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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2 무덤속에 있던 나사로를 불러낸 생명의 예수님말씀 2018. 10. 14. 11:55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요11 : 17- 44
예수의 정확한 발음은 여호수아 이다. 물론 예수님은 당시에 여호수아라고 불리웠다. 여호수아는 알다시피 모세의 뒤를 이어 가나안을 정벌한 지도자로 여호수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라는 의미로 가나안으로 구원을 이루신 지도자이다.
여호수아 또는 여호슈아라는 히브리어 발음이 헬라어로 하면 예수아로 라틴어로 죠수아로 영어로 지저스로 한자로는 야소로 한국어로 예수로 발음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예수=여호수아인데 다만 여호수아 라는 이름이 마치 우리나라에서 철수나 영희라는 이름이 흔한 이름인 것처럼 유대인들 사이에 여호수아라는 이름도 흔한 이름이라서 예수라는 존재를 특정한 이름으로 부르기에도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예수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라고 하는 것보다는 예수그리스도라고 불러야 되지 않나 생각하며 성경에는 이렇게 많이 불리워지고 있다. 즉 예수란 이름 자체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좀더 구체적인 의미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다라고 성경에 말씀하고 있으므로 오늘은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구원하시는 경우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한 사복음서는 예수님을 각각 다른 모습으로 기록하였다. 마태는 왕이신 예수님, 마가는 섬김의 종이신 예수님, 누가는 인자이신 예수님,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으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구주가 되십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Ⅰ.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느니라”(요 12:44∼45)고 하심으로써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했다고 지적합니다.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회당장의 딸, 행여나가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무덤속에 있던 나사로를 소생시키셨습니다. 죽었던 자들을 살리신 예수님께서는 더욱 놀라운 일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을 살려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바로 구원자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들이 거절한다면 예수님은 그를 부인 사람들에게는 바로 심판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세상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나를 거절하고 내 말들을 받아 들이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그를 심판하는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말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요12:48).” 처음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지만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예수님은 죄인을 심판하러 심판주로 오실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읽었던 요한복음에 총 7가지의 기적이 나온다. 사도 요한이 소개한 7가지 표적들(물을 포도주로/왕의 신하의 아들 치유/38년 된 병자 치유/오병이어 기적/물 위를 걸으심/태생적 소경 치유/죽은 나사로를 살리심) 중 앞의 여섯은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다양한 측면에서 계시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반면 죽은 나사로의 소생 사건은 예수께서 사망의 권세를 정복하고 생명을 부여하시는 성자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증거한다는 점에서 모든 표적의 절정을 이룬다.
요한복음에 기적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 이유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속자요 메시아이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기적을 깊게 다루고 있다.
인간의 삶을 사자성어로 생로병사라 합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다가 마지막은 죽을 병이 들어 죽게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허무한 인생인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각자 사명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각자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하여 각자에게 재능을 주시고 꿈과 비전을 주십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망각한 체 오로지 자기자신을 위해 살아간다. 자신만을 위한 삶의 과정은 욕심의 삶이고 죄악 된 삶이고 죽음을 향한 삶이며 자신만을 위한 삶의 결론은 심판의 삶이고 멸망의 삶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찾아오시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의 삶은 사는 의미와 목적이 달라진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와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자신을 위한 삶보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이 자신도 참된 기쁨이고 즐거움이고 행복한 삶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으로 각자의 분야에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이 우리의 사명이다.
여러분이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 나와 의사, 교사, 변호사, 국회의원, 기업가, 등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도 자신을 위한 삶을 살면 결국은 불행의 삶이고 멸망의 삶이고 실패의 삶이다.
낮고 천하고 볼품없고 보잘것없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 부끄러운 직업을 가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삶이고 생명의 삶이고 성공의 삶이다. 매시간 마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고 그로 인하여 얻어진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며 세상 속에서도 죄짓지 않고 하나님 말씀 따라 순종하며 살면서 하나님을 자랑하고 나타내면 그것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명이 끝나면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하는데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빨리 죽고, 늦게 죽고 하는 죽음의 시기 또한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악한자가 장수할 수도 있고, 선한 자가 일찍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성도의 죽음의 사례를 살펴봅시다.
1) 이 땅에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할 때 : 거지 나사로의 죽음이 있다.
2) 이 땅에서 거부로 장수하고 생명의 년수를 다 하고 죽을 때 :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죽음 있으며
3) 년수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명을 다 감당하고 죽을 때 : 스데반.
4) 죽음으로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믿도록 하실 때 : 예수님의 제자들, 순교자들의 죽음이 있다.
