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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말씀 2019. 4. 7. 13:14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마 13:10-23 19. 4. 7
성경을 하나의 유기체에 비교하여 한 몸이라고 한다면 복음서는 얼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가장 밝히 비춰진 부분은 복음서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골고루 다 보아야 되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이 복음서인 만큼 복음서를 많이 읽고 이해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아 의롭게 된다는 기독교의 교리를 명확하게 썼다 하더라도 복음서에 비할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로마서가 중요한 것이지 로마서가 결코 복음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이 땅위에 교회가 세워진 후 사도들이 교회에서 행한 것을 기록한 사도행전도 복음서의 세계성을 설명하는 책이며, 로마서를 비롯한 서신들은 복음에 대한 변증서입니다.
이처럼 복음서를 통하여 성경 전체를 종합해 볼 수 있는 까닭에 복음서가 성경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 4복음서 모두가 하나같이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떠한 기적이나 치유보다도 “예수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말씀은 다 중요한 가운데서도 역시 더욱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를 우리의 몸에 비유한다면 손가락 하나를 다쳐도 고통스럽고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도 아파하는 것처럼 우리 몸 어느 한 부분도 중요치 않은 것이 없습니다만 필요에 따라서는 오른손을 자를 수도 있고 다리를 끊을 수도 있습니다. 자르고 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은 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목은 자를 수가 없습니다. 목을 자르면 죽음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는 우리 몸의 목과 같은 것 아니겠어요
예수님은 40일 금식하신 후 공생애 들어가시면서 제일 먼저 외치신 말씀이 (마4: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인데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에 관심을 갖고 천국을 반드시 알고서 천국에 가기를 원하시는 천국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천국은 감추어졌던 비밀이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35엔 천국은 창세로부터 감취었던 비밀인데 이제 예수님께서 밝히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11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으나 너희에게는 허락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천국은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선지자들에 의해 암시적으로 전해졌을 뿐 명시된 적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야기 오셔서 세우실 나라는 물질적이고 정치적인 이세상나라를 세우시는 메시야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오신분이시므로 천국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들려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천국은 이 땅에서는 볼 수 없는 나라이므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은 분명히 유대인들에게는 감취었던 비밀을 우리들에게 들려주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천국에 관해 알기를 원한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 비유를 상고해야만 합니다. 이런면에서 오늘날 성도들은 구약시대 성도들보다 훨씬 복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보기 원하고 듣기 원했던 것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죽었지만 오늘날 성도들은 성령의 역사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복된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잘못 이해한다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버림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직접 볼 수 없으므로 예수님이 하신 비유로 이해할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비유는 단순하면서도 또 숨겨진 그 무엇이 있는 양면성을 전하는 것인데 단순하다는 것은 실생활에 잘 알려진 재료로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오래 남아 있게 되는 것이고 또 숨겨진 의미로 인해서 듣는 사람에 따라서 해석의 차이가 생길수도 있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말씀하실 때는 보화, 알곡, 진주 등 많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는데 천국을 얻기 위해서는 마치 가장 값진 진주나 보화를 소유하기 위해 그 무엇을 팔아서 소유하더라도 아깝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1.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마태복음 13장34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비유가 없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셨을까요?
첫째로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은 안한 것만 못한 결과를 가져오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말하는 자는 듣는 자의 편에서 말해야 하고 듣는 자는 말하는 자의 편에서 들어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자기가 경험한 세계 외의 이야기는 전혀 통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래서 눈높이 맞춰서 이야기 하여야 조금은 알게 되는데 천국 이야기를 아무리 자세하게 한다 하더라도 아무도 경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이야기 하려고 할 때에 누구나 다 아는 아주 평범한 땅의 이야기를 들어서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이것이 비유입니다. 땅에 것을 이야기 한다면 땅에 있는 꽃이나 밭에 있는 곡식이나 공중나는 새를 가리켜 말씀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땅의 것을 들어서 비유로 말씀하실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둘째로 또 모르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마태복음 13장14절을 보면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있듯이 이 말씀은 마음이 열린 사람에게는 알게 하고 마음이 닫힌 자에게는 모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 헤롯 왕을 여우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눅13: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기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내쫓고 치료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게 되리라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 그리고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어느 날 “여우에게 가서 말하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여우하면 헤롯왕의 별칭이 여우인데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압니다. 헤롯왕을 여우라고 하는 것이 비유입니다. 만약에 헤롯왕에게 가서 말하라고 하면 정치적인 문제에 걸리게 되면 시끄러워집니다. 그러나 여우에게 가서 말하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므로 비유란 이처럼 언제나 은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알아듣고자 하는 자에게는 알게 하기 위함이고, 마음이 삐뚤어지고 완악한 자에게는 모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11)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16-17절에는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비유는 모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셋째로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말이란 역시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설교를 하더라도 우선 졸지 않도록 재미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나 가르치는 사람은 일단은 졸지않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재미있게 말하여 우선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심이 있고 매력에 끌려야 듣지 그렇지 않으면 안 듣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재미있게 말씀하셨습니다. 재이있게 하는 비유는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게 합니다. 그리고 그 그림은 구체적일수록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친절하고 재미있게 구사해 나갈 때 듣는 사람은 손길 닿는 대로 그리면서 재미있게 듣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재미있게 천국의 복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넷째로 잊어버리지 않기 위함입니다.
