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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1 사무엘 선지자의 고별사
    말씀 2018. 7. 1. 10:56

    사무엘 선지자의 고별사 삼상12:1-15

     

    2018년 들어오면서 우리사회는 미투운동의 확산이 교회에 까지 튀어 만민중앙교회 이00목사, 성락교회 김00목사등도 이 운동에 혐의가 들어나면서 다시한번 교회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하였다. 사실 우리나라 교계의 비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2014MBC PD 출신인 김재환 감독이 제작한 '쿼바디스'는 한국 대형 교회 목회자들의 비리를 고발한 다큐영화인데 한국교회는 점점 커졌고 예수는 점점 작아져보이는 한국 교회의 비상식성을 고발하는 영화로서 이 영화 때문에 한국교희 비리가 사회에 많이 알려지기도 하였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교회가 이 영화가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며 해당 자료를 삭제하지 않고 개봉을 강행할 경우 법적 조치로 강력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하였고 또 일부 대형교회 신도들도 쿼바디스를 상영하면 불매운동을 벌이겠다며 압력을 넣는 바람에 이 영화가 기대 이상으로 관객을 동원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지금도 어느 대형교회목사가 여성신도와의 성추행 논란으로 현재 구속 상태인데 교계에서 성적스캔달은 이번이 처음 아니며 이 쿼바디스 영화에서도 보면 성추행 논란으로 교회를 사임하면서 전별금 13억을 받아 새로 교회를 차린 전00목사가 나오는데 이런 문제로 자숙하기는 커녕 다시 교회를 개척하는 것을 보노라면 도대체 그런문제로 유명해 졌다고 그런교회를 찾는 교인들은 과연 어떤 수준인가 다시한번 놀라게 한다. 또 이 쿼바디스 영화에서는 대형교회 목사들이 교회헌금을 횡령(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사람이 재물을 부정하게 유용하거나 반환을 거부함으로 성립하는 범죄) 유용(재물을 원래의 목적에 사용하지 않고 부정하게 다른용도로 사용하는행위) 배임(타인의 사물를 처리하는 사람이 그 사무에서 불법행위를 하여 재산상 이득을 취하거나 당초의 본인에게 손해를 가하는 범죄) 혐의로 법원에 출두하면서도 '이 고난은 조개가 진주를 만들어질때의 고통같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연단'이라고 설교하는 조00목사. 박사 학위 논문을 표절하고서도 논문표절 건을 말하는 장로에게 "아이고 굉장하시네요 어떻게 찾았습니까?"하며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00목사 등을 보고 이 영화에 언급되는 인물들 한명 한명이 교계에서는 막강한 자신들만의 성을 쌓고 있는 목사들이 아닌가. 이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추악한 잘못들에 대해 회개나 사과의 태도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보란듯이 더 전면에 나타나 자신을 따르는 성도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만들고 있다. 이처럼 개별 교회들의 추문은 전에도 몇 번 여러 PD수첩이나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다루어 졌기도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이런 교회 비리들이 단지 믿음이라는 단어로 덮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는 이런 비리와 불법을 보면서 나 한사람 눈감고 있으면 되지 하는 것이 믿음있는 사람이 행할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비리를 파헤쳐서 한국교회가 거듭나는 기회를 삼자는 것이 본 영화를 제작한 이유라는 것이다. 특히 이 영화속에는 가상의 캐릭터 2명이 나오는데 그들을 통해 한국교회의 맨얼굴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쿼바디스(Quo Vadis)라는 말은 라틴어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뜻이다. 지금 누구의 가슴도 뛰게 하지 못하는 한국 교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쿼바디스 한국교회? 이다.

