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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12-3 노아의 때, 롯의 때가 마지막 때의 전주곡이다.
    말씀 2018. 12. 17. 08:01

    노아의 때, 롯의 때가 마지막 때의 전주곡이다 눅 17: 26-35

    요즘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중에는 이젠 말세가 다 되었다고들 한다. 오히려 교회에서 보다 믿지 않는 세상에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럴만도 하다. 무엇보다도 성적으로 우리 사회가 너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성적문란이야 어제 오늘이 일이 아니지만 이제는 남녀간의 성문란도 문제지만 동성간 성접촉으로 에이즈라는 질병이 증가일로에 있는데 이 질병을 치료하는데 비용이 국민세금으로 충당되는데 한사람 당 수억원이라고 하는데도 오히려 동성간의 성접촉에 의해 이런 질병이 증가추세로 가고 있다는 것 그냥 넘길일이 아니다. 성문화가 이렇게 까지 간것에 대해서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업적중 제일 큰 업적이 동성결혼 합법화를 이루어 내었다니 그럴만한 말도 나올만 하다.

    제19회 서울 퀴어축제가 2018년 7월 14일에 약 12만명 정도가 참여하였다고 하니 벌써 우리나라도 동성간 성의 안전지대가 아니다. 우리나라가 2000년도부터 이런 퀴어 축제를 시작했다는 것인데 초기에는 그들만이 축제겠지 생각했는데 이제는 해를 거듭할 수록 참여 인원이 증가하고 있다니 그리스도인으로서 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이이다. 퀴어라는 말이 듣기에는 매력적일지 모르지만 퀴어라는 뜻은 본래는 ‘기묘한, 이상한’이라는 뜻으로 동성애자를 멸시할 때 쓰였던 단어였으나. 동성애자 인권 운동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당당하게 ‘퀴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서 지금은 성 소수자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니 아이러니칼하기도 하다. 이처럼 퀴어문화축제가 문화행사라는 이름으로 이제는 국가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참가하다보니 이처럼 퀴어문화 축제는 해가 갈수록 참여인원이 증가하며 어느새 서울의 큰 축제행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만약 예수님을 믿지 않는 어른들이 이러한 축제행사를 본다면 이젠 이나라도 세상종말이 다 되었다고 하는 말이 일리 있는 말이다. 성은 하나님께서 남녀간의 사랑의 행위로 주신 것인데 동성간의 성적쾌락을 위해 음지에 있던 저들이 양지로 나와서 축제를 갖는 다는 것은 세상 마지막 때 이런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성경대로 세상 끝날이 오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태복음 24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그분께서 올리브산에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은밀히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에게 말씀해 주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들 즉 성전이 무너져 돌위에 돌 하나도 남지않게 된다는 것이 있으리이까? 또 주께서 오시는 때의 표적과 세상 끝의 표적이 무엇이리이까? 하니 주님의 말씀은 가까이는 예루살렘성전의 파괴로부터 시작하여 멀리는 미래에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해질 때 일어날 사건에 대한 예언말씀을 주신 것이다. 그 때 주신 인류 역사의 종말에 대한 징조들 중 몇가지를 소개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와서 나는 그리스도라고 사칭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님 승천 이후 자칭 그리스도라하는 자들은 어느 시대든 사람들을 미혹케 하였다. 미혹받다라는 것은 마음이 무엇에 흘리거나 정신이 헷갈려서 갈팡질팡 헤매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바로 오늘날 재림주니 자칭예수가 나타나서 자기가 구세주라고 떠들어대면 많은 사람들이 정말 그에게 가서 그를 경배하고 있다는 것은 시대적으로 종말이 임박해 왔다는 증거이다. 또 다른 징조로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날 것이라고 하셨는데 인류역사상 전쟁은 수없이 있어 왔지만 우리시대에 일어난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은 전쟁의 양상을 전혀 새롭게 바꾸어 놓았다. 총과 포와 병기의 발달로 너무나 많은 인명 살상이 일어난 전쟁이었으며 전쟁이 이렇게 인류를 참혹하게 만드는 것인지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욱 위협적인 핵무기를 개발하였으며 만약 세계3차 대전쟁이 나서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땅이 불에 타서 녹고 녹아서 모든 물질들이 소멸될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성경은 이미 핵전쟁이 났을 때 상황을 베드로후서 3장 10절 그 날에는 하늘들이 큰 소리로 함께 사라지고 원소들이 뜨거운 열에 녹으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도 불태워지리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머지 않아 핵전쟁이 다가오고 있음을 모른채 해서는 안되겠다.

