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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 비느하스가 던진 질투의 창말씀 2018. 5. 27. 13:09
비느하스가 던진 질투의 창 민 25 : 1-18
하나님은 독생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더 강조한다면 그리고 더 역설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질투하는 것은 우리 생활가운데서 많이 경험하지 않았나요?
어린 아이에게 동생이 태어난다는 것은 어린아이에겐 어른들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위기입니다. 그 동안 혼자서 받아오던 엄마 아빠와 가족들의 관심과 사랑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충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동생을 때리고 꼬집기도 합니다. 때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갑자기 아기티를 냅니다. 안 물던 우유병을 빨기도 하면서 한 마디로 이 어린아이는 새로 생긴 아가가 자기가 받아 누리던 가족들의 사랑을 다 빼앗아가 버렸기 때문에 미운 것입니다. 이 아이는 동생이 자기가 받아야 할 사랑을 가로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질투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 어린아이는 부모의 사랑이 동생과 나누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만을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우리들만 사랑한다면 우리도 우리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마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 부터 독점적인 사랑을 받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다른 신앞에 가서 먹고 마시고 육적인 쾌락까지 하였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쓰리고 아프셨겠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한 자들을 누가 손좀 봐주면 얼마나 그 마음이 시원하겠는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이런 질투하는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비느하스가 한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은 기뻤하셨습니다. 비느하스가 무엇을 하였기에 하나님께서 비느하스로 하여금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는 것을 영원토록 주셨을까 ? 아래의 글을 읽으시면서 은혜받으시기 바랍니다.
1. 질투하시는 하나님
질투라는 말은 사랑의 다른 형태로서 사랑하고 있는 상대가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대인 감정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상대가 자기에게 무관심하고 비교대상도 아니면 질투가 되지도 않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질투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에 대하여 질투할 이유는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그 사람이 자신만을 향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줄 때 당연히 질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사람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향해도 질투심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는 참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질투는 우리 인간들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면에서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질투하는 하나님 즉 엘 칸나로 소개하시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신명기에는 질투하는 하나님 엘칸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34:14) 너는 다른 신에게 경배하지 말라. 주는 질투라는 이름을 가진 질투하는 하나님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다른 어떤 우상도 섬기지 말라 명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그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질투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칸나, 헬라어로는 젤로스라 합니다.
엘칸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인데 이 질투라는 젤로스는 성경에서 두 가지 의미로 쓰여지는데 하나는 질투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열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질투라는 말은 하나님의 열심과 통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질투 안에는 하나님의 열심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열심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열심입니다. 우리를 약속하신 저 천국에까지 반드시 인도하시겠다는 열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집을 피우고 자기 뜻대로 살려고 곁길로 갈 때조차도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열심히 있으신 분이십니다.하나님은 우리를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결코 다른 것과 나누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으며 영원토록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사랑에 어떻게 보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만을 온전히 사랑하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돈, 명예, 권력, 자식, 취미, 쾌락, 사업 등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바로 그것들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의 열정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이름 안에는 하나님의 열심이 있습니다. 우릴 향한 하나님의 열정은 당연히 우릴 통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우린 온전히 하나님만을 섬기며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또 질투는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택하여 부르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출34:10) 그분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맺노라. 내가 아직 온 땅에서나 혹은 어떤 민족가운데서도 행하지 아니한 놀라운 일들을 너의 온 백성 앞에서 행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행할 일은 두려운 것이므로 너와 함께 있는 온 백성이 주의 일을 보리라.
지금은 성령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순종과 거역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때 성령은 탄식하시며 우리가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질투하심입니다.
(약4:5) 너희는 성경기록이 우리 안에 거하는 영이 시기하기까지 욕심을 내느니라, 하고 헛되이 말하는 줄로 생각하느냐?
그런데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들이 하는 질투와는 다릅니다. 질투 자체가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너무도 사랑하시는 것에서 비롯되었기에 어떤 경우에도 이 사랑을 접는 경우가 없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쫓는 우리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과 언약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질투는 연인 사이의 사랑의 질투와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우리 마음에는 질투가 불처럼 일어납니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랑이 클수록 그 질투는 억제하기 힘들 정도로 클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이 질투로 인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는 것을 뉴스를 통해 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질투하기까지 자신의 그 모든 사랑을 내어주심으로 우리들을 사랑하신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연인으로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 말씀하신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우릴 향한 하나님의 고귀한 사랑에 대한 반증입니다.
