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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 거짓을 진리로 믿는 이슬람을 알자말씀 2018. 8. 27. 15:45
거짓을 진리로 믿는 이슬람교를 알자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이 되면서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특히 종교가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외모로부터 그들의 문화 종교까지 알게 된다. 물론 전세계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12월 25일은 기독교의 예수탄생일 이라고 하지만 실은 예수님은 12월 25일이 탄생일이 아니다. 지하에 있던 기독교가 지상으로 나와 로마의 국교로 되면서 태양신의 탄생일에 예수가 탄생했다는 기상천외같은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 거의 2천년 동안이나 내려오고 있는 것돈 놀라운 일이다. 내가 오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크리스마스날보다 더 경이로운 종교행사를 말하고자 한다. 과연 어느 종교가 전세계인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는가 생각하니 무슬림이라고 하는 이슬람교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해마다 이슬람교의 라마단에는 2백만명정도의 무슬림들이 메카를 방문하는데 방문하는 숫자도 놀랍지만 그들이 메카에 도착해서 흰 천으로 온몸을 감싼 채 메카사원의 중앙에 있는 카바신전 주위를 시계반대 방향으로 도는 행렬은 해마다 지구촌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현재 이슬람교도의 수는 대략 세계 인구의 약 25%인 18억 내외로 알려져 있다. 지구촌의 4사람 가운데 한 명은 이슬람교도인 셈이다. 무슬림들의 메카 순례 여행인 하지를 통해 또 하나의 종교인 이슬람 문화를 알아 보자. 우선 이슬람들의 특징은 머리에 히잡을 쓴 여자들을 볼 수 있다. 어떤 여자들은 머리에만 히잡을 쓴 것이 아니라 눈만 내놓고 온몸을 천으로 감싸고 다니는 여자들도 있는데 보기에도 역겨워보인다. 그러나 그 지역에선 여자들이 희잡을 하지 않으면 날 데려다가 강간해도 좋다는 의미이므로 여자가 10살 이상만 되면 외출할 때는 착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디 여자들 히잡쓴 것만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하루에도 메카를 향해 5번씩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정말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들의 이런 종교의식을 볼 때는 그들이야 말로 대단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는데 과연 그럴까?
무슬림들이라면 누구나 평생 한 번 메카성지순례 즉 라마단 하지에 참가하는 것이 최고의 소망이라고 한다. 그들이 그렇게 원하는 라마단때 메카순례 즉 그들말로 하지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1. 메카성지순례 (하지)
그들 달력으로 라마단이 오면 한달 동안 그들은 라마단 절기를 지키는데 그들중 일부는 메카에 가서 성지순례를 한다. 닷새 동안 진행되는 성지순례 즉 하지는 메카에 도착하면 성지순례객들은 바느질하지 않은 흰 천을 두르고 메카 대사원 중앙에 있는 육면체 카바신전을 반시계방향으로 7바퀴 도는 것으로 시작한다. 카바 신전 주위를 7번 돌고나면 카바신전 벽에 붙어 있는 검은 돌에 입맞춘다.
석전 참배를 마친 순례객들은 이스마일의 생모인 하갈이 물을 구하러 다녔다는 고행을 경험하고자 인근 사파 언덕과 마르와 언덕 사이를 7번 오가는 '왕복 의식'을 치른다.
그다음은 메카 외곽에 있는 성지들인 라흐마 산과 무즈달리파, 메카에서 동쪽으로 8㎞ 떨어진 미나를 방문하고. 이후 미나계곡에서 숙영하고 예언자 무함마드의 마지막 설교장소였다는 아라파트 산에서 해질 녘까지 기도한다.
다음날은 아브라함의 희생제를 기념하여 희생제를 바치고 또 순례객들은 무즈달리파산에서 작은 돌멩이를 몇 개 주운 뒤 3일 동안 미나계곡 근처 자마라트에서 악마를 상징하는 돌기둥벽에 돌을 던지는데 이 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압사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한다.
2015.9. 24일에도 성지순례(하지) 기간 밀집한 순례객들이 미나 계곡에서 악마를 추방하고자 돌기둥 벽에 돌을 던지는 과정에서 압사 사고가 발생해 1천500명 이상이 숨지거나 부상했다. 그러덴 이런 하지기간중에는 해마다 압사사고가 그치지 않는 이유는 라마단 기간중 순례객들은 이런압사사고는 신을 위한 순교로 믿기 때문에 전혀 두려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2018년 성지순례에는 사우디의 적성국인 이란에서 약 9만명이 참가하고 사우디가 작년 6월 단교를 선언한 카타르인들도 참가한 것으로 알려졌으니 이런 무슬림의 종교행사에는 정치를 초월한다고 할 수 있다.
(1) 이슬람의 다섯 가지 의무
① 증언 고백 (샤하다)
“나는 알라 이외에 신이 없음을 증언합니다. 나는 무함마드가 알라의 사자임을 증명합니다.”라는 증언을 무슬림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고백한다.
② 예배(살라트)
하루 중 일출, 정오, 하오, 일몰, 심야 등 다섯 차례에 걸쳐 기도를 드리는 데 특히 금요일 정오에는 모스크(사원)에서 예배를 드린다. 기도를 할 때는 반드시 메카를 쪽을 향해서 한다.
③ 희사(자카트)
무슬림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 중의 일부를 바치는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인다.
④ 단식(샤움)
어른이 된 무슬림들은 매년 라마단 월의 해가 떠 있는 시간에 금식을 한다.
