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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 한국전쟁의 미스터리
    시사정보 2018. 6. 20. 15:09


     

    6.25 한국전쟁의  미스터리

    제2차 세계대전으로 참혹한 전화를 입은 인류는 더 이상 인류가 전쟁을 치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1945년 10월 24일 가맹국 51개국으로 발족한 국제평화기구인 UN이 창설 되었다.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소련 흑해 연안의 얄타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소련의 스탈린 당 서기장, 영국의 처칠 총리 등 연합국 수뇌들이 모여 전후 문제에 대한 사전 논의를 하였는데 중요한 것은 국제연합탄생과 바로 한반도 38선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1945815. 일본이 항복하며 조선은 해방되었으나 일본을 무장해제 시키고자 38선을 기준으로 소련군은 북쪽에, 미군은 남쪽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19488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19489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출범하였다.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전쟁을 막고 평화를 사랑하고자 국제연합기구인 UN이 창설되었다. 

    소련은 얄타 회담 때부터 만약 미국이 38선 분할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나라는 조선인민공화국이 되었을 가능성이 99% 이었다고 봐야 한다.

    흐루쇼프 회고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남침공격을 위한 완벽한 계획서를 가지고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해 스탈린을 만났다. 194935일의 김일성-스탈린 회담에서 김일성은 남한을 무력으로 침공해 정복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스탈린은 북한이 남한보다 절대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한 무력 침공은 안된다.‘며 거절하였다. 한편 중고은 국공내전이 끝나 공산당이 정권을 잡자, 김일성은 모택동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0년 1월 김일성은 다시 한 번 모스크바를 방문해 군지원 요청과 남침 승인에 대한 확답을 받는다.

    김일성의 적화야욕에 의한 6.25 한국전쟁은 이렇게 잉태되어 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미리 한국전쟁을 대비하여 UN을 창립하도록 역사하지 않으셨는가 생각해 보다.

    1. 6.25한국전쟁 발발

    김일성은 1950년 6월 10일 전쟁 발발하기전 남한정부에 느닷없이 자신들이 억류하던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 부자와 그해 남한에서 체포된 거물간첩 김삼룡·이주하를 맞교환하자는 평화공세의 연막작전을 펼쳤다.

    실은 이 기간동안 김일성은 인민군을 훈련을 가장해 38선 인근으로 이동시켜서  623일까지 전쟁 준비를 마쳤고 24일에는 해병대병력을 실은 인민군 수송선이 동해안으로 출항하였다. 한편 우리군이 비상경계령을 해제한 6월23일은 북한 김일성이가 남침 준비를 완료된 날인데 전쟁발발하기 이틀전 이런 위기상황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국방부는 오히려 6월 24일 자정을 기해 경계령을 해제하고 육본은 비상 경계령 해제와 더불어 전 장병의 2분의 1에 휴가를 주어 외출과 외박을 시켰으니 전방 부대 장병 절반 이상이 텅 비었다. 이런 상황에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선전포고도 없이 38선을 넘어 북한군 포병대가 일제 포격을 개시했는데 국군은 처음에는 일상적인 포격으로 생각하고 제대로 대응하지 않은채 인민군의 남침이 가속화되면서 외박중인 병사들의 귀환은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최전방의 국군 진지는 인민군의 공격으로 궤멸당하고 있는 상태였다. 실제 전쟁확인은 11시경에 북한은 남측이 우리의 평화제안을 거부하고 우리를 공격하여 아군(인민군)이 반격에 나섰다.”라는 거짓방송을 내보냄으로서 전쟁발생이 확인된 것이다.

    북한 군은 치밀한 사전 계획에 의거 /총병력 19만 8천 380명, /탱크 242 대, / 해군함정 약 30척, /대포 2천 500문,/ 120밀리 포 56문, /82밀리 포 1천 503문의 강력한 무력으로 장단반도, 문산, 동두천, 춘천 그리고 강릉의 5개 방향으로 38선을 일거에 돌파하여 남으로 내려왔다.

