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18-8-1 출애굽의 진정한 의미
    말씀 2018. 8. 7. 16:26

    출애굽의 의미 창 15:13-14 12: 37-42

    1956년 제작된 십계라는 영화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인 모세역에는 찰톤헤스톤이고 애굽왕 파라오역은 율브린너가 나오는 영화인데 이집트 고센 지방에 살던 히브리백성들이 나날이 번성해 가자, 모세가 세상에 등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이집트의 새왕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위협을 느끼고 히브리인의 장자를 모두 죽이라고 명한다. 요게벳이라는 히브리 여인은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바구니에 넣어 나일강에 띄워 보내는데 마침 강가에 있던 파라오의 딸 공주가 아기를 발견하고, 모세란 이름을 지어준 다음 자신의 아들로 키운다. 세월이 흘러 공주의 오빠가 왕이 된다. 왕의 아들 람세스는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계승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모세를 견제하고 모함한다. 어느 날, 모세는 자신이 이집트 왕족이 아니라 히브리 노예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부귀영화를 뒤로 한 채 노예로서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동족의 고통을 함께 나눈다. 400년간 노예 생활을 해온 히브리인들은 언젠가 하나님이 인도자를 보내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인도하리라는 기다림 속에서 살고 있었다. 모세가 노예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람세스에게 알려지자 모세는 광야로 추방된다. 광야를 헤매던 모세는 미디안에 이르고 그곳에서 십보라라는 양치기 여인과 결혼해 아들을 낳는다. 그러던 어느 날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름심을 받고 이집트로 돌아가 히브리백성을 구해 내라는 명령을 받는다. 지팡이 하나만 들고 이집트로 돌아간 모세는 10가지 재앙을 행하여, 결국 파라오가 된 람세스를 굴복시키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다. 홍해 바다에 이르렀을 때 마음이 바뀐 람세스가 전차 부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쫓아오자, 하나님은 홍해바다를 갈라지게 해서 그들을 무사히 건너게 해주시는 것은 출애굽의 하이라이트이다.

    출애굽기의 내용은 창세기 끝부분에서 이어진다. 야곱의 아들들은 형제 요셉이 애굽총리를 하고 있었을 때 기근을 피하기 위해 애굽 고센지방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후 43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열두 형제의 자손들과 그들의 직계가족은 하나님이 약속한 대로 커다란 민족으로 성장했다. 이집트 사람들은 그들을 히브리 사람이라고 불렀다.

    출애굽의 이스라엘백성의 지도자 모세는 미디안 광야 40년동안 유목민 생활을 하던 모세는 호렙 산 까서덤불이 타는 불가운데서 히브리인들을 구출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이집트로 돌아가서 파라오에게 히브리민족이 광야에 가서 하나님에게 제사 드리기 위해 출애굽을 요구한다. 파라오는 당연히 거부하고 히브리인 노예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는 조치로 대응했다. 그리나 하나님은 파라오가 계속 거부할 경우 일련의 참혹한 재앙을 내려 이집트와 파라오를 굴복하게 한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집트에 준 재앙은, 첫째재앙은 나일 강 물이 피로 변하게 하는 것이었다. 다음에는 개구리와 이, 파리떼가 이집트 전역을 뒤덮어 애굽의 궁전과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질병이 이집트의 가축들을 죽였다. 독종이 번져 사람과 나머지 살아 있는 동물들의 피부가 곪았다.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져 농작물을 파괴했다. 그래도 파라오는 여전히 굽히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메뚜기와 암흑의 재앙이 이집트를 덮쳤으며 끝으로 나일 강 유역의 모든 땅에 사는 사람과 동물의 초태생(처음 태어난 이)이 죽는 재앙이 일어났다.

    이스라엘백성들은 마지막 장자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주님은 모세에게 지시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양을 잡아 희생제물을 준비하도록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모든 집의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 이집트인들의 초태생을 죽이는 밤에 재앙이 이스라엘 집을 넘어가도록 했다. 이 마지막 10번째 재앙을 통해 파라오는 자기 아들을 포함한 이집트인들의 참혹한 재앙을 똑똑히 보았을 때 마침내 항복하고 모세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축떼를 데리고 속히 나가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서둘러 이집트를 떠나도록 하기 위해서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준비하는 무교절인 파스카를 기념하는 절기를 갖게 되었다. 이렇게 하면서 출애굽은 시작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센지방을 출발하여 숙곳에 와서 정렬을 정비하고 나니 20세 이상된 남자만 약 20만명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자신의 결정을 후회한 파라오가 정예 전차부대를 동원하여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인들을 뒤쫓아왔을 때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홍해가 갈라져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다를 육지같이 통과하여 홍해를 건넜으나 추격하던 애굽의 군대들은 갈라져 있던 바닷물이 다시 합쳐지면서 이집트 사람들은 홍해에서 전멸하게 되었던 것이 출애굽의 최고의 극적인 장면이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면서 완성되는 것이다.

