음 마치 이스라엘의 수장절처럼 곡식을 모두 수장시켜 놓은 뒤 한가한 때에 축제가 열리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우리의 추석은 현재 추수 때에 비하여 때가 너무 빠르다. 그래서 신라의 이 한가위 절기만 빼고 우리 민족의 다른 절기 문화들을 보면 고구려에서는 추석보다 2개월이 늦은 음력 10월에 동맹(同盟)이라는 이름으로 제천제(祭天際)를 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예멘에서도 10월에 무천(舞天)이라는 이름으로 제천제를 드리고 있었다. 부여에서는 추석보다 무려 4개월이나 더 늦은 12월에 영고(迎鼓)라는 이름으로 감사제를 올리고 있었다. 이런 문화들이 바로 우리 땅, 우리 기후에 절기가 맞는 바로 신토불이 문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추석 절기가 오히려 길쌈놀이(삼베)의 본체인 가배 문화에는 그 때가 꼭 맞고 또 이스라엘의 포도 절기 문화에도 초막절은 그 때가 꼭 맞는다. 그런데 다만 추석이 우리 땅에서 추수절기로서만 그 시기가 맞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추석은 한반도 땅의 고유문화가 아니라 일찍이 한반도 땅에 들어온 성서적 외래문화임이 분명하다.
3. 누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까?
(1) 인생의 큰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이 감사할 수 있다.
때로는 질병을 통해서, 때로는 사업의 어려움을 통해서,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시련과 고독한 싸움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를 힘들게 하는 때가 정말 주님이 가까이 있는 것이므로 주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통해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누가복음 17장 속의 문둥병자들을 보면 10명이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저들은 그 시대의 난치병 환자들이었어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죽을병을 몸에 짊어진 버려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느 날 주님을 만나면서 자신의 삶의 가장 큰 문제인 문둥병이 치료되었습니다. 저들은 주님께 (눅 17: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러분, 긍휼을 요구하는 문둥병자들에게 주님이 구체적으로 내려주신 긍휼이 뭐였어요? (눅 17:14)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아멘입니다.
주님 당시엔 문둥병자가 혹시 그 병이 나았다 해도 완전히 낫게된 선언은 의사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들만이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 한것은 ‘너희 몸이 치료된 것을 가서 보여주고 이제는 모든 질병으로부터 풀려나 해방을 누리라’ 이것이 우리 주님의 뜻이었어요. 저들은 제사장에게로 가는 길에 치유를 받았습니다. 자신의 몸에 구체적으로 임한 주님의 긍휼을 몸으로 체험했고 누가 뭐라고 해도 저들은 주님의 손길을 직접 체험한 것입니다. 남이 가르쳐줘서 안 게 아니라 스스로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내 삶에 주님의 사랑흔적을 경험한 자는 오늘도 주님을 향해 감사를 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누가 감사할 수 있습니까?
(2) 은혜를 주신 분에게 관심을 둔 자가 감사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은혜가 주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아는 자들만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눅 (17:15-16)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여러분, 잘 보세요. 고침 받은 것은 열 명인데 돌아와 감사한 것은 한 명뿐이었다는 것은 고침은 다 받았지만 그렇다고 다 감사한 것은 아니었어요. 열 문둥병자 중 사마리아 문둥이 한사람만 감사했어요. 내가 고침받은 것을 아는 것보다 치유해 주신 분을 먼저 생각한 한 사람만 돌아와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많은 걸 소유하고 있어도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에만 집착하고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감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소유보다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이 기막힌 사실에 초점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지극히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할 수 있으며 아무리 어려운 환경 속에 처박혔어도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아멘.
여러분, 여러분은 감사하며 사는 자입니까? 감사를 상실하고 사는 자입니까?