    그리고 마지막 때는 불법이 성하여 질것이라고 하였다. 말세에는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하였습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극에 달할수록 불법은 더욱 기승을 떨지게 되고 또 사람들은 성적인 쾌락을 위해 동성간에도 이성간에도 성적타락의 죄악이 만연될 것임을 경고하였는데 이미 이 성적타락의 현상은 온 지구상에 어느 도시에나 만연되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느냐?” 묻는 바리새인의 질문에 예수님이 주신 답변은 위에서 말한 자연계의 이상이 아니라 불법으로 인한 성적타락이 주 요인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곧 저들이 꿈꾸는 이상 세계가 실현되는 것으로 여긴 것 같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순간을 ‘인자의 날’로 묘사하시면서, 그 날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준비한 자에게는 그 날이 구원과 기쁨의 날이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재앙과 심판의 날이 될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는 ‘노아의 때와 같고’(26), ‘롯의 때와 같으리라’(28)는 말씀을 주셨다. 그러니 노아의 때에 일어났던 사회현상이나 롯이 살았던 시대의 사회현상이 인류마지막 때도 동일하게 일어난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노아의 때와 롯의 때가 마지막 때의 전주곡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누가복음과 창세기에서 기록하고 있는 노아의 때와 롯의 때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오늘 이 말씀들을 살펴보면서 종말의 때를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과 삶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죄악이 극에 달했던 때

    먼저, 창세기에서 묘사되고 있는 노아의 때와 롯의 때의 공통적인 특징은 죄악이 관영한 시대였다는 것이다. 창세기 6장 5절에서는 “주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세상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다 했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등장하는 소돔성의 모습은 더 참담합니다. 소돔성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여 하나님께서 그 실상을 알고자 주의 천사들을 보내 그곳을 살펴보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찾아온 주의 천사들을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알아보고 자신의 집으로 영접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지켜본 소돔 사람들이 롯의 집으로 몰려와 그들을 이끌어내라고 윽박지릅니다. 그들과 상관, 즉 동성연애를 하겠다는 겁니다. 이 정도면 심판이 내려져도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소돔성의 타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동성연애(sodomite)’입니다. 영어로 ‘동성연애’라는 단어가 sodomite입니다. 소돔하면 동성연애를 떠올릴 만큼 이 죄가 관영한 곳이었습니다. 요즘은 동성연애를 주제로 한 영화나 연속극이 나올 만큼 ‘동성연애’자체를 죄악시 하지 않는 시대이지만, 동성연애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을 파괴하고, 스스로를 더러운 정욕에 내어 던지는 심각한 죄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레위기 20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이런 죄를 짓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 하셨고, 로마서 1장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가져오는 대표적인 죄 가운데 하나로 동성연애를 들고 있습니다. 만일, 롯의 때와 같이 주의 천사들이 뉴욕과 동경과 서울의 밤거리를 돌아본다면 어떤 평가를 내릴까요? 과연 소돔성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는 이시대는 당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큰 죄악이 가득 찬 노아의 때, 롯의 때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1) 성적 타락

    1) 노아시대

    (창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손인 선택한 백성들이고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예들인 버림받은 자들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고 했다. 신앙적인 면에서 결혼 대상을 선택하지 아니하고 좋아하는 대로 아내를 삼았다는 말이다. 어느새 그로 인한 폭력이 만연되었을 것이며 힘있는 자들의 일부다처주의가 만연되어졌다.

    당시에 결혼 제도는 족장 즉 아버지 허락 하에서 결혼이 허용되었다. 그런데 그 제도를 저버리고 자기들의 좋아 하는 대로 하나가 아닌 여러 여자들을 아내로 삼은 것이다. 아내를 삼았다는 말은 자신의 마음대로 소유했다는 말이다. 가정을 이루는 결혼이 아니라 성적 쾌락을 위한 소유였다. 즉 성쾌락주의 결혼이 자연스럽게 일부다처주의가 만들어진 것이다. 서로 좋아 하는 대로 아내를 삼았다고 하니 폭력과 음란이 극적으로 성행했음을 말해준다.