    인류역사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선악과를 따먹은 탐심으로부터 시작하여 인류는 범죄하여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 났는데 이런 탐심은 인구가 증가하고 사회가 다변화 될수록 더욱 기세를 부려 이 사회를 더 타락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교회사를 통해 본다면 탐욕의 막장은 16세기 독일의 주교 선거에서 시작된다. 독일 마인츠의 대주교가 되기 위해 엄청난 선거비를 탕진한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빚을 갚기 위해 교황청에 면죄부 판매권을 요청한다. 탁월한 슬로건과 효과적인 판매 전략에 의해 면죄부는 불티나게 팔려서 세상을 어지럽혔다. 종교가 가장 멀리해야 할 탐욕을 가장 가까이에 두었던 부패한 구교는 면죄부 판매로 인하여 결국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하였다. 종교개혁후 새로 생긴 개신교 역시 세월이 지나니 또 종교개혁이전의 구교보다 더 심한 탐심으로 인한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누가 말하기를 예수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그리스로 가서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가서 제도가 되었고 유럽으로 옮겨가서 문화가 되었고, 미국으로 가서 교회 기업이 되었는데 마침내 한국에 왔을 때 교회는 대기업이 되었다는 의미심장한 말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가 한국으로 들어온지도 벌써 130여년이 지났는데 그동안에 개신교 교회수는 대략 8만개라고 하는데 이는 한 집 걸러 하나씩 있다는 전국의 편의점 숫자 39000개 보다 두배가 넘는다는 얘기다. 이렇게 많은 전국 교회가 한 해 거둬들이는 헌금이 약 18조원가량 이라는 추정마저 나온다. 이런 대형교회가 선한 일도 많이 하지만 교회를 점점 대형화 시키는 원인은 더 많은 현금이 들어오기 때문에 교회는 대형화 추세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택한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곳인데 과연 크리스천들이 꿈꾸는 교회가 오늘의 모습이라면 쿼바디스 라는 영화가 제작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인데 이 쿼바디스라는 영화가 대체 무슨 영화이기에 개봉전부터 해당 교회 관련 장면들을 삭제해달라는 내용증명을 보낸 것이 이 영화를 유명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MBC PD 출신인 김재환 감독이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었을 때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이야기인데 아무도 말하지 않기때문에 이영화를 제작하였다고 말한다.

    재밌있는 건 이렇게 통렬하게 기독교의 내부고발 전문이라고도 하는 김 감독이 모태신앙이라는 점이다. 일부 목사들은 교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준다며 그를 비난했을 지라도 정작 본인은 그 죄를 <쿼바디스>에 뒤집어씌우는 건 선후 관계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개독’, ‘먹사등 교회를 비하하는 안티기독교인에게 진짜 기독교는 이런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교회신도들에게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모순을 외면한 채 침묵하고 순종적인 것이 곧 믿음이 아니고 이제는 옳지 않은 것에 대해 강력하게 분노를 표현할 줄 아는 모습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수는 사실 약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편이 되어 그들 처지를 대변해주려고 노력했죠. 그러면서도 권력의 잘못을 지적하고 저항하는 그 모습을 닮아가야죠.” 하나님도 못 한다는 한국 교회 개혁을 이 영화 <쿼바디스>가 과연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성도들이 눈물 흘리며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자신의 배만을 채우는 목사들. 또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수 있을 만큼 추잡한 성추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목회를 이어가고 있는 목사들, 이렇게 기형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한국 교회의 모습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가? 그저 영화에서 처럼 곧 멸종할 수 밖에 없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그 끝이 어떻게 될지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말기암 환자처럼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인 지금의 한국교회인 것만은 틀림없다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영화는 마지막에 예수님의 독백처럼 회개하라’ ‘돌아오라같은 메시지를 던질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감독은 예수 분장을 한 배우의 입을 빌어 말한다. "너희는 어디로 숨었는가?"라고. 마치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판단은 관객에게 공을 쥐어주는 듯 하다. 이제 영화를 보고 공을 쥔 관객으로서의 그저 단지 '재미있는 다큐였다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베드로의 고백처럼, 쿼바디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쿼바디스 주여 한국교회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요? 그리고 저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라는 고백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구원시켜 천국으로 데리고 가고자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죽기 전에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너희에게로 와서 나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셨는데 이 말씀을 믿지 않았다는 증거가 오늘의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면 천국을 믿지 않는다면 당연히 지옥도 믿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수명이 길다해도 100년후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지만 그후엔 심판이있다(9:27)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곧 심판에 의해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 진다.

    당신이 천국에서 영원을 보내야할지. 지옥에서 영원을 보내야할지 이땅에서 사는동안 깊이 생각해야한다. 만약 아무 대책도 없이 살다가 지옥에 떨어져 대성통곡한다해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기회는 살아있을 때만 딱~한번 뿐이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소홀히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겐 엄중한 지옥심판이 있을 뿐이다. 지옥은 영원히 불타는 불못이라 누구나 견딜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마가복음 9장에는 지옥에 대해 세 번이나 강조하는데 지옥에는 그들의 벌레들도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9:44).

    살아있을 때는 어떤 큰 죄도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은후에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살아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자만이 그 지옥의 심판을 면할 수가 있다. 천국가는 길은 단 한길.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길 밖에 없다.

