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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년간 흩어졌던 유대인들은 어떻게 이스라엘을 건국했는가?
    종말 2018. 6. 27. 14:15

    2000년간 흩어졌던 유대인들 어떻게 이스라엘을 세웠는가? 

    사43: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할 것이요  남쪽에게 이르기를 붙잡아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 데려오고 내 딸들을 땅 끝에서 데려오라 하리니  

    유대인의 역사가 요세푸스가 기록한 유대전쟁사’에 의하면 유대는 로마지배에 저항하면서 3차례나 전쟁을 하였다. 1차는 70년, 2차는 113년, 3차는 133년 유대전쟁이 있었다, 1차 2차 전쟁에서도 수많은 유대인들이 살육당하고 노예로 끌렬 갔지만 특히 바르 코크바의 반란 (132~135)으로 시작된 3차 유대전쟁은 제14대 로마 제국의 황제

    하드리아누스(117년~138년)가 130년에 유대지역 방문해서 유대인에게 割禮를 금한 것과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 로마의 신 주피터 神殿을 지었던 정책에 대한 유대인의 반감으로 일어났던 반란이다. 이 3차 전쟁의 결과로 사망자는 약 58만명이며 985여 개의 마을이 廢墟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항상 로마제국에 반대하는 항쟁의 진원지가 되기 때문에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을 비롯한 전지역에서모든 유대인을 추방했고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므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완전히 떠나도록 명하였다. 135년 이후에는 예루살렘에 유대인이 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후 2000년 동안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을 떠나 전세계에 흩어져 살게 된 것이다.

    Ⅰ. 시온주의의 태동  

    이스라엘의 건국은 나라를 잃고 전세계에 흩어져 유리 방랑하던 유대민족이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에 돌아와 나라를 세우려는 시온주의 운동의 결실로서 이루어졌다. 이 시온주의 운동은 19세기 중엽부터 헤스, 핀스커, 헤르쩰등과 같은 유대민족 선각자들에 의해 제시되었고, 다음 세대들이 이 비젼을 발전시켰다. 자신들의 민족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시온주의의 활동은 19세기말 데오도르 헤르쨀에 의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1896년 유대인 문제는 오직 유대국가 건설만으로 해결된다는 요지의 소책자 '유대국가'(Der Judenstaat)를 저술한다. 이 책자는 유대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켜 1897년에는 그의 주도로 스위스 바젤에서 2백여명의 유대인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제1회 시온주의 총회가 개최되고 '국제법의 지지를 얻어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을 위한 국가건설을 시온주의의 목표'로 결정한다.

    II. 이스라엘의 건국과 국가발전  

    한편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는 물결은 이미 1882년부터 시작되었다. 유대민족의 귀환사는 보통 1882년부터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한 1948년까지 시대별로 5대 이민군으로 구분한다. 즉, 1차 1882-l903 (20,000-30,000명), 2차 1904-1914 (35,000-40,000명),

    3차 1919-1923(35,183명), 4차 1924-1931(81,613명),

    5차 1932-1948(366,061명)인데, 2차와 3차 대이민시 들어온 귀환자들이 이스라엘 건국을 이루어 내는 지도 세력을 형성한다. 특히 2차 대이민시에 들어온 벤구리온 (David Ben-Gurion: 초대수상), 벤-쯔비 (Yitzhak Ben-Zvi: 2대 대통령), 쉬프린작 (Yosef Shprinzak: 초대 국회의장)등이 1920년대부터 각종 유대민족의 자치조직들을 결성하여 팔레스타인 시온주의 운동 지도자로 부상한다. 이들은 주로 러시아와 폴란드등 동구권출신 유대인인데 조상의 뼈가 묻혀있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꿈을 안고 돌아와 정착한 사람들이며, 대부분 비 종교인이다. 19세기말 부터 러시아, 폴란드등 이곳 동구권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이 시작되자 시온주의 운동에 공감한 일부 청년들은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에 돌아와 민족국가 재건의 꿈을 키워간다. 벤구리온을 정점으로한 유대민족 지도자들은 세계의 이곳 저곳에서 돌아오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정착시키는 한편 준국가적인 기구들을 조직하고, 지하 군사 조직을 창립하면서 독립 국가 건설을 위한 주춧돌을 놓아 간다. 벤구리온을 비롯한 이들 지도 세력은 1920년대부터 유대 민족의 지도자로 부상하여 1948년 독립국가 건설에 성공하였다. 이스라엘의 독립을 유엔에서 결정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독일 나치히틀러가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유대인 약 600만명(유럽 전체 유대인의 80%)을 집단 학살한 것이 전세계 알려지면서 유대인들을 혐오하던 대부분 유럽 국가들이 유엔에서 이스라엘독립을 지지하므로써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를 세우게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나치 독일에 의해서 유럽전체 유대인의 80%정도가 학살당하는 민족적 재앙이 역설적으로 유대 민족이 팔레스타인 땅에 돌아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결국 이스라엘 건국의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비종교적인 학자들은 유대인 6백만 학살과 2차례의 세계대전등 극히 일어날 확률이 낮은 연속적 우연한 사건의 발생으로 유대민족의 대대적인 귀환과 이스라엘의 건국이 가능했음을 인정한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인정할 때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 하나님의 손길이 작용했음을 믿을 수밖에 없다.