    1. 출애굽의 기원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노아가 홍수 후에 세 아들에 대해 아래와 같은 예언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창9:26-27 노아가 또 말했습니다. "주 곧 셈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될 것이요 27 하나님께서 야벳을 크게 만드시리니 그가 셈의 장막에 거하며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될 것이니라. 하였더라.

    하나님은 노아의 입을 통하여 셈과 함과 야벳을 놓고 예언을 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이니 셈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라고 하였고 야벳은 창대케 되나 셈의 장막에 깃들인다고 하였고 함은 종이 될 것을 말한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 보면 하나님의 역사는 셈의 후손들을 통해서 역사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셈의 계통인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장막에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창12:1-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는 이 한 마디의 말씀은 성경전체의 제목과 같은 말씀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아브라함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을 맹세로 세운 것이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을 떠나 가나안 세겜땅 상수리나무에 이르렀을 때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고 언약하셨습니다(창 12:7).

    그러나 아브라함은 즉시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고 아직 그 아내는 잉태치 못하므로 혈혈 단신으로 유리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으나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창15:13에 보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확실히 알라. 즉 네 씨가 자기들의 소유가 아닌 땅에서 나그네가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이 사백년동안 그들을 괴롭히리라 14 또한 그들이 섬길 그 민족을 내가 심판하리니 그 뒤에 그들이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오리라(창 15:13-14).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끝까지 믿었더니 아브라함 나이 100세때 인간의 힘으로는 소망이 없는 사라의 몸에서 이삭을 낳게 했던 것이다. 이후 100세에 난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에 아브라함이 순종하였더니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셨다.

    창 22:16-17 16 이르되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였노라. 곧 네가 이일을 행하여 네 아들 즉 네 유일한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였으므로 17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네 씨를 하늘의 별들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니 네 씨가 자기 원수들의 문을 소유하리라.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가리켜 맹세를 하되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네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다 하였음이라고 하셨다.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창26:4 네 씨를 하늘의 별들같이 번성케 하고 이 모든 지역을 네 씨에게 주리니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그랄 땅에서 이삭에게 나타나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언약을 세우셨다.

    창28:13-14 13 또 보라 주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주니 곧 네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니라. 네가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씨에게 주리니 14 네 씨가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널리 퍼지며 너와 네 씨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들이 복을 받으리라.

    오늘날 기독교가 야곱의 후손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가 이룰 때까지 이 세 사람에게 세운 언약이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야곱의 아들중 요셉을 통해 출애굽의 시작을 섭리하였는데 야곱의 12 아들중 요셉은 하나님이 주셨던 꿈 즉 해와 달과 별이 자기를 향해 절을 한다는 꿈을 통해 형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고 형들은 동생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파는 비극적인 일이 있었지만 이것으로 출애굽을 하는 민족적인 언약을 이루어지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애굽에 종으로 팔렸던 요셉은 파라오의 호위대장인 보디발에 팔려 갔으나 후에는 보디발의 아내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중 생활을 하였다는 것도 민족적 언약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그 후 7년 흉년을 만났을 때에 요셉을 팔았던 형들이 요셉 앞에 와서 절하게 된 것도 민족적 언약이 이루어지는 과정이었다. 가나안 기근으로 인해 야곱의 족속인 70여명이 애굽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이나 그 후 요셉을 모르는 새왕이 들어서면서 히브리인들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는 바로왕의 압박을 받은 것도 그 민족에게 언약이 이루어지는 과정이었다. 애굽에 들어간지 400여년이 지난 어느날 홀연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서 10가지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시킨 것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였던 그 언약의 정한 때가 온 증거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장래 인간 종말에 될 예언적인 예표가 되였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유대교는 세계적인 기독교로 발전하여 세상 종말에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루어 질 일이 시작될 때 되어질 예언적인 역사가 되었던 것이다.(사11:16, 미7:15).

    사11:16 아시리아를 떠난 그분의 백성중의 남은 자들을 위하여 큰 길ㅇ 생기리니 그것은 곧 이스라엘이 이집트 땅에서 나오던 날에 그에게 있었던 것과 같으리라.