그렇다면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과연 그 이름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질투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자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가를 나타내셨습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십자가의 그 사랑이야 말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을 증거하는 징표인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길래 보잘 것 없는 미천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정도의 사랑을 베푸신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무엇이길래 이토록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도 우리들로부터 독점적인 사랑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출34:14) 너는 다른 신에게 경배하지 말라. 주는 질투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님이니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7 너는 너를 위해 부어 만든 신들을 만들지 말지니라.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하나님만을 사랑하기를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독점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사랑이 나누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로 향한다면 용납이 되겠습니까? 만약 용납한다면 그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질투와 혼동해서 사용하는 단어가 시기입니다. 성경에도 이 두 단어는 서로 혼동해서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고전 13장에서는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참된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질투는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질투와 시기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질투는 “사랑하고 있는 상대가 자기 이외의 사람을 사랑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감정”이라고 한다면 시기는 “자기의 소유가 아님에도 탐하거나 남이 잘되는 것을 시샘하여 미워하는 감정”을 의미합니다. 물론 질투의 감정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독점하려는 동기는 분명히 정당합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질투에 대한 구절을 연구해보면 놀랍게도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질투의 하나님으로 소개하는 구절은 영락없이 우상숭배를 금하는 말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대표적인 몇 구절들만 봅시다.
(출34:14) 너는 다른 신에게 경배하지 말라. 주는 질투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님이니라.
(신4:23-24) 2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할지니라 너희가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너희와 맺은 그분의 언약을 잊어 버리고 너희를 위해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금하신 새긴 형상이나 어떤 것의 모습을 만들까 염려하노라 24 주 네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오 곧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거나 조각하지 못하도록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나누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사랑을 쪼개어 나누는 행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결혼식에서 부부는 결혼서약을 합니다. 결혼서약은 이제부터 부부된 당신만을 사랑하겠노라고 서약하는 것입니다. 배우자에 대한 사랑을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따라서 이 약속을 깨뜨린다면 이혼하는 사유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그 순간 이제부터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만을 사랑하겠다고 서약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 됩니다. 하나님보다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자식을 더 사랑한다면 그 모든 것이 우상이 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서 독점적인 사랑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이 나누어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질투하기까지 사랑하셨기에 우리도 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하나님 이외 다른 것들과 나누어서는 안된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것과 맞서 싸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내려놓을 때까지 싸우실 것입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나누지 않는 즉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성도님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질투 때문에 큰 죄를 범하고 결국 자신마저 패망의 길로 걸어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있을까요? 동생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데 자신의 제사는 열납되지 않음을 질투하여 결국 동생을 죽임으로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고 만 가인이 있습니다.
블레셋 군대의 침략으로 국가가 바람앞에 등불같은 위기에 있을 때 용감하게 맞서 싸워 적장 골리앗을 죽인 다윗을 질투한 사울왕은 결국 전쟁에서 자신과 자기아들들과 하루동안에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질투심은 긍정적인 이미지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단어입니다.
2. 발람의 교훈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을 살펴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신 후 시내산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심으로 그들을 언약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급기야 금귀고리 같은 금붙이를 가지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우상섬기는 죄를 범하고 맙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간에 맺은 언약은 너무 빨리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깨뜨린 백성들에게 진노하심으로 그들을 진멸하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간곡한 중보기도에 따라 그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십계명을 돌에 새겨 모세를 통해 주십니다. 다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다시는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섬기지 않도록 재삼 당부하시면서 자신의 이름을 ‘엘 칸나 즉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여기서 엘은 하나님, 칸나는 질투하는 뜻입니다.
(출34:14)“너는 다른 신에게 경배하지 말라. 주는 질투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님이니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을 섬기는 여정을 보여주는 책이다. 다시말하면 시내산에서의 율법을 받은 후 시내광야를 떠나 38년이 되는 해에 요르단 동쪽 모압 평지에 도착할 때 까지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과 규례를 얼마나 잘 지켰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힌 사탄은 광야 40년 동안에도 틈만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고자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계속하여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하나님앞에 자주 넘어지는 것 중의 하나가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부귀명예를 온전히 버리지 못해 넘어지곤 한다.