    2. 서울 함락

    ​전쟁 발발 하루만인 626 의정부가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고 62710시경에 창동의 국군 저지선이 무너지고 국군은 미아리-회기동을 서울의 최후방어선으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으나 27일 오후 7시에 인민군이 전차를 동원해 공세를 가해왔고, 국군은 저항하였으나 결국 28일 새벽에 미아리방어선이 돌파 되면서 서울의 마지막 방어선이 무너졌다. 인민군은 26일 서울로 입성하였더라도 큰 저항없이 왔을 텐데 왜 의정부에서 2틀이나 기다렸는지가 미스터리한 일이다. 드디어 6월 28일 11시에는 시청앞에 조선인민공화국기와 김일성 초상화가 등장하게 되었다. 전쟁 역사상 적에게 그 나라의 수도를 3일만에 내주었던 것이야 말로 또 하나의 미스터리라고 봐야 할 것이다.

    3. UN의 한국전 참전 가결

    대한민국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주미한국대사 장면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6월 26일 주미한국대사 장면은 백악관으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방문,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하였다. 미국은 유엔 안보리에 한국 문제를 건의했다. 이에 따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현지시각 6월 25일 14시에 소집되었고,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유엔군의 한국 전쟁 참전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했다.

    당시 소련은 거부권을 행사하려 했고, 그렇게 되면 유엔은 한국에 군대를 파견할 수 없는 긴장한 분위기 가운데 회의 날이 나가왔다. 유엔군 6.25참전결정회의에 소련 외상은 회의 당일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한국전쟁에의 참전을 만장일치로 가결되어 한국은 유엔군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이런것이 한국전쟁에 대한 미스터리라고 봐야 할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련의 대표가 타고 오던 승용차가 갑자기 고장을 일으켜 그 대표는 회의 시간을 훨씬 지나 모든 결정이 끝난 두에 도착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이 진짜 미스터리한 것이다.왜냐하면 소련이 유엔군 참전을 거부하였다면 유엔 16개국 참전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것은 기도의 힘이었다. 당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투표함을 만든 사람이 투표함을 완성하고는 안쪽에 이런 기도문을 쓰고 서명을 했던 것이다.

    "이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결정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결정이 되어 인류 역사에 하나님의 올바른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1997년 투표함이 낡아서 바꾸기 전까지 아무도 몰랐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의 기도를 들으셨고 역사를 주관하고 계셨던 것이다.

    27일 재개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다시 ‘공산군의 무력 침략을 배제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보낼 것을 가결했다. 이에 미국은 28일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으로 맥아더 전투사령부를 한국에 설치하고 해군과 공군을 우선 한국 전선에 파견했다.

    유엔의 이와 같은 결의는 세계 역사상 국제정의에 입각한 최초의 유엔군을 탄생시킨 것으로서 국제평화의 수호를 위한 획기적인 거사였다. UN이 1945년 10월 24일 창립되어 소련의 거부권 없이 한국전쟁에 유엔군을 참전시키기로 일사분란하게 신속이 결정된 것 모두는 어떻게 보면 너무 미스터리하기도 하다.

    미군 6.25전쟁이 일어난지 10일 지나서 7월1일 처음으로 한국으로 온 온 최초의 전투부대가 미 제24사단 21연대의 제1대대가 1개 포병대이다. 이제 7월 5일 처음으로 북한군과 미국이 오산에서 최초로 공산군을 맞아 싸웠으나 33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들어오는 적에 포위되어 많은 전사자를 내고 포위망을 탈출, 후퇴했다. 여기서 미 제24사단장 딘 소장은 몸소 적 전차에 수류탄을 던지며 용전하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미군이 7월 5일 처음으로 전쟁을 하여 많은 손실을 입었는데 북한인민군이 왜 의정부에서 2틀을 지체하였는지? 또 6월 28일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이 왜 3일 동안이나 진격을 멈추고 '노닥거렸느냐' 이 점이 참으로 6.25한국전쟁의 미스터리로 남는다. 왜냐하면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는데  지체하지 않고 남쪽으로 내려갔다면 미군이 들어오기 전 전 한국이 인민군에게 점령하였다고 하여도 틀린말이 아니었다.