    이사야 11장을 보면 주님 재림시에도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와 같은 역사가 있을 것을 가르쳤다. 과거에 출애굽 할 때에 나타난 역사는 인류 종말에 새시대를 이루는 역사를 보여준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들어 애굽을 치듯이 하나님의 종들을 들어서 북방 짐승 정권을 치므로 북방이 망하는 동시에 평화로운 새시대가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다시 간략하게 정리하여 보자.

    (1) 애굽의 노예가 된 이스라엘 백성 (출1:1-14)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것이 출애굽원인이 되어 처음에 고센땅에 자리를 잡은 야곱의 후손들은 70명이었지만 야곱과 그 아들들이 죽은 후에도 생육하고 크게 번성하여 출애굽을 할 때는 장정만 60만명이나 되는 강한 큰 민족을 이룰게 되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성취되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다가 400년만에 다시 가나안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에 들어온 나이가 75세였고 이삭을 낳기까지 25년이 걸렸다.

    이삭이 야곱을 낳은 나이가 60이며 야곱이 애굽에 들어간 때가 130세였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 언약을 받은 후 야곱과 12아들식구들이 애굽에 들어갈 때까지 215년만에 약속이 이루어 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대만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하늘의 별을 셀수 없을 정도로 바다의 모래알같이 대적의 성문을 소유할 만큼 강하게 만들어주셨다( 창22:17)

    ​(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왕

    야곱의 후손들은 요셉이 알지 못하는 새왕이 세워질때까지 번성하며 강한 족속으로 고센땅에 모여살았지만 새왕이 일어난 후부터 강한 압박으로 괴로운 노예생활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왕은 누구인가?

    ​요셉시대에 애굽을 다스리던 왕은 목동들의 왕가라 불리우는 힉소스왕정이었다. 힉소스왕조때 바로왕은 요셉을 총리로 등용하였고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번성하며 강한 족속으로 성장하게 된 것도 힉소스왕조의 그늘아래서 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왕이란 힉소스 왕조를 멸한 새왕은 이방왕조인 힉소스를 섬멸하고 애굽의 옛영광을 되찾은 애굽정통왕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애굽의 신왕국시대의 문을 연 투트모세 1세인 새왕은 애굽왕조의 견고한 위를 세우기 위해 애굽의 국고성인 비돔과 라암셋건축에 히브리인들을 혹사시키게 되었다.

    요셉이 있을 때에도 피라미드 건물을 지어 곡물창고로 사용했는데 애굽의 새 왕은 비돔과 라암셋(고센근처)에 피라미드형상의 국고성을 만들었고 후에 바로를 신격화하면서 영생불사를 꿈꾸는 왕의 무덤으로 만들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갈대아 우르(바벨론)에서 끌어내어 가나안의 족장으로 세우시고 구원자의 모형인 요셉을 애굽에 보내셔서 4대만에 즉 430년 만에 애굽에서 나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은 애굽의 모든 성을 쌓는 일을 하는 이스라엘을 바로가 놓아주지 않았기에 어려웠다. 그것 말고도 또 다른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생활에 익숙해져 있어서 비록 노예로 살지만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으니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았기 때문에 불확실한 가나안 땅을 향하여 모험을 하느니 조금 자유가 억압 되더라도 노예로 남기를 원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실 안주이다.

    출애굽을 가로막는 것은 외부적인 것과 내부적인 것이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출애굽은 인간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계획하에 이루어 진 것인데