(1) 발람의 탐심
어느 누구든지 높은 대접과 엄청난 뇌물을 준다고 하면 이를 거절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민수기 22장에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에게 행한 것을 보았는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있을 때(민 22:1) 심히 두려워하였으며 온 백성은 간담이 녹을 정도로 떨면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민 22:2-3). 모압 왕 발락은 전쟁으로는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음을 알고 군사 전략가와 장로들을 불러서 이스라엘을 넘어뜨릴 묘책을 찾았는데 그것은 모압으로부터 644km나 떨어진 브돌에 사는 발람 선지자를 초청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당시 발람의 명성이 어떻게 나있는가 하면 발람 선지자가 축복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임하고,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임한다는 명성이 대단했다. 그래서 모압 왕 발락은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을 통하여 예물을 보내 발람을 초청하였습니다(민 22:7).
발락 왕이 보낸 장로들이 물질을 갖고 발람을 찾아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왕의 말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발람에게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 받은 자들이니라(민22: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발람은 모압왕 발락에게 가지도 말고 이스라엘을 저주하지도 말라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들었음으로 처음엔 발락에게 갈 수 없다고 하였으나 이번에는 발락이 더 높은 고관들을 보내면서 전보다 더 높여 크고 존귀하게 대해주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겠다는 말에 발람은 발락 왕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주 내 하나님을 어겨 더하거나 덜하지 못하겠노라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지 알아보겠다고 하면서 발락이 보낸 자들을 유숙하게 했던 것(19)은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해 준다는 발락 왕의 제안에 결국 발람은 발락에게 가고자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21).
(2) 말을 하는 나귀
발람이 나귀를 타고 출발하자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들고 길을 막아섰습니다. 이를 본 나귀가 칼을 든 천사를 피하려 갈팡질팡하자 발람은 나귀를 세 번씩이나 채찍질했습니다.
(민22:23) 나귀가 주의 천사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떠나 밭으로 들어가므로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때리니라.
25 나귀가 주의 천사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담에다 짓누르매 그가 다시 나귀를 때리니
27 나귀가 주의 천사를 보고 발람의 밑에 엎드리니 발람이 분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더라.
이때 하나님은 나귀의 입을 열어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렇게 세 번씩 때리느냐고 나귀가 말을 하니 발람이 말하기를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라면 벌써 너를 죽였으리라고 하였을때 하나님이 발람의 눈을 열어 칼을 든 주의 천사가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게 하고 그가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네 길이 내 앞에서 삐뚤어졌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는데(32). 만일 나귀가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분명히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33)”고 하였습니다. 발람은 이제 당신이 그 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내가 돌아가겠나이다 하니(34) 주의 천사가 이르되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해서 발람은 결국 발락에게 가게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귀를 통해서 발람의 어리석은 행동을 깨닫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발람은 발락이 약속하는 물질에 눈이 어두워져 발락을 위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숭배와 음행죄를 지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도록 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2:14)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발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기회가 오면 자기 뜻대로 하는 이중적 행태를 보여주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한 장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 위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이 세상이 어두운 것을 좋아하면서 빛의 길을 가지 않는 발람들이 많기 때문인데 뇌물 좋아하는 사람,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 교회보다는 자기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은 현대판 발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발람의 길을 가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도 발람의 길을 따라간다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발람의 교훈을 따라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한번 보겠습니다.
3. 이스라엘의 불평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광야를 떠난지 거의 40년만에 드디어 광야의 모든 여정을 마치고 요르단강 동편 시팀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요르단강만 건너면 가나안 땅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동안 말씀으로 양육 받았으며, 많은 전쟁을 통해 강한 군대의 모습도 갖춰서 주위의 다른 나라들이 두려워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일만 남게 되었는데 뜻밖에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복병을 만났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적들을 다 물리쳤고, 심지어는 유명한 점술가 발람도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시팀에 와서 모압사람들 사는 것을 보니 광야 40년 동안 먹었던 만나가 이제는 하찮은 음식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만나를 처음 먹었을 때는 꿀 섞인 과자 맛, 기름 섞인 과자 맛 같다고 했던 만나가 하찮은 음식으로 느껴지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실 지난 40년 동안 먹었던 만나는 종합 영양제로서 만나만 먹고서 전쟁에 나가 승리도 하였고 또 병에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영양실조에 걸려 죽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푸석푸석한 빵을 싫어하노라고 불평하기 시작하였습니다(민 21:5). 가나안 땅 들어가서 하나님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다른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어 있었는데도 이제 가나안 들어가는 것을 앞두고 만나가 푸석푸석한 빵이라고 생각할 때 모압 여자들이 모압의 축제에 오면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합니다. 불만이 생기면 불만을 틈타 유혹이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40년 동안이나 훈련을 받아 그토록 강하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군대로 변모한 그들이 어떻게 그처럼 쉽게 무너질 수 있었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넘어진 것은 발람의 교훈이라고 계2:14에 말하고 있습니다
(계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바알브올에 연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니 그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었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어떻게 이스라엘이 쉽게 넘어졌는지 우리는 민 31:16에서 이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보라 이들이 발람의 조언을 따라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브올의 사건에서 주를 대적하고 범법하게 하여 주의 회중 가운데 재앙이 있었느니라”
발람은 모압 왕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패배시킬 수 있는 한 가지 비밀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발람이 발락에게 알려준 계략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도 요한은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가리켜 ‘발람의 교훈’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제 ‘바알브올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의 전모를 살펴봅시다.