    2) 롯의 시대

    (창19:5-14) 소돔사람들이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밤에 네게 온 남자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롯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동성애가 성행했다. 소돔이라는 말 자체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홍수심판에서 살아남은 노아의 아들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들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함의 손자 구스의 아들 니므롯의 주도하에 바벨탑을 쌓았으나 바벨탑이 무너진 후 메소타미아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셈과 야벳의 후예들은 슈멜의 통치하에 앗수르 도성을 중심으로 나라를 이루었고 함의 후예들은 니므롯의 통치하에 바벨론을 중심하여 나라를 이루었다. 두 나라가 영토싸움을 하는 중에 구스의 아들 니므롯이 죽게 되면서 니므롯의 아내 세미라미스가 젊은 나이로 미망인이 되었고 그는 왕비로서 이름 모를 남자에게서 아들 담무스를 낳았다. 그리고 그 아들이 죽은 남편 니므롯이 환생했다고 속이고 그 아들이 성인이되자 자신과 결혼하고 니므롯이 환생하여 온 담무스는 하늘의 왕, 즉 태양신 바알(Baal)신이라 신격화 하고 세미라미스 자신은 하늘의 어머니이며 하늘의 왕후로 태양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달신 즉 아스타르테 (Astarte)로 신격화 했다.

    담무스가 바벨론 제국을 일으키고 바알신을 국신으로 숭배하게 했다. 그리고 바벨론에 거대한 담무스 신전을 세우고 인신제(人身祭 -어린 남자 아이)를 드렸다. 그리고 제물생육을 위해서 담무스의 애곡이라는 축제를 정하여 바벨론 전역에 있는 여자들은 신에게 바칠 아들을 낳아 받쳐야 했다. 바벨론 제국 안에 모든 여자들은 담무스의 애곡이라는 축제 기간에 신에게 바칠 아들을 낳아야 했다. 담무스 신전에는 수십 개의 방이 있는데 남자 사제들이 많이 있었다. 제국 안에 여자들은 누가나 할 것 없이 신전 방에서 벗은 몸으로 애곡을 하면서 사제의 선택받기를 위해 애곡했다. 그 사제들이 와서 동전 한 잎을 주고 그 여자와 성 관계를 가지게 되고 아들을 낳으면 신의 아들로 신전에 바치게 된다. 이것이 매춘의 기원이 되고 성경은 바알 종교를 음행의 종교라 했던 것이다. 담무스가 바벨론 제국을 장악 하면서 모든 제국 안에 거주하는 자들은 바알신을 섬겨야 했다. 그래서 아브라함 때에 와서는 여호와의 종교는 거의 전멸되고 아브라함 한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기 위해 불러낸 것이다. 이 바알 종교 음행의 영향으로 당시 모든 부족들은 성적으로 문란해 있었다. 소돔(Sodomite)이란 말이 남색(男色 Sodomy)이란 말이며 당시 소돔 사람들은 성적인 대명사로 불리워지게 된 것이다. 그예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롯이 성문에 앉았다가 하나님의 나그네가 오는 것을 보고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찌기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롯은 나그네에게 발씻을 물과 양을 잡아 대접하는 것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배운 것이다. 어두울 때에 소돔 사람들이 몰려 와서 이 저녁에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내놓으라 우리가 상관 하겠다고 했다. 상관 하겠다는 말은 야다(עדַיָָ)란 말인데 서로 성적 관계를 가지겠다는 말이다. 성적 타락의 극치를 말하는 것이다. 롯은 그들을 가로 막으며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 했다. 롯이 자기 딸들 그것도 정혼한 딸들인데 정욕의 도구로 내어 줄 것이니 너희가 좋을 대로 행하라 한 것을 보면 그러한 일들이 당시 생활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종말의 징조중 하나가 롯의 때와 같이 성적타락이 극에 달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롯의 때 소돔 백성들 보다 몇십배나 더 타락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 빠져들면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당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2) 인간성이 강포

    1) 노아 때 사람들

    (창 6: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인 네피림(םילְפֽנְ)이 있었다고 했다. 네피림아란 말은 넘어 뜨리다 라는 뜻으로 침략자, 강포한 자, 장사. 힘으로 사는 자를 말한다. 힘 있는 자들의 세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성이 잔인해졌다는 말이다.

