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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 복음의 증인이 되자
    말씀 2019. 12. 1. 18:16

    복음의 증인이 되자 1:1-11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구원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마음에서 우러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받은 이 구원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바로 복음전도하는 일입니다. 교회를 오래동안 다녔어도 아직 까지 한 번도 남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아직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왜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려주어 하느냐 하는 것은 주님이 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 우리들에게 부탁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도 부모나 가장 가까운 누군가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 아니면 아주 멀리 떠나면서 그 무엇을 부탁하였다면 그것을 들어주는 것이 인간의 마음인데 하물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사 우리들에게 부활의 확신과 함께 영생을 보여주신 그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 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증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하신 말씀을 한 번 보겠습니다.

    (28:19-20)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3년동안 동거동락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가르치셨고 이제는 주님께서 하셨던 것을 제자들에게 맡기시고 하늘로 올라가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가서 복음을 증거하고 가르쳐 제사삼으라는 부탁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이야 말로 전에는 겁쟁이였지만 이제는 담대해졌고 주님을 위해서는 그 무엇을 드려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가장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 하니 그들은 다 복음전도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복음전도가 무엇인가 바울의 예를 보겠습니다.

     

    1. 그들이 그의 증인이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전도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교회가 세워졌고 예루살렘교회는 시리아의 안디옥에도 교회를 세웠고 이어서 안디옥교회에서는 최초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이방지역까지 파송했는데 사도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하였을 때 유대인들이 모이는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하였던 설교를 보면 사도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40년 광야생활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사사 시대를 거쳐, 왕정국가로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에 이어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가리켜 내가 이새의 아들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시면서 그가 내 모든 뜻을 성취하리라고 하셨는데 이는 다윗을 혈통을 따라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을 말하면서 곧바로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인류의 구원자이신 진정한 메시야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따랐던 침례 요한도 예수님을 가리켜 자기는 예수님 앞에서는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는 자라고 증거하였고 또 유대 총독 빌라도도 죄 없으신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하였으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모든 권세를 총동원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것은 그들의 힘이 강하고 예수님은 약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사도바울의 증언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3:29-31) 29. 그들이 그분에 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성취하고 나무에서 그분을 내려다가 돌무덤에 두었으나

    30.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셨으므로

    31. 그분께서 그분과 함께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올라간 자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는데 그들이 백성에게 그분의 증인이 되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던 이유를 31절 하반절에서는 그들이 이제 백성들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고 바울은 힘있게 말했습니다.

    증인이 무엇입니까? 증인은 자기의 상상력과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주장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자가 아니라 증인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사실대로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켜서 증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는 나중에 제자들이 증인 역할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도록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여러번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말씀을 확대 설명한다면 예수님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도 예수님의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즉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목적은 예수님의 증인 노릇을 하기 위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에 대해 고린도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말씀은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이기 때문이며 이렇게 사는 것이 참된 행복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법정에 선 증인이 과거에 자기가 본 것을 말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하여 우리가 보았던 예수님을 우리의 입으로, 우리의 행동을 통하여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말씀들을 읽고 묵상하고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입에서, 우리의 행동에서 예수님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예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성전입구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분명히 이렇게 말하며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3: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 말과 함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태어났던 그 사람은 기적적으로 일어나 껑충 껑충 뒷면서 걸어서 성전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전부 다 베드로와 요한의 주변으로 모여들었 때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분은 예수님이신데 왜 우리들을 주목하느냐고 하면서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어찌하여 이 일에 놀라느냐? 어찌하여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신의 권능이나 거룩함으로 이 사람을 걷게 만든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 너희들이 십자가에 죽였던 예수님의 이름으로 된 것이니 그런즉 너희는 회개하고 그분을 믿으면 너희죄가 용서함을 받으리라고 했을 때 그날 남자 장정만 5천 명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4:4)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우리의 삶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우리들을 집중했을 때 우리는 모든 영광을 오직 예수님께 돌려야 하며, 우리의 생각은 오직 그들도 우리처럼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데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증언하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얼마나 귀하냐하면 예수님을 모르고 멸망 가운데 빠졌던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도록 복음전도를 한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별과 같이 빛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증인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이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전도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야 가능한 일이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이일에 함께 하여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후 전도자들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면서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을 기록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데 증인의 삶이란 말 그대로 자신의 본 것 들은 것을 전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복음전도는 내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일입니다.