    첫째, 출애굽은 무엇보다도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사건이다. 아시다시피, 출애굽은 한방에도 끝내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지만 10가지 재앙을 통해 천하에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한방이라는 짧은 시간보다는 여러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이기시는 것을 보여주심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보기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매일 드리는 삶의 예배에서 하나님이 승리하시고 인간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항복하는 삶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둘째, 출애굽은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경험하는 사건이다. 잘알다시피, 이스라엘은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누룩을 포기하는 대신 애굽 사람들에게서부터 은금 패물과 의복을 얻게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주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12:35-36) 이처럼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수없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채워주심에는 애굽의 누룩을 포기해야 하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애굽에서 누리던 죄악된 습관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채우심을 만나는 조건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출애굽은 ‘주의 군대’로 살아가는 첫 걸음입니다.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때에 바로 그날에 주의 모든 군대가 이집트 땅에서 나왔은즉”(12:4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당신의 군대라고 칭하셨습니다. 백성이 아닌 군대라는 직위를 부여하셨습니다. 왜 군대라고 하셨을까요? 군대는 백성이라고 말할 때와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군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절대복종, 일사불란한 행동, 결사항전, 강한 결집력, 뜨거운 전우애 등이 그 특징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당신의 백성임과 동시에 군대이길 원하셨습니다. 출애굽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출애굽은 광야를 거쳐야 하고, 가나안에서 기존의 세력들과 대대적인 전쟁을 치러야 하는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가나안 정복은 군대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과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여정이 이와 같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죄악에서 구원받은 이후 우리는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안식을 얻기 위해 가나안의 죄악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여정은 영적 싸움의 연속입니다. 마귀와의 연속적인 싸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영적 전투’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군대여야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권면을 생각해야 합니다. “너희가 마귀의 간계들을 능히 대적하며 서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것은 출애굽의 삶입니다. 애굽에서의 삶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살던 습관을 떨구어내야 합니다. 이젠 주의 군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채우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신앙과 삶이 절대복종, 일사불란한 행동, 결사항전, 강한 결집력, 으로 꽉 채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출애굽의 밤에 행한 유월절을 행사를 통해 이스라엘은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늘 생생하게 기억하여야 했다. 이리하여 한 해의 흐름을 따라 순환 반복되는 여러 명절 가운데 유월절은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 유월절의 내용 가운데에는 예수님께서 유월절 양으로 모든 인류를 위해 돌아가신 십자가의 속죄 행위가 예시되어 있는데, 이는 온 세계에 미치는 구원 행위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능가하는 대사건이 된다.

    (고전 5:6-8)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뜨게 함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며 악하고 사악함의 찬 누룩으로도 말며 오직 순수함과 진실함의 누룩없는 빵으로 하자

    “출애굽의 의미”는 결론적으로 출애굽은 고센땅에서 가나안으로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소속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종에서 주인의식을 갖고 아들로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환경적인 변화보다도 하나님께서 주신 신분의 변화입니다.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고 애굽에서의 430년간의 종살이에서 하나님의 열심으로 10번째 재앙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이집트로부터 출애굽한다(출 12:37). 그들은 미이라가 된 요셉의 시신을 수습하여(출 13:19) 중다한 잡족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한다. 이때 장정만 계수하여 60만이 이집트를 벗어났다(출 12:37-38).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은 야곱과 그의 가족 70명이 430년 전에 시작되었는데 애굽 즉 라암셋(고센 땅)을 떠나서 가나안(숙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출애굽입니다.

    그럼, 출애굽을 하는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

    출애굽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의해 이미 430년 이전에 약속하셨고, 야곱의 가족들을 애굽으로 이주시켰는데 이 430년 동안 엄청난 인구폭발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70명을 가나안이 아닌 다른 곳으로 보냈다면 그들은 다 죽어서 없어졌을 것입니다. 애굽의 울타리에서 바로를 잠깐 사용하셨습니다. 고센 땅이라고 하는 라암셋은 삼각주 지역이라서 굉장히 기름진 땅으로 농사를 두 번 지을 수 있는 땅입니다.

    그 곳에서 농사짓게 하셨고 폭발적인 인구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출애굽은 곧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 구원은 히브리민족의 노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애굽으로부터...바로로부터... 출애굽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애굽이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를 누르고 있는 바로는 무엇입니까?

    육신적인 것이 있을 수 있고, 환경적인 것이 있을 수 있고, 여러 가지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나를 억누르고, 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의 힘 앞에, 애굽의 그 곳에서 우리를 탈출시키려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저와 여러분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긋지긋했던 애굽에서 출애굽을 했듯이 오늘 죄악이 관영한 이 세상에서 출애굽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

    (1) 희생의 제물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애굽에서 어떻게 출애굽을 할 수 있었습니까? 희생의 제물입니다.

    출 12장 29절을 보면, “29..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애굽 땅에 있는 처음 난 것은 재앙으로 인해 다 죽게 됩니다. 유월절의 제사는 어린 양의 희생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장자의 재앙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악한 세상에서 구원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희생의 제물입니다.

    희생의 제물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서 땀과 피와 눈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은 이렇게 표현됩니다.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과 허물과 우리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찔리시고, 상하시고, 징계 받으신 이 희생의 댓가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길 때 예수님의 희생의 제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내 생각은 별거 아닙니다. 지식, 학식이 나를 세워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플러스, 알파가 필요합니다. 그 알파가 하나님의 손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구원하심은 완전한 구원

    탈출은 도망치듯이 밤중에 몰래, 빈손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출 12장 35절을 보면,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이집트 사람들에게서 은 보석과 금 보석을 의복을 구하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금 패물을 가득 가지고 나왔습니다.