    만약 인민군이 6월 26일 서울에 입성하여 쉬지 않고 국군을 밀어붙였다면 7월 5일쯤엔 인민군이 낙동강 부근까지 도달해 사실상 한반도 전역을 장악한 상황이었다면 아마도 미군은 지상군 파병을 포기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인민군이 의정부에서 이틀을 지체한 것이나 서울을 점령한 이후 3일간이나 지체한 것이 6.25전쟁의 가장 큰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당시 인민군 6사단 13연대 정치장교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최태환씨는 전쟁당시 중좌 (중령)의 계급으로 인민군 6사단 13연대 정치보위부 책임장교였는데 그의 주장은 "김일성은 서울 점령 후 제2대 국회를 소집해 이승만대통령 하야를 결정하는 쿠데타를 벌이려했다"고 증언을 하였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에 주력한 것이 바로 제2대 국회의원을 찾아내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한 후에 제2대 국회의원 소집을 공고 하였지만 이곳에 찾아오는 의원이 거의 없었다. 결국 인민군은 3일동안 국회의원 색출 작업을 하였지만 개원에 필요한 과반수 이상의 의원을 찾을 수 없어 남한을 통합할 수 없다고 보고 7월2일 군사력으로 전 한반도를 석권하고자 한강 이남으로 공격을 결정한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최씨의 증언은 6.25 당시 인민군 작전국장이었던 유성철씨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의 남침계획은 침공 사흘안에 서울을 점령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서울을 점령하면 20만 남로당원이 일어나 남한 정권을 전복시킨다는 박헌영의 말을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을 사흘로 예정했지만 결과는 3년이라는 기나긴 전쟁을 보낸 것이다. 결국 인민군은 3일을 제외한 전 기간은 그들의 예상에도 없던 전쟁을 치룬 것이다.

    4. UN 군 참전

    ​한국에서의 전쟁 발발은 625930분에 무초 대사의 보고서가 미국에 보고되었다. 626일에 UN안전보장이사회가 긴급개최되었고, 북한의 침략중단과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가결되었다(소련 대표가 불참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다시 안전보장이사회는 628일 개최되었고, ‘북한의 침략을 격퇴하기위해 필요한 물자와 유엔결의에 의거해 16개국 파병을 결정함과, 의료지원 5개국도 참전한다는 안건이 가결되었고. 미국은 이 결의안에 따라 71일에 미 지상군을 한국전쟁에 참전시킨다.

    미국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미 극동군사령관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에 따라, 맥아더는 주일 미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에게 “제24사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라.”라는 명령을 하달(6월 30일)하였다.

    ​(오산 전투 전황)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미군의 선발대(24사단 소속, 일명 스미스 특임대)71일 부산에 상륙하였고, 72일경에 대전에 도착하였다. 7월5일 처음으로오산에서 전투를 하였는데 미군의 방어선이 완성되지 못한 사이에 인민군이 전차를 앞세워 공격해와 미군은 첫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스미스 부대의 무참한 패배로 미국 지상군의 전선 투입만으로 조선인민군의 남침이 중단되기를 바랐던 더글라스 맥아더의 기대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스미스 부대의 패전 이후, 미군은 윌리엄 F. 딘 소장이 이끄는 육군 24사단을 대전에 투입했지만 대전의 미 육군 24사단은 마침내 7월 20일 패주하고 말았다. 한편, 대한민국은 대전을 빼앗기고 난 다음에 대구를 거쳐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했다.

    (1)낙동강 방어전[편집]

    UN군은 7월 한달간 지연작전을 펼치고, 717일경, 8군은사령관 워커는 낙동강의 지리적 특징을 이용해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써 구상하였다. 깎아지른 절벽이 많아 방어에는 용이하지만 공격하기에는 불리했던 지형이었던 것이다. 최초 방어선은 총 길이는 다부동-포항을 연결해 총 길이 200km로 축소 조정되었다. 워커는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구상하고, 이곳에서 인민군을 저지한 뒤 반격을 펴기로 계획하였다. 한편 인민군은 815일까지 전쟁을 끝내겠다는 생각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향한 총공세를 개시한다. 이것이 8월 공세이다.