⑤ 순례(하지)
무슬림들은 매년 하지의 달(이슬람력 제12월)에 메카로 순례 여행을 하는데, 무슬림이라면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꼭 해야 한다. 그러면 이런 이슬람교가 어떻게 발생했는가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2. 이슬람교의 탄생 배경
바울순교 후 64년부터 311년까지 박해 중에서도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면서 지하에서도 교회는 성장하고 있었다. 박해중에는 오히려 순수했던 기독교가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공인이 선포되자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교회는 교리적인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런데 사탄은 매우 교활하게 그리스도인들을 참소하고 로마카톨릭을 통하여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하는 한편 기독교를 변질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영지주의라는 이단을 만들어 교회를 혼란스럽게 했었지만 그러한 방법이 통하지 않게 되자 이번에는 교회를 교리 논쟁에 휘말리면서 변질되게 만들었다.
(1)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 발생한 교리논쟁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에서 세운 에베소교회가 431년 에베소 3차 공의회를 통해 마리아를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하나님의 어머니로 결정하면서 교리적으로 변질을 가져와 오늘날 로마 카톨릭이란 초대형 이단이 탄생된 것이다. 이렇게 타락하고 변질된 카톨릭 교회가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교황청을 예루살렘으로 옮겨서 세계 모든 종교의 통합을 이루어 로마 교황으로 하여금 모든 이방종교들을 총체적으로 관장하는 승원장 즉 법황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북아프리카 지방에 수도원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수도원하면 장차 성직자가 될 사람들이 수도하는 곳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로마교가 전 세계 지배를 위하여 만든 로마교회의 정보 수집을 위한 지부였다. 이런 수도원을 통해 4세기 중반에 북아프리카에 성자가 있다는 소문이 전파되어 나갔는데 그 사람이 바로 어거스틴이었다. 그는 로마 교회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성자로 불려졌으며 그 유명한 참회록(Confession)과 신의 도성(The City of God)이란 책을 쓴 사람이다.
어거스틴의 탁월한 학문과 노력에도 아랍의 부족들은 좀처럼 잘 개종하지 않았다. 어거스틴이 죽고 나자 로마는 다른 방법을 준비하고 추진해 나갔다. 당시에 로마교에서는 큰 도시에서 동떨어진 작은 부족들의 마을에 수도사들을 침투시켜서 이상한 예언들을 하고 다니게 했다. 그 예언이란 장차 한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 아랍의 부족들을 하나로 통일시켜서 서로 싸우지 않는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고 다니게 했다. 이러한 예언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었고 그러한 예언이 퍼져 나간 후로는 부족들 간에 전쟁이 있을 때 마다 언제 그러한 지도자가 나타날 것인지 고대하게 되었다.
(2) 마호메드 (무함마드) 등장
마침내 570년경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한 사람이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마호메드(아랍어로는 무함마드)였다. 후일에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은 인물이 되었다.
이슬람교가 출발한 아라비아 땅은 그 옛날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 이스마엘 자손들이 살아온 땅이었다. 그들이 믿고 있는 전설은 하갈과 이스마엘이 사라의 핍박을 피하여 아브라함의 집을 나온 후에 목이 말라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우묵한 것을 터치시니 거기서 물이 나와서 마시고 소생했다는 성경의 이야기를 빗대어 그 우물 곁에다 신의 집이라는 집을 지었다고 전하여지는 그곳에 오늘날에는 카바 신전이 세워져 있고 해마다 수백만의 순례자들이 찾는 곳으로 이슬람교의 최대 성지가 되어졌다.
옛날부터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그 우물을 차지하기 위하여 부족간의 암투가 벌어졌던 것인데 마침내 그 우물을 차지한 부족이 이스마엘 직계자손 중에 꾸라이시 부족인데 그 부족의 한 인물이 바로 압둘 무타리부라는 사람이었다. 이 무타리부는 마호메드의 할아버지 되는 사람이다.
마침내 압둘 무타리부는 메가의 영웅이 되어 그들이 섬기는 후발신에게 기도하기를 만약 신께서 열 명의 아들을 주신다면 그 중에 한 아들을 카바에서 희생제물로 바치겠다고 서원을 했다. 수년 후에 그 응답으로 그는 열 명의 아들을 얻게 되었고 그 중에 압둘라라는 막내아들을 특별히 사랑했다고 한다. 압둘 무타리부는 그 막대 아들 압둘라를 신께 희생제물로 바치는 대신 약대 100마리를 바치고 아들을 속량해 내었다. 바로 이둘라는 569년에 아미나라는 여성과 결혼한 후 대상들과 함께 길을 떠났는데 도중에 병을 얻어서 돌아오지 못했으나 아미나는 마호메드를 유복자를 임신하였는데 그가 바로 마호메드이었다.
아이가 태어나자 압둘 무타리부라는 아들을 잃었지만 대신 손자를 얻은 것을 신께 감사드렸다고 전한다. 불행은 겹쳐서 오는 법인지 마호메드의 7살 되던 해에 그의 어머니 아미나 마저 죽고 2년 뒤 그러니까 마호메드 9살 되던 해에는 그의 후견인으로 돌보아 주던 할아버지인 압둘 무타리부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9살 되던 해부터 삼촌들을 따라서 낙타상인들과 동행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카톨릭 수도사가 나타나 마호메드의 등을 보여 달라고 해서 등을 보여 주었더니 그 수도사가 하는 말이 "이 표시는 예언자의 인이니 당신들은 이 아이를 잘 보호하시오 특별히 유대인들이 이 아이의 생명을 빼앗으려 할 터이니 신의 일을 하게 될 이 아이의 생명을 잘 지키도록 하시오 이 아이는 장차 위대한 일을 하게 될 것이오." 하고 사라졌다고 전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교황청의 한결같은 소원은 예루살렘에 교황청을 세우는 것인데 로마 카톨릭은 우선 이것을 반대하는 정통파 유대인들과 카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을 제거하는, 그 일을 대신해 줄 인물을 구하고 있었다. 교황청이 찾는 그런 인물은 바로 전 아랍사람들을 한데 묶어 교황청에 복종하게 할 영웅이어야 한 것이다. 로마교황청은 그 악한 일을 맡을 사람으로 마호메드라는 인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 영웅으로 하여금 전 아랍을 하나로 묶어서 교황에게 순복하게 하고 또 예루살렘을 교황청에 바칠만한 인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3) 마호메트의 첫 결혼
이제 마호메트가 25세이었을 때 교황청에는 이 모든 일을 추진할 한 여인을 택하였는데 그녀가 바로 수도원에 있던 40세인 하디자로 마호메드의 첫 번째 아내가 되었고 그녀의 사촌 오라버니는 바라카였다. 처음에 그녀는 자신의 전 재산을 카톨릭 교회에 헌납하고 수녀원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 특수 임무를 받아서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고 자금지원은 교황청이 책임지기로 하고 하디자와 바라카가 특수 임무 즉 마호메트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사탄은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이스마엘 자손들에게 복음이 들어가지 못하게 공작하고 있었고 카톨릭은 정통파 유대인들을 제거하는 일과 카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을 제거하는 꿈을 꾸었고 마호메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이용당하고 있었다.
