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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 아달랴 축출을 위한 제사장 여호야다의 거사말씀 2018. 7. 15. 17:56
아달랴 축출을 위한 제사장 여호야다의 거사
왕하 11; 1-12, 대하 22 :1-12
왕하 11:1, 대하 22:10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가의 모든 씨를 멸하였으나
(왕하 11:1-12)
1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 의 모든 씨를 멸하였으나
2 요람왕의 딸 곧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 스를 취하여 죽임을 당한 왕의 아들들 가운데서 그를 훔쳐 내니라. 그들이 그와 그의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에게서 피하게 하였으 므로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라.
3 그가 그녀와 함께 주의 집에 육년 동안 숨어 있었고 아달랴가 그 땅 을 통치하였더라.
4 일곱째 해에 여호야다가 사람을 보내어 백명을 다스리는 치리자들을 대장들과 호위대와 함께 부르고 주의 집으로 그들을 데리고 들어가 그들과 언약을 맺으며 그들로 하여금 주의 집에서 맹세하게 한 뒤에 왕의 아들을 그들에게 보여 주고
5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 중에 서 삼분의 일 곧 안식일에 들어가는 자들은 왕의 집을 주의하여 지키 라.
6 또 삼분의 일은 수르 문에 있고 삼분의 일은 호위대 뒤에 있는 문에 있어서 너희가 이와 같이 그 집을 주의하여 지켜 그것이 침범당하지 아니하게 하라.
7 또 안식일에 나아가는 너희 모든 사람의 두 무리 곧 그들은 왕을 위해 주의 집을 주의하여 지키되
8 너희는 각각 손에 병기를 잡고 사방으로 왕을 에워싸며 구역 안에 들어오는 자는 죽이고 왕이 나가고 들어올 때에 왕과 함께 할찌니라, 하니라.
9 백인 대장들이 제사장 여호야다가 명령한 모든 것대로 행하여 그들이 각기 안식일에 나와야 할 자들과 함께 거느리고 제사장 여호야다에게 나아오매
10 제사장이 주의 성전에 있던 다윗왕의 창과 방패들을 백인 대장들에게 주니라.
11 호위병들이 각각 손에 무기를 잡고 왕을 둘러싸되 성전의 오른쪽 모서리에서부터 성전의 왼쪽 모서리까지 제단과 성전 옆에 서고
12 그가 왕의 아들을 데리고 나와 그에게 왕관을 씌우며 증언 책을 주매 그들이 그를 왕으로 삼고 그에게 기름을 부으며 손뼉을 치고 말하기를 국왕 폐하 만세, 하니라.
측천무후를 알고 계시나요.. 중국 서안시 건현 양산에 있는 무자비한 여황, 측천무후비석이 있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력을 보인 통치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측천무후에 대해 살펴보자.
측천무후는 당나라 초기에 태어났는데 빼어난 미모 덕분에 14살에 태종의 후궁으로 뽑혔는데 측천무후는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태종이 죽고 난 뒤 절에 가서 비구니가 됐죠. 당 태종의 아들 당 고종은 그녀를 눈여겨 보고 다시 궁궐로 데려온다. 하지만 무측천은 여기에 만족할만한 인물이 아니였다. 그녀는 왕씨 밑에 들어가 왕후를 제거하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무측천이 고종의 딸을 낳았는데, 그것을 축하해주러 왕씨가 갔지만 왕씨가 가고 난 뒤 무측천이 자신의 딸을 질식시켜 죽어버린 후 왕후가 무측천의 딸을 죽인 것으로 덮어 씌워 이 사건을 계기로 왕씨가 폐위되고 무측천은 황후자리에 오른다. 이제 그녀가 80세가 되어 병들어 죽을 때 그녀는 묘비에 아무 것도 기록하지 말라고 부탁하는데 양산에 있는 당나라 고종황제의 건릉에는 황제의 비석 옆에 신기하게도 아무 글도 새겨져 있지 않은 비석하나가 유구한 세월의 풍상을 견디며 우뚝서있다. 도대체 누구의 묘비이기에 아무 비문도 없이 그것도 중국황제의 비석과 나란히 서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여자의 몸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16년 동안 중국 천하를 다스린 측천무후의 무자비(無字碑)비석이다. 평민 출신으로 천거 받아 황궁으로 들어가 피비린내 나는 암투 속에 마침내 황후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아들도, 딸도 죽이고 황제가 되어 무소불위(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라는 뜻, 즉 무슨일이든지 할수 있는 힘, 권력을 나타내는 표현)의 권력자가 된다. 그러나 결국은 비석에 글자하나 남기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된다.