5)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죽는 경우 : 나사로의 죽음이 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나사로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나사로는 두 여동생 마리아와 마르다와 함께 베다니에 살고 있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3km 떨어져 있는 감람산 기슭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베다니는 문둥병자와 소외된 사람들이 격리되어 사는 사회로부터 냉대받던 곳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메시아를 소망하며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집을 방문 하실 정도로 그들을 각별히 사랑하셨다. 그래서 3남매는 더욱더 믿음이 좋았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굳건한 믿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사로가 과연 누구였을까?
나사로는 한 때 문둥이로서 예수께서 고쳐주신 자로 추정됨(마26:6 이제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그분께 와서 그분께서 음식앞에 앉으셨을 때에 그분의 머리에 그것을 붓거늘)
위의 말씀을 추적해 본다면 문둥이 시몬이 치유돼 나사로(하나님은 나의 도움)란 이름으로 개명?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사로의 누이동생들이며 마리아는 300데나리온 상당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던 여인(마 26:6-13, 막 14:3-9, 요 12:1-8))으로 예수님과 마르다와 마리아 및 나사로와는 매우 친밀하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던 중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오빠 나사로가 중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두 자매에게 생명 줄과도 같고 나이도 젊은 오빠가 죽는다는 것은 절대로 받아 들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두 자매는 예수님께서 오시면 오빠를 고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사람을 보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가 곧 죽어간다는 다급한 소식을 전해 듣고도 즉시로 가시지 않고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 받으시기 위함이라시며 이틀을 더 계신 것이다. 실은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되심을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증거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제자들과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주님앞에 나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어떤 병도 다 고쳐주신 예수님께서 정작 그렇게 사랑하시는 3남매의 오빠 나사로가 죽어 간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알아듣지 못할 말씀만 하시며 즉시로 가지 않으시고 이틀이 지나서야 가자고 하신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죽은 자를 살리실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이란 사실을 몰랐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선지자의 한 사람으로 알고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또한 예루살렘은 위험한 곳이었다. 얼마전만 하여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알고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병들을 고치시므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쯤으로 알고 있었는데 안식일을 어기며 병을 고치기도하고, 유대인들이 하나님 다음으로 존경하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자신이 있었다고 하고, 아브라함이 자신을 보고 기뻐하였다고도 하며, 자신이 자칭 하나님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하는 유대인들은 그가 신성모독한다며 반발하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속에 진리가 없어 나를 알지 못한다고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곳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여 이곳으로 피신해 온 것이다. 그러니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쪽으로 가시지 않은 것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것을 두려워하여 가지 않은 것으로 오해하고 지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는데 그리로 가시려 합니까? 하고 만류한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지금 나사로가 잠들어서 깨우러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차라리 잠들었으면 깨어나겠습니다라고 하며 나사로가 살아있을 때는 안 가시고 죽고 난 후에 가자고 하시는 예수님에게 원망과 불평의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나사로가 죽었다 내가 가지 않은 것은 너희로 믿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가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제자들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간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기를 각오하고 죽은 나사로를 만나러 간다는 말씀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도마 같은 제자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하는 것이다.
베다니에 예수님의 일행이 도착하자 나사로는 죽은지 이미 4일이나 지난 뒤였다. 마리아와 마르다 역시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곳에 계셨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원망서린 말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들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자신의 믿음을 말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네 오빠가 다시 살아 나리라’고 말씀하시자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 날 줄 아나이다’라고 부활 신앙을 말하였다. 금방 마르다는 예수님이 구하시면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자신의 믿음을 말했지만 예수님께서 지금 당장 살리신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날 부활할 때에 나사로가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마르다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말씀을 하셨다.