    설마하지 마라. 지금도 루시퍼는 온천하를 꾀는 타락한 천사장이다.

    루시퍼는 지옥 보좌에 앉아서 졸개들을 지상으로 파견하여 인간들을 죄짓게 하여 그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인데 매 순간마다 인간이 있는 곳에서는 늘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의 보좌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지옥의 보좌에는 루시퍼가 있다

    루시퍼는 인간을 지옥으로 끌고 가서 사람들을 생선처럼 취급하여 삶아먹고 구워먹고 온갖 끔찍한 형벌을 가한다 이 모든 것이 영의 세계 실상이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이사실을 모르고 속아 죄짓고 회개치 않아 지옥에 떨어지고 있다.

    지금 한국은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음란한 도시임에 틀림없다.

    부정부패한 세력들만 득실득실한 사회 하루가 멀다하고 우후죽순 생기는 건 교회의 빨간 십자가인데. 왜 이사회는 더욱 죄악을 향해 가는 것일까? 이는 주님의 대변자임을 사칭하며 자위적으로 말씀을 해석하는 함량 미달자인 목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십여년전인가 기독교협회 최고 수장인 목사가 십계명에도 명시된 간음하지 말라를 어기면 어떻게 된다는 걸 몸소 보여주기 위해 교인성도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남편에 들기게 될 처지에 되자 베렌다 에어컨 실외기를 붙들고 있다가 황천간 사건이 기억난다. 천국을 가기 위해 이 세상에서 극복해야 할 것은 성적인 탐욕과 물질에 대한 탐심이다. 이 두가지만 극복할 수 있다면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사탄은 인간이 가장 벗어나기 어려운 이 문제를 놓고 우리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불법은 혼자만의 힘으로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가 고발하고 그러기 위해선 나하나 천당가겠다고 일신의 안위만 집착한 나머지 주위의 부정과 불의를 묵인하고 눈감고 있으면 오히려 주님을 배신하는 행위임을 알어야 한다. 주님의 이름을 팔아 사리사욕의 바벨탑을 쌓고 있는 작금의 한국 교회의 죄악에 참담함을 느낄 뿐입니다.

     

    1. 여호수아의 청렴결백

    옛부터 청렴결백이란 마음이 고결하고 재물에 욕심이 없으며, 행동이나 마음이 깨끗하여 허물이 없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인간답게 생활할 수 있는 요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청렴하며 자기 분수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 우리조상들은 조선시대부터 비록 배고파도 떳떳하고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가를 즉 청빈이 중요시되는 문화적 전통을 가진 나라였다.

    조선왕조의 청백리들이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이름을 빛내고 있는 청백리중 한 사람인 오리 이원익은 선조, 광해군, 인조의 3대에 걸쳐 영의정을 4번이나 역임하였지만 그에게 집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청렴결백한 성품을 잘 아는 왕이 그가 노인이 되어 빈궁한 삶을 딱하게 여겨 그에게 금침과 비단으로 된 의복을 하사 하였으나 그는 굳이 사양했다. 여러 번의 강천에도 조금도 응할 기색이 없어 왕은 그의 상스러운 고집에 감복하여 표창한 일이 있었다.

    이렇게 이원익의 청렴은 궁중과 조정에서 널리 알려졌고, 청렴결백하고 인자하며, 곧은 정승이라 서로 다투어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훗날 청백리로 표창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청백리정신을 가진 관료들은 자기를 희생하는 살신성인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서 나라에 충성하고 친구 간에 의리를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겼다. 금보기를 돌덩이 보듯이 했고, 자기 이름 석 자 관직에 올리는 것에 온 가치를 두고 살았다. 그래서 청백리에 한번 오르게 되면, 그 후손에게 그렇게 명예스러울 수 없다 했고, 탐관오리에 한번 오르게 되면 사람들이 그 집안과는 혼사마저 꺼렸다. 오늘날은 정말 교회가 이런 청백리 정신을 지켜나가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한국교회에서 이런 청백리의 정신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 것 같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우선 여호수아는 출애굽당시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이끈 지도자입니다. 성경을 통틀어 여호수아처럼 훌륭한 지도자도 드물다.