“아멘”하면서 들은 설교는 잊어버릴 수 있어도, 비유로 말한 예화들은 잘 잊어버리지를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예화는 오래 오래 기억되기에 예수님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씨 뿌리는 비유의 배경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공관복음서에 다 들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골육이냐?’라는 질문 다음에, 이 비유가 있고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에서도,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골육이냐?’는 질문 다음에, 이 비유가 등장하니까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누가 예수님의 진짜 가족이냐?’에 대한 대답을 이끌어 내기 위한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지 않은가요?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배경은,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등장하는 장면에, 세 복음서 공히, ‘수많은 큰 무리가 예수님을 찾았다’라는 배경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눅 8:4)을 보세요
눅8:4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막 4:1)을 보세요
막4: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 (마13:2)을 보세요
(마 13:2)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이렇게 예수님의 기적을 본 ‘큰 무리’가 예수님을 좇겠다고 예수님께 나아와서,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어요. 그 때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떨어지는 거예요. 무엇을 말하고자 이 비유를 하셨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너희들, 날 좇겠다고, 지금 날 찾아왔는데, 너희들이 정말 다 옥토인 줄 아니?’ 이것입니다. 거기에다! 그 비유의 내용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만 설명해줬어요. 그리고는, ‘왜 비유로 말씀을 하시느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대답을 하십니다. 잘 들어보세요.
(마 13:10-15)
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 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 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말씀은, 이사야서 6장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이사야서 6장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의 말씀 또한 이해+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럼 이 인용문이 나오게 된 이사야서 6장으로 가서, 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진의를 한 번 파헤쳐 보고자 합니다. (사 6:8-13)을 보세요.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 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9 주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11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12 사람들이 주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웃시야 왕은 좋은 평가를 받은 그런 왕입니다. 그 웃시야 왕의 사촌이 이사야예요. 이사야는 왕족이었어요. 대단한 벼슬을 하던 사람인데, 하나님한테 붙들리는 바람에, 아주 그냥 고생만 하다가 죽은 사람이에요. 그 이사야가 슬픔에 잠겨 있어요. 그런데 그 이사야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서, ‘네가 나를 위해 백성들에게로 가라!’고 명령을 해요. 그리고는 백성들에게 가서, 그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하나님의 비밀을 못 알아듣게 하라는 엉뚱한 지시를 하세요.
바로 그 임무를 예수님이 맡아가지고 내려오셨다는 거죠? 그러니까 오늘 비유에서 예수님이 그 말을 끌어다 쓰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사야도, 예수님의 모형이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막혔던 백성들의 눈과 귀가 뜨이게 되는 날이 오고요, 황폐해졌던 성읍이 회복이 되는 날이 온다는 희망의 약속이 함께 주어졌는데, 13절을 보시면, 거룩한 씨가 오실 때에, 성읍이 회복이 되고, 막혔던 백성들의 눈과 귀가 뚫린다고 이야기를 해요. 거룩한 씨! 그루터기인 예수! 그 씨가 오실 때에, 비로소 눈과 귀가 뚫리고, 황폐한 광야가 회복이 된다는 거예요.