40세가 되었던 어느 날 마호메드가 메카 외각에 있는 히라산의 어느 동굴에서 성스러운 환상을 보았다고 하는데 그 모든 환상은 언제나 바라카가 해석해주는 대로만 기록된 것이다. 이 때 보았다는 환상들을 기초로 하여 오늘날 코란이란 책이 만들어졌다.
마호메드가 보았다는 마리아에 대한 환상으로 인하여 카톨릭을 신봉하는 왕들로부터 이슬람은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마호메드가 쓴 다른 문서에는 이스람교리를 만들었던 한 페이지도 기록이 없는데 혹 있다면 이슬람 최고 지도자(아야톨라)들의 손에 있다고 보고 있다.
이 문서에는 이슬람 교리를 만들어 가는데 교황청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가 소상하게 나와 있어서 일반인들에게는 절대 비밀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물론 교황청 비밀문서 보관소에도 있고 이슬람 최고지도자들의 손에도 보관되어 있다고 알려졌다. 이러한 문서에는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정통파 유대교와 카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기독교를 말살할 것인가 하는 내용이 있어서 이 문서가 외부에 유출되면 두 종교는 다 큰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서로 견제하면서 서로 조심하고 있는 것이다. 마호메트가 지시받은 교리는 아내 하디자에게 친구들에게 알려졌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스람교는 전파되기 시작했다.
마호메드는 632년에 죽고 나자 이슬람교는 오히려 더 번창하게 되었다. 교황청의 목적대로 아랍의 모든 유목민 부족들이 알라 신과 그의 선지자 마호메드의 이름 아래 통일되어 갔다. 그 때까지 아랍 사람들의 속내를 알지 못한 교황청은 이슬람교가 북아프리카 지역을 침략하여 통일시키는 일까지 승인하여 주었고 자금까지 대어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진행될 때 교황청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을 약속받고 재정을 지원했다고 한다.
첫째 정통파 유대인들과 카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을 제거할 것
둘째 어거스틴 수도사들과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항상 보호할 것
셋째 교황청을 위하여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카톨릭에 돌려줄 것 등 이었다.
이러한 조약이 체결되고 자금이 지원되자 이슬람교는 북 아프리카 전역을 다 쓸어서 통일시켰다. 성지를 순례하면서 시내산 밑에 있는 성 카타리나 수도원 첨탑에는 기독교의 십자가와 이슬람교 반월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심코 그냥 지나 갈 수도 있으나 자세히 보면 그 때부터 이슬람과 카톨릭이 화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로마 카톨릭과 이슬람은 불가침 조약이 있고 화평하게 잘 지내고 있으면서 그들의 공동의 적은 여전히 정통파 유대인들과 카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로마 카톨릭은 종교재판이라는 무시무시한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학살하였고 이슬람도 동방에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무차별 죽이므로 그들의 조약을 성공을 거두는 것이기도 하였다.
세월이 흘러서 아랍사람들의 이슬람 군대는 마침내 로만 카톨릭에 진 빚을 갚아야 할 때가 도래하였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승리를 맛 본 아랍 사람들은 교황청의 군사력이 별것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랍의 군대를 막아 낼 어떤 군대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교황청에서는 아랍 사람들이 더 이상 교황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슬람지도자들은 교황청이 그렇게 손에 넣고 싶었던 예루살렘의 중요성을 깨닫고는 성전 산을 자신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3. 예루살렘을 거쳐간 주인들
평화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 예루살렘이란 도시는 그 도시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지난 3천년동안 참으로 파란 만장의 역사를 가진 도시였다. 예루살렘은 3000년전에는 여부스라는 가나안의 한 부족이 차지하고 있다가 이스라엘 왕 다윗이 탈환하여 예루살렘이라고 했는데 이는 평화의 도시라는 의미이다.
다윗 왕이 여부스인을 쫓아내어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다음에는 솔로몬왕이 궁전과 일찍이 다윗이 건립한 이스라엘의 하나님 제단 앞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립하였다.
BC 935년 왕국이 이스라엘과 유대로 양분되자 예루살렘은 남방 유다의 중심지가 되었다. BC 586년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가서 BC 538년까지 억류하였다. 그 후 페르샤의 고레스 왕이 이들을 석방해 줌으로써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솔로몬 성전도 재건하였으나, 옛날의 번영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1) 로마와 비잔틴제국 (BC 63-614)
그 후 여러 차례 파란을 겪은 끝에 BC 63년 폼페이우스가 거느린 로마 군이 성벽을 파괴하고 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때부터 예루살렘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BC 37년부터 헤롯왕이 이곳을 점령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솔로몬 왕 이후의 번영을 잠시 되찾았다. 후에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70-71년에 이 도시를 공격함으로써 헤롯 시대의 번영은 사라졌다. 유대교도들은 헤롯이 지은 성전의 벽, 나중에는 그 성벽을 통곡의 벽이라 이름 짓고 이곳을 찾아가서 통탄하는 풍습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에도 유대교도의 반란때문에 135년 로마는 예루살렘은 파괴했으며, 예루살렘에서 유대교도들을 몰아냈다. 그 후 로마가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자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도의 순례자로 붐비었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의 명령으로 최초로 그리스도의 성묘교회가 건립되었다.