     

    (2) 인민군의 8월 공세

     

    -다부동 전투6•25전쟁의 최대의 격전지이자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다부동은 국가존망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구축한 최후의 저지선 (마산 ~ 왜관 ~ 낙동리 ~ 영덕: 240km)으로, 이 전투에서 우리는 55일 동안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으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냅니다.

    다부동 전투에는 국군과 유엔군의 활약 외에도 경찰, 학도병, 노무병 지역주민 등 보이지 않는 숨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다부동 전투의 승리로 이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벌어졌던 다부동 유학산 6•25 격전지로 당시 이곳은 대구로 들어갈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1950년 8월 13일부터 23일까지 총 11일간 국군 제1사단 12연대와 북한군 제15사단이 혈전을 벌인 ‘다부동 지구 전투’의 최대 격전지로써, 고지(高地)의 주인이 아홉 차례나 바뀌었고 유학산의 능선과 골짜기가 온통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룬 구국의 현장입니다.

     당초 8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겠다는 계획이 어려워졌다고 판단한 인민군은 815일을 대구 점령의 날로 정하고. 다부동지역에서 대규모 공세를 개시하였다. 최후의 결전을 각오한 한국군 제1사단은 영국군 보병 제27여단의 지원을 받아가며 북방으로 4Km를 반격, 뒤이어 이 날 미 제 24사단과 해병사단의 응원 출동이 있어 23일까지는 대구 북방의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켜 낙동강 이남 지역을 확보했다.

    2) 인민군의 9월 공세 

    인민군의 8월 공세가 대구에 진출하지도, 낙동강을 돌파하지도 못하고 좌절되자, 인민군은 최후 총공격인 9월 공세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인민군은 점차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연합군의 공습으로 인민군의 군수시설과 보급로가 파괴된데 이어 장비의 보충등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1950년 8월 초 낙동강방어선을 공격하는 북한군은 가용부대의 절반에 해당하는 5개 사단을 대구 북방에 배치했다.

    반면 그 지역의 아군 방어병력은 총 3개 사단(국군 제1·제6사단, 미 제1기병사단) 뿐이었다. 적의 주 접근로를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은 낙동리 부근으로 도하하는 적을 몇 차례 격퇴시켰으나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제6사단은 북한군과 공방전을 반복하다가 결국 용기동에서 위천으로 물러났다. 왜관일대의 미 제1기병사단은 역습을 전개해 낙동강을 도하하려는 적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무렵인 8월 11일 육군본부는 국군의 방어선을 303고지(작오산, 왜관 북쪽)∼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축소 조정했다. 이에 따라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은 다부동∼군위 선에서 대구를 방어하게 되었다.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다부동∼가산선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끝까지 저지 격퇴함으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다부동 방어전투를 승리하게 된 배경에는 미 제8군의 적절한 예비대 투입도 큰 기여를 했다. 마침내 8월 20일 적은 더 이상 다부동 전선을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유학산 정면을 공격했던 제15사단을 영천 방면으로 전환했고, 이로써 8월의 다부동 위기는 해소되었다

    -왜관-다부동 전투 

    인민군은 92일부터 다시 다부동에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다부동에서는 다시한번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인민군은 전차를 앞세워 미8기병연대가 주둔한 다부동을 공격하였고, 가산이 인민군에 피탈되었다. 또한 7기병연대역시 포위되었다, 이 공세는 다시한번 대구를 위협하였고, 연합군은 낙동강 방어선 후방인 데이비드슨 선으로 철수하는것까지 고려하였다.

    (※데이비드슨 선은 마산-밀양-울산을 연결하는 선으로, 방어선이 아니라 UN군이 안전하게 일본으로 철수하기위해 필요한 선이었다, 이곳으로 철수하겠다는 것은 곧 한반도를 포기하겠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만일 데이비드슨 선으로 철수한다면 인천 상룩 자체가 불가능해지기에 사령부와 본부만 부산으로 이동하는 선에서 그쳤다

    인민군의 공세는 912일부로 중단되었으며. 이날 7기병연대가 314고지를 점령하고, 14일에는 대구 북방에서 연합군이 인민군을 저지하였고. 15일에는 인민군이 다부동-가산산성 일대로 철수하여 인민군의 9월 공세는 좌절되었다.