     

    2. 복음전도에는 박해가 따른다

    돈은 써야 가치기 발생하듯이 성도라는 직분은 복음은 전해야 가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녔어도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헌신과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전하는 자의 사명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나를 통해 구원받은 영혼들을 생각하며 부지런히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명감당하면서 사람들이 우리들을 주목하고 존경한다면 얼마나 힘이 나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일도 항상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이 아니듯이 복음전도하는 일은 사탄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보다 한 수 위입니다. 우리의 지혜로서는 저들을 대적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말하기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우냐고 합니다. 사탄의 전략을 모르고서 하는 말입니다.

    4년전 미국 오레곤주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캘리포니주 위에 오레곤 주가 있는데 산림도 우거지고 바다와 산이 있는 아름다운 주인데 여기에는 기독교인도 많고 착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주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20151023천명학생이 다니는 대학교에 괴한이 수업중인 강의실에 들어와 "너는 기독교인이냐?" 라는 질문을 한 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을 곧 만나게 될 것."이라며 머리에 총을 쐈고 "아니다"라고 하면 다리 등 신체부위에 총을 쏴서 수업 중 13명이 살해되었고 7명이 다리에 부상을 당하는 끔직한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에서는 매년 총기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아직도 미국에선 아버지 생일날 최고선물이 총이라고 합니다. 보통 한 집안에 4-5개 정도 있으며 좋은 총은 1분에 몇 발 나가는 것으로 자랑을 한다고 한다. 이런 일들이 꿈을 이루고자 전 세계 사람들이 선망하는 미국사회의 현실입니다. 만약 지금 그런 총을 가진 괴한이 예배중인 교회안으로 뛰어 들어와 교회천장에 공포탄을 한발 쏜 후 목사부터 머리에 총을 대고 너 정말 죽으면 천국 가느냐? 묻는다면 예스하면 그래 지금 네가 원하는 천국 내가 보내 줄게 하면서 총을 쏜다면 남은 교인들 중에서도 에쓰 혹은 노라고 말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지만 생의 마지막에 예기치 않게 이런 시험이 온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하겠는가 한번 쯤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이 이처럼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10:32-33) 32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우리들이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 하면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우리들을 시인하시겠다고 하셨고 예수님을 부인하면 예수님도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우리들을 모른다고 하시겠다는 말씀이 복음서에도 있고 요한계시록 3:5절을 통해서보면 시험을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을 것이며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기록되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보좌앞에 있는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제 아무리 위대한 이름을 남겼다 할지라도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면 천국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위의 사건을 들으면서 목숨이 끊어질 경우라도 나는 당당하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요 ? 점점 예수믿기 어려워 지고 있는 시대가 오늘날입니다. 오늘날 미국교회의 고민은 미국정책에 대항하는 일들입니다. 지난 오바마 정부에선 교회들이 동성결혼 반대 베리칩 절대 불가 오바마케어 의료보험가입 반대 WCC반대 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시나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청교도들에서 의해 세워진 나라가 미국인데 미국은 지금 신앙의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32년간 시에 교회등록 하고 아무 일없이 운영되던 교회가 어느 날 정부로부터 더 이상 교회등록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통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왜 정지되었을까? 그리고 얼마 후에는 은행으로부터 편지를 1통 받습니다. 정부허가를 받지 못해 거래하는 교회의 은행계좌가 취소되었으니 00까지 입금된 돈을 찾아가고 정리해달라는 내용입니다. 그 날짜 이후에는 입출금이 불가능하다는 통보입니다. 그래서 담임목사는 시청 담당자를 찾아가 왜 교회등록 허가가 취소되었는가? 그 원인을 알아보니 귀 교회가 정치활동과 사회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라는 황당한 답변을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정치헌금 한 적 없고 정치가들을 강당에 세운적도 없고 정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한적 없다고 하였는데 무슨 말이냐고 오해가 있는게 아니냐 하고 따졌더니 담당자는 귀 교회는 국가시책인 오바마 케어를 반대하면서 베리칩을 거부하고 연방대법원이 인정한 동성결혼 합법화를 반대하고 국가정책에 따르지 않으니 그 자체가 정치활동이라는 것이다. 