    2) 롯의 때 사람들

    (창19:9-11)그들이 가로되 너는 물러나라 또 가로되 이놈이 들어와 우거하면서 우리의 재판관이 되려하는 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악하게 다루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나아와서 그 문을 깨치려 하는지라.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으며 문밖의 무리로 무론 대소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힘들어하더라. (창 10:6-9) 6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7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9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바벨탑을 주도한 사람이 함의 손자 구스의 아들 니므롯이었다. 니므롯은 노아 이후 처음 영걸로 기록된다. 영걸이란 기브볼(רוֹֹ??) 용감하다, 맹렬하다, 힘세다, 억세다. 니므롯은 신이 내려준 사람으로 모든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바벨탑 이후 신격화 되어 바알신의 기원이 된 사람이다. 니므롯은 힘의 사람이었고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이 니므롯의 영향으로 인간은 폭력화 되었다.

    롯의 때 소돔 사람들은 폭력적인 사람들인 것이 잘 나타난다. 비록 차별이 심한 자들로 롯에게 우리의 재판관이 되려 한다고 했다. 롯이 성문에 앉아서 도성의 지도자로 재판을 했던 것으로 이에 대하여 자기 부족이 아닌 자가 도성의 지도자로서 재판 하는 것을 반항하는 말이다.

    나그네를 보호하려는 롯을 향해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겠다고 덤벼들었다. 이유 없이 폭력을 가하려 한 것이다. 폭력성 역시 남녀 노 소 무론 대소하고 난무했음을 보여준다. 소돔 사람들은 성폭력 자들이며 강포한 자들이었다.

    종말이 가까워지면서 인간성이 포악해 진다는 말이다. 이것은 역사가 흐를수록 더 심해지는 것을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믿는 자들은 이 폭력성에 빠지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깨어 있는 생활이다.

    2. 현세 지향적인 삶 (27-29)

    누가복음 17장 27절은“노아가 방주로 들어간 날까지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였느니라”(2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당시의 사람들이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모여서 먹고 취하고 놀고 결혼식에 참석하여서도 먹고 마시고 취하는 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이런 행위는 육체를 즐기는 것이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이요 감각을 무감각하게 하여 더욱 취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말씀을 들어야 내세가 있고 믿음이 있는 것인데 세상일에만 즐기다보면 어찌 내세를 준비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세상은 복음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만드는 탁월한 기술을 확보하였으니...기독교라는 문화로 복음을 전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면서 오히려 더욱 세속적인 일에 몰두하게 만들고 있는 고도의 전략화로 인하여 사탄은 인간들을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세상을 속이고 유혹한다.

    오늘날 젊은이들을 보라. 홀로 모든 것을 누린다. 귀에 이어폰과 손엔 아이폰과 눈에는 홀로그램과 시뮬레이션과 각종 온라인 개임에 젖어들고 익숙하며 또 한편으론 끔찍한 사건과 무방비로 노출된 성적 범죄와 문화의 홍수속에서 신음하지만 이미 중독된 그들에겐 더 큰 자극만이 유일한 즐거움이며 집착일 뿐...다른 이들은 다른가? 여러 모양으로 각자의 이익과 쾌락과 만족에 올인하기 바쁘다. 나만 안걸리면 된다는 신드롬과 함께 오직 나만 괜찮고 좋으면 그만이다. 가정이 해체된 것은 이미 오래되었고..그렇게 세상의 문명과 문화는 어찌하든 영원에 대하여 실증과 배척과 함께 다만 대박과 한방을 꿈꾸라고 부추긴다.

    더 높이 더 크게 더 많이를 외치며 많이 누리고 챙길수록 더 갈하고 목이 탄다.

    채워도 채워도 허전하며 배고프다. 그러면서도 정작 영혼의 문제에 둔감하다...노아의 때처럼 그렇게 순간과 찰나의 것에 목숨 걸게 만든다... 그렇다고 은혜의 날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 노아의 대홍수가 있기 전에도 100년 동안 은혜의 기간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기다리셨다. 노아가 방주를 지을 동안 하나님은 사람들이 말씀을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결국 100년의 은혜의 기간은 끝이 나고 방주의 문은 닫혔다(창7:16).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었다. 노아가 방주로 들어간 날까지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였느니라(눅17:27).

    유감스럽게 이런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다. 많은 교회들이 구원이란 선행과 노력의 산물이라고 가르친다.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교회는 그렇게 많지 않다. 다수가 진리에서 돌아서 거짓을 가르치고 있다. 노아 시대에 은혜의 시간은 100년 이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은혜의 날은 이보다 더 길지만 - 현재까지 약 2,000년이며 언제 끝이 날지 아무도 모르지만 끝날 때가 올 것이며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가장 큰 은혜의 때 즉 현 세대의 은혜의 경륜이 끝나면 가장 극한 심판의 때인 환난기가 닥칠 것이다(행17:30-31). 이런 큰 환난은 전에 있지 않았다(마24:21).