1.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막고자 하는 사탄의 전략
축전무후와 같은 악행을 한 여왕이 유대역사 가운데 바로 아달랴이다. 젖먹이 손자까지도 죽이고자 했던 아달랴의 악행을 통해 우리들이 반드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막고자 하는 사탄의 궤계가 이것이 처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상 사단의 이런 음모는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자행되었다.
(1)아브라함의 처를 바로왕에게 뺏길번 한 사건
아브라함이 애굽 왕 바로를 두려워하여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 바로의 후궁이 되게 한 사건도 사실은 아브라함의 후손(씨)으로 와야 할 구원자가 오는 길이 막혀버릴 위험한 사건이었지만 그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를 지켜주심으로써 언약을 보존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볼 때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여자의 후손으로(창 3:15), 아브라함의 씨로(창 22:17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또 네 씨를 하늘의 별들같이 바닷가의 모레같이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니 네 씨가 자기 원수들의 문을 소유하리라)올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2) 모세를 물에서 건져 낸 사건
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 남자아이는 다 죽이라고 한 바로의 명령도 아브라함의 씨를 말리고자 한 사단의 음모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에 나온 인물이 모세이다. 모세란 물에서 건져냈다는 뜻인데 바로에 의해 유아들이 모두 살해되는 위기 상황에서 태어난(출 2:1-10 )모세는 히브리 남아로 출생한 후 삼 개월 만에 남아 살해 명령을 피해 목숨이나 부지하려고 갈대 바구니에 담겨 나일 강 물결에 버려졌으나 하나님의 섭리로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도 애굽 왕 바로의 딸 즉 애굽 공주에 의해 구출되어 공주의 양자가 되어 오히려 애굽 최고의 신분과 교육 배경을 가지고 성장하게 된 사건을 보여 준다.
(3) 다윗과의 언약으로부터 메시야 올 것을 방해
하나님께서는 다윗과의 약속을 통해 메시야를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삼하 7:12네 날들이 차서 네가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배속에서 나올 자 곧 네 뒤를 이을 네 씨를 세우고 그의 왕국을 굳게 세우리니 말씀을 통해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방해하고자 한 사단의 공작은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베들레헴의 모든 아기들을 죽이라고 한 헤롯의 명령도 그런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4) 헤롯왕 때 베들레헴 경내의 두 살 이하의 아이 살해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미가 5장 2절) 하였음이니이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
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호 11: 1)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의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렘 31:15)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위의 사건들은 바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는 것을 방해하고자 한 사탄의 적극적인 전략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약대로 다윗의 씨를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달랴로부터 요아스를 구출해 낸 사건이다.
2. 다윗왕가를 말살하고자 하는 아달랴의 악행
아합과 여호사밧의 화친으로 아달랴가 유다 왕 여호람에게 왕비로 오게 되었는데 아달랴는 이스라엘에서 최고로 악명 높은 왕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었는데 어미 이세벨은 바알을 열렬하게 숭배했던 자로 그 어미 영향과 사단의 지배를 받는 이런 아달랴가 유다 왕 여호람의 아내며 아하시야 왕의 모친이다. 아하시야는 어머니 아달랴로부터 주 하나님대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왕이 되고 나서 아합 왕가의 길을 따르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북왕국 이스라엘과 가까운 사이가 될 수밖에 없었고, 아합의 아들 여요람이 라못길르앗에서 시리아(아람)왕 하사엘과 싸울 때 함께 했던 아하시야도 상해를 당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요람이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었을 때 아하시야는 요람을 문병갔다가 예후에게 죽임을 당하며 결국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이처럼 북왕국 아합왕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는 여호람의 아내가 되어 여호람의 악정(대하21:4-6)을 도왔다. 결국 여호람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게 되었고, 그의 아내 아달랴는 다윗 왕가를 없애고자 유다 집의 왕가의 씨를 진멸하려 하였으므로(대하22:10) 이에 유다 왕조는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만약 다윗 왕가가 무너진다면 하나님의 유다를 향한 다윗의 언약(삼하 7:12)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위기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언약을 생각하사 여호세바를 통하여 요아스를 살려 두신다. 