또 모든 종교는 평등한데 왜 당신교회에서만 예수님만을 믿어야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이 사회운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등록 허가를 취소하였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는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이 때가 교회가 핍박받고 있는 상황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경만이 진리라고 해야지 다른 종교도 각자 진리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록하기를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만이 인류의 구원자이시라 해야지 다른 교주들도 구원을 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로 만나서 결합을 하는 것이지 동물들도 안하는 동성결혼을 한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죄악이라고 설교하면 그것이 정치활동이라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또 예수님이라는 이름자체가 죄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라고 하였듯이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고자 2000년 전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신 것인데 어찌 세상의 모든 종교가 다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바마케어를 받고자 하면 전제조건이 베리칩을 오른손에 삽입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베리칩이 요한계시록 13:16에 나오는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자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게하고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성경은 마지막 시대가 되면 이 짐승표를 사람들의 오른손에 삽입할 것을 기록하여 났는데 그런 현상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이미 시작되었는데 그 짐승표를 받으면 편리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제가 미국 TV에서 베리칩을 광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 편리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그리고 그 짐승표를 안 받으면 여러 가지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는데 누가 안 받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 말씀을 아는 사람만은 그 베리칩을 받으면 지옥가는 것을 알면서 어찌 베리칩을 받으라고 교인들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먹으라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이라고 사탄이 거짓말 하는 것을 믿고 먹는 다면 당연히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먹으면 죽는 다고 말씀한 것을 믿어야 할까 아니면 먹으면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사탄의 말을 믿어야 할 것인가는 각자의 몫입니다. 지금 교회가 한가로이 예배드리면서 신앙생활하는 것은 이미 끝나가고 있습니다. 목숨걸고 복음을 지키지 않으면 다 마귀의 손아래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교회는 경고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정말 하나님 말씀을 바로 전하면 교회가 핍박을 받아야 하고 테러리스트로 오해를 받아야 하고 정치활동한다고 그리고 사회활동을 한다고 국가로부터 핍박을 받는다는 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런 핍박을 받는 다는 것은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에서나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청교도들이 세운 기독교국가라는 미국에서 예수믿는 다는 이유로 머리에 총을 맞고 살해당한다는 것,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세상법은 틀렸다고 하여서 교회가 문을 닫게 된다는 것은 중동 IS에서나 북한같은 나라에서나 일어나는 것인데 실제로 4년전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제는 여러분 생명 걸고 예수님 믿어야 합니다. 복음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걸고 순교의 자리까지 나가야 합니다. 이제는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육신을 따라가면 영혼까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육신을 내려놓더라도 예수님의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정말 머리에 총을 겨누고 너도 기독교인이냐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하여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나는 기독교인이다 너도 예수님 믿어야 천국갈 수 있다라고 전하면서 나는 정말로 천국에서 너 보기를 원한다면서 복음을 전하면서 죽더라도 그 죽음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일 하다가 죽는다면 그 죽음을 순교라고 합니다. 순교하다 죽은 사람하면 누가 생각납니까?

     