4. 범죄에 빠진 이스라엘
발람은 불의의 삯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이스라엘백성들을 무너뜨릴 계략을 발락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계2:14에 보면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의 계략을 듣고 이스라엘에게 올무를 놓았는데 그 올무는 자기들 신의 축제 때 아름다운 여인들을 통해 유대남자들 특히 통치자들을 초청하여 우상에게 절하고 우상의 제물 먹고 우상앞에서 그들과 행음하게 하는 정말 말초신경까지 녹을 정도로 유혹하는 올무였습니다. 만일 발락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왔더라면 이스라엘은 그들을 맞아 용감하게 싸워 승리했을 것이었지만 발락이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내어 우상숭배 잔치에 그들을 초대하자 자긍심도 강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이 던진 음행의 미끼로 인해 올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신4:3-4, 민31:16, 시106:28-29, 31, 고전10:8).
그 때의 상태에 대해 (25:1절)“이스라엘이 시팀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이 사건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가나안 족속들의 우상숭배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가나안 족속들의 대표적인 우상은 ‘바알’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우상도 농경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 농사가 잘 되려면 무엇보다 비가 제 때에 충분히 내려야만 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족속들은 비가 내리는 것은 남신과 여신의 성적 결합에서 비롯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들에게 제사를 드릴 때 마지막 순서는 신들 앞에서 성행위를 함으로써 성적자극을 받은 신들이 성적 결합을 하게 되어 비가 온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압 여자들이 이스라엘 남자들을 그들의 제사에 청했을 때 이스라엘 남자들은 먼저 모압 여자들에게 반해서 그녀들을 따라가서 그들의 제사에서 함께 어울려 제사 음식을 먹고 우상에게 절을 했습니다. “그들이 자기 신들에게 희생물을 드릴 때에 백성을 부르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니라(2)”. 그리고 2부 순서로 그들은 바알 우상앞에서 모압 여자들과 음행죄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 갔었을 때에도 모세가 오래 동안 내려오지 않자 그들은 금송아지우상을 만들어 그 앞에서 춤추며 우상놀이 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었는데 또 다시 이런 우상숭배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우상앞에 절한정도가 아니라 붉은 포주주로 만취한 상태에서 눈은 붉은채 모압여자들과 육적인 쾌락 성행위를 한 것입니다. 40년 광야훈련이 이처럼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마치 건물짓는데는 수십년 걸려도 무너지는 데는 단 몇초만에 무너지듯이 이스라엘이 가나안입성을 눈앞에 두고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마귀에 속하여 가나안 입성을 하지 못하도록 한 마귀의 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백성의 우두머리들을 잡아 처형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바알브올에게 연합하였으므로 주의 분노가 이스라엘을 향해 타오르니라(3).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모든 우두머리를 붙잡아 해를 향하여 주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주의 맹렬한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4)”
이것은 지도자의 책임이 막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지도자들만 처형당하는 것이 아니라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들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바알브올에게 연합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5)”
백성들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진리를 실감하며 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처형을 당한 것은 또 주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도록 백성들의 죄를 속하는 의미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가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백성들 중에 염병이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전염병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였다고 9절에 보면 그 재앙으로 죽은 사람이 이만 사천 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5 비느하스가 던진 질투의 창
백성들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백성의 지도자들과 우상에게 연합된 자들이 죽임을 당했으며, 백성들 중에는 염병이 생겨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을 때 모든 백성들은 회막문앞에 모여 죄에 대한 회개와 사망고통으로 인하여 부르짓는 상황에서 참으로 뻔뻔스러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6절에 보니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중의 성막문앞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중 한사람이 모세의 눈앞과 온 회중의 눈앞에서 미디안 여인 하나를 데리고 자기 형제들에게로 오니라.