그 거룩한 씨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인데 그 거룩한 씨인 예수가 오늘 그 큰 무리들 가운데 오셨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왜 그들이 못 알아듣느냐 말예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그냥 일반적 부르심 말고, 특별한 선택! 예정! 그 안에 해당되는 사람들! 거기에 참예한 자들에게만 해당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오심은, 그들에게만 적용이 돼요. 그들의 눈과 귀만 열려요. 그들이 바로 교회이고, 오늘 본문에서는 열두 사도로, 모형으로 그려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만이 예수님에게 해설을 전해 듣고, 그들이 이해를 하게 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 거예요. 물론 그들도 이해를 못했지만 성경은 항상 교회에게 어떤 메시지를 준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이 시점에서 제자들이 알아들었느냐, 못 알아들었느냐, 이건 무의미한 논쟁인 거예요. 제자들이 언제 예수를 믿게 되었느냐? 여러분은 성경이 교회에게 하는 말만 알아들으시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당에 아무리 큰 무리가 모여 있다 할지라도, 그게 다 성도가 아니라는 말이에요. 유대교의 서슬이 퍼렇던 그 시대에, 예수를 좇겠다고 큰 무리가 모였어요. 그들 나름대로 손해를 감수하고 예수께 나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해서, ‘이곳에 모인 대부분은 다 가짜다!’라고 선언을 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예배당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 중에, 정말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올바로 깨닫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앉아있는 사람들은 참 극소수일 것입니다. 그저 자기의 소원이나 이루고 문제나 해결받기 위해 앉아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단호하게 ‘그들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오직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당신이 뚫고 들어가서 눈과 귀를 통해 말씀을 알아듣는 그들만이, 당신의 택한 백성들만이, 당신의 가족이요, 참 성도라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내 어미이고, 누가 내 골육이냐?’ 그 뒤에다가 씨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연결시킨 것입니다.
3. 씨뿌리는 비유의 말씀
<씨 뿌리는 이야기>는 천국의 비유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씨를 뿌릴 때 토양에 따라 열매를 잘 맺게 하는 토양이 있는 가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토양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19절 씨는 천국의 말씀이고 씨부리는 사람은 37절에 보니 예수님이 뿌리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의 말씀을 우리들의 마음 밭에 뿌리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씨뿌리는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중 가장 잘 알려진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우리들의 마음의 밭에 천국의 말씀의 씨를 뿌렸는데 열매를 맺는 마음의 밭을 가진 사람만이 천국백성이 된다는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 4가지 종류의 마음 밭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밭이 열매를 풍성하게 맺고 어느 밭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지 다음의 이야기를 들으면 알게 됩니다.
(1) 길가의 마음밭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라고 합니다. ‘길가’는 밭과 밭 사이에 난 좁은 길의 가장자리를 의미하는데,
이 길가는 다져진 상태이므로 씨앗이 떨어지면 흙에 묻혀지지 않으니 새들이 와서 먹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길가의 마음밭을 가졌을까요? 이사람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말씀을 듣고도 거부하는 완악하고 교만한 마음을 말합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15장 1-15절보면 그들 전통인 조상들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대신했던 그들의 상태가 이를 입증합니다. 3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입술로는 주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멀어진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아무도 바꿀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길가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인데 이런 사람의 마음은 마치 길가의 땅 같이 굳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달을 수도 없으며 마음의 변화도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길가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과 지식과 편견으로 가득 차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공간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드릴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는 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길가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본인이 인정안하면 그 말씀 씨앗을 새가 와서 먹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전혀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새는 무엇을 비유한 것입니까
19 절에는 악한자라고 하였고 또 마가복은 4:15에 보면 예수님은 이 새를 “사탄”이라고 하시면서 사탄에게 말씀을 빼앗겨 버리는 자들이 바로 길가의 마음을 가진 자라고 하십니다.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사탄이 와서 말씀을 거두어간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하나님 말씀을 뺏어갔으므로 감격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나요?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John Bunyan)은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기는 했지만, 마음에 아무런 감동도 없고 기쁨도 없고,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왜 내 마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고민하던 존 번연은 <씨 뿌리는 비유> 말씀을 읽다가 갑자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 마음이 길가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왔다 갔다 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들어와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내 마음에 떨어진 말씀의 씨를 사단이 빼앗아 갔구나.” 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불신을 가져오는 사단을 물리치고 좋은 옥토와 같은 마음이 되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진지하게 들었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마음에 감동을 받아서 길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감동과 감격을 끼치는 설교도 하였고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존번연의 생애(1628-1688년)
1628년에 잉글랜드 베드포드에서 비천한 신분인 땜쟁이(솥과 냄비 때워주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다. 번연은 학교에서 읽기와 쓰기를 배웠으나 그는 악하고 무익한 생활에 탐닉하다보니 학창 시절에 배운 것마저 까먹어 가며 소중한 세월을 허비 했다고 한다. 그는 젊은 시절 죄를 많이 짓든 적게 짓든 멸망하는 것은 똑같다는 생각에 의도적으로라도 죄에 탐닉해야만 그나마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있었다. 죄를 짓는 데까지 지어보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생겼다. 욕구를 다 채우고자 아직 지어보지 못한 죄를 찾아내어 그 단맛을 보고 싶었다. 욕구를 다 채우지 못한 채 죽을까봐 서둘러서 죄의 달콤한 것들로 배를 채웠다. 존번연은 신앙으로 교육받은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교회에 열심히 나가게 되었고 술집과 술친구들 보다 가정과 아내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아내는 결혼할 때 책 두 권을 가지고 왔는데 한권은 ‘보통사람이 천국에 이르는 길“이었고’ 다른 한권은 ‘경건훈련’ 이었다. 이두권의 책이 번연의 신앙 성장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비참한 길에 있던 그에게 뜻밖의 방향에서 구원의 손길이 찾아왔다. 하루는 성깔 있는 여인이 너무 심한 욕을 한다는 이유로 번연을 마구 나무랬는데 평생 살면서 당신처럼 심한 욕을 하는 자는 처음 보았다고 하는 말에 번연의 마음에 화살처럼 깊이 박혔고 그 순간부터 그는 욕하는 죄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성경을 다시 읽기로 다짐했다. 행동이 크게 달라지자 이웃 사람들이 그를 개과천선한 사람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지만 그는 어느 날 자신의 신앙관이 매우 부실하고 ‘진정으로 경건한 삶이라는 증표가 없다’는 것을 깨달게 되었다.