요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을 믿고 죽은 자는 몸은 죽어도 영혼은 살아서 천국에 들어가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이미 죽은자의 육신도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자가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죽음을 거치지 않고 변화받아 휴거되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 간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에 마르다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이렇게 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제자들보다 더 좋은 믿음을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나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는데 그것은 수제자인 베드로와 같은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리아를 불러 오라 하셨다. 마리아와 많은 조문객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다. 그리고 마리아 역시 마르다와 같이 예수님이 계셨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울자 뒤따라온 조문객들도 같이 울었다.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은 세번 눈물을 흘리신 것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실 때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기도하실 때였는데 나사로의 죽음에 흘린 눈물은 인간의 죽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이 긍휼해서이고 예루살렘의 멸망에 흘린 눈물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이 겪을 고통을 생각해서 유대인들이 불쌍해서이고 겟세마네의 기도에 흘린 눈물은 인간의 모든 죄가 전가되어 십자가에 못박히실 예수님이 인간의 입장에서 겪을 고통을 생각해서 흘리는 눈물일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어서 나흘이나 지나 벌써 섞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옮기라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리셨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일을 하실 때 먼저 기도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셨다.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조문객들과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도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이심과 하나님은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모든 것을 들어 주신다는 것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심으로 그들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덤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딱 한번 말씀하셨다. 그러자 죽은 나사로가 손발이 묶인채 무덤을 걸어 나오는데 그의 얼굴은 수건으로 묶였더라. 예수님의 말씀은 어느 누구의 말씀이 아니다. 그분의 말씀은 창조주의 말씀이시다. 세상만물을 창조하실 때도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생겼고 물과 물이 하늘과 땅으로 나뉘어라 하시니 나뉘어졌고 식물과 동물이 종류대로 있으라 하시니 그대로 생기도록 한 바로 그 말씀이신 것이다.
말씀으로 세상만물을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죽은 인간을 살리신 종교는 기독교외에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 정도의 능력이 되야 하나님이 되는 것이지 쪼잔하게 돌덩어리에 절하고 나무에 절하고 해와 달에 절하는 그런 종교와는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이 모든 사실을 처음부터 똑같이 지켜본 사람들이지만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마리아와 마르다, 나사로, 그리고 제자들은 확실히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었지만 오히려 이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으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 한 것이다.
2000년 전 그 당시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있는 반면에 그 사건을 우리는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성경 말씀을 통해온전히 믿는 성도들이 있다. 그것만 봐도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믿음의 은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 그러면 이제까지 총체적으로 논했던 말씀들을 좀더 세밀하게 만나 봅시다.
Ⅱ 지상에서 행하신 기적의 절정
예수님은 공생애 삼년 반 동안 수많은 기적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거하셨는데 오늘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죽은지 4일이나 지났고 무덤속에 있던 나사로를 소생시킨 것이야 말로 예수님이 행하셨던 수많은 기적중의 최고의 극치를 나타내는 기적이다. 그 현장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1.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시다 (11 : 1~16)
베다니에 살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오라비 나사로는 예수님과 일찍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사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 요단강 동편에 계셨을 때 나사로가 갑자기 병이 들아 죽어간다는 전갈을 받으신 예수님은 이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시며 이틀을 더 유하신 후 나사로가 죽은 사실을 확인하시고 유대로 출발하셨다.
예수님은 죽음까지도 합력해 선을 이루시게 하셨다(롬 8:28).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사건은 요한복음에 소개된 예수님의 일곱 표적 기사 중 마지막 이적기사로써 모든 표적의 절정을 이룬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 자신의 영광을 들어내기 위한 표적적 사건임을 밝히신다. 이는 나사로의 사건이 자신의 십자가의 구속사역과 본질상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시사하는 말씀이다. 이런 사실은 이틀을 더 유하신 후 나사로의 죽음을 확인한 후에 유대로 출발하신 사실을 통해 확인된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메시아적 권세의 발휘와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통해 믿는 자를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시는 메시아적 사역이 본질상 동질성을 띠기 때문이다. 성도의 삶은 그것의 좋고 나쁨을 막론하고 모든 것을 합력해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섭리적으로 주관된다(롬 8:28). 경우에 따라선 인간의 최악이 하나님의 최선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약1:2)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기쁨으로 여기라 4 오직 인내를 완전히 이루라 이것은 너희가 완전하고 완벽하여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범사에 예와 아멘으로 수납해야 할 당위성이 이에 있다. (9장)한편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눈에 진흙을 발라주신 후 실로암 못에 가써 씻고 오라고 하면서 그의 눈먼 것을 치유하신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사칭한다고 참람죄(신성모독죄)를 적용해 돌로 치려했을 때(10:33) 예수께서 유대인들을 피해 잠시 침례 요한이 처음 침례를 주던 요단강 동편 베뢰아 지역에 계셨다(10:40). 그런데 하나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이런 값비싼 향유로 주님의 발을 씻겨 드릴 정도의 관계에서 병들어 죽어간다는 기별을 받은 예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도무지 인자하시고 사랑의 주님이 어떻게 그렇게 하셨을까 하는 의문을 품을 수 있는 역사를 하셨을까? 우리 일반 상식으로는 왜 그 소식을 들었으면 참 앉았다가 폴짝 뛰듯이, 병든 구급차 119에 전화하면 쫓아 오듯이 예수님께서 즉시 모든 하든 일을 멈추시고 병든 나사로를 찾아 가셔야 지당한 것 같고 그래야 우리 상식에 맞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들으시고는 하시는 말씀이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병이며, 아들 예수님에게 영광이 돌아가기 위한 병이라고 말씀하시고는 예수님이 그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틀을 기다리니 전갈 보낸 누이들의 입장이 어떻겠습니까?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잠들었다 우리가 깨우러 가자 말씀하시니 예수님은 죽은 것을 두고 잠들었다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참말로 병들어 자는 줄로 알았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요 11:14) 말씀하시며 그러나 베다니로 가자.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오리쯤 된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얼마전까지만 해도 복음을 전하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 얼마 전에도 유대인들이 돌로 죽이려 하는데 거기 가시려 하십니까? 예수님이 가자 하니 도마가 우리도 죽으러 가자고 담대히 말했던 것입니다.