    3. 초대교회의 순교자

    (1) 야고보의 순교

    (12:1-2) 1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야고보(James)는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에서 가장 먼저 순교를 당한 제자이다. 여기 나오는 헤롯은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에 동방박사들을 만나서 유태인의 왕이 태어났다고 하니까 베들레헴과 인근 마을의 두살 이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인 인물이 아닙니다. 그 헤롯의 아들인 헤롯 안티파스는 침례 요한을 죽인 장본인이고요 오늘 등장하는 헤롯왕은 헤롯대왕의 손자인 아그립바 1세입니다. 헤롯 가문은 혈통적인 약점(유대인이 아니라 이두메 출신) 때문에 항상 유대인들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미워하는 것을 알고, 아무 죄 없는 사도 야고보를 살해하는 사건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리곤 사도 베드로까지 옥에 가둔 것입니다. 야고보의 순교는 초대교회 특히 예루살렘교회에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중에서도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사도로써 최초 순교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주님께서 따로 기도하러 가실 때나 이런저런 일들이 생길 때마다, 베드로 요한과 함께 데리고 다니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과 주님 사이에는 몇가지 일화들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한 일화가 세베대의 아내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의 소망에 대한 것입니다. 세베대의 아내인 이 두 아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서 뭔가 높아졌을 때 자신의 두 아들의 자리를 예수님께 청탁합니다. 하나는 우편자리에 다른 하나는 좌편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의 마실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침례를 받을 수 있느냐?(10:38)”고 물으셨을 때 그들은 주저없이 할 수 있나이다.”고 대답합니다. 주님이 마실 잔과 주님이 받으신 침례는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했던 것임이 분명합니다. 야고보는 그가 말한대로 예수님이 마시는 잔을 마십니다. 야고보는 열두 사도 중 가장 먼저 순교했고, 그의 형제 요한도 밧모섬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됩니다. 본문은 그때에로 시작하는데 안디옥 교회가 탄생하고, 예루살렘교회를 닮아 잘 세워지는 중에 있던 그때입니다. 교회가 여러 어려움 속에서 끈질긴 생명력으로 풀뿌리처럼 이곳저곳 이방인들에게 역사하는 중이었는데, 여기에 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은 사건이 바로 야고보의 순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안 됐다고 말할 수 없고, 요한이 다행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요한이 오래 살면서 교회를 돌보고,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요한일이삼서, 계시록)을 썼다고 업적을 많이 남긴 것도 아니고, 야고보가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두 사람이 모두 내 잔을 마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두 형제는 고난의 잔을 마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죽고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는가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죽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는 교회의 생명력이 나보다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2) 스데반의 순교

    스데반은 초대교회의 최초의 순교자로서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에 대한 기록입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순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때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스데반이 말하기를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하면서 주여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고 하니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내 영혼을 받아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순교하지 않았어요? 그순간 하늘 문이 열리고 예수님이 보좌에서 일어서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순교자가 과연 오늘날 몇 명이나 나올까요? 아니요 나 예수 안 믿어요 하면서 다리에 총을 맞고 불구자로 살게 될 집사도 목사도 교인들도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 듯 떠오릅니다.

    이런 믿음의 시험이 어느 날 교회 또는 학교에 들어 닥친다면 그것이 바로 알곡이냐 쭉정이냐를 가르는 심판일 것입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키로 까불러서 구분하는 것처럼 참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도 심판의 키질을 통해 골라내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언제든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결정하는 순간의 시험이 나에게도 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미리 들은 사람들은 시험준비를 미리 한 것이기 때문에 시험이 왔을 때 결정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신앙을 갖지 않으면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마차 우리나라는 그동안 지진의 안전지대였다고 생각했는데 4년전 경주에서 진도 5.8지진이 발생한 후 이제는 결코 지진의 안전지대가 아닌 것처럼 또한 그동안 종교의 자유로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머지않아 복음의 위기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마지막 때에는 환난이 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4:9)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핍박을 받으리라.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다가 환난을 당할 것을 보장하였으니 환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지금 여러분이 이 세상을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믿다가 죽으면 그것이 복된 죽음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짜피 우리는 때가 되면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죄인으로 태어난 이상 반드시 죄값으로 죽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사망이 온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나만은 그렇지 않겠지 영원히 살 것처럼 전혀 죽음에 대해 준비 없이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의 그림자가 들어 닥치면 말 한마디 못하고 공포에 싸여서 마귀에게 끌려 지옥으로 가게 되는 것이 일반 사람들의 인생의 종착역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로는 사후 세계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회개할 기회가 죽기 전 까지는 얼마든지 있지만 죽은 후에는 회개할 기회는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죽어서 지옥 간 영혼은 영원히 불타는 지옥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치고 죽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나요? 이왕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는 죽음이 가장 복된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과정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가 단지 복음을 위해 죽었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조명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인격과 삶과 타인들에 대한 태도가 바로 순교이며 선교의 모습임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스데반은 우선 성령이 충만하여 지혜와 믿음이 넘쳐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지혜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깊숙한 묵상과 꾸준한 영적 각성을 통해 지혜를 축적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6장과 7장 초반부에 나타난 스데반 집사의 설교와 그의 영적 지식과 질문에 대답하는 태도, 청중들 앞에 서서 시험받고 죽을 때의 모습이 바로 신앙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고 참 순교의 완성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유대인들은 이를 갈며 죽일 듯 공격하고 있었지만 스데반의 모습은 천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성령충만한 순교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스데반이 죽는 그 장면은 바로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외쳤다. 이 외침은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외치신 말씀과 같습니다. 비록 자신을 향해 날카로운 비수와 같은 저주와 함께 돌덩이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다해 우리를 사랑하셨던 예수님처럼 스데반의 순교는 진실한 순교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찌르는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바로 우리에게 참 순교의 모습과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세상살이 속에서도 스데반의 순교의 삶을 통해 궁극적인 승리를 이끌어 내는 귀한 영적 일꾼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기독교 역사는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씨앗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어 왔습니다. 순교자들의 수가 채워지면 하나님은 반드시 순교자들을 신원하여 주실 것입니다.