번연은 성령의 긍휼히 여기심을 힘입어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성경을 확신(사45:17너희는 끝없는 세상까지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당황하지 아니하리로다)을 얻게 되었고 죄의식으로 번민하던 영혼이 안식할 곳을 찾게 되었다.
번연이 처음 설교를 시작했을 때 각처에서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러 왔다. 사역이 눈에 띌 정도의 성공을 거두자 얼마 후에 번연은 금식하면서 주님 앞에 기도드린 뒤 베드포드 교회로부터 그 지역과 주변 지역을 담당하는 정규 순회 설교자로 세움을 입게 되었다. 657년 번연은 이튼에서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했다. 그는 체포되어 번연은 설교를 그만두겠다는 각서를 쓰라는 판사의 요구에 거절하다가 베드포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의 죄목은 노동자인 번연이 흉악하고 사악하게도 영국 국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불법 집회와 비밀 집회를 여러번 공동으로 주관하여 왕국의 선량한 백성들에게 큰 불안과 혼란을 조장함으로서 우리의 주군이신 국왕의 법을 어기는 죄를 범했다는 것이었다. 번연은 12년간 옥살이를 했으며 오랜 옥살이를 하는 동안 불후의 역작인 천로역정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많은 교훈과 위로를 안겨준 여러 책자를 집필했다. 한번은 국왕 찰스2세가 오웬에게 어떻게 지식인이 무식한 땜장이의 설교를 그렇게 앉아 꼬박 들을 수 있느냐고 묻자 위대한 학자이며 목회자였던 오웬이 “전하 만약 제가 그 땜장이만한 설교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제가 가진 모든 학식을 기꺼이 버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길가밭의 마음을 가진 존 번연이었지만 주님의 은혜로 옥토같은 마음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크신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2) 돌밭같은 마음밭이 있습니다. (5-6)절입니다.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돌밭의 문제는 흙이 깊지 않고 얇다는 것입니다. 돌밭이란 돌이 풍화작용에 의해 흙으로 변하는 것인데 흙이 깊지 않기 때문에 씨가 났지만 해가 돋은 후에 싹이 타서 말라지는 경우입니다.