이처럼 아달랴의 악정에서 요아스를 구출하심은 '다윗의 씨' (그리스도로 이어짐)를 없애려는 사단의 계략을 하나님께서 극적으로 역전시키시는 장면이다. 사단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여자의 후손은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창3:15)는 예언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에서 성취되어 하나님의 승리를 가져왔듯이 요아스의 사건도 하나님의 역전승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아하시야의 죽음이라도 기다렸듯이 아달랴는 왕위찬탈을 하는 과정에서 아달랴는 다윗의 씨를 없애고자 어린 손주 손녀까지 다 살해하는 중에서 요아스는 죽음의 위협에서 건짐을 받았고, 7살이 되도록 성전에서 철저하게 보호되어 자라게 되었다. 아달랴가 그 사이에 요아스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요아스를 보호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달랴가 한 행위는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다윗 언약을 파괴하려는 시도이고, 사탄에 의해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는 것을 막고자 하는 악독한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아달랴가 다윗 가문에 속한 왕의 씨들을 모조리 죽인 살육극 배경에는 사단의 깊은 음모가 있었다(왕하 11:1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가의 모든 씨를 멸하였으나). 물론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아달랴는 더 이상 자기의 왕좌를 넘보는 자가 없게 하기 위해서 왕의 씨를 말린 것이었지만, 사단은 그런 아달랴의 잔인하고 반인륜적인 살육극을 통해서 다윗의 언약을 파괴하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무효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장차 그에게서 날 후손(아들)이 하나님 나라를 세울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의 후손들이 진멸되고 만다면 더 이상 이 땅에는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올 수 없다는 사실을 사단은 노렸던 것이다.
아달랴는 아하시야를 악한 자로 키움으로써 간접적으로 다윗 왕가를 몰락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아하시야가 이스라엘 왕 여요람과 함께 아람 왕 하사엘과 싸우다가 여요람이 부상하여 그의 병 문안을 갔다가 예후에게 죽음을 당하자 아달랴는 다윗 왕가의 씨를 전멸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만일 아달랴의 계획이 성공을 거두어 다윗 집을 전멸시켰다면 다윗의 후손으로 약속된 메시야 예언이 성취될 수 없게 되는 위기를 당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여호야다를 통하여 아히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숨기게 하심으로써 사단의 궤계를 깨뜨리고 다윗 언약을 신실히 지키셨다.
3. 요아스를 왕으로 추대하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거사
요아스를 숨긴 여호야다는 하나님의 전에서 육 년 동안 양육하는 동안 아달랴가 유다를 통치하였다. 왕하 11:1절에 보면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자기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모든 씨를 멸하였으나“
요람왕의 딸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의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도적하여 내고 저와 그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여 죽임을 당치 않게 한지라"
유대왕 여호람의 왕비요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즉위하자 힘과 권세로 왕 다음가는 태후가 되었으며 아하시야가 예후에게 살해되자 왕위를 빼앗고, 그녀의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 있는 다윗의 왕통에 속하는 모든 남자를 죽여 자기의 안전을 도모했다. 그러나 한 어린 아기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 즉 그의 고모인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숨겨 성전 안에서 6년 동안을 무사히 숨어서 자랐다. 이로써 다윗의 왕통이 단절되지 않은 동시에, 메시야의 계통을 계승해 주었던 것이다.
아달랴는 아하시야의 아들을 모두 죽였으나 요아스가 살아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달랴를 심판하기 위해 그를 남겨두신 것입니다. 아달랴의 통치기간 동안 그가 성전에서 자랐지만 그에 존재에 대하여는 아달랴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거사를 누가 일으키나 하면 제사장은 무엇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입니까? 칼을 쓰는 것이 제사장의 임무가 아닙니다. 제사장은 거룩한 피를 받드는 역할을 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려는 사단의 계략이 아무리 집요해도 결국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인제 칠 년째 되는 해가 되었을 때 제사장 여호야다는
여러 사람들과 언약을 맺어 아달랴를 축출하고 요아스를 왕으로 추대할 거사를 모의했습니다(왕하11:4-11).
칠 년째 되던 해야 여호야다가 사람을 보내어 백인대장들과 호위병 백인대장들을 데려다가, 자기가 있는 성전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그는 그들과 계약을 맺고 성전에서 맹세하게 한 다음, 왕자를 보여 주었다.
그러고는 이러게 명령하였다. "그대들이 할 일은 이렇소. 그대들 가운데 안식일 당번 삼분의 일은 왕궁을 지키고, 다른 삼분의 일은 수르 문을, 나머지 삼분의 일은 호위병들 뒤쪽에 있는 문을 지키시오. 이렇게 궁전을 지켜야 하오.