문둥병자 중의 한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역사보다도 그것을 주신 우리 주님에게 더 큰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그 한 사람만이 돌아와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도 세상 살아가면서 여러분의 주머니에 수입이 생길 때 그 물질만 보고 기뻐하지 말고 그 물질을 주신 분을 생각하고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입에서 작은 것 하나를 받고도 먼저 감사가 터져 나올 것입니다. 이것이 감사의 진리입니다. 또, 누가 감사할 수 있습니까?
(3) 우선순위를 아는 자가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돌아온 한 문둥병자에게 물으셨어요.
눅(17:17-1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주님이 물으신 아홉과 돌아 온 한 사람의 차이는 무엇이 달랐느냐 하면 우선순위의 차이였어요. 열 사람의 문둥병자가 모두 다 내 몸이 고쳐진 것은 다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누가 자신을 고쳐주셨는지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홉은 예수님에게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왜그런가요?
저들은 예수님에게 감사하는 것보다 더 급한게 그 동안 떨어져 살았던 가족들을 만나는 것이 주님께 감사드리는 것보다 더 급했고, 내 육신의 만족이 주님께 감사드리는 것보다 더 급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주님께 드려야 할 감사가 맨 뒷전으로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저들은 감사를 상실한 자가 되고 만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홉명 문둥병자의 모습이 바로 오늘 나의 모습이 아닌지 한번은 생각하여 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오늘도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감사를 가로막는 원흉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늘 감사하는 사람은 지극히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를 드리며 사는가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사가 증발된 인생, 감사가 메마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들에게 부어주신 은혜가 차이가 나서가 아니라 감사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먼저 해야 할 것이 뒤로 밀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어떤 환경도 하나님께 감사를 가로막는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인색하다면 그건 내 어려운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기도하고 받았으니까 당연히 내가 얻을 것을 얻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감사하지 못했던 것, 이걸 회개해야 합니다. 내가 얻을 축복만 바라보았지 축복을 주시는 분을 주시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주님에게 감사드리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여러분에게서 축복을 주시는 주님을 향해 넘치는 감사를 드려지기를 축원합니다.
(4) 감사한 자는 구원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눅 (17:19)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주님의 구원은 오늘도 누구에게 나타납니까? 감사하는 자에게! 할렐루야!
오늘도 우리의 믿음은 주님을 향한 감사로 나타나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 하나에도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이번 한 주간 동안도 우리가 받는 것보다 주시는 분에게 더 관심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찬양 하십시오;
지극히 작은 일 하나라도 주실 때마다 주시는 분에게 찬양을 드리고 감사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언제나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며 마지막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구원의 역사가 여러분의 삶 위에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가위 추석을 맞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신명기 16:13~15절 말씀입니다.
신 16:13 너희는 타작마당과 포도즙을 짜는 술틀에서 소출을 거두어들일 때 이레 동안 초막절 축제를 올려라.
14 너희는 이 축제를 올리면서 아들과 딸, 남종과 여종, 너희가 사는 성문 안에 있는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들도 함께 즐기게 해야 한다.
15 너희는 이레 동안 여호와께서 고르신 곳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축제를 올려야 한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일하여 거두는 소출에 복을 내려주시는데 어찌하여 즐기지 않겠느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3대 명절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가을 추수 때에 드리는 수장절입니다. 수장절은 포도소출을 저장한 후 7일 동안 추수의 은혜와 구원의 은혜를 함께 감사드리는 축제입니다. 이 축제 때는 조상들의 광야생활을 떠올리며 초막에서 1주간 지내기도 합니다.
우리 민족은 한가위라는 고유 명절을 지냅니다. 추석은 가을 추수의 때에 맞추어 음력 8월 보름에 보름달처럼 넉넉함을 허락하신 하늘에 감사하고,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이 있도록 한 선조들의 유덕과 삼라만상의 수고와 이웃의 도움에 감사하는 명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막절에 견줄만한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한가위를 보내는 오늘 우리는 수장절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추석명절의 영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것을 감사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한 온갖 것들을 새롭게 대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은 물론이요, 그 사랑의 통로가 된 것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나의 생명의 씨앗이 되어주신 부모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내 오장육부와 이목구비도, 나의 지식과 지혜도, 내가 입는 옷도, 내가 사는 집도, 내가 사용하는 온갖 물건들도 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신세를 지면서 그것을 종교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사랑의 빚을 지면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모두다 감사해야 될 대상들일 뿐입니다.