    심판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누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집을 짓는데 시간을 보낼 것인가 그렇게 어리석은 인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탄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렇게 날을 보내고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마귀의 미혹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면 위험하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를 거절하는 것,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거절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당신은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인가?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죄인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구원자께로 인도하고 있는가?

    세상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데서 나와 이제는 은혜를 주신 주 예수님께로 나와야 한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

    (1) 노아시대 사람들

    노아가 약 100여 년 동안을 산에다가 방주를 지었다. 산에다 방주를 짓는 것은 고기잡이 배가 아니고 인간을 홍수에서 살기 위한 배라는 것을 실제적으로 보여 증거한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증거한 것이다. 노아는 죄악이 가득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100년 동안 배가 뜰 수 있는 강도 바다도 아닌 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었다. 노아는 배 만드는 일에 전 재산을 털어 넣고 자신은 먹을 것, 입을 것 아껴가며 근근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인생 낙오자, 세상을 등진 비정상인으로 보았을 것이고, 남은 가족들이 불쌍하다고 욕하고 손가락질 했을 것입니다. 미치지 않았다면 저런 짓을 할 수 없지 하며 사람들은 혀를 찼을 것이다.

    홍수의 심판이 있을 것을 깨달은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었다. 창세기 6장 14절 21절까지에는 하나님이 만들라고 하신 방주의 모형도가 나옵니다. 가로가 135미터, 세로가 22.5미터, 높이가 13.5미터로 그 부피가 대략 잠실야구장 정도라고 합니다. 이 정도면 대략 125,000마리의 양을 싫을 수 있는 크기라고 합니다. 그 큰 방주를 가족들의 힘만으로 만들었으니 100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방주를 직접 만들어 주지 않으시고 노아로 하여금 이 방주를 만들게 하셨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먼저, 노아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이 명령하신 말씀을 다 준행하는지 살펴보신 것입니다. 믿음이 뭡니까? 성경적 개념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로 노아가 100년 동안이나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했습니다’ 바로 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통해 노아는 홍수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 100년의 시간은 노아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마지막으로 주어진 구원의 기회였습니다. 노아라는 사람이 100년 동안이나 산꼭대기에 어마 어마한 방주를 짓고 있었으니 아마도 노아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노아도 기회가 있는 대로 방주를 보려고 몰려온 사람들이게 ‘홍수의 심판’이 있다는 하나님 말씀을 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의 가족 외에는 그 누구도 이 노아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없었고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2) 롯의 시대 사람들

    소돔성을 심판하시기 전에도 하나님은 롯과 그의 가족들에게 심판에 대한 분명한 경고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창 19:13-14) 그들에 대하여 부르짖음이 주앞에 크므로 주께서 우리로 이곳을 멸하러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14)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주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

    “농담으로 여겼더라.” 이 말은 장인 될 롯이 한 말을 헛소리로 여겼다는 말이다. 롯을 하나님께서 이 죄악의 도성을 불로 심판하신다는 것을 엄격하고 엄연한 사실을 절박한 마음으로 사위될 자들에게 권면 했지만 롯의 사위들은 “주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고 재촉하는 경고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다 했습니다. 소돔성 심판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농담으로 여겼다가 소돔성이 멸망할 때 함께 심판을 받았다는 겁니다.

    또 롯의 아내는 소돔성이 심판을 받을 때 “뒤를 돌아보지 말라”하신 주의 천사의 경고를 무시했다가 ‘소금기둥’이 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노아시대 사람들이나 롯의 시대 사람들의 심판 받을 죄는 크게 세 가지 도덕적 이성적 타락이며 포악한 인간성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해 버리는 영적인 죄악이었다.

    (3) 마지막 때 사람들

    마찬가지로 마지막 날 즉 인자의 날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도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먼저 안전한 곳으로 옮기신 후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7년 대 환란이 몰려올 때, 이 땅에는 어느 곳도 안전한 곳이 없기에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를 하늘로 데려가신 뒤,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앞으로 일어날 그 날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입니다(눅17:34,35).