이제 유대 지역 베다니에 사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오라비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는 전갈을 받고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의 영광을 들어내기 위한 표적적 사건임을 말씀하시며 이틀을 더 지체하신 후에 베다니로 떠났을 때는 나사로는 이미 죽은 후였다. [임상학적] 죽음이란 호흡운동, 심장 수축 그리고 동공반사가 없는 것을 말 합니다. 즉 환자가 응급구제 노력에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을 때를 일컬는다. 나사로는 바로 이런 상태를 유지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틀을 지체하신 이유가 임상학적으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성부와 성자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이를 통해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시기 위함임을 시사해 주셨다. 이는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적용된다.
2.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11 : 17~44)
나사로가 죽어있었던 나흘이라는 시간은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는 슬픔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오시지 않는 예수님을 원망하며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슬픈 일이 왔을 때 보통 주님께 기도로 간구합니다. 그러나 간구함이 빨리 응답되지 않고 지연되면 자연스레 지치기 마련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도 나흘이 지나도 오지 않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슬픔에 지쳤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요 11:21-22) 말하였던 것을 보면 마르다는 굉장히 믿음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한 편으로는 예수님 좀 일찍 오셨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인데 원망이 섞인 말이 아닐까라고 볼 수도 있고, 그런 죽을 병도 예수님이 계셨으면 죽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의 주님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믿음의 말이 아니고 자기의 주관과 자율과 사욕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 대화를 한 후 이제 예수님께서 네 동생 마리아를 데려 오라고 말씀하셔서 마리아에게 주님이 오셨다고 말하니, 울던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뛰쳐 나옵니다. 또 마리아도 마드라와 동일한 말을 합니다.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으리이다, 하더라’(요 11:32)울면서 말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도 그 말을 하며 우는 마리아와 또 문상 왔던 사람들이 마리아의 급히 나가는 것을 보고 뒤 따라 와서 같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며 민망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눈물은 누가복음에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을 입성하실 때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너희가 보는 이것들로 말하건대 날들이 이르리니 그때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지 아니하고 다 무너지리라’(눅 21:6) 비참하게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신 일이 있고, 본문 35절에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통분과 민망하여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히브리 5:7에 보면 이제 삼십년과 공생애 3년을 마치시고 최종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의 완성을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하나님의 소원이요, 택한 백성들이 구원얻는 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마지막 만찬을 자시고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갯세마네 기도 동산에 들어가셔서 기도 하는 중에 이 십자가에 중대함을 밝히 깨달으시고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이 십자가는 택한 백성들의 모든 한 죄도 빠짐없이 낱낱이 그 죄의 정죄를 받고 거기에 합당한 형을 언도 받아서 그 형의 값을 예수님이 친히 받으셔야 하는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대속죄에 대한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는 눈물의 기도를 흘리셨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를 보시면서 흘린 눈물은 통분과 민망의 눈물이신데 이 내용도 모르는 유대인들이 눈먼 소경이 되어 왜 네가 늦게 와서 죽게 되었느냐 좀 일찍 와서 살려 주지 속으로 비웃은 말들을 할 때에 예수님이 통분히 여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사로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나사로가 죽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어도 다시 살 것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11절). 나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살고 있습니까? 응답이 지연된다고 낙담하며 원망하고 있진 않습니까?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되심을 온전히 신뢰하길 원합니다. 그 믿음을 통해 우리 삶에 놀라운 주님의 역사들이 펼쳐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3.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요 11: 31~44
나사로를 살리신 이유는 마리아와 마르다가 오라비의 죽음으로 인하여 슬픔에 잠긴 이들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도록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슬퍼하며 애통할 때에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1)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그녀를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녀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너희가 그를 어디 두었느냐 하시니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매 예수님께서 우시더라(31-35).