다음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바로의 압제에서 구원되었듯이 오늘을 사는 우리도 온갖 죄악의 탐욕의 노예가 되었다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이 구원의 은혜야말로 우리가 감사해야 할 가장 큰 영적 선물입니다.
알곡이 여무는 추석 축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풍요롭게 성장시키도록 허락하신 분 앞에서, 추수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 삶의 온갖 시름과 맺혔던 것들을 푸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가족들 안에서 작은 불화도 이웃들과의 사이에서 야기되었던 온갖 형태의 불편함들도 보름달처럼 둥글고 넉넉하게 해소되는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민족 명절을 지내면서 이처럼 우리는 감사의 정으로 먼저 하나님아버지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그리고 우리주변의 이웃들에게 까지 다 내가 감사해야 될 대상임을 알고 함께 음식을 나누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측면에서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더 나아가 우리 고유의 문화인 추석이라는 절기를 통하여 불신자 전도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햇 곡식과 햇 과일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에서 한가위와 추수감사절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감사절이라 할 수 있는 한가위와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은 그 본질적 의미에서 상통하기 때문에, 이 추석 명절시기를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것은 이제 복음의 토착화를 위하여 필요한 단계로 보아진다. 기독교의 추수감사절은 하나님께 첫 수확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드리고, 이웃과 풍성함을 누리는 시기이다. 이러한 전통문화와 결합된 토착예배는 우리민족의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어,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제 한국교회는 추수감사절에 대한 원형적 의미(첫 수확을 하나님께 드린다)를 되새기며, 추수감사절의 시기를 추석과 일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그 의미를 오늘날 한국교회가 오늘날 시대에서 문화적 차원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둘째는 모든 것이 감사할 조건이다.
오늘도 건강하여 주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합니다. 건강 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실 건강 하나만 있어도 건강한 사람은 절대로 불평할 권리가 없습니다. 건강하면서 불행을 논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건강에 대한 모독입니다. 왜요? 당신이 건강을 잃어버리고 덜커덕 병원에 입원해 보세요. 이제 여러분은 딱 한마디가 아무 것도 없어도 좋으니 건강 하나만 있다면 나는 만족하겠노라고. 이것은 실질적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건강하면서도 왜 그렇게 불평이 많아요? 이건 사치스러운 불평이에요. 참으로 이렇게 소중한 건강을 가진 것만으로도 무한한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약간의 외부 자산이 있는 것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외부재산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는 가장 필요한 재산인 일용할 양식입니다. 꼭 필요한 재산입니다. 두 번째는 여유 있는 재산이 필요한 것은 남에게 주고 싶을 때 주고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는 그런 여유 있는 재산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 보면은 구제할 것이 있게 하기 위하여 일하라. 그랬어요.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구제하기 위해서 일하는, 이런 여유재산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불필요한 재산이 없는 것에 감사하기 바랍니다.
인간은 누구나 불필요한 재산 때문에 근심도 많고, 걱정도 많고, 건강도 잃어버리고, 가정도 잃어버리고 자기 명예도 다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누가복음에는 바로 그 세 번째 이야기에 해당되는 어리석은 부자가 있습니다. 그는 결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이 사람이 가난했더라면 어땠을까? 자기가 가난하고 병들었다면 예수님께 나와서 구원받았을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이 사람은 불필요한 부자이기 때문에 주님앞에 나올 필요도 없었고 부자이기 때문에 어리석어졌고 부자이기 때문에 그는 불행해진 사람이에요. 불필요한 재산이 많았어요. 그 인격이 재산을 감당하지 못했어요. 관리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서 지나친 부가 참으로 문제입니다. 관리 능력이 없는 재산이 바로 문제입니다.