    노아의 때, 롯의 때와 같이 죄악이 관영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세상일락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져서 하나님의 경고를 외면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죄악이 관영한 시대를 살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믿음과 의를 지킨 노아와 롯은 심판에서 구원받는 은혜를 얻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과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종말과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무시하거나 외면하면 안됩니다. 요즘은 교회 안에서도 종말과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듣기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다고 떠드는데, 정작 교회 안에서는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종말에 대한 성경의 예언들이 하나씩 실현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무지해서인지, 무감각해서인지는 몰라도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말과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면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4. 심판이 임하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신 후에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홍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도록 방주를 지으라 하시고, 방주가 완성되고 방주에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안전하게 옮겨 놓으신 후에 홍수의 심판이 내려졌습니다(27). 롯과 그의 가족들이 소돔성에서 빠져나간 뒤 안전한 도피성 소알성으로 옮기신 후 소돔성을 심판하셨습니다. 불의 심판이 내려졌다(29). 노아와 롯은 비록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살았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먼저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으신 후에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비도 오지 않는 마른하늘에 산 꼭대기에서 100여년 동안 배를 만드는 것은 의무감이나 책임감으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마치 음악을 만났던 것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그 노래에 매료되었던 것처럼 그 사랑에 매료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인데 하나님의 사랑에 매료되어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노아를 성경은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며,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노아가 도덕 규범이나, 윤리 규범을 완전히 지키기 때문도 아니오 세상의 도덕과 윤리적인 잣대에서 어떤 절대적인 완전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도 아니며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노아가 의롭고 완전한 사람이 된 것은 그도 보통사람이었지만, 늘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즐겼으며, 하나님과 교통했기 때문에 노아는 점점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따르는 자로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웃과 건강한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아의 방주가 완성되어 노아의 8식구와 모든 짐승이 다 배에 오르기 까지 한 사람도 방주를 찾지 않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방주의 문을 닫으라고 명하셨다.

    하나님은 심판을 언제 어느 날 어느 시에 하시겠다고 날짜를 정확하게 말씀하지 않았다. 노아와 가족이 그리고 생축들이 존속할 수 있는 준비가 되기까지 방주가 완성할 때가지 기다리신 것이다.

    방주가 완성되므로 때가 되니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방주로 들어가라 이제 비를 내리겠다고 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하신대로 사람과 짐승을 다 방주에 태웠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두 태우고 더 태울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으니 친히 하나님이 방주의 문을 닫으셨다.

    하나님은 죄악으로 포악해진 들에게서 떠나가시고 그들의 날을 120년으로 한정시키었으며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했으나 120년의 유예기간을 두고 심판하시는 것이다. 노아가 말씀대로 방주 짓기를 다하자 하나님이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느니라"(1절)고 그에게 말씀하신다

    노아는 당대에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복종하여 자기의 의로움을 지켰다. 하나님께 은혜 입은 자는 그의 말씀에 절대 복종함으로써 의를 세운다. 언약은 말씀에 복종함으로써 유지되며 이 때 복종하는 자는 의롭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로 하여금 정결한 짐승 암수 일곱씩, 부정한 짐승 암수 둘씩 데려오라고 하신다(2절). 공중의 새들 암수 일곱씩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신다(3절).

    6장에서는 암수 한쌍씩 데려오라고 되어 있으나 7장에서는 정결한 짐승 일곱쌍을 데려오라고 한다. 6장의 한쌍씩은 생명보존을 강조하며, 7장의 일곱쌍은 제의를 강조한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온후 정결한 짐승중에서 취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심판의 유예기간 100여년이 다 지나고 칠일이 남았다. 이제 칠일후면 하나님이 사십 주야로 비를 내려 그가 지으신 모든 것을 멸절하신다(4). 노아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갔다(7). 그가 데려온 짐승들도 방주로 들어갔다(8-9절). 마침내 칠일이 지나고 홍수가 땅에 임하였다(10).

    노아가 600세 되던 2월 17일, 그 때는 무두셀라가 죽던 해이다.

    그 날에 큰 깊음의 샘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이 열려 사십 주야 동안 비가 땅에 쏟아졌다(11-12절). 이 많은 물이 어디서 왔으까?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실 때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을 나누셨다(창 1:6). 그런데 하늘의 창문이 열려 궁창 위의 물이 땅에 쏟아졌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노아의 가족 8명을 제외하고는 다 전멸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고 성경의 기록이다.