(2) 아랍 족속 (614-이후)
예루살렘은 동로마 즉 비잔틴 제국의지배를 받아오다 614년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가 비잔틴 제국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뒤, 많은 교회를 불사르고 다수의 시민을 끌고 갔다.
마호메드가 죽은 후 불과 7년째가 되는 638년 이슬람교로 단결한 아랍인이 이곳을 함락시켰으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도 비잔틴 제국에서 이탈하여 이슬람교 국가의 일부가 되었다. 현재 바위사원에 있는 큰 바위는 마호메트가 꿈에 천사 가브리엘의 안내로 알라신 앞까지 갔다는 이른바 승천(미라지)의 장소로서 신성시되고 있다. 아랍인들은 솔로몬의 궁전이 있던 곳에 회교사원(알 아크사 마스지드)을 지었으며,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 압둘 말리크(재위 685-705)가 이곳에 바위 돔 사원을 건립하였다.
마호메드가 바라카의 지도를 받으면서 코란을 기록하는 중에 큰 거짓말을 삽입한 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아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을 듣고는 모리아 산으로 가서 이스마엘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다고 거짓말을 썼다.
이런 것들로 인해 이슬람교도들은 이 예루살렘을 성지로 존중하였다.
(3) 십자군 전쟁(1099-1229)
예루살렘을 차지하려고 그렇게 공을 드렸던 교황청에서는 여전히 예루살렘을 포기할 수 없어서 마침내 1099년에는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침략하였으며,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의 대학살을 자행하고, 이 곳을 수도로 하는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1187년 이집트에 아이유브 왕조를 건설한 살라딘이 이슬람 세력을 모아 이를 탈환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이 있었으나 1229년 2월-1244년 8월까지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의 화의로 이 땅을 회복한 적이 있을 뿐 성지 탈환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카톨릭의 군대와 아랍의 군대는 오래 동안 전쟁을 하게 되었고 수 세기가 흘러갔지만 예루살렘은 교황의 손에 넣을 수가 없었다.
(4) 시리아 맘루크 왕조(1299-1516)
아랍 사람들은 알라 신의 이름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마침내 터키가 아랍인들이 손에 넘어갔다. 이슬람과 로마교황청의 수년에 걸치는 전쟁을 치르면서 마지막 선택의 길은 적당한 선에서 휴전을 하는 것이었다. 그 때 중재자로 나선 사람이 그 유명한 성 프란시스(Fracesco 1182-1226)였다. 그들은 공식 협상을 통하여 이른바 정교조약을 조인하고서 휴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 맺어진 그 조약에는 터키를 카톨릭에 양보하고 카톨릭 쪽에서는 레바논을 아랍영토로 인정할 것이며 또한 로마 카톨릭이 아랍국가에서 활동할 수 있는 한 회교도들 또한 아무런 간섭없이 이슬람 사원을 세울 수 있게 하는데 동의했다. 그리고 그들은 상호의 종교를 독립된 종교로 인정하고 공동의 적이 되는 정통파 유대인들과 카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기독교를 공동의 적으로 간주하여 이를 제거하는 일에 공조하기로 약속하면서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렇게 하여 사탄은 아랍 열국에 있는 불쌍한 이스마엘 자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손을 써 놓았다.
(5) 오스만 투르크 (1516-1920)
교황청과 아랍군의 정교 조약에 터키를 카톨릭에 양보하는 것으로 했지만 1299년 터키에서 일어난 오스만 1세가 세운 투르크 제국은 1453년에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이스탄불로 수도를 옮겨 번성하였고 예루살렘 땅은 1516년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셀림 1세가 시리아 맘루크 왕조의 세력을 꺾고 예루살렘을 지배하게 되었다. 현존하는 성벽의 대부분은 술레이만 대제(1520-1566)시대에 축조된 것인데, 오스만 터키도 쇠퇴하여 19세기 전반에는 예루살렘 인구가 약 1만명 정도로 감소하였다.
오스만 트루크 제국은 각 분야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17세기 이후로는 점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중엽 이 후 러시아-투르크 전쟁에 대패함으로써 유럽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한 투르크제국은 1908년에는 청년 장교들 주축의 투르크 당을 결성 이후 케말파샤 아타튀르크는 1922년 11월 술탄 정부의 폐지를 선언함으로써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멸망하였다.
(6) 영국 (1920-1948)
한편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터키군이 패퇴하고 앨런비 장군이 거느리는 영국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으며 1920년부터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위임 통치 하에 들어가자 그 수도가 되었다. 그 후 1차대전 중의 벨포어 선언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유대인들이 격증하였으며 1948년 5월14일에 이스라엘 국가 로 독립하였다. 이에 따라 예루살렘은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동서로 양분되었는데, 1967년 6월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전역인 동부마저 차지했다. 그러나 아직도 예루살렘 그 성전 산에는 이슬람 사원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렇게 되고 보면 이제는 그 예루살렘이 교황청의 소유가 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슬람교의 소유가 되지도 못했고 교황청이 그렇게 없애 버리려고 했고 아랍사람들이 그렇게 박해했던 유대인들이 거의 다 차지하게 되었다. 다만 성전이 있는 그 거룩한 곳만 아직도 이방인들의 발아래 밟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구원의 때가 기다려지고 있는 것이다.