그다음에 안식일 비번인 두 부대는 모두 임금님을 에워싸시오. 대열에 들어오는 자는 누구든지 죽이시오. 임금님께서 나고 드실 때에도 곁에 있어야 하오."
백인대장들은 여호야다 제사장이 명령한 대로 다 하였다. 그들은 저마다 안식일 당번인 부하들뿐만 아니라 안식일 비번인 부하들까지 데리고 여호야다 제사장에게 갔다. 여호야다 제사장은 성전에 보관된 다윗 임금의 창과 방패들을 백인대장들에게 내주었다.
호위병들은 모두 무기를 손에 들고 성전 남쪽에서 북쪽까지 제단과 주성전에 서서 임금을 에워쌌다.
그때에 여호야다가 왕자를 데리고 나와, 왕관을 씌우고 증언서를 주었다. 머리에 기름을 부은 다음 왕을 삼으니 백성들이 손뼉을 치며 "임금님 만세!" 하고 임금님 만세를 부름으로써 정식으로 즉위식을 마치게 되었다
아달랴가 호위병들과 백성의 소리를 듣고 백성이 모인 성전으로 가서
보니, 임금이 관례에 따라 기둥 곁에 서 있고 대신들과 나팔수들이 임금을 모시고 서 있었다. 온 나라 백성이 기뻐하는 가운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서 아달랴는 옷을 찢으며, "반역이다, 반역!" 하고 외쳤다. 그때에 여호야다 제사장이 군대를 거느린 백인대장들에게 명령하였다. "저 여자를 대열 밖으로 끌어내시오. 그를 따르는 자가 있거든 칼로 쳐 죽이시오. " 여호야다 제사장은 이미 성전에서는 그 여자를 죽이지 마라." 하고 말해 두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아달랴가 왕궁의 '말 문'으로 난 길에 들어서자, 그들은 그 여자를 체포하여 거기에서 그 여자를 죽였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기 위하여 잔인하게 손자들을 죽인 아달랴의 죄악에 대한 심판이었다. 아달랴가 요아스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역이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행위를 잊은 어리석은 자의 외침이었습니다. 반역은 아달랴가 다윗 집의 씨를 진멸한 것이 진짜 반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바알의 신당을 헐고, 우상을 깨뜨리고, 또 바알의 제사장을 죽였다.
아달랴가 다윗의 씨를 없애고자 살육사건의 보상은 이렇게 칠년만에 비참하게 끝을 맺게 되었다.
요아스왕은 유대나라 8번째 왕입니다. 역대하 22∼24장이 요아스에 대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아스 전체의 삶을 볼 때 그는 왕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왕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부왕이었던 아하시야왕이 죽었을 때 그 소식을 들은 왕의 어머니이고 그에게는 할머니인 아달랴가 자신이 왕권을 탈취하고자 그에겐 손자들이 되는 왕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때 요아스는 한살이었으며, 여호세바라는 고모가 그를 살려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침실에서 몰래 키워서 7살이 될 때에 요아스의 고모부가 되는 여호야다 제사장이 레위인들과 군사들을 동원해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왕통을 잇기 위해 7살 아이를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 만약 왕자들이 죽지 않았다면 그는 왕에 오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고모가 그를 살려주지 않았다면 역시 왕이 되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7살에 왕이 되어 여호야다 제사장의 지도를 받아 정치를 잘 했습니다. 그는 조상이 섬긴 우상을 다 부수고 하나님의 성전을 본 모습으로 회복하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것이 대하 24: 4-14 왕하 12: 1-5에 있는 종교개혁입니다.
대하 24: 2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 이것은 신앙생활을 잘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개혁을 단행한 요아스의 전반기 30년간 선한 왕으로 살았다.
4 요아스왕의 배도
요아스왕의 후반기에는 차라리 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는 또한 불행한 왕이 된 것입니다.
대하24: 18 그들이 주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의 집을 버리고 작은 숲과 우상들을 섬겼으므로 그가 그 당시 부쉈던 그 우상들을 다시 세우고 섬겼으며, 자기가 수리한 성전을 다시 더렵혔던 것입니다.
19 그럼에도 주께서 대언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사 그들을 다시 자신에게로 데려오도록 하셨으므로 대언자들이 그들에게 증언하였으나 그들이 들으려 하지 아니하니라.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어렸을 때에 그를 살려주었던 고모의 아들, 그가 7살이었을 때 자기를 왕으로 세워주신 그런 고모의 아들, 생명의 은인의 아들인 대언자 스가랴까지도 돌로 쳐 죽이는 악을 행한 것입니다.