    (6:9-11)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예언했는데 이 예언대로 스데반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 것입니다. 스데반은 죽음 직전 하늘이 열리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7:55-56)

    7:58-59에서 스데반은 그렇게 돌아 맞으면서도 너무도 편안하게 자는 것처럼 죽는 스데반을 보면서 그 때 혈기가 가득한 사울은 스데반이 돌에 맞을 때 증인들의 옷을 맡았던 사울이었습니다(7:58). 이런 스데반의 죽음이 후에는 사도 바울이 회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느꼈을 것을 경험은 후에 사울은 사도 바울로 변화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앞에서 영생을 놓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선 안됩니다 어리석은 사람하면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 버린 에서가 생각납니다. 앞으로는 에서처럼 먹는 것 때문에 짐승표나 베리칩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 말씀은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듣고도 인류조상 아담과 하와는 먹었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쳐다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해서 먹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도 베리칩을 받으면 편리하고 안전하고 스마트하고 정보화 시대에 최첨단의 무리에 포함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거절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오직 순교의 믿음없이는 받을 수 없는 것이 마지막 시대의 선악과인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사도행전 11절 누가는 12 제자도 아니지만 바울을 따라다닌 주치의사로 전도여행을 떠날 때 바울과 동행하면서 선교지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를 기록한 사람으로 그는 유대문화와 그리스 문화에 익숙한 사람으로 일찌기 유대와 이방지역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 하나 보면서 기록해 났다가 그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데오빌로 각하에게 두 번의 편지를 보낸 것이 오늘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이라는 신약성경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한 것입니다.

     

    4. 사도행전 입문

    1절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에서 먼저 쓴 글이라는 것은 누가복음 1-2절에 보면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나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다 라고 이 편지를 쓰게 된 동기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누가가 데오빌로 각하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편지를 쓴 것이 오늘날 누가복음이 된 것입니다.

    데오빌로 각하라고 하였는데 각하는 당시 황제 밑에 있는 원로급의 신분이 각하인데 누가는 복음을 전달할 대상자로 이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들에게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가는 생각하기를 데오빌로 한사람만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의 영향력으로 인해 핍박으로부터 기독교인을 보호하여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 고위층에 있는 데오빌로 각하에게 편지를 썼던 것인데 이는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기도하면서 성령의 인도함에 의에 누가복음서가 쓰여 진 것입니다.