    동부전선에도 한국군 제2군단이 9월 10일 최강을 자랑하던 북한군 제15사단과 1개 포병연대를 영천지구에 몰아 포위하고 4,800여 명의 북한군을 사살, 수많은 차량과 전차 무기 등을 빼앗아 완전 섬멸한 후 단번에 15km를 북진하여 적의 기세를 최종적으로 꺾어놓고 말았다. 당시 미8군 사령관이던 워커(Walker) 중장은 12일 담화를 발표하여 ‘한국 전선 최대의 위기는 지나갔다’고 말하였다.

    4. UN군의 총반격

    유엔군이 육전에서 전과를 올리기까지는 공군의 지원폭격이 크게 주효하였으니 유엔 공군은 이미 개전 20일 만에 제공권을 장악, B29, B26 등 중폭격기는 적 후방의 교통로를 파괴하는 한편 평양·진남포·함흥·성진·청진·나남 등지의 군수품 공장을 완전히 파괴했다. 한편 해군도 개전 직후부터 제해권을 장악하였으나 지상작전이 후퇴를 거듭하므로 큰 활약을 못 하고 있던 중, 낙동강 전선에서 육군의 반격이 개시되자 전격적 북상을 기도하는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9월 13일 인천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이 작전의 해군 사령관은 미 해군 소장 도일(Doyle)로서, 동원된 군함은 한국 15척, 미국 226척, 영국 12척, 캐나다 3척, 오스트레일리아 2척, 뉴질랜드 2척, 프랑스 1척, 도합 261척이었다. 13일부터 2일 간에 걸쳐 맹렬한 함포 사격을 가한 후 15일 새벽 마침내 유엔군과 국군 해병대가 맥아더 장군 지휘로 인천에 상륙, 서울을 향해 진격했다.

    김일성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이 있자 약 2만의 병력으로 최후 저항을 시도했으나 20일에 유엔군 수색대는 이미 한강을 건너 서울에 침투했고, 23일에는 한국군해병대와 미 제1해병사단이 서울 서북방의 안산을 점령하고 다음 날 마포로 도하하여 시내로 돌입했으며, 25일에는 관악산 방면으로부터 한국군 제17연대와 미 제7사단이 한강을 도하하여 남방으로부터 시내로 돌입, 협공으로 맹격을 가했다. 북한군은 결사적 항거로 시가전을 기도하였으나 병력의 대부분이 섬멸되어 서울에서 퇴각하니, 9월 28일 역사적인 서울 탈환이 이루어져 중앙청 첨탑에 다시 태극기가 올랐다.

    9월 30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북한 공산군 총사령관 김일성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냈으나 김일성은 이를 거부하고 다만 남한지역에 있는 공산군의 전면 퇴각만을 명령했다. 따라서 같은 날 유엔군 사령부는 휘하 전장병에게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할 것을 명령했다.

    10월 1일 오전 11시 45분 국군 제3사단은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했으며 뒤이어 수도사단이 인제를 거쳐 북상하여 10월 10일 3사단과 함께 원산시내와 명사십리 비행장을 완전 점령했다. 중부전선에서는 국군 제7사단과 8사단이 북상, 18일에는 서부전선으로 북상한 미 제1군단과 만나 19일 한국군 제1사단을 선두로 하여 평양을 완전 점령했다. 동부전선의 수도사단과 3사단은 원산에서 다시 북진하여 10월 17일에 함흥, 22일에 북청, 28일에 성진을 점령했으며, 여기서 제3사단은 백두산(白頭山)을 향해 합수로 진격하고 11월 25일 수도사단은 함경북도 도청 소재지 청진에 돌입했다. 이로써 국토의 전역이 거의 수복되고 통일이 목전에 다달았다.