     

    유대 민족 지도자들은 이러한 역사적인 큰 흐름에 바탕하여 인류역사상 보기 드문 기적을 창출한 것이다. 이들은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이후 전개된 아랍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므로 시온주의 운동의 기본적인 목표 달성에 성공한다.

    1882년 팔레스타인 땅의 유대인 인구가 2만 4천명에 불과하던 것이

    1948편 65만명(이스라엘 전체 인구 87만명)으로 늘어났으며,

    지금은 유대인 500만명 아랍인 120만명 (2000년 통계) 총 620만명 종교별 : 유대인 480만명 모슬렘 90만명 기독교인 13만명 드루즈 10만명 기타 13만명. 출처: "Statistical Abstract Of Israel 2000"

    전세계의 유대인 인구에 대한 팔레스타인 인구의 비율도 1882년 0.3%에서 1948년 5%, 그리고 현재 35%로 늘어나 이스라엘이 명실공히 유대 민족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당시 벤구리온 수상은 독일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배상금을 받아 필요한 재정에 충당했으며, 미국, 유럽등 해외에 있는 유대인들의 모금 운동과 자원 봉사를 통한 헌신 역시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지도자들의 리더쉽, 국가 발전을 위한 국내외 유대인들의 열정, 그리고 당시 국제 경기의 호황에 힘입어 이스라엘은 1961년 우리 나라의 1인당 국민 소득이 73 달러에 불과할 때, 이스라엘은 이미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서 1인당 국민 소득이 814 달러를 기록했다 (당시 일본의 1인당 국민 소득은 502 달러였다)- 1996년 이스라엘의 1인당 국민 소득은 16,800 달러다. 이스라엘 경제는 최근 회복되어 높은 경제 성장률을 보이고 있는 이스라엘은 GNP의 24% 가량을 국방비에 투입하면서도 (일본 0.9%, 미국과 한국은 약 5.6%). 과학 기술, 문화, 교육등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III. 아랍 제국과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 평화

    해외에 있는 유대인의 귀환과 국가 경제, 사회 발전이 이스라엘 정부가 항상 중요하게 여기는 정책이지만, 유대 민족이 극복해야 할 최대의 난제는 아랍 제국과 생존을 건 투쟁에서 살아 남는 것이다.

    1948년 5월 14일 독립이 선언되고 나서 24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사우디 아라비아 그리고 이집트 6개국은 신생 독립국 이스라엘을 향해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이스라엘은 8개월간 계속된 독립전쟁에서 유대인 인구의 1%에 가까운 6천명이 전사했다. 그리고 대부분 지역에서 아랍 연합군 부대를 물리쳤으나, 유대 민족의 최대 성지인 통곡의 벽 등 구 예루살렘 성안 유대인 지역을 요르단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그러나 이 독립 전쟁은 시작에 불과했다. 1950년대 들어 이집트에서 나세르 대통령에 의해 범아랍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군비를 증강시킨 끝에 1956년 이집트가 수웨즈 운하를 국유화함으로서 위기가 조성되자 이스라엘은 '시나이 작전'이라는 이름 하에 순식간에 시나이 반도를 점령함과 동시에 최신 장비로 무장한 이집트군을 무력화시킨 후 휴전 협정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결시킨다.