예수님의 해석한 (20-21)절을 보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믿음의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났을 때 곧 넘어지는 자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을 들을 때는 ‘아멘!’ 하고, 듣지만 믿음이란 사실 시련을 통해서 자라는 것인데 환란이 오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복음을 들을 때는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나지만 오래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돌밭과 같은 마음의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설교시간에 은혜도 받고 깨달음도 있습니다. 부흥회 때에는 눈물도 흘리고 그 심령이 뜨겁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무도 뿌리가 약하면 쓰러지는데 영적인 믿음의 뿌리가 깊지 못하면 포기하고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돌밭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주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믿는 중에 다가오는 환난과 고난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육신에 고통이 오면 말씀을 포기합니다. 길가의 사람들에게 문제가 마귀라면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육신’입니다. 영혼보다 육신의 평안을 위해서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편한 것을 추구합니다. 육신을 고생스럽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대로 경건하게 살려고 하면 핍박과 환난이 있다고 했습니다. 나의 신앙상태가 돌밭 같은 마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말씀의 뿌리가 있는 사람은 위기가 기회가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의 위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하면서 말씀을 앞 세우고 그 위기를 통과합니다. 아무리 캄캄한 밤이 있어도 밝은 빛이 있으면 통과할 수 있습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칠흙같은 어둠일지라도 밝은 불만 있으면 길가는데 불편함은 있어도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면 돌밭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욥기서에 나오는 욥을 생각하면 돌밭같은 마음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욥이 당한 고난을 보면 양이 7천 낙타 3천 소 5백 나귀 5백 종들도 많이 있었는데 하루 동안에 다 잃어 버렸는데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는데 나쁜 사람들이 와서 가축을 뺏고 종들은 죽임을 당하였고 곧 이어서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서 양과 종들이 불에 타 죽임을 당하고 갈대아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 낙타를 빼앗고 종들을 칼로 죽이는 이런 환난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 중에 다른 종이 또 와서 더 슬픈 소식을 전하는데 맏아들의 집에서 생일잔치를 할때 대풍이 불어서 집이 무너져 욥의 아들딸들이 하루에 한 장소에서 다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하루동안에 일어난 이 엄청난 사건을 치르면서도 욥의 고백은 알몸으로 왔으니 알몸으로 돌아간다고 하면서 주신자도 하나님이시오 거두신 이도 하나님이시니 주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어다 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위기에서 욥의 신앙고백은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돌밭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신앙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람인데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이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떡을 먹었던 많은 사람들이 떡먹는 재미로 예수님께 왔지 영생을 위하여 오지 않았다고 예수님을 말씀하였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들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신앙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뿌리가 깊으면 아무리 어렵고 불행한 일이 온다하더라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욥처럼 믿음의 뿌리가 깊어야만 흔들리지 않는 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밭입니다. 7절입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마13:2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시떨기는 기후가 건조한 팔레스틴에서는 어느곳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가시떨기는 복음의 씨의 기운을 꺽어버리는 것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가시떨기 밭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교회에 나온지 오래 되었지만 의와 인과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됩니다. 가시(세속적인 모든 재물 쾌락 정욕)나무는 생장력이 강하므로 어디서든지 잘 자라지만 알곡은 가시떨기나무와 같은 곳에서 있으면 잎만 무성하지 알곡이 채워지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씨앗이 가시떨기 같은 마음의 밭에 뿌려지면 열매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시떨기 마음의 가장 큰 문제는 재물의 유혹을 받아 세상 염려가 많은 마음입니다.
길가는 마귀, 돌짝밭이 육신이라면, 가시떨기 밭은 세상입니다. 세상 자랑은 바로 물질과 연관이 있으며 이런 마음의 밭이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의 밭입니다. 세상적인 염려와 재물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신앙생활의 열매는 결실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나름대로 믿음도 있었고 때로 봉사도 하고 충성도 하지만 마음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세상이고 돈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귀도 통과하고 환난도 통과했는데 재물에서 걸리고 맙니다. 주님은 재물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고 단호히 강조하셨습니다. 세상일 때문에 주님을 사랑할 수 없다면 가시떨기밭을 갈아 엎어야만 좋은 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요
(4) 옥토와 같은 마음밭이라고 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주님의 해석한 말씀이 23절에 나옵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누가 옥토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까? 좋은 땅을 옥토라고 하지요 이런 땅은 기름지고 수분이 충분하여 가뭄도 안타고 햇볕이 잘들며 잡초 같은 것을 제거한 땅이지요. 이런 땅을 우리 마음에 비유하면 영혼의 심지가 깊고 신앙적 절개가 있는 성실한자 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좋은 밭에 뿌린 수확량은 백배 육십배 삼십배 수확을 가져온다기 보다는 예수님안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영적 수확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달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하시면서 43 귀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자신의 마음의 밭이 어떤 밭인지 스스로 점검하는 마음을 갖게 하기도 합니다. 누구나 좋은 마음의 밭을 갖기를 원하는데 어떻게 이런 옥토의 밭을 가질수 있나요 23절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 좋은 옥토의 마음의 밭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고넬료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이방인이면서도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하며 선한 일을 하면서 주위사람들에게 인정받았던 백부장이었습니다. 한번은 주의 천사가 환상중에 나타나서 고넬로야 하였을 때 “주여 말씀하옵소서 제가 듣겠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이방인 고넬료집에 온 식구들에게 방언 예언 하는 성령충만함을 주셨습니다. 옥토의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이 내 삶속에 들어와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좋은 땅에 떨어져야만 말씀을 듣고 깨닫게 되어서 은혜를 받게 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예수님 이야기가 쏙속 들어오고 믿어지고 감격의 눈물이 나옵니다.