    (1) 인천 상륙 작전

    작전의 제1단계는 월미도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5시 시작된 공격 준비 사격에 이어 미 제5해병연대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다. 월미도는 2시간 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은 108명이 전사하고 106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어 제2단계로 국군 제17연대, 미군 제7사단, 미국 1 해병사단이 주도한 인천반도 공격이 이어졌다. 인민군 제18사단과 인천 경비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미군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는 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할 시간을 성공적으로 빼앗아버리며 인천 장악에 성공하였다.

    (2) 서울 수복[편집]

    그 후 서울을 빼앗긴 지 3개월 만인 9월 28일에 서울을 되찾았다. 한국군은 이어서, 달아나는 인민군을 뒤쫓아 38선을 돌파하여 10월 10일에는 원산을,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이어, 10월 26일에는 서부는 청천강 북부와 압록강의 초산에 이르렀고, 중부는 장진호까지 진격했으며, 동부는 압록강의 혜산진까지 진격했다. 또한 11월에는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하였다.

    5. 중공군 침략과 재반격 작전

    대한민국 국군 및 UN군에 의한 무력 통일을 눈 앞에 두었을 때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만났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은 미국이 북한을 이기면 머지않아 바로 중화인민공화국도 공격할 것이고,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타이완에서도 중화민국 주도의 중국 통일을 위해, 쳐들어올 거라는 추측으로 인해 결국,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미국과 싸워서 중화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의 공산주의 혁명 정신을 지켜야 되는 목표를 삼았었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인민지원군이 사단급의 병력으로 전쟁에 개입하여 반격해 왔다. 중국 인민해방군이 한국에서 참전하니 이제부터 한국전쟁은 국제전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11월 24일 맥아더 장군이 직접 지휘에 나서 총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29일까지 서부전선의 유엔군은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하고 12월 1일부터는 동부전선에서도 철퇴를 개시했다. 12월 4일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 백만이 북한에 투입되었으며,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발표했다. 이날 유엔군은 평양에서 완전 철수했고, 12월 23일 워커 중장이 일선 시찰 중 자동차 사고로 사망, 후임으로 릿지웨이 중장이 미 제8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는 동부전선의 아군 12만과 피난민 10만이 흥남에 모여 해상으로 철수했다.

    중공군이 일선을 담당하는 동안 북한 공산군도 5개 군단의 병력을 정비하여 다시 일선에 나타나 12월 말일까지 38선에 집결한 병력은 중공군 약 17만, 북한 공산군 약 6만 총 23만으로, 이날 밤 자정을 기해 일제히 38선을 넘어섰다. 1월 3일 영국군이 의정부에서 격전 끝에 철수했고, 1월 4일 서울이 두 번째로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고, 중공군과 북한군은 계속 남진했으나 유엔군도 이때는 이미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1월 9일 유엔군은 비로소 재반격을 개시했으니 당시의 전선을 그려 보면 서쪽으로부터 오산-장호원-제천-영월-삼척을 연결하는 선이 된다. 아군의 반격이 개시된 이후 2월 2일에 전사한 북한공산군 전선사령관 김책을 비롯해 10여 만의 전사자를 낸 적군은 할 수 없이 2월 7일부터 전면 퇴각을 개시했다. 적은 전 전선에 견고한 참호를 구축하고 있었으므로 일일이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겨우 진격이 가능했다. 이리하여 아군은 3월 2일에 비로소 한강을 넘어섰고, 14일에 국군 0제1사단이 다시 서울에 진주할 수 있었다. 다시 적은 소위 춘계대공세를 취하여 4월 23일 김화 남방의 아군 방위선을 집중적으로 돌파하여 28일에 춘천, 30일에 서울 북방 우이동까지 육박하였으나 결국 격퇴되고, 5월 16일 제2차 공세로 인제 지구에 남침하였으나 동원병력 11만 중 5만여 명의 살상자를 내고 6일 만에 격퇴되었다. 아군은 서부전선에서 6월 3일 연천지구로 진격하고, 중부전선에서는 6월 6일에 처음으로 평강에 대치하여 철의 삼각지대를 이루는 철원과 김화를 점령했고, 동부는 5월 30일에 고성까지 올라가 있었다.