    그는 에브라임 지파의 대표로 뽑혀 가나안 일대를 두루 살펴본 12 정탐꾼의 한 명으로서 돌아와 보고할 때도,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보고를 했던 10명과는 달리 갈렙과 함께 확신에 찬 긍정적인 보고를 한 바 있다. 그 때문에 가나안 땅에 1세대로서는 갈렙과 함께 딱 둘만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는 또 모세의 지시에 따라 이스라엘의 광야 행군의 진로를 막는 아말렉 족과 싸워 이긴 매우 용감한 장군이기도 했다(17:8-16) 그의 본명은 본래 호세아(구원이라는 뜻)를 모세가 바꿔 준 이름이 여호수아(여호와는 구원자)입니다(13:16). 이스라엘을 가나안 복지까지 잘 이끌었고, 가나안 땅의 지파별 분배까지 모세가 남긴 유언과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철저히, 끝까지 순종하여 이행한 사람이었다. 여호수아는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의 뒤를 이어 가나안 정복의 기수로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내력에는 모세로부터 지도자 직분을 받을 때 "강하고 담대하라"는 권고와 축복을 받았습니다. 구원자를 가리키는 여호수아 라는 이름 때문에 예수님의 한 예표이기도 했다. 예수의 그리스어가 바로 히브리어 '여호수아'에서 왔다. 아무튼 오늘은 지도자 여호수아의 청렴결백함에 말하고자 합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부각돼온 물욕으로 인한 부정부패 등의 이슈에 걸려 넘어져 교계와 사회로부터 비난 받는 사례가 빈번하게 속출한 것이 지금의 한국교회이다. 여호수아는 오래 전 이 점을 잘 간파했기에 우리에게는 훌륭한 귀감이 되어준다.

    가나안을 모두 정복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명령과 모세의 지시대로, 각 지파별로 땅을 배분해준 여호수아는 맨 마지막에 자신의 몫을 할당받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의 명에 따라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 곧 에브라임 산에 있으며 가이스산 북쪽에 있는 딤낫세라(여호수아서 19:50, 24:30)였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로 이미 노년의 몸이었지만, 자신이 배당 받은 그곳은 살기에도 불편한 산지 딤낫세라에 거주하였다(19:50b). 아마도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최고지도자로서 자신이 원했다면, 일찌감치 에브라임 기업 땅의 더 좋은 성을 요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또 다른 성과 기타 산물을 요구했더라도 백성들이 기꺼이 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물욕이 전혀 없었고 단지 살 곳만 있으면 만족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인생에 있어 물질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으나 오직 하나님이 참 기업이시요, 희망의 전부임을 철저히 깨달았다. 그러기에 그는 물질에 대하여 흔들림 없이 늘 꿋꿋했다. 돌아보면, 여호수아는 특히 가나안 정복 초기 바로 여리고성의 정복 직후 발생한 아간의 전리품 취득 사건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유다 지파의 후손인 아간은 여리고 점령 당시 바벨론 산인 화려한 겉옷 한 벌, 200세겔(2.3kg), 50세겔(570g) 등을 챙겨 몰래 숨겨둔 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아이 초기 전투에 패배했고 하나님이 그 원인을 알려주신 뒤에는 아간과 그의 자녀에게 돌로 치고 소유물은 불로 태워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아 오늘날 그 곳을 아골 골짜기라 부르게 하였다. 여호수아는 이 사건의 수습과정을 통해 과다한 물욕이 곧 괴로움이 될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을 터입니다. 지도자에게 있어서 청렴결백은 필수요건입니다. 아간은 온전히 바쳐야 할 물건에 손을 댐으로써 가장인 자신과 자신의 가족과 소유물이 모두 아골 골짜기의 큰 돌더미를 만들어서 만대에 보여준 경고의 기념비였다.

    세라의 아들 아간이 저주받은 물건으로 범법하였으므로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사람이 자기의 불법가운데서 홀로 멸망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니라(22:20).

    당시는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 신정사회였기에 심판과 형벌도 즉각적이었지만, 현대에도 사회 곳곳에 현대의 아간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이다. 그에 비하면 여호수아는 얼마나 올곧고 꿋꿋이 청렴을 지키던 지도자였던가! 그는 끝까지 흠 없이 자기 삶을 정직하게 살아낸 하나님의 종이였습니다.

     

    2. 사무엘의 청렴결백

    그리고 오늘 읽은 말씀은 사무엘선지자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사사말기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사무엘상 121절부터 15절 말씀에 보면 사무엘이 이제 나이가 늙고 백성들은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사무엘에게 이제 리더십이 교체되는 시간이 왔어요. 하나님께서 사무엘로 하여금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을 세우게 하였어요. 이제 지금까지 하나님이 왕이시고 사무엘은 선지자, 또는 사사로부터 사울왕에게로 정권 이양이 전환되는 거에요. 이제 사무엘로서는 마지막 고별 설교 같은 걸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러 나면서 사무엘이 어떤 얘기를 하는 것인가 알아봅시다.