4. 로마카톨릭과 이슬람과의 합작품 - 파티마성당
한편 1910년경에 포르투칼에서는 공산주의 운동이 나타나면서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악선전하면서 포르투칼에서 카톨릭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래서 교황청에는 포르투칼에서 확산되는 공산주의를 막아 내려면 마리아가 나설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위대한 쇼를 준비했다. 그 유명한 사건이 마호메드의 딸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포르투갈 산타렘주 빌라노바데오렘에 있는 파티마 마을에서 일어났다. 수세기 동안 무슬림들이 포르투칼을 점령하고 있을 때 마호메드를 숭배한다는 뜻에서 그 지역 이름을 파티마라고 불러 왔었다. 무지한 이슬람교인들과 교활한 교황청의 수법은 결국은 사탄의 뜻을 이루는데 이바지하고 있는 것이다.
1917년 5월부터 10월까지 매달 13일이 되면 3명의 어린 목동 앞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죄의 회개와 로자리오의 기도를 권하였다는 유래 때문에 이 작은 마을에 성모마리아의 나타남으로 일약 순례지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1930년 레이리아의 주교가 이 사실의 신빙성을 인정하게 되면서 파티마의 로자리오 성모에 대한 숭앙은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지금은 파티마대성당이 건립되어 해마다 600만명정도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아 참배한다. 65m의 탑위에 큰 십자가를 꽂은 것으로 유명하다. 카토릭의 거짓을 진리로 바꾸어 사람들을 믿데 하는 능력이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공산주의자들의 카톨릭에 대한 위협은 포르트칼에서 뿐만 아니라 스페인에서도 혹독하였다. 19세기 초부터 스페인은 정치적인 파란을 겪게 되었고 1868년 마침내 카톨릭 왕조가 무너지게 되었고 카톨릭계 여왕은 폐위되었다. 그러다가 1923년부터 다시 군주 정치가 부활하였고 스페인 정국은 혼란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을 때 교황청은 스페인의 카톨릭 교회로 하여금 반기를 들게 부추겼다. 스페인은 1931년부터 1936년 사이에 대통령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는데 이는 다 교황청의 카톨릭 농간에 의한 것이었다. 이에 스페인 정부는 카톨릭에 격분하여 스페인에 있는 카톨릭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고 공립학교에서 신부나 수녀가 강의를 못하게 했다. 스페인 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곧 교황청의 철저한 보복을 초래하게 되었다. 교황청은 그들의 도전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가 철저하게 보복하였다.
이어서 교황청은 이슬람 지도자들을 불러서 옛날 예루살렘을 교황청에 넘기지 않은 빚을 갚을 것을 요구하였고 정교 조약을 내세우며 스페인 징벌을 요청하게 되었다. 프랑코 장군의 지휘하에 약 400만명이나 아랍 군대가 징집되었다. 교황청은 엄청난 재정을 지원하면서 이슬람 군대를 스페인에 파송하였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이 전쟁을 스페인 내전이라 하지만 이는 순전히 카톨릭 교회가 꾸며낸 이야기다.
교황청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인 이슬람 군대는 카나리 제도와 남부 스페인을 공격했다. 스페인 국민들은 페트로스 세거라 추기경이란 사람이 이슬람 군대를 지휘하면서 카톨릭을 거부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무차별 죽이는 것을 보고 전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하여 교황청은 스페인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버리고 다시 스페인은 교황청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는 예수회와 언론을 동원하여 교황청과 마리아가 도와서 스페인을 공산주의부터 해방시켰다고 거짓 선전을 했다. 이 전쟁을 전후로 교황청과 이슬람교 사이에는 피하지 못할 조약이 들어 있는데 그것은 절대로 교황청이 이스라엘을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지금도 교황청은 이스라엘을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진정한 종교는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며 현재 세계정세를 둘러보게 된다.
5. 유일신을 믿는 세계 3대 종교의 비교
세 종교의 공통점은 유일신을 믿는 일신교라는 점이다. 원래 이 세 종교는 출발부터가 인류 최초로 유일신을 믿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세 종교 모두 아브라함을 자기들 종교의 최고 조상으로 섬긴다. 다만 유일신을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유대교서는 신을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처음 하나님이 직접 모세에게 가르쳐준 이름은 '나는 나다'라는 의미의 '에헤으아세르 에헤으'였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감히 신의 거룩한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된다고 믿어서 유대인들은 신의 이름을 발음하려 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YHWH'를 '야훼' 혹은 '여호와'라 부르나 한국 기독교에서 가톨릭은 '하느님' 그리고 개신교는 '하나님'이라 칭한다. 이슬람교는 '알라'라 부른다. 모두 같은 분이지만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조금 깊이 들어가 보면 유대교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직접 신과 계약을 맺은 것을 믿는 유대민족의 종교다. 반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종교로 이를 받아들이면 누구나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 이보다 늦게 생긴 이슬람교는 예수를 구세주가 아닌 예언자로 인정하고 무함마드를 최후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로 보는 종교다. 뿌리가 같기 때문에 당연히 이들 종교는 모두 <구약성경>을 <성경>으로 믿는다.
세 종교의 경전을 보면, 유대교는 <구약성경>과 <탈무드>이며, 기독교는<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이슬람교는 <토라>와 다윗의 시편, 예수 복음서 그리고<코란>이다, 그런데 이슬람교에서는 <코란>을 제외한 세 개는 후대에 일부 내용이 변절 되었다고 본다.