(5) 추수감사절은 마지막 추수(심판대)를 준비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을 때마다 기억하고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생을 마치는 날 우리에게는 최종적인 추수감사절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일생동안 살면서 수장한 것을 결산하고 정산하는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해마다의 추수감사절은 한해의 수확한 것을 ‘우리가’ 정산하지만, 최종적인 추수감사절은 일생 동안의 초막생활을 통해서 우리가 수장한 것을 ‘주님이’ 정산하고, 상급을 결정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분이 상주시는 분임을 믿고 믿음으로 산 사람은 상을 받을 것이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푯대로 삼아 달려간 사람은 상을 받게 될 것이다.
주께 받은 사명을 마치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은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않고 하늘에 쌓아둔 사람은 그 보물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초막생활의 고난을 잠시 받는 가벼운 것으로 여기고 이겨낸 사람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남은 고난을 자기의 육체에 채운 사람들은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육체를 위해 심지 않고 성령을 위해 심은 자들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될 것이다.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둘 것이고,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두게 될 것이다. 마지막 초막절은 일생동안 수장한 것을 결산하는 마지막 추수감사절이 될 것이다.
마지막 초막절을 대비해서 일생 동안 과연 무엇을 수확하고 수장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착실히 준비하자.
광야의 초막생활을, 믿음과 인내로 살고, 우리 인격의 온전함을 이루어 가자
추수감사절 절기를 지키면서 성경말씀에 나오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수장절과 추수감사절의 전통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태도를 새롭게 갖는 기회가 되어야겠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사랑하신 기록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애굽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애굽을 출발하여 홍해를 건너서 광야생활 40년의 연단과 훈련을 한 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하셨다. 광야생활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도 주시고 하나님 앞에 감사드리는 것을 가르치셨다. 이스라엘백성은 원래 유목민족이었으나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 후로 농사를 짓게 되었는데,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첫 농사를 지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던 것이다. 그 후 추수할 때마다 하나님께 반드시 감사드렸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탈출하게 하시고 하늘과 땅과 비를 주셔서 농사짓게 하시는 하나님께 먼저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라고 말씀에 기록되어있다. 우리도 지난 한 해 동안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리가 건강한 것도 감사하며 지금 현재 어느 정도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감사하게 된다. 한해 하나님께서 지켜보셔서 우리가 하는 일이나 사업, 가정이 어느 정도 잘되고 축복받은 것을 감사해야 한다. 농사지어 곡식을 거두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고 감사 절기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배워 실천해야 한다.
깨끗함을 받은 자는 열 명이었으나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한 자는 한 명 밖에 없었던 누가복음 17장의 열 나병환자 이야기처럼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러면 어떤 것에서 감사를 드릴까?
첫째, 평범한 중에 감사하자
같은 시대에 같은 삶을 살아갈지라도 개인들간 믿음의 정도에 따라 감사의 정도에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깨닫는게 감사이다.
스펄전 목사님은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은 등불을 소유한다, 등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은 달빛을 소유한다,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은 별빛을 소유한다, 별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햇빛을 소유한다,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은 햇빛보다 더 밝은 곳 천국을 소유한다고 하였다. 감사하면 할수록 더 큰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이시다.
둘째, 역경 가운데서도 감사하자.
역경 중에 감사가 참 감사이다. 이러한 은혜는 성도만이 맛볼 수 있는 은혜요 아무라도 감사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을 역경의 은총이라고 한다. 톨스토이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젊어진다고 하였고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마귀의 세계만이 감사가 없다고 하였다.