    2 이제 보라 그 왕이 너희 앞에서 걷느니라. 나는 늙어 머리가 세었고 보라, 내 아들들은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내가 어려서부터 이날까지 너희 앞에서 걸었노라.

    3 보라, 내가 여기 있나니 주 앞과 그분의 기름부음 받은 자 앞에서 내를 대적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학대하였느냐? 내 눈을 어둡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삼상 12:2-3)

    그러니까 자기가 정말 청렴결백하게 이 사역을 해 왔음을 회상하는 겁니다. 누구 것을 뺏고 누구 것을 압제 했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슨 일이든지 이 사무엘과 같은 자세로 하면 좋겠어요. 누구 것을 뺏지도 않고 그리고 누구를 속이지도 않았고 그리고 누구를 압제하지도 않고 사무엘은 사사로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말을 백성들에게 전하며 우리가 알다시피 젖을 떼면서 바로 하나님의 전에서 성장했잖아요. 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아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캄캄한 영적 암흑기에 유일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위대한 선지자에요. 그는 어려서부터 이날 이때까지 그가 말한 그대로 살았던 참으로 청렴결백한 사사였다. 우리도 인생 이렇게 좀 청렴결백하게 살면서 부끄러움이 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그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내가 뭘 이용해 먹은 게 뭐냐? 내가 당신들을 속인 게 뭐냐? 이렇게 사람들에게도 좀 당당하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사무엘이 고백한 것처럼 나도 언젠가는 직장에서 고별할 때 그리고 교회에서 고별할 때 마지막으로 가족앞에서 고별할 때 천국 갈 때가 분명히 오겠죠? 이렇게 성도들이 모여서 나의 임종을 찬양하면서 환송해 줄 때, 여러분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여러분을 속인 적이 있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이용해 먹은 적이 있습니까? 내가 혹시나 내 눈을 멀게 할 뇌물을 내가 좋아했었습니까? 뭐 이러면서 고별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그렇게 고별사를 하니 백성들이 응답하기를

    4 그들이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학대하지도 아니하였으며 어떤 사람의 손에서 조금도 취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매

    5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 손에서 아무 것도 찾지 못한 것에 관하여 주께서 너희에게 증인이시며 또 그분의 기름부음 받은 자도 이날 증인이니라, 하니 그들이 응답하되, 그분께서 증인이시나이다, 하니라(삼상 12:4-5).

    그러니까,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당신은 우리에게서 어떤 것도 뺏지 않았고 그리고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이용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이 청렴결백은 하나님이 보증해 주신 것이었고, 당시의 왕 후보자 사울과 온 백성이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어 100% 공인해 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무엘이 대단한 사역을 한 거에요. 이렇게 모든 백성들이 사무엘을 인정한 참 부럽고 본받고 싶은 그런 모습인 것 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나도 마지막 고별사할 때 자식들 앞에서 내가 지금까지 돈이 없어 우는 걸 봤냐? 그리고 어려움이 있을 때 내가 사람한테 구걸하는 걸 봤냐?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기도하면서 살아 왔다는 것을 자식들에게 정말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매일 가족 예배를 통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시인 윤동주의 시처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살았던 사람이 여호수아이고 사무엘인데 과연 오늘날의 교계지도자들이나 우리 중 누가 감히 이럴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아마 누구든 절로 "나는 아냐.."라고 힘없이 고개를 떨굴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런 청렴결백을 포기해야 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설령 지난 날 끝없이 실패해 왔더라도 신앙 선구자들을 본받고, 역사 속의 지난 잘잘못의 선례를 통하여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그 분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엔 사도 바울의 고백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비천하게 되는 것도 알고 풍부하게 되는 것도 알아 어디에서나 모든 일에서 배부른 것과 배고픈 것, 풍부한 것과 궁핍당하는 것을 다 배웠느니라 (4:12).