    당시의 벤구리온 수상은 문제의 소지가 될 시나이 반도를 즉각 돌려주었지만 당시 기세 등등하여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나세르 대통령의 기를 꺾는데 성공했다. 독립 전쟁을 포함 6차의 중동전중 [독립전쟁 (1948), 시나이작전(1956), 6일전쟁(1967) 이집트와의소모전 (1968-1970), 10월(욤 키푸르)전쟁(1973), 레바논전쟁(1982)]

    현대 이스라엘 역사의 분수령이 된 것은 6일 전쟁이다. 애꾸눈의 모세 다얀 장군이 국방 장관으로서 활약한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로부터 골란 고원, 가자 지구, 요르단 서안 지구 시나이 반도 등 자기 영토의 3배나 넘는 넓은 지역을 점령한다. 통곡의 벽을 다시 탈환하는 감격을 맛보며 순식간에 감람산, 구 예루살렘성, 베들레헴, 헤브론, 세겜, 여리고 등 자기 민족의 성지들을 순식간에 점령해 버렸다. 이제 이스라엘은 비록 조그만 영토와 인구를 가진 소국이지만 중동 지역에서는 그 누구도 상대하기 어려운 군사 대국으로 부상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며 자만심에 빠져있던 이스라엘의 허를 찔러 치욕감을 안겨준 전쟁이 1973년 10월에 발발한 10월(속죄일)욤키프로 전쟁이었다. 수에즈 운하를 따라 설치되어 난공 불략의 요새라고 자랑하던 바르 레브 선 (Bar Lev Line)이 이집트 군의 기습 공격에 힘없이 무너지고 속죄일을 맞아 손을 놓고 있던 병사들은 전선 곳곳에서 패퇴하여 전사하였다. 골란 고원에서는 시리아군의 탱크 공격에 곤욕을 치렀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열을 가다듬은 이스라엘 군은 미국의 신속한 무기 보급과 미군 첩보 위성의 도움을 받아 결국 시리아와 이집트를 격퇴하는데 성공했으나, 많은 사상자를 내는 등 엄청난 댓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절망적이던 화약고 중동에 평화의 싹이 돋는 계기가 되었다. 다섯 차례에 걸쳐 아랍 제국의 선두에 서서 이스라엘과 싸운 끝에 상처만 얻고 빚더미에 눌리게 된 이집트가 소련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미국의 도움을 걷어 이스라엘과 평화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1977년 메나헴 베긴 총리는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을 이스라엘에 초청하고 1977년 ll월 20일 사다트 대통령은 적국 이스라엘의 국회인 크네세트에서 극적인 연설을 함으고서 전쟁의 악순환의 고리를 풀고 평화에의 물꼬를 텄다.   

    1979326일 이스라엘과 이집트간에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 의해 이스라엘은 유일하게 석유가 나던 시나이 반도를 1982년까지 이집트에게 돌려주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간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 (1979년)을 시작으로 1993년 오슬로 합의를 시작으로 두 민족간 평화과정이 진행되어 왔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평화과정은 이츠학 라빈 전 총리의 암살, 네탄니야후 강경우파 리쿠드당의 집권, 수많은 유혈 테러 사건의 발생에도 불구하고 당초 일정보다 지연되긴 했습니다만 8년 가량이 지난 지금까지 이 평화과정은 꾸준히 진행되었다. 한편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간의 관계도 요단강 서안과 가자지구 43%지역에서 철수했고, 이 지역에 팔레스타인 자치가 실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두민족간 평화과정의 마지막단계에 와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측에서는 외교, 국방권을 행사할 수 있는 독립국가를 이스라엘이 1967년 점령했던 요단강 서안과 가자 전지역에 창립하겠다. 이스라엘은 점령지역 거의 전역(98%)에서 철수하라. 수도는 동 예루살렘이라고 요구하고 있으나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점령지역 중 43% 정도 철수했는데, 더 이상은 안되며 동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고 유대교 성지로서 조금도 내줄수 없다. 정착촌 하나도 철거하지 못하겠다. 이런 강경한 입장입니다.

    IV. 이스라앨 건국과 생존의 요인

    유대 민족은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핍박과 고난, 민족 멸절의 위기를 극복하고 결국 독립 국가 재건에 성공한 것은 기적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이스라엘은 1948년 독립한 이래 아랍 제국과 여섯 차례의 중동전을 치르는 등 수많은 도전과 위기를 극복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기술등 각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유대 민족의 성공 요인은 무엇인가? 600만의 이스라엘이 어떻게 2억의 아랍 제국과 싸워 독립을 지킬 수 있었는가?