또 세 종교는 공히 죽은 다음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 개념을 발전시켰다. 초기 유대교는 '야훼의 날'을 강조했다. 이를 '마지막 날'이라고도 한다. 유대교에서는 '마지막 날'이라는 용어는 메시아가 도래할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믿음을 상징한다. 다른 종교들도 부활과 구원에 관한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을 심판하는 날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하나님’이라는 동일한 신을 믿는 형제 종교이자 세계적인 거대 종교로서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내세우는 사랑과 자비, 복음과 구원과는 다르게도, 작금의 현실은 갈등과 반목으로 점철되어 있다.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비극의 그 끝은 어디인가?
(1) 기독교는 탄생
예수가 공생활을 시작한 이후 복음 전파를 위해 최초로 뽑은 열두 명 제자는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인 요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타대오라고도 불리는 유다 그리고 빌립, 바돌로메, 도마, 세리 마태, 가나안사람 시몬, 가롯 유다다.
예수를 믿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면서 박해도 그만큼 심해졌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와 사마리아로 퍼졌다. 이때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사울이란 사람이 있었다. 사울은 예수가 다윗이 예언한 구세주이며, 이사야 선지가가 예언한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고 선전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격분했다. 더욱이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3일 만에 부활시켰으며, 유대인들이 이러한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해줄 것이라는 말에 분노했다.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거룩한 성전과 율법을 거스르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메섹 그리스도인들을 감옥에 잡아넣기 위해 산헤드린의 정식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게 되었다.
이렇게 예수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대적하던 바울이 기독교의 세계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는 복음을 이방 세계에 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그는 구원의 의미를 '은혜'중심으로 설명함으로써, 유대 관습에 낯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데 성공했다. 신약성경 복음서를 제외한 대부분을 사도바울이 기록한 말씀이다.
(2)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
유대교와 기독교가 극명하게 다른 점이 있다. 유대는 유대인에 한정된 종교인 반면 기독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계기로 전 인류의 구원을 지향하는 보편적인 종교로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구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런 율법을 지키면 구원하겠다'라는 약속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계명이나 율법을 지킬 수 없어 모두 하나님의 심판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약속 곧<신약>을 받았다. 그것이 예수 그리도를 믿는 것이다. <구약>은 어떻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느냐 하는 문제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했다면 <신약>은 예수가 그리스도 곧 구세주임과 하나님께서 보낸 독생자임을 알게 하고 그를 왜 믿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안내서다.
(3) 이슬람교의 출현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570년 메카에서 태어날 당시 아랍 세계는 한마디로 사막에서의 삶이 한시도 편하지 않는 유목민이었다. 그들은 사막의 혹독한 기후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낙타와 양떼를 몰며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자기 종족 이외에는 아무 책임의식이 없었다. 이러한 궁핍한 생활은 그들의 행동을 공격적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전투에서의 용맹, 부족공동체에 대한 충성심, 약한 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관용 등 남성다운 태도와 여행자와 손님에 대한 환대 등을 으뜸가는 미덕으로 여겼다. 한편으로는 미신이 유행했다.
무함마드는 자기가 받은 계시에 따라 유일한 알라의 종교인 이슬람교를 포교하는 데 나섰다. 그는 우선 아내에게 알라에 대해 알려주었다. 다음에는 열한 살 난 사촌 동생에게, 그다음에는 하인에게 설교했다. 그는 이처럼 주변 사람들로부터 시작해 613년 공적인 자리에서 가르침을 시작했다.
이슬람의 경전 코란은 무함마드가 알라로부터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인정되는 공식적인 이야기들을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이슬람교는 이를 두고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신의 참된 말씀이라고 말한다.
이슬람교의 경전은 <토라>, <자브르>, <인질>, <코란>이다. <자부르>는 다윗의 시편이며 <인질>은 예수의 복음서다. 하지만 이 경전들은 유대교나 기독교의<성경>과는 많이 다르다.
-<코란>은 아랍어 동사 '읽다'에서 파생된 단어로 '읽는 것' 곧 독경이란 뜻이다. <코란>은 무함마드에 의해 외워져 추종자들에게 전달되었다. <코란>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문맹자다. 그는 글을 쓰거나 읽지를 못 했다. 그런데도 무함마드는 알라의 계시에 의해 이를 외웠으며 그 추종자들이<코란>을 기록했다고 한다.
(4) 이슬람교는 성장배경
무함마드가 아들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자 이슬람교는 장로 중에서 칼리프를 선출했다. 초대 칼리프는 무함마드의 부인 다음으로 첫 제자가 된 무함마드의 친구 아부바크르였다. 그는 메카에서 부유한 상인 출신으로 아내를 잃었던 무함마드에게 자신의 딸인 아이샤를 내준 인물이다. 그는 강대했던 동로마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와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면서 후에 거대한 이슬람 제국 건설의 기반을 닦았지만 아쉽게도 칼리프 자리에 오는지 2년 만인 634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5) 이슬람교 종파들
종파분열의 역사는 632년 무함마드의 죽음으로 이슬람 세계는 위기에 직면한다. 뒤를 이을 아들이 없는데다 후계자 선정도 하지 않은 채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통성이라는 화두가 이후 이슬람교 역사를 지배하게 된다. 무함마드 사후 후계구도는 피로 얼룩졌고, 그에 따른 갈등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칼리프라는 선출제를 중요시하는 수니파로 사우디아라비아가 종주국이고 혈통을 중요시 하는 시아파는 이란의 종주국인데 이들 간의 갈등도 여기서 출발한다.
6 이슬람교의 진실
사실로 들어가보면 성지순례는 이슬람에서 만든 제도가 아니라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만들기 전부터 이교도들이 행해왔던 풍습이었다.
또 카아바 신전도 처음부터 알라(Allah)만의 신전이 아니라 아라비아 반도의 각 종족들이 섬기던 360개 우상들의 집합소였다.