    우리들이 세상 살다보면 성인이 아닌 이상 우리는 간혹 성욕과 물욕에 빠질 수는 있어도 거기 갇혀 있지 말아야 합니다. 곧장 정신 차리고, 얼른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지도자로서의 성욕과 물욕은 자타에게 치명적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물욕 때문에 남까지 망하게 만드는 현대의 아간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수아처럼, 사무엘처럼, 바울처럼. 그리고 그 누구보다 우리 주님처럼 탐심없이 살아갑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오늘 7절에 보면 사무엘이 이렇게 얘기해요. 그런즉 가만히 서 있으라 주께서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행하신 모든 공의로운 일에 대하여 내가 주 앞에서 너희와 변론하리라. 그러니까, 이제 떠나기 전에 내가 너희들에게 하고 싶은 말 하나님 앞에서 좀 하고 가겠다. 이게 마지막 고별 설교 같은 거에요. 그러면서 뭔 얘기를 하나 하면 8절에 야곱이 애굽에 들어간 후 너희 조상들이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모세와 아론을 보내사 그 두 사람으로 너희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곳에 살게 하셨으나. 이 사무엘이 하는 고별 설교에서 자, 애굽에서 부르짖을 때 모세와 아론을 보내서 하나님이 구원하셨다는 이 말은 뭐냐하면 항시 하나님을 버리면 부르짖을 고통이 온다는 말이예요.

    하나님을 떠나 돈 벌고 명예 얻고 성공은 할지 모르지만 부르짖을 고통이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거요, 하나님께 배신을 몇 번 했더라도 부르짖으면 구원자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의 말씀 없이 내 기분과 내 감정과 내 생각대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 와서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반드시 건지는 사람을 보내요. 그래서 오늘 거 사무엘이 말했던 첫 번째 이야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고통 중에 보냈던 사람이 모세와 아론이에요. 요셉이 총리였을 때 애굽에 들어갈 때는 극진한 애굽왕의 보호를 받고 고센 땅에서 안전이 보장이 된 상태로 살았어요. 그런데 왜 그 애굽 땅에서 노예가 됐을까요? 거기서 400년 동안 평안히 살면서 하나님을 잊어 버린 거에요.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산 세월은 반드시 고통이 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걸 뭘로 생각해야 되느냐? 우리가 사는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 하나님의 주권 밑에서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돼요.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하나님과의 연합 전선을 갖고 있을 때는 주변 열강들이 전혀 밀치고 못 들어왔어요. 군사력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이 철통 같이 보호를 해 줘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와 다른 우상 숭배로 넘어 가면 인격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배신 당한것이므로 이스라엘의 보호자가 자연스럽게 될 수 없는 구조가 되어버리니 하나님의 보호로부터 벗어나 버려요.

     

    이것은 뭔가 하면 양으로 비유하잖아요. , 목자가 쳐놓은 그 울타리 안에는 먹이있고 질병과 그리고 모든 적들로부터의 보호받는 울타리를 쳐서 양들을 목양하고 있어요. 근데 양이 그 울타리 안에서 평안히 살다 어느 날 고개를 들어 바깥 세상을 보니까 그 울타리 너머에는 산도 있고 꽃도 피고 너무 좋은 것들이 많은 것 같아서 양이 목자의 보호받기가 싫어 울타리를 넘어 간 거에요. 이는 내 인생에 간섭하지 마라. 이러고 하나님의 울타리를 넘어간 양과 같은 거에요. 그럼 울타리 밖은 이리가 있어요. 양이 그 화려함을 보고 울타리를 넘었다가 결국은 이리에게 잡아 먹히는 꼴과 똑 같은 거에요. 그래서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미고 하나님의 보호 없이는 내 인생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만이 내 인생의 보호자되신다는 이런 심령을 갖고 우리가 일생을 살아야 돼요.

     

    이게 돈이 많이 생기면 돈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의지가 약해져 그냥 울타리를 넘으면 바로 이리와 늑대가 기다리고 있어요. 목자가 있을 때는 공격을 못하지만 이 공동체에서 벗어나는 순간 상태가 달라요 그래서 우리는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돼요.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무리가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우리를 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하나님의 보호의 방법은 양 무리를 만들어 놓고 그리고 목자를 딱 세워 놨어요.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는거예요. 내가 이 목자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늑살 당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느 날 목사님이 싫고 집사님들이 싫고 교회 만나는 인간들이 다 미친 인간들로 보이잖아요? 이건 영적 치매가 온 거구요. 영적 사춘기가 온 거에요. 사춘기는 무조건 반항해요. 무조건 뛰쳐 나가요. 정말 위험한 건 영적 사춘기 왔을 때 혼자 은혜 받았다고 그 무리의 소중함을 모르고 교만이 뻗치기 시작하면서 그 좋아하던 성도들을 다 비판하게 될 때 사실 얼마나 영적으로 위험한 상황에 떨어지는지를 알아야 한다.