우리는 주님의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 우리들이 십자가의 복음이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밭이 온통 세상 것으로 가득 차 있어서 좋은 옥토가 되기는 커녕 길가밭 돌밭 자갈밭이 되어 있기 때문에 영적 열매를 거둘 수 없고 나아가서 기쁨이 없고 또 세상일에서도 별로 축복다운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진실로 믿으면 천국은 내 마음안에 이루어 지고 내 마음에 천국이 이뤄야 져야 진짜 하늘나라에 가서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천국을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전 구약시대 많은 선지자와 의인들도 우리가 들었던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을 듣고자 하였어도 듣지 못했고 보고자 하였어도 보지 못했는데 우리들은 이시간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고 믿으니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들입니까 말씀을 믿고 깨달아 30, 60, 100배의 은혜를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씨뿌리는 비유에 대한 심층연구
신앙연륜이 좀 있는 분들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씨 뿌리는 비유에 대한 설교를 여러번 들으신 줄 압니다. 대부분은 위에서 말했던 이야기들을 들으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결론은 열심히 노력하면 길가밭, 돌짝 밭, 가시떨기밭을 열매를 풍성히 맺는 옥토로 바꾸어볼 수 있다는 것이였죠. 그러면 이 비유의 제목을 ‘밭의 비유’로 바꾸어야하는데 그렇지는 않지요. 한번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관해 영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비유를 마음이 옥토같은 밭이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38 밭은 세상이요 라고 하였듯이 밭은 우리 마음이라 하지 않고 세상이라 하면 의미가 좀 다르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마13: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왕국의 자손들이로되 가라지는 그 사악한 자의 자손들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이 말씀은 밭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씨에 관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좋은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며 가라지는 사악한 자의 자손들이라고 생각하면 좋은 씨는 교회에서 신앙생활 잘하는 성도들이고요 가라지는 그러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다시말하면 교회다니면서 천국가는 성도들과 지옥가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좋은 씨인 우리는 길가에서도 돌밭에서도 가시떨기밭에 있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씨에 의해서 인데 그 씨는 천국의 자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라지는 결실맺지 못한 백성이므로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라지를 왜 일찍 사르지 않았을까?
그건 그 가라지들에 의해서 우리가 넘어지기도 하고 아파하기도 하고 또 힘들게 하기도 하면서 우리에게 도움이 되니까 남겨 두시는 겁니다. 우리는 가라지 때문에 아프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끝내 승리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게 해주기에 그 가라지가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라지를 내버려두거나 버린다고 하지 않으시고 나중에는 가라지를 불에 사른다고 하십니다.
(1) 영적인 면에서 길가는 무엇일까요? (창19:12-14)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밖으로 이끌어내라. 그들에 대하여 부르짖음이 주 앞에 크므로 주께서 우리로 이곳을 멸하러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주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는 말씀처럼 심판의 계시가 떨어졌는데 농담으로 여기는 것은 왜 그럴까? 소돔과 고모라가 너무 좋으니까, 세상이 너무 좋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주님당시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처럼 나는 죄인을 구원한다는 복음을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길가 밭에 씨가 들어갈 수 없듯이 이단들과 교회에서 행하는 자기 의쌓기와 그리고 세상이 너무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복음이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 길가밭이라는 것입니다.
(2) 영적인면에서 돌짝 밭은 무엇일까요? (출 14:10-12)
10 바로가 가까와 왔을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드니 보라 이집트사람들이 자기 들의 뒤를 따라 행진하더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주께 부르짖었으며 11 또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이집트에 무덤이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데리고 나와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고 나와 이같이 우리를 대하느냐? 12 우리가 이집트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더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리라 하였노라.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았으리라 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지만 환란과 핍박이 떨어지자 차라리 이집트로 보내달라고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위해 일했는데 나한테 이런 시련을 주냐고 한다면 분명히 믿음의 뿌리가 없는 사람이외는 따로 설명할 수가 없는데 그들이 바로 돌밭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입니다.
(3) 가시떨기밭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데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마음입니다. 맘몬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려 했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을 살게 하십니다. 경제 환경이 좋을 때는, 예수님을 잘 믿는 것 같았는데, 쫄딱 망했더니 온 몸에 힘이 쭉 빠지고, 예수 믿을 힘이 안 나요. 왜? 예수 믿고 원하는 게 다 있었는데, 그걸 안 줬어요. 이런 모습이 우리 안에 없냐고요? 있습니다. 들키지 않았을 뿐이에요. 여러분이 연극을 열심히 잘 하고 있을 뿐이지, 우리 마음속에는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고 싶은 그런 가시떨기 같은 마음이 다 들어 있어요. 중요한 건 그 세 가지 밭의 모습이, 우리 속에 너무나 풍성히 넘치고 있잖아요? 솔직히 말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너무 행복해지면, 하나님의 말씀이 저 만치 물러가는 그런 경험을 합니다. ‘야, 복음이 뭐 필요야?’ 길가 밭이잖아요?