    38절을 보면,

    “38 섞인무리와 양떼와 소떼와 심히 많은 가축도 그들과 함께 올라왔더라 ” 도망쳐 나온 것이 아니라 양과 소와 많은 가축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떳떳하게 댓가를 받고 나오는 것입니다. 완전한 구원은 부끄러운 구원이 아니라 당당한 구원입니다.

    완전한 구원의 모습입니다. 430년 전, 야곱의 70명의 식구들이 애굽에 들어갔을 당시는 먹고 살려고 그곳에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과 전혀 다른 출애굽 행진을 하는 것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잃어버렸던 기쁨과 행복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고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출애굽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출애굽의 구원은 세상이 요구하는 그런 가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출애굽을 하면 애굽보다 더 좋은 곳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복받고 잘사는 것이 주 목적이 아닙니다. 환경의 변화가 아닙니다. 편안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육적인 고통에서 벗어나서 은금 패물이 생기고, 양과 소가 생기는 것이 새로운 삶의 구원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3. 출애굽 프로젝트에 택함 받은 모세

    비전의 사람치고 한 번쯤 모세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에덴을 상실한 인류의 꿈이기 때문에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누구나 모세를 한번쯤 꿈꾸게 된다는 것입니다.

    꿈꾸었던 사람 모세, 꿈을 잃어버렸던 사람 모세, 비록 모세는 이스라엘인으로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출애굽 프로젝트’에 불림을 받기 전까지 이스라엘의 국적자가 아니었다. 그는 애굽 국적으로 살다가 도망하 미디안 국적을 가지게 되었고 운명이 자기에게 준 가혹한 인생살이에서 십보라와 결혼하고 미디안의 목자가 되었다.

    목자의 삶은 왕자로 살아왔던 모세의 분노와 좌절, 상실감과 비참에 빠진 청년의 혈기와 투지를 삼켰다. 광야의 목마름, 추위와 더위, 고독과 무의미는 그에게서 말을 빼앗아 버렸다. 처음에 그는 애굽의 추적을 피하며, 생계를 도모하기 위해 양떼와 함께 광야로 갔다.

    그는 광야에서 점점 혼자 사는 일에 익숙해졌고, 광야의 고독과 자유에 젖어서 복잡하고 추악한 인간 사회를 잊었으며, 그는 광야에서 세상을 넘어서는 무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자신운명에 대하여 아무런 원함이 없는 사람, 사십 일 동안 말 한 마디 없이 살 수 있는 침묵의 사람, 물을 마시지 않고 여러 날을 버틸 수 있는 사람, 굶주려도 공포에 빠지지 않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 그는 어떤 모욕과 비난도 감내하는 인내의 사람, 의식주와 미래를 신의 손에 맡긴 단순한 사람, 인간을 넘어선 초자연의 힘에 승복하는 사람, 대자연의 변화무쌍을 이해하고 순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고 훈련되었다. 그는 광야의 초인이요, 은자와 인생의 달관자로 남은 삶을 살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찾았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출애굽 프로젝트’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부름에 정색하며 무겁게 입을 연다. 그는 자신이 그 프로젝트를 감당할 수 있는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모세의 첫 번째 발언) “내가 누구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까?”

    모세의 부정적인 대답에 당혹한 하나님께서 간청하는 어조로 ‘반드시 그와 동행하며 출애굽이 완성된 후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의 광야생활의 터전이었던 산에서 기쁨의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라고 설득하신다. 그럼에도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출애굽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동행하며 모든 것을 책임져 주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에게 자신이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고 솔직하게 털어 놓는다.

    (모세의 두 번째 발언)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의 길고 긴 설득 끝에 이어지는 세 번째 모세의 발언은 자기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며 그들이 자기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의사 개진을 한다.

    (모세의 세 번째 발언)“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다급해진 하나님은 그에게 줄 능력과 기적을 미리 체험케 하고자 지팡이와 모세의 손으로 기적을 일으키게 하시며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말씀해 주신다. 그러나 모세는 40년 광야생활에 시달리며 혀가 굳어져 어눌해진 ‘실어증’을 언급하며 간곡히 사양한다.