    여기 주께서 그들을 하솔 군사령관 시스라의 손과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모압 왕의 손에 넘기셨더니 그들이 저희를 치매(9). 넘기셨다는 게 뭔가 하면 하나님이 손 뗐다는 말이에요. 이게 다른 것을 숭배하고 이미 마음이 딴 데 가면 하나님도 인격적 모독을 당하면 손을 떼세요. 그래서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모독하면 안 돼요. 예를 들어서 남편은 괜찮은 사람인데 근데 거지하고 놀아날 때 남편이 자존심이 더 상한 거잖아요. 아니 바람을 피울라면 나랑 좀 비슷한 인간하고 피워야지. 저런 쓰레기 같은 인간하고 바람나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어요? 비슷한 거에요. 하나님도 같은 마음을 갖는 거예요. 어떻게 나를 섬기던 백성이 저런 쓰레기 마귀한테 가서 똑 같은 모습으로 엎드리나? 이 진노가 어마어마한 거에요. 인격적인 모독 이거 말로 다 할 수 없는 거에요.

    우리가 이것을 부부 관계에서 바람난 것을 생각해 보면 딱 맞더라고요. 사람들이 음식 솜씨가 없어 또 생활 능력이 없어 그런 건 다 참을 수 있지만, 바람 피우는 건 못 참는 거에요. 그래서 이스라엘 전 역사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내어 주는 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섬겼을 때 하나님이 손을 떼요. 그런데 호세아서를 읽어 보면 호세아 선지자의 아내 고멜은 창녀예요. 그런데 이 창녀는 어떤가 하면 이 호세아가 데리고 살다가 애를 하나 낳고 나면 시간이 좀 지나면 다른 남자에게 가요. 그러잖아요? 그러면 호세아한테 하나님이 가서 그 여자를 몸 값을 지불하고 다시 데리고 오라 그래요. 하나님이 자기 심령을 거기에다가 그렇게 적어 놨다니까요. 호세아한테 다른 남자의 품에 가 있는 여자를 돈 주고 사오라 그래요. 거기 데리고 와서 또 애를 낳고 살아요. 또 나가요.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가? 하나님을 등지고 가서 이방신의 품에 안겨 있는 이스라엘을 또 찾아 오고 부르짖으면 또 받아 주고 부르짖으면 또 받아주고 그래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을 하신 얘기를 성경에 기록해 놨어요.

    10절에 백성이 주께 부르짖어 반드시 하나님을 떠나면 부르짖을 수 밖에 없어요. 사단이 인간을 위해서 목자가 되거나 인간을 위해서 역사하지 않아요. 말갛게 벗겨 먹고 가죽만 남겨서 버려요. 그게 마귀들이 하는 짓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아닌 마귀 숭배를 하는 사람은 영혼이 다 갉아 먹히고 나중에 지옥 가는 거예요. 눈이 멀어지면 모른다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주를 버리고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섬김으로 범죄하였다고 본인들이 고백해요. 하나님을 등지고 산 시간이 우리에게 이런 고통을 갖고 왔다고 회개하잖아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모든 역사가 전쟁 역사에요. 왜 그런 많은 전쟁을 하였냐고요? 배신. 하나님을 배신한 흔적이에요. 그게. 하나님을 등지고 떠나서 대적한테 짓밟히다가 하나님을 힘입어 그 대적들을 물리치는 전쟁 그 전쟁사에요. 그러면서 이제부터 우리가 주를 섬기겠나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항시 하시는 일이 보내는 일을 해요. 11절에 주께서 여룹바알 누구죠? 기드온이에요. 여룹바알. 베단, 입다, 나 사무엘을 보냈다는 거에요.

    하나님을 떠나 마귀 숭배하고 우상숭배하고 이상한 종교에 빠진 나라들을 보세요. 다 가난하고 되는 일이 없다니까요. 그런 상태 속에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냈다고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의 유일하신 구원자에요. 그래서 오늘 여기 나온 모세, 아론, 여룹바알, 베단, 입다, 사무엘 이런 구약의 인물들은 다 앞으로 오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로 믿어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는 여러 가지 주제에서 우리를 이 죄악 세상에서 건져서 천국도 가게 하지만 오늘 14절에 보니까 이렇게 말했더라구요.