지나온 1년을 회고하면서 주가 주신 복을 헤아려 보고 주님이 기억하실만한 감사의 계절이 되게 하자. 이번 추수감사절에 감사의 표현을 농도 짙게 해 보자. 그러면 불평과 불만의 응달에서 감사촌의 양지바른 곳으로 주소가 변경될 것이다. 돈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그릇된 가치관을 버리고 말씀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보자. 여러분 소유와 생명은 별개입니다. 예수님은 생명 문제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고 하나님이 재산을 주셨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주었으니 주신자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쓰지 못할 때 하나님이 심판해 버립니다. 이것을 알아야지요. 또한 재산을 준 목적이 있습니다.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고, 버는 재미도 있지만 문제는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제가 농담 겸 진담으로 말합니다만은 솔직히 말해서요 먹은 것만 내 것입니다. 많이 잡수세요. 먹은 것은 틀림없이 내 것이지 밥상에 놓인 것도 내 것이 아니에요. 왜요? 먹을지 말지 두고봐야 아니까. 이 말은 뭐냐하면 사용한 것만 내 것입니다. 돈은 가지고 있다고 내 것이 아니에요. 사용한 것만 내 것이에요. 그것도 내가 주고 싶은 데로 주고 쓰고 싶은 대로 쓴 것만 내 것이에요. 억지로 준 것은 강도 만난 거예요. 빼앗긴 것은 내 것이 아니요. 내가 기쁜 마음으로 준 것, 그것만 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행복을 몰랐습니다. 행복이란 영혼 문제와 관계되어 있고 그 영혼이 영생하느냐 하지못하느냐에 행복이란 문제가 결정되는 것이에요. 이 기본적인 것이 확보되기 전에는 세상 물질이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인데 이 사람은 영생의 문제와 자기의 재산을 맞바꾸려고 했어요. 그게 어리석은 것이죠. 그래서 탈무드에는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답니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 주먹을 꽉 쥐고 태어난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이 죽을 때는 손을 펴고 죽는다." 여러분, 죽는 사람 보세요. 손을 딱 펴더라구요. 이게 상징적 의미가 있는 거예요. 손을 딱 펴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유명한 격언이 있지 않습니까? 죽은 사람이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잘 들어두세요.
주머니가 없습니다.
행복이란 어디에 있느냐? 많이 가지고,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이 재산이 그를 즐길 수 있게 할 수 있었더냐? 오늘 본문에 자세히 읽어보면 "내가"라고 하는 소유격이 여섯번이나 나옵니다. 내가, 나의 것을, 내 집 창고를 짓고, 내가. 아무리 나라고 소리 질러봐도 내 것 아니에요. 하나님은 비웃습니다. "오늘 밤 네 영혼을 내가 취할 터인데 그러면 뉘 것이 되겠느냐?" 여러분, 아깝거든 죽기 전에 다 쓰세요. 다 쓰고 가세요. 깨끗하게 통장 비워놓고 가야 됩니다.
오늘 이거 보세요. 하나님이 주시어 소유하게 하시고, 누리게 하십니다. 행복도 하나님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 6장 19절에 "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하늘에 쌓아두라. 오늘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게 결론입니다.
세상에는 두가지 부자가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위해서 하늘에 많이 쌓아둔 그런 부자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에 대하여는 인색하여 땅에다가만 쌓아둔 부자가 있는데 그것이 걸림돌이 되어 아주 망가져 버리는 인간이 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비참한 인간, 돈의 노예가 된 인간, 돈에다가 목숨을 건 인간, 어리석은 인간. 여러분, 내게도 불필요한 것이 있는가 살펴보십시다. 제발,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맙시다. 지혜로운 부자, 하늘나라에서 부요한 그런 부자, 금생과 내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그런 부자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추수감사절은 하늘나라를 위해 보물을 쌓아 둘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살아있을 때 지금이 선을 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내일은 나의 시간이 아닙니다. 오라고 하면 가야할 때입니다. 추수할 즐거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 가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라고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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