     

    6. 전협정

      이승만은 1951년 6월 9일 휴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 소련의 휴전안을 거부하였다. 1951년 7월에 휴전 회담이 개시된 후 세계 전쟁 사상 처음 보는 제한 전쟁(휴전이 되면 각기 점령 지역에서 국경이 정해지는 조건으로 싸우는 전쟁)이 벌어졌다. 1951년 9월 20일 이승만은 휴전 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장해제, 유엔 감시하 총선거를 요청하였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19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1952년 5월에 이르러선 포로 교환 문제를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 의제에 합의하였다. 한국 전쟁 중 2년 동안 이렇다 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하자, 중화인민공화국을 부담스러워한 미국은 현상유지 차원에서 휴전협정을 추진하였다. 그래서 유엔군과 중국 인민해방군은 얼른 이 한국전쟁을 중단하고, 휴전을 하기로 했었다. 미국은 소비에트 연방 및 중화인민공화국 측과 휴전을 논의한다.

    당사국인 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산군과 유엔군은 함께 휴전의 성립을 희망하여 서로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드디어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전협정이 정식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에 걸쳐 참담했던 한국전쟁은 종전이 아닌 휴전협정만이 조인되었고, 한반도에는 '제2의 38선'인 휴전선이 설정되어 민족분단의 비운을 또다시 맞이하게 되었다.

    7. 전쟁 결과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 대부분이 북한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38도선 전역에 걸쳐서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감행하였다는 6.25한국전쟁은 3년 1개월에 걸쳐서 한반도 전체를 폐허화했고, 참전한 외국의 병력에까지 극심한 해를 입었으며, 이때 사용된 폭탄의 수는 불분명하지만 1차 세계대전에 맞먹는다고도 한다. 한국전쟁은 그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 이번 한국 전쟁은 미국과 소련을 비롯해 UN과 의료진 그리고 중공군까지 참전하면서 제3차 세계 대전에 가까운 전쟁이었다.

     소련의 통계에 따르면, 북한의 11.1%에 해당되는 113만 명의 인구가 전쟁을 통하여 사망하였고, 양측을 합하여 250만 명이 사망하였다.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과 교통시설이 파괴되었고, 정부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며,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60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의 사망자는 백여만 명이 넘으며 그중 85%는 민간인이다.

      미국은 한국 전쟁에 가장 많은 군사를 지원하였고, 윌리엄 F. 딘 장군을 비롯한 상당수의 미군들이 전쟁포로로 잡혔다. 또한 이 과정에서 총살된 미군의 숫자도 많았다고 한다. 약 54,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베트남 전쟁 때보다는 약간 적은 수이지만 훨씬 짧은 시기에 발생하였다.

    3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거나 다치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국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대한민국과 북한 간의 적대적 감정이 팽배하게 되어 한반도 분단이 더욱 완고해지면서, 현재까지도 휴전선에 의한 분단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휴전협정 이후의 충돌

    휴전협정 이후 크고 작은 국지 도발 및 무력 충돌이 여러 번 있었다. 1968년에는 북한에서 김신조를 앞세워 청와대 침투를 시도한 사건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경찰과 민간인을 포함해 인명피해가 있었다.

     

    1990년 이후에는 서해 북방한계선 부근에서 수차례의 해상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1999년에는 연평도 부근에서 제1연평해전이 있었으며,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사이에 비슷한 지점에서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였다.

    2009년에는 대청해전이 발발하였다. 2010년에는 천안함 침몰 사건과 연평도 포격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2006년, 2009년, 2013년, 2016년에 잇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4차례핵실험을 강행하였고, 2015년에는 서부 전선 포격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2016년에는 4차 핵실험인 최초의 수소탄 핵 실험까지 강행하면서 상황은 더욱더 악화의 길로 걷고 있다. 그리고 2017년, 6차 핵실험을 강행하고, 미사일 발사를 감행하여, 국제사회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가 멀어져 갔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회담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회담

    참고 문헌 및 사이트

      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

    -한권으로 읽는 6.25전쟁

    -6.25전쟁사 5권 낙동강방어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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