    (모세의 네 번째 발언)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이니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인내가 한계에 달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애굽으로 가면 입에 할 말을 주겠다’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프로젝트에 대하여 끝까지 흥미가 없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 간청하였다.

    (모세의 다섯 번째 발언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

    모세의 부정적인 반응에 마음이 상한 하나님께서 모세의 의견을 수용하였다. 그리고 출애굽 프로젝트를 일부 수정하여 말 잘하는 레위인이자 모세의 친형인 아론을 모세와 함께 쓰기로 하였다. 그러나 모세는 고맙다든지 아니면 최선을 다하겠다든지 일체 말이 없다.

    그는 호렙산 가시덤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아내와 장인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평상시나 다름없이 조용하다. 장인 이드로에게 ‘애굽에 가서 친척들의 안부를 물어 보겠다’는 그의 말에는 ‘출애굽 프로젝트’와 하나님을 만난 기적에 대한 흥분도 감격도 없다.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단순하고 우직하고 초라한 사람이 보일 뿐이다.

    하나님의 특사로 애굽에 들어간 모세는 생사를 함께 나눌 인간관계도 없고 소속 당파와 그룹도 없고 가문의식도 희미한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다.

    생각해 보라! 그들에게는 수십 년 동안 애굽에 저항하며 60만 이스라엘을 이끌어온 나름의 체계와 조직이 있고 생사고락을 함께 한 지도자와 참모들이 있을 터인데 누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들먹거리며 나타난 나그네, 이방에서 살다가 굴러온 돌을 지도자로 떠받들겠는가!

    당시 압제받는 60만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지주, 실권자는 아론이었다. 형 아론 또한 동생인 모세에게 지도자 자리를 내어줄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출애굽 프로젝트’의 중심으로 기용하셨고 모세가 안심하고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아론을 보조자로 부르기로 하셨다.

    광야 40년 동안에 반복되는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은 의식주 문제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다른 문제는 차치하고 목마름과 배고픔은 가장 기초적인 생존의 문제이기에 열악한 환경 속에 있는 백성들의 괴로움을 한 눈에 헤아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모세는 단 한 번도 물과 밥의 문제를 미리 하나님께 아뢰어서 소요에 이르기 전에 해결하지 않았다. 항상 난리가 난 뒤에 하나님께 아뢰고 문제를 해결하면서 백성들을 훈육하였다.

    모세가 왜 백성들의 고통에 민감하게 바로 바로 대응하지 않았는가를 묵상해 본다. 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목마름과 추위, 배고픔과 더위에 훈련되어서 전천후 인간이 되어 다른 사람들 또한 자기처럼 강한 사람일거라고 착각하여 백성들이 자기처럼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모세는 하나님에 의해 강제로 끌려나온 후에 ‘출애굽 프로젝트’에 자기의 남은 삶을 바쳤다. 그 과정 속에서 지도자들의 반란과 백성들의 애굽으로의 복귀 운동, 불평불만 세력의 책동, 의식주 곤란으로 인한 폭동, 우상 숭배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 등으로 사람들을 죽여야 했다. 백성들은 날마다 애굽과 약속의 땅, 하나님과 우상, 폭력과 평화, 생명과 죽임, 신앙과 불신앙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야 했고 그 결과로 남은 자들만이 가나안으로 전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세는 약속의 땅 문전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비스가산에서 조상에게로 돌아갔다.

    모세가 죽었을 때도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 하였다. 그러나 모세를 위하여는 ‘온 회중’이나 ‘온 족속‘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모세를 위하여 온 백성이 애곡하지 않았다는 것은 모세에게 유감을 가진 백성들이 있다는 말이다. 그는 인기를 추구하는 대중정치가, 선동적인 리더가 아니었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을 위하는 지도자였다.

    모세가 하나님을 향하여 바르게 행하였기 때문에 ‘출애굽 프로젝트’는 사산과 도산, 난산과 만산의 위기를 통과하며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가 융통성 없이(?) 하나님께 철저하게 순종하며 악역을 담당한 것으로 인하여 상처받은 사람들이 왜 없었겠는가!

    모세가 아론처럼 ‘좋은 사람’이란 말을 들으며 인기를 탐하였다면 우리 인류에게 영원한 모형이 되는 혁명의 대역사 ‘출애굽'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모두가 정말 가나안들어가기를 원한다면 모세가 하나님께 순종하였던 것을 배워 실천해야 하겠다. 출애굽을 하였다고 모두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과야는 가나안을 들어가는 또하나의 과정이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만 차지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다시한번 새겨봅시다. 아멘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