    남을 구원하고자 편지 한장 보낸다는 것은 작은 일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하는 작은 일 하나하나가 이처럼 귀하다는 것이다. 교회 청소하는 일부터 식사준비하는 일까지 안내 하는 일까지 다 작은 일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귀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편지 한통을 보냈는데 그것이 하나님 말씀이 될 줄을 누가 알았는가? 한 영혼 구하기 위해 이런 수고를 한 것인데 지금이야 컴퓨터에서 금방 쓸 수 있고 여러사람에게 보내기를 원하면 복사한다든지 프린터로 여러장을 인쇄하던지 하면 되지만 당시에는 갈대로 만든 파피루스에 글을 써야하는데 오늘 날과 비교하면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인데 한 영혼 구하기 위해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한 작은 일들 그 하나하나가 결코 주님안에서 헛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편지한통 두통이 누가복음이 되고 사도행전이 되는 위대한 성경말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편지 한번으로 끝났다면 사도행전은 씌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사도행전이 없었다면 우리는 초대교회가 어떻게 활동하였는지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다면 어느 것 하나 다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소한 것 하면 뭣하나 소홀이 하면 안됩니다. 내개 맡겨주신 모든 것을 성실하게 하면 후에는 상급으로 돌아온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어떤 상급을 약속하였는가?

    사도행전 11-11절에서는 주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이 약속되어 있는데 성도들에도 동일한 약속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3절입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시작하여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좀 구체적으로 말하면 누가복음 끝부분에 기록된 부활에서 승천까지 40일간의 예수님의 행적을 사도행전 서두에 언급하게 된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1) 부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은지 3일 후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여러번 부활의 몸을 보여주셨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신 일은 하나님 나라 일을 말씀하시니라(3).

    이땅에 40일 동안 부활의 몸을 입고 누구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였을까? 누가복음 24장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이야기도 하고 떡을 떼어주시고 성경을 풀어 설명해 주시기도 하였고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에게는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복된 믿음이라고 하였고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는 제자들에게는 먹을 것을 차려서 주기도 하였고 때로는 먹을 것을 달라기도 하셨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제적으로 만났기 때문에 겁많던 갈릴리 어부들은 신앙의 투사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를 믿었으므로 그 제자들은 한결같이 목숨 바쳐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온전히 믿을 때 참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 우리도 신앙생활하면서 부활의 예수님이 나에게 오신 것처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우리자신을 드릴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부활한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명한 빌라도에게 나타나서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렛 예수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면 또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고소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 그중에서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나타나서 내가 너희들이 죽였던 나사렛 예수라고 양손과 양발에 못박혔던 흔적을 보여주셨다면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정말 메시야라는 것을 믿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총독이나 종교지도자인 장로나 바리새인들이나 대제사장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다면 좋았을 덴데 왜 예수님은 40일 동안이나 계시면서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았을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죽었다 깨어나도 탐심과 정욕을 기꺼히 버리거나 순교할 사람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일 먼저 부활의 주님을 타나내 보이신 사람은 누구였는가?