염병으로 24000명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죄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로 슬퍼하면서 회막 문앞에서 울 때에 시므온 지파 시므리라는 통치자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자기 장막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지금 이런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상황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생각하기를 이 상황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이것은 죄는 사람을 얼마나 무감각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파렴치하고 추악한 범죄를 보고 한탄만 하고 있었는데 마침 아론의 손자인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그들을 뒤따라 들어가서그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 죽이니 이제 하나님의 진노가 끝났다고 했습니다.
비느하스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그분의 왕권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가슴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활활 타올랐으며, 결국 하나님을 향한 열정적인 사랑으로 즉각 그들을 징계하는 행동을 취했던 것이다.
“7 제사장 아론의 손자요, 엘르아살의 아들인 비느하스가 그것을 보고 회중 가운데에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8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장막에 들어가서 그 두사람 곧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으니 이에 재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치니라(7-8)”
그런데 말입니다. 그 순간 무섭게 퍼져나가던 염병이 뚝 그쳤다는 것은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거룩한 질투의 열정을 가지고 거룩한 분노를 발산하여 죄를 범한 그 남녀를 일거에 처치한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비느하스의 그 담대하고 열정적인 행동이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에서 나온 비느하스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염병이 그치게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비느하스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의로운 것으로서 대대로 칭송을 받을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시106:28-31) 시편 106은 이 사건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8 그들이 또한 스스로 바알브올과 연합하고 또 죽은 자들의 희생물을 먹어서 29 이같이 자기들이 창안한 것들로 그분의 분노를 일으키므로 재앙이 그들에게 임하였도다. 30 그 때에 비느하스가 일어서서 심판을 집행하니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31 그분께서 그것을 그에게 영원토록 모든 세대에 이르는 의로 여기셨도다. 정말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고후 11:2).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원수를 자신의 원수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의 의로운 행위를 칭찬하시고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제사장이 되게 하신 ‘화평의 언약(12)’을 주셨습니다.
그 공로로 하나님은 비느하스에게 특별한 축복을 주셨는데 곧 제사장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와 그의 뒤를 이을 그의 씨가 그것 즉 영존하는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얻으리라”. 다시 말하면 너희 가문은 영원한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리라는 복을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재앙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6 사랑의 하나님은 곧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언약을 맺으실 때 자신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4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곧 네 주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니라.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들을 지키는 수천의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느니라(출20:4-6)”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비록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하였을지라도 우리를 멸하지 않으시고 독생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사 인류를 구원하여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 역시 당연히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이럴 때의 하나님의 심정을 ‘질투’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는 말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역설적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므로 우리도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상을 섬기거나 죄에 빠져 파멸당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그래서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고 축복의 땅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시기 위하여 광야로 인도해 오셨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 빠지며 음행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이 때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범죄자를 처벌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1) 미디안을 처벌하라.
바알브올 사건에서 시므온 족속의 지도자 시므리가 자기 장막으로 데리고 온 여인 고스비는 바로 미디안 수령의 딸이라고 하였습니다(15). 이것은 미디안이 계획적으로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민31:3에서 하나님께서는 미디안을 ‘주의 원수’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백성을 유혹하여 죄에 빠지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만든 미디안을 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중에서 얼마를 무장시켜 싸움에 보내고 그들이 가서 미디안족속을 치고 미디안에게 주의 원수를 갚게 하라(31:3)” 미디안은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했으므로 주의 원수가 되었고, 결국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에 의하여 심판을 받았습니다(민31). 그리고 이 때 발람도 칼에 죽 임을 당했습니다(8).
(2)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한 열정의 사람들
여기서 우리들은 하나님을 위한 거룩하고 뜨거운 열정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며, 허물과 죄로 얼룩진 주의 많은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도 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열정을 보여준 분들에 대해 알아 보고자 합니다.