    (1)유대 민족은 우리 한민족처럼 명석한 두뇌와 높은 교육열을 꼽을 수 있다. 세계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민족이며, 미국 유명 대학 교수진의 20%를 유대인 교수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곳 이스라엘의 과학 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율 역시 그 어느 나라보다도 높다. 노동 인구 1만명 당 자연과학 분야에서 석사 이상의 학위를 소지한 자가 4.6명 (미국 2.6명, 일본 0.5명, 영국 2-5명이며, 국제적인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는 비율이 노동 인구 1만명 당 60명 (미국 30명, 일본 12명 영국 30명 독일 23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2) 유대 민족의 창조성과 교육 우선의 문화 형성에는 구약 성경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성경은 유대 민족 신앙의 경전이자 가장 기본적인 법규범이며 그들 민족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들은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 성경과 함께 좀 더 구체적인 관습과 전통을 규범화시킨 구전 율법(미쉬나)에 토론과 설명이 덧붙여져 편찬된 것이 탈무드이다.

    유대 민족은 성경과 탈무드 공부를 통해서 학문과 교육을 중시하고 생활화하는 문화와 전통을 창조, 계승해 왔다. 성경 연구를 통해 히브리어가 보존될 수 있었다. 민족 종교인 유대교, 성경과 탈무드 공부가 생활화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교육과 학문 중시의 전통, 선민 의식, 그리고 핍박과 고난의 삶 가운데서 형성된 가족주의와 민족 유대감, 이러한 요소들이 지난 2천년간 자신의 민족성을 지니면서 민족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도자들의 리더쉽이야 말로 민족 내부의 다양한 갈등을 조정하고 민족의 에너지를 결집시켜 민족들을 도전과 기회에 창조적으로 응전하게 하므로써 2천년만의 독립국가 재건이라는 기적을 가능케 했다.

    (3)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탁월한 지도력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 지도층의 부정과 부패 현상을 거의 볼 수 없고, 개인의 이익보다 민족과 국가의 이익을 우선하는 이스라엘 지도층의 삶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유일한 슈퍼 파워로 등장한 미국의 지원과 해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의 도움 역시 큰 힘이 되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에게 유리하게 전개된 국제 정세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조건들이지만, 이러한 조건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고 극대화 시키는 지도자들의 탁월한 지도력을 빼놓을 수 없다.

    최 창 모 (건국대 히브리학과)

     

     

    Ⅴ. 이스라엘의 건국의 근원은 약속의 성취 

    역사는 모든 학문의 기초이자 중심이며 또한 모든 학문이 역사로 통한다. 우리가 왜 한국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것은 한국인은 한국의 얼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모국어인 한국말과 한국의 역사를 통해서 한국의 얼을 획득할 수 있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공부하려면 히브리어를 통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성경을 이해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 할 수 있다.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을 수는 있지만 이스라엘의 고대사는 주로 성경의 기록과 일치한다. 성경이 역사책은 아니지만 역사적인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중요한 역사사료이다. 이스라엘 역사를 구성하고 있는 역사 사료들로 성경, 탈무드, 요세푸스가 쓴 유대전쟁사 같은 역사책들이 있다.

    성서에서 말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곧 이스라엘 역사의 시조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지금의 이라크, 메소포타미아 사람이다.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티그리스 강을 따라서 남쪽으로 약 400km 내려가면 우르라는 곳이 있는데 성경은 이곳이 아브라함의 고향이라고 말한다. 고대어로 메소포타미아라 일컫는 갈대아는 인류 4대 문명 발상지 중 가장 오래 된 곳이다. 아브라함은 대략 BC 18세기경의 사람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메소포타미아의 아브라함의 본향인 우르는 당시 현대로서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문명을 꽃피우던 장소였다. 아브라함은 문명의 한복판에서 살던 사람이었다. 여기서 세계의 가장 우수한 문학, 역사, 신화, 종교를 공부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우르 사람들이 다 문명인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곳으로부터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굉장히 먼 길을 지나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가나안에서 아브람함이 100년간을 살았는데 100년 동안 가장 중요한 사건은 말한다면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은 것이    창15장에 나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는 것을 믿었을 때 이어서 하신말씀이 나는 이땅을 네게 주어 상속하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데리고 나온 주니라(창15:7) 그리고 이 가나안 땅을 주셨다는 것을 하나님과 계약을 한것이 9절에 나온다. 창15:9 나를 위하여 삼년된 암송아지와 삼년된 암염소와 삼년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여 10그것들을 중간에서 나누고 각각의 조각을 마주 보게 놓았으나 새들은 나누지 아니하였더라 17절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오르는 등불이 그 조각들 사이로 지나가니라 18절  바로 그날에 주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며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씨에게 주었노라 는  말씀을 확인시켜 준 것 이 이스라엘 건국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아브라함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은 것은 세월이 가도 유효한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은 곧 이주민의 역사다.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왔는가 우리의 영은 하늘에서 와서 다시 하늘로 가는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무엇인가 잠시 있다가 떠날 나그네가 머무르는 장소이다. 이는 성경의 신앙 고백의 시초이다. 그것은 곧 이스라엘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시초는 본토민들의 역사가 아닌 이민자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왜 자기 백성의 역사를 다른 나라 사람을 데려다가 시작하셨을까?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민자로부터 시작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끊임없이 모으셨다가 때로는 흩어지게 만드셨다가 다시 역사를 형성하게 하는 반복의 역사였다. 신앙적 입장에서 말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세계를 구원하셔야 했다. 그런 선교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아주 고난이 많았다. 훈련은 곧 고난이다.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들은 이처럼 고난이 많다. 