22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그의(스가랴)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베푼 친절(은혜)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을 죽이니 그가 죽을 때에 이르되 주께서 그것을 보시고 그것으로 인하여 벌을 주옵소서 하니라. 그것도 하나님의 성전 뜰 안에서 그를 돌로 쳐 죽였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악으로 갚았던 정말 있을 수 없는 악을 행한 자입니다.
그러한 그를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의 고종사촌이었던 스가랴를 돌로 쳐 죽인 바로 그해가 다 가기 전에 아람군대가 쳐들어 왔습니다. 요아스는 큰 군대를 가지고도 쳐들어오는 작은 군대를 이기지 못하고 부상을 입었고, 치료 중에 있을 때 그의 신하들에 의해서 암살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25 그들이(아람사람들)이 그에게서 떠나면서 (큰 병을 앓는 그를 남겨 두었으므로) 그의 신하들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들의 피로 인해 그를 대적하여 음모를 꾸미고 그의 침상에서 그를 살해하니 그가 죽으니라. 그들이 그를 다윗의 도시에 묻었으나 왕들의 돌무덤에 묻지는 아니하였더라.
정말로 더 부끄러운 것은 그가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묘에는 묻히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성경은 원인을 이렇게 규명하고 있습니다.
대하 24: 24 시리아 사람들의 군대가 적은 무리의 사람들로 왔으나 주께서 심히 큰 군대를 그들의 손에 넘겨 주셨으니 이는 그들이 주 자기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더라. 이처럼 그들이 요아스를 치고 심판을 집행하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를 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가까이 하시고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멀리하십니다. 주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참된 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해야 하고 쏟아버리면 안됩니다.
결론은 인생이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세 가지 중요한 만남이 있습니다. 첫째는 부모, 형제, 아내를 만나게 되는 가정이며, 둘째는 직업, 직장을 만나는 것이고 셋째는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부분을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지고, 인생의 결과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유대 5대왕 여호람은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주는 세 가지 면에서 아달랴를 만난 것은 첫 단추를 다 잘못 끼웠습니다. 32세에 왕위에 오른 여호람은 권력을 남용하여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게 됩니다(4절). 그는 주어진 직책을 바르게 시작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유다에는 평화의 시대가 사라지고 그가 왕위에 오른 지 8년 만에 창자가 고치지 못하는 심한 병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왕비 아달랴를 만나 부인의 잘못된 영향으로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은 방법으로 왕권을 사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나의 사는 날 동안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먼저 하나님이 주신 직분을 바르게 사용해야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시어 목사로, 장로로, 집사로 직분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직분을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직분을 맡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를 세우고 우리를 온전케 만들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재능이 많으면 많을수록, 직분과 직책의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겸손하여 교회의 덕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은 하나님이 주신 가정에서 바르게 시작해야 합니다. 여호람왕의 인생의 첫 출발은 좋았지만 배우자와 만남이 잘못되었습니다. 여호람 왕의 배우자가 된 아달랴는 북쪽 이스라엘의 7대 왕, 아합의 딸이며(6절) 아합 왕은 아람 나라의 침략을 막고자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한 사람입니다. 이세벨은 교활한 바알 숭배자였고 엘리야 선지자를 죽이려고 끝까지 찾았던 여인입니다. 여호람의 아버지 여호사밧은 훌륭한 왕이었지만 이런 가정에서 자란 아달랴와 결혼시키는데 가장 큰 실책을 저질렀습니다(대하18:1). 그 결과 국가는 대 위기를 당하고 가정은 깨어져버립니다.
끝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시작해야 형통한 복을 받습니다. 여호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첫 단추를 잘못 끼웠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왕이 되자마자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바알 신전을 부수어 버리고 아세라 신상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산당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여호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대하 21:6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걸어 아합의 집이 행한 것 같이 행하였으니 이는 그가 아합의 딸을 아내로 맞았기 때문이라. 그가 주의 눈에 악한 것을 행하였더라) 열조의 하나님을 버렸으며(10 이는 그가 주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더라) 유다의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워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우상을 숭배하도록 했습니다.(11 그가 유다의 산들에 산당들을 세워 예루살렘 거주민들로 하여금 음행을 하게 하고 또 유다를 억지로 그리하게 하였더라) 그는 왕위에 오른 후부터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로 하여금 우상 숭배를 거두라고 경고합니다(12 대언자 엘리야가 그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되 주 곧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네 아버지 여호사밧의 길들과 유다왕 아사의 길들로 걷지 아니하고). 그런데도 여호람 왕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파멸의 길을 갔습니다. 결국 그가 죽자 아무도 분향하지 않았고 아끼는 자가 없었고, 열왕의 묘실에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19∼20절).