    마가 복음 169절에 보니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마귀들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일곱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자는 갈릴리에서 일곱마귀에 붙들려서 고생하다가 예수님이 그녀를 마귀에게서 구원하신 후 그녀는 그 때부터 예수님을 따르면서 헌신한 여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에도 그 자리에 있었고 시신을 무덤에 두었을 때에도 있었고 안식후 첫날 새벽에 무덤에 갔었을 때에도 시신에 바를 향료를 준비하여 갔던 여인이었고 무덤에 갔었을 때 무덤속이 비었을때 천사로부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부활의 소식을 처음 들었던 것도 그녀이고 마지막은 부활하신 주님이 처음 만나주었던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이런 것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이 누구에게 제일 먼저 찾아오시었는가? 예수님을 가장 많이 사랑한 사람에게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먼저 만나주시면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살아난 것을 전하라.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에 무덤이 있는 산에서 헐레벌떡 뛰어 내려와 제자들이 있는 다락방에 가서 문을 두르리면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을 때 제자들은 아 이 여자가 마귀들려 미쳤을 때 모습으로 또 미치지나 안했을까 생각하니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런 자 에게만 복음이 전파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예수님 아니면 살수 없는 사람들에게만 복음이 전하진다면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오늘 이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에게 복음이 전하여 지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이 영원한 안식을 주시는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은혜이며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고 복음은 어떻게 보면 우리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이땅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사는 진리가 바로 하나님 은혜인데 이 은혜는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 하나님의 은혜도 탐심과 정욕이 없는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들에게 40일 동안 보여주었을까? 주님을 위해 죽을 자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실세로 부활 후 만났던 120명의 제자들은 다들 순교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은 후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성벽에서 떨어져 죽었고 장작불에 화장되어 죽었고 콜로세움에서 사자밥이 되었고 그들 중 누구도 주님을 모른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들은 끝까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예수님은 부활하셨다고 복음을 전하다 죽었던 부활의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들도 부활의 신앙을 가져야 담대해 지는 것입니다.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이다 라는 믿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모여서 기도하던 중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였으며 그들은 최초의 복음증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맡겼더니 그 복음이 지금까지 2000년 동안 전하여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오해하고 있었던 것처럼 제자들 역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오해를 하였습니다. 6절에 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예수님께 이렇게 여쭙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이스라엘 땅에 메시아 왕국을 세울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이고, 그 때 즉 마지막 심판으로 인한 회복의 때가 바로 지금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7-8).” 때와 시기는 철저히 하나님의 권한이니 너희들이 정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종말의 시기가 아니라, 주님 다시 오실 그 날을 기다리는 자로서의 자세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것이 증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증인이 되어야 할 곳의 범위도 예루살렘과 온 유대지역 또 사마리아와 땅끝이라고 언급합니다. 또 증인으로 사는 삶은 어떠한 삶이겠습니까? 먼저 예수님을 믿는 증인으로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답게 세상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주님을 믿고 살면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믿음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것이고, 언젠가는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마지막이 있음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봅니다. 주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님은 우리들이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야 함을 크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주님, 주님 오실 날을 고대하며 사는 자의 삶의 자세를 잊지 않고 하루하루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잘 감당하게 해 주시옵소서. 언젠가 세상과 작별할 날이 올 때 그날이 후회가 아닌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순간이 될 수 있도록 오늘을 잘 살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2) 승천

    인간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은 구약시대에 엘리야가 제자 엘리사가 보는 가운데 승천하였다고 하는데 예수님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과 기약없는 작별을 한 것입니다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축복하신 후 감람원이라는 산(12)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24:50-51).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들은 당연히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어 달라는 말씀에 대해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하나님과 동등한 분(2:6)분이셨는데 이러한 예수님은 인간의 형상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신적권위를 가지고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왕권의 행사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16:19)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므로서 왕권의 행사로 복귀하신 것입니다.

    승천하실 때 두 천사가 예수님을 증언하십니다.

    9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천사가 증인이 되었습니다.

    10 두 천사가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느냐?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다고 약속하였습니다.

     

    (3) 재림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을 때 옆에 있던 천사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다시 오시리라는 언약에 대해 이제는 제자들이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못하면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세상끝날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결코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모든 시간은 하나님의 목적과 섭리 가운데 그분께서 의도하신 대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우리들의 소망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그리고 천사가 증언한 대로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역사적인 사실인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재림에 대해 이전에도 말씀하셨습니다.

    (24:30)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는 주님자신의 증언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계셨다가 승천하셨습니다. 이 날들은 예수님께서 교회를 설립하는데 필요한 가르침과 기간을 가지셨음을 말한다. 사도들이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기도로 준비한 기간이 오순절 성령강림까지의 10여일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날 성령을 받았던 120명의 증인들은 모두 증인으로서 순교자적인 생을 마감한 성도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부활의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왜 우리들에게 복음의 사역을 맏기셨을까? 우리들은 보잘 것 없는 연약한 사람들이지만 우리들도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맏겨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고 주신 사명을 기꺼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은 죽음이라는 고통의 시간을 희망의 시간으로 바꿔논 것입니다.

    승천은 예수님의 승리를 확실하게 보여 준 거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은 오히려 이땅에 대한 예수님의 지속적인 통치를 의미합니다. 이제부터 우리 행복침례교회 성도님들은 내 안에 전지전능하신 성령님께서 계신다는 믿음을 갖고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과 전도자의 사명을 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행복침례교회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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