(2)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약속하심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그 중 어떤 이들은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은 동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36-40)
(3).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신 예수님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41-44).
죽은지 4일이나 지났고 무덤속에 있던 시신이 살아서 무덤 밖으로 나왔던 기적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가정에 주신 선물이지만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다. 나사로를 다시 살게 한 것은 곧 마리아와 마르다의 믿음에 근거한다. 예수께서 그곳에 계셨다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을 것을 믿고 있었던 마리아와 마르다의 고백에서 이 사실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도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말씀하신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잠자는도다 내가 깨우러간다고 말씀하신대로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고 나사로는 다시 살아났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은 육신이었고 그가 살다가 다시 죽었을 때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천국으로 들어간 것이며,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심은 나사로와는 달리 하늘에서 오신 분이시기에 그 육신이 흙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오신 그대로 가장 높으신 보좌로 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이 죽으면 이 육신이 나사로처럼 흙으로 돌아가고 영의 실상으로 나사로처럼 예수보좌의 곁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사랑안에 거하면 우리는 옛 사람은 죽고 새 생명으로 곧 영의 실상으로 이미 다시 산 것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다.
1)기도 응답이 늦게 온다고 낙심하지 말라.
예수님은 일부러 늦게 가셨다. 왜 늦게 가셨는가? 하나님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간혹 기도 응답이 늦게 온다고 낙심하는 분들이 있다. 낙심하지 마라. 하나님의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낙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2)믿음이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①15 내가 거기에 있지 아니하였던 것을 너희를 위해 기뻐하노니 이것은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라
②40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이르시되 네가 믿고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라.
③42 이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이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내신 이적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의 정체를 설명해 주는 이적이라 하겠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심에는 앞으로 주님 자신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을 보여 주는 예표도 된다. 이 설교를 들은 성도들은 나사로를 살려 주심으로 주님께는 사망권세를 가지신 분이심을 알아야하고 동시에 우리의 죄와 허물도 용서해 주시는 구원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4.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다 (11 : 45~57)
예수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셨고 이를 보았던 많은 유대인들은 그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소식을 접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첫 반응은 "이 사람이 많은 기적들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리요?(47)"였습니다. 심지어 그 해 대제사장 가야바는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 앞에 예수를 죽일 것을 논의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았기에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어떻게 하면 더 풍족하게 살 수 있을지에 관심을 두며 살아갔습니다. 이와 같이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어떻게 자신의 권세와 재물을 지키며, 어떻게 더 잘 살아 갈지가 인생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생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요 죽음으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지 보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에 관심을 가지고 준비된 삶을 살아가기 원하십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되어 영원한 생명의 삶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Ⅲ. 결론
나사로의 죽음은 성부와 성자의 영광을 보여주신 표적적 사건이다.
1.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을 들어내기 위한 표적적 사건임을 밝히신다. 그래서 이틀을 더 유하시고 나사로의 죽음을 확인한 후에 출발하셨다.
2. 이는 나사로의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사역과 본질상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메시아적 권세와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통해 믿는 자를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셔서 부활의 생명을 공급하시는 메시아적 사역이 본질상 상응성을 띠기 때문이다.
3. 그런 의미에서 성도의 삶은 그것의 좋고 나쁨을 막론하고 모든 것을 합력해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섭리적으로 주관된다(롬 8:28). 경우에 따라선 인간의 최악이 하나님의 최선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범사에 하나님섭리를 인정하는 의존적인 신앙관을 확립하자.
인간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죽음에 대한 불안감을 떨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조심하고 준비한다고 죽음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죽음의 권세를 극복할 수 있는 방도는 예수님을 믿는 일이다(요 11:25-26)
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가시적으로 보았다.
② 성자의 영광은 예수께서 성부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서 죽음을 정복하실 권세가 있음과 장차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한 것을 예표한 표적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죽을 병 든 나사로의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사역과 본질상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런 의미에서 죽은 나사로의 부활(소생) 사건은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사실과 죽은 사람이 다시 살 수 있는 부활의 확실성을 예표적으로 입증해 주신 셈이다. 이상의 사실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죄없다고 하시고 의롭다고 하시며 부활의 생명을 보증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요11:25-26. 히 10:14).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피흘려 죽게 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그래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은 그런 불신자들을 엄벌에 처하신다는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요한복음 5장 22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은 심판주로 오십니다. 성경은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10)고 하시거나,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고 하심으로써 심판의 모습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구원받을 만한 때요 은혜받을 때라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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