유다 나라의 왕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앉혀지는 자리이기에 끊어지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끊어지면 하나님의 언약이 무용지물이 되는 사태가 되어버립니다. 물론 마귀는 이 점을 노리고 아달랴라는 왕후를 통해서 이 일을 성사시킬려고 하였지요. 메시야가 기어코 이 땅에 오지 못하도록 사단도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 하고 있습니다. 만약 왕자가 전멸 당한다면 이는 다윗의 혈통이 끊어지는 것이 되고 그렇게 되면 메시야, 즉 구세주가 오실 수 없는 겁니다.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부터 대대로 이어져서 구세주로서 태어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구세주가 태어나면 이 때까지 세상을 지배해온 마귀들은 끝 나 버리는 것입니다. 어린 양되시는 메시야가 마귀사탄들을 쳐부수고 이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게 하시고자 오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거기에 대한 내막을 모르지요. 인간들은 밥이나 먹고 살면 된다고 하는 그런 자기 생존 문제에만 관심이 있지 메시야나 마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는 그 순간에도 악마는 노리는 것은 메시야가 오는 것을 어쨌든 막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메시야의 오시는 선을 끊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기선을 끊어 버렸다면 전기 불이 오지 않듯이 인류를 구원하는 데 연결되는 그 구원의 선을 끊고자 마귀는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마귀의 인류구원파괴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자기 하는 일에나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그런 존재들이지요. 실제 예화가 마태복음 8장에 나옵니다.
마귀 들린 자에게 예수님이 오니까 마귀 들린 자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나는 당신을 압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 이지요? 당신은 우리 를 지옥에 넣으려고 왔겠는데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는데 왜 벌써 왔나요?"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마귀야 청년에게서 나와 어디갈래?" 마귀들이 그 동리에 있는 돼지 때에게 들어가기를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이 허락해 주었더니 돼지에게 들어간 마귀들이 돼지 떼들을 바다에 빠뜨려 몰살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반응을 한 번 보세요. 이 마을 사람들은, 저 마귀 들렸던 청년이 어떻게 갑자기 멀짱하게 되었으며 어째서 가만있는 돼지들이 바닷물속으로 돌진하는지 관심을 두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과 마귀들인 청년에게는 아예 관심도 없고 오직 돼지몰살한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아. 내가 키운 이 돼지가 돈이 얼마인데 세상에 이걸 하루에 다 날리게 되었는데 하며 그것만 안타까워합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돼지를 누가 죽게 했나를 조사했더니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찾아가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수여, 이 마을을 떠나주소서!" 이것이 인간들이 예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메시야가 오셨는데 영접할 생각은 안하고 예수여 이 곳을 나가주소서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예수님이 왜 오셨습니까? 피를 흘려서 우리의 죄값을 속죄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18-22절을 보면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방금 읽어드린 본문에 수많은 돼지가 날라가 버린 그 데가볼리 주민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그들에게 들려주기를 예수의 피가 언약의 피이고 구원하는 피라 할지라도 그들은 날라가 버린 돼지가 더 중요하지 예수님의 피에게는 관심이 더 가겠습니까?
동방박사들은 메시야를 따라와서 몰약과 유황과 황금을 바쳤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마귀를 쫓아내 주어도 이들에게는 자기 돼지를 잃어버렸다고 예수님을 다른 곳에 가라고 말한 그 주민들이 과연 구원받겠습니까? 그 사람들이나 교회 앉은 우리들이나 생각하는 바가 똑같은지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이 돼지였기에 예수님에게 자기 곁에서 떠나주시기를 간청했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붙들려 하는 것인가?
이처럼 정작 죄인은 바로 나구나 예수님은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셨구나 나 같은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구나를 우리들이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예수님만을 바라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돼지 잃었다고 예수님에게 나가라는 무리 속에 나자신도 포함되는 것이 아닌가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주여 제는 정말 저밖에 모르는 부족한 인간입니다. '나'라는 악마를 추방해 주시고 이제는 그 빈 맘에 나를 구원하러 왔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바로 내 영혼에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라고 생각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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