환난과 핍박이 오면, ‘도대체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희생을 했는데, 나에게 이렇게 대우를 하냐?’고 믿음의 뿌리가 없으니 하나님께 삿대질도 해대는 돌짝 밭이죠. 경제 환경이 좋을 때는, 예수님을 잘 믿는 것 같았는데, 세상일 때문에 갑자기 망하고 나면 온 몸에 힘이 쭉 빠지고, 예수 믿을 힘이 안 나게 되면 믿음의 고개에서 넘어지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지금? 우리는 길가 밭이고, 돌짝 밭이고, 가시떨기예요. 이 세상에 무슨 좋은 옥토같은 밭이 있나요?
(4) 세상에 무슨 옥토 같은 밭이 있습니까?
마귀가 가라지를 뿌리는데 놔두라고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게 좋은 밭입니까? 세상에 좋은 밭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네가지 종류의 밭의 비유를 통해 우리들의 실체를 폭로 시키시는 거에요. 너희는 죽은 흙에 불과하다고. 죽은 밭에 생명이 있냐고요? 당연히 씨에 생명이 있지요. 생명이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씨앗을 우리 마음에 뿌리었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인 복음에 의해 그렇게 폭로되고 비워가면서 예수가 가득해집니다. 하나님은 미리 우리를 옥토로 만들어 놓고는 세상속에서 길가도 겪고 돌짝밭도 겪고 가시덤불도 겪으면서 원래 우리의 연약한 마음을 처절하게 느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씨뿌리는 비유의 말씀은 이렇게 열심히 살아 나쁜 밭을 좋은 옥토로 만들라는 밭의 비유가 아닙니다.
1) 아담 이후 모든 인간들의 상태. (롬 3:10-12)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모든 인간의 상태가 길가 밭, 돌짝 밭, 가시떨기의 상태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절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그런 상태라는 것입니다!
2) 그들 밭이 옥토가 되다 (롬 3:23-24)
그런데 불모지에 무력함의 밭에, 생명의 씨가 떨어져서, 돌과 가시떨기를 부수고 찢어서. 그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 보세요.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렇게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에(롬5:10), 영원 전에 준비된, 하늘의 씨가, 그 원수의 밭에 심기어져서,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 구원의 현실을 설명해 주는 비유가, 바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속에 담긴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 보면, 그 씨가 ‘예수 그리스도다!’라고 명확히 말씀합니다. 그 씨가 말씀으로 오셨고 그 ‘말씀이 떨어지매’ 밭에 따라 결실되는 정도가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옳게 이해 하지 못하면, 다른 비유들도 전혀 이해를 못한다는 이야기예요. 먼저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나오게 된 문맥상의 배경을 살펴 보겠습니다.
5. 씨뿌리는 비유의 진정한 의미
하나님의 복음을 알아듣는 이들이 우리 가족이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만 크게 짓고 사람만 많이 채우면 장땡이라는 식!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의, 그런 발상으로, 좋은 교육 프로그램, 멋진 예배당 건물 지어놓고. 그렇게 해서 사람 많이 모아놓으면, 뭐 할 건데요? 맨 가짜들 모아놓고 뭐 할 건데?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이들이 모여야 돼요. 부흥은, 눈과 귀가 막혀서 말씀을 못 알아들었던 이들의, 눈과 귀가 뚫리는 일을 부흥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에서부터 약속이 된, 아니 영원 전부터 약속이 된, 그 거룩한 씨가, 은혜로 들어오기 전에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모두 돌짝 밭이요, 길가 밭이요, 가시 떨기일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런 열매 못 맺는 땅을 말씀을 듣고 좋은 밭으로 바꾸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설명해주는 것뿐이에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가시떨기와 돌 짝 밭은, 항상 하나님의 저주의 상태를 가리키던 것들이었고, 광야의 상태를 가리키던 소품이었어요. (창3:17~18)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아담이 타락을 하자 하나님의 저주가 내리는 데, 그 저주의 산물이, 가시덤불과 엉겅퀴예요. 그러니까 땅이 저주받은 이후로, 이 세상이 내어놓는 모든 소산! 과학, 문명, 교육! 이런 모든 소산이 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과 아무 관계도 없이, 그런 것들을 많이 끌어 모으는 걸, 복(福)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배우려고 하기는 커녕, 그냥 자기들이 원하는 세상의 가시덤불과 엉겅퀴만을 구하는 게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까?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금과 은이, 인생 최고의 목표인 줄 알고, 하염없이 그 동냥 그릇만 바라보고 있던, 사도행전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처럼, 가시덤불과 엉겅퀴에 불과한 이 세상 것을 더 갖고자 극성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되었던 그사람이 동냥 통을 바라보면서, ‘은과 금을 가득 넣어주세요. 나는 이걸로 행복할 수 있어요. 내가 앉은 이곳이 미문(美門)이거든요. 나는 여기서 행복할 수 있어요.’ 하는 모습과 똑같지 않습니까? 그 때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줄터이니 일어나 걸어라!’ 하였더니 일어나 것었던 것입니다. 앉아서 동냥하는게 더 좋은가요? 일어나 걷는 것이 더 좋은 가요? 