    유목민들의 삶의 형태는 족장 중심의 부족사회로 대부분 물과 목초지를 따라 떠도는 떠돌이였다. 아브라함 이하 이삭, 야곱은 모두 족장으로 족장의 말은 곧 법이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는 족장들이 있는데 그들의 권위는 참으로 대단하다. 이스라엘의 선거철이 되면 정치가들이 그들 족장을 만나 표를 놓고 흥정을 하게 된다. 성경의 역사를 보면 부족과 다른 부족들간의 분쟁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이삭 시대에 브엘세바의 아비멜렉과의 충돌도 그러한 한 예이다.

    만약에  부족간의 충돌에서   계약을 위반하면 그 지역에서 살수가 없게끔 되어있다.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은 계약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계약을 하신다. 계약을 위반하면 그것은 곧 죽음뿐이다. 그것이 곧 죄의 개념이다. 그래서 창세기 15장에서처럼 계약 당사자들끼리 계약할 때 참 흥미로운 방식으로 계약을 한다. 양쪽에 제단을 쌓아놓고 소를 한 마리 잡아서 각을 떠서 반쪽은 저쪽에 반쪽은 이쪽에 놓고 두 계약 당사자가 그 가운데 서고 계약 문을 읽는다. 그리고 두 당사자는 반 동강난 제물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이 재물에 불을 피우고 하늘에 그 연기를 올려 보낸다. 이것이 곧 창세기 15장의 계약 방식이었는데 이것이 곧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두 사람 중에 한사람이 계약을 위반하면 반 동강난 동물처럼 그 당사자도 죽게 되리라는 것을 서약하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 증인들이 바로 태양, 별, 달, 이런 것들이 곧 증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계약이라는 것은 아직,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의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구조에서 아주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그래서 성경상에 계약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십계명은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사이의 계약법인 것이다. 그 계약을 위반하면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족장의 시대가 대략 5세기를 점하게 된다. 세월이 흘러 이스라엘 민족에게 기근의 큰 위기가 닥치게 된다. 당시 이스라엘은 기근이 들면 비옥한 토지를 갖고 있던 이집트로 먹을 것을 구하려 갔다가 이집트에서 노예로 400년을 지난 것도 하나님과의 계약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창15
    :13 너는 확실히 알라 네 씨가 나그네가 되어 400년 동안 그들을 섬기리라는 약속을 하였다.

     이 말씀을 이루고자 가나안에 기근이 드니 야곱 이집트로 식량을 구하러 가게 된다.   정확치 않지만 대략 BC 17세기경에 이집트로 내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후 400년간을 종살이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낸다. 

    출애굽의 과정을 넘어 가나안 정착 과정에서는 왕정으로 이어지는 과도기로서 곧, 출애굽부터 300~500년 가까이되는 시대로서 사사시대라고 하는데 이 사사시대는 족장들의 시대가 끝났으면서도 아직 왕이 없었던 과도기적 구조를 갖추고 있던 아주 독특한 시기들이다. 이 사사시대는   부족사회도 아니기에 족장도 없고 여기에는 어떤 명령권 자도 없다. 아직 왕도 없다. 400년 동안 가나안 시대에 족장도 왕도 없었다면 도대체 그 사회가 무정부 상태라고 불안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이스라엘 역사 중에서 이 시기 만큼 평온하고 행복했던 시절이 없었다고 성경은 고백한다. 이 사사시대는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던 시대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간단히 말한다면 서로 간섭하지 않고 살았다는 뜻이다. 사사는 왕도 족장도 아니었다. 오직 전쟁 시에 용맹한 장군이 되어 나라를 안정되게 하고는 다시 평민으로 돌아가곤 했다.