무슬림들이 성지순례를 사모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물론 평생 한 번은 메카를 방문해야 한다는 율법이 있기는 하지만 그 보다는 성지 순례와 메카의 카아바 신전 자체를 신성시하는 이슬람의 문화가 시대에 따라서 점점 발전,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아무리 비천한 신분의 무슬림일지라도 사우디아라비아로 성지순례를 다녀오기만 하면 호칭이 바뀐다.
사람들은 그를 미스터 아무개 혹은 미스 아무개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지(Haji) 아무개라고 부른다. 이것은 성직자가 아닌 무슬림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경칭이다.
내막을 물었더니 최근에 메카의 성지순례를 다녀온 사람이 사는 집인데 성지순례는 그 동네의 경사라서 주민들을 초청해서 성대하게 잔치를 벌인다는 것이었다.이란 뿐 아니라 중동에는 “하지아바드”라는 마을 이름을 여러 군데서 발견하게 된다. 이는 ‘성지순례 다녀온 사람(하지)이 사는 마을(아바드)’이라는 의미다. 그 동네의 원래 이름이 있음에도 성지순례를 다녀온 사람이 그 동네에 있으면 그 때부터 하지가 살고 있는 마을 즉 “하지아바드”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처럼 성지순례를 하는 것은 개인과 가문 뿐 아니라 마을의 명예와도 관련이 있는 행사이기 때문에 무슬림이라면 모두가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1) 무슬림들이 특히 성지순례를 열망하는 이유는?
방금 위에서 명예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본의든 아니든 많은 실수와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데 이슬람의 제2 경전으로 잘 알려진 부카리의 하디스에 의하면 무슬림이 성지순례를 하게 되면 방금 태어난 어린아이처럼 죄 없는 상태로 돌아간다고 한다.(Sahih Bukhari Volume 2 Book 26 Number 256) 그러므로 특히 죽음을 앞 둔 노약자들이 성지순례를 선호하는 것은 평생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기도 하다. 해마다 압사 사고로 대형참사로 커지는 원인들 중의 하나는 순례자들 중에 병약한 노약자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다면, 이슬람들의 메카 성지순례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사실 무함마드가 메카를 본격적으로 이슬람 성지로 인정한 것은 624년 초부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무함마드는 어려서부터 메카의 꾸라이시 족에서 성장했기에 자연스럽게 카아바 신전 순례를 따라 하면서 자랐다.
꾸라이시 족이 섬기던 알라(Allah)도 메카에 모셨던 360개 신들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어디까지나 이교도들의 풍습이었다. 무함마드가 610년 메카 주변의 히라 동굴에서 천사를 통해 알라(Allah)신의 첫 번째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 이후에도 그가 메카에 머물렀던 12년 동안에는 이교도들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그들의 신앙전통을 따라 카아바 신전을 순례했었다.
그런데 메카에서 이교도들의 핍박이 심해지자 그는 622년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메디나로 이주한다. 이를 히즈라(Hijra)라고 하는데, 이는 이슬람의 원년이며 이슬람 달력은 이 때 부터 시작된다.
메디나에 간 무함마드는 그곳에서 유대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무함마드는 자신도 같은 창조주를 믿는 선지자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 증표로 그들과 같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말하는 알라의 계시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 말씀과 심각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한 유대인들은 그가 선지자라는 것을 믿지 않고 그를 비웃으며 배척했다(꾸란15:6).
성서를 가지고 있다면서 자신(무함마드)의 계시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한 악담과 저주가 꾸란에 많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약18개월 동안 유대인들과 같이 예루살렘 방향으로 기도하던 무함마드는 메디나의 통치권을 장악한 이후 처음 맞는 해인 624년 초부터 기도의 방향을 메카로 바꿔 버렸다. 이는 자신을 배척하는 유대인들과의 결별을 선언하며 적으로 여기겠다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예루살렘 쪽으로 기도하던 무함마드가 우상들의 도시 메카로 기도 방향을 바꾼 이유에 대해 무함마드는 꾸란에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가 언급한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알라는 전능하니까 바꿀 수 있다(꾸란2:148).
둘째, 알라는 동에도 계시고 서에도 계시니까 바꿔도 된다(꾸란2:142).
셋째, 진짜 중요한 이유는 너희가 정말 알라와 무함마드를 따르는 무슬림들인가, 아니면 따르는 척하는 위선자들인가를 구분하기 위해서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꾸란2:143).
그래서 624년부터 지금까지 모든 무슬림들은 메카를 향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 당시 메카의 카아바 신전 안팎에는 360여개의 우상들이 있었다. 메카의 성지순례를 이교도들이 해오던 방식으로 그대로 유지한 것은 이교도들이 이슬람을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타협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무함마드는 이 성지순례를 처음부터 모든 무슬림들의 의무라 하지 않고 사파와 마르와 언덕을 오르내리면서 성지 순례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넌지시 묵인했다(꾸란2:158).
심지어 무함마드는 카아바 신전 동쪽 구석에 있는 검은 돌에 입을 맞추는 이교도들의 순례 방식을 그대로 따라 했는데, 이 검은 돌은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으로서 이교도들이 신성시하여 순례하며 입을 맞추던 것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무함마드의 장인이자 이슬람의 두 번째 칼리프였던 우마르는 성지 순례 시 검은 돌을 향하여 “이 돌멩이야! 내가 알라의 이름으로 말하는데 나는 네가 누구에게 은혜를 베풀거나 해를 끼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선지자 무함마드께서 네게 입을 맞추지 않으셨다면 나는 절대로 너를 만지지도 않았을 것이다.”라며 입을 맞추고는, “우리가 이교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라말(Ramal:카아바 신전을 돌 때 처음 세 바퀴를 빨리 걷는 의식)을 할 이유가 없다. 알라께서는 이런 것들을 다 파괴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께서 그렇게 하셨으니 우리는 그것을 떠나기를 원치 않는다.”라고 말했다.(Sahih Bukhari Volume 2, Book 26 Number 675)
이런 기록들은 지금의 이슬람 성지순례가 유일신 종교를 자칭하는 이슬람 고유의 종교 의식도 아니고 무함마드가 새롭게 만든 의식도 아니며 오히려 이슬람이 배척하고 있는 이교도들과 우상숭배자들의 풍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2) 이슬람교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한 진실
메카 성지순례의 모든 행위들을 아브라함과 관련된 이야기로 만들어 놓았다. 거기에 속아서 신앙생활을 오래 한 기독교인들조차 이슬람을 아브라함의 종교라고 칭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꾸란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은 성경의 아브라함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성경의 아브라함은 데라의 아들로서 99세 때부터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바꿔주셨는데(창17:5), 꾸란의 아브라함은 아자르의 아들(꾸란6:74)로서 어려서부터 아브라함으로 불렸다(꾸란21:60).