이것은 예수님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돌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는데, 그 돌이 오히려 올무가 되고, 거치는 돌이 되어서, 열매를 못 맺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 돌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예요. 그렇다면 그 예수가 돌 짝 밭의 돌이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걸려 넘어질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돌에 의해서, 거칠고 넘어진다는 말이 로마서에 똑같이 나오죠? 그 거치는 돌이 예수님이었잖아요? 이스라엘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돌이, 예수님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 돌이 죄인들에게는 유일하게 피할 수 있는 도피성이신 예수가, 어떤 이들에게는 거치는 돌이 되고 걸리는 반석이 되며, 함정과 올무가 된다고 하면 이게 가시떨기요 돌 짝 밭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누군가에는 은혜가 되지 않고 가시떨기와 돌 짝으로 오셔서, 그들의 눈과 귀를 막고, 절대로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수 없게 만드신다는 거예요. 창세기의 이야기와, 이사야서 6장의 이야기와,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이렇게 일관성 있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영생은,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획득이 불가능한, 것임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사야서 6장에서, 하나님이 이사야를 보내면서, ‘너 가서 눈과 귀를 다 막아버려!’ 그랬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 계시잖아요? 그러면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신단 말입니다. 길가, 가시떨기와 돌 짝이 예수란 말입니다. 그 분이 생명의 말씀을 가리고 있는 휘장이라는 말입니다. 그 휘장이 너희들의 노력으로 찢어졌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찢어졌냐? 그걸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예수님의 모친이고 동생이되는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생명의 씨가, 은혜로 뚫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가 가시떨기와 돌짝으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고 있던, 그 공의가 들어가서 죽어버리는 거예요. 그걸 십자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옥토 좋은 밭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라는 그림으로 또 한 번 설명해주는 거예요.
(요 12:23-24)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열매 이야기가 여기 또 나오잖아요? 씨가 심겨져서 죽어야 돼요! 가시떨기와 돌 짝이 죽어야 돼요. 그게 죽어야 열매 맺는 옥토가 된다 말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을 설명하는 거예요. 그렇게 밭 스스로 옥토가 되어서 열매를 맺는 게 아니라, 한 알의 씨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그 말은, 하나님의 공의가, 예수의 죽음으로 채워지게 된다는 뜻이지 인간의 그 어떤 공로나 노력이나 열심도 단 1%도 기여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씨에 의해서, 열매 맺는 하나님 백성들이 되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 우리의 가시덤불과 돌짝들을 제거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 가족이며, 골육이라는 거예요.
예수님은 당신의 육적 어머니! 육적 형제들을, 바로 그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앞에서 부정해버리심으로 말미암아, ‘누가 내 어머니냐?’ 그건 예수님이 불효자라서, 그렇게 말씀하신 거 아녜요. 교회에게 뭘 설명해주기 위함이에요. ‘누가 내 어머니냐, 누가 내 형제야?’ 말씀하심으로 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조건과 자격을, 단호하게 규정시켜버리는 거예요.
그게 예수인 나에게는 나의 육적 어머니, 형제라도 그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쓸모없는데, 뭐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조건과 자격으로 드려질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여러분은 착하게 살아서, 업적 많이 쌓아서 천국 가는 게 아녜요.
그러한 복음의 현실을, 사도 바울이 호세아서와 이사야서를 동시에 인용하여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롬 9:27-29)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 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수많은 큰 무리 중에 남은 자가 돌아왔는데, 그 남은 자가 씨 때문에 돌아왔단 말입니다. 씨 때문에! 돌짝 밭, 길 가 밭, 가시 떨기가, 씨가 심겨지니까, 옥토가 되어 남은 자, 렘넌트(remnants)들이 된다는 것을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고, 그 분의 은혜에 맡기는 건,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 정말 미련하고 유약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진정한 능력을 경험하는, 진짜 지혜로운 삶이라는 걸,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에게 알려 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이 땅의 진정한 교회는 주님의 어머니 주님의 동생들이 모인 그리스인들의 가족이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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