예를 들면, 다윗이 그러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때 블레셋 군대와 전쟁을 할 때에 마침 아버지의 심부름차 형들을 위하여 음식을 전해주려 전투 현장에 갔습니다. 거기서 적장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이스라엘 군대를 욕하고 조롱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때 다른 이스라엘 병사들은 골리앗의 기세에 완전히 제압당하여 다들 숨고 도망치는 데 바빴는데 소년 다윗은 할례받지 않은 골리앗이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이스라엘 군대를 조롱하는 것을 듣고는 거룩한 분노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그는 거룩한 열정이 솟구쳐서 골리앗과 맞서 싸우러 나아갈 때 이렇게 담대히 선포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주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주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주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주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5~47)
하나님은 다윗의 이 거룩한 열정을 보시고 그를 위하여 일하셨으니, 다윗이 던진 작은 물맷돌 하나가 적장 골리앗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아서 그 자리에서 쓰러지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대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거룩한 열정을 가진 다윗의 믿음과 헌신이 전세를 완전히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그 다윗을 하나님은 크게 들어 사용하시고 이스라엘의 목자로 높이 세워 쓰십니다.
구약 시대 아합 왕과 그 아내 이세벨이 이스라엘백성들을 바알 숭배로 더럽힐 때에도 하나님은 거룩한 열심을 품은 한 사람, 디셉이라는 시골 출신 엘리야를 들어 지극히 위대한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거룩한 열정으로 거의 혼자서 온 세상과 맞서 싸웠고, 하나님은 그런 그를 위하여 까마귀를 동원하여 떡과 고기를 주시기도 하셨고, 사렙다 과부의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도 베풀어주셨고, 그 집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주시기도 하시고, 갈멜산에서 불로 응답해 주시기도 하시고, 또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삼년 반 동안 비는 커녕 이슬도 내리지 않았던 무서운 가뭄을 그치게 하고 단번에 큰 비를 내려주시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용기있게 헌신한 한 시골출신 대언자의 거룩한 열정을 기뻐하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신약 시대 많은 사도들이 열심을 냈었지만 특별히 이방 선교의 길을 달려간 사도 바울의 열심은 남다른 바 있었습니다. 그가 고린도 교회가 이런 저런 시험으로 흔들릴 때 그들을 권면하기 위하여 쓴 편지 속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2-3).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당시 거짓 교사들이 접근하여 바른 예수가 아닌 다른 예수를, 바른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 성령이 아니라 다른 영을 받게 하려고 시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 일부가 흔들리고 요동했을 때 사도 바울은 마음이 아파서 편지를 써서 권면하기도 하고, 사람을 보내어 권면하기도 하고, 자기가 직접 가기도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많은 눈물로 기도하면서 그들을 바른 길로 돌이키려고 애썼습니다. 바로 그러한 노고가 바울의 심정에 있는 하나님의 열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사도 바울 당시에 그렇게 크게 흔들렸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다시 사도 바울의 지도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의 순결한 신부로 계속 남아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열심이 이렇듯 때로는 많은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속죄의 길로 인도하며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합니다. 또한 이러한 열심이 하나님 마음에 쌓인 분노를 쉬게 만들고 그 마음이 기쁘게 만들고 그래서 축복으로 전환되기도 합니다.
광야 인생길을 가는 성도에게 방심은 금물입니다. 방심은 우리가 은혜로 충만할 때, 시험과 싸움에서 이겼을 때도 찾아옵니다. 본문의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방심하다 넘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을 받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강한 군대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점술가 발람이 감탄하고 부러워할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위기의 때기이도 합니다. 40년 광야생활에서 수많은 승리의 삶을 마쳤던 이스라엘이 이처럼 맥없이 무너진 것은 교만하여 방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은혜가 충만하십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고 있습니까?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럴 때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교만하여 방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무슨 일이 있어도 죄에 빠지지 않도록 힘쓰며,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오직 믿음에 견고히 서서 끝날까지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처럼 불신이 만연한 시대에 주의 열심을 품은 사람을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러한 열심을 품고 주의 영광을 위하여 힘써 일하게 하옵소서. 성령의 충만함을 주사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이 시대에 우리 모두 비느하스와 같이, 다윗과 같이, 엘리야와 같이, 바울 사도와 하나님의 열심을 품은 사람이 됩시다. 이 시대에 주님의 진노를 기쁨과 시원함으로 바꿀수 있는 하나님의 질투하심을 품은 열심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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