    사사출신의 신분은 사실 별 볼일 없었다. 입다는 창녀의 자식이요,

    기드온도 양반출신이 아니었다. 사사시대는 오히려 왕이 되기를 거부했던 시대이다. 왕도, 법도 세금도 군대도 필요 없다는 것이며  우리는 우리대로 살겠다는 그러한 시대였다. 사사기 마지막 부분을 보면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시대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그 후 백성이 왕을 요구하여 하나님은 왕정국가를 허락하셨다.  사울왕을 시작으로 다윗왕 솔로몬왕으로 이어지는 왕정시대의 기간은  BC 586년 이스라엘의 왕정이 무너질 때 가지 계속 되는데 이것이 곧 1차 성전의 멸망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충격의 이유는 첫째로 왕정과 신전은 깊이 결부되어 있는 것이었다. 왕은 중앙집권의 전제 군주이고 신이 사는 신전은 하나였고 그 신은 예루살렘에만 있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다른 곳으로 옮겨 다니는 신이 아니었다. 그 이전까지의 하나님은 장막치고 머무는 그곳에 하나님도 머물러 계셨다. 불과 구름기둥사이로 움직이셨던 하나님이었다. 그러던 것이 예루살렘의 성전은 곧 하나님 여기만 계셔요, 다른데 가시면 안돼요 라는 뜻이다.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는가, 역사를 연구할수록 정치와 종교, 양자가 합할 때 반드시 위기가 온다는 것이다.

    종교적 본질인 진리라는 것과 변화와 현실을 중시하는 힘의 논리인 정치라는 것은 그 속성상 맞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불변인데 정치는 매순간 변하기 때문이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예배를 드리던 예루살렘 성전이 이방 왕에게 파괴당했다. 그것은 곧 그 신이 죽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볼 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우주적 하나님이 사시는 집이 이방인의 신에게 멸망당했다는 것은 엄청난 신학적 충격이었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여기서 깨지기 시작한다. 종종 하나님은 사람을 때려서 깨닫게 하시는 경우가 있다. 이사야서는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집에는 살지 않으신다는 이 말씀을 알았을 때까지 이스라엘은 얼마나 충격적인 사실 속에 살아야 했던가? 그렇다면 예루살렘의 솔로몬의 성전에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혼란이 있다. 역사의 위기에서 그들은 새로운 사상을 창출해 내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 “그 날이 되면 이곳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 때가 오리니” 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곧 근본적으로 500년간 믿어왔던 신앙의 내용이 깨어졌음을 의미한다.  이제는 메시야라든지 곧 새 하늘과 새 땅, 예레미야의 경우에는 새로운 계약을 필요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 새 계약을 위해서 이전 것과 장차 새로 올 것과의 사이에 ‘단절’을 선언하게 되는 것이다. 또 적어도 가나안 땅에 정착한 1500년 가까이의 팔레스타인의 터전이 깨어지면서 이들의 삶의 현장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바벨론으로, 이집트로 요르단 등지로 터어키 지역으로 이들은 흩어진다. 그리고 흩어졌던 그들이 나중에 돌아온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대로라면  둥지는 잘렸지만 그루터기는 남아있어 언젠가는 나라를 회복할거라는 소망이 있었다. 그 귀향의 꿈은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BC538년 바벨론의 수도인 바벨론을 멸망시키게 되면서 고레스왕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땅으로 돌려보내니 그들이 돌아와서 제2차 성전을 완성한 것이 BC515년이었다. 에스라, 느헤미야서를 보면 이 성전을 짓는 동안에 공사를 방해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한 사회는 어떤 위기를 맞으면서 사회는 질서의 재편을 이루게 된다. 그처럼 BC586년 이스라엘이 망하고 바벨론에 잡혀갔던 기존의 지배층들이 돌아와 그 정통성과 기존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당시 팔레스타인의 신흥계급층들과의 사이에 갈등을 겪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후에 페르시아는 헬라의 마케도니아에 의해 정복되어 헬레니즘의 시대가 도래했고 이후 이스라엘은 BC 167-164년에 마카비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고 하스모니안 왕조를 탄생시킨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의 내부는 두 세력이 형성되는데 하나는  정통파 바리새파였고 또 하나는 진보주의적이며 친 헬라적인 사두개인들이었다. 결국 이후의 이스라엘은 보수파인 바리새파를 중심으로 독립을 쟁취한다. BC141년 경 시몬이라는 사람이 왕이 된다. 그는 왕인 동시에 제사장, 군대 사령관이다. 하시딤이란 단어가 뜻하듯이 율법에 충실하다는 뜻으로, 바리새파 사람중에 아주 경건한 유대인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들은 마카비 가문의 후예에 의해 세워진 하스모니안 왕조가 율법에 위배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율법에 의하면 유다 지파의 다윗 왕조의 후예가 아니고서는 안 되었다. 제사장 출신의 시몬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막강한 지도력을 발휘한 이후에 왕이 된 것은 기원전 586년 유다 멸망 이후 거의 400년만에 모진 고생 끝에 독립운동을 통해 세운 왕조임에도 불구하고 정통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유대인의 마지막 독립왕조인 하스모니안 왕조는 하시딤 왕조와 대립하게 되었다. 하스모니안 왕조의 몇몇 왕들은 이 하시딤의 세력을 축출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하시딤세력들이 옮겨 간 곳이 에세네파, 즉, 사해의 쿰란 공동체였다. 이들은 결국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쿰란을 형성하고 기도와 근신으로 암흑시기를 보내면서 메시야가 곧 오실 것이라는 종말론적 사상을 가지게 된다. 하스모니안 왕조는 대를 이어오다가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에 의해 하스모니안 왕조는 BC 63년경에 멸망한다. 그리하여 로마는 BC63년부터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게 된다. 이 때 로마는 헤롯 대왕의 아버지인 안티 파테르를 등극시킨다. 안티 파테르는 원래 유대인이 아니라  유다 남쪽, 이두메 지방의 이두메인들을 할례를 줄 때 유대인에 편입된 자였다. 유대인들은 이 이방인 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는 유대인들을 박해했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의 정황이었다.