    아침이 되매 그 천사들이 롯을 재촉하였으나 롯의 가족들도 소돔성을 떠나는 것을 망설이매 그 남자들이 롯의 가족들의 손을 잡고 그 성을 데리고 나가서 도피시켰는데 성경에는 주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셨으므로 그들이 그를 데리고 나아가 그 도시 밖에 두니라(창19:16).

    그들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하늘에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려 불로 소돔과 고모라가 불의 심판을 받았던 것이다.

    마지막 때는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심판하시고 구원하신다고 하셨다.

    아들에 의한 심판과 구원은 이미 노아의 홍수심판으로 경험되어진 사건이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아들을 믿어 영생을 얻은 자는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이다. 영생의 본질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귐에 있다.

    장차 오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오시는 날을 노아의 홍수심판으로 비유하신다.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은 장차 만민을 심판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눅 17:26-27).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그러할 것이다(눅 17:30).

    먹고 마시고 장가가도 시집가는 것은 인간이 자기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삶이다. 누가 그것을 탓할 것인가!

    그러나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인자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는 그 날에 자기 목숨을 얻을 것이다.(눅 17:33).

    노아는 심판이 유예된 100년간, 그리고 마지막 7일간 의를 전파하였다(벧후 2:5). 그러나 사람들은 홍수가 임하는 그 날까지 자기 목숨만을 위해 먹고 마시며 살았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그 날까지 말이다.

    우리들은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실지 알 수 없다.

    오늘도 많은 사람은 그 날을 망각한 채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며 자기 목숨을 위해 사는 일에 몰두한다. 교회 안에서조차도 자기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근자에 주와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는 생뚱맞은 자이다. 인자가 오시는 그 날까지 그러하리라!

    5.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

    나는 70여 평생을 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살아왔다. 좀 더 잘 먹고 좀 더 잘 마시고 좀 더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살기 위해 달음질했다.

    내가 장가가고 자식들 키워 결혼시키고 손자보고... 그렇게 수를 누리다가 죽는 것...자기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사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돈벌었고 남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성공하고 명성을 얻고 싶었다. 교회를 다니고 목사가 되어서도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 거룩한 가면을 쓰고 내 인생을 얻기 위해 몰두하였다. 세상사람들로부터 부수적인 명성도 얻었다. 심판 날을 망각하며 다분히 땅의 일을 구하며 살며 사역하였다.

    나의 목숨을 얻고자 살던 내게도 홍수심판이 임하여 자기 인생을 위해 쌓았던 모든 것이 휩쓸려갔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방주를 예비하셨다. 요나를 예비한 물고기처럼 심판받아 죽어야만 합당한 나를 위해 아들을 예비하셨다. 아들 안에서 생명을 얻고 영생을 얻게 되었다.

    다시는 나를 위해 살 수 없는 자,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를 위해 사는 자가 되었다. 매일 인생의 갈림길에서 묻는다. 죄를 버릴 것인가? 다시 옛날로 돌아갈 것인가? 내 목숨을 위해 살 것인가? 주와 복음을 위해 살 것인가? 이제부터는 나를 위한 인생은 지워버리고 오직 주와 복음을 위해 남은 인생을 투혼한다. 노아가 그리했던 것처럼 사람들의 몰이해 속에서도 구원의 방주를 짓는다.

    누구를 위해 매일 방주를 짓는가! 결국 내 인생을 얻기 위해서이다.

    죽기에만 합당한 자에게 은혜 베푸신 주를 위해서이다.

    아버지...평생을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내 목숨을 얻기 위한 인생에 심판의 칼이 임했을 때까지 깨닫지도 못한 자였습니다. 말씀 앞에 나아가니 모든 것이 드러났습니다.

    오, 주여! 나를 붙드소서. 크나큰 손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기억하게 하소서. 어찌 다시 내 인생을 살겠나이까!

    나를 강권하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강권하소서.

    주와 복음을 위하여 도살장으로 끌려가도 족하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하여 털 깎는 자 앞에서도 잠잠합니다.

    나의 인생은 끝났습니다. 내 이름도, 명성도, 성과도 지나갔습니다.

    날마다 영생을 바라보며 방주를 짓게 하소서. 내 주님 언제 오실지 모르나 오늘 오셔도 영접하게 하소서. 마라타나! 주여, 속히 오소서! 속히 오소서! 내게 오소서!