    사무엘이 너희가 만일 주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의 목소리를 듣고 주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며 또 너희와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의 하나님을 따르면 좋겠지마는. 그거에요.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따르면 좋아요. 그러나 만일 주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명령을 거역하고 주의 손이 너희 조상들을 치신 것 같이 내가 너희도 칠 것이다. 이건 뭔가 하면 너희가 언제든지 나를 싫다하는 순간 나는 손 뗄 거다.

     

    3. 우리들의 신앙행로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심령이 깨긋해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참으로 훌륭한 믿음의 행로를 갔던 여호수아와 사무엘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사무엘은 노년이 되어 그의 사사로서의 권한도 끝이 나는 순간까지 그가 사랑하고 끌어 안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한 것입니다. 내가 뭘 속여서 너희들을 이용해 먹더냐 내가 너희에게 뭐 착취하던 게 있더냐? 뇌물을 받았더냐? 그러면서 사무엘이 조상적부터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부르짖는 고통 가운데 있었고 하나님은 우리가 수도 없이 많이 떠났지만 끊임없이 구원자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압제자 손에서 건져줬다. 너희들 지금 너희들이 원해서 뽑은 왕도 하나님을 경외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도 그 고통의 부르짖음의 압제 아래로 갈 것이다. 그것이 사무엘의 고별 설교였습니다.

    한국의 수많은 정치가들이 마지막에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함으로 인하여 대한민국의 존경받는 지도자가 거의 없다는 사실은 매우 슬픈 일이다. 권력으로 인하여 가려졌던 그의 결점들이 하나 둘씩 드러날 때에, 많은 사람들은 그의 행한 업적들은 잊어버리고, 손가락질 하기에 바쁜 것이다.

     

    (7: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열매는 가장 마지막에 맺혀지게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 동일한 도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어야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언행일치의 삶이 되어야 영적인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사명을 마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예는 이제 막 책임을 지고 아직 시험대에 오르지 않은 사람들이 받는 박수 갈채보다 휠씬 더 가치가 있다. 사람은 진리의 대적들까지도 그의 충절을 인정할 때 가벼운 마음으로 짐을 벗을 수 있지만 우리들의 큰 인물들 중에는 명예와 이익을 얻으려고 원칙을 희생시켰기 때문에 수치 가운데 그들의 공직을 마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인기를 얻으려는 욕망으로, 부와 안일을 탐하는 유혹 때문에 그들은 길을 잃는다. 죄를 묵인하는 사람들이 잘 되는 것같이 보이고 그들이 취한 행동이 성공을 거두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눈은 이 교만한 자랑꾼들 위에 머무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행한대로 갚으실 것이다. 가장 큰 외적인 번영, 하나님과 혹은 그들 자신과 화목의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가 없다”(사인즈 1882. 7. 27).

     

    나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도덕적으로 살고 있는가? 나의 삶 속에서 도덕적인 결함들이 보이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가 먼저 살 수 있는 지도자가 되자! 그리하여 사무엘과 같은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가 되자! 사무엘과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도자는 평생을 지도자로서 사명을 감당했지만 그는 청렴결백하였다고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는데 그 외에 교계지도자라는 명칭을 가진 발람이나 아간, 가룟 유다는 돈에 미혹되어 스스로 망했는데 그것도 부족해서 발람 같은 선지자는 나귀에게도 부끄러움을 당하여 역사에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남겨서 오늘의 목사들에게 크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가롯 유다는 돈을 사용할 명분을 가난한 자를 위한다고 했지만, 그의 속마음은 도적질하기 위함이라는 주님의 책망을 받은 것과 같이 오늘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목사, 장로, 교단의 관계자들은 가롯 유다와 같이 명분만 내세워 하나님의 돈을 낭비하거나 도적질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목사, 장로, 교단 관계자들은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음을 기억하고 그분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양심적으로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할 것이다.

    잠언 저자는 말하기를 사악한 자들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로운 자들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28:1)”고 했으니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하는 신앙심으로 맡은 일에 충성하여 누구 앞에서라도 담대한 목사, 장로, 성도가 되어야 할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헌금을 사용한 장부를 검사받을 때 부끄러움 없이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생이 마치는 날 우리 자신이 얼마나 청렴결백하였는가를 선악간 행한 것으로 들어날 것을 기대하면서 믿음의 청렴결백한 선지들을 따라 가는 우리의 신앙인이 되기를 바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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