성경의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지금의 예루살렘)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렸던 사람이었으나, 꾸란의 아브라함은 메카 부근에서 이스마엘을 번제로 드리려던 사람이었다(꾸란37:102-106). 성경의 아브라함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부근을 방문한 일도 없었는데, 꾸란의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함께 메카에서 카아바 신전을 건축했다고 한다(꾸란2:127).
성경의 아브라함은 경전을 받은 일이 없는데, 꾸란의 아브라함은 모세처럼 경전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한다(꾸란87:18). 꾸란의 아브라함은 이교도들이 죽이려고 불속에 던졌는데 알라께서 건지셨다고 한다(꾸란21:68-69). 심지어는 양을 잡는 풍습도 아브라함이 아들을 번제로 드리려던 일과 관련시켜 놓았고, 사탄에게 돌을 던지는 풍습도 아브라함과 관련시켜 이야기를 만들어 놓았다.
이는 꾸라이시 종족이 섬기던 알라(Allah)신을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의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로 믿게 하려고 예루살렘의 아브라함을 메카에 적용시킨 것으로,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사파와 마르와 언덕을 일곱 번 왕래하는 것은 성지순례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서, 그곳은 무슬림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이스마엘과 그의 모친 하갈이 물을 구하기 위해서 방황했던 언덕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하갈과 이스마엘이 사해바다 남서쪽에 있는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했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창21:14).
이슬람의 역사에는 젖먹이 이스마엘이 사막에서 목말라 하자 하갈이 물을 찾아 사파와 마르와 언덕을 일곱 번 왕래하면서 헤매고 있을 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발꿈치 혹은 날개로 땅을 파니 샘이 솟아 나왔다고 한다. 이를 잠잠(Zam zam) 우물이라고 부르는데, 카아바 신전 동쪽 20미터 지점에 있으며 무슬림들은 이를 거룩한 물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이와는 전혀 다르게 나타나 있다. 아브라함이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았고(창16:16), 그를 내쫓은 것은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이 젖을 뗀 후이니(창21:8), 당시 이스마엘은 17세쯤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큰 아이를 젖먹이라고 부를 리가 없다. 성경에는 천사가 ‘없던’ 우물을 새로 팠다는 기록도 없으며, “주께서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이미 있었던’ 샘이 보였다고 말씀하고 있다.(창21:19)
성경의 이스마엘은 바란 광야에 살았으며 애굽 여인을 아내로 삼았다고 기록되었는데(창21:21), 이슬람의 이스마엘은 메카 부근에 살았으며 주르훔 족의 아랍 여인을 아내로 삼았다고 한다(Sahih Bukhari volume4, Book55, Number584).
성경의 아브라함은 메카 쪽으로 간 일이 없고 가나안 땅에서 이스마엘을 추방한 후 죽을 때까지 그를 다시 만나지 않했다. 그러나 이슬람의 역사에 보면 아브라함은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를 최소한 다섯 차례나 방문한 것으로 나와 있다.
첫째 방문: 하갈 모자를 추방할 때 메카까지 데리고 와서 버리고 갔다고 한다(Sahih Bukhari Volume4, Book55 Number584).
두번째 방문: 이스마엘을 번제로 드릴 때 메카 부근에 와서 번제로 드렸다고 한다(꾸란37:102-106).
세번째 방문: 카아바 신전을 지을 때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같이 지었다고 한다(꾸란2:127).
네번째 방문: 이스마엘이 처음 결혼한 여자가 마음에 안 든다며 아브라함이 이혼을 명했다고 한다(Sahih Bukhari volume4, Book55, Number584).
다섯째 방문: 아브라함의 명령에 따라 이스마엘이 첫 번째 아내를 버리고 다른 아랍 여인과 결혼을 했더니 아브라함이 다시 와서 그녀를 보고 만족해하면서 축복했다고 한다(Sahih Bukhari volume4, Book55, Number584).
아브라함이 성경말씀대로 가나안 땅에 살았다면 직선거리로 1,000Km도 넘는 거리를 100세가 넘는 노구를 이끌고 어떻게 다섯 번이나 왕래할 수 있었을까?
지금처럼 고속도로가 깔려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을 진리로 믿고 있는 무슬림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들은 결코 우리가 미워하거나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다.
그저 그 땅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부모님과 선생님으로부터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속아왔던 피해자들이다.
오랜 세월 속아왔던 무슬림들에게, 죄 사함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방문함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얻어지는 것임을 알려줘야 한다.
사막에 천사가 내려와서 기적을 일으켜 잠잠(Zam zam)이라는 새 우물을 파줘야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와 있는 생수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줘야 한다. 그래서 수많은 무슬림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구원에 동참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그들도 살고 우리도 사는 유일한 상생의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너무나 종교적이고 너무나 경건하고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한다고 보는 무슬림들이야말로 정말 거짓 종교를 진리처럼 믿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그들이 믿는 알라는 전혀 다른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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