    마지막 때 인 오늘날에는 참 생명으로 인도하는 바른 말씀이 선포되고 기도의 불이 항상 꺼지지 않으며 구원의 방주 역할을 잘 감당해내고 있는 영적으로 깨어있는 교회를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 둘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바르고 정확하게 선포하는 참 목자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좋은대로 변질시키고 희석시켜 양떼들을 사망으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양무리중 제일 앞서가는 양입니다. 제일 앞선 양 한 마리에 의해 전체 양들의 생명이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사명이 얼마나 중대한지 알고나 있는지요?

    야고보서 3:1을 보면 "내 형제들아 !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장 6절에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자기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 깊숙히 잠기는 편이 낫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죄악으로 관영해 간다 해도 교회만은 결코 물들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달아 말씀 안에 살도록 가르쳐야 하지요. 그런데 오늘날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과 타협하도록 잘못 가르치는 곳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고 하셨던 것처럼 오늘날은 죄와 불법이 성하여져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이 되었습니다. 농부가 추수할 때 알곡만 거둬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살라버리듯이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쭉정이들보다 한 명의 알곡이 더 중요하고 알곡만 천국이라는 창고에 거둬들이는 분이셨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

    하나님께서는 알곡을 원하시기에 그의 자녀들이 참된 알곡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심으로 아담과 그 후손들인 인류를 통해 오늘도 인간 경작의 역사를 펼치고 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과연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알곡인지 아니면 세상을 사랑하여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속에 죄와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쭉정이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합니다.

    사실 이 마지막 때에는 구원받는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8장 8절 후반절에 예수님께서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말씀하신 대로 정말 믿음찾아보기 힘든 때가 되었지요. 물론 많은 사람들이 “믿습니다” 고백하고, “주여, 주여” 하며 찾지만 그중에 참 믿음, 구원받을 만한 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죄를 버리도록 누군가 깨우쳐 주지 않는다면 무엇이 죄인지조차 모르고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다가 결국 구원받을 수 없는 쭉정이 신자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니 목회자는 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성도들에게 잘 가르쳐 주어야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때를 위해 행복침례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홍수를 대비하여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만들게 하셨던 것처럼,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미리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셔서 롯과 그 가족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셨던 것처럼, 이 마지막 때에도 행복침례교회를 세우셔서 구원의 방주 역할을 감당케 하시고자 행복침례교회를 통해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노아의 시대는 물로써 세상이 멸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는 불로써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주신 것이니라”(벧후 3:5-7).

    홍수 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노아를 광신적인 사람이요 부질없이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의 위대하고 학식이 많은 사람들은 노아가 예언한 홍수를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결코 있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은 별반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의 경고를 조소합니다.

    바로 이 때에 멸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라고 조롱하면서 질문할 때, 징조들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멸망이 홀연히 저희

    오늘날 사람들은 여전히 먹고, 마시고, 심고, 집을 짓고, 시집 가고, 장가 가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상인들은 여전히 사고 팔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최고의 자리를 위하여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극장, 경마장, 도박장 등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흥분적인 일이 편만합니다. 그런가 하면 은혜의 시기는 신속히 마쳐지고 있습니다. 자비의 문은 미구에 영원히 닫혀질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구세주의 경고의 말씀은 봅시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 21:36).

    그리고 오늘날이 바로 노아와 롯의 때처럼 흥청망청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오는 줄을 꿈에도 모르고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면서 신나게 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노아때와 같이 사람들은 집을 짓는 일에 바쁘게 살지만 노아가 방주로 들어 가던 날과 같이 멸망이 예고없이 어느날 불현듯이 다가왔을 때 까지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사람이 무지하다는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노아 때처럼 롯의 때처럼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멸망을 받았듯이 오늘날도 우리가 준비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 성을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다”(28,29)했습니다. 노아의 때와 롯의 때를 살았던 사람들의 특징은 바쁘게 살아갔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로 너무 바쁘다 보니 종말과 내세를 바라보지 못하고, 준비 없이 심판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기에 언제 주님이 부르셔도 떠날 수 있는 믿음의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구원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에 응답할 수 없을 만큼 바쁘다면 이것은 바빠도 너무 바쁜 겁니다.

    누가복음 21장 34에서 예수님은 경고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세상 일락에 취하고, 생활의 염려에 매여 살면, 마음이 둔하여지고 심판의 날이 덫과 같이 임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바빠도 종말과 심판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지혜로운 삶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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