    예수님은 탄생은 지파 간의 갈등, 외세의 개입, 사회적 혼란의 상황에서 구세주로 오신 것이다.

    하스모니안 왕조가 BC63년경에 몰락하면서 이스라엘은 BC63년경 폼페이가 들어오면서 로마의 속국이 된다. 이 같은 행정적 간섭이 심화되면서 이스라엘이 저항한 것이 곧 제1차 유대반란(AD66~70년, 성전 파괴까지)인데 이러한 저항은 로마로 하여금 강력한 무력수단을 통해 예루살렘을 정복하게 하면서 급기야 예루살렘 성전은 AD70년 멸망한다.

    BC 586년 제1차 성전의 파괴와 AD 70년 2차 성전의 파괴는 성격상 큰 차이가 있는데 전자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BC 515년 2차 성전 재건과 연결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현재까지 예루살렘의 성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AD70년 성전파괴이후 이스라엘은 디아스포라가 시작되어 전 세계로 흩어진다. 전통적인 신앙구조에 있어 이스라엘은 두 개의 기둥 즉 성전과 율법이 이스라엘을 혹은 유대교를 국가로서 종교로서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이스라엘을 유대교를 지탱하고 있는 유일한 기둥은 토라만이 남게 되었다. 그래서 AD70년 이후의 유대교는 완전히 토라 중심의 종교가 되어 버린다. 더 이상 성전은 없게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성전이 없기 때문에 제사장도 동물 희생제사도 없게 되었다. 남은 것은 오직 율법밖에 없었다. 이처럼 완전한 토라 중심의 종교를 유대교라 부른다. 오늘날 유대교라 부르는 것과 ‘이스라엘의 종교’라 명했던 과거의 종교는 전혀 다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 종교라 함은 AD70년 이전의 성전과 율법 중심의 두 기둥을 가진 이스라엘의 종교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대교란 성전이 없는 율법 중심의 오늘날의 유대교인 종교를 말하는 것이다. 유대교에 있어서는 오직 토라를 잘 지키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따라서 유대교 중심은 이제 성전 대신에 율법을 공부하는 장소인 회당 중심으로 변하였다.  

    유대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회당에서 율법을 공부한다.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공부하는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밖에 없다. 그만큼 그들에게 율법의 공부는 구원과 직결되는 것이다. 5세기부터 1894년까지는 이스라엘은 나라도 주권도 없는 국제 고아로 떠돌이의 삶을 보낸다.

    AD 5세기에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것은 기독교인들인 비잔틴 사람들이었다. AD 7세기경에는 마호메트의 이슬람종교가  이곳을 점령하고 비잔틴을 축출하게 된다. 그러다가 10세기 후반 정확하게는 1091년 경 십자군들이 유럽으로부터 건너와서 무슬림 들을 제거하고 이곳에 기독교 왕국을 건설한다. 이것이 13세기까지 계속되다가 당시 이집트 무슬림인 마물룩 인들이 이곳을 점령하다가 16세기에 터어키인 들에게 19, 20세기 초에는 다시 영국이 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게 된다. 그리고 50년의 영국 통치 후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게 되는 것이다.

    약 1500년 동안 팔레스타인은 역사의 주인들이 빈번하게 교체되었다. 그러다가 유럽에서 한 유대의 지식인 테오도르 헤르쩰이 나타난다. 이 사람은 원래 비엔나 대학의 법과대 출신이었고 어느 날 운명적인 신문기사를 접하게 된다. 그 기사는 프랑스군내에서 유대인 드레피스라는 대위를 독일의 간첩으로 체포하게 되는데 사실은 이 사람은 첩보활동과 무관한 자였는데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재판을 받아 사형언도를 받는 희생양이 된 것이었다.   테오도르 헤르쩰은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유대인이 유럽사회에서 얼마나 차별 받고 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그 자신도 랍비의 아들이었다. 1884년 그는 독일어로 된 소책자, 유대국가’란 뜻인 ‘쥬덴스타트’ 를 발간한다. 이것이 바로 시온주의를 제창한 최초의 이론서가 되었던 것이다.

    그 내용이란 천년 이상의 방랑과 차별에 있는 유대인이 시온으로 즉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19세기말 당시의 이 같은 이야기는  전혀 불가능한  환상으로만 여겨졌다. 테오도르 헤르쩰은 각 나라별로 유럽의 유대인 지식층들을 중심으로  1897년에는 그의 주도로 스위스 바젤에서 2백여명의 유대인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제1회 시온주의 총회가 개최되고 '국제법의 지지를 얻어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을 위한 국가건설을 시온주의의 목표'로 결정한다.

    테오도  4차 시온주의 총회의 연설을 하고 그 다음해 1904년에 41세라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는다.  그는 마지막이 된 그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꾸는 이 꿈은 5년 내지는 50년 후에는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다.“ 그가 죽은 지 50년이 채 안되어 그의 말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이제 이 강의를 마치고자 한다.

    한마디로 시온주의는 메시야 운동이 아니다. 이전에 잠깐 언급한 적이 있지만 메시야 운동이란 제1차 성전이 멸망하고 바벨론에 잡혀간 유대인들이 선지자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을 통해서 귀향과 회복의 꿈을 품는데 그것은 언젠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를 보내서 그들에게 아름다운 세계를 주실 것이라는 소망의 종교적인 의미에서 메시야 사상이라 한다. 이러한 꿈은 테오도르 헤르쩰 이 주도했던 시온운동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싱온주의 운동은  정치적인 귀향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볼 때 메시야 운동과 시온주의 운동은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분명한 나의 생각은  이스라엘의 건국은 시온운동의 결과였지 메시야 운동의 결과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기독교는 유대교의 실체를 알 필요가 있다.

    시온주의는 메시야 운동의 산물이 아닌 동시에 안티 세미티즘, 소위 반유대주의의 산물이다. 유대인들은 떠돌아다니는 수천년 동안 다른 민족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류마지막 때 다음과 같은 말씀이 이루어 질 것을 말했다.

     사43: 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 놓으라 할 것이요 남쪽에게 이르기를 붙잡아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데려오고 내 딸들을 땅 끝에서 데려오라 하리니  말씀을 성취시킨 것이지만 테오도르 헤르쩰은 그의 ‘시온주의 제창’은 철저하게 드레퓌스 사건 같은 것을 경험하면서 시작한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  창15장 아브라함과 언약을 한 말씀을 이루어 주신 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결과는 2000년이 지난 후에도 피값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혔을때 그들은 피값을 자기와 자기들 후손들에게 돌려달라고 하였는데 그들의 말대로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가 등장해서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이런 사건을 전후로  이미 상당수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 이민하기도 했었다. 그리하여 2차대전의 종결과 함께 남은 유대인 생존자들은 급거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었다.

    1948년 유엔의 지지를 얻어 이스라엘이 독립 시에 신생 이스라엘의 인구는 불과 60만이었다. 현재는 500만명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내에 거주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토로 몰려 온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물론 여러 가지 외교적 노력도 있었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나치의 유대인 600만명 학살은 이스라엘 건국의 결정적인 촉매 작용을 했다. 그러므로 테오도르 헤르쩰의 시온주의 운동은 이스라엘벡성들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으로 돌아오는 것을 선포한 운동의 결과이다.   물론 그 결과로서 탄생한 이스라엘이 종교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현대 이스라엘의 문제에 있어 내적인 것은 소위 종교인들과 세속인들 간의 갈등이요 외적인 